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의 연표
구석기 70만 년 전: 한반도 인류 출현 신석기 8천 년 전 : 토기 등장. 간석기 사용. 반구대암각화 제작 청동기 2천 년 전 : 민무늬토기 사용. 고인돌 축적 청동기 1천오백년 전 : 청동기 제작. 논농사 시작 철기(삼한) 4백년 전 : 철기 문화 보급. 한국식동검 등장 철기(삼한) 1백년 전 : 철기 문화 확산. 와질토기 사용 삼국(신라) 400년 : 신라에 병합. 진흥왕, 천전리 각석 방문 539년. 태화사 창건 643년 통일신라 676년 : 영축사 창건 683년. 관문성 축조 722년. 처용 등장. 망해사 창건 875~886년 고려 918년 : 박윤웅, 고려 태조에게 귀부 930년. 울산 흥려부 승격 940년. 성종, 태화루 방문 997년. 울주에 읍성 축조 1385년. 언양에 읍성 축조 1390년 조선 1392년 : 울주를 울산으로 개칭 1413년. 경상좌도 병영성 축조 1417년. 삼포(염포) 개항 1426년. 경상좌수영 개운포 이전 1459년. 조선 1592년 : 임진왜란, 울산 함락1592년. 정유재란, 도산성 전투 1597~1598년. 울산군에서 울산도호부로 승격 1598년. 울산농민 항쟁 1862년. 울산군, 언양군으로 행정구역 개편 1896년. 일제강점기 1910년 : 언양군, 울산군에 통합 1811년. 울산만세운동 1818년. 울산읍 승격 1841년. 울산교 준공 대한민국 1948년 : 울산공업센타 지정. 울산시 승격. 울산박물관 개관 2011년 |
* 사람이 살기 시작하다 :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 인류는 처음으로 불을 사용하고 뗀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무리 지어 먹을거리가 있는 곳을 찾아 이동하면서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였다. 동굴이나 강가에 일시적으로 머무르면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를 돌`나무`뼈 등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조각품을 만들거나 동굴 벽화를 그리는 등의 예술 활동도 하였으며 죽은 자를 위한 장례 의식을 치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구석기시대는 약 70만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울산에서는 무거동 옥현 유적, 신화리 유적, 입암리 유적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약 4만 년 전~1만년 전)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돌을 깨뜨려 도구를 만들다 :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돌을 깨트려 만든 뗀석기를 주로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주먹도끼나 찍개와 같이 하나의 석기를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시간이 지나고 석기를 다듬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긁개나 밀개와 같이 쓰임과 용도에 맞는 각각의 석기를 제작하였다. 후기 구석기시대가 되면 고운 입자로 이루어진 새로운 종류의 돌을 사용하여 돌날과 작은 돌날처럼 크기가 더 작고 정교한 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 주먹도끼 : 구석기시대의 맥가이버 칼. 구석기시대 초기에, 좀더 거친 형태의 뗀석기인 찍개의 뒤를 이어 나타났다. 이후 구석기시대 중후기까지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의 한탄강변에 세계적인 주먹도끼 유적지가 있다.
* 바다를 무대로 살아가다 :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에는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후가 점차 따뜻해지고 바닷물의 높이가 높아져 강이 생기고 내륙 깊숙이 바닷물도 들어왔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정착 생활을 시작하고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살면서 고기잡이`사냥`채집으로 식량을 얻었으며, 점차 가축을 기르고 농사도 시작하였다. 또한 다양한 장신구를 만들고 반구대 암각화와 같은 예술 작품도 남겼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는 빙하기가 끝난 이후인 기원전 8천년 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울산은 신암리 유적, 우봉리 유적, 황성동 유적, 궁근정리 유적 등에서 이른 시기부터 늦은 시기의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다. 이들 유적은 주로 해안가와 강가에 분포하는데, 이를 통해 신석기시대 울산 사람들은 식량과 자원을 얻기 쉬운 바다와 강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 바다, 삶의 터전 :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곳에 주로 머물며 생활하였다. 울산은 주변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기온이 온화하였으며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여 물고기와 조개가 풍부하게 서식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해안가에 정착한 사람들은 돌`뼈`조개껍데기로 만든 다양한 도구로 낚시하거나 그물을 이용하여 식량을 얻었다. 또한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고래`상어와 같은 바다 동물이나 큰 물고기를 잡기도 하였다.
* 사냥을 하고 농사를 시작하다 :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어로 활동 이외에도 사냥이나 야생 식물 채집, 농사 등 다양한 생업 활동을 하였다. 사냥에서 잡힌 동물은 식량과 각종 도구를 만들 수 있는 뼈를 제공해 주었다. 신석기 시대 이른 시기에는 도토리와 같은 야생 식물을 채집하여 먹다가 후기에는 조`기장과 같은 잡곡 농사를 시작하였다.
