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군에는 모하당 김충선을 배향(학덕이 있는 사람의 위패를 문묘(文廟)나 서원(書院) 등에 모심)한 녹동서원이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출정한 일본군의 장군으로 동래전투 이후 바로 조선군에 군사를 데리고 투항했다. 이후 임진왜란 동안에 여러 전투에 참전했고 병자호란 까지 참전한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이다.
역사가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는 일본과 한국의 소통이 필요할 때 일본은 소통의 창구로 모하당 김충선을 소환한다. 그래서 녹동서원이 있는 곳에 김충선 전시관을 마련하고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하여 보여준다.
부모형제와 고국을 떠나와서 조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다 간 김충선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외로움도 같이 느낀다.
[전시관 내용 정리]
모하당 김충선은 일본인으로 어릴 때부터 조선의 문물과 인륜중시 사상을 흠모하였다. 임진전쟁 때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우선봉장으로 조선에 출병하였다. 그러나 부산항에 도착하자마자 조선 침략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부하 3천명을 이끌고 조선에 귀화했다.
그 후 김충선은 경주`울산 등지의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조총의 제작 기술과 사용법을 조선에 전수하였다. 또한 임진전쟁이 끝난 이후 대구 우록동에 거주하다가 자청하여 10년동안 북쪽 변방을 지키다가 돌아왔으며, 이괄의 난과 병자전쟁 때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으로 삼란공신으로 불렸으며, 품계가 정한대부(정2품)에 올랐다. 또한 김충선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사성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노후에는 우록동에서 가훈과 향약을 지어 자손과 주민에게 가르치다가 1642년에 별세하였다.
* 조선시대의 귀화인
조선왕조는 건국초기부터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을 저지하고 변경을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향화책이다. 즉 조선에서는 적극적으로 왜구나 여진인을 귀화하게 하고 그들에게 식량과 토지`가옥 등을 주어 조선에 정착하여 살도록 하였다. 그 결과 조선초기에는 많은 일본인과 여진인이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서는 귀화한 일본인을 귀화왜인 또는 향화왜인이라 칭하였다. 이들은 고려말 조선초에 조선에 귀화한 왜구와 임진전쟁 때 귀화한 일본군, 승려, 대마도정벌 때에 구류된 왜인 중 조선에 거주하기를 희망하는 자, 대마도주가 파견한 사송인, 생활고 때문에 스스로 귀화한 자 등 그 유형이 다양하였다. 특히 이들 중에는 조선정부로부터 관직을 제수받은 수직왜인도 많이 있었다. 이들 귀화왜인은 왜구 토벌에 참가, 왜구 및 일본의 정세 제공, 대일사절의 왕래 및 사행의 호송, 삼포항거왜인의 관리, 피로`표류인의 송환 등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 임진전쟁 때의 활약
김충선은 조선에 투항한 이후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먼저 1593년 4월에 경주부에 위치한 이견대 싸움에 참전하여 일본군 3백여급을 참살하는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성명을 하사받고 자헌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1597년 11월에는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휘하로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넘어오는 일본군을 의령`정진에서 공격하여 일본군을 참살하였다. 또한 1597년 12월 22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조명연합군이 울산성을 공격할 때 김충선은 군사 백여명을 거느리고 성을 넘어가 일본군 수십여 급을 참살하였다.
* 북방의 방어
김충선은 임진전쟁이 끝난 후에 대구 우록동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북쪽 변방에서 오랑캐의 침범. 1603년에 자청하여 10년 동안 북쪽의 변방을 방어하다가 1613년에 우록동으로 돌아왔다. 김충선은 정헌대부(정2품)의 교지와 어필을 하사받았다.
* 이괄의 난 때의 활약(1624년)
임진전쟁이 끝나자 조선에서는 경상도 울산`밀양 등지에 분치하였던 항왜를 양계 지방으로 보내어 북방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양계지방을 방어하러 왔던 항왜 130여 명이 난에 적극 가담하였다. 김충선은 이괄의 부장으로 난에 가담하였던 항왜 서아지가 일본으로 도망가려 하자 그를 밀양에서 참살하였다. 그 공으로 김충선은 서아지로부터 적몰한 전장과 사패를 상으로 받았으나 수어청에 반납하여 둔전으로 삼도록 하였다.
