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진주박물관 특별전 병자호란
2022. 12. 13 ~ 2023. 3. 26
* 전시를 열며
국립진주박물관은 17세기 초 동아시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병자호란을 조명하는 특별전 ‘병자호란’을 개최합니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8일 청나라의 침공으로 시작되어 이듬해 1월 30일 조선 국왕이 청 황제에게 항복하면서 끝난 전쟁입니다. 이 짧은 전쟁이 조선에 끼친 피해와 영향은 임진왜란에 못지않았습니다.
종전 후 불과 7년 만에,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심이던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큰 파장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전쟁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에 맞서서 명나라를 떠받드는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패배한 전쟁의 의미도 애써 축소하려 했습니다. 전쟁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이나 전쟁을 치른 사람들의 치열한 고민, 그리고 패전의 상처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오늘날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러한 까닭입니다.
이에 국립진주박물관은 병자호란을 주제로 특별전을 마련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부터 전쟁이 남긴 유산까지를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소개합니다. 짧은 기간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직접 관련된 유물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의 급박했던 국제 정세와 그 변화를 보여주는 새로운 자료들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전쟁을 겪었던 선조들의 비극을 살펴보면서 평화를 위한 지혜로운 길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병자호란 이전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1618 ~ 1627)
1618년 4월 명나라 동북 지역에서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후금은 요동의 중심 도시 무순을 공격했다. 명나라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토벌군을 준비했고 조선에 원병을 요구했다. 광해군(재위 1608 ~1623)은 고민과 논란 끝에 군대를 파견했으나 1619년 3월, 조`명연합군은 사르후(심하) 일대의 전투에서 후금군에게 크게 패했다. 이후 후금은 기세를 몰아 1621년 3월경에는 심양`요양 등 요하 동쪽 지역을 거의 장악했다.
이로써 명나라로 통하는 육로를 봉쇄당한 조선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후금과 맞서게 되었다. 명나라를 오가는 사신은 바닷길을 이용해야 했고, 후금에 맞서 외교적`군사적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한편, 명나라는 금주성`영원성 전투의 승리로 후금군을 가까스로 전지했고, 요동반도 해안의 섬을 연결해 방어선을 만들었다.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은 평안도 가도에 들어가 동강진이라는 군사기지를 만들었다. 이 기지는 후금을 배후에서 견제하는 동시에 조선과 명나라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1627년 1월 후금이 조선을 침공하면서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인조(재위 1623 ~1649)는 강화도로 피난하여 강력히 저항했지만 결국 조선과 후금을 형제관계로 규정하는 화친조약을 맺어야 했다. 후금의 군사적 위협 때문이었지만, 조선이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후금과 교린 관계를 맺은 것은 이후 나라 안팎으로 심각한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 청제국의 성립과 조선의 대응(1628 ~ 1636)
1629년 10월, 산해관을 우회하여 몽골지역의 장성을 넘은 후금군은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방어의 책임을 맡은 원숭환`모문룡 등 장수들간의 갈들이 깊어졌고 이로 인해 수하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켜 후금에 귀순하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또한 1632년경부터 섬서성 등 북중국 지역에서 가뭄이 이어지자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명 조정을 위협했다. 이처럼 명나라는 후금의 공세, 내부의 분열, 그리고 유민의 반란으로 조선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후금은 1635년 차하르 몽골의 항복을 받아냈고 홍타이지(청태종 재위 : 1626 ~1643)는 제고지보라는 원나라의 국새를 얻었다. 이를 계기로 1636년 국호를 후금에서 대청으로 고친 홍타이지는 스스로를 황제로 칭했다. 제위에 오른 홍타이지는 조선에게 기존의 형제관계 대신 제후국의 지위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으나,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요시한 조선은 이를 거절했다.
조선의 척화론자들은 전쟁을 불사하더라도 청과의 관계를 즉각 단절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화의론자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척화론과 화의론 사이에서, 인조는 적절한 정책이나 전쟁 대비책을 추진하지 못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와 달리 조선을 격려하는 조서를 내릴 뿐이었다. 하지만 청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 조선을 두려 했던 청나라는 조선의 거절을 용납할 수 없었다. 조선과 청나라는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병자호란의 발발과 조선의 패전(1636 ~ 1637)
패전한 조선은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1637년 2월 소현세자`세자빈`봉림대군을 심양에 인질로 보냈다.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척화론자들도 잡혀가 죽임을 당했다. 오랑캐에 항복한 왕실과 조정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전쟁의 피해로 인해 국정운영에 곤란을 겪게 되었다. 전쟁 당시 많은 사람이 죽거나 청나라에 끌려갔다. 잡혀간 사람을 되찾아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오지 못했다.
