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9/25 경산시립박물관

부실이 2022. 9. 28. 22:45

* 경산시립박물관

2007년 개관한 경산시립박물관은 경산의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의 문화유산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연구, 보존, 전시, 교육하는 우리 지역의 유일한 박물관이자 시민과 함께 소통하는 종합문화공간입니다.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의 공립박물관 리모델링사업 타당성 심사를 통과하여 2019년 10월  [경산시립박물관 상설전시개편 전시설계 및 전시물 제작 설치]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코로나19의 여파와 전시실 리뉴얼 공사로 인하여 2020년 6월부터 임시휴관이던 우리 박물관이 2021년 9월 전시실 리뉴얼 작업을 모두 마치고 드디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합니다.

 

* 경산시립박물관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상설전시실을 재구성, 전시 유물과 콘텐츠를 전면 개편하였습니다. 

경산시립박물관 MI(박물관 상징 및 정체성을 나타내는 로고) 및 대표 캐릭터 [경산이와 압독이]를 개발 제작하였습니다.

어린이 체험학습실을 확장하고 콘텐츠를 전면 개편하였습니다. 

교육실을 신설하였습니다.

경산시립박물관 로고 : 경산시립박물관 자음 ㄱ, ㅅ, ㅂ에 소통의 창을 의미하는 사각형 심볼 배치.

 

* 경산문화의 시작 : 고대문화실 : 상설전시 1

경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신석기시대로 추정된다. 아직까지 신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금호강 지류인 남천변의 옥곡동과 옥산동유적 청동기시대 집터 내부에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편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접한 대구 시지동의 생활유적에서 구석기시대 석기가 채집된 것으로 보아 경산에도 구석기시대 유적이 존재할 것으로 짐작된다.

 

경산에서 사람의 활동흔적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로, 집터, 고인돌(지석묘), 돌널무덤(석관묘) 등이 확인된다. 청동기시대 경산 사람들은 금호강 일대의 낮은 구릉이나 냇가 인근 평지에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어 벼농사와 밭농사를 토대로 하면서 과일, 견과류 등을 채집하고 어로활동, 수렵활동을 하며 생활하였다.

 

* 청동기시대 마을과 무덤

마을은  남천변의 옥곡동과 옥산동, 오목천변의 남산면 산양리를 비롯하여 진량읍 내리리, 하양읍 대학리 등 금호강 일대에서 확인된다. 특히 옥곡동유적은 경북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청동기시대 마을유적으로, 280여 기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집의 면적은 사용하던 사람들의 신분이나 용도에 따라 20M2 이하부터 70M2까지 차이가 나며, 내부에는 기둥자리, 저장공간,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자리 등이 있다.

무덤은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대표적이다. 특히 고인돌은 경북지역 중 경산에 제일 많이 분포(2001년 253기)하는데 용성면 일대(2001년 148기)를 중심으로 오목천과 남천의 상류역에 밀집 분포한다. 고인돌 가운데 하양읍 대학리유적의 묘역식 고인돌은 무덤 간의 차별화가 극대화된 거대무덤으로 지역공동체 사회에서 유력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사회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 청동기시대 석기

청동기시대에서 청동기는 몇몇 사람들이 신분을 과시하고 위력을 나타내는 위세품으로 드물게 사용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돌을 갈아서 만든 간석기를 주로 사용하였다.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되던 간석기는 청동기시대에 더욱 정교하고 다양한 제품들로 만들어졌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렵이나 농경생활을 위해 돌도끼, 반달돌칼, 자귀 등 각종 농기루를 비롯하여 공구, 무기 등을 많이 제작, 사용하였다.

 

* 청동기시대 토기

토기는 주로 집터와 무덤에서 발견된다. 종류는 항아리, 깊은 바리, 보시기 모양의 몸통에 무늬가 없는 민무늬토기가 대부분이고, 그릇 겉면에 붉은 칠을 한 간토기도 있다. 토기의 아가리에 구멍무늬, 겹아가리에 짧은 빗금무늬, 골아가리무늬 등을 새기기도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가리의 무늬는 없어진다. 청동기시대 토기는 손으로 빚어 만들어 한데가마에서 낮은 온도로 구운 것으로 전문 장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저장용, 조리용, 식기용 등으로 만들어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경산의 고대국가, 압독국

압독국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원삼국시대 경상도지역에 있었던 진한 12개 소국 중 경산에 있었던 나라로 압량소국으로도 불리었다. 압독국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대까지 존재하였으며, 기원후 4세기 무렵 신라에 복속되었으나, 신라가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지배를 하기 전 약 200여 년 동안은 압독국 수장층이 자치권을 보장받아 지역을 다스렸다. 압독은 신라가 지방에 주군현제를 시행한 6세기 이후에는 압독군 또는 압량주로 불리다가 8세기 대에 장산군으로 개칭되었다.

