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2일 방문
* 대곡댐 편입부지의 유적 발굴조사와 그 의미
대곡천은 태화강의 상류로, 태화강 발원지인 백운산 탑골샘에서 흘러온 물이 여러 지류와 모여 천을 이룬다. 울산광역시의 식수원 확보를 위해 대곡천 유역에 대곡댐 건설을 계획하면서 편입부지에 대한 학술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지역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구미리`삼정리`천전리 일부에 해당된다. 이 행정 명 안에는 여러 개의 마을이 있다.
1998년 창원대학교 박물관이 편입부지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양수정유적 등 20여 개소의 유적을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1999년 9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4차에 걸쳐 시굴조사를 했다. 아울러 2000년 3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5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이를 통해 청동기시대 주거지, 삼한~삼국시대 고분군, 통일신라시대의 절터`건물터와 석축유구, 기와가마`토기가마 등과 조선시대 건물지`기와가마`분청사기가마`백자가마`옹기가마`제련로 등이 조사되었다. 유물은 1만3천여 점이 출토되었다.
이렇게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생활유적과 고대의 고분 변천에 대한 자료를 얻었으며, 울산의 역사문화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유적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로 인해 울산대곡박물관이 건립되었다.
대곡댐 편입부지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고, 고대에는 강력한 정치집단이 존재했으며, 조선시대에는 각종 생산시설이 있어 대규모 생산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대곡천 유역은 단순한 하천이나 골짜기가 아니었다. 이 지역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되어,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다양한 성격의 공간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 울주 천전리 각석을 방문한 진흥왕
539년(법흥왕 25) 여섯 살 어린아이로 대곡박물관 근처인 천전리각석에 왔던 심맥부지(후에 진흥왕)에 대해 소개한 영상이다. 심맥부지는 천전리 각석에 와서, 14년 전인 525년 이곳을 다녀갔던 아버지(사부지 갈문왕)을 그리워하며, 어머니(지몰시혜비)와 함께 자신들의 방문 사실을 바위에 새겼다. 다음 해 일곱 살의 심맥부지는 540년 왕위에 올라, 신라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진흥왕이 되었다.
* 대곡천 유역의 철 생산
제철은 쇠부리, 야철, 제련 등으로 불리는데, 철 생산과 철기제작에 관한 전체 공정을 뜻한다. 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원료가 되는 철광석, 연료를 위한 숯(목탄), 운반을 위한 교통로 등 다양한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대곡천 유역은 이러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철 생산지로 활용되었다. 울산지역은 삼한시기부터 달천광산(달천철장) 개발로 우리나라 철기 생산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달천광산의 철광석과 토철의 특징은 비소 함량이 높다는 것이다. 대곡댐 편입부지에서는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와 방리(천전리에 속한 지명), 두동면 삼정리, 구미리의 대밀에서 야철지가 조사되었다. 천전리의 방리야철지 가운데 제1호는 18세기 무렵에 2차에 수리하면서 장기조업이 이루어졌던 용광로이다. 이것은 현재 대곡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이전 복원되어 있다.
노에서 나온 숯을 분석해보니 모두 소나무였다. 대곡댐 편입부지의 야러 야철지에서 철 조직에서 비소가 검출되었는데, 원료는 달천광산에서 채굴하여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노의 뒤쪽에는 송풍시설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 대곡천 유역의 숯 생산
숯은 여러 용도로 사용하였는데, 철을 생산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양의 숯이 필요했다. 수은 일반 땔감과 달리 열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대곡댐 편입부지에서는 울주군 두동면 삼정리유적과 하삼정유적 등에서 숯가마(탄요)가 조사되었다. 삼정리유적에서는 백탄가마와 흑탄가마가 각각 2기 확인되었다.
