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9/4 정관박물관 3

부실이 2022. 9. 27. 22:15

* 칠기 만들기

칠은 인류가 발명한 최초의 천연 도장 물질로,  옻나무의 수액이 재료이다. 칠에 여러 가지 발색제를 넣으면 흑색`적색 등 다양한 색이 만들어지는데, 장식의 목적도 있지만, 방부`방수`내영기능이 있어, 지배층의 고급용기에 사용되었다.

칠제품에는 칼집`화살통 등 무기류와 굽다리접시`원통형그릇`잔, 그리고 붓`부채자루가 있다.

부산 고촌 유적에서는 옻이 묻은 그릇이 물가의 야외 화덕에서 출토되었는데, 생옻을 끓여서 칠을 만든 생생한 현장이다. 

또한 이 유적에서는 검은 칠과 붉은 칠을 한 아주 고급의 잔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부산 고촌 유적에서 생산한 칠기는 동래 일대의 지배집단에게 공급되었을 것이다.

 

* 목기 만들기

목기 가공기술의 발달은 금속기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목기는 도끼로 베어낸 원목으로 제작한다. 이때 용도별로 적당한 수종을 선택하게 되는데, 유적주변의 식생을 중심으로 나무의 성질을 고려하였을 것이다. 벌채한 원목은 마을 제작공방으로 옮겨와 가공하는데, 제작이 간단한 자루나 방망이형 목기의 경우에는 가지부분을 이용하여 나무껍질을 제거하고 결합부분만 다듬어서 마무리 하였다. 그러나 구조가 복잡한 목기는 몇 단계의 과정을 더 거치게 된다. 결구와 같은 세밀한 가공이 필요한 제품의 경우 구멍파기나 돌려깍기`장식 등을 가미하고, 매우 정제된 목기는 가장 마지막 단계에 표면에 옻칠을 하여 완성하였다.

 

* 토기만들기

가장 보편적인 생활도구의 하나인 토기는 점토로 형태를 만들어 말리고, 불에 구워 만든 그릇이다. 삼국시대에는 질이 무른 와질토기와 연질토기, 단단한 도질토기가 생산`소비되었다. 토기는 운반`저장`가공`조리`식기`벼루`등잔 등 생활분야와

제기`부장품`무덤의 널 등 아주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물레를 돌려 형태를 만들고 천장이 있는 가마가 등장한 삼국시대부터 토기 사용량이 증가하였다. 이에 전문적인 토기 생산 집단이 등장하였고, 이들에 의해 생산된 토기는 상당히 넓은 지역에 공급되었다. 

가동 마을유적에서는 식기류처럼 작은 토기는 마을 안에서 직접 만들었으나, 제기나 부장품 등에 사용할 고급의 도질토기는 규모가 큰 인근의 전업적인 토기 생산시설에서 공급받았을 것이다.

 

* 골각기 만들기

동물의 살과 가죽을 벗기고 난 후 남은 뼈`뿔`이빨 등을 가공하여 도구로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도구 일체를 골각기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골각기의 재료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것은 사슴이나 돼지의 사지골`견갑골`늑골`송곳니와 사슴의 뿔이며, 삼국시대가 되면 소뼈도 사용한다. 이는 재료를 얻기 쉽고 재질이 단단하기 때문이다.

골각기 제작과정은 원재료가 되는 뼈나 뿔을 도끼`칼 등으로 깍아 연모로 쓸 부분을 추출하고, 자르기`다듬기`마연하기 등으로 마무리하였다.

부산 고촌유적에서는 사슴뿔로 만든 손칼자루 54점, 사슴뿔에 예리한 홈을 판 각골 7점, 점칠 때 사용하는 복골 13점 등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몇 개 기종에 대해 많은 양이 출투된 것으로 보아 고촌 유적이 목기`칠기와 더불어 골각기 생산의 전문공방이었음을 의미한다.

 

* 가축

우리가 오늘날 손쉽게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동물을 기르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기술은 신석기시대에 개를 기르면서 시작되었고, 청동기시대에 들어서 돼지에서, 소와 말의 경우는 삼국시대에 들어서야 발견된다.

그러면 야생동물과 가축은 어떻게 구별하는 것일까?

