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성 : 국가지정 사적 제118호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해서 삼국 시대부터 조성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석 깊은 곳이다. 고려 말 우왕 5년(1379)에 진주 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잦은 침범에 대비하여 본래 토성이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 25년(1592) 10월 왜군 2만여 명이 침략해 오자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천8백여 명의 군사와 성민이 힘을 합쳐 물리쳤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이듬해 6월에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했고, 민간인과 관료, 군인 등 7만여 명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절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1972년에는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일제 강점기에 허물어졌던 서쪽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다. 1979년부터는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는 등 진주성 정화 사업을 시작하여 2002년에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국립진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은 1984년 11월 2일 가야문화 연구를 위하여 경상남도 첫 국립박물관으로서 문을 열었습니다. 1998년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의 주요 격전지인 진주성 내에 위치한다는 역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임진왜란과 동아시아’라는 주제로 특성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천자총통, 지자총통, 중완구, 비격진천뢰 등 임진왜란 무기를 비롯해 구석기시대 주먹도끼부터 근대 형평운동 관련 유물까지 경남의 역사·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을 보존, 연구, 전시, 교육하고 있습니다.
* 16세기 대항해 시대와 동아시아
15세기 말 유럽의 해양 세력들은 대양을 가로질러 신대륙과 아시아에 이르는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하였습니다. 바스쿠 다가마, 콜럼버스, 마젤란 등 탐험가들을 앞세운 유럽의 열강들은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가는 바닷길을 개척하는 한편, 인도를 거쳐 중국·일본까지 진출하였습니다. 특히 포르투갈 상인은 중국·일본과 무역을 하며 그곳에 불랑기포와 조총을 건네주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하는 사림이 성장하여 중앙 관료로 진출하면서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사림의 주도로 서원과 향약이 만들어져 지방 사회의 안정을 꾀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토지 집중과 수취 체제의 모순, 상업의 발달로 계급이 분화되고 농촌사회는 동요하였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임꺽정의 난과 정여립의 모반 사건 등이 일어났습니다.
한편, 중국 명나라는 북쪽의 몽골, 남쪽의 왜구로 말미암은 외환과 지방세력 반란 등의 국내 문제가 겹쳐 재정 부족이 심각하였습니다. 만력제가 즉위한 뒤 장거정이 국방을 강화하고 개혁정치를 펼치면서 국운이 다소 회복되었으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15세기 후반 봉건 영주들이 할거하던 전국시대가 시작되어 서로 패권을 다투었습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침내 일본을 통일하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릅니다.
* 하나의 전쟁, 세 가지 기억
1592년(선조 25)에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7년 동안의 전쟁을 삼국은 서로 다르게 부릅니다. 한국에서는 ‘임진년에 왜구들이 일으킨 난‘이란 의미로 ’임진왜란‘이라고 부르고 북한에서는 ’임진 조국 전쟁‘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왜구에 대항하여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의미로 ’항왜원조‘, 또는 만력제 때 조선에서 벌인 전쟁이란 의미로 ’만력 조선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분로쿠·게이초 노에키‘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발발한 해의 일본왕의 연호가 분로쿠·게이초이고, 여기에 전쟁이라는 일본어 ’에키‘를 더한 것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시작된 임진왜란은 명군이 참전하면서 조선·명·일본 삼국의 국제 전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임진왜란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동아시아 삼국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 7년 전쟁의 시작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전국을 통일한 뒤, 1591년 8월 자신을 태합(다이코)로 칭하였습니다. 이후 전국의 영주들에게 조선 침략을 선포하고 규슈 사가현에 출병 거점인 히젠 나고야성을 축조하였습니다. 일본군은 1592년 3월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나고야성을 출발하여 4월 13일 부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일본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 등을 함락한 뒤, 파죽지세로 한성을 향해 진군하면서 7년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의 발발 원인에 대해서는 히데요시의 공명심과 정복욕, 명과의 통상무역 재개, 영주들의 불만을 해외의 영토 확장으로 잠재우려는 의도, 영주들의 군사력을 통한 체제의 안정 모색 등 다양한 견해가 거론됩니다. 이러한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 조선의 반격 : 의병의 봉기와 수군의 활약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은 1592년 5월 3일 한성을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6월에는 평양성을 함락하며, 7월에는 함경도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렇게 조선이 전쟁 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조선의 군사제도와 방위 체제 때문이었습니다.
