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인의총
만인의총은 만여 명의 의로운 충혼을 모신 무덤으로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민`관`군 1만여 명을 합장한 곳이다.
전쟁이 끝난 후 전사자의 시신을 한 곳에 합장하였으며, 광해군 4년(1612)에 충렬사를 세워 순절한 8충신을 배향하였다. 만인의총은 동충동(구 남원역 부근)에 있었으나 민가에 둘러싸이게 되어 196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 남원읍성
통일신라시대에 남원에는 지방 행정중심인 소경이 자리하였으며, 그에 따른 성곽이 있었다. 중국식 읍성을 본 따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규모는 3`4km 가량의 둘레에 높이 4m 정도였으며, 사방에 문을 두었다. 정유재란 때 이곳에서 조명연합군(조선군 1천명, 명군 3천명)과 성안의 주민 6천여 명이 합세하여 오만 육천여 왜군의 공격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성은 함락되었고 만 여 명에 달하는 민관군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전투 중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민가 몇 채만 남았다고 하니 당시의 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시련과 좌절을 딛고 선 조상들의 기상을 간직해 온 남원읍성은 동학 혁명과 전라선철도 개설 등으로 많이 허물어졌는데, 최근에 일부를 복원하였다.
* 남원향교
남원향교는 서기 1407년에 전국의 주`부`군`현 향교 설치령에 의하여 1410년 부의 서쪽 4리쯤 되는 교룡산 아래 대곡에 창건하였다. 18년 뒤 1428년에 요천 남쪽 덕음봉 아래에 이건하였다가 15년 후인 1443년에 현 위치인 향교동 왕봉산 남쪽 기슭에 이건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1597년 정유재란에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다. 2년 후인 1599년 관내 유림의 참여로 대성전을 재건하고 1609년에 명륜당을 재건하였으며 이어서 동`서무, 동`서재, 내`외삼문, 사마재와 전사청을 신축하고 1935년 남원도호부 동헌의 근민당 문루인 환월루를 명륜당앞에 이건하여 진강루라 현액하고 시내 중심지에 지하 1층, 지상5층 충효관을 건립하고 향교 경내에 건평 50평의 강학당을 신축하여 향교로서 걸맞는 전각과 재당을 완비하였다.
1949년 농지개혁으로 향교재산이 오유로 돌아가자 위성조합을 설립, 재정을 확보하여 향교 운영기반을 구축하였다.
남원향교는 전라도 4장관 향교이면서 중설위 향교로서 공부자와 4성을 중앙 정위에, 송조 4현과 우리나라 18현을 동`서 종향위에 배향하고 춘2얼과 추8월 상정일에 석전대제를 봉행하고 매월 1일과 15일에 분향례를 봉행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지표인 전통유교를 계승 발전하여 급변하는 외세와 새로운 서구풍조 속에서도 유림의 총 본산으로서의 조직과 체제를 재정비하여 유림과 지역사회 교화를 책임짓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 관왕묘와 적토마도
이곳은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관운장을 모신 사당이다. 조선 선조 32년(1599)에 남원성 동문밖에 처음 세웠던 것을 숙종 때 성안으로 옮겼다가, 영조 때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때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의 영향을 받아 관운장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당시 명군이 왜군을 맞아 힘든 전투를 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관운장이 신비로운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 싸움에 승리하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이 관왕묘에는 흙으로 빚은 관운장 형상을 안치하였다.
적토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명마이다. 조조가 관우에게 선물하여 관우가 주로 타고 다녔다고 한다.
* 남원사직단
남원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해마다 정월이면 남원 부사가 몸소 이곳에 나와 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그해 풍년과 고장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사직단은 네모진 형태로서 네 방향 모두 장방형의 돌을 이용하여 3단의 기단을 쌓았는데 높이는 1`3m 내외이다. 사직단 옆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사방은 담장으로 둘려 있다.
농경국가에서 토지와 곡식은 나라 살림의 근본이기에 사직은 곧 국가를 뜻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조 3년(1394) 서울에 사직단을 세우자 전국 각지의 행정 중심지에도 사직단을 세웠다. 남원 사직단 역시 그 무렵에 설치했다고 한다.
* 남원 향교동 산림녹화탑
건립배경 : 향교동 산림녹화탑은 치산치수가 정사의 근본임을 재언하고자 과거 남원군이 전국산립사업시범군으로 선정된 당시 300여 회원(산림계장)들이 산림녹화탑 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국회의원을 비롯 농림부장관, 산림청장, 산림조합연합회장, 도지사, 군수 등 요원의 뜻을 모아 과거 도남벌이 심했던 민중의 사상을 계도하고 산림을 수호한 유공자들을 깊이 추모하며, 애림사상을 고취하기 이하여 건립되었다.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
* 만복사지
이 곳은 고려 문종(1046 ~ 1083) 때 처음 세운 만복사가 자리했던 터이다. 처음 지었을 때,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법당과 오층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근래의 발굴 조사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만복사는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서`북쪽에 법당을 둔 일탑삼금당식 배치였다. 이 사찰은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중기까지 번창하던 만복사는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석탑과 돌 유물 몇 개가 절터를 지키고 있어, 일면이나마 웅장했던 옛 사찰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경내의 국가지정문화재(보물) : 오층석탑, 석조대좌, 당간지주, 석조여래입상
* 남원의 상징
남원시를 상징하는 새는 제비, 꽃은 철쭉, 나무는 배롱나무이다.
