* 진해탑
제황산(해발 90미터) 정상에 위치한 이 탑은 높이 28미터, 건축 면적 400제곱미터로서, 군함의 마스터형으로 건립한 군항도시 진해의 상징입니다. 이곳에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29년 세운 전승기념탑이 있었으나, 1945년 광복 이후 그 탑을 철거하고, 1967년에 우리 해군의 위용을 상징하는 진해탑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탑 내에는 시가지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와 조상의 얼과 슬기가 깃든 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통해 시민들이 애향삼과 자긍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한 [창원시립진해박물관]이 있습니다.
* 진해의 역사
신석기시대 : 안골포 패총, 수도동 패총
청동기시대 : 죽곡동 동굴 주거지
삼한·삼국시대의 진해 : 웅천유적(패총, 주거지, 고분군), 석동 고분군, 지은동 패총, 여좌동 패총, 용원유적(패총, 주거지), 망산도 패총, 가주동 패총, 소사고분군, 마천동 패총
통일신라시대의 진해 : 757년(경덕왕 16). 웅지현을 웅신현으로, 완포항이 속한 골포현은 합포현으로 개칭하여 의안군의 영현으로 개편.
고려시대 :
1016년(현종 9) : 웅신현과 완포항이 금주(지금의 김해)의 속현으로 개편
1384년(우왕 10) : 완포현의 고산에 성곽을 축조
1390년(공양왕 2) : 양광도, 전라도 및 경상도의 연해처에 만호를 두었는데 이때 내이포에 수군만호가 주둔하였을 것으로 추정.
조선시대 :
1398년(태조 7) : 내이포 만호를 도만호(경상우수영)로 승격
1407년(태종 7) : 내이포(제포)를 왜국에 개항하여 왜선의 정박을 허가
1419년(세종 원년) : 대마도 정벌에 따라 왜와 통교를 단절
1434년(세종 16) : 웅천읍성을 축성
1437년(세종 19) : 웅신현을 웅신진으로 개편하여 구자를 설치
1443년(세종 25) : 계해조약으로 삼포(제포, 부산포, 염포)에 한하여 왜인의 거주를 허락.
1452년(문종 2) : 웅신현(지금의 웅천동)과 완포현, 천읍부곡(지금의 웅동지방)을 통폐합하여 웅천현으로 승격 개편하고 김해도호부에서 분리됨.
1453년(단종 원년) : 웅천현성을 증축하고 해자 조성.
1462년(세조 8) : 김해 가망포의 수군만호진을 안골포로 이진
1485년(성종 16) : 제포진성 축성(1486년 완성)
1490년(성종 21) : 안골포만호진에 진성을 축성
1510년(중종 5) : 삼포왜란(대마도 왜인들과 제포 항거왜인들이 일으킨 난동)을 제압하고 웅천현을 도호부로 승격. 제포왜관을 폐쇄하고 왜와 통교 단절.
1512년(중종 7) : 웅천 도호부를 현으로 복현
1544년(중중 29) : 제포의 우수영을 가덕도로, 왜관은 부산포로 옮기고 제포왜관을 폐쇄
1592년(선조 25) : 왜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발. 왜 육군제3진이 4월19일에 안골포에 내려 수군과 격전을 하고 북진함. 5월 7일 합포에서 왜선 5척을 격파함(합포해전). 7월10일 안골포에서 왜선 20척을 격파하여 이순신 장군이 대승(안골포해전)
1593년(선조 26) : 2월20일~3월6일 곰개(웅포)의 왜 수군을 일곱 차례 공격함(웅포해전). 왜군이 웅천 남산과 안골포 동망산, 명동 사화랑산에 왜성을 축성. 스페인 세스뻬데스 신부가 웅천에 상륙. 웅선왜성에서 미사를 올리고 1년여 거주하며 선교.
1595년(선조 28) : 왜장 마쓰라 시게노부가 두동 점골(현 웅천도요지) 사기장을 납치하고 뛰어난 도공 2명을 나고야성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냄.