백탄가마는 등고선 방향과 평행되게 축조되었으며, 땅을 ㄴ 형태로 굴착하여 측벽과 측구를 만들고 천장을 구축한 반지하식 구조의 평가마이다. 흑탄가마는 반지하식 평가마로, 평면형태는 세장방형으로 분구와 연도를 가진 구조로 판단된다. 이 조사지역의 서쪽 저지대에서는 삼정리 야철지로 불리는 제련로가 조사되었다. 대곡천 유역의 숯가마는 숯이 이 지역에서 진행된 생산 활동을 뒷받침해 주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 대곡천 유역의 도자기 생산
대곡댐 편입부지를 포함하는 대곡천 유역은 고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토기`분청사기`백자`흑유자기`옹기 등을 생산했던 곳이다. 이 지역은 양질의 흙과 더불어 물과 땔감이 풍부했기 때문에 도자기 생산에 유리했던 것이다.
천전리의 방리유적에서는 토기가마 3기와 함께 인화문토기가 조사되었다. 천전리의 고지평 유적에서는 조선전기의 분청사기 가마가 조사되었다. ‘경주부 장흥고’ 명을 비롯한 명문 분청사기가 출토되었는데, 이 지역은 조선시대 때 경주부에 속한 지역이었다. 두동면 삼정리의 상삼정 유적에서는 17~18세기 대의 백자가마 3기가 조사되었다. 이곳에서는 백자를 비롯한 흑유자기를 생산했다. 천전리의 방리유적1과 방리유적2에서 각각 17~18세기 대의 백자가마 1기가 조사되었다.
가마는 계단식의 칸가마 구조이다. 그리고 천전리유적과 천전리의 방리 옹기요지에서는 18~19세기 대의 옹기가마가 조사되었다. 이렇게 한 지역에서 오랜 기간동안 각종 도자기를 생산했다는 점에서 대곡댐 편입부지는 매우 주목되는 지역이다.
* 대곡천 유역의 기와 생산
기와는 점토를 재료로 제작 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대곡댐 편입부지에서는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의 방리유적2에서 통일신라 기와가마 3기가 조사되었다. 여기서 출토된 기와는 인근 지역인 방리유적 건물지에서 출토되었다. 이 가마는 토기와 기와를 함께 생산했던 가마로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기와가마로는 천전리유적에서 기와가마 10기와 미완성 기와가마 2기가 조사되었다. 그리고 천전리의 방리유적2에서 기와가마 1기, 구미리의 양수정유적에서도 확인되었다.
천전리유적 기와가마는 조선 후기로 추정되는데, 15세기 전반대의 기와도 출토되었다. 대곡천 유역의 장천사지 등의 절터에서는 천전리 기와가마와 동일한 기와가 발견되었다. 천전리 기와가마에서 생산된 기와가 주변 지역으로 공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대곡천 유역의 생산유적 분포
대곡댐 편입부지 발굴조사에서는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생산유적이 확인되었다. 대곡천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면서 유적이 분포하는 곳을 보면 울주군 두동면 구미리`삼정리`천전리에 속한 지역이었다. 발굴기관에서는 유적명을 이러한 행정명과 함께 자연지명을 사용하여 이름 붙였다. 그래서 유적 이름이 다양하게 붙여졌다.
이 지역에서는 고대의 토기가마`기와가마에서부터, 조선시대 기와가마`분청사기가마`백자가마`옹기가마`숯가마`제련로 등이 조사되었다. 이렇게 좁은 골짜기에서 시기를 달리하면서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생산활동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곳이라 할 수 있다.
* 이런 유적은 난생 처음입니다.
이처럼 많은 무덤이 나올 줄 몰랐습니다. 이곳은 거대한 공동묘지입니다. 마을 전체가 무덤을 깔고 있었던 것입니다. 집들을 모두 철거하고 보니, 밑바닥이 전부 무덤이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무덤 위에 마을이 조성됨으로써 봉분이 비록 깍여 없어지긴 했으나 그 밑바닥 유적과 유물은 고스란히 남게 되었던 것이지요.
- 발굴 책임조사원 인터뷰(2003.7.22.)