* 병자전쟁 때의 활약(1636년)
병자전쟁이 발발하자 김충선은 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급히 한성으로 향하였으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파천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 바로 광주의 쌍령에 진을 치고 경상좌우병사와 진영을 나누어 청군을 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김충선은 150여 명을 거느리고 선봉에서 청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당시 부장이었던 김계충`김계수`김성인`김귀성 등이 2차로 출전하여 많은 적을 참살하고 돌아왔으나 김성인은 전사하였다. 그 후 김충선은 왕을 호종하기 위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곧 청과의 화의가 성립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김충선의 활약을 인정하여 훈련도감에서 왕에게 ‘그의 자손을 대대로 녹용하고 복호(조세나 부역을 면제하도록 함) 하도록 하자는 계를 올려 윤허 받았다.
* 임진전쟁 주요 전투일지
1592. 4 : 일본군 침략. 곽재우, 조헌 등 의병 일으킴 1592. 5 : 서울 함락. 명에 원병 요청. 사천 해전(이순신)에서 거북선 처음 이용 1592. 6. : 선조 의주로 피신. 평양 함락. 명나라 원군 1진 도착(조승훈) 1592. 7 : 웅치, 이치 전투. 한산도대첩(이순신). 승병 거병(휴정) 1592. 8 : 금산전투(조헌`영규 전사). 명, 일본과 화해교섭. 전국 각지에서 의병 활약 1592. 10 : 진주대첩(김시민) 1592. 12 : 명군 2진 도착 1593. 1. : 평양수복 1593. 2 : 행주대첩(권율) 1593. 5 : 명, 일본과 화친 논의 1593. 6 : 진주성 함락(김천일, 논개 전사) 1593. 8 : 일본군과 명군, 철수 시작 1594. 2 : 훈련도감 설치 1594. 11 : 속오군 설치 1596. 8 : 의병장 김덕령 옥사(이몽학 난 연루) 1597. 1 : 정유전쟁(일본군 재침) 1597. 3 : 명군 2차 출병(이여송) 1597. 7 : 원균 전사. 이순신 3도 통제사가 됨 1597. 9 : 명군, 직산 전투에서 일본군 대파. 명량해전(이순신) 1598. 11 : 이순신 노량해전에서 전사. 전쟁 종료 |
* 의병장 : 평양 : 임중량 / 해주 : 이정암 / 수원 : 홍계남 / 옥천 : 조헌 담양 : 고경명 / 광주 : 김덕령 / 나주 : 김천일 / 의령 : 곽재우 / 합천 : 정인홍 길주 : 정문부 / 금강산 : 사명당(유정) / 묘향산 : 서산대사(휴정) / 금산 : 영규 |
* 한`일 교류사
한국 | 일본 | 연대 | 사 항 |
삼국 시대 |
죠몬시대 야요이 시대 |
5세기 이전 |
. 벼농사와 청동기문화 일본에 전파 . 철정 등 제철기술 일본에 전파 |
고분시대 야마토 시대 |
513 | 백제, 일본에 오경박사 단양이 파견 | |
552 | 백제, 일본에 불교 전파 | ||
588 | 소가노 우마코, 백제에서 승려, 사원 건축자, 노반박사(주물), 기와박사, 화공 초청. | ||
663 | 왜가 백제 구원을 위해 군대 파견. 백강 전투. | ||
665 | 백제 유민 오미 간지키에 이주 | ||
남북국 시대: 통일 신라 |
나라시대 | 727 | 발해, 일본에 사절 파견(제1차 발해 사절) |
779 | 신라, 일본과 국교 단절. 다자이후에서 사무역은 계속됨. | ||
고 려 | 헤이안 시대 |
918 | 왕건 고려 건국 |
1019 | 고려가 쓰시마, 이키, 지쿠젠 등을 약탈하고 돌아가는 도이(여진족)를 토벌하고 일본인 포로를 송환 | ||
가마쿠라 시대 |
1236 | 고려대장경 조판((~1251) | |
1271 | 삼별초 정부, 일본에 서계를 보내 함께 몽고와 싸울 것을 제안함 | ||
1350 | 왜구, 경사도 고성`죽림`거제도에 대거 침입9왜구의 침입 본격화 됨) | ||
1380 | 최무선, 진포에서 왜적선 대파 | ||
조 선 | 무로마치 시대 |
1394 | 회례사 김적선, 일본국 진서절도사 원료준에게 대장경 사급(내려줌). |
1404 | 조선과 무로마치 막부의 교린관계 성립 | ||