 

압독국의 중심읍락은 임당유적 일대로 추정되며, 전성기의 압독은 금호강과 오목천에 의해 형성된 충적평야에서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토기 제작 전문 공방에서 대량의 토기를 생산, 유통하였으며 멀리서도 한누에 보이는 높고 커다란 무덤을 축조하는 등 발전된 면모를 갖춘 지역 정치체로서 신라의 고대국가형성에 한 축을 담당하였다. 압독국의 유적에서 출토된 다량의 각종 유물들, 인골, 동물유존체, 어패류와 순장 등은 고대 사람들의 정치`사회 구조, 내세관, 제사풍속, 식생활 등을 비롯하여 DNA를 활용한 인물 복원 등에 이르기까지 압독을 비롯한 한반도의 고대 문화를 복원하고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 압독국의 대표유적 : 양지리유적 / 임당유적

 

* 초기철기시대

초기철기시대는 도끼, 끌 등의 공구류를 중심으로 한 철기가 등장하는 시기. 이 시기는 철기가 처음으로 등장하지만 청동기 제작기술이 더욱 발전하는 시기이다. 경산지역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철기는 임당동 유적에서 출토된 틀에 부어 만든 쇠도끼로 자루를 끼우는 부분이 직사각형이고, 2줄의 가로띠를 가진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중국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반도에서도 이른 철기 중 하나로 여겨진다.

 

* 임당동 환호유적

임동 구릉에 조성된 환호유적은 경산지역 대표적인 초기철기시대 유적이다. 환호는 도랑을 파서 마을이나 특별한 공간을 감싸 보호하는 시설물이다. 임당 구릉의 환호 내부는 별다른 건물 흔적이 확인되지 않은 공터로 추정되며, 환호 내부에서 의례와 관련된 유물이 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의례가 이루어지는 신성한 장소를 보호하는 용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 철의 등장과 기술의 발달, 압독의 성립

압독국이 성립되는 시점은 임당 구릉에서 이중의 환호와 널무덤이 조성되기 시작하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로 추정된다.

당시는 새롭게 철기가 등장하고 기존 청동기 제작기술이 더욱 발전하던 시기이다. 초기의 압독 집단은 한국식동검, 쇠칼, 쇠투겁창 등과 같은 무기와 따비, 쇠도끼 등의 농기구를 사용하였다. 또한 청동거울, 오수전 등 중국제 유물도 출토되고 있어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후 3세기 중엽부터는 새롭게 덧널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하는데, 이전에 비해 더 다양한 철제 농기구와 무기, 장신구 등이 부장된다. 무덤의 크기와 입지에 있어서도 차별화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사회분화가 이루어지고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정치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 강력한 지배자의 출현, 양지리1호 널무덤

금호강 중류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 하양읍 양지리유적 1호 널무덤의 주인공은 원삼국시대 당시 지역 일대의 강력한 지배자였다. 약 2천여 년 전에 축조된 통나무널 무덤에서는 각종 금속 무기, 부채 등 옻칠 제품, 숭어뼈`복숭아씨`참외씨가 담긴 항아리 등을 비롯하여 청동거울, 청동호랑이모양 허리띠고리 등 기원 전후 중국과의 교역의 산물이자 신분을 상징하는 다량의 청동제 유물 등이 쏟아졌다. 널 내부에서는 성년 전반(20대)의 남성으로 추정되는 1개체의 옛사람 뼈도 확인되었다. 특히 널 아래 무덤구덩이 바닥 가운데에 위치한 네모형의 요갱에 봉헌된 옻칠 된 투겁창집과 투겁창, 청동 꺽창집은 전례가 없는 한반도 유일의 부장품으로 무덤 주인공의 신분과 사회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양지리 1호 널무덤 유물 갖춤새

봉토 : 짭은목항아리 1점, 독 2점

충전토 위 : 주머니모양 항아리 1점, 쇠뿔모양 손잡이 항아리 1점, 짧은목항아리 1점(칠기편, 숭어뼈`복숭아씨`참외씨)

