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의령의병박물관 1 : 1 / 7

부실이 2023. 1. 16. 17:09

* 자료집 정면에 수레바퀴모양토기가 있다. 보물 제637호로 전 의령군 대의면 출토

 

* 문화교류의 중심 의령의 가야

교역의 중심지 의령, 독립된 가야국이었다

지금까지 고고학적 조사를 종합하면 의령지역에는 두 개의 정치집단이 좆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의령읍 중리고분군, 중동고분군을 중심으로 하는 서남부 집단과 부림면 경산리고분군, 유곡리고분군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부 집단의 존재다.

역사하계는 의령읍과 부림면 지역을 각각의 집단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임례국과 사이기국(김태식 교수의 학설) 또는 탁순국과 탁기탄(이희준 교수의 학설)이 그것이다.

이들 양 집단은 고령, 함안, 고성, 창녕의 가야세력은 물론 백제, 신라, 왜 등 여러나라와 교류하며 중립적인 외교로 주변 강대세력들의 상호견제 속에서 완충지대로서의 전략적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주변의 강대세력들을 적절히 이용하는 중립적인 외교자세로 교역의 중심지로서 그들의 세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하나의 고분 안에서 다양한 계통의 유물이 한꺼번에 출토되는 특징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의령의 가야는 주변 가야세력들을 넘어 백제, 신라, 왜와도 교역을 했던 독립된 가야국이었던 것이다.

 

*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 (250만 년 ~ 1만 년 전)는 유인원과 갈라져 진화를 시작한 인류가 불을 사용하고,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와 나무나 뼈로 만든 도구를 사용한 시기이다. 한반도에서는 약 75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초기의 도구는 거칠게 가공되었으며 여러 기능을 가진 것이었으나, 점차 다양하고 세분된 기능을 가진 정교한 도구들로 분화`발전되었다. 구석기인들은 사냥과 채집생활을 영위하면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 이동하였으며, 주로 강가나 동굴에서 생활하였다. 의령지역에서는 아직 구석기시대 유적은 확인되고 있지는 않으나 인근의 진주 집현 월평리, 대곡 마진리, 지수 청원리 등지에서 구석기 유적이 확인되거나 유물이 채집되고 있어 의령지역에서도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하겠다.

 

*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기원전 8천 년 ~ 기원전 1천 년)는 빙하기 이후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이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고 정착생활을 시작한 시기였다. 신석기인들은 고기잡이와 사냥, 채집활동을 바탕으로 농경과 목축이 가미된 생활을 영위하였다. 간석기와 뼈 연모는 더욱 효과적으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도구였으며, 토기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하고 음식을 조리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직물이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동물뼈와 뿔`조가비 등을 사용하여 꾸미개를 만들어 몸을 치장하였다. 나아가 중국`일본`연해주 등 주변지역과 필요한 자원과 정보를 교류하였으며, 움집터와 조개더미(패총), 무덤유적을 남겼다. 의령지역은 대의면 마쌍리 유적이 있으며, 마쌍리 유적에서 야외노지 1, 집석 1, 무덤으로 추정되는 적석묘 1기가 발견되었다.

 

* 청동기시대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5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청동기시대는 구리와 아연, 또는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인류가 최초로 금속기를 만들어 사용한 시기로 중국 동북 지방을 비롯한 북방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농업이 발달하면서 낮은 구릉이나 충적지를 중심으로 취락을 형성하여 정착생활을 하였다. 청동기는 주로 무기와 의기를 사용되었고, 실제 용구는 민무늬토기, 석기와 목기, 뼈 도구가 주로 사용되었다. 고인돌, 돌널무덤, 독무덤 등 새로운 무덤이 등장하였고 사회 내부에는 사회적 지위 차이도 생겼다. 의령지역에는 의령읍 서동리 유적을 비롯한 대의면 마쌍리, 정곡면 석곡리`오방리, 가례면 가례리`수성리, 화정면 상정리, 칠곡면 신포리 등 많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존재하고 있다.