전쟁 이후 청나라는 해마다 무리한 공물을 요구했고 1639년에는 청태종의 공덕과 청군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를 삼전도에 세우게 했다. 또한, 명나라를 공격할 때마다 조선군의 참전을 강요했다. 1644년 명나라는 농민반란으로 멸망했고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어 북경에 입성했다. 중원을 장악한 청나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중심이 되었다.
1649년 인조의 뒤를 이은 봉림대군, 즉 효종(재위 1649 ~ 1659)은 반청숭명의 분위기 속에서 청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북벌계획을 세웠다. 중앙군과 지방군을 강화하기 위해 어영청을 개편`강화하고 영장제를 시행했으며 이완 같은 무신을 중용했다.
또 그는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는 경제 개혁도 추진했다. 그러나 과감한 군제 개혁에 대한 양반들의 거부감과 군비 증대에 따른 경제적 부담 때문에, 북벌 계획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청에 대한 반감이 문학 작품 속에 표출되기도 했고, 일부 작품은 지도층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비판했다.
* 17세기 전반 동북아시아 연표
명 | 청 | 조선 | 일 |
만력제 1608 요동 지역의 광녕총병 이성량, 조선을 직할령으로 편입하려 시도 |
1588 누르하치, 허투아라(홍경) 건설 | 1608 선조 사망. 광해군(1608~1623) 즉위. 이 원익의 건의로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 지역에 대동법 시행 1609 서북지역의 방어태세를 엄히 하라고 지시 기유약조 체결. 일본과의 통상 재개 |
도쿠가와 이에야스 1603 에도 막부 성립. 도쿠가와 이에야스 (재위 1603~1605) 쇼군취임 1607 조선과 국교 회복. 회담 겸 쇄환사 방문(정사 여우길) 1609 네덜란드 히라도 상관 설치 |
1610 하남에서 난 발생 1611 동림당쟁 1618 후금 정벌을 위해 양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 조선에 원군 요청 1619 조`명연합군, 심하전투에서 후금군에 대패 |
1615 만주팔기 편제 1616 후금 건국, 누르하치 즉위(1616~1626) 1618 명과 단교하고 전쟁 개시. 무순 공격, 함락 1619 개원과 철령 공격, 함락. 사르후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게 대승 |
광해군 1610 창덕군 중건 1613 선조비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사망 영창대군 강화도 위리안치(계축옥사) 1616 창경궁 중건 1619 명나라의 요청으로 후금 원정군에 파병 후금에 대패하여 도원수 강홍립 등이 포로가 됨 |
도쿠가와 히데타다 1611 중국선의 나가사키 무역을 허가 1615 오사카성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에게 승리 1616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망 1617 회답 겸 쇄환사 방문(정사 오윤겸) |
태창제 *천계제 1620 만력제 (1572~1620) 사망 태창제 즉위`사망(1620) 천계제(1620~1627)즉위 1622 산동에서 백련교도의 난 모문룡, 가도에 군진을 설치 1626 원숭환이 영원성에서 후금군에 승리 1627 천계제 사망, 승정제(1628~1644) 즉위 화북지역에 대규모 기근 발생. 농민반란군 발생 1629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임 |
1621 심양과 요양을 공격`함락, 요양으로 천도 1622 광녕 공격`함락, 조선의 선천 임반관 습격 1625 요양에서 심양으로 천도 1626 천명제(누르하치)사망, 숭덕제(홍타이지 재위 1626~1643) 즉위 1627 조선 침공(정묘호란) 1629 장성을 우회하여 북경 공격 |
1623 광해군이 폐위. 인조(1623~1649) 즉위 1624 이괄의 난. 인조 난을 피해 공주로 피난 1627 정묘호란, 후금과 정묘약조 체결 후금, 의주 개시 요구 1628 후금, 회령 개시 요구 |
