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청도박물관 12 / 25

부실이 2022. 12. 29. 23:30

* 청도박물관 : 과거를 담아 미래를 열다

청도박물관은 폐교였던 구 칠곡초등학교를 새단장하여 20131214일 개관.

 

 

* 고고역사관

청도군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시장으로 청도지역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부터 삼국시대굽다리접시, 고려시대 청자병 등 지역에서 출토된 고고유물과 조선시대 인쇄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목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 청자상감국화문팔각접시 : 고려시대

: 돌칼 : 청동기시대

: 굽다리 접시 : 5~6세기 경

: 뿔잔 : 5~6세기 경

 

* 이서국 이야기

고고역사관에서는 이서국이야기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습니다.

이서국은 원삼국시대 청도지역에 존재하였던 작은 나라인데, ‘삼국사기삼국유사를 통해서 위치와 존속시기 등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가 가야로 세력을 확장해 가던 시기에 신라에 복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유례왕 297년에 이서국이 금성(경주)을 공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한때는 신라와 대립할 정도의 국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현재까지 이서국의 왕릉이라 할 만한 대형 고분군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초기철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청도 서쪽지역 여러 곳에서 발굴되고 있어 앞으로 새로운 성과가 기대됩니다.

 

* 민속관

청도의 전통 생활문화와 민속품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근대 이전 청도사람들의 삶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은 유물들과 청도지역의 민속문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시유물 대부분은 청도사람들의 기증`기탁유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문갑 : 조선시대

: 배틀 : 1960년대

 

* 알림이센터

,, 인심이 좋아 삼청의 고장으로 불리는 청도지역을 소개하는 곳으로 청도의 관광지, 문화재, 유적지 그리고 특산품 등을 알리는 홍보관입니다.

 

* 신석기시대 청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다

청도에서는 아직 구석기 시대 유물이 알려진 바 없다. 다만 밀양 고례리유적에서 후기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청도에도 후기구석기시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청도에서 확인된 가장 이른 선사문화는 8천년 전 오진리 바위그늘 유적으로 신석기 시대 문화층에 해당한다. 오진리 바위그늘 유적 외에도 빗살무늬토기와 석기를 사용한 사람들의 유적이 진라리`신당리에서 발굴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바다나 강가에서 고기잡이와 사냥, 야생 열매의 채집 등에 의존하는 정착생활을 하다가 점차적으로 농경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석기시대 청도사람들은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청도천과 동창천의 물길을 통해 남해안과 내륙의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신석기 문화를 지속적으로 형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

빗살무늬토기는 기원전 약 4천년 전부터 1천년 사이, 신석기인들이 사용한 그릇이다. 그릇 겉면에 빗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문양을 새겨 빗살무늬토리라 한다. 빗살무늬토기의 밑이 뾰족한 것은 강가와 바닷가 모래에 반즘 묻어놓고 편리하게 세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청동기 고인돌 문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으로 우리나라를 주된 분포지로 한다. 땅 위에 넓적한 돌판으로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을 얹어둔 형식과, 지하에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을 얹은 형식으로 구분된다. 고인돌은 형태에 따라 탁자식`바둑판식`개석식 등으로 분류된다. 청도의 고인돌 유적은 청도천을 중심으로 범곡리`송북리`소라리`진라리`무등리`원정리 등 대규모의 고인돌 무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고인돌 무리들로 청동기시대 후기 청도천 중류지역에 이서국과 같은 읍락국가가 성립될 수 있는 고고학적 기반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민무늬토기(무문토기)

민무늬토기란 문양이 없는 적갈색토기를 말한다. 토기 윗부분에 구멍이나 빗금무늬 등 단순한 문양이 있는 토기와 적색`흑색 등의 간토기 등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에 만들어졌던 모든 토기를 포괄한다. 지금까지 청도에는 진라리`송서리`신당리`예리`화리 유적 등에서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 붉은간토기

