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울산박물관 3 : * 통일신라`고려`조선 시대 이후의 울산

부실이 2023. 2. 26. 23:00

* 통일신라시대 - 울산 사람들의 생활

통일신라시대 울산은 농경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였지만, 바다를 무대로 다양한 생업 활동도 지속했다. 반구동 유적과 같이 항구와 관련된 시설의 존재를 통해 상업과 무역업에도 종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불교문화가 더욱 확산하고 발달하면서 화장 풍습이 새로운 장례 문화로 등장하였고, 바다가 보이는 곳에 건물을 세워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산하동 화암 유적

 

* 도장 무늬로 화려하게 - 통일신라시대 토기

통일신라시대에는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토기가 많이 만들어졌다. 이전보다 훨씬 더 고운 점토를 사용하여 굽다리 사발`뚜껑`바리`장군`뼈 항아리 등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또한 다양한 무늬의 도장을 찍어 그릇을 장식하는 도장무늬 토기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토기의 일부분에만 간단한 무늬를 찍어 장식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토기 모든 면에 다양한 무늬를 찍어 장식하였다.

 

* 뼈 항아리

삼국시대 말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불교문화가 확산되면서 장례문화가 시신을 땅에 묻는 매장에서 불에 사르는 화장으로 변화하였다. 화장 후 남은 뼈를 담는 그릇으로 도장무늬 화려하게 장식한 뼈 항아리를 사용하였다.

 

* 벼루 - 글자를 널리 사용하다

벼루는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이 문자를 활발하게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왕궁과 같이 급이 높은 유적이나 위계가 높은 관청시설 혹은 사찰에서 주로 확인된다. 반구동 출토 벼루

 

* 흥려부로 격상되다 : 고려

통일신라시대 말, 호족 출신인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후,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 유민을 포용하여 936년 완전한 통일 국가를 세웠다. 고려시대는 통치체제를 새롭게 정비하였으며 국내에서는 상공업이 발달하고, ``여진`일본`서역 등과의 대외 무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울산은 통일신라시대 말 호족 출신 박윤웅이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흥려부(고려를 흥하게 한다)로 격상되었다. 고려시대 울산의 중심지는 학성산과 토성이 있는 반구동 일대였다. 울산은 울주라 불렸으며 별호는 학성이었다. 언양 지역은 헌양으로 불렸다가 언양으로 바뀌었다. 또한 성종이 997년에 한반도 동남쪽을 순행하던 중 태화루에 방문하여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고려시대 후기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 1385(우왕 11)에 읍성(고읍성), 1390년에 언양읍성을 쌓았다. 고려시대 유적으로 삼정리 유적과 진현`압골 유적에서 청자 가마터` 성암동 유적에서 무덤, 천전리에서 관아터, 그리고 연자도 유적에서 고려귀족의 생활유적이 발견되어 고려시대 울산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 고려시대 울산사람들의 생활

고려시대 울산 사람들의 생활 모습은 주로 무덤에서 발견되는 껴묻거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움무덤을 만들거나 화장이 성행하였다. 신분과 위계에 따라 무덤의 형태와 껴묻더기의 질과 양, 조합의 차이가 있었다. 무덤에는 자기와 도기, 금속기 등을 주로 같이 묻었다. 자기는 완과 발`대접 등을 묻었다. 도기는 편병`반구병`항아리 등을 묻었다. 금속기로 청동합``잔과 같은 그릇과 동곳`거울`숟가락과 젓가락 그리고 동전과 철제 가위 등을 주로 묻었다. 고려시대 울산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는 유적은 효문동 유적, 복산동 유적, 연자도 유적 등이 있다.