조선 전기에 군사의 징발은 병농일치제의 원리에 따랐지만, 군역을 군포로 대신하는 군역의 포납화가 진행되면서 유사시 농민들을 동원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방은 제승방략 체제로 편제되어 요충지에 군사를 모아 놓고 중앙의 장수가 내려와서 통솔하였는데, 방어선이 한 번 무너지면 다른 대책이 없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에서 곽재우·정인홍·김면, 전라도에서 고경명·김천일, 충청도에서 조헌, 황해도에서 이정암, 함경도에서 정문부 등이 의병을 일으켰고, 영규·휴정·유정은 승병을 이끌었습니다. 의병 창의는 일본군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조선군의 사기를 고취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반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승리를 거두며 바다를 장악하여 일본의 진출을 저지하였습니다.
* 동아시아 대전으로의 확대, 그리고 강화 협상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일본에 일방적으로 밀리자 조선은 명에 구원병을 요청하였습니다. 명은 조선이 무너지면 요동은 물론 명 전체가 위험에 빠질까 염려하여 파병을 결정하였습니다. 1593년 1월 총병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이 연합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하였습니다. 하지만 명군은 개성을 함락한 뒤에 전진을 서두르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일격을 당하자 일본과의 강화 협상에만 골몰하였습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조선·명·일본 모두 병력 손실과 군량 부족 등의 어려움에 직면하였습니다.
선조가 강력하게 반대하였지만, 명은 일본과의 강화 협성을 진행하였습니다. 명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반면 일본은 명의 공주를 일본 국왕의 후비로 삼고, 조선의 4도를 일본에 넘겨 달라는 등의 요구를 하였습니다. 강화 협상이 지지부진하며 결말이 나지 않자, 1593년 6월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의 심유경은 명에 가짜 항복사절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명 조정은 이것을 그대로 믿고서 히데요시의 일본 국왕 책봉을 승인하였습니다. 1595년 1월 책봉 사절단이 일본으로 출발하고 1596년 9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에게 명 황제의 임명장 등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자신을 일본의 국왕으로 임명한다는 것 외에 원하는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격노하였습니다. 결국 4년여를 끌어오던 강화협상은 결렬되고 히데요시는 다시 조선을 침략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 울산왜성 전투도 : 울산왜성에서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이 전투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1597년 12월 하순부터 1598년 1월 초까지 울산왜성에서 벌어진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이 전투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끈 일본군은 가토 기요마사군과 합류해 울산, 서생포 방면으로 후퇴하고 울산왜성을 축조하였다. 명의 경리 양호는 명군 4만여 명을 이끌고 도원수 권율이 이끈 조선군 1만여 명과 합세해 조령을 넘어 1597년 12월 23일 울산왜성 포위공격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조·명연합군이 이기는 듯 하였으나 일본군이 지원을 받게 되고 큰비가 내리면서 점차 불리해졌고 이듬해 1월 4일 경주로 철수하였다. 명군은 사실상 패배한 전투를 이긴 것처럼 황제에게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양호를 해임하고 만세덕을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 활과 총통으로 무장한 조선군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일본이 사용하던 조총의 위력을 실감하여 조총을 도입하고, 무과시험에 조총 사격술을 포함하는 등 변화를 시도합니다. 전쟁 당시 조선군은 활과 화살, 창으로 무장한 기병이 주력 부대였습니다. 탄력성이 뛰어난 소 힘줄과 물소 뿔로 만들어진 격궁과 대롱 안에 화살을 넣어 발사하는 편전은 조선군의 대표적인 병기였습니다. 근접전에서는 ‘모든 병장기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무용과 위엄이 있는 창을 주력 무기로 사용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당시 무과시험에 포함되지 않았던 도검은 보조적인 병기였습니다. 또 편곤·철퇴·차폭·쇠도리깨 등이 무기도 사용하였습니다.
한편 조선의 화약 무기인 총통은 전쟁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고려말 이래 조선은 총통류를 개량, 발전시켜 전자·지자·현자·황자의 대형 총통을 주조하였고 개인용 화기인 승자총통·별승자총통·삼안총 등 다양한 총통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대형 총통은 조선 수군의 주력 함선이었던 판옥선과 거북선에 장착되어 수군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 비격진천뢰 : 우뢰같은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포탄
선조 때 이장손이 처음으로 만들어 임진왜란 때 사용한 무쇠로 만든 포탄이다. 안에 마름쇠 등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인 후 손으로 던지거나 굴리기도 하였으며, 완구에 넣고 발사하기도 하였다. 목곡에 감긴 약선의 수에 따라 폭발 시간을 조절할 수 있어 현대의 시한폭탄 역할을 하였다. 박진이 1592년 경주성을 수복할 때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무찔렀다.
