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연표
* 1592년 4/13 일본군 조선침략. 임진왜란 발발 4/22일 곽재유 의병 봉기 5월 일본군 한양점령 기강전투 / 옥포, 합포해전 / 정암진전투 / 고경명, 김천일이 의병 일으킴 |
6월 당포, 당항포해전 7월 한산도, 안골포해전 제1차평양성전투 / 명의 원군파견 8월 금산전투 / 제2차평양성전투 9월 부산포해전 10월 제1차진주성전투 |
* 1593년 1/9 조`명연합군평양성탈환 / 행주산성전투 |
4월 일본군한양철수 6월 제2차진주성전투 10월 선조 한양으로 돌아옴 |
* 1594년 4월 유정, 가토와 회담 |
* 1595년 7월 이몽학의 반란 8월 통신사파견 |
* 1597년 정유재란 1월 14일 일본군재침군 부산상륙,정유재란 발발 7월 칠천량해전 |
8월 남원성전투 / 직산전투 9월 명량해전 / 보은전투 12월 울산도산성전투 |
* 1598년 8월 히데요시 사망 |
9월 사천성전투 11월 노량해전 11월26일 일본군철수 완료 |
* 의병의 활약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규군의 관군이 붕괴되자 백성 스스로 자기 고장을 지키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뭉쳐 일어난 것이 의병이다.의병은 대개 그 지방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적게는 몇 십 명에서 많게는 몇 천 명의 규모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개인의 재산을 사용하여 물자를 조달하였으며, 부대마다 지켜야 할 군율을 두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전국에 걸쳐 일어났던 의병은 적을 기습하는 유격전 전법으로 일본군의 진격을 막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의병활동의 원천은 무기나 병력 등의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충성과 의리를 바탕으로 한 결사 항쟁의 정신이었다.
일본군은 주요 도로를 따라 진격하고, 요충지에만 군대를 배치하였기 때문에 의병들은 후방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을 괴롭혔다.
임진왜란 때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관군의 무력으로 인하여 일본군이 수십일 사이에 우리의 국토와 죄 없는 백성들을 짓밟자, 동족을 구하고 자기 고장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 의병 분포도
전주 : 고경명 담양 : 김덕령 나주 : 김천일 화순 : 최경회 옥과 : 유팽로 공주`금산 : 조헌, 영규 한성 : 홍계남, 우성전 연안 : 이정암 묘향산 : 서산대사 |
의령 : 곽재우 합천 : 정인홍, 손인박 거창 : 김면 영천 : 권응수, 정세아 영주`안동 : 한효순, 김해 통천`금강산 : 사명대사 경성`길주 : 정문부 |
* 곽재우장군 복식
선조 11년(1578) 명나라 사신으로 간 부친을 따라 중국 북경에 갔을 때 명나라 황제로부터 선물로 받은 비단으로 홍의(붉은 옷)을 지어 입고 종립을 썼으며, 백마를 타고 스스로 천강홍의장군이 하였다. 곽재우장군은 날쌘 장정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붉은 옷을 입혀 여러 곳에서 왜군을 공격해 왜군을 혼란케 하였으며,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선봉에 서서 적진을 드나들었다.
* 임진왜란 조선의 무기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주무기는 활과 화살, 총통, 비격진천뢰, 화차 등이었다. 활과 화살은 전통적인 전투무기의 하나로 특히 조선의 활은 정교함과 성능의 우수함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총통은 화약을 이용하여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가장 큰 천자 총통에서부터 지, 현, 황의 순으로 작아진다.
임진왜란 때 제조된 신무기인 비격진천뢰는 둥근 탄환 모양으로 속에 화약`철편`신관을 장착하고 겉을 철로 둥글게 둘러 싼 다음 이것을 완구에 넣고 쏘아 목표물을 파괴하였는데, 오늘날의 포탄과 같은 것이다.