목관 내부 : 옻칠 된 칼집과 청동칼 2세트, 옻칠 된 칼집과 쇠칼 2세트, 옻칠 부채 손잡이 3점, 옻칠 용기 2점, 청동 호랑이모양 허리띠고리 1점, 원통모양 동기 12점, 청동 종방울 1점, 청동 단추 2점, 청동 말모양 꾸미개 1점, 중국거울 3점, 청동팔찌 1점, 목걸이 1세트

목관 바닥 : 쇠납짝도끼 19점, 쇠를 두드려 만든 도끼 2점, 쇠를 틀에 부어 만든 도끼 1점

묘광 벽면 : 쇠납짝도끼 8점

 묘광 바닥 : 쇠를 틀에 부어 만든 도끼 15점, 쇠투겁창 1점

요갱 내부 : 옻칠 된 투겁창집과 투겁창 2세트, 청동 꺽창집 1점, 자귀 1점

 

*  무덤 안의 부채

무덤에서 부채 부장이 확인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양지리유적 1호 널 무덤에서는 죽은 사람의 얼굴을 덮는 부채 1자루, 허리 근처 1자루 등 무려 3자루가 확인되었다. 무덤에 부채를 부장한 것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큰 새의 깃털을 이용하여 장례를 치른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새의 깃털로 제작된 부채를 장송 의례행위로 사용한 것으로 죽은 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위신재이자 벽사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옻칠된 꺽창집

칼집은 목재로 만든 뒤 옻칠을 하고 오수전을 부착하여 제작하였다. 꺽창이 들어 있는 꺽창 칼집의 앞뒤 면에 중국 한나라 동전인 오수전이 각 13개씩 모두 26개가 부착되어 있다. 오수전은 무게가 5수(3`25그람)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 압독국의 토기와 토기공방

압독국의 유적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유물의 종류는 토기이다. 고대에서 토기는 그릇이라는 용도를 넘어서 고대사회의 제의, 생산과 유통, 교역과 정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4세기에서 6세기 전반까지 압독국의 토기는 대부분 옥산동유적 일대의 토기가마에서 생산되었다. 옥산동유적에서는 41기의 토기가마가 확인되었는데 경주 다음으로 대규모 생산체계를 갖춘 토기 전문 공방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토기는 대부분 경산지역에서 소비되었고 멀리 대구와 성주지역에서도 유통되었다. 토기 종류는 굽다리접시, 뚜껑 등의 소형토기가 가장 많이 생산되었고 그 다음으로 항아리가 많이 제작되었다.

 

* 압독의 마을

압독 사람들이 살던 마을의 모습은 임당유적, 시지유적 등에서 잘 나타난다. 임당유적은 기원전부터 환호가 있는 중심마을이었고, 이후 시기에도 방어시설인 임당 토성을 비롯하여 집터, 무덤, 저습지가 있는 압독국의 중심마을이었다. 마을의 집터 면적은 중소형부터 대형주거지까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사회 분화가 상당히 진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속시설로 야외노지, 변소 등도 확인된다. 시지유적은 대구시 수성구 시지동`매호동`신매동`욱수동`노변동 일대를 아우르는 유적으로 대규모 생활유적이자 집터, 무덤이 있는 복합유적이다. 시지유적은 당시 지역의 중심마을인 임당유적의 세력 아래에서 토기와 철기 등 생산을 주로 담당한 장인 집단들의 마을로 보여진다. 

 

* 집터

집의 평면형태는 말각장방형, 원형으로 내부에는 온돌, 부뚜막, 터널구조의 고래 시설을 설치하여 조리, 난방 및 연기 배출구로 활용하였으며 바닥은 불다짐을 하기도 하였다. 집의 면적은 30M2 미만(42%)부터 최대 105M2(5%)까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피라미드형 사회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 내부에서는 화로모양토기, 장란형독, 연질바리, 연질독, 시루 등 주로 음식의 조리와 저장, 식사를 위한 토기들이 출토되는데 대형의 바리에 탄화미가 담겨진 채로 출토되기도 하고 그릇의 외면이 불에 그을리거나 음식물을 조리하다 끓어 넘친 흔적이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 압독의 타입캡슐,저습지

저습지는 물이 흐르지 않고 오랫동안 고인 상태로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흙이 퇴적되어 뻘층을 이루기 때문에 토양 내부의 유기물이 부식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다. 임당유적 저습지에서는 제사의식과 관련된 점뼈, 각종 동물뼈, 소형토기, 흙구슬, 뼈바늘, 머리장식에 사용된 뒤꽂이, 다양한 용기류, 나무신발, 베틀 부속구, 건축부재 등 당시 압독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하던 거의 모든 물푼이 출토되었다. 특히 철제 갑옷을 만들 때 사용된 목제 갑옷들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출토되는 등 임당유적 저습지는 고대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오리모양 토기

오리를 닮은 새모양토기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큰 새의 깃털을 이용하여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죽은 자가 날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죽은자의 영혼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해 제작된 장송 의례용 토기이다.