 

* 고려시대 울산의 도자기

고려시대 사람들은 청자와 도기를 주로 사용하였다. 청자는 고운 점토로 그릇의 형태를 만들고 표면에 유약을 발라 1200~1250도의 고온에서 구워내어 푸른빛을 띠는 자기이다. 주로 귀족이나 고위층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도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은 그릇으로, 일상생활에서 저장과 운반을 비롯해 다양한 용도로 제작되었으며 생활 전반에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자기로 만들지 못하는 대형 그릇을 대부분 도기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울산에서는 삼정리 유적`천전리 유적`직동리 유적에서 청자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삼정리 유적에서는 일반생활에서 사용되는 청자가, 직동리 유적에서는 관청에서 사용하는 청자가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 고려시대 울산 귀족의 생활 유적, 연자도

연자도는 울주군 온산읍 당월리 앞바다의 작은 섬으로, 공장을 짓기 위해 매립이 결정되면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12~13세기 건물지 21, 구덩이 278기가 확인되었으며, 건물지에서는 온돌 시설이 발견되었다. 또한 12세기 후반 ~ 13세기 후반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양질의 청자`도기`기와와 함께 금동불상과 철솥`철추도 출토되었다. 연자도유적은 대몽항쟁기 기간 몽골의 침입을 피해 울산지역 지배 세력이 일시적으로 피난 간 섬, 또는 해상 무역이 이루어졌던 근거지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연자도는 매립되어 섬이 아니지만 4호 건물지는 울산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이전하여 전시하고 있다.

 

* 조선의 울산 - 방어와 군사 중심 도시

고려시대 말 새롭게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 사대부가 힘을 합쳐 조선을 건국(1392)하였다. 조선은 유교 사상과 민본 이념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 양반 관료 체제를 갖추었다. 또한 전국을 8도로 나누고, 이후 그 아래에 부```현을 두어 지방을 다스렸다.

조선시대 울산은 울산군()과 언양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또한 국사적 요충지였던 울산에는 경상도 육군과 수군 본부에 해당하는 경상좌병영과 경상좌수영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이 왜성을 쌓아 주둔하기도 하였으며, 정유재란 당시 조명연합군과 도산성에서 두 차례나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조선 전기 일본인들의 왕래와 거주를 허가했던 삼포 중 하나인 염포가 위치하였다. 또한 방어진에 말을 기르기 위한 목장이 있었다. 울산은 소금과 철 생산지로도 유명하였다.

 

* 임진왜란 시기 울산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울산은 왜군에 점령되었다. 1593년 평양성 전투 이후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이 남해안에 왜성을 쌓을 때 울산 서생포왜성은 왜군 장수 가토기요마사의 주둔지가 되었다. 울산의 왜군은 남해안에 주둔한 총병력 43천 명 중 6천명에 달했다. 이들은 1596(선조 29) 5월 일본으로 철수하였다가 정유재란으로 돌아온 뒤 159811월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줄곧 울산에 머물렀다. 이로 인해 울산인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 징비록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냈던 서애 류성룡(1542~1607)1592~1598년까지 경험한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징비록에는 임진왜란의 원인, 전쟁 전후 조선 왕실의 상황, 전투의 전개 과정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차 울산 도산성 전투가 원인이 되어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오해하게 되었다. 이 때 류성룡은 영의정으로서 조선을 변호하러 명나라로 떠나지 않으려 한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후 낙향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으며, 1647(인조 25)에 간행되었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일본에서 간행된 징비록 : 1695년에 교토에서 중간된 기록이 있으며, 본래 징비록에 더하여 조선의 군현이 적힌 도표까지 들어있을 정도로 자세하였기에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조선 왕실이 징비록의 일본 유출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 울산 지역민의 활동

조선후기 울산 지역사회는 문풍을 일으키고자 노력하였다. 1694(숙종 20) 구강서원에 사액을 받도록 했고 1713(숙종 39) 반고서원을 건립하기도 했다. 1749(영조 25)에는 최초의 사찬 읍지인 [학성지]를 편찬하였다. 울산의 과거 합격자도 늘었다.

1862(철종 13)1875(고종 12)에는 아전의 전횡과 과도한 세금을 견디지 못하여 농민항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 방어진목장과 달천철장, 그리고 염막

조선시대 국가에서 쓰는 말을 기르기 위해 울산 방어진에 목장이 설치되었다. 염포 동쪽 산 정상에 목장이 그려져 있는데 1651(효종 21)에 새롭게 마성을 쌓았다. 방어진목장은 전임 감목관이 배치될 정도로 중요했다. 목장 주변에 호랑이가 많았기에 감목관의 주요 임무는 호랑이 피해를 막는 일이었다고 한다.

