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원답사 : 2024. 3. 1 ~ 3. 2
3월 1일 : 남원문화원(남원부 관아터) - 남원용성관 소맷돌 - 만인의총 - 만인의총 유지 - 남원읍성 - 남원 향교 - 남원충렬사 - 남원 석돈 - 남원 관왕묘 - 만복사지 - 남원 양사재
3월 2일 : 남원향토박물관 - 남원독립애국지사 추모비 - 남원 의충사 - 초촌리 고분군 - 황진장군 기념관(정충사) - 교룡산성 - 대곡리 암각화 -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1박2일 동안 남원의 문화유적지를 두루 돌아봤다. 남편이 미리 갈 곳들을 자료를 뽑아서 준비했고 일정은 2박3일로 예정했는데 보려고 하는 곳들이 가까이 있어서 하루를 줄이고도 가능했다. 준비한 코스 중에서 몇 곳을 생략했는데 남원을 대표하는 광한루원을 생략한 것은 여러번 다녀간 곳이어서 나중에 와서 봐도 되는 곳이었다.
* 남원문화원
남원문화원을 코스에 넣은 원래 목적은 남원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자료가 전시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공휴일이라 쉬는 것인지 문이 닫혀 있다. 덜 활성화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한 것은 2일에 방문한 남원향토박물관에서 보고자 하고 듣고자 했던 궁금증들이 풀렸다. 남원은 인구가 8만으로 시로 승격할 무렵의 13만의 인구에서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인구 감소는 대한민국의 커다란 사회문제로 급부상했다.
남원문화원 자리는 조선시대 때 남원의 관아터이다. 문화원 마당 가장자리에는 커다란 비석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앞면은 ‘남원의 역사와 문화의 산실 남원부 관아터’, 뒷면은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옆면은 남원의 연혁, 다른 옆면은 판소리의 본고장 남원.
큰 글씨의 제목 밑으로는 내용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유용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 남원의 역사와 문화의 산실 남원부 관아터
백두대간 산록과 금남 호남정맥의 남쪽에 자리한 남원은 통일신라 때 소경이 설치된 만큼 융성하고 산고수려한 고장이다. 한반도의 남`북 축과 영`호남의 문화가 교차하는 남원은 교통의 중심지인데다 마한`백제로 이어지는 남원평원과 가야`신라로 이어지는 운봉고원을 함께 하고 있어 일찍부터 정치`경제`군사의 요충지이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로 황산대첩(1380년), 정유년 남원성전투(1597년), 동학농민항쟁(1894년), 지리산전투(1950년) 등의 전란을 겪기도 하였으나, [만복사저포기], [최척전]에서 [춘향전][흥부전]과 [혼불]로 이어지는 소설 문학의 본향은 물론 판소리의 본고장으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귀정사, 실상사 등의 불교 문화와 남원`운봉향교 등 유교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남원부는 1군(순창), 9현(용담, 구례, 임실, 운봉, 장수, 무주, 진안, 곡성, 광양)을 관장한 도호부였고, 1895년에는 순천, 담양, 옥과, 창평이 추가된 소속군이기도 하였다.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남원은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 1861년 경주로부터 피신해 오시어 교룡산의 은적암에 약 반 년 동안 은거하시며 [논학문 : 동학론] 등 동경대전의 주요경전을 집필하시며 포교하셨던 동학의 성지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김개남 장군이 음력 6월 하순에 무혈 입성하여 북으로는 금산, 진산에서부터 남으로는 순천, 광양까지를 관장하는 전라좌도 대도회소와 전라좌도 대집강소를 설치하여 임무를 관장했는데 그 자리가 여기 남원부 관아터이다. 7월 중순에는 7만 여명의 농민군이 운집하여 남원대회를 열었으며 김개남 장군이 정병을 이끌고 북상한 뒤에 남은 농민군이 운봉을 공격하려다가 방아치전투에서 수천 명이 순절하였고 이어 남원성 전투에서 민보군에게 패전하여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후 일본군이 진주하여 많은 백성을 살상하고 방화하는 참상을 겪었으나 살아남은 농민군은 신간회, 3`1독립운동 등의 구국운동으로 이어졌다.
* 남원의 연혁
백제시대 : 고룡군
통일신라 : 소경 설치. 757년 : 남원소경으로 개칭
고려시대 : 남원부. 이후 고려시대에 대방군, 조선시대 일신현으로 격하 된 경우가 있었으나 곧 남원부로 승격 됨.