 

* 압독의 전성기, 고총과 지배자 '간'

압독국의 무덤은 초기철기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4단계인 널무덤, 덧널무덤, 고총, 돌방무덤으로 변화한다. 고총은 삼국시대 지배자의 무덤으로 경산에서는 임당동과 조영동고분군(사적 제516호)이 대표적이다. 경산지역 고총의 묘제는 암광목곽묘가 가장 많으며, 무덤 내부에서는 각종 토기류, 장신구류, 무기류, 마구류, 농공구류 등 다종다양한 유물이 부장되고 순장이 행해졌다. 압독의 지배자를 가리키는 호칭은 신라 각 지방의 수장층을 '간'으로 지칭한 사료로 보아 '간'으로 불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제력, 권력, 대외교섭력 등을 가진 압독의 '간'은 신라의 최고지배자인 '마립간'으로부터 귀금속제 위세품을 하사받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 지배자의 위세품

고대사회에서 몸을 치장하는 화려한 귀금속제 장신구는 소유한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이다. 압독 지배자의 무덤에서는 금동관, 관꾸미개, 관모, 목걸이, 귀걸이, 허리띠장식, 팔찌, 반지, 신발 등 각종 귀금속제 장신구가 많이 출토된다. 특히 금동관은 확인된 것만 20여 점으로 신라의 여러 지역 정치체 중 가장 많은 수량이다. 이러한 위세품은 신라의 왕실로부터 하사 받은 것으로 압독의 지배층은 신라의 후원을 받으며 지역을 자치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 무기와 말갖춤

무덤에서는 화살촉을 비롯한 쇠창, 도끼 같은 무기들이 많이 출토된다. 특히 신분이 높은 사람의 무덤에서는 고리자루 큰 칼, 화살통, 갑옷 등이 부장되며 말갖춤도 함께 출토된다. 말갖춤이란 말을 탈 때 쓰는 연장이나 말에 달린 꾸미개 등 말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는 모든 도구를 말한다. 임당유적에서는 거의 모든 고총에서 말갖춤이 출토되며 철뿐만 아니라 금, 금동, 은 등으로 화려하게 제작하기도 하였다. 

: 안장앞가리개, 안장뒷가리개, 고삐, 재갈, 가슴걸이(고들개), 말방울, 발걸이(등자), 말띠꾸미개, 안장, 후걸이, 말띠드리개(행엽), 다래

 

* 압독국의 비밀의 열쇠, 임당유적

임당유적은 경산지역에 존재했던 압독국의 실체를 보여주는 대표 유적으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 무렵까지 천여 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서 끊임없이 지속되어진 고대 경산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생생히 보여주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문화유산이다.

1982년 임당동고분군을 발굴하면서 확인되기 시작한 임당유적은 경산시 임당동, 조영동, 압량읍 부적리`신대리 등에 걸친 대단위 복합유적으로 2천여 기가 넘는 무덤을 비롯하여 환호, 토성, 마을, 집터, 저습지 등에서 금동관, 은제 허리띠 등 귀금속제 장신구, 토기, 청동기, 철기, 목기 등 2만8천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현악기, 목제 갑옷틀, 용무늬화살통, 금동제 비갑 등 출토 예가 없는 희귀한 유물뿐만 아니라 다량의 인골, 동물유존체, 어패류 등이 종합적으로 확인되어 고대 문화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 압독 사람들의 제사음식

압독 사람들의 무덤에서는 제의와 관련된 동물`식물`어패류 유존체가 많이 출토된다. 무덤 내부뿐만 아니라 무덤 덧널의 개석 위에서도 확인되며 말 한 마리의 몸통을 절단하여 단독으로 매장한 말무덤도 있다. 무덤 내부에서 확인된 종류는 조개껍질(소라, 다슬기, 바지락 등), 조류뼈(꿩, 닭, 오리, 기러기 등), 포유류뼈(돼지, 소, 말, 사슴, 멧돼지, 개 등), 생선뼈(상어, 복어, 잉어, 숭어, 방어, 가오리, 참돔 등), 씨앗(복숭아, 살구 등), 곡류(쌀, 보리, 밀 등) 등 매우 다양하다. 이를 통해 압독 사람들은 농경생활과 사냥, 사육, 채집을 하며 먼 바다의 어패류를 유통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무덤에 다양한 먹을거리를 부장하는 풍습을 통해 저승에서도 이승과 같은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는 고대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다.