울산지역의 철 생산량은 영남지방에서 가장 많았다. 소금 생산지로도 유명.

 

* 조선후기 울산 봉수꾼의 생활

봉수대는 주요 경로에 들어있는 직봉과 보조 역할을 한 간봉으로 구별된다. 남목봉수(주전봉수)는 간봉이다. 1858~1896(고종 33)에 해당하는 시기 봉수대의 운영 모습, 봉수꾼의 생활을 알 수 있는 고문서가 남아 있다.

 

* 왜적 토벌에 울산읍민들의 공이 가장 컸다

임진왜란 시기 내내 왜군의 점령 하에 있었던 울산 지역사회는 왜군에 맞서고자 노력했다. 기박산성에서 의병을 결진하고, 개운포`태화강`건천`사자평 등지에서 왜군에 맞서 전투를 치렀다. 서생포회담에는 통역이 되어 명나라와 일본의 숨은 의도를 조정에 전하기도 하였으며, 도산성 전투 때에는 조명연합군을 도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8(선조31) 선조는 교서를 내려 당시 울산군수였던 곽재우 등에게 울산 의병의 노고를 치하했다고 전한다. 또한 좌의정 이덕형의 건의를 바탕으로 1593년에는 언양현과 합쳐 울산도호부로 승격되었다.

 

* 근대 울산

1896년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경산남도 울산군`언양군이 되었으나, 1914년 언양군이 울산군에 통합되었다. 울산은 방어진과 장생포를 중심으로 어업이 발달하였으며, 읍내를 중심으로 전화, 우편, 전기, 철도 등 근대 문화가 들어왔다. 지역인사들이 모여 민족교육을 위한 근대 학교도 설립하였으나, 조선교육령이 공포되면서 점차 우리말과 우리 글을 자유롭게 가르치기 어려워졌다. 울산에도 정기 시장이 형성되고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으나, 일본인들이 도매상`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점차 울산 상권을 장악하였다.

1919년에는 언양`병영`남창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36년 울산 달리에서 동경제국대학 학생과 일본의 민속조사단체가 달리 주민들을 대상으로 위생`민속조사를 하였다.

1936년 울산 달리 조사와 일제의 울산 공업화 계획

조선축항주식회사는 1930~40년대 울산의 입지조건에 주목해서 [울산 공업항 건설계획]을 수립, 1941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수정 허가를 받아 진행하게 되었다. 울산에 공업항 개발, 항로신설, 공업지대 개발 등이 주 내용이었으나 1945년 광복을 맞아 중단되었다.

 

* 장생포와 방어진

근대 울산은 어업이 발달하였다. 1899년 러시아는 장생포에 고래 해체장을 설치하여 울산을 고래잡이 기지로 활용했으며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일본이 포경기지로 활용하였다. 일본은 방어진도 어업기지로 개발하였다. 1912년에 일본인 거주지가 3501400명으로 늘어나, 오카야마현 히나세 어민들이 집단촌을 이루어 히나세 골목이라 불렸던 마을이 있을 정도였다. 1930년이 되면 방어진은 세계 3대 정어리 어장으로 발전하였다.

 

* 근대 울산의 사회 경제

1876년 개항 이후 우리나라는 일본을 비롯하여 서양 여러 나라와 국교를 맺고 통상 교역을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경제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외국의 값싼 공산품이 들어오고 국내의 곡물이 대량으로 수출되는 부작용도 발생하여 전반적인 물가상승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사실 이전 시기 울산 산업은 비료, 곡물 등 소규모의 전통적인 매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가 되면 울산에도 방도리 시장 등 많은 정기시장이 형성되면서 울산의 사회경제가 크게 발전하였다. 많은 일본인들이 방어진, 장생포, 병영 등지에 들어와 근대적인 도매상,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점차 울산 상권을 장악하였다.