1623 도쿠가와이에미스 (재임 1604~1651) 쇼군 취임 1624 회답 겸 쇄환사 방문(정사 정립) 스페인 선박의 일본 내항 금지 1629 임진왜란 이후 최초의 일본 사신단의 상경(겐포 일행) |
* 승정제 1630 언숭환을 반역죄로 처형 1631 이자성 무장봉기 시작 1633 모눈룡 휘하에 있었던 경중명`공유덕이 후금에 투항 1639 화북지역 대기근 발생. 농민반란군이 다시 일어남 |
* 숭덕제(홍타이지) 1631 대능하성 공격, 함락 1635 여진을 만주로 개칭. 몽골팔기 설치 1636 홍타이지, 황제를 칭함. 국호를 청으로 바꿈. 조선침공(병자호란) |
* 인조 1631 군기시에 별조청을 설치하여 화기, 화약을 제조하게 함 1633 안주 및 청천강 이북의 산성에 군량을 비축하고 훈련도감과 군기시의 군비를 보냄 1636 병자호란, 인조 남한산성으로 피신 1637 강화도 함락. 청황제에게 삼전도에서 항복 청나라와 정축맹약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척화론자 등이 인질로 청에 끌려감 1639 대청황제공덕비(삼전도비) 건립 |
* 도쿠가와 이에미쓰 1632 도쿠가와 히데타다 사망 1635 다이묘에게 에도와 영지를 1년마다 왕복하게 하는 참근교대제 재정. 일본인 해외 도항 금지 1636 통신사 방문(정사 임광) |
1644 이자성군의 북경 함락. 숭정제 자결. 명나라 멸망 |
* 순치제 1643 숭덕제 사망. 순치제(재위 1643~1661) 즉위. 숙부 도르곤 섭정 1644 산해관을 넘어 북경에 입성. 북경으로 천도 1645 남경 함락 이후 명나라 잔여세력에 의한 남명 정권이 잇따라 세워짐 |
* 1645 소현세자 귀국 후 사망. 봉림대군(효종) 귀국 1646 임경업, 심문 중 옥중에서 사망 청의 요청으로 중강에 개시 1649 인조 사망. 효종(재위 1649~1659) 즉위 |
1641 네덜란드 상관,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이전 1643 통신사 방문(정사 윤순지) 1646 남명의 정지룡, 청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본에 군대를 요청하였으나 막부는 거절 |
* 17세기 전반 격변의 동북아시아 : 후금의 탄생에서 청제국의 완성까지(1614~1644년)
누루하지의 후금 건국 :
1616년 누르하치는 여진족들간의 패권 투쟁에서 승리하고, 스스로를 한으로 선포하며 후금을 건국한다.
1618년, 무순 함락 : 여진족을 통일한 누루하치는 교역의 중심지인 무순을 공격한다.
후금은 교역을 가장하여 명나라를 기만한 후 손쉽게 무순성을 점령.
1619년 사르후(심하) 전투 : 무순 함락에 분노한 명나라는 후금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명나라는 조선군의 참전을 요구했고, 조선은 조총병을 위주로 원정군을 파병한다.
조명 연합군은 4개의 길로 후금의 본거지인 허투알라로 진격하였지만, 후금은 팔기군을 활용한 빠른 기동전을 펼치며 조명연합군을 각개격파한다.
1626년 영원성 전투 : 명나라는 거듭된 패전으로 수세에 몰렸지만 원숭환이 북방전선을 지켜낸다. 원숭환은 산해관 앞에 영원성을 축조하고 홍이포를 배치하여 후금부대를 격파한다.
1627년 정묘호란 :
후금은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하였으나,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여 장기전을 대비한다.
1636년 병자호란 : 청나라는 조선에게 군신관계를 요청하며 조선을 침공한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으나 청군이 길목을 막자 남한산성에 들어간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인조는 두 달 가까이 버텼으나 결국 항복하게 된다.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를 행한다.
1641년 송산전투 : 명나라의 북방 방어선이었던 송산성과 금주성이 청나라의 공격에 무너지게 된다. 이로서 명나라는 산해관을 제외한 북방 방어선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1644년 이자성의 난과 청의 입관 : 이자성을 중심으로 한 농민 봉기 세력이 북경을 함락하자 명나라는 사실상 명망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산해관의 오삼계는 청나라에 항복한다.
1644년 청제국 완성 : 오삼계의 항복으로 산해관이 열리자 청나라는 30여 년 만에 중원을 장악하고 1912년 중화민국이 건국되기까지 268년간 중국을 통치했다.