* 조총과 칼로 공격한 일본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다양한 무기 가운데 조총과 도검은 전투에서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일본은 1543년 규슈 다네가시마에서 닿은 포르투갈 상인에게서 처음으로 조총을 접하였습니다. 이후 조총은 일본에서 자체 제작되어 1575년 나가시노 전투 등 일본 내전에 사용되었으며, 일본의 주력 무기가 되었습니다. 또 조선이나 명과 비교해 우수한 도검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오랜 내전을 치렀기 때문에 도검을 이용한 전투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일본군은 조총 부대와 함께 긴 창과 큰 칼 등 창검으로 무장한 무사를 중심으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전술을 구사하였습니다. 이는 전쟁 초기에 일본군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전쟁 중 일본의 도검을 조선군이나 명군이 노획하여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조선과 명의 도검 기술은 일본 도검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습니다.
* 새로운 무기와 전술로 지원한 명군
명의 군데는 크게 북병과 남병으로 나뉩니다.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비한 기마병 중심의 북쪽 국경 구변 지역의 군대를 북병, 남부 해안 지역에 출몰하는 왜구에 대비한 보병 중시의 절강 이남 군대를 남병이라고 불렀습니다.
명의 장수 척계광은 왜구를 소탕하고자 근접전에 역점을 둔 보병 중심의 ‘절강병법’을 만들었습니다. 척계광이 만든 새로운 체제의 군대와 전술은 임진왜란에 참여한 명의 남병에 의해 조선에 도입되었습니다. 남병은 근접전에 역점을 두어 모두 방패를 착용하고 낭선·당포 등의 새로운 무기와 조총 등으로 무장하였습니다. 아울러 명군은 불화살·불랑기포·호준포 등의 다양한 화기류를 주조하여 사용하였습니다.
평양성 전투에 처음 투입된 명군은 조선의 군사 체제와 전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척계광이 저술한 [기효신서]는 1593년 우리나라에 도입된 이래 조선 후기 병서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 지금도 남아 있는 7년 전쟁의 흔적, 왜성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후방에 거점을 확보하고 조선에 있는 일본군에게 병력과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한반도 남해안 일대에 쌓은 성입니다. 일본군은 1592년 4월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하였습니다. 곧바로 점령지를 방어하고 물자를 보급하려고 부산 왜성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듬해 1월 조·명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남해안 일대로 후퇴한 일본군은 경상도 서생포에서 거제도에 이르는 중요 지점에 왜성을 축조하고 장기전에 돌입하였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군은 직산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기존의 왜선을 점령하고 울산에서 순천에 걸쳐 새로운 왜성을 축조하였습니다.
왜성은 선박이 출입하기 쉬운 바다나 큰 강이 가까운 구릉지에 세워졌습니다. 이는 육지와 바다를 연결하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왜성은 외곽에 해자를 비롯한 여러 방어시설을 두고 높이가 여러 단이나 여러 겹의 곽을 배치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성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방어에 효율성을 높인 것이 특징입니다.
* 7년 전쟁의 기억과 추모, 논공행상
국왕 선조는 전쟁이 끝난 뒤 공을 세운 사람들을 공신으로 선정하였습니다. 1604년(선조37) 4월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주로 피신할 때 자신을 따르던 신하 86명에게 호성공신의 칭호를, 왜적을 물리치거나 명에 지원을 요청하는 데 공을 세운 18명에게는 선무공신의 칭호를 내렸습니다. 아울러 임진왜란 중인 1596년 7월 충청도 홍산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은 청난공신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듬해 4월 정공신의 공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임금의 피신을 도운 2375명에게 호성원종공신을, 무공을 세운 9060명에게 선무원종공신을 추가로 녹훈하였습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임진왜란 대 자신을 따르던 신하 80명에게 1613년 3월 위성공신의 칭호를 내리고 이듬해 4월에 그보다 공이 적은 2463명을 위성원종공신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전란 후의 민심을 수습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임진왜란 때 절개를 지키며 죽어간 사람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하였습니다.