 

* 독립을 향한 염원

3`1운동의 물결에 따라 울산에서도 언양, 병영, 남창 등지엣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본군경에 의해 희생자가 생겼으며, 일부는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박상진은 광복회 총사령을 맡아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붙잡혀 1921년 대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최현배는 국어문법서 [우리말본] 집필에 몰두하여 한글을 지키는데 헌신하였다. 동요 [눈꽃송이]의 작사가인 서덕출은 1925년 잡지 [어린이][봄편지]를 발표하여 독립을 향한 민족의 염원을 아름다운 동시로 표현하였다.

191942: 언양 의거

191944 ~5: 병영 의거

191948: 남창 의거

 

* 박상진(1884~1921)

박상진은 일제강점기 국내에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했다. 1902년부터 의병장 출신인 허위에게 배웠다.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한 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으나 사퇴했다.

1912년부터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세워 독립운동의 군자금 조달 및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19151월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채기중을 중심으로 결성된 풍기광복단을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에 취임했다.

그는 대한광복회의 이념을 근대국민국가의 공화주의로 하고 무장혁명노선을 표방했다. 군자금 모금을 위해 친일 부호를 처단하기로 계획했다. 1917년말과 1918년초에 걸쳐 부호 장승원, 면장 박용하 등을 처단했다. 그러나 이종국의 밀고로 1918년 초 사형선고를 받아 순국했다. 1960년 울산에 추모비가 세워졌고, 천안에는 광복회기공비가 건립되었다.

 

* 광복 이후 울산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일본인들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고, 귀환 동포의 인구 유입이 급격히 이루어졌다. 갑작스럽게 광복으로 울산은 변변한 교과서조차 없이 9월 중순 이후에야 개학할 정도였다. 그토록 염원하던 광복을 맞이했지만, 울산은 곧 미군정체제 아래로 들어갔고, `우의 대립 문제가 불거졌다. 경제적인 면에서 울산은 농업, 포경업을 중심으로 한 어업 도시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일본과의 경제 교류가 끊어지면서 방어진항은 무역항으로의 기능을 상실했다.

광복 이후 울산 상북 출신 민속학자인 송석하는 조선산악회의 회장으로 1947년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를 추진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울산 언양 출신 소설가인 오영수는 군에 자원입대하여 종군작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 경상좌도병영성

경사좌도병영성은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영성을 줄인 말이다. 조선시대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동남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병마절도사’(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무관직)가 머물던 성이다.

1417(조선-태종 17) 지금의 병영성이 축조되었다. 1426(세종 8)좌병영은 경상우도 병영인 창원 합포에 합쳐지기도 하였으나, 1437(세종 19) 울산군이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이 재설치 되었다. 경상좌도병영성은 경상좌도 지방군의 최고사령부 역할을 하였기에 외적의 침입을 막는 울산의 지리적 중요성을 담당하였으나, 대부분은 군사적인 기능을 위해 설치되었다. 사방으로 성문을 두었고, 서문과 북문 주위에는 옹성(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을 쌓았으며, 성벽 곳곳에 치성(성벽에 기어오르는 적병을 쏘기 위해 만든 시설) 등을 설치하였다. 성안에는 관청`창고`무기고`우물 등 다양한 건물과 시설이 있었다.

 

* 울주 언양읍성

왕이 거주하는 수도 서울의 둘레에 쌓은 성을 도성이라고 한다면, 왕이 아닌 각 군현의 주민과 관리를 보호하고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읍성이라고 부른다. 언양읍성은 언양현감이 생활하며 언양현의 살림과 통치를 책임진 곳이다. 언양읍성은 1390(고려 공양왕2) 토성으로 만들었으며, 1500(연산군 6)에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읍성은 평상시에는 행정적인 기능을 하고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군사적인 기능을 하였다. 4면에 문을 만들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각루(보초병이 망을 보던 곳)`옹성`치성 등을 만들어 적의 침입을 대비하였다. 성안에는 관아와 객사`향교 같은 관공서를 뒀으며, 우물이나 연못 같은 시설도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