붉은간토기는 고운 진흙으로 그릇을 빚은 뒤 산화철을 발라 문지른 뒤 구워 붉게 만든 토기이다. 그릇의 형태는 둥근 몸체에 입주위가 밖으로 바라진 짧은 목이 달려 있는 항아리와 밑이 편평하고 몸체가 갸름하여 밖으로 바라진 입주위를 가진 항아리가 있다. 한반도에서는 주로 고인돌이나 돌널무덤 껴묻거리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되어왔으나, 주거지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실생활에서 특수한 용도로도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 이서국의 뿌리, 청도의 청동기시대 문화

청도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400년 무렵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벼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농경생활이 시작되었고, 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마을 가장자리에 깊은 도랑과 나무울타리를 두른 규모가 큰 마을들도 생겨났다. 이러한 생산력의 증가에 따라 사회내부에서는 신분차이가 발생하게 되었고, 지배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청도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신당리`화리`갈지리`진라리`서상리`유호리`사촌리`오진리 등이 있으며,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생활 터전 때문에 주로 동창천과 청도천을 따라 형성된 선상지와 충적대지에 분포한다.

당시의 집자리는 대개 반지하식의 움집으로 평면형태가 장방형`세장방형`말각방형`원형 등 다양하며 내부에는 기둥자리와 화덕자리, 저장구덩이 등이 남아 있어 집의 구조와 주거생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 곡식저장 등을 위해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고상식건물, 연장이나 도구를 만들던 공방지, 토기를 굽던 소성유구 등이 함께 확인된다.

무덤은 지석묘 석관묘가 주류를 이루고 지금까지 청도지역에서 알려진 지석묘는 63개소 정도로 땅위에 보이는 상석만 하더라도 400여기에 달해 영남지역의 지석묘 최대 밀집지로 주목받고 있다.

의례유적으로는 비파모양 동검이 나온 예전리유적, 그리고 순지리 순늪마을 북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던 선돌도 당시의 전통과 관습을 알려주는 표식물로 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출토유물로는 민무늬토기와 간돌검, 돌창, 돌도끼, 반달돌칼을 비롯하여 조리용구인 갈돌과 갈판, 공이가 있으며, 석기를 만들 때 받쳤던 모룻돌과 석기 제작을 위한 몸돌 및 석재도 나온다. 특히 석기의 제작`사용과 관련하여 모든 유적에서 많은 숫돌이 확인되었다.

청도에 분포하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와 마을 유적은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를 통해 볼 때 수량이나 규모에 있어서 영남의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로 보아 청동기시대에 유력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들 유력 집단이 이서국의 성립과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청도의 청동기시대 집자리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대표적인 집자리로는 동굴과 움집이 있다. 청도의 청동기시대 집으로는 주로 바닥이 네모난 형태의 움집의 집자리로 진라리`송읍리`신당리 등에서 발굴되었다. 특히 진라리 생활유적에서는 대형집자리를 중심으로 소형집자리들이 주변에 배치하고 있는데, 이는 집자리 위치 선정에 있어 일정한 계층성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반달돌칼

반달돌칼은 곡식의이삭을 따는데 사용한 수확용 도구이다. 돌칼 가운데 뚫려있는 구멍에 끈을 끼워 고리를 만들고, 고리에 손을 고정시켜 사용하였다. 반달돌칼은 신석기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청동기시대에는 벼농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 청도 신당리 고인돌 돌널