사례가 많은 돼지의 경우 뼈의 크기와 먹이 변화를 통해 구별할 수 있다. 즉 가축화가 진행되면서 근육이 점차 약해지고 전체적으로는 체격이 작아지는 특징이 나타난다. 또한 야생에서 구하던 먹이가 안정적인 사료로 바뀌면서 점차 견치도 사라지고 이빨크기도 작아지는 등 턱뼈가 변형되며, 나아가 사람이 먹고 남은 잔반을 먹고 자라기도 했다.

부산 고촌유적에서도 다양한 가축들이 확인되었다. 가장 많은 것은 집돼지이지만 소`말`개 등도 있다. 

소와 말은 농사 뿐 아니라 운송이나 교통수단으로도 사용된 귀중한 자원이었을 것이며, 집돼지는 중요한 식량자원의 하나였다. 

 

*  나무로 된 농사도구

삼국시대에는 철제 농사도구의 사용으로 인해 농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나, 여전히 나무로 된 도구도 사용되었다. 나무로 된 농사도구에는 괭이와 고무래, 삽 등이 있다.  나무괭이는 땅을 파거나 고르는 데 사용되는 도구로, 주로 개간이나 기경작업(땅을 갈아엎는 작업)에 쓰이며, 평괭이와 쇠스랑형으로 구분된다. 고무래는 논이나 밭의 흙을 고르고 씨를 뿌린 뒤 흙을 덮는 데 쓰이는 연장이다.

 

* 쌍날따비

따비는 비탈이 심하거나 돌과 나무뿌리가 많아 쟁기를 쓸 수 없는 곳에서 땅을 일구는데 쓰는 갈이연장이다. 생긴 모양이 삽과 비슷하지만 흙 속에서 날을 박고 자루를 뒤로 당겨 흙을 일으킨 다음 손잡이를 돌려 흙덩이를 뒤집는다. 일반적으로 고대 따비는 송곳형, 주걱형, 영남식 외날따비로 분류되고, 송곳형과 주걱형은 다시 외날과 쌍날로 세분된다.

부산 고촌유적에서는 송곳형 쌍날따비의 철제 따비날을 꼽기 위한 몸체로 추정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길이가 길고, 단단한 참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사용방법은 농경문 청동기에 표현된 것과 유사하다.

 

* 청강`대라리 유적

청강`대라리 유적은 삼국시대 무덤`생활`제사 공간이 해발 100~130미터의 고지대에 형성된 복합유적으로 4개의 구릉 위에 있다. 마을은 4세기부터 5세기 후엽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었다. 사람들은 구릉의 가운데를 비워두고 살림집을 짓고 모여 살았다. 마을의 범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옆의 구릉으로 옮겨갔다. 마을 가장자리에는 한 해의 수확물과 생산에 필요한 재료를 보관하기 위한 저장구덩이와 쓰레기를 버린 구덩이가 있다. 한편, 마을 사람이 죽으면 가장 남쪽 구릉의 공동묘지에 묻었으며, 나무로 만든 덧널에 시신과 부장품을 넣어 무덤을 만들었다.

제사는 북쪽 꼭대기를 둘러싸듯 울타리를 쳐 마을과 분리된 신성한 공간에서 거행되었다. 울타리 입구는 남쪽으로 열려 있고, 이를 따라 들어가면 제사를 지내기 위한 터와 신전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마을 사람들이 소중하고 신성하게 여기는 상징적 공간으로, 바다와 하늘을 우러르며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추정된다.

 

* 신앙 : 풍요와 안녕의 기원

기장 지역에는 달음산 유적, 동백리 유적, 청강`대라리 유적 등의 제사 유적이 있다. 달음산 유적은 해발 587미터의 산 정상부의 경관이 수려한 곳에서 자연신을 모셨던 전형적인 산악 제사유적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오랜 기간 유지되었다. 

동백리 유적은 나지막한 구릉에 형성되었는데 마을과 무덤을 조망할 수 있는 정상부에 제사유구가 있다. 제사 유구는 깊은 도랑과 나무 울타리를 교대로 여러 겹 두른 모습인데, 이는 제사 지내는 곳을 보호하기 위한 특수한 시설로 보인다. 이와 비슷한 형태로 청강`대라리 유적에서는 여러 겹의 나무울타리가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의 제사 유물로는 상형토기와 소형 토제품 외에도 복골`철탁과 같은 제사 도구가 있다.