* 토기를 만들고 무늬를 새기다 : 신석식시대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인류 최초로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이는 인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토기는 손으로 흙 반죽을 빚어 모양을 만들고 야외에 위치한 가마에서 낮은 온도(600~700도)로 구워내어 붉은 갈색을 띤다. 운반`저장`조리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토기 표면에는 덧무늬, 눌러 찍은 무늬, 그은 무늬, 짧은 사선 무늬, 겹아가리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이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예술과 정신세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울산에서는 초창기를 제외한 전 시기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특히 신암리 유적에서는 다양한 덧무늬 토기가 많이 출토된다.
* 풍요와 아름다움을 기원하다 :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생활이 안정되면서 팔찌나 목걸이`귀걸이를 만들어 아름답게 꾸몄다. 옥으로 만든 귀걸이는 무덤에 묻기도 하였다. 또한 흙을 빚어 사람의 얼굴`여성의 몸`배 등 다양한 모양의 예술품을 만들었다. 장신구나 예술품은 개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속한 무리의 신앙`의례에 사용하거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목적도 있었다.
* 다양한 조개 -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어떤 조개를 먹었을까?
바닷가에 위치한 황성동 유적의 조개무지에서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많이 발견되었다. 홍합`가리비`참굴`전복`우럭`피뿔고둥`피조개`왕우럭조개 등 종류도 다양하며 그중에서 굴과 홍합이 가장 많다. 먹고 난 조개껍데기로 어로 도구나 장신구 등을 만들기도 했다.
* 신석기시대 토기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토기에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 토기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토기 안쪽을 살펴보면, 점토 띠를 쌓아 올려가며 만든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바닥에 찍힌 나뭇잎 모양은 바닥을 받침대에서 분리하기 위하여 나뭇잎을 깔고 작업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기원전 1만년 : 초창기 : 고산리식 토기 :
바닥이 평평하고 무늬가 없는 토기로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
: 6천년 : 조기 : 덧무늬토기 :
가는 점토띠를 붙여 다양한 무늬를 기하학적으로 장식한 토기
: 4천 백년 : 전기 : 눌러 찍은 무늬 토기 :
끝이 뾰족하거나 둥근 도구로 눌러 찍어 장식한 토기
: 3천5백년 : 중기 : 빗살무늬토기 :
도구로 누르거나 그어서 만든 선으로 빗살무늬처럼 장식한 토기
*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모형 : 신석기 시대로 추정
울산을 가로지르는 태화강 상류의 대곡천 절벽에 위치한다. 너비 약 8미터, 높이 약 5미터의 편평한 바위 위와 그 주변 바위에서도 그림이 확인된다.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하여 고래와 같은 바다동물과 육지동물, 동물 사냥과 고래잡이 모습 등 약 30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 그림들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사냥과 해양 어로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울산 신석기시대 대표 유적인 황성동 세죽 유적에서 고래 사냥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어 반구대 암각화는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암각화의 우수성과 가치를 알리기 위해 실물 크기의 모형으로 제작하여 전시하고 있다.
* 청동기 : 풍요로운 삶의 터전
청동기시대에는 벼농사를 비롯한 본격적인 농경이 이루어졌다. 대규모 마을이 생겨나고 마을을 다스리는 지배자도 등장하였다. 일상생활에서는 주로 민무늬 토기`간석기`나무로 만든 도구가 사용되었다. 청동으로 만든 칼이나 거울은 권위를 상징하는 의기로 제작되어 지배자와 같은 특별한 사람만 소유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2천년 경에서 기원전 1천5백년 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울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의 청동기시대 유적이 밀집되어 있어 사람이 살기좋은 환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요 유적으로 검단리 유적, 무거동 옥현 유적, 다운동 유적, 연암동 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 확인되는 유구와 유물은 ‘울산식 집자리’, ‘검단리식 토기’등으로 불리며 후기 청동기시대의 영남 및 동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되는 독특한 문화 양상을 보여준다.
* 청동기 - 힘과 권력의 등장
농경의 발달로 잉여생산물이 증가하면서 이를 차지하기 위해 마을간 싸움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다툼 속에서 힘과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등장하였다. 지배자는 마을을 다스리고 이웃 마을과 전쟁하면서 점차 큰 힘을 가졌고, 고인돌과 같은 커다란 무덤을 만들어 권력을 과시하였다.
