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성 조문국사적지. 조문국박물관
의성은 지리적으로 경주에서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중요 교통로에 위치하여, 당시 신라에서는 이곳을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하였을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의성에서 현존하는 대규모의 고총에서도 확인된다. 금성산 고분군은 현재 행정 구역상 대리리, 탑리리, 학미리로 구분되지만, 하나의 능선에 지속적으로 조성된 대규모 고분군이다. 이는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발굴전문기관에 의해 총 7회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다. 이 일대에는 조문국 경덕왕이라 전해지는 고분을 포함해 약 374기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된 유물의 다수는 의성양식토기 이지만 금동관, 금동장식, 은제관식 등이 출토되었다. 의성군 금성면 일대는 오랫동안 조문국의 도읍지였으며 이를 증명하는 대규모 고분의 축조, 수준 높은 위세품 등에서 확인되며 의성조문국박물관에서 전시 보관 중이다.또한 대리리 2호분 내부 모습을 재현한 고분전시관에는 출토유물, 순장문화를 통해 당시 매장 풍습을 엿볼수 있다.
이러한 조문국 및 의성 지역의 역사와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조사, 수집, 전시, 보존하기 위하여 의성군에서 박물관을 설립하여 2012년 10월에 준공하였으며, 2013년 4월 25일에 개관하였다.
* 뼈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발굴을 통해서 가끔 동물이나 사람의 뼈가 출토된다. 우리나라 국석기시대의 동굴유적에서는 멸종된 동물의 뼈가 발견되고 현재와는 전혀 다른 추운 지방에 사는 동물과 더운 지방에 사는 동물 뼈도 발견되고 있어 우리나라의 기후와 동물의 생태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신석기시대에 주로 발견되는 조개무지에서 사람의 뼈가 출토되기도 한다.
이러한 동물이나 사람의 뼈를 통해 당시의 매장풍습이 밝혀지기도 하고,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키, 나이, 성별, 혈연관계 등은 물론 생활풍습과 먹거리 등을 추측할 수 있다.
*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 약 4백만 년 전 등장. 최초 원시 인류. 직립보행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두 발로 대지를 디딘 최초의 동물이다. |
. 호모 하빌리스 : 약 250만 년 전 등장. 인류 최초로 돌을 도구로 사용. 인류가 손을 움직여 도구를 만들고 조작하게 된 것은 그들의 두 뇌를 정교하게 하고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 호모 에렉투스 : 약 50만 년 전 등장. 베이징인, 자와인, 하이델베르크인. 동굴생활, 불과 언어 사용. 불을 쓴다는 것은 추운 지역에서도 살 수 있다는 것으로, 이제 인류는 아프리카를 떠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게 되었다. |
. 호모 사피엔스 : 약 20만 년 전 등장. 네안데르탈인. 언어의 구사와 예술행위가 시작되고, 집단 내외적으로 고도로 구조화`조직화된 양식의 사회적 행위를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
.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 약 3~4만 년 전 등장. 현생 인류의 직접적 조상. 크로마뇽인, 상동인, 그리말디인. 이들이 새겨놓은 많은 조각상 및 동굴에 그려놓은 암벽화는 그들의 예술적인 수준과 다양한 경제활동, 신앙 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 환경 변화에 따른 의성인의 생활사 : 구석기 생활
*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차이는?
구석기시대는 인류 역사의 99%가 넘는 긴 기간을 차지하며 느린 속도로 문명이 발전한 시대이다. 도구는 나뭇가지나 동물 뼈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했지만, 특히 돌을 깨뜨려 다양한 석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약 1만 년 전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면서 깨트려 다듬은 돌을 갈아서 더욱 날카롭고 정교한 석기를 만들어 사용하게 되는데, 이것이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 구석기인들은 어떻게 도구를 만들었을까?