이 돌널은 각남면 신당리에서 옮겨온 것으로 청동기 시대 고인돌 유적으로 추정된다. 돌널의 규모는 길이 177cm, 50cm, 깊이 30cm 내외이며, 발견 당시 고인돌의 덮개돌은 없어졌으나 돌널은 온전하였고, 내부에서 돌칼 1점과 돌화살촉 여러 점이 출토되었다. 유적의 돌널 바닥돌 위에서 부러진 돌 화살촉의 앞부분이 피장자의 머리 부분에서 확인되고 바닥돌 아래에 묻힌 화살촉 편과 서로 붙은 것이었기 때문에 머리에 돌화살촉을 맞고 죽은 전사의 무덤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 청동기시대의 마을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와 몽골 등지로부터 퉁구스계에 속하는 새로운 종족이 한반도로 진출하여 청동기 문화를 전파하면서 정착하게 되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강이나 바닷가에 인접한 낮은 구릉이나 평지에 움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농경무늬 청동기 문양에서 보듯이 괭이나 따비를 이용한 밭농사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주 흔암리와 부여 송국리 등에서는 탄화미가 출토되었고, 논산 마전리와 울산 옥현 등에서 확인된 논 유적을 통해서 벼농사를 지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요 도구로는 청동제 의기 및 무기, 생산을 위한 간석기(마제석기), 다양한 종류의 무늬 없는 토기(무문토기) 등이 제작`사용되었다.

본격적인 농경의 시작으로 생산력이 증가되고 사회 내부에 신분적 차이가 발생하였다. 이는 이 시기에 많이 만들어진 무덤형식인 고인돌과 돌널무덤(석관묘), 독무덤(옹관묘)의 규모나 부장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전시된 청동기시대 마을 모형은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이나 유물 등을 토대로 하여 당시의 마을생활 모습을 추정 복원한 것이다.

 

* 청도의 비파형동검과 간돌검

비파형동검은 전체적인 형태가 비파모양을 한 동검이라는 것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요령식동검 혹은 고조선식동검으로도 부른다. 청도에서는 아직 발굴된 비파형동검 자료는 없으나, 예전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비파형동검이 있다.

간돌검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석기로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에서 많이 출토된다. 청도 진라리에서 출토된 간돌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것으로 길이가 67cm에 이른다. 지금까지 청도에서는 진라리 외에도 화리`신당리`대천리 등에서 많은 수량의 간돌검이 출토되었다.

 

* 청동기시대, 도구를 사용하다

인류가 도구를 사용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이지만, 청도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다양한 도구들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청동기시대는 청동제품이 출토되지만 실생활에서 사용되었던 도구는 주로 돌로 만든 석제품이다. 도토리 등 열매를 분쇄할 때 사용한 갈돌과 갈판, 옥을 마연할 때 사용한 옥마지석 등 여러 석제품들이 출토되고 있다.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로 청동기시대 도구의 사용과 발달, 문화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이서국 사람들의 무덤은 어떤 모습일까? : 경산 신대리 유적

이서국은 원삼국시대부터 4세기경까지 존속한 나라로서, 청도에서 당시 무덤이 발굴된 자료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이서국과 함께 존재했던 이웃나라 압독국의 옛터인 경산의 신대리와 임당동유적의 발굴 자료를 통해 이서국의 무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였던 돌널무덤은 원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널무덤으로 구조가 바뀌게 된다. 널무덤은 직사각형의 무덤 가운데 판재나 통나무로 된 널을 설치하고 그 주위에 껴묻거리를 넣어두는 구조이다. 껴묻거리는 이 시기의 대표 토기인 주머니호와 쇠뿔손잡이단지`청동검`청동거울`호랑이모양 허리띠고리`구슬 등이 있다.

 

* 이서국 사람들의 집자리

이서국의 옛터인 신당리와 갈지리에서 원삼국시대의 움집이 발굴되었다. 신당리유적은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함께 움집 10여기가 조사되었고, 움집은 이서국 시기의 초기 집자리에 해당되는 둥근 형태로 갈지리유적에 비해 시기상 앞선다.

갈지리유적은 원삼국시대 움집 7동과 삼국시대 건물지 5동이 조사되었고, 움집은 네모형태이다.

발굴된 이서국 집자리 자료는 영남지역의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비추어 볼 때, 기원후 1~3세기의 원삼국시대에 존재했던 소국들의 생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서국의 움집과 출토유물은 인접한 압독국의 유적으로 알려진 경산 임당유적과 대구 매호동유적에서도 동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앞으로의 비교 연구가 주목된다.