고인돌 이외에도 돌널무덤`움무덤`독널무덤`주구무덤 등을 만들었고 집터를 무덤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무덤 안에서 간돌검`청동검`화살촉`옥`붉은간토기와 같은 유물들이 발견되는데, 이는 무덤 주인의 지위나 권력을 드러내는 상징물로 보인다. 울산에서도 언양읍 서부리, 상북면 향산리 등에서 거대한 고인돌이 발견되지만, 그 수가 집터에 비해서 매우 적다.
* 청동기 - 사냥, 여전한 생계 수단
청동기시대에는 농경과 더불어 사냥과 어로도 여전히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사냥과 어로 활동을 통해 부족한 식량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고, 고기를 통해 단백질도 섭취할 수 있었다. 주로 돌화살촉으로 만든 화살과 돌창으로 사냥하였으며 함정 시설을 만들어 사냥하기도 하였다. 함정은 땅을 깊게 파고 뾰족한 막대를 꽂아 만든 시설로, 청동기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사냥 방식이다.
*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일구다 :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 초기에는 2~4기의 집들이 모여 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백 기의 집들이 모여 규모가 큰 마을을 이루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주로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있는 배산임수 지역에 마을을 만들었다. 마을 안에서 주거구역`매장구역`경작지 등으로 공간을 만들어 생활하였으며,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환호`목책`망루 등의 시설을 만들었다.
집의 형태는 움집이며 내부에는 화덕`기둥 구멍`곡식 저장 구덩이 자리 등이 발견된다. 초기에는 큰 집에서 대가족이 살다가 후기로 갈수록 집의 크기와 가족 수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 벼농사의 시작과 농기구의 발달 :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조`수수`보리`콩과 같은 잡곡 농사와 함께 본격적인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눈은 하천이 범람한 곳이나 골짜기의 아래쪽과 같이 비옥한 땅에 작은 규모로 만들어졌다. 농경의 발달은 농기구의 발달로 이어졌다. 돌삽`곰배괭이`돌보습으로 땅을 일구고, 반달돌칼과 돌낫으로 수확했으며 갈돌과 갈판`공이와 절구 등으로 수확한 농작물을 가공하였다. 농경의 본격적인 발달은 노동력과 수확물을 관리하고 분배하는 계층이 등장하는 등 사회적인 모습도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간돌검
간돌검은 돌을 정교하게 갈아 만든 짧은 검으로, 고인돌과 같이 특정한 무덤이나 규모가 큰 집자리에서 주로 출토된다. 이를 통해 마을 내에서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검손잡이에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 검손잡이가 과장되어 표현된 것들은 간돌검이 상징적이고 의기적인 도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보여준다.
* 달모양`별모양 도끼
편평하고 납작하게 만든 돌을 곱게 갈아 달 혹은 별 모양으로 만든 석기이다. 중간에 자루를 끼울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있다. 명확한 용도를 알 수 없으나 의례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 붉은간 토기
붉은간 토기는 고운 점토를 사용하며 형태를 만들고, 표면에는 산화철을 녹인 액체를 발라 매끄러운 도구로 문질러 구운 토기이다. 청동기시대 생활 토기인 무문토기와 달리 바닥이 둥근 것이 많고, 굽다리를 붙인 것도 있으며 주로 무덤에서 부장품으로 출토된다. 간돌검과 함께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 가락바퀴
가락바퀴는 실을 만들 때 사용했던 도구이다. 구멍에 막대를 끼워 축을 만들고, 솜이나 동물털 등의 섬유를 축에 이어 회전시켜 꼬아서 실을 만든다. 실을 감는 도구인 가락을 끼워 사용해서 가락바퀴라고 부르며 흙이나 돌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 검단리식 토기
검단리식 토기는 깊은 바리모양 토기에 낟알무늬를 눌러 찍어 새긴 토기를 말한다. 주로 동남해안 지역에서 확인되며 검단리 유적에서 대표성이 인정되어 검단리식 토기라고 부른다. 울산식 집자리와 함께 후기 청동기시대 동남해안 지역의 문화 특징 중 하나이다.
* 그물추 : 사는 곳에 따라 그물추 모양이 달라진다?
그물추는 청동기시대 대표 어로구로 그물을 바닷속에 가라앉게 하는 무게추로 사용하였다. 형태는 기둥 모양의 원통형과 동글납작한 원형이 있다. 원통형은 무게가 무겁고 큰 하천변과 바닷가 주변에서 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큰 물고기를 잡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납작한 원형 모양은 무게가 가볍고 내륙의 작은 하천변에서 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작은 물고기를 잡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울산에서는 주로 주거지에서 많은 양이 발견되는데, 대부분의 취락에서 어로 활동도 중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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