뗀석기(타제석기)는 돌을 깨서 만든 도구로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 모루떼기 / 직접떼기 / 간접떼기 / 눌러떼기
* 신석기 생활
신석기인들의 정착생활 : 신석기인들은 기후환경이 변화된 덕분에 구석기시대보다 먹을거리의 확보가 쉬워졌다. 차츰 이동생활을 줄일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계절의 변화에도 구애 받지 않고 안정되게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는 강가나 바닷가에 머물러 살기 시작하였다. 가끔 동물이나 바위그늘에 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땅을 파고 지붕을 덮은 움집을 지어 살았다. 이동생활보다 훨씬 시간적 여유가 많아져 생활이 더욱 윤택해졌다.
* 사냥의 어려움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은 지금과 달리 추운 시기였기 때문에 메머드나 순록과 같은 동물들이 살았다. 이같이 몸집이 크고 성질이 순한 동물들을 찾아다니며 사냥돌을 던지거나 날카롭게 다듬은 돌창으로 사냥하였다. 구석기인들은 활을 발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새나 작고 날쌘 짐승들을 사냥하기 어려웠다.
* 신석기인들은 어떻게 도구를 만들었을까?
신석기시대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구석기시대와 달리 토기를 발명하였고 돌을 날카롭게 갈아 만든 마제석기(간석기)를 사용한 것이다. 이처럼 발달한 토기와 석기제작 기술은 신석기시대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자르기 / 구멍뚫기(활비비) / 갈기(숫돌이나 가죽에 갈음)
* 신석기시대 토기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신석기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이 처음으로 토기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지역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다채로운 무늬로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초창기에는 무늬가 없는 토기가 만들어졌으나, 이후 남해안과 동해안 지역에서는 표면에 가는 점토띠를 붙여 장식한 덧무늬토기가 유행하였다. 그 다음에는 밑이 둥글거나 뾰족한 토기의 표면에는 도구로 여러 가지 점과 선을 그려 장식한 빗살무늬토기가 널리 유행하였다.
* 토기제작 종류
- 태쌓기 : 반죽한 점토를 일정한 굵기의 둥근 태로 만들어 쌓는 방법
- 서리기 : 길고 납작하게 만든 점토띠를 아래로부터 위로 감아올려 만드는 방법
- 빗기 : 점토 덩어리를 그냥 손으로 눌러 빚어 토기 모양을 만드는 방법
* 신석기기대의 토기 무늬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초창기 토기에는 무늬가 없지만, 흙을 반죽할 때 섞은 식물 줄기와 같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가장 오래된 무늬는 덧무늬토기(융기문토기)인데, 가는 점토띠를 가로, 세로 혹은 사선으로 덧붙여 장식하였다. 그 후 남해안에서는 끝이 뾰족한 도구로 촘촘이 찌르거나 짧고 깊게 눌러 새긴 무늬(자돌`압인문토기)가 유행하였고, 중부지방에서는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하여 입술 부근에는 짧은 사선 무늬를 그 아래에는 생선 뼈 무늬를 장식한 토기가 많이 만들어졌다. 이후 전국적으로 이와 같은 생선 뼈 무늬를 비롯하여 마름모꼴이나 삼각형 등 여러 가지 기하학적 무늬의 빗살무늬토기들이 널리 유행하였다. 하지만 후기가 되면 무늬의 정연함이 흐트러지고 일부에만 무늬를 새기는 등 빗살무늬가 점차 퇴화해 간다.
*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본격적인 벼농사를 시작한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구릉지대나 평야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가옥은 네모꼴이나 원형인 움집이 대부분이었으나 멀리 전망할 수 있는 망대와 곡식과 식료를 저장하는 다락집도 있었다.
그리고 마을 전체를 둘러싼 구덩이나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여 마을을 보호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벼`보리`콩`조`수수 등 오곡을 재배하였으며 이를 수확하기 위한 도구로 반달돌칼과 낫 등을 사용하였다. 또 냇가나 구릉의 바위면에 그림을 새긴 암각화가 많이 만들어졌는데, 지금까지는 주로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확인되고 있다.
청동기시대라 하더라도 도구는 여전히 돌칼과 돌화살촉, 돌도끼, 반달돌칼 등 석기를 주로 사용하였고, 청동기는 힘을 가진 소수계층의 권위를 과시하는 장식품이나 의례에 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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