1411 | 조선, 일본국왕 미나모토 요시모치에게 대장경 사급 | ||
1419 | 조선, 왜구의 근거지 쓰시마 섬 정벌 | ||
1426 | 조선, 삼포(부산포, 제포, 염포) 개항 | ||
1438 | 문인제도 정약(조약을 의논하여 정하다) | ||
1443 | 계해약조 정약 | ||
1492 | 조선, 류큐 국왕에게 대장경 사급 | ||
1510 | 삼포왜인의 반란 발발 | ||
1512 | 임신약조 성립 | ||
1544 | 사량진에서 왜인의 약탈사건 발발 | ||
1547 | 정미약조 성립 | ||
아즈치`모모야마시대 | 1592 | 임진전쟁 발발(~ 1598). 조선문화(도자기, 인쇄술, 유학)의 일본 전파 | |
에 도 시대 |
1607 | 도쿠가와 막부에 회답겸쇄환사 파견(~1624. 3회 파견). 두모포 왜관 설치(~1678) | |
1609 | 기유약조로 조일국교관계 회복 | ||
1636 | 대마도에서 국서개작사건 발생. 이정암윤번제 실시. 조선통신사 파견(~1811. 9회 파견) |
||
1637 | 겸대제 실시 | ||
1678 | 초량왜관 설치(~1872) | ||
메이지 시대 |
1875 | 운요호 사건 발생 | |
대한 제국 |
1876 | 강화도조약 |
* 남북국, 활발한 국제 교류를 통해 발전하다 - 남북국시대
신라는 통일 이후 활발한 대외 무역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당에는 신라방`신라소와 같은 거점이 만들어졌으며, 그 중심에는 청해진이 있었다. 당시 당-신라-일본을 오가는 사람과 문물들이 장보고의 선박을 이용하여 바다를 건넜는데, 당에 유학한 일본의 승려 엔닌도 이 선박을 이용하였다. 특히 이 시기 신라와 일본과의 관계는 외교적인 차원보다 물품의 교역이라는 측면이 강하였다.
발해는 건국초부터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자부하면서 돌궐`일본 등 주변의 여러나라들과 활발한 사절의 왕래와 교류를 지속하였다.
* 활발한 사절의 왕래와 교류가 유지되다 - 조선 전기
조선은 건국초부터 다양한 왜구대책과 쓰시마 섬의 정벌로 왜구를 진압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왜구의 침입은 1410년을 전후하여 급격히 줄어들었다. 반면에 일본에서 조선에 들어오는 통교자는 증가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왜인들이 도항하는 포소를 3포로 제한하였다. 이와 더불어 서계`도서`문인 등의 왜인통제책을 실시하여 규정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용함으로써 그들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한편 조선과 일본은 각각 1401년과 1403년에 명의 책봉을 받음으로써 조선국왕과 막부장군 간에는 대등한 교린외교가 성립되었다. 그 결과 조선전기에는 양국 간에 활발한 사절의 왕래를 통해서 우호적인 관계와 문물의 교류가 지속되었다.
* 조선 전기 통신사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통신사라는 명칭만을 사용하지 않고 회례사(回禮使), 보빙사(報聘使), 경차관(敬差官)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통신사는 명나라라는 동일한 사대국을 가진 동등 외교 관계의 국가로서 파견하는 외교 사절로, 왜구의 단속 요청, 대장경의 증정 등을 주 임무로 삼았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사절들 중에도 무로마치 막부의 새 쇼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목적의 사절들이 있었다.
1510년 중종 5년 발생한 삼포왜란을 계기로 세종 이후 파견되던 일본과의 사절 왕래는 끊겼으나 선조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끈질긴 요청으로 다시 파견하게 된다.
1590년 일본의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위해 파견된 중요한 특사였다. 조선은 서인의 대표인 정사 황윤길과 동인의 대표인 부사 김성일과 역시 동인이었던 허성을 서장관으로, 정탁을 사은사로 차출하여 1590년 출발하였다.