화차는 일종의 전차로서, 수레 위에 백 개의 신기전을 장착하여 연발로 발사하는 무기로 행주대첩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일본군의 주무기는 조총이었다. 임진왜란 초기, 조총에 대해 알지 못하던 조선의 군사는 그 위력에 놀라 흩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점차 조선에서도 조총의 제조기술을 익혀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 천자총통 : 보물 647호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화포 중에서 가장 큰 화기로, 거북선 및 판옥선에 장착되어 큰 성능을 발휘하였다. 화약은 서른 냥을 사용하여 대장군전을 발사하는데 사거리는 구백 보였다. 후기에는 조란탄이라고 하여 탄환 백 발을 발사하기도 하였다.
* 지자총통 : 보물 862호
지자총통은 화약 스무 냥을 사용하여 조란탄이라는 철환 이백 개나 장군전을 발사하는데 스물아홉 근에 달하는 장군전의 경우 팔백 보나 날아간다.
* 현자총통 : 보물 1233호
크기는 지자총통과 차이가 없다. 한 번 발사에 네 냥의 화약을 사용하였고, 발사물은 차대전이나 은장차중전 혹은 조란탄의 세 종류를 사용하며, 사정거리는 팔백 보에서 천오백 보에 이른다.
* 조총
조총은 원래 서구에서 개발된 화기로 직접 손으로 화약심지에 불씨를 점화하여 사격하는 기존의 우리의 총통과는 달리 격발장치가 있어 방아쇠를 당기면 용두에 끼워져 있는 화승이 화약에 불을 붙여 줌으로써 탄환이 발사되는 방식의 화승식소총이다.
조총은 기존 화기에 비해 조준사격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명중률이 뛰어났던 총이다. 조총은 16세기 동아시아로 전래된 이후 임진왜란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 활과 화살
조선의 활은 정교하고 그 성능이 뛰어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맞서 주무기로 사용되었다. 남방에서 수입된 물소뿔과 느릅나무 등 탄력이 좋은 목재를 복합적으로 사용하여 만들었다.
* 경상우도 의병활동의 특징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은 4얼 22일 곽재우가 의령에서 수명의 가동을 거느리고 활동하는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그 이후 김면을 중심으로 한 거창`지례`성주 방면에서의 의병활동과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합천`고령`성주 방면에서의 의병활동이 전개되고, 진주성을 중심으로 해서도 판관 김시민 지휘하의 관군과도 협조 속에 진주성을 방어하기 위한 의병 활동이 전개된다.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은 이렇듯 4개의 방면에서 독자적으로 전개하면서도 필요에 따라서 서로 연합해서 작전을 전개하고 지원활동을 벌이는 경우도 많았다. 성주에서의 김면과 정인홍의 부대가 연합공격 작전을 폈던 것이나 지례`사랑암 전투에서 진주성을 지키던 김시민의 부대가 지원활동에 나선 것이 그 예이고 진주성이 고성의 왜적으로부터 위협받을 때 곽재우가 부대를 이끌고 진주 부근으로 달려온 것이나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곽재우와 정인홍 휘하의 일부 군사력이 진주 외곽에서 지원활동을 한 것도 그 예이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경상우도의 의병장들은 대부분 남명의 문인 출신이라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경상우도의 3대 의병장 곽재우, 김면, 정인홍을 들 수 있다. 행의를 누구보다도 강조했던 남명은 당시 이론 지향적 비실천적 학풍을 거세게 비판하고 하학상달을 강조했다. 이러한 직설적인 현실대응의 남명학풍은 때로는 정치적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에는 문인들로 하여금 의병창의 대열에 앞장서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상우도의 눈부신 의병활동은 다른 지역에서의 의병활동을 자극시키는 파급효과를 가져왔으며, 물론 전라도의 의병활동이 활발했던 탓도 있긴 하지만,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으로 인한 견고한 방어거점 형성이 소조천융경 부대의 전라도에 대한 공략을 소극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 경상우도 의병의 조직변화와 성격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 조직은 전기와 후기로 변화하였는데, 그것은 의병운동의 성격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
정인홍 군은 5얼경부터 초기 의병 조직이 갖추어졌다. 이때부터 향촌사회의 강력한 통제력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국가의 의병 장려와 통제책에 따라 관직이 주어져도 나아가지 않았다. 때문에 정유재란 때에도 유일하게 경상우도에서 향병장이 되었다. 정인홍군의 초기 의병조직은 학연으로 결합된 문인들이 다수였으며, 합천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인사였다. 그러나 의병 하층부에는 관군에서 편입된 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김면 군은 1592년 5월경 초기 의병 조직이 편성되었다. 이후 김면이 의병도대장과 경사우병사가 되면서 의병을 총괄하고, 관군화되었다. 이것이 김면 군의 후기 의병 조직이다. 여기에는 경상우도와 좌도의 유력한 의병장들도 편제되어 있는데, 이들은 의병 초기에는 독자적인 향병이나 의병을 주도하다가 후기에는 유력 의병장에게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국가의 의병 통제책과 연관되어 있었다. 때문에 김면 군의 후기 의병 조직에는 경상도 전역의 의병과 관군이 참여하고 있다.