1895년(고종 32) : 웅천현이 진주부 관하의 웅천군으로 개편
1896년(고종 33) : 경상남도 웅천군으로 개편
1900년(광무 4) : 러시아 함대가 군항의 적지를 찾아 현동만에 내려 지역 탐사
1904년(광무 8) : 일제가 거제의 송진포를 침탈하여 ‘일본제국 해군가 근거지 방비대‘를 설치.
1906년(광무 10) : 교육을 구국의 길로 선택한 지사들이 덕산동에 사립경명학교, 성내동에 사립 개통하교 개교. 진해만과 영흥만이 일제에 침탈. 일제 해군이 추수기의 도만동 벌판에 들어와 군항 예정지 측량을 강행.
1908년(융희 2) : 웅천군과 진해군(마산의 진동·진북·진전 지방)이 창원부에 통폐합.
1910년 : 창원부가 마산부로 개편. 일제는 해군건축지부를 두고 군항 설치공사를 시작(~1922년)
1914년 : 창원군이 마산부와 분리. 진해면, 웅중면, 웅동면이 속하게 됨.
1916년 : 진해군항에 요항부 개청
1919년 : 독립만세 시위(35명 체포, 16명 투옥)
1931년 : 진해면이 진해읍으로 승격
1946년 :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의 전신)를 개조, 조선해안 경비대 특설기지가 됨.
1948년 : 국군으로 개편됨에 따라 해안경비대가 해군으로 개칭.
1949년 : 한국해병대가 덕산동에서 창설.
1955년 : 진해읍이 창원군에서 독립되어 시로 승격. (웅천면 및 웅동면, 천가면은 창원군에 속함)
1963년 : 제1회 군항제 개최
1973년 : 창원군의 웅천면이 진해시에 편입
1983년 : 의창군에 속해 있던 웅동면이 진해시에 편입되어 옛 웅천현 고토 복원(가덕도 제외)
1996년 : 행정동 통폐합에 따라 진해시 행정동 조정(24개동에서 16개동으로 조정)
2010년 : 창원시, 마산시와 함께 통합되어 창원시 진해구가 됨.
* 안골포해전 : 1592년 7월 10일
안골포해전은 1592년 7월 10일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경남 진해에 있는 안골포에서 왜군을 격멸한 해전이다. 이순신은 원균과 이억기 등과 합세하여 안골포로 진격하여 왜 수군 20여척을 격멸하였다.
한산도와 안골포에서 연이어 패한 왜군은 부산으로 움추려들어 호남 진출을 포기하게 되었고, 이로써 왜군의 육지 보급로에 문제가 생겨 평양에 주저앉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산대첩과 함께 왜 수군의 주력 함대를 격멸한 빛나는 임진왜란 5대 승전해전으로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 한반도와 주변정세
19세기말, 서양에서는 제2차 산업혁명이라는 비약적 산업의 발전으로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펼쳤으며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이들 제국주의 열강은 아시아, 아프리카 및 태평양지역을 침략대상으로 삼았다.
러시아와 일본은 서구 열강의 압력을 받아 제국주의 국가로 변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구미의 자본주의 문명을 받아들여 동양에서는 유일한 근대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자본주의국가의 대열에 참가하게 된 일본은 그들의 국내시장의 협소와 자원의 부족으로 그들의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군사력을 이용하여 해외로부터 원자재와 식량을 획득하고 상품판매를 위한 시장을 얻으려 하였으며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하고 한반도를 그들의 남진정책의 전지 기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 러·일 전쟁과 진해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은 1899년 마산포 개항을 둘러싸고 계속되었다. 마산포의 개항을 전후하여 러시아는 남해안의 항구로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마산포에 동양 함대를 위한 조차지를 설정하기 위해,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 때문에 러시아와 일본은 마산포 일대의 토지를 매수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였고, 그 결과로 마산포 공동 조계지의 경매가 과열되었고 다른 개항장에는 없는 러시아와 일본의 단독 조계지가 마산포에 설정되기도 했다.