 

* 벼농사의 시작

벼는 우리나라에서 주식으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곡물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벼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도 그 존재가 일부 확인되지만 청동기시대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재배되었다. 여주 흔암리와 부여 송국리 주거지에서 탄화미가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울산 검단리 유적의 토기에서도 볍씨가 박힌 흔적이 있어 기원전 6세기 이전에 이미 본격적으로 벼 재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벼농사에 이용된 도구로는 반달모양 돌칼이 수확도구로 사용되었고, 돌보습이나 목제 농구도 다량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벼농사는 중국의 화남지방에서 대륙을 거쳐 들어왔다고 하는 북방설이 지배적이지만 일부는 바닷길을 따라 동남아지역에서 전래 되었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벼농사기술은 일본으로 전래되어 야요이(청동`철기시대)문화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덧무늬토기

덧무늬토기는 토기의 겉면에 진흙 띠를 붙이거나 겉면을 맞잡아 돋게 하여 무늬를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다. 주로 남해안과 동해안 지역에서 출토된다.

 

* 경산리 2호분 출토 말갖춤 복원모형

경산리 2호분은 경산리 고분군 내에 위치한 비교적 중형의 구덩식돌덧널무덤이지만 출토유물에 있어서는 가야고분의 최상위수장급에 해당한다. 즉 왕릉급에서만 드물게 부장되는 청동합을 비롯한 호화로운 말갖춤새 등이 출토되어 경산리2호분 피장자의 신분을 어느 정도 뒷받침 해주고 있다. 경산리2호 출토 말갖춤새는 이 시기 가야고분에서는 유례가 없는 극히 호화로운 의장용마구로 이러한 마구들은 가야지역보다 백제지역과 일본열도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경산리 고분집단의 대외교류관계를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초기철기시대

청동기시대가 끝나는 무렵인 기원전 3세기부터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는 철기의 등장, 점토대토기는 새로운 제도기술에 의한 와질토기의 생산, 철제농기구와 무기의 생산, 사회분화에 의한 계급의 발생을 특징으로 하며, 신라`백제`가야의 고대국가가 태동하는 모태가 된다.

의령지역의 초기철기시대 유적으로는 가례 운암리 유적이 있으며, 운암리 유적은 칠골~가례간 국도 건설구간에서 확인된 유적으로 2007년 우리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하였다. 조사결과 초기철기시대 수혈주거지 6, 수혈유구 6기 등의 생활유구와 옹관묘 1, 석관묘 2기 등 무덤 유구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원형점토대토기,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 두형토기 대각부편 등이 출토되었다.

 

* 가야시대

가야는 562년 멸망할 때까지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한 연맹세력으로 결국 신라에 병합되었다. 가야는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중국, 일본 등과 활발히 교역하여 선진문화와 부를 축적함으로써 강력한 군사집단을 형성하였다. 가야의 연맹세력은 대체로 5세기후반을 경계로 전기와 중기로 구분되는데, 전기에는 낙동강 하류 지역의 금관가야가, 후기에는 낙동강 서부의 산악지대에 거점을 둔 고령의 대가야가 연맹의 맹주로서 군림하였다.

고령의 대가야를 맹주국으로 한 가야연맹세력은 합천, 함양, 산청, 남원 등 지리산 주변과 진주, 사천, 고성, 의령 그리고 섬진강유역에 이르는 서부경남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세력판도를 형성하였다.

대가야연맹은 전반적으로 유사한 문화권을 형성하면서도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가진 연맹의 각 소국들마다 고분의 입지, 덧널의 배치방법, 순장법, 부장철기, 마구류, 갑옷, 그리고 토기의 조형성 등에서 독특한 문화적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 가야의 말갖춤(마구) 명칭

마구란 말의 뛰어난 기동성과 강한 힘을 효과적으로 부리기 위한 도구

말을 다루어 부리기 위한 제어용 마구 : 재갈,

말에 올라 앉아 신체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안정용 마구 : 안장, 말발걸이

말을 장식하는 장식용 마구 : 말띠꾸미개, 말띠드리개, 말방울

적의 화살이나 창으로부터 말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용 마구 : 말투구, 말갑옷

우리나라에서 마구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부터이나 사람이 직접 말을 타기 위한 기마용 마구가 완전히 갖추어지게 된 것은 삼국시대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에서는 각 국의 특성에 맞는 여러 종류의 마구가 개발되어 사용되었다.

가야의 마구는 고구려와 북방지역 기마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제작되었지만 점차 독자적인 마구를 개발하여 금관가야와 대가야,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가야의 마구는 실용성이 강한 점이 특징이나 5세기 후반부터는 신라`백제 등의 영향을 받아서 화려한 무늬와 금동`은 등으로 호화롭게 장식된 말갖춤이 많아진다.

 

* 가야의 무기

무기란 전쟁에 사용되는 도구의 총칭으로, 가야의 무기는 기능과 용도에 따라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로 구분된다.