상형토기는 새나 말을 형상화한 동물형이 많은데, 실제 동무을 봉헌하기에는 재산적 손실이 크므로 이를 대신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소형 토제품은 접시나 발과 같은 모양으로 만든 용기형, 토기나 기와를 둥글게 가공하여 만든 원반형, 손으로 흙을 주물러 장고 모양으로 만든 것 등이 있다. 점치는 도구로는 사슴 뼈나 돼지 뼈를 불로 지지거나 칼로 깍아내어 갈라지는 모양을 보고 길흉을 점쳤던 복골이 있다. 쇠로 만든 철탁(쇠방울)은 의식을 행할 때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6세기 신라 사회가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었을 때 뿐만 아니라 제사를 주관하던 전문 직업인으로서 제사장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신을 섬기다

삼국시대의 제사는 그 성격에 따라 개인적인 것과 공공의 목적인 것이 있다. 개인적인 제사는 생활공간 주변에서 이루어지지만, 공동의 제사는 신전과 같은 국가 시설이나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독립된 구릉에서 지냈다. 또 바다가 보이거나 산꼭데기와 같이 자연신을 만날 수 있는 신성한 장소에서도 제사를 지냈다.

경산 임당동 유적의 웅덩이 주변의 수변 제사, 부산 달음산 유적의 산 정상부에서 지내는 산악 제사, 경주 감은사와 같이 바다에서 지내는 바다 제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일상생활에서의 제사는 살림집 부뚜막을 지키는 조왕신 제사, 우물 제사, 큰 건물을 만들 때 건물의 안녕을 기원하며 땅의 신에게 올리는 제사가 있다. 구릉에서는 나무 울타리를 두른 독립된 공간에서 특별한 제사 시설이나 제사 유물이 발견되기도 한다.

 

* 새를 숭배하다

고대 사람들은 새가 곡식을 물어다 주어 마을에 풍요와 안녕을 가져다주고, 하늘의 신과 땅의 주술자를 연결해주는 매개체라고 믿었다. 옛 기록에는 큰 새의 깃털을 이용하여 장례를 지낸다는 내용처럼 장송 의례에서 다양한 형태로 새를 상징하는 내용이 발견되기도 한다. 특히 오링와 관련된 내용이 많은데, 항아리 뚜껑 손잡이를 오리 모양으로 만들거나, 죽은 이의 가슴 부위에 새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얹어두기도 하였다. 또 갑옷에 오리 모양 장식을 덧붙이기도 하고, 오리 모양 토기를 무덤에 부장품으로 묻기도 하였다. 오리 모양 토기는 속이 비어 있고 귀때가 있어 주전자 기능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는 장례 과정에서 술과 같은 액체를 담아 따르는 데 사용하였던 것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의 안식이나 승천을 기원하는 의미로 제사에 사용한 후 함께 묻은 것으로 보인다.

 

* 무덤 제사

무덤에서 지내는 제사는 무덤을 축조하는 공정별로 다양한 위치에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반반하게 고른 무덤 주변 지면이나, 주인공 주변, 정상부 혹은 테두리, 주위돌(호석) 주변, 무덤고랑 등이다.

널무덤이나 덧널무덤에서는 널이나 덧널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제사가 많고, 돌방무덤에서는 무덤의 경계에 쌓은 주위돌이나 고랑에서 제사가 이루어졌다. 특히 무덤 주인공을 돌방에 묻는 과정에서 지내는 제사는 장엄하게 치뤄졌다. 무덤축조가 완성된 이후에도 무덤 앞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신라와 가야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신라에서는 봉토에 우물형 돌구조물을 만들어 말을 대신해 마구를 바치기도 했던 반면, 고성`합천 등 가야에서는 봉토나 고랑에 장방형의 돌 제단을 만든 점이 다르다.

 

* 무덤을 만들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정관 방곡리 널무덤이 만들어지고 난 이후 상당기간 동안 기장지역에서는 무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본격적으로 많은 무덤이 조영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이후로 청강`대라리 유적과 용수리 고분군의 덧널무덤이 그 예이다.