1902년 1월 영·일 동맹이 성립되면서 이러한 세력 균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긴장은 고조되어갔다. 이런 시기에 러시아가 진해에 군항을 설치한다면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여순항의 중앙적 위치, 즉 내선을 장악하게 되며, 만약에 일본이 장악하게 된다면 러시아의 해로는 차단된다. 이처럼 진해항은 정치적·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결국,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대규모의 군대를 한반도에 진주시켜 주요지역을 사실상 강점하였다. 이때 군사적 요충지였던 진해만 이대는 일본군의 일차적 점거대상이었으므로, 2월6일 일본군이 불법적으로 마산포 일대를 점령하고 전보사와 우체사를 장악하였다. 이어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한국을 일본의 동맹국과 같은 지위로 만드는 한편 군사작전에 필요한 곳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쟁 시작과 함께 일본군이 한국의 여러 지역을 강점한 것을 추인해주는 한편, 군용지라는 명목으로 많은 땅을 점거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3월에 칠원군 영도와 심리 일대를 점거하여 포대를 쌓고 대포를 설치하였으며, 5월에는 한산도에 들어가 많은 전답을 훼손하면서 포대를 건축하였고, 거제도 송진포에 해군경비대 기지를 만들기 위해 많은 땅을 수용하였으며, 1905년 1월에는 가덕도 일부를 수용하는 등 진해만 일대의 많은 지역이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이들 기지에서 함포 사격과 해상 훈련 등 장차 러시아군과의 전투에 대비한 모든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1904년 10월 발트해에서 출발하여 오랜 항해를 거친 러시아 함대를 1905년 5월 대마도와 울릉도 근해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격파할 수 있었다.
1904년 일본의 선제기습으로 시작된 러시아와의 전쟁은 대마해전에서 러시아의 패배로 끝났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작업을 본격화하였다.
* 진해군항 대시가계획
진해만이 군항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로부터 수군의 근거지로 아주 유명하였으며 지도를 펼쳐보면 천연적인 지형은 서남으로 나가면 거제·가덕·한산의 섬들이 전면에 옆으로 늘어서 세계에서 보기 드문 자연의 숨어 있는 작은 성이 되어 있고 서북은 바로 통영의 반도에 이어져 있고 동쪽은 먼 부산을 바라본다.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하게 되면, 수도는 중심지가 되는 한국의 서울로 옮기고 해군기지는 자연적 지형이 군항으로서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웅천군(현재 진해)의 앞바다와 섬, 그리고 웅중면, 웅서면의 일부에 걸쳐 동양 최대의 군항을 건설할 계획으로 추진하였다.
일본이 진해를 군항으로 삼은 것은 10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청·일(1894~5년), 러·일(1904~5년) 두 전쟁을 거치면서 아시아 패권국이 되겠다는 야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대마도를 중심으로 남쪽의 좌세보(사세보)와 북쪽의 진해에 군항을 두어 대한해협을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재패할 수 있다는 전략 때문이었고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여 국권을 강탈한 것은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핑계로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전초전이었다.
일본은 앞으로의 전쟁에 대비하여 러일 전쟁 직후부터 한반도에 군항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은 해군기지를 한반도에 설치하기 위해 조사 작업을 진행한 끝에 웅천군(진해구)과 거제도, 진해군(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등 진해만일대를 해군기지 설립 대지로 선정하고 한국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여 1906년 8월 진해만 일대를 군항예정지로 고시하였다. 그 범역은 1973년 7월에 창원군 웅천면이 진해시에 편입되기 이전의 진해시 전역이었으며 그중에서 시가지 면적이 약 12만평으로 이때 ‘군항’으로 예정된 지역의 면적은 천3백만평이었다. 군항과 신도시 건설 때문에 철거대상이 되었던 마을은 서부지역의 현동·도만리·도천리·여명리·중평리·좌천리·신좌천리·안곡리·속천리 등 9개 마을과 동부지역의 하구·중동 등 2개 마을, 모두 11개 마을로 가구 수는 390호, 쫓겨나야 했던 사람은 2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후 현지 조사를 하고 한국 정부에 의해 헐값에 매수와 철거 조치를 끝낸 후 곧장 일본해군의 관할 아래 들어갔고, 1907년 10월 진해만 시설조사위원을 임명하는 등 군항 건설에 착수하였다. 1906년 6월부터 측량을 하면서 군항이 들어설 지역의 한국인 마을을 철거하는 등 공사를 시작하였다.