 

* 이서국 이야기, 역사가 되다

고대 역사서에 남겨진 이서국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여길 수도 있으나 자세히 보면 그 속에는 이서국의 역사가 숨어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이서국의 고지가 청도라는 사실은 삼국유사의 기사에 보이는 금오촌 영미사가 운문사에 납전한 기사와 폐성(이서산성)에서 신라군과 이서국 군사의 전쟁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이서국의 옛터는 청도 산서지방은 화양읍, 이서면 일대로 알려져 있으며, 이서국의 도읍지는 청도군 화양읍과 이서면의 경계가 되는 토평리의 백곡마을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백곡토성과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그리 멀지않은 곳에 이서산성(폐성)이 자리 잡아 전초기지 역할을 해주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서국은 3세기경에 금성을 공격할 정도의 유력 집단으로서 역사에 그 실체를 보여주고 있으며, 신라의 죽엽군 설화에 보이듯이 이서국의 세력 규모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이서국의 존속 시기는 삼한(`변한)시대의 기원전후의 시기로부터 4세기까지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4세기까지 아직 청도에 신라`가야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고식도질토기가 소라리, 봉기리 등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5세기 이후에 신라토기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점으로 보아 이서국은 5세기 이전까지 그 세력이 유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도의 이서국은 삼한 소국의 하나로서 역사기록에 어렴풋이 남아있지만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청도천을 따라 열을 지어 분포하고 대규모 마을유적에서 무문토기와 석검들이 발굴되는 모습을 볼 때 청도에는 오래 전부터 이서국의기반이 구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청도의 삼국시대 고분

청도에는 산서의 청도천과 산동의 동창천 지류가 뻗어있는 골짜기 곳곳에 삼국시대 고분군이 분포한다. 고분들은 대부분 청도천과 동창천의 지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지 끝부분이나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고분의 구조는 이서국 시기에 해당되는 널무덤과 덧널무덤에서 신라시대의 돌널무덤과 돌방무덤으로 이어져 발전하고 있다.

청도에서 이서국 시기의 널무덤이 아직 발굴된 바 없으나 이 시기의 와질토기가 지표에서 채집되는 점과 경산 임당유적과 밀양 교동유적의 사례로 보아 앞으로 발굴될 가능성이 높다. 4세기의 덧널무덤은 봉기리유적에서 발굴되었고, 화양읍 소라리에서 노형토기 등의 유물이 채집된 것으로 보아 소라리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널무덤이 분포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고분유적은 성곡리, 봉기리, 원정리, 순지리고분군 등이 있다. 청도의 삼국시대 고분은 주변의 창녕, 경산과는 달리 대규모의 고총구분군이 분포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 삼국시대의 토기의 변화

청도 삼국시대 무덤의 구조가 이서국 시기의 널무덤과 덧널무덤에서 신라시대의 돌널무덤과 돌방무덤으로 이어져 발전하고 있듯이 토기에 있어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난다.

이서국 시기의 토기는 3세기대 영남지역의 일반적인 토기문화와 같이 쇠뿔손잡이단지와 주머니호가 대표적이다. 이후 4세기 후반대에는 굽구멍이 일렬로 뚫린 굽다리접시가 등장한다. 이 시기까지 청도의 토기문화는 가야계 토기문화와 신라계 토기문화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양상을 보여준다. 5세기 이후부터 굽구멍이 일렬에서 상하가 엇갈리게 뚫린 새로운 형식의 굽다리접시가 출현한다. 이들 토기는 신라토기의 제작기술을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6세기부터는 굽다리가 짧은 굽다리접시가 나타나며 청도의 토기문화는 신라토기와 동일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 무덤에서 만나는 청도의 고려문화 : 대전리 고려시대 무덤유적

청도군 이서면 대전리에서 그레이스 컨트리클럽을 조성하던 중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대규모의 무덤유적이 확인되었다. 이 중 출토유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토광묘는 약100여기 정도이다.