공격용 무기는 원거리무기 : , 화살, 석궁, 투창

근거리 무기 : , , , , 도끼가 있다.

방어용 무기는 적의 활이나 창, 칼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갑옷과 투구, 방패가 대표적이다. 갑옷은 폭이 넓은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보병용의 판갑옷과 물고기 비늘모양의 조그만 철판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든 기병용의 비늘갑옷이 사용되었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도구로, 반구형의 복발에 세로로 긴 철판을 가죽끈이나 못으로 결합하여 만든 종장판주, 투구 앞쪽에 반원형의 챙을 붙인 차양주, 철모와 비슷한 충각부주, 크고 작은 철판을 엮어서 만든 소찰주 등이 있다.

이러한 무기는 가야가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틈바구니에서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발전싴 나간 원동력으로, 가야의 우수한 기술과 발전수준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 의령지역의 가야문화

가야의 권역에 있어 의령지역은 지리적 입지나 환경에 있어 주변 가야 즉 고령의 대가야, 창녕의 비화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 등 주변 강대세력의 중간에 위치하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의령지역의 가야집단은 5세기 전반까지는 지역색이 인정되는 김해`부산지역을 제외한 범 가야지역의 고식도질토기 문화권에 속하다가 5세기 후반에 이르면 남강 수계와 낙동강 수계를 기점으로 각각 서남부 집단(의령읍 중심)과 동북부 집단(부림면 중심)의 양대 문화권으로 나뉘어진다. 이러한 양 집단은 강력한 정치체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문화까지는 꽃피우지 못하였지만 주변 강대세력들의 견제와 완충지로서의 지리적 이점을 십분 활용하여 전략적으로 체제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의령지역이 제 가야세력의 중심에 위치하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의령집단의 강력한 정치체의 형성 및 독자적 문화를 확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의령지역의 가야집단이 고분의 위계에 있어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을 가진 집단으로 성장 발전하지는 못하였지만 어느 한 주변의 강대세력에 예속이나 복속되지 않고 주변 강대세력을 적절히 이용하는 중립적인 외교자세로 다양한 주변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나름의 체제를 유지하였다고 보인다. 이러한 의령지역의 양 가야집단은 562년 신라에 의한 대가야의 복속이 이루어질 무렵 거의 같은 시기에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 가야의 토기

3세기 후엽에서 4세기 초 토기생산 기술에 혁신이 일어나는데 1100 ~1200도의 고온에서 환원염 소성하여 흡수성이 거의 없는 도질토기의 출현이 그것이다. 삼한의 토기문화가 와질토기 중심이었다면 가야의 토기문화는 도질토기 중심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도질토기는 처음에는 둥근 밑 항아리, 귀달린 항아리 등의 단지류만 제작되다가 4세기대 이후부터 점차 모든 기종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면서 세련된 곡선미를 특징으로 하는 가야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가야토기의 제작 기술은 일본에 전해져 일본 고분시대 토기인 스에키(한반도의 백제와 가야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만들어진 회청색 토기로, 기존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토기들보다 단단함) 의 발생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 가야의 지역 양식

가야토기는 기원후 3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에 출현하며, 주로 기원후 4세기 대까지는 신라`가야지역의 지역색이 나타나지 않는 공통양식기로 고식도질토기라 부른다. 그러나 기원후 5세기가 되면 뚜렷한 지역적 특색을 지니면서 가야와 신라토기로 구분된다. 즉 남가라(김해)가 있었던 김해`부산지역, 가라국(대가야)가 있었던 고령과 그 주변지역, 안라국(아라가야)이 있었던 함안과 그 주변지역, 그리고 고자국(소가야)으로 비정되는 고성`사천`진주지역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각 가야토기의 지역색은 가야집단의 권역과 지배범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6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신라세력의 급속한 팽창으로 가야토기는 독자성을 잃고 신라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라후기양식토기로 바뀌어 간다.

 

* 가야후기 국제교역의 중심 의령

인류문명은 그 태동 이래 꾸준히 외부와의 접촉과 교류를 통해 발전하고 성장해왔다. 이는 한반도 집단도 예외는 아니며 특히 한반도 남부집단은 일본열도와 선사시대 이래 꾸준히 교류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러한 교루는 대부분 유물을 중심으로 한 생활과 직접 연관된 것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5세기 후반부터는 사후세계와 관련된 수용에 있어 다수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묘제에까지 확대되어 나타난다.