* 최초의 계획도시, 진해
진해 군항의 건설은 1910년부터 10년간으로 계획하여 제1기 공사 기간으로 잡고서 착공하였으며, 이때 공사비용은 800만원이었다. 참고로 당시 황소 한 마리 값은 37원이었다.
1910년 4월 1일에 임시 해군건축부 지부를 설치하고 일본해군의 오키노 대령이 군항건설 업무를 관장해갔으며, 진해시가 군항건설은 1910년 4월 임시 해군건축부 지부를 설치하고 4월 5일에 진해에 해군무선전신소를 개통했으며, 6월에는 시가 예정지에 대한 측량과 아울러 도로 및 하수도 공사에 착수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1911년 1월에는 일본 정부가 진해만에 건설되는 군항을 일본 해군 제5 해군구의 군항으로 확정했고 한반도 부근 해역을 담당시켰다.
이 지역은 ‘중평 한들’이라고 일컫는 넓고 기름진 벌판이었다. 1912년 야마타 우시다로에 의해 ‘진해 군항 대시가 계획도’가 설계되면서 벌판 한가운데 있던 거목인 팽나무(포구나무)를 중심으로 사방에 여덟 갈래 길을 내고 그 모서리에는 8개 나라의 다른 양식의 건물을 지어 이색적인 광장 조경을 하려 하였다. 시가지는 유럽식으로 설계하여 큰 팽나무를 원심으로 팔방으로 큰 거리를 펼치고, 큰 거리에 연결하여 중거리를 설치, 중거리에 또 소거리를 연결하여 대·중·소거리 각각 상호 교착되어 시가지 거리가 정연하고 거미줄 같은 멋진 모양을 한 방사 직교형 시가를 만들었다. 현재 ‘중원광장’이라 불리는 팽나무가 있던 자리는 주변 들판에서 일을 하던 농민들의 휴식공간이었으나 한인과 일본인이 뒤섞여 사는 것은 위생상의 문제 등으로 불가함으로 조선인을 격리하여 황무지 경화동으로 강제집단이주 시킨 후 일본인 전용 주거지역으로 변경되었다.
1914년까지 ‘진해 진수부’라는 이름의 일본해군 기지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건설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와 동시에 군항을 보호하기 위해 마산포의 개항장을 폐지하여 허가받지 않은 선박의 통행을 제한하는 조치도 취하였다. 1912년 4월에는 청사와 부두 시설이 일부 완성되자 거제도 송진포에 있던 해군 방비대가 이전해 왔다. 이처럼 군항 건설 공사가 진행되던 때 이곳의 지명도 본래의 웅천에서 진해로 바뀌었다. 즉 1912년 1월 당시 마산부에 속했던 웅중면 전부와 웅서면의 일부를 통합하여 진해면으로 하였던 것이다. 1914년에는 마산부에서 창원군이 다시 분리됨에 따라 진해면은 창원군의 관할 구역이 되었다. 1916년 3월에는 진해의 군항을 요항(군사상 경비를 요하는 항구)으로 지정하고 4월에 진해 요항부를 개청하였다. ‘진수부’로 하기로 했던 해군 기지를 군항 아래 등급인 ‘요항부’로 바꾼 것이다. 1922년 3월에 마침내 진해군항 설치공사를 완료하고 1923년 3월 일본 제3 해군구의 요항으로 확정되었다.