* 정묘호란 발발의 몇 가지 이유
1. 가도 견제 : 만주에서 쫒겨나 조선 땅으로 피신해 온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평안도의 섬 가도에 진을 치고 후금의 배후를 위협했다. 명나라 장수가 조선 땅에서 후금의 배후를 위협한다는 것은 후금으로서는 용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2. 이괄의 난 : 인조를 추대하는데 앞장섰던 이괄은 그가 이끌던 군대를 이끌고 난을 일으킨다. 당시 이괄의 군대는 조선의 북방을 지키는 정예 기동대였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자, 이괄의 군대가 지키던 북방의 방어선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누르하치와 달리 호전적이었던 홍타이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3. 만주 대기근 : 후금의 최대 교역국가는 명나라였다. 하지만 전쟁으로 명과의 교역이 끊기게 되고 여기에 대기근까지 겹치자 후금은 조선과의 교역이 필요했다. 부족한 물자를 어디서든 찾아야 했던 후금은 조선을 눈여겨 보던 상황이었고 조선과의 교역 통로를 마련하여 후금의 어려운 물자 사정을 극복하려 하였다.
* 정묘호란의 끝
후금군은 압록강을 건넌 뒤 파죽지세로 의주성, 정주성, 안주성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개성까지 전성을 물리며 버텨냈고 동시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다. 인조의 몽진으로 후금군은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는 게 어려워졌고 장기전을 피해야 했던 후금은 정묘화약을 체결하고 서둘러 전쟁을 끝낸다.
정묘화약으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국가가 됐지만 9년 뒤 일어난 병자호란은 두 나라를 군신의 관계로 바뀌게 한다.
* 삼국의 앓던 이, 가도의 모문룡
후금에 패배해 조선으로 내려온 모문룡의 명군으로 인해 조선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무단으로 주둔한 명나라 군대는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안겼으나 명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하여 함부로 내칠 수도 없었다. 이에 조선은 후금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명군이 가도에 들어가도록 설득했고, 모문룡은 1622년 가도에 군진을 설치했다.
가도는 압록강 하류와 인접, 명과 조선 사이의 해로에 위치하고 있어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가도에 들어간 모문룡은 후금의 사정권을 벗어나게 되었으며 동시에 조선 역시 후금의 위협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매해 봄이면 산동, 절강 등지에서 상선들이 몰려들었다. 명이나 조선 조정이 감사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밀무역이 벌어졌고, 모문룡은 가도에 세관을 설치하여 왕래하는 상인들로부터 통행세를 징수하며 부를 축적해나갔다.
* 청나라 군사제도의 핵심, 팔기체
팔기체는 청나라군의 군사편제로,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면서 각 부족의 부대 깃발로 구분한 것이 시초였다. 처음에는 청황, 청백, 청홍, 청남의 4개 깃발로 구성되었다가 영토와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1619년에 테두리를 두르고 형태를 바꾼 양황, 양백, 양홍, 양남의 4개가 추가되어 팔기가 되었다. 후금(청)이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여진족 뿐 아니라, 몽골족, 튀르크족, 티베트족, 한족(명나라), 조선족 등도 팔기에 편입되었다. 각 기에 소속된 구성원은 평상시에는 행정과 생산을 위한 업무를 하다가 전쟁 시에는 청나라 정예군인 팔기군 병사가 되었다. 특히 청나라 기병은 실전경험과 전술교리, 충실한 무장, 기동전에 특화되어 있어 당시 동북아시아 최강의 전투 집단으로 평가된다.
여진족은 유목민족이 아니라 수렵채집과 농경을 함께하는 민족이었지만, 기마 전력만큼은 유목민족에 뒤지지 않았다. 팔기로 편제된 강력한 기병 전력은 빠른 기동력과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했다. 팔기군 기병부대의 기동력은 가공할만한 것으로 병자호란 당시 300명의 선봉대는 6일 만에 600km를 주파하여 한양에 도달했다. 갑옷 또한 충실하여 화살로는 살상이 어려웠고 조총 등의 화기를 동원해야 제압이 가능했다. 특히 수은갑으로 무장한 정예부대인 비야리는 승부를 결판낼 때 투입된 당대 최고의 전투부대로 명성을 떨쳤다.