한편, 곽재우 군은 1592년 4월경부터 초기 의병 조직이 갖추어지면서 독자적인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곽재우는 1593년 김면 사망 후 경상우도의 의병을 통괄하였다. 곽재우 군도 의병 후기 단계에 이르면 초기의 의령 지역 인사에서 창녕 인근 지역 인사들로 확대되었다. 그가 경상좌도 병사 등의 직책을 부여받아 관군의 장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정유재란 시기에는 관군의 장으로 화왕산성 전투를 지휘하였다. 이렇듯 경상우도의 각 의병장의 의병 조직 변화가 갖는 의미는 의병이 독자적으로 구성되어 활동하였으나, 관군이 정비된 이후 왕조의 입장에서는 의병의 통제가 절실한 과제가 되었다. 이에 조정은 의병 통제를 시도하게 되는데, 경상우도에서는 김면과 곽재우를 통하여 의병을 통제`해체시켜 나가면서 의병을 장악하였다.
* 곽재우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출생. 본관은 현풍이고 호는 망우당.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과거를 보아 2등으로 뽑혔으나, 글이 왕의 뜻을 거슬러 무효가 되었다. 그 뒤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변 돈지에 집을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을 하였다. 3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대패하자, 4월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 싸웠다.
의병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과 세간리에 지휘 본부를 두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하였다. 곽재우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들에게 위엄을 보이고, 앞장서서 적진에 돌진하거나 위장전술을 펴서 적을 공격하거나 유격전을 감행해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처음 십여 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이천 명에 이르렀고, 곽재우는 이 병력을 휘하에 두고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곽재우의 의병활동은 임진왜란 초기 어려운 상황에서 민심을 수습하고 긴박한 전쟁 국면을 만회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동기는 세가지 이유로 설명 할 수 있다. 첫째,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대부분 고을의 수령들이 일본군을 맞아 싸우지 않고 일가족을 이끌고 피신해버리자 이에 분개하였고,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충의의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둘째로는 스스로 자기 고장을 보전하여 백성들을 일본군의 살육으로부터 구제해야겠다는 확고한 신념이었다. 세 번째는 나라의 녹을 먹은 관리의 후손으로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지식인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 곽재우 의병군의 성격
곽재우는 경상우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고, 독자적인 의병운동을 통하여 조직적인 활동을 선도한 인물이다. 우선 곽재우 군의 의병 구성 인사에서 초기에는 향촌사회의 혈연적`향당적 인사들이 주였지만, 후기에는 지역적`당파적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먼저 곽재우의 초기 의병은 1592년 4월 22일 기병한 후 5월에 들어서면서 초유사 김성일의 노력과 전국적인 의병의 봉기로 의병의 수가 급격히 늘어갔다. 이때 경상우도에서는 초유사에 의해 군사가 합군하는 경우가 많았다. 곽재우 군은 삼가의 윤탁 군과 합군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군세가 날로 늘어났다. 이처럼 곽재우 군은 군사수가 늘어나자 자연히 군을 조직화하고 군무를 분담할 필요가 있었다. 곽재우 군의 의병 초기의 지도부 인사 18명을 분석해 보면 신분별로는 독격장과 선봉장 등의 소수를 제외하면 15명이 사족이며 지주 계층이었다. 출신지역별로는 의령 11명, 삼가 5명, 진주 1명이었다. 학연상으로는 조식 문인이 4명이며, 허언심은 곽재우의 매형이었다. 곽재우 군은 의령 지역의 인사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학맥이나 혈연으로 연계되어 유대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때문에 의병운동 초기 곽재우의 군사는 의령 중심의 향토방위군이었다. 아울러 곽재우 군에는 무관직을 역임한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어서 전투력이 뛰어났다.
