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금조총 이야기 : 양산박물관

부실이 2023. 10. 15. 23:10

* 양산시립박물관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 금조총 이야기 : 2023. 10. 6 ~ 12. 17

 

* 전시를 열며

1990년 7월의 여름, 북정리고분군 조사가 마무리되던 어느 날, 양산 부부총에서 약 20미터 아래 떨어진 조그만 돌무더기를 당시 그 누구도 고분이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금으로 만든 새다리 한쌍이 출토되어 [금조총]이라 부르는 이 무덤의 발견은 양산 고분문화를 새롭게 조명하는 일대의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금조총이 속한 북정리고분군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발굴되면서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비탈의 작은 돌무더기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최고 수준의 부장품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죠. 무덤 속에는 금귀걸이를 비롯한 황금 장신구가 가득하였고, 상상도 못한 새다리 공예품도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금조총 유물들은 지난 2017년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한 차례 소개가 되었지만, 처음으로 출토품 전체를 33년만에 고향에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 박물관은 개관 10주년을 기념하며 [금조총이야기] 특별전을 통해 새롭게 이야기를 써볼까 합니다.

이번 전시에 공개되는 당시 최고 부장품들을 통해 삼국시대 양신지역 지배층의 위상과 격조 높았던 삽량의 문화를 다시 한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 금조총

석실 길이가 280cm 정도인 소형 고분으로, 구조는 북서쪽 짧은 벽 전체를 출입시설로 사용하는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이다. 시기는 5세기 말~6세기 초 정도에 축조된 무덤으로, 무덤의 규모나 출토유물의 수준은 신라지방 소재 고분 가운데 우월한 편이다. 

 

* 금조총의 부장품들

: 손칼과 은제칼집장식 : 

: 금제새다리 : 보물 제1921호

: 금제팔찌 : 보물 제1921호

: 은제대금구`띠꾸미개 : 보물 제1921호: 금동관 

: 청동초두 : 보물 제1921호

: 굵은고리금귀걸이 2셋트 : 보물 제1921호

: 금제구슬과 굽은옥 

 

* 양산시 역사

* 선사시대
구석기 : b. c. 38000  : 양산지역 인류 등장 / 양산 사송 유적 - 후기 구석기 출토 
* 조선
1397년 : 태조 6년 : 양산향교 창건
1406년 : 태종 6년 : 가야진사 건립
1413년 : 태종 13년 : 양산군으로 개칭
신석기 : b. c. 4000 : 빗살무늬토기인들의 남하 / 금곡 율리패총이 가까움 / 신암리유적 : 덧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울주군서생면 신암리) 1592년 : 선조 25년 : 임진왜란 때 군수 조영규가 동래성에 입성하고 순절. 임진왜란 후 양산군이 동래부에 폐합
1599년년 : 선조 32년 : 기장현을 동래부에 폐합
청동기 : b. c. 8~9세기 : 농경문화의 정착 / 소군장세력 등장 / 신기동, 북정동 고인돌(지석묘), 신평유적, 소토리유적 1603년 : 선조 36년 : 양산군 복원
1617년 : 광해군 9년 : 기장현 복원
* 삼국`통일신라 시대
77년 : 신라 탈해이사금 : 가야와 황산나루터에서 격전
115년 : 신라 지마이사금 4년 : 가야가 신라를 침입
116년 : 신라 지마이사금 5년 : 신라가 가야성을 포위 공격
264년 : 신라 미추이사금 3년 : 왕이 황산을 순행
418년 : 신라 눌지왕 2년 : 삽량주라 부름
646년 : 신라 선덕여왕 15년 : 자장율사가 통도사 창건
665년 : 신라 문무왕 5년 : 상주와 하주를 분할하여 삽량주 설치
통일신라 : 신라 신문왕 7년 : 삽량주에 성을 쌓음
통일신라 : 신라 경덕왕 16년 : 양주로 개칭
1641년 : 인조 19년 : 통도사 중수
1643년 : 인조 21년 : 다시 동래부에 예속
1645년 : 통도사 대웅전 중건
1675년 : 숙종 원년 : 송전봉산 설치
1717년 : 숙종 43년 : 송담서원 건립
1742년 : 영조 18년 : 임술년 대홍수. 
1748년 : 영조 24년 : 송전봉산 폐지
1835년 : 현종 1년 : 칠현사 건립
1836년 : 현종 2년 : 소노서원 건립
1875년 : 고종 12년 가야진사 중수
1877년 : 고종 14년 : 삼조의열단 설치(이만도 군수)
* 고려시대
940년 : 양주로 개칭
983년 : 성종 2년 : 지방행정구역 개편. 영동도에 속하게 됨
1018년 : 현종 9년 : 경주목에 속함. 방어사 설치. 동평현, 기장현 2개의 속현이 있음
1085년 : 선종 2년 : 통도사 국장생석표 건립
1301년 : 충렬왕 27년 : 밀서운(지금의 밀양)에 병합
1304년 : 충렬왕 30년 : 양주로 환원
* 대한제국
1897년 : 고종 34년 : 전국을 13도로 하고 양산군을 8면으로 함
1905년 : 경부선 철도 통과
1906년 : 구포면을 동래군으로 대저면을 김해군으로 이관하였으며, 외남면을 울산군에 이관