* 진해의 민족학교
진해의 근대 교육기관인 웅천 개통학교는 진해의 근대 교육기관으로 덕신동의 경명학교와 함께 사립학교의 효시가 된다. 개통학교를 설립한 분은 주기효선생으로 근대적 민족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깨닫고 1903년 판임주사의 자리를 사임하고 학교 설립에 매진해 1906년 3월 웅천 북부동에 웅천사립개통학교를 인가받아 설립하고 보통과에 2년제 고들과를 설치하여 교장은 주기효, 영어는 양주용이 맡았다. 처음에는 북부동의 사저에서 개교하였다가 1906년 10월 교실이 협소하여 성내동에 있던 옛 웅천현 서기청 건물로 이전했다가 뒤에 웅천현 객사를 교실로 사용하였다. 주기철, 문석주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으나 어려운 경제난과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에 시달려 1915년에 폐교되고 1917년 4월 1일부터 개통학교와 숙명의숙을 통합하여 ‘웅천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이것이 진해 최초의 공립학교로의 편입이었다.
그밖에 진해지역에 근대 여성교육기관인 숙명의숙, 안골동 사립 경명학교, 웅동 계광학교, 경화 대정학교, 문성학교, 삼계학교 등이 설립되었고 각 마을마다 야학교 또는 강습소를 설치하여 문맹 퇴치를 위해 한글을 가르치고 민족정기를 배양하는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 스스로 세운 근대교육
일제는 한국을 일시적 착취대상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다. 한국 통치에서 가장 큰 장애는 한국인의 민족정신에 의한 뿌리 깊은 배일사상이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한국인을 우민화·황국신민화하려는 차별교육을 실시하는 교육정책이었다.
한국인 민족지도자의 양성을 꺼리는 정책으로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억제하였고 보통학교 취학도 일본인 아동의 취학률은 91%인데 한국 아동의 취학률은 3·7%에 불과했으며 보통학교 졸업자로서 중등교육기관에 진학할 수 있는 학생도 1%정도였다. 교육과정 또한 지금까지의 학교교육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국어는 ‘조선어’라는 이름으로 고정되어 외국어와 같은 위치로 전락하였으며 지금까지 외국어로 편성되었던 일본어가 국어로서 한국인에게 강요되었다. 이리하여 일본어는 교수시간이 전체 수업시간의 40%에 달했고 조선어는 한문과 합하여 겨우 그 반 정도였다. 고등보통학교에서도 조선어 및 한문의 주당 수업시간이 3시간인데 반하여 일본어는 그 두 배가 넘는 7시간이 배당되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한 시기에 민족을 무지로부터 깨우쳐 근대교육을 통해 애국의 정신을 일깨워야 한다는 교육 구국운동이 일어나 수많은 사립학교가 생겨났다. 사립은 국권 회복을 위한 민족적 자각에서 설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민족적 색체가 강한 사학의 번창에 당황한 일제는 1908년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여 사학교육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하였고, 국권침탈 다음 해인 1911년에 종래의 사립학교령을 개정한 사학학교규칙을 공포하여 사학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으며, 1915년에는 다시 개정사립학교규칙을 발표하여 사학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가하였다.
* 진해의 3·1운동
1919년 3월 탑골공원의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에 영향을 미쳤고, 이곳 창원군 등지에서도 불길처럼 번져왔다. 이부근은 이 고장 마천 출신으로 서울 경신학교 재학 중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귀향하여 주기용과 밀의해 계광학교 학생 김일성, 배종인과 배건수, 이원우 등과 소성제에서 의거를 계획하였다. 거사일은 4월 3일로 정하고 그 준비로 독립선언서 2천매를 등사하고 태극기도 6백매를 비밀리에 만들었다. 4월 3일로 택한 것은 음력으로 3월 삼짇날로 우리 민족적 명절이었고, 일본인으로서는 진무천황의 제일로 웅천신사에서 제사가 있었으며, 경화동은 장날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접한 웅천면의 정운조, 문석주, 김병화 등 동지들에게도 연락하여 웅동의거 거사 후 일본헌병에 의하여 검거될 때까지 책임을 질 것 등을 미리 의논하고 웅천에서도 의거를 준미하였으나 정운조, 문석주는 하루 전날 4월 2일에 일본헌병의 탐지에 검거 구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혹독한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를 누설치 않아 다음날 의거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태극기를 흔들면서 모여든 군중이 6백여 명, 주기용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이부근의 만세 선창으로 군중은 일제히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또 부르니 만세 함성이 멀리 퍼져나갔다.