한편 곽재우 의병 조직의 하층부에는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재지사족들이 지주로서 가동이나 전호를 이끌고 참가하였다. 또 자발적인 향민들이 참여하였다. 이후 초유사 김성일의 지시로 독자적으로 향병을 이끌고 있던 윤탁과 오운이 합군하면서 군사수가 늘어났다.
후기 의병 조직의 변화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의병을 통제하였는데, 1593년 김면의 사망 이후 경상우도의 의병 조직은 곽재우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곽재우 의병대장, 이광악 부장, 김덕령 좌영, 홍계남 우영으로 임명하여 의병을 재조직한다. 이는 전선이 경상도에 집중되자 전국의 의병으로 활약하고 있던 의병들을 경상도를 중심으로 편제하여 통제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경상도 전체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지역연합군이었다.
* 정암진전투
정암진전투는 곽재우의 의병활동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전공을 세운 전투로 역사적인 의미가 큰 전투이다. 1592년 음력 5월 하순, 경상도에서 전라도 진격을 노리는 일본의 안코쿠지 에케이의 2천여 대군은 전라도로 향하는 길목인 정암진에서 도착하여 곽재우의 의병부대와 일전을 벌이게 된다. 안코쿠지는 히데요시의 특사로 바다를 건너와 7번대장 모오리 데루모토, 6번대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에게 전령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고바야카와군은 5월초 한양회의 후, 한양에서 담당지인 전라도를 향해 남하하고 있었으며, 안코쿠지군과 전라도 전주에서의 합군을 목표로 했다. 안코쿠지의 병력은 정암진 강안에 도착하여 수심이 얕고 마른 지역에 도하 지점을 설정하고 정찰대를 보내 통과할 지점에 나무 푯말을 꼽아 표시를 해두고 뗏목을 만들어 도하 준비를 하였다. 이에 밤사이 곽재우장군은 이 사실을 간파하고 군사들을 동원해 나무 푯말을 뽑아 늪지대로 옮겨 꼽아두고 정암진 요소요소와 숲에 군사들을 매복시켜두었다. 날이 밝자 안코쿠지의 선봉대가 도하를 시작했으나 늪지대로 잘못 들어가 허우적거리다 곽재우의 의병군에게 섬멸되었고 일부 주력군이 남강을 도하했으나 미리 대기하던 곽재우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정암진전투의 승리로 곽재우군은 한층 더 사기가 충천하게 되었고, 지역 주민의 신뢰도 두터워졌다. 정암진의 승첩은 경상우도를 보존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같이 경작을 할 수 있게 하였을 뿐 아니라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차단함으로써 전라도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게 하였다.