* 일제강점기
1914년 : 기장군을 동래군에 통합
1919년 : 3월 13일 : 신평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 전개
               3월 27일 : 양산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 전개

* 현대
1970년 : 경부고속도로 개통. 고리원자력 발전소 준공
1979년 : 양산면이 양산읍으로 승격
1995년 : 동부 5개 읍, 면이 부산광역시로 편입
1996년 : 양산군이 양산시로 승격


* 양산지역의 선사문화

선사시대(bc 2000/1500~bc 400년 경)라 함은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시대, 즉 문자 기록이 아닌 남겨진 유물이나 건축물 등의 흔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시대를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연경관이 좋은 곳, 햇빛이 잘 드는 곳, 자연재해의 피해나 영향을 받지 않은 생활하기 편리한 곳에 터전을 잡기 마련이다. 특히 양산은 낙동강의 잦은 범람은 넓은 습지와 같은 형태가 형성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교적 범람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에 마을을 형성하고 사람들의 집단생활이 시작되었다. 때문에 양산의 선사 유적들은 주로 양산천과 회야강 등 강을 끼고 펼쳐진 평야나 나지막한 구릉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양산의 대표적인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완만한 구릉에 위치한 하북면 신평 지산리, 지내리, 순지리유적, 회야강 일대의 편산리 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집자리부터 삼한시대 무덤까지 대거 확인되어 선사시대 양산의 주거문화를 이해할 수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소토리, 신기리 등지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현재 1~2기 정도가 남아있으나 과거에는 주변에 무리지어 분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소토리 유적은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무덤부터 통일신라,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어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터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양산의 최초 구석기유적 - 사송 유적

사송유적은 양산시 동면 사송-내송리 일원에 공공주택지구를 건설하기 위한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유적은 경부고속도로를 기준으로 북동쪽과 남서쪽으로 크게 나뉘는데 동면 소재지에서 노포사송로를 따라 부산방면으로 2~3km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를 한 결과 D2지점에서 양산지역 최초로 후기구석기시대(bc 3800~36400)에 해당하는 몸돌, 돌날몸돌, 좀돌날몸돌, 돌날, 긁개, 홈날, 새기개, 복합석기 등 128점의 뗀석기가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유물층에서 출토된 유물은 74점이며, 지표 및 교란층에서 수습된 유물은 54점이다. 그 외에도 청동기시대 집자리 18동, 통일신라시대 우물, 조선후기에 해당하는 토광묘, 수혈유구 등 전 시기에 걸쳐 다양한 유구가 존재한다.

 

* 구석기 석기 용어

몸돌 : 몸돌은 격지와 더불어 석기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석기의 소재가 되는 격지를 박리한 후 남은 잔존물이자 돌덩어리이다.