* 강화 협상
산성에 들어간 직후부터 조선 조정은 청과 강화하는 것을 현실적인 대안으로 여겨 청군 진영에 사람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예조판서 김상헌은 강화론을 비판했고, 뒤이어 강화론을 주장하는 자를 처벌하자는 여론이 힘을 얻었다. 그러나 청군의 포위는 날이 갈수록 두터워졌고, 여러 지역에서 출발한 근왕병들이 차례로 청군에게 격퇴되었다. 1637년 1월 1일 청태종이 직접 출정한 것을 확인한 뒤 최명길은 강화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면서 인조를 설득했다. 이 주장을 받아들인 인조는 다음 날 홍서봉 등을 청군 진영에 보내 화친을 청했다. 이후 몇 차례 협상을 거치면서, 청 태종은 인조의 직접 항복을 요구했다. 인조는 강화도의 함락을 확인한 뒤 청의 항복 조건을 받아들였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행했다.
* 강원도 근왕병
강원도 근왕병 : 강원감사(감영-원주) 조정호가 근왕병을 소집하여 남한산성으로 출진
1636.12.26 : 원주영장 권정길이 1천명의 근왕병을 이끌고 검단산(하남) 도착
1636.12.27 : 검단산 전투. 청군과 첫 교전에서 승리하였지만 청군의 재공격에 패배.
이후 : 권정길은 춘천으로 퇴각. 조정호는 미원(가평 설악면)에서 주둔.
* 충청도 근왕병
충청감사(감영-공주) 정세규가 근왕병 7천명 소집하여 남한산성으로 출진
1636.12.25 : 공주에서 출발하여 정세규는 험천(용인), 충청병사 이의배는 안성 죽산산성에 도착
1637.1.2 : 험천전투. 충청감사 정세규 청군(요토) 기습공격에 패배
이후 : 험천전투를 치른 정세규는 병력의 절반이 상실된 채 공주로 후퇴
* 경상도 근왕병
경상감사(감영-대구) 심연이 근왕병 8천명 소집하여 남한산성으로 출진
1636.12.30 : 심연 충주 도착
1637.1.2 :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은 2천명의 근왕병을 이끌고 쌍령(광주) 도착. 충청병사 이의배가 합류
1637.1.3 : 쌍령전투. 경상좌병사 허완, 경사우병사 민영 : 청군(요토)
청군에게 대패하여 약 3천명의 병사 및 경사좌병사 허완이 전사
이후 : 심연은 조령(문경새제) 거쳐 경상도로 퇴각
* 전라도 근왕병
전라감사(감영-전주)이시방이 근왕병을 소집하여 남한산성으로 출진.
1637.1.4 : 전라병사 김준룡이 2천명의 근왕병 이끌고 용인 광교산 도착
1636.12.30 : 이시방은 수원 주둔
1637.1.5. : 광교산전투. 전라병사 김준룡 : 청군(도도, 양고리). 청군지휘과누 양고리 전사. 김준룡의 승리
이후 : 이시방은 양지에 머물렀고 김준용은 보급품 부족으로 수원으로 철수
* 평안도 근왕병
평양감사(감영-평양) 홍명구가 근왕병 소집하여 남한산성으로 출진.
1637.1.26. : 평양감사 홍명구와 평안병사 유림이 김화 도착
1636.1.28. : 김화전투. 평안감사 홍명구, 평안병사 유림 : 청군(요토)
홍명구는 전사하였고 유림은 청군을 격퇴
이후 : 김화전투 이후 남한산성으로 이동하였으나 인조의 항복으로 전쟁 종결
* 전쟁의 상처 : 피난, 전망, 그리고 피로인
전란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청나라에 끌려갔다. 잡혀간 사람을 되찾아오는 쇄환이 일부 이루어졌으나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고, 탈출한 사람도 다시 잡혀가는 비극도 있었다. 또 되돌아온 여성들은 정절을 잃었다면서 이혼을 요구받았고 가문에서 축출되었다. 또 함께 잡혀간 부인의 도움으로 조선에 돌아와서는 딴 여자와 재혼한 사람도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오랑캐로 무시했던 청나라에 국왕이 항복하는 상황에 가치관의 혼돈을 느꼈다. 친청`반청 갈등 속에서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형제를 잃어 실의에 빠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친을 주장한 자를 원수로 여기는 자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심양으로 잡혀간 남편에 대한 부인의 애절한 사연도 있었다. 이처럼 전후 조선 사회는 전쟁의 물리적`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 문학작품에 나타난 병자호란
병자호란은 짧은 기간에 일어났다가 끝난 전쟁이었지만, 그 후유증은 국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까지 크게 남아 영향을 미쳤다. 오랑캐에게 항복한 국왕을 임금으로 모셔야 하는 양반들, 패전으로 귀중한 생명과 재산을 잃은 백성들은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찾고자 했다. 이러한 욕구와 희망이 문학 작품으로 표출되었다.