한반도 남부 가야집단의 경우 전기는 낙동강하류의 김해집단을 중심으로 철을 매개로 한 왜와 낙랑, 대방 등과 국제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나, AD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김해집단이 와해되면서 후기는 교역의 중심지가 경남해안의 소가야집단과 내륙의 의령집단으로 그 장소와 주체가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근거로는 당시 축조된 고분의 모습과 출토유물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고성지역의 경우 송학동 1B-1호분 등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으며, 의령지역의 경우 운곡리 1호분의 동장형 석실구조, 석실 내 돌선반 시설 그리고 경산리 1호분의 석실내 석관, 경산리 2호분 출토 왜계 마구류 등 왜계 문물과 각 고분에서 공반되어 출토되는 대가야계 유물, 소가야계 유물, 아라가야계 유물, 백제계 유물, 신라후기 양식유물 등 주변지역과의 다양한 교류가 이루어졌음이 무덤의 형태와 출토유물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즉 의령지역은 남강과 낙동강 수계를 이용하여 내륙의 제 가야집단과 낙동강 건너 창녕의 신라집단과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이며 왜와 주변 가야집단 및 신라와의 중개무역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창녕 송현동 7호분의 녹나무계 관은 왜계요소로 의령집단의 중계로 왜와 창녕의 신라집단의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성의 소가야권과 의령지역에 한정하여 묘제에 있어 왜계요소 고분이 나타난다는 점은 당시 양지역의 제지수장층이 왜와의 교섭에 적극적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다양한 지역의 유물이 공반되어 출토된다는 것은 다양한 지역과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가야후기 의령지역은 바다를 낀 고성지역과 더불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국제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 의령 경산리 1호분

경산리 1호분은 굴식돌방무덤이다. 경산리 1호분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일대의 다른 굴식돌방무덤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석실내부에 거대한 돌널을 후벽과 나란히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석실 내에 거대한 돌널을 안치한 예는 우리나라에서는 광주 월계동 1호분과 경산리 1호분 예 밖에 없다. 그러나 가까운 일본에서는 석실 내에 다양한 형태의 돌널이 30여기 발견되고 있다. 경산리 1호분에 나타나는 이러한 왜계 요소는 운곡리 1호분의 왜계 요소와 더불어 왜와의 교류에 의한 결과로 추정된다.

 

* 통일신라기 의령의 유적과 유물

신라는 6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정치제도를 받아들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안으로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밖으로는 활발한 정복사업을 도모하여 마침내 668년에 삼국을 통일하였다. 불교는 통일국가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어 크게 발전하였고, 신라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국에는 수많은 사찰과 탑, 불상이 조성되었고, 불교의 전래와 함께 사후관념도 바뀌어 장례를 치름에 있어 껴묻거리의 최소화와 가족장으로 변화하며, 화장묘가 크게 유행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의령은 신문왕5(685)에 장함현이라 불리었고, 경덕왕 16(757)에 의령현으로 이름이 바뀌어 함안군의 영현이 되었다. 신반(부림면)지방은 의상현으로 바뀌어 강양군(합천)의 영현이 되었다.

 

* 고려시대 의령의 자취

후삼국으로 분열된 통일신라 말기의 상황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태조 19. 936) 우리 역사상 두 번째의 통일왕조가 된 고려는 12세기에 들어 특유의 청자 문화를 꽃피우는 등 화려한 귀족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고려인들은 자신의 왕을 천자로 부르며 천자국에 맞는 정부 체제를 운영하였다. 왕을 천자`황제 등으로, 왕실을 황가로, 왕성을 황성으로 부르고, 왕의 명령을 제 또는 칙이라 한 것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송이나 거란`금 등에 조공하며 사대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외교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고려가 천자의 나라를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후삼국의 통일을 이루었다는 높은 자긍심과 함께, 당시 다원적 국제 질서 속에서 고려 스스로 또 다른 천하의 중심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시대의 의령은 현종9(1018)에 의령현이 진주목의 영현이 되었으며, 공양왕2(1390)에 감무를 두었다. 의상현은 고려초 신번현으로 개칭하였으며, 공양왕3(1391)에 의령현의 영현이 되었다.

 

* 조선시대 의령

14세기 후반 고려 내부의 폐단이 심화되고 대외적으로 원`명이 교체되는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되었다. 신진사대부와 신흥 무장 세력을 주축으로 건국된 조선은 성리학 사상에 따라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정치를 지향하였다. 조선의 통치체제는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근거하여 국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로 정비되었다. 이는 문벌귀족을 중심으로 한 고려와는 다른 조선적 특색을 지닌 통치 질서였다.