격지 : 원석이나 몸돌에서 떨어져 나온 돌조각이다. 일반적으로 석기를 만드는 과정 중 몸돌에서 떨어진 부스러기에 비해 큰 조각으로, 타격면, 타격혹, 동심원 등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긁개 : 격지나 돌날의 가장자리에 고른 잔손질을 통해 만든 연모이다.  가장자리에 박리를 가해서 직선날, 볼록날, 오목날을 가파르게 형성한 석기로 기능적으로 가죽이나 나무를 다루는 데 주로 사용하였다.

돌날 : 길이와 너비의 비율이 2:1 이상인 석기이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전형적인 석기이며 그 자체로 도구 사용이 가능하고, 도구 제작을 위한 예비 몸체로도 사용된다.

뚜르개 : 돌날이나 격지의 한 곳이나 여러 곳을 뾰족해지도록 손질해서 만든 연모이다. 후기 구석기시대에 처음 등장하며, 만드는 방법, 크기, 형태가 다양하다. 뚜르개는 뼈, 뿔, 나무, 광물에 구멍을 뚫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새기개 : 1회 혹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직에 가까운 박리를 가하여 날카로운 끝날을 조성하여 만든 석기이다. 기능은 뼈나 뿔, 나무 등에 홈을 파거나 긁거나 뚫는데 사용되었다.

복합석기 : 한 몸체에 서로 다른 용도를 갖도록 만든 연모이다. 즉, 밀개 - 새기개, 밀개-뚜르개처럼 동일한 몸체에 두가지 기능을 갖도록 제작되었다.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나타나며, 대표적인 유형은 밀개 - 새기개가 함께 있는 석기이다.

홈날 : 홈 모양의 날이 있는 석기이다.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출현하며, 중기 구석기시대에는 톱니날석기, 긁개 등과 함께 사용되었다. 홈날은 물체를 긁거나 뾰족하게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 양산 소토리 유적

소토리 유적은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일원. 유적은 소토리 소노 청동기 주거지 유적과 소토리 소노 지석묘, 소토리 송국리 문화집락 유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소토리 소노 지석묘 유적은 청동기시대 묘 11기를 비롯하여 주거지 2동 등이 확인되었다. 묘제는 석곽묘 9기, 석관묘 1기, 토광묘 2기이다. 3호 석곽묘는 부장칸을 따로 만들고 그 내부에 적색마연호1점을 매납한 특징을 보인다. 4호 석곽묘는 석곽 안에 다시 석관을 축조한 특징을 지닌다. 9호 석곽묘의 경우 청동기시대 주거지 1호와 중복으로 만들어졌다. 

소토리 유적의 묘제 축조시기는 출토된 유물을 통해 청동기시대 후기로 추정된다. 유적에서 확인된 토기와 석검, 석촉 등은 양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후기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 양산 신평유적

양산 신평유적은 1977년 지표조사 후, 통도환타지아 유원지 건립에 따라 1992년 발굴 조사되었다. 이곳은 청동기시대부터 삼한시대에 이르는 생활유적과 분묘유적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유적지이다. 유적은 순지리와 지내리 일대의 완만한 구릉에 위치해 있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21동과 삼한시대의 묘제인 옹관묘 6기, 토광묘 1기, 석관묘 1기가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구릉 정상부를 중심으로 중소형 주거지 2~3기가 무리지어 분포되어 있었다. 형태는 방형과 장방형의 수혈주거지가 주류를 이룬다. 옹관묘는 구릉의 동남단 급경사면에 거리를 두고 분포되어 있고 주옹과 부옹의 합구식이 많으며, 단옹만 출토된 것도 있다. 신평유적은 청동기시대 전기 주거문화 및 삼한시대 전기 묘제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신기동 지석묘(계급발생), 평산 주거유적

양산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낙동강 일대의 청동기문화와 관련이 깊으며 기원전 5~6세기 경부터 붉은간토기, 민무늬토기 계통의 농경문화가 시작되었으며, 점차 부가 축적되면서 지석묘(고인돌)이 축조되는 등 신분제 사회를 이루게 된다. 

 

* 삼한시대(원삼국시대, 초기 철기시대) 문화 - 변한과 금관가야

기원전 4세기 중국에서 철기 문화가 들어옴으로써 한반도에서도 국가가 출현하게 된다. 삼한시대의 양산은 변한에 해당하며 이후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기가야연맹(금관가야)의 일원이 된다. 발굴된 양산패총은 풍요로웠던 낙동강 일대의 모습을 보여주며(농경, 수렵, 야철) 김해, 동래, 양산 지역이 서로 긴밀한 교류를 맺으며 발전했음을 알려준다.