* 남명 조식
남명은 곽재우의 스승이자 곽재우의 부인되는 상산김씨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남명의 실천주의적 학풍과 사상은 많은 남명 문인들로 하여금 의병장으로 떨쳐 일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 일본군의 철수 경로
. 1598년 11월 15일, 동부 전선의 일본군은 철수를 개시, 부산에 도착함
. 그 무렵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군의 해상봉쇄로 순천에서 농성
. 다치바나 무네토라, 시마즈 요시히로 등은 퇴각 개시 후, 순천의 위급함을 알고 구원하러 가던 중 노량해협에서 고전함
. 해상봉쇄가 허술한 틈을 타 고니시 유키나가는 퇴각에 성공하여 부산으로 향함
. 시마즈 요시히로 등도 잔류부대를 수습하여 부산으로 향함
. 다른 부대도 부산에 집결하여 26일까지 철수를 완료
. 1598년 일본군의 철수경로
고난이 극에 달한 서부전선의 퇴각도. 순천의 고니시 군대, 사천왜성의 시마즈 군대 등이 철수를 완료하고 7년에 걸친 전쟁도 그 마지막을 고했다.
. 구로다 나가마사 : 서생포.5천명 / 가토 기요마사 : 울산. 1만명
모리 요시나리 : 부산포. 5천명 / 다치바나 무네토라 : 고성. 7천명
시마즈 요시히로 : 사천. 1만명 / 고니시 유키나가 : 순천. 1만3천명
소 요시토시 : 여수. 1천명 / 이순신 : 고금도. 1만3천2백명으로 노량으로 출정
* 논공행상 일람표
* 선무공신 :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거나 후방을 지원한 공 1등 : 이순신, 권율, 원균 2등 : 신점, 권응수, 김시민, 이정암, 이억기 3등 : 정기원, 권협, 류사원, 고언백, 이광악, 조경, 권준, 이순신, 기효근, 이운룡 |
* 호성공신 : 임진왜란 중 선조의 의주 피난을 수행한 공 1등 : 이항복, 정곤수 2등 : 이후, 이후, 이원익, 윤두수, 심우승, 이호민, 윤근수, 유성룡, 김응남, 이산보, 유근, 이충원, 홍진, 이괵, 류영경, 이유징, 박동량, 심대, 박숭원, 정희번, 이광정, 최흥원, 심충겸, 유자신, 한연, 이기, 이경온, 이경검, 신잡, 안황, 구성 3등 : 정탁, 이헌국, 류희림, 이유중, 임발영, 기효복, 최응숙, 최빈, 여정방, 이응순, 이수곤, 송강, 고희, 강인, 김기문, 최언순, 민희건, 허준, 이연록, 김응수, 오치운, 김봉, 김량보, 안언봉, 박충경, 임우, 김응창, 정한기, 박춘성, 김예정, 김수원, 신응서, 신대용, 김새신, 조귀수, 이공기, 양자검, 백응범, 최윤영 : 일부 생략 |
* 청난공신 : 1596년(선조26) 이몽학의 난을 토벌한 공 1등 : 홍가신 2등 : 박명현, 최호 3등 : 신경행, 임득의 |
* 답사 후기
의령의병박물관은 공부할 내용이 많은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제1전시실은 의령의 역사와 인물에 관한 고고역사실, 의병유물전시실, 영상실로 구성이 되어 있다. 먼저 해설사의 해설을 기다리는 동안 영상실에서 의병장 곽재우를 주제로 한 만화로 만든 영상을 보았다. 이어서 해설사님의 설명이 시작되었는데 공부가 많이 되신 분이구나 싶다.
박물관은 10년 전에 개관을 하였고 박물관의 외양은 곽재우장군의 휘날리는 홍의 자락을 형상화했다는 말씀이다.
붉은 색이 있는데 옷자락은 추상적으로 처리가 되어서 유추해내기가 어렵기는 하다.
충익사는 의병박물관이 있기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고 의병탑이 있다.
의병탑은 양 기둥 사이에 18개의 고리가 디스크처럼 자리하는데 곽재우와 17 의병장군을 상징한다고 했고
디스크는 곽재우 장군이 동네 나무에 북을 매달아 북소리로 사람을 불러모았는데 그 북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양 옆의 기둥은 횃불을 상징.
무언가 그 자리에 있을 때는 의미를 담아서 형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충익사 해설사님이 친절하게 해주신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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