무덤 내부에서는 다수의 부장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용도로는 발, 접시, 청동 숟가락, 젓가락 등과 같은 식생활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되었고 청동거울, 동곳, 반지 등 생활용 유물과 철편과 같은 제의적 유물도 보인다.

무덤에 묻힌 유물들은 대체로 생활유물로서 무덤 주인공이 평소 사용하였던 물품들이다. 이를 통해 죽어서 만날 저 세상에서도 이 세상과 같은 삶을 누린다고 믿었던 고려시대 사람들의 내세관을 엿볼 수 있다.

 

* 청도에서 꽃 핀 조선의 목판문화

목판은 나무판에 글씨를 뒤집어 새긴 후 표면에 먹을 묻혀 내용을 찌어내던 판목을 말한다. 먹을 묻혀 내용을 찍어내던 판목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서적의 간행을 위한 목판제작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서적이 널리 유통되어 지식정보를 대중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각 서원이나 문중에서는 교육자료의 간행과 특히 선조와 선현의 선양사업을 위한 문집간행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청도의 서원이나 문중에도 많은 문집들이 간행되어 보관되고 있는데 자계서원의 [탁영선생문집], 남강서원의 [국담집], 명동서사의 [병재선생문집] 등이 목판으로 남아 있다. 그 중 밀양박씨 문중에서 간행한 배자예부운략판목과 해동속소학판목, 14의사록판목은 자료적 가치가 높아 문화재로 지정되어 선암서원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청도의 선암서원이 한국학의 보고라는 명성을 가지게 되었다.

 

* 자계서원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탁영 김일손(1464~1498)과 조부이신 절효 김극일, 장조카 삼족당 김대유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이곳은 원래 탁영선생이 공부하던 운계정사였으나 선생이 무오사화 때 화를 입고 서거하신 후 중종 13(1518)에 청도지역의 유생들이 뜻을 모아 사당으로 바꾸고 자계사라 하고 탁영선생을 제향해 왔다. 선생이 무오사화로 서거하실 때 서원 앞 시냇물이 붉은 색으로 바뀐 이변이 있어 자계라 한 것이다.

선조11(1578)에 사당의 중수와 함께 학사, 곳간 등이 새로이 세워져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자계서원이 되었으며, 1615(광해7)에 절효 김극일, 삼족당 김대유를 병향하였고, 현종2(1661)에는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8(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4년에 사림과 후손들의 협의에 의하여 김용희(탁영14세손)의 사재로 복원되었다. 1975년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서원에는 사당인 존덕사가 있으며 강당인 보인당은 정면 5, 측면 2칸의고주형 집이며, 겹처마의 팔작지붕이고 활주가 있다. 영귀루와 보인당 사이에 유생의 숙소인 동`서재가 있는데, 동재의 건축기법은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흔치 않는 유례여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도주관

도주는 청도의 옛 이름으로 이 건물은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곳이다. 객사는 중앙에 정청을 두고 좌우에 동헌, 서헌을 둔 구조로 정청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어 지방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으며, `서헌은 접객시설로 외국사신들이나 중앙관리들의 이동시 접대 및 유숙하는 곳이었다.

도주관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나 노후하여 중종38(1543) 관찰사 임백령이 중창하였고 주세붕이 쓴 도주관 중수기문에 중창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후 정청과 우객사만이 남아 있었으나 2006년 좌객사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답사후기

폐교였던 곳을 새로 단장해서 문을 연 청도박물관. 박물관과 민속관까지 겸하고 있다. 

청도의 이서국은 신라 미추왕과 죽엽군이라는 설화같은 역사 속에서 등장하는 통일 전 소국이었던 신라를 산을 넘어서 침략하는 힘이 있는 소국으로 표현하고 있다. 청도로서는 신라와 실력이 비등한 시절이 있었고 그 소국 신라가 나중에 통일을 이루는 신라이니 자부심은 가져도 될 것이다.

청도는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객사 도주관이 남아 있고 보물로 지정된 석빙고, 읍성벽이 남아 있어서 청도의 문화관광 자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