1591년 2월 21일(음력 1월 28일) 일본에서 귀환한 통신사 일행은 3월 조정에 상반된 보고를 내놓게 된다. 서인이었던 정사 황윤길과 동인이었던 서장관 허성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 올 것이다”라고 주장을 하였고, 동인이었던 부사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조정에서는 그의 의견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에는 이미 명나라를 침략한다는 ‘정명가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 침략에 대한 암묵적인 대비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 조선 전기 통신사의 내역
1420년(세종 2년) 송희경
1428년(세종 10년) 박서생
1439년(세종 21년) 고득종
1443년(세종 24년) 변효문
1590년(선조 23년) 황윤길 김성일 허성
1596년(선조 29년) 황신
* 조선 후기 조선통신사
임진전쟁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에도 막부는 국내의 정치적 안정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 섬 도주를 통하여 조선에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해 왔다. 조선은 그 진위를 살피기 위해 유정(사명대사)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1607년에는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2년 후인 1609년에 기유약조를 맺어 국교를 정상화하고 동래부의 부산포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
국교가 재개된 이후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 쇼군의 권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조선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조선에 사절 파견을 요청해왔다. 이에 조선에서는 초기 회답겸쇄환사를 포함하여 12차례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삼사(정사`부사`종사관)을 중심으로 300~500명으로 편성되었으며 일본에서는 많은 인원과 막대한 재정을 동원하여 통신사를 극진히 접대하였다. 조선통신사는 초기에는 정치적 외교적 사절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문화시절의 성격으로 변화하여 조선의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도 하였다. 한편, 통신사를 통해 일본의 문물이 전해져 조선의 지식인들이 일본사회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 조선 후기 통신사 일람표
연대 | 정사 | 사절 명칭 | 기 록 |
1607 선조 40 | 여우길 | 회답겸쇄환사 | 해사록 |
1617 광해군 | 오윤겸 | 회답겸쇄환사 | 부상록, 동사상일록, 동사일기 |
1624 인조2 | 정립 | 회답겸쇄환사 | 동사록 |
1636 인조14 | 임광 | 통신사 | 병자일본일기, 사상록, 동사록, 해사록 |
1643 인조21 | 윤순지 | 통신사 | 동사록, 해사록, 계미동사일기 |
1655 효종6 | 조형 | 통신사 | 부상록, 부상일기, 일본기행 |
1682 숙종 | 윤지완 | 통신사 | 동사록, 동사일록 |
1711 숙종37 | 조태억 | 통신사 | 동사록 |
1719 숙종45 | 홍치중 | 통신사 | 해유록, 해사일록, 부상기행, 부상록 |
1748 영조24 | 홍계희 | 통신사 | 도쿠가와 이에시게 취임 축하 |
1763 영조39 | 조엄 | 통신사 |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취임 축하 |
1811 순조 | 김이교 | 통신사 |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취임 축하 |
* 임진전쟁 발발 배경
조선에서는 15세기 이후 정변이 자주 일어나면서 공신들이 많이 생겨나고 그들이 특권세력이 되면서 여러 가지 모순이 쌓이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정계에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훈구세력과 격렬한 갈등이 빚어졌다. 그 결과 여러차례 사화가 발생하고 당쟁이 격화되는 등 정치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조선초기에 설치된 국방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비변사를 설치하였으나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또한 삼포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는 단절과 회복을 반복하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이용하여 혼란기를 수습하였고,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는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는 한편 농민들의 무기를 몰수하는 등 봉건적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그는 또한 전국적인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인력동원에 필요한 자료를 정비하는 등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준비에 힘을 기울였다.
* 임진전쟁의 원인
1.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의도를 계승하기 위해
2. 명나라와의 무역이 단절되자 감합무역(명일무역. 조공무역)을 재개하기 위해
3. 도요토미 히데요시 개인의 공명심과 정복욕 때문에
4.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장남의 죽음 때문에
5. 조선을 장악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을 통한 무역상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6. 국내 통일과정에서 발생한 다이묘와 무사들의 불만 해소와 영지의 확보 등
* 근`현대 한일 외교
조선사회는 안에서 성장하고 있던 근대적인 요소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채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식민통치에 필요한 준비를 하였고, 1910년에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여 36년간 식민통치를 하였다. 이에 맞서 우리 민족은 국내외에서 무장 독립투쟁, 민족 실력양성운동, 독립외교활동 등을 벌여 일본에 저항하였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투쟁과 연합군의 승리로 1945년 8월에 광복을 맞이하였다. 1965년 한일간의 국교가 정상화되어 양국간의 교류가 시작되었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었다. 또한 양국 간의 대중문화의 개방이 이루어져 일본문화가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한국의 문화도 일본에 유입되어 한류 열풍이 불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한`일간에는 종군위안부 문제와 독도 영유권 문제 등 해결되어야 할 외교현안이 산적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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