이때 웅천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던 일본 헌병과 거류 일본인들이 만세소리를 듣고 현장으로 달려와 헌병대들은 칼을 뽑아들었고, 일본인들은 닥치는 대로 흉기를 들고 시위대를 위협하여 맨주먹의 시위대는 질서가 무너져갔다. 이어서 진해헌병대의 기마헌병과 경찰들이 시위를 진압하러 지원을 왔다. 군중들은 헌병과 경찰들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항하였으나 기마 헌병에게 짓밟히고, 끌려가고 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이날 시위자 가운데 체포된 사람은 32명, 누가 체포되었는지는 기록상 남아 있지 않고, 주동자들은 군중 속에서 색출되어 가혹한 고문 끝에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에서 재판에 부쳐져 마산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 항일의 불꽃
우리나라는 경술국치가 되자 그 뒤로 전국 어디에서든지 유형·무형의 민족자강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3·1독립만세운동 발로가 된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비롯해 사회주의 독립운동, 문화(종교)운동, 애국계몽운동, 사회운동 심지어 국외 독립운동까지 진해지역과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 의해 전국에 발현되었으며 또한 진해는 김남이, 조맹임, 김조이 등 여성운동가 배출의 요람이기도 하다.
진해에 있었던 항일 농민운동으로는 돌리 헛 난리와 진해면 소작쟁의와 웅천면 소작쟁의를 들 수 있다. ‘돌리 헛 난리’는 이 고장의 토지·산림·염전·어장 등을 해군에서 군항시설을 하려고 1906~1907년 사이에 임의로 점탈을 하는 일에 대한 저항으로 ‘경남 최초의 농민 반격’이라는 의의가 있으며 ‘소작쟁의’ 역시 군용지로 매입이라는 명목으로 강탈한 당시 진해면의 농토 중 당장에 군사적 목적에 쓰지 않는 농지를 대여할 때 일본인들에게만 대여하고, 대여 받는 그들은 지주 행세를 하면서 착취를 한 데 대한 쟁의였다.
진해에서 결성된 다양한 항일 단체에는 1915년 주병화가 중심이 돼 설립한 ‘진해 청년회’가 있고, 1920년대에 들면서 ‘대한구락부’를 시작으로 1928년 ‘웅천여자청년회’에 이르기까지 21개 사회단체가 설립되는 등 일제하에서 농민·노동·청년·학생·여성 등 분야별 운동에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무정부운동 등 혁명 사상까지 가세하면서 모두 23개 단체가 결성돼 강연회·토론회 개최, 야학 설립과 도서관 운영 등 민족정신 고양에 힘썼다.
진해에서 있었던 공장 노동자의 항일투쟁은 일본인이 세워서 운영하던 공장 두 곳의 쟁의가 있었다. 일제 약탈 정책에 따라 양잠을 장려하고 제사 공장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1930년에 준공된 동양제사주식회사 진해 공장은 그중 하나로 한국인 공원들이 많았다. 노동 환경과 처우가 매우 열악하여 이에 저항하는 남녀공원들이 노동쟁의를 일으켰던 제사공장쟁의와 공장주가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을 더 낮추겠다고 하여 진해의 여좌동에 있는 후쿠다 타월공장에서 여자 노동자 절반 이상이 동시에 동맹 파업을 감행한 타월 공장 쟁의가 있었다.
*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
해군은 3군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창설되었는데, 일본의 항복 이후 1945년 11월 30일에 폐쇄되었던 일본 해군의 진해경비부를 인수하여 대한민국 해군기지가 설립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손원일·정긍모 두 사람이 주동이 되어 장차 해군을 만들어 보겠다고 각각 동지 규합과 대원 모집을 서둘다가 1945년 8월 21일에 만나 해군건설을 약속했다.