전란이 끝난 초기에는 전쟁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만큼,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청군에 항전하다 결국 국왕이 항복한 일을 묘사한 [산성일기]나 강화도 함락으로 죽은 억울한 영혼들이 전쟁에 책임이 있는 대신과 관리들을 비판하는 [강도몽유록]이 나왔다. 이후 패배감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회복하고 무능한 집권층을 규탄하는 [박씨전, 임경업전] 같은 군담소설이 큰 인기를 끌었다.
* 인질로 잡혀간 세자와 청나라의 북경 점령
1637년 항복 직후, 조선은 명나라 대신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명나라를 침공하는 청군을 돕도록 군대를 파견해야 했다. 또 세자`세자빈`봉림대군은 인질로 심양에 갔고, 강경한 척화론자들도 잡혀가 처형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다. 이후에도 청나라는 조선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압박했다. 김상헌 등 청나라에 반발하는 관료들을 끌고 가 가두었으며, 고위직의 자제를 인질로 붙잡아갔다. 심지어 인조의 지위를 위협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조선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파병하기도 했지만, 임경업 같은 장수는 명나라로 망명하여 청나라에 대항했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고 청군이 북경을 점령한 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압박을 낮추어 이듬해 세자를 돌려 보내주었다.
* 전후 임경업의 군사활동
병자호란 당시 의주부윤이었던 임경업(1594~1646)은 1637년 청군이 가도에 있는 명군을 공격할 때나 1640년 4월 청군이 명나라의 금주위를 공략할 때 억지로 참전하였으나 청나라에 비협조적이었다. 이 사실으 드러나, 1642년에 압송되던 중에 명나라로 탈출하였다. 이후 그는 등주도독 군문의 총병 마등고의 휘하에 활동하다가 1645년 청나라에 붙잡혔다. 1646년 조선에 잡혀와 심기원의 옥사로 신문을 받다가 죽었다.
* 전후 조선의 제도 정비
전쟁 직후 민심 수습에 힘을 기울인 조선은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제도정비를 시작했다. 청나라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중앙군과 지방군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를 고치거나 만들었고, 군사훈련과 군비 증강을 추진하였다. 또 그는 대동법을 충청도`전라도로 확대 실시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였으며, 상평통보의 주조`유통도 시도했다. 그의 개혁 조치는 숙종(재위1674-1720) 때에 이르러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호적제도가 안정적으로 시행되었고,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로써 국가는 보다 많은 인구를 파악하여 각종 역을 부담하게 할 수 있었다. 대동법 실시 이후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했으며, 상평통보의 전국적 유통으로 사회경제적 변화가 촉진되었다. 또 국토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군사 지도`고을 지도 등 다양한 형태의 지도가 제작되었다.
* 에필로그
오늘날 우리는 병자호란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400년 전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파악하지 못한 조선이 명분에 사로잡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새로운 군사강국 청나라에 일방적으로 패배한 전쟁으로 여겨야 할까요?
병자호란은 2개월간의 짧은 전쟁이었지만 그 속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의 노력과 논쟁, 피와 눈물이 있습니다. 강대국의 힘겨루기 속에서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군사적 약세에도 당위와 명분을 지키며 죽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고자 굴욕을 감내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죄 없이 적국에 끌려가 이역만리에서 생을 마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병자호란은 400년 전의 이야기지만 오늘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지금도 지구 한편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그 전쟁 속에서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급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우리의 갈 길에 대한 모색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 답사 후기
국립진주박물관 특별전 '병자호란'전을 관람했다.
유적으로는 대표적으로 남한산성이 있고 두 달여의 짧은 전쟁이어서 유물은 많지 않다.
전시 공간은 영상으로 많은 설명이 있었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고 잘 공부하고 왔다.
임진왜란은 할 말이 많고 찾아가서 확인하는 유적도 많은데 비교가 된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남한산성에 고립되 있던 임금을 구하기 위해 각 도별로 근왕병을 모아서 임금을 구하러 나섰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 때도 병사를 모집하러 다녔다는 자료를 보기는 했었지만 특별전 '병자호란'을 통해서 근왕병의 존재를 각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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