* 동아시아와 조선 사회의 재편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명은 조선에 병력을 파견하여 많은 사상자가 생겨났고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져야 했습니다. 결국 명은 밖으로는 만주족인 후금이 급성장하고 안으로는 농민 봉기가 일어나 1644년 멸망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 에도에 막부를 열고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전쟁 후 일본은 조선인의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1604년 조선은 사명대사 유정을 파견하여 일본의 사정을 살폈으며, 1607년 화답 겸 쇄환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결국 조선은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고, 통신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조선 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수장의 권위와 정통성을 과시하려는 도쿠가와 막부의 이해에도 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조선도 황폐해진 국토을 재건하고 흥기하는 후금에 대한 방어책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한편, 명·청 교체기에 명은 ‘망해가던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를 내세워 후금과의 전쟁에 파병을 요청하는 등 조선을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끝난 지 30년 만에 조선은 다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치러야 했습니다.
* 조선시대 사림 세력의 산실, 경상우도
조선은 성리학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대부 관료들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특히 15세기 후반 도덕성을 강조하고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이 중앙 정계에 등장하여 훈구파와 대립하면서 몇 차례의 사화를 겪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림파는 큰 피해를 보았으나 서원과 향약을 통한 지역적인 기반 덕분에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전국 곳곳에 세워진 서원에서는 성리학 이념 교육과 연구가 활발하였고, 지역마다 향약이 만들어져 성리학적 윤리가 확산되면서 사림은 향촌질서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원은 지방의 사족들이 선현을 제사지내고 성리학을 공부하며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곳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림 세력의 사실인 경사도 지역에 서원이 많이 세워졌습니다.
경상우도 경남에는 조선시대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남명 조식이 있었습니다. 조선 중기 최고의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조식은 학문적 수양과 실천에 투철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학문적으로 뛰어난 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남명학파’를 이루었습니다. 조식이 강조한 실천적인 학문은 정인홍·최영경·곽재우 등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되었고 이들은 임진왜란 때 서부 경남을 중심으로 특별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 3·1운동과 근대 진주의 발전
역사적으로 진주는 경상도 서남부의 대표적인 고을이었다. 이와 같은 지위는 개항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으며 1896년 지방제도 개편 당시 경상남도 관찰부의 소재지가 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진주는 행정·사법·재정·교육 기관이 모여 있는 경남의 행정 중심지였다. 또 한국인이 발행한 최초의 지방신문이었던 [경남일보]가 진주에서 1909년에 창간되어 지역의 여론을 주도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진주의 3·1운동은 경상도 내에서 가장 많은 참여 횟수나 인원을 차지할 정도로 활발하였다. 또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형평운동을 비롯하여 농민운동, 노동운동, 소년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심역할을 하였다.
* 화력조선 : 2021년 조선무기 특별전 : 2021년 9. 17 ~ 2022년 3. 6
* 전시를 열며
‘포방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강력한 화포전력을 선호하는 것을 빗대어 만든 신조어입니다. 긴 사거리와 강력한 위력을 가진 화포는 국토의 70%가 산지 지형인 우리나라에서 침략군을 방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 중의 하나입니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외적의 침략에 시달리던 고려는 첨단무기였던 화약의 개발에 성공하였습니다. 조선의 세종과 문종은 화약무기를 개발하고 활용하여 방어체제를 구축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15세기의 조선은 세계적으로 우수한 화약무기 전력을 갖추었습니다. 임진왜란의 승리는 화약에 대한 지식과 화약무기 제작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특성화 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은 2018년부터 우리나라 화약무기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2019년에는 첫 결과물로 [소형화약무기 종합보고서]를 발간하였습니다. 이번에 선보이는 조선무기 특별전 [화력조선]은 그 내용을 풀어낸 것입니다. 이번 전시는 지금까지 사극에 많이 등장했던 활과 창으로 무장한 군대가 아니라, 총통과 화포로 무장한 조선의 군대를 보여 드립니다. 화약의 불꽃과 연기, 그리고 강력한 위력에 매료된 화약무기의 나라, 화력조선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1. 화약시대의 개막
불로불사의 영약과 열병의 치료제로 쓰이던 화약은 10세기 이후 무기로 개발되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되었습니다. 화약은 몽골제국의 원정과 함께 유라시아 대륙으로 전파되었습니다.
: 화약의 원료와 [포박자] : 국립중앙박물관
화약의 원료인 염초, 숯, 유황은 동진(4세기)대 [포박자] 등 중국 도교 경전에 연단술의 재료로 언급되었다.
: 동의보감(1610년) : 국립진주박물관
염초와 그 원료인 복룡간(아궁이 및 오래된 흙)을 약재로 언급하고 있다.
2. 조선 화약무기의 발전
고려말 도입된 화약무기는 100여 년 만에 국토방위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세종~문종대에 화약의 대량생산과 신무기의 개발이 이루어졌고, 이를 활용하여 변경을 안정시켰습니다. 화약무기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임진왜란 때에도 크게 활약합니다.