 

* 상어고기와 돔배기

무덤 속에서 확인되는 동물유체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상어고기의 흔적이다. 특히 임당유적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무덤 중에서 상어 뼈가 가장 많이 출토되는 유적이다. 상어뼈는 대부분 수장층의 무덤에서 확인되는데 굽다리접시나 항아리에 넣어 부장하거나 부장칸에 토막 낸 상어 여러 마리를 순장자와 함께 부장하기도 한다. 경산을 비롯한 영천, 대구 등지에서 현대의 중요한 제사음식 중 하나로 돔배기(소금으로 간을 친 토막 낸 상어고기)를 올리는 문화가 고대로부터 기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순장

순장은 왕이나 그에 준하는 권력자가 죽었을 때 평소 그들을 모시던 시종이나 하인을 죽여 무덤에 함께 묻는 풍속을 말한다. 압독에서 순장은 4세기 초 덧널무덤에서 처음으로 2명의 순장자가 확인되며 4세기 말 ~5세기까지의 거의 모든 지배층 무덤에서 순장자가 확인되는데 최대 8명까지 순장된 무덤도 있다. 순장자들은 보통 금동제 귀걸이, 옥으로 만든 목걸이, 손칼 등을 착장하고 있어 무덤 주인공의 시녀, 시동, 시종, 호위무사, 재산관리자 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순장이 사라지게 된 시점은 신라 지증왕 2년(501년) 기록에 순장을 금지한다는 기사에서 보듯이 6세기에 접어들면서이다.

 

* 압독과 신라

압독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하여 신라가 지방에 주군현제를 시행한 6세기경 이후에는 압독군 또는 압량주로 불리다가 8세기대(경덕왕 757년)에 장산군으로 개칭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고학적 연구성과를 통해 볼 때 압독이 신라에 복속된 시기는 4세기 전후로, 신라는 직접 경산지역으로 지방관을 파견하기 전인 6세기 때까지는 자치권을 보장하는 간접지배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가 경산지역에 지방관을 언제부터 파견하였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관련된 흔적은 몇몇 유적에서 찾을 수 있다. 

대표적 유적으로는 임당지역의 물과 관련된 일에 대한 논의가 새겨진 임당동유적 출토 고비, 조세와 관련된 신라의 행정활동을 보여주는 소월리유적 출토 목간, 압량주 군주 김유신과 관련된 경산 병영유적 등이 있다.

 

* 김유신과 경산 병영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김유신(595~673)은 왕경인으로 선덕왕 11년(642년)에 압량주 군주가 된다. 당시 신라의 상황은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대야성(합천)이 함락되어 서부 국경 지역을 대부분 상실하고 후퇴하게 되었는데, 수세에 처한 신라는 김유신이 주병(압량주 군사)을 뽑아 조련하여 적진을 향해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군사들이 훈련한 장소가 [경산 병영유적]으로 압량읍 일대에 야트막한 언덕으로 남아있다. 이곳은 당시 경산이 신라 통일의 전초적 기지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는 장소이다.

 

* 금동 쇠뿔모양 둥근판과 팔뚝가리개(임당 1호분)

무덤 주인공의 머리쪽에서 중첩된 상태로 출토된 금동제 우각형 원형판과 비갑(팔뚝을 보호하기 위한 갑옷)이다. 본 유물들은 출토 예가 매우 드문 것으로 경산지역에서도 임당1호분에서 처음 확인된 것이다. 금동제 우각형 원형판은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으나, 관식일 것으로 추정한다.

 

 

 

'역사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하당 김충선(1571~1642년)  (0) 2022.10.26
9/25 경산시립박물관 2  (1) 2022.09.29
9/4 정관박물관 3  (0) 2022.09.27
9/4 정관박물관 2  (1) 2022.09.21
9/4 정관박물관 1  (0) 2022.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