1654년 : 전라좌영 설치
1910년 : 48면을 22면으로 통폐합
1914년 : 19개면으로 개편
1981년 : 남원읍이 남원시로 승격
1995년 : 남원군이 남원시로 통합. 남원의 별칭 : 용성
* 판소리의 본고장 남원
천혜의 지리산은 수려한 계곡이 많다. 이 대자연 속에서 사설을 엮고, 목을 다듬어 이루어낸 서민예술이 판소리이며 동편제다. 조선 순조 때의 명창 송흥록이 계면조 우조와 진양을 완성하여 동편제를 창시한 후 박만순, 송우룡 등이 이어받아 송만갑, 유성준 등에 이어 김정문, 이화중선 등으로 전승되고 박초월, 강도근 명창들로 이어져 판소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오르게 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판소리 다섯마당 중 [춘향가] [흥부가]는 남원을, [심청가]는 남원의 인근지방을 배경으로 한 것도 남원이 판소리의 본고장임을 입증한다 하겠다.
* 남원의 역사 시계
1267년 : 남원 :
남원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인류의 모든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 하늘을 두려워하여 무사와 안녕의 기원을 바위에 새기었던 원시인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운봉고원을 중심으로 가야정치체가 있었고 백제와 신라의 접경으로 삶과 역사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에 처음으로 남원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면서 모든 삶의 여건이 풍요로운 곳이라 하여 ‘천부지지 옥야백리’라 불리었으며 여러 고을들을 거느린 도읍이었다.
특히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문화장터를 이루니 판소리와 춘향전, 흥부전 같은 고전소설의 배경지가 되었다. 가히 남원은 웃음과 슬픔, 풍류와 한이 어우러진 한국인의 고향이라 하겠다.
605년 : 광한루
1419년 황희 정승이 누각을 짓고 광통루라 하였는데, 1444년 정인지가 달나라의 옥황상제가 사는 궁전인 광한청허부가 바로 이곳이라 하여 후일 광한루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582년 남원부사 장의국이 광한루 앞을 흐르는 요천을 끌어다가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오작교를 만들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
현재의 광한루는 1626년(인조 4년)에 재건된 것으로 고전소설 춘향전의 무대이며 보물 제28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세월이 흐르면서 선조들이 광한루 주변에 연못을 만들고 방장정, 영주각 등의 정자를 지어 도교사상을 반영한 이상향을 꾸미니, 이 정원이 바로 명승 제33호로 지정된 광한루원이다. 춘향의 사랑과 역사의 향기가 어우러진 광한루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며, 사랑의 샘이다.
427년 : 만인의총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들의 임진년 침공의 패인이 호남 점령 실패에 있다고 여기고 전라도를 철저히 공략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에 왜군은 경상, 전라, 충청을 잇는 요충지인 남원에 병사 5만6천 여 명을 보내 8월 12일 남원성을 포위하였으니 이복남 등이 이끌던 1천 여 군사와 양언이 이끌던 명나라 군사 3천 여 명 그리고 돌멩이,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남원성민 6천 여 명이 필사적인 항전을 벌였다. 하지만 슬프게도 남원성을 지키던 민`관`군 1만 여 명은 죽임을 당하고 남원성은 8월 16일 함락되었다.
전란이 끝난 후 전사한 사람들의 시신을 한 곳에 묻어 1612년(광해군 4년)부터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으며 1964년 향교동 현재 만인의총 자리로 이전하여 그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있다. 남원은 나라가 어려웠을 때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뜨거운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 석돈
남원 석돈은 남언성의 수호신을 섬기는 제단이다. 이곳에 우체국을 지으면서 일부 파괴되었던 것을 근래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현재의 석돈은 받침부에는 40~80cm 크기의 돌을, 중간부와 상부에는 20~30cm 크기의 자연석을 쌓아서 네모난 단을 이루었다. 석돈은 그 옛날 관리의 숙소였던 용성관의 부근에 거대한 돌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그 위에는 풀이 무성하고 고목이 우거져, 철따라 두견새와 두루미가 날아와 쉬어 가곤 했다고 한다. 근래 각종 건물을 지으면서 석돈의 돌을 빼내어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 용성관 석물
이곳에 흩어져 있는 몇 점의 돌들은 옛 용성관 건물에서 나온 것들이다. 용성관은 통일신라 신문왕 11년에 처음 지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다른 지역에서 출장온 관리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조선 태조를 상징하는 나무 패를 모셨으며, 백성을 돕는다는 뜻에서 [휼민관]이라고도 불렀다. 이 용성관은 광한루`관왕묘와 더불어 남원의 3대 건물로 일컬을 만큼 규모가 컸다. 정유재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과 숙종 때 다시 지었으나, 6`25 한국전쟁 때 다시 불탔다. 지금은 70m 가량의 옛 건물 받침부와 용성초등학교 본관 계단으로 쓰이는 돌 한 점이 남아 있다.
* 남원답사1은 현재 남원문화원이 위치하고 있는 곳의 과거 역사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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