* 하삼정 고분군 ‘나’지구 목곽묘(나무덧널무덤)12호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삼정리의 하삼정 마을에서 조사된 목곽묘 12호이다. 묘광의 크기는 길이 400cm 너비 176cm, 잔존깊이 39cm이다. 목곽의 크기는 길이 320cm, 너비 76cm, 잔존깊이 39m이다. 원 지반을 굴착하여 목곽을 안치한 후, 목곽과 묘광 사이에 10~50cm 활석으로 보강하여 축조하였다. 그래서 위석목곽묘라 구분하기도 한다. 하삼정 고분군의 목곽묘 129기 가운데 위석목곽묘는 22기로 확인되었다. 목곽묘 12호의 시상대는 세장방형으로 20cm 내외의 납작한 할석을 사용하여 주공간에 마련했다. 동쪽 벽과 서쪽 벽 쪽에 긴목항아리, 굽다리 긴목항아리 굽다리접시 등의 토기를 부장하였다.
* 하삼정 고분군
하삼정 고분군은 두동면 일대에 대곡댐 건설을 계획하면서 발견되었다. 대곡댐 수몰지역 발굴조사로 생활 유적, 생산 유적, 분포 유적이 확인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과가 하삼정고분군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천기에 가까운 고분이 발견되었다. 단일 면적에서 고분 밀집도가 높은 편이다. 상삼정 마을에서 전읍천과 연화천이 대곡천에 합해져 하삼정 마을에 이른다. 하삼정 마을 북쪽 구릉(하삼정 유적)과 서쪽 구릉 말단부(하삼정고분군)에 고분군이 분포한다.
하삼정 고분군은 기원후 2세기부터 7세기까지 긴 시간동안 조성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무덤이 축조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묘제가 만들어졌다. 널무덤에서 돌덧널무덤, 돌방무덤으로 이어지는 묘제의 변천 양상과 유물의 변화상을 볼 수 있다. 특히 5세기대의 대형 돌덧널무덤이 확인됨에 따라 이 지역에 강력한 정치체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신라지역에 속하면서도 가야의 요소를 반영한 묘제가 나타나고 있어 양 지역의 교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 하삼정 고분군의 무덤 형태
널무덤 목관묘 |
독무덤 옹관묘 |
나무덧널무덤 목곽묘 |
돌덧널무덤 석곽묘 |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묘 | 돌방무덤 석실묘 |
땅을 파고 판제나 통나무로 만든 널을 둔 형태 | 큰 독이나 항아리 등의 토기에 주검을 넣어 묻는 형태 | 주검과 껴묻거리를 보호하는 덧널을 나무로 짜 맞춘 형태 | 주검과 껴묻거리를 보호하는 덧널을 돌로 돌린 형태 | 땅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 덧널을 설치한 뒤 그 위에 돌을 덮고 다시 흙을 씌워 만든 형태 | 돌로 방을 만든 다음 한쪽에 출입구를 만든 형태 |
2세기 | 2~3세기 | 2~5세기 | 4~6세기 | 6세기 | 6~7세기 |
5기 | 13기 | 153기 | 797기 | 2기 | 35기 |
북쪽 구릉 | 북쪽 구릉 | 북쪽 | 서쪽 | 서쪽 | 서쪽 |
* 하삼정이 품은 가야
울산 지역은 일찍부터 신라와 관련된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었다. 신라가 낙동강 하구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인접 지역인 울산을 지나야 했다. 삼정리 하삼정은 신라가 울산 두동`두서면-언양읍-삼남읍을 거쳐 양산, 김해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다. 하삼정 일대에서 발굴된 고분의 규모와 수, 껴묻거리(부장품)를 통하여 볼 때 하삼정은 신라에 속해 있으면서도 주요 거점 지역으로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삼정 일대는 신라가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그리고 가야가 신라 지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교통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신라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가야 지역의 특징적인 묘제가 하삼정 고분군에 나타나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김대 대성동 나무덧널무덤의 경우 시신을 묻는 으뜸덧널의 바닥이 껴묻거리를 넣는 딸린덧널의 바닥보다 낮다. 하삼정 고분군 나지구 나무덧널무덤3호, 돌덧널무덤 115호`231호 등에서 딸린덧널이 으뜸덧널보다 높게 설치되었다. 해당 돌덧널무덤은 4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경주 주변부에서 가장 일찍 돌덧널무덤이 축조되었다.