1945년 9월 말에 해사대원 약 40명을 정긍모가 직접 인솔하여 부산으로 내려가 취업하도록 하고 이런 틈에 미국 군정청은 교통부 안에 해사국을 설치하였다. 조선해사협회는 1945년 10월 중순에 해사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으며, 해사협회가 한국의 유일한 해사단체임을 인식시키고, 미군정 당국의 협조를 의뢰하여 해사국장 미육군 소령 칼스텐과 그의 고문 이동근이 해사협회와 면담을 하고자 하여 11월 1일에 손원일은 직접 해사국을 방문하였다. 그때 미국 군정청에서는 행정기구를 설치하고 있었으나, 아직은 해군 관계가 미비하다는 이유를 들어 정식단체로 허가해 주지 않았다.
칼스텐은 손원이에게 해안경비대를 조직할 것을 제의하였고, 손원일은 그것이 앞으로 한국의 해군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이라면 조직할 의사가 있다고 말하자, 칼스텐은 그 취지대로 협조를 약속하는 한편, 사관학교 설립에 대한 요청도 승인하였다.
이리하여 총원 2백명으로 해안경비대를 조직할 것과 그 본부를 진해에 설치할 것에 합의하고, 해사협회는 해인경비대를 창설하게 되었으며, 그 명칭을 ‘해방병단’이라고 하였다. 단장에 손원일이 취임하였다.
* 진해군항제
군항제는 1952년 4얼 13일 창원시 진해구 북원광장에 전국 최초의 이충무공 동상을 제막하고 그 뒤로 해마다 4월의 벚꽃 개화기에 당시 해군통제부에서 주관한 이충무공 추모제를 올린 것이 그 기원이 된다. 추모제는 1963년 충무공의 호국정신을 이어가고 향토 문화예술의 진흥을 도모하고자 민·관·군이 통합하여 문화축제로 새롭게 단장되었고, 명칭도 [군항제]로 변경되었다. 진해군항제는 충무공이라는 역사문화자원과 벚꽃이라는 자연자원을 결합한 특화된 지역축제로 1980~·990년대를 거치면서 벚꽃을 즐기는 행사로서 비중이 커지고 있다.
1905년 일본 연합함대가 진해를 기지로 삼고 각종 군사시설을 세우면서 도시미화용으로 약 11만 그루의 벚나무를 심었는데 특히 현재의 공설운동장 서편 약 1만평의 농지에 ‘벚꽃장’이라는 벚나무 단지를 만들어 관광휴식처로 이용했다. 광복 후 시민들은 벚나무를 일본의 국화라 하여 베기 시작했는데, 벚나무가 모두 없어질 무렵인 1962년 식물학자들이 진해의 왕벚나무 원산지가 일본이 아닌 제주도임을 밝히면서 관광도시 계획을 세우고 관광수로 정하여 본격적으로 조경에 나섰다. 시민들은 벚나무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5·16군사정변 이후 ‘벚꽃 진해’를 되살리는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조경에 나섰다. 벚꽃은 나무가 크고 꽃이 많이 피기 때문에 왕벚나무라고 한다.
* 박물관 답사 후기
창원시립진해박물관은 전시관이 한 실로 협소하다. 9층의 진해탑의 2층에 위치하고 있다.
진해탑을 찾는 방문객들은 박물관도 같이 관람하고 갈 수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
진해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군사도시로서 한결같이 위치한다.
지역의 특성이 뚜렷하게 일관성을 가진다.
9층 전망대는 아주 근사한 풍광을 볼 수 있다.
진해시를 360도로 둘러볼 수 있는 위치로 진해만 앞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고 동서남북의 진해를 다 볼 수 있어서 시야가 가릴 것 없이 시원하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일제시대 때 계획도시의 흔적이 도로에서 보인다.
농민들은 농사짓던 기름진 땅과 바다 농사 대신 산비탈로 집단 이주해서 살아야했던 고달픈 삶의 흔적도 유추해본다.
꽃구경의 도시 진해로 알고 있다가 이충무공을 기리면서 시작되었던 군항제의 내력도 새롭게 알게 된다.
공부하는 자세로 접근해서 많이 모르던 진해를 알게 되어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