* 근`현대 : 구국에 목숨 바친 남원 사람들
남원사람들의 구국활동은 민초들이 자발적으로 호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다른 지역과 유기적인 관련을 맺어 애국과 민주화의 표상이 되었다.
일제에 항거한 의병 :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양한규(1844 ~ 1907)가 의병을 일으켜 광한루에 주둔한 일본군을 습격,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했으며, 1919년 3`1운동에는 이석기와 황찬서 등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여 모두 19차례의 만세운동을 벌여 전북에서는 가장 많은 42명이 순절하였다. 또한 당시 남원 관할인 번암면 출신인 백용성(1864 ~1940)은 한용운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4`19의 기폭제 김주열 열사 :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출신의 김주열은 1960년 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상고에 입학하기 위해 마산에 머무르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한 시위대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지 27일만에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4월 11일 마산항 중앙부두 앞 바다에 떠올랐다. 김주열의 참혹한 주검은 마침내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되었다.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고룡마을에 열사의 묘소아 추모각`기념관이 있다.
* 사쓰마 자기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정유재란 때 침략한 왜군은 성이 함락된 후 수많은 문화유산을 침탈하고 도공을 납치해 갔다.
그 중 일본 가고시마 나에시로가와로 끌려간 박평의 등의 도공과 사가현 아리따로 끌려간 도공 이삼평 등은 오늘날 일본 도자기의 산업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
정유재란 당시 남원으 전라도의 문화 중심지이자 조선 도자기의 생산지로서 이름난 고장이었다. 그 무렵 일본에서는 차도가 유행하여, 조선에서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릇이 일본에서는 귀중한 보물로 여겨졌다. 이런 까닭에 조선의 도자기기술은 최첨단 산업이었다.
그래서 도공들을 납치해간 일본의 번주들은 특별한 대우로 보호하면서 그릇을 굽게 하여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삼아 도자기 산업을 발전시켜 나갔는데 심수관 등은 사쓰마도자기를 만들어 냈으며, 이삼평은 아리따 도자기를 만들어 일본 도자기의 조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리고 ‘오늘이 오늘이소서’는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과 그 후예들이 400여 년 지난 지금까지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로 부르며 간직하던 것을 1988년 7월 26일에 그들이 그리워하던 고향 땅 광한루원 완월정에서 귀향음악회를 열었다.
* 전쟁의 상처 그 이후
조선은 7년간의 전쟁으로 온 국토과 황폐해지고, 무수한 인명이 살상되고, 기근과 질병으로 쓰러졌다. 토지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없어졌다. 또한 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되었는데, 불국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서적 기타 주요 문화재가 소실되거나 약탈되었다. 또한 남원의 광한루, 만복사도 소실되었다.
그리고 수 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 나가사키의 포루투갈 상인에 의해 유럽 등지로 팔려갔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 보여준 강력한 군사력에 힘입어 동북아에서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이는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을 이룬 이후 철저한 전답 측량과 수확량 조사사업과 같은 사회경제적 개혁에 힘입은 것이다. 조선침략을 통해 일본은 활자, 그림, 서적을 약탈하였고, 또한 조선에서 끌고 간 이삼평, 심당길 등 도자기 기술자들에 의해 일본은 도자기문화가 큰 발달을 보게 되었다.
조선은 전란으로 사회 경제적 기반이 크게 약화되었고, 이후 전후 볶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누루하치의 후금이 일어나 다시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명에 의존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게 된다.
7년 전쟁을 통한 상처와 영향 등을 몇 가지만 언급한다면 첫째가 ‘피로인’ 문제다. 왜군에 의해 적국으로 끌려간 백성들이 10만에서 많게는 40만 명으로 추정된다. 전투의 포로가 되거나, 사역을 위해서 끌려간 경우, 일본의 노동력으로 사용될 목적, 그리고 노예사에게 팔기 위해서 끌려간 경우 등등 여러 이유로 많은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사라졌다.
[금계일기] [만사록] [월봉해상록] [정유피난기] 등을 쓴 노인, 정경득, 정희득, 정호인 등은 정유재란시 일본에 끌려갔다가 조선에 돌아와 당시 조선인 포로의 규모와 생활상 및 일본의 풍토와 지리 정보 등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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