조선시대 의령은 국가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함과 동시에 불교를 대신해 유교사상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함에 따른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유교 문화가 깊게 자리하게 된다. 향교, 서원, 제실, 정려 등은 모두 유교문화의 산물이다.

 

* 떡살

고려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떡살은 누르는 면에 음각 혹은 양각의 문양이 있어서 절편에 찍으면 문양이 아름답게 남는다. 사용하는 방법은 적절한 크기로 잘라낸 떡에 물기를 묻혀서 떡살로 도장을 찍듯이 누른다.

떡살은 재질에 따라 나무떡살과 자기떡살로 나뉜다.

떡살의 문양은 주로 부귀와 수복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는 길상 무늬를 비롯하여 장수와 해로를 뜻하는 십장생, 태극무늬, 빗살 등의 기하학적 무늬, 만자 등의 불교적인 무늬와 꽃`수레바퀴무늬 등 아주 다양하다. 떡살의 무늬는 일반적으로 가문에 따라 독특한 문양이 정해져 있었다.

 

* 명기

명기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내세에서도 복락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마음에 무덤에 함께 묻는 그릇을 말한다. 조선시대 명기는 소꿉 장난감처럼 축소된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그 종류로는 실생활에서 사용되던 사발, 접시, 합 등의 그릇과 인물 그리고 말, 당나귀 등의 동물이 있다.

 

* 분청사기인화삼가인수부명발

분청사기인화삼가인수부명발은 인수부라는 중앙관사명이 새겨진 공납자기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분청사기에 관사명, 지명 +관사명이 나타나는 것은 태종 17(1417)에 자기를 수납하는 해당관사의 이름을 새기도록 한 조처와 세종 3(1421)에 자기를 만드는 장인의 이름을 새기도록 한 조치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 확인되는 유물에는 장인의 이름대신 지명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이러한 조처의 배경이 그릇의 질을 책임지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즉 지명은 해당관사에 자기를 공납하는 지방의 공납실무책임자인 지방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공납용 자기의 제작지역을 나타내는 지명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공납용 자기로 관사명이 새겨진 그릇 중 인수부와 장흥고명 그릇의 제작지는 주로 경상도에 밀집되어 나타나며,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경상남도지역에는 의령, 삼가, 진주를 비롯한 8개소 11개의 자기소가 있는 것으로 전한다.

 

* 조선백자

조선시대 도자기는 분청사기와 백자로 대표된다. 분청사기는 그 화려했던 생명이 비교적 짧았던 반면, 백자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 절제와 순수미가 돋보이는 백자는 유교적 이념을 구현하고자 한 조선왕조와 사대부층의 사상과 생활에 적합하였으므로 그 안에 조선의 문화가 담겨질 수 있었다.

백자는 경기도 광주에 설치되었던 왕실과 중앙관청용 백자 제작을 전담하였던 사옹원과 그 하급 관청인 분원 즉 관요의 설치와 그 운영에 따라 발전하고 쇠퇴하였다.

 

* 고려자기

가마터와 유적에서 출토된 자료들로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말에서 10세기 초부터는 자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1세기경 강진과 부안 두 지역을 중심으로 양질의 청자가 제작되었으며

12세기부터는 청자 제작이 절정기에 도달한다. 비색 청자 유약은 반투명하며 더불어 고려 청자의 중요한 특징이 되고 있다.

12세기 후반 상감 청자가 유행하면서부터 청자의 제작 경향은 은은한 비색 유약과 조형미를 추구하기 보다는 맑고 투명한 유약을 통해 생생히 드러나는 상감무늬의 흥미로운 모습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어 간다. 정교했던 상감무늬와 유려하고 절제된 그릇의 형태.

13세기 원나라와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고려청자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고 14세기 남해안의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강진과 부안의 장인들이 내륙을 피난하면서 청자의 질을 더욱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고려 말의 청자의 퇴락은 조선시대로 이어져 분청사기의 모태가 되었다.

 

* 가야금 : 우륵의 탄생지를 의령으로도 보는 설

가야금은 6세기경 가야에서 탄생한 악기이다. 6세기 이전의 악기유물과 가야금장식 토우 등을 통해 가야금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현악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악지]에는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고 악사 우륵이 가실왕의 명을 받아 가야금을 위한 12곡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은 가실왕이 전래의 고유 현악기와 당나라의 쟁을 참고하여 새로운 형태의 가야금을 만들었음을 말해준다.