: 임란첩보서목 : 보물 제660호(1598년)
임진왜란 당시, 총통을 비롯한 전쟁 물자를 만든 기록이 수록된 수군 보고서로 이순신 장군의 수결이 남아 있다.
: [천자문] 순서 총통 : 한성백제박물관 등
성종 대 이후 개발된 총통은 [천자문]의 순서대로 이름 붙이고 관리하였다.
: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04호(19세기) : 육군박물관
1588년 여진족 시전부락을 토벌하는 내용을 담은 그림으로, 당시 이순신 장군이 총통부대를 이끌고 공을 세운 기록이 있다.
: 국조오례의서례(1474년)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전기 각종 화약무기에 대한 설명이 그림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 정종 적개공신교서 : 보물 제1835호 : 대가야박물관(수탁품)
이시애의 난 진압에 총통군을 이끌고 공을 세운 정종(1417~1476)의 공신교서이다.
: [만력기묘] 명 승자총통 보물 제 648호(1579년) : 국립중앙박물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승자총통이다. 승자총통은 이전 총통에 비해 총신을 길게 만들어 사정거리를 늘리고 탄환의 위력을 높였다. 휴대용 화포.
4. 조총의 시대로
임진왜란 직후 조선은 적극적으로 조총을 생산하여 17세기에는 조총이 조선군의 주력무기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추가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급격히 발전한 서양의 총포류에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 조총(17~19세기) : 국립중앙박물관 등
5. 화력조선 비사
화약의 생산과 화약무기를 담당하는 포수의 양성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한 발의 탄약을 발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피땀어린 노력이 필요하였습니다. 화약의 자급자족, 총통 제작 체제의 확립, 화약의 다양한 활용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청기와 : 국립중앙박물관
화약의 주재료인 염초는 청기와 제작에도 사용되었다. 17세기 이후 염초의 부족으로,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다.
: 불꽃놀이용 총통 : 국립광주박물관 등
불꽃놀이는 화약의 주요 사용처 중 하나이다. 불꽃놀이의 하나인 매화용으로 사용된 총통들이다.
: 격목이 확인된 삼총통 : 국립경주박물관
격목은 화약 폭발 가스의 누출을 막아 위력을 높이기 위한 재료로 발사와 함께 날아가기 가기 때문에 잔존하기 매우 어렵다. 격목이 장전된 상태로 남아있는 국내 유일한 총통이다.
: 연속발사가 가능한 총통 : 국립중앙박물관
총통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 다수의 총열을 결합하여 화력을 높이거나 연사가 가능하도록 했다.
6. ‘화력족보’ : 고총통에서 K-2까지
고총통에서 K-2소총까지, 개인화기의 발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영상입니다.
* 국립진주박물관 관람 후기
국립진주박물관을 방문한 후 다가오는 느낌은 풍성하다.
먼저 국립진주박물관은 진주성 안에 있다. 박물관의 특성이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사를 중심으로 박물관이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상설전시실 처음 시작이 16세기 대항해시대인 세계사 속에서 동아시아 중국, 일본, 조선은 어떠하였는가?를 전지적 시점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여러 이유로 조선과 명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최고조로 훈련된 전쟁기술로 초기에는 조선 침략이 성공하는 듯했으나 전쟁은 7년 동안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끝으로 일본은 성공하지 못한 전쟁, 조선은 가까스로 막아낸 전쟁, 조선을 도와주러 왔던 명나라는 국운이 다하여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박물관을 관람한 뒤 진주성을 영남포정사 문루, 공북문, 북장대, 포루, 서장대, 촉석루. 김시민장군 동상 순으로 돌아보았다. 수원화성을 걸어서 돌아보던 기억과 마주친다.
진주성은 아름다운 성이고 역사적인 사건이 깊게 각인된 역사의 현장이다.
조선의 무기 화살과 총통, 일본의 무기 조총과 도검, 새로운 무기와 전술로 지원한 명나라에 관한 설명도 참 좋았다.
이번 국립진주박물관을 관람하는 느낌은 부분적인 공부들이 구슬이 실에 꿰어지는 듯하다. 세계사 속에서 동아시아에서 조선의 위치, 왜군이 남해안에서 장기전을 벌일 때 쌓은 왜성의 축성술, 의병의 봉기와 수군의 활약, 전쟁이 끝나고 삼국의 운명이 어떻게 변하였는가 등.
박물관을 관람하고 집에 돌아와 이렇게 복습을 하면 공부는 깊게 각인되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