 

* 양산 물금유적

물금유적은 양산시 물금택지 신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1997~1998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된 유적으로, 서로 인접한 가촌리유적과 범어리유적을 통칭한다. 가촌리유적은 5~6세기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적으로 2동의 주거지와 다수의 수혈유구가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장방형이며 모두 동쪽에 입구를 조성하였다.

주거지 주변의 많은 수혈유구들은 조개를 굽거나 여러가지 도구를 제작하기 위한 공방시설로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범어리유적은 제철과 관련된 24기의 수혈유구를 비롯해 그 이에도 2기의 우물, 구상유구, 도로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우물은 제철과정에서 필요한 많은 양의 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것으로 하나를 사용하다가 규모가 더 큰 것을 새로 조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도로유구는 양산과 물금을 직선으로 연결했던 것인데, 현대의 도로와 위치와 방향이 거의 일치한다. 출토되는 토기와 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7~8세기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적으로 추정된다.

 

* 양산지역의 삼국시대

양산지역은 신라가 가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였다. 그래서 신라는 일찍부터 영토분쟁을 일으켰고 양산지역은 점차 신라로 복속되었다. 양산패총에서 발견된 토기가 김해시 회현동 패총에서 나온 것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 보아 1~4세기 양산지역이 김해문화권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 물금제철 유적

물금유적은 양산시 신도시 조성계획의 일환으로 물금읍 범어리와 가촌리 일대에 대한 1994년 지표조사를 거처 1997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제철은 철광석(또는 사철)과 연료를 이용해서 철을 분리해내는 과정이다. 사철은 바닷가나 냇가에서 채취하는데 물금유적은 낙동강과 양산천이 합류하는 지점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제척유적에 적합한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다.

가촌리유적에서는 소구릉 사면을 따라 2기의 반수혈주거지와 제철과 관련되는 13기의 수혈유구가 발견되었다. 유구내에서는 토기편, 조개, 철광석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범어리유적 역시 제철과 관련되는 24기의 수혈유구와 2기의 우물터, 양산 평야지역으로 길게 펼쳐진 3개소의 구상유구가 발견되었고, 출토유물로는 송풍관과 철광석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물금제철유적은

양산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철기문화가 발달했음을 보여주는 문화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철기문화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 부부총의 고고학적 의의

부부총이 위치한 북정동 고분군은 입지적인 면에서는 가야의 무덤형식을 무덤의 형태적 면에서는 신라의 무덤 형식을 따르고 있다. 또한 출토유물들은 경주 지역과 유사성을 가지면서도 무덤 형태가 고유의 전통성을 띠고 있어 피장자는 신라의 귀족이나 신라왕조에 흡수된 지방의 호족 고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의 주인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김유신의 아버지로 금관가야 출신이면서 신라의 진골귀족이었던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무덤이라는 설이 있다.

부부총과 고분에서 발견된 출토유물은 우리나라 역사상 국가와 지역에 따른 성격 형성과 특수성 기여라는 면에서 가장 주목된다. 현재 부부총 유물은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 박물관 답사 후기

2023년 양산시립박물관 개관 1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금조총 이야기' 를 보러 갔다.

9월에 동아대석당박물관에 갔는데 금조총에 관련된 유물이 전시실에서 철수되었다고 한다.

해설사 말은 유물을 교체하는 중으로 전시실 일부는 출입금지 중이었다.

인터넷으로 양산박물관은 특별전을 하고 있나 하고 검색했더니 동아대학교 발굴팀이 발굴한 금조총 유물들이

장기 임대 형식으로 양산박물관으로 이관했고 기념하여서 특별전을 준비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그래서 가서 본 금조총 전시관을 돌아본 소감은 아담하게 유물을 잘 전시했다는 느낌이다. 

무덤 한 곳에서 나온 유물의 양이야 차이가 있겠지만 유물의 성격이 어떠한가에 무게를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유물들의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