가야가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우륵은 550년경에 신라로 망명하였고, 신라 진흥왕의 후원을 받아 신라의 세 명의 제자인 계고, 법지, 만덕에게 각각 가야금, 노래, 춤을 가르쳤다. 이후 신라에서는 이 음악을 대악으로 삼았다. 일본의 청정원에는 오늘날 정악가야금 형태의 신라금이 전해져 오고 있다.

가야금은 정악가야금과 산조가야금 두 가지가 있다. 정악가야금은 우륵이 연주한 전통가야금으로 비교적 느리고 단아한 음악 연주에 맞아 음색 또한 부드럽고 깊은 울림을 낸다. 산조가야금은 19세기말 민속악의 연주에 맞도록 기존 가야금보다 음역이 높고 빠른 가락들을 연주하기 편하게 개량한 가야금으로 남도 판소리와 민요의 영향을 받아 산조라는 새로운 음악 양식을 탄생시켰다.

 

* 백산 안희제

백산 안희제 선생은 1885년 의령군 부림면 입산 마을에서 태어나 조국의 근대화운동에 앞장섰던 사업가이자 정복운동에 헌신했던 애국지사이다. 근대 신교육을 받은 선생은 근대학교 설립운동에 착수하여 부산과 의령 등지에서 여러 학교를 세우는 한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에도 힘썼다.

또한 선생은 만주와 중국내에서 벌어지는 무장 항일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려는 노력을 가장 활발하게 펼쳤던 분으로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상해임시 정부에 독립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리고 3`1운동에도 헌신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은 물론 기미육영회를 조직하여 청년교육에 앞장섰으며, 중외일보를 인수하여 민족언론 활동에도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1942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19438월 향년 59세로 생을 마감.

 

* 의령지역의 전적 문화재

전적 문화재란 넓게는 문자나 기호 등에 의해 전달되는 모든 기록정보를 말하며, 좁게는 기록정보 가운데 각 학문분야에 있어 학술적 혹은 예술적 가치가 있는 기록자료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이래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많은 전적문화재들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이는 전적, 고문서, 서적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적은 책을 의미하는데 직접 붓으로 써서 역은 사본과 목판 및 활자로 찍어서 만든 인쇄본 두 가지로 분류된다. 일반적으로 사본은 고본과 전사본, 사경, 일기 등으로 나누어지며, 인쇄본은 목판본과 활자본으로 구분한다.

고문서는 일정한 목적을 표현하기 위해 전달된 글과 도장, 수결이 담겨져 있는 것을 말하며, 공문서, 사문서, 외교문서 등이 이에 해당된다.

서적은 필자가 직접 글로서 예술과 사상을 표현한 것으로 서화, 시문, 서간 등이 포함된다.

의령지역은 일찍부터 한지 산업이 발달하면서 전적문화재 생산의 기반이 용이하였으며,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미수 허목 등 당대 최고 유학자들과의 인연과 지역 유림의 활발한 활동으로 많은 전적문화재들이 생산되고 보존되어 있다.

 

* 답사후기

의령의병박물관의 자료집은 '의령의 가야'라는 큰 주제어가 있다.

박물관 이름은 의병박물관인데 박물관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커다란 분야 중에 가야권에 속해 있는 의령인 것 같다.

의령은 가야권에 둘러싸여 있다. 소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비화가야 등

실제로 많은 고분들이 있고 고분들에서 유물이 나오기는 하는데 가야시대 의령의 위상을 내세울만한 유물이 아직은 없다.

그래서 6가야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앞으로 계속 발굴작업은 이어질테니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의병박물관으로서의 의령은 의병장 곽재우의 존재감만으로도 충분히 이름을 떠올린다.

그래서 의병유물전시실의 자료는 설명이 자세하게 잘 되어 있다. 박물관 주변 환경은 접근하기가 좋은 곳이다.

큰 하천이 있어서 여름에는 물놀이, 겨울에는 썰매타기 등 실제로 어린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썰매타는 풍경을 보았다.

가까이 있는 정암진전투의 장소 정암진도 보았다. 발이  셋 있는 솥의 형상의 바위라고 솥바위, 그래서 부자바위라는 이름까지 유추하는 정암이다.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알게 되고 많이 보게 된 박물관 답사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