무덤의 형태는 폭에 비해 길이가 길고, 2~4기의 무덤이 옆으로 나란히 배치되는 등 신라 무덤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 내부 부장품들은 금관가야 토기로 많이 채워져 있어 신라의 정신문화와 금관가야의 물질문화가 혼합된 이 지역만의 독특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중엽 이후가 디면 반룡리`청광리`명례리 등 기장의 여러 곳에서 무덤군이 형성되는데, 무덤 양식과 부장 내용으로 보아 이 지역이 신라지역임을 알 수 있다.

 

* 청강`대라리 유적의 무덤

청강`대라리 유적은 기장읍 대라리와 청강리 일대에서 동북쪽으로 뻗은 구릉에 위치하며, 부산`울산 간 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무덤이 있는 구릉에서는 덧널무덤 44기, 돌덧널무덤 2기, 독무덤 1기가 조사되었다. 무덤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아래쪽으로 범위를 넓혀갔으며, 구릉의 동쪽 끝에 자리잡은 청강리의 돌방무덤군과 연결된다. 결국 구릉의 높은 곳에는 덧널무덤, 낮은 곳에는 돌덧널무덤과 돌방무덤을 만들었는데, 이는 4세기부터 7세기 무렵까지 청강`대라리 사람들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 신라와 가야문화의 만남

기장지역에 본격적인 무덤이 조성된 것은 4세기경으로 청강`대라리 유적과 가동 용수리 고분군이 대표저이다. 이들 무덤의 특징은 당시 영남지역의 가장 유력한 정치세력이었던 신라와 금관가야의 문화가 공존하여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무덤의 형태는 너비에 비해 길이가 긴 덧널무덤으로 2~4기가 나란히 배열되는 신라무덤의 특징이지만, 부장품들은 손잡이 달린 화로모양토기`굽다리접시 등 금관가야적인 문화양상이 뚜렷하다. 이는 기장지역의 정치집단이 신라와 금관가야 양쪽 모두와 교류하면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두 지역 문화양상이 함께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판갑옷과 투구

갑옷과 투구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 4세기에 들어서면 한반도에서는 길게 자른 철판의 가장자리에 작은 구멍을 뚫어 가죽이나 못으로 연결한 판갑옷과 투구를 착용하였다.

부산 용수리유적 43호 덧널무덤에서 출토된 판갑옷은 새와 고사리 모양으로 장식한 초승달 형태의 철판을 달아 목을 보호하였고, 등판에는 고사리 모양으로 자른 철판을 덧대었다. 또한 날카로운 조각칼로 목`등`도련에 기하문을 새기고, 가슴`진동`어깨`목 부분은 동물의 털로 장식하는 등 현재까지 발견된 삼국시대 갑옷 중 가장 화려한 모습을 갖추었다.

판갑옷과 함께 출토된 투구는 길게 자른 철판 16매를 가죽으로 엮은 후 삼각 모양의 볼가리개를 붙이고, 가장자리는 가죽을 감싼 후 가죽 끈으로 꿰매었다. 투구의 위쪽은 가죽과 같은 유기질제로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신라식 무덤을 만들다

5세기대가 되면 이전의 덧널무덤과 5세기 중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돌덧널무덤이 혼재하다가 점차 돌방무덤으로 변화해간다. 돌덧널무덤들은 기장의 여러 지역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4세기대 덧널무덤 무덤배치와 비슷하게 2~4기의 무덤이 나란히 배치되는 특징이 있다.

돌방무덤은 높은 쪽에 눈썹모양의 고랑을 돌려 무덤을 완성하였다. 새롭게 등장한 이 무덤에서 출토하는 유물들은 기장이 신라 영역으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며, 반룡리`명례리`청광리 유적 등이 있다.

 

 

 

'역사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9/25 경산시립박물관 2  (1) 2022.09.29
9/25 경산시립박물관  (1) 2022.09.28
9/4 정관박물관 2  (1) 2022.09.21
9/4 정관박물관 1  (0) 2022.09.19
익산 입점리고분전시관  (1) 2022.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