* 오리모양 토기
오리모양을 한 토기이다. 당시 사람들은 새가 죽은 자의 영혼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날라다 준다고 하여 오리모양토기를 특히 많이 묻었다.
* 부장품 : 토기
죽은 이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이나 사후세계를 위해 특정 물품을 같이 묻어주는 부장 행위가 있다. 무덤에 부장된 껴묻거리는 기종, 형태, 재질, 수량 등에서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와 죽은 이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지역 간의 교류 등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척도가 된다.
2~3세기에는 낮은 온도에서 구운 와질제 토기가 만들어지다가,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회청색 도질토기가 나타나는 4세기를 전후하여 신라와 가야 지역에 다른 형태의 토기가 각각 발전한다. 지역과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신라 지역은 굽에 뚫린 네모난 구멍(투창)이 엇갈려 있는 것에 비해, 가야 지역은 여러 가지모양을 수직으로 나란하게 뚫은 것이 특징이다.
하삼정 고분군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와 철기 등이 출토되었다. 적어도 5백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고분이 조성되었기에 시기를 달리하는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발굴되었다. 하삼정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는 대부분 신라 토기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하삼정 일대가 신라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 굽다리접시(고배)`항아리
다리 형태의 긴 굽이 있는 접시이다. 굽다리 접시는 삼한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 계속 유행하며 형태의 변화를 보인다. 껴묻거리 가운데 시간적인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반영한다.
: 3세기 : 접시가 벌어지고 굽다리가 짧다.
: 4세기 : 굽다리에 소형의 구멍이 상하 엇갈리게 뚫려 있다.
: 5세기 : 굽다리가 점점 직선적으로 변화한다. 뚜껑(개)의 손잡이는 굽다리를 뒤집어 놓은 듯한 대각도치형이다.
: 6세기 : 굽다리의 끝부분이 말려 올라간다. 굽다리의 길이가 짧아진다.
굽다리가 매우 짧아진다. 투창이 없거나 작다.
: 2세기 : 굽다리 긴목 항아리
목이 길고 굽다리가 붙어 있는 항아리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입, 몸체, 굽다리에서 형태 변화를 보인다. 굽다리 접시와 함께 시간적인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한다.
: 3세기 : 짧은 목 항아리(단경호) : 입을 밖으로 말아 단이 졌다.
몸체 위쪽이 넓은 역사각형이다. 굽다리에 투창이 없다.
: 5세기 : 목이 곧게 뻗었다. 몸체에서 가장 넓은 부분이 어깨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온다.
: 6세기 : 몸체가 동그랗다.(구형)
뚜껑 있는 긴목 항아리 : 입 부분이 L자형으로 꺽인다. 항아리 크기가 작아지고 몸체가 납작한 공 모양이다. 접시나 뚜껑에 집선 무늬 등 다양한 무늬를 새기거나 토우를 부착하였다.
* 답사 후기
대곡박물관에 최소한 세 번 이상 온 것 같다.
특별전 ‘하삼정 ’, 특별전 ‘기와전’ 그리고 특별전 ‘구충당 이의립전’.
올 때마다 공부를 하고 갔는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배경 지식이 빈약하다 보니 쌓이는 것 역시 얇았던 것 같다.
이번에는 전시실 자료를 핸드폰으로 찍어와서 자료로 만들어 올렸다. 눈으로 읽는 동안 자판으로 옮기는 동안 자료는 깊게 인식되는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가 쌓여야 아는 게 생길 것이고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다르리라는 말씀처럼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다음 특별전이 있을 때 다시 오기를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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