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다종 다양 다채 : 대성동고분박물관 특별전(1/29)

부실이 2023. 2. 9. 21:26

* 다종 다양 다채 : 대성동 108호분

2022.12.13 ~ 2023.03.26

대성동 108호분 : 과거와 현재를 잇는 통로

 

* 대성동 108호분 특별전을 개최하며

인간의 사회적 활동을 보여주는 것이 도시라면 마지막을 보여주는 것은 무덤이 아닐까요? 이번 특별전시는 201912월부터 2020828일까지 진행한 대성동고분군 10차 발굴조사 자료 중 도굴되지 않은 대성동 108호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인간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무덤 속에 사회적 삶을 각인하고자 부장한 유물을 통해 당시 금관가야인들의 생활과 무덤 주인공을 재해석하는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금관가야는 고김해만에 위치하여 중국과 일본 사이의 대외교역 요충지로 철의 생산, 수출 등 교역의 번성하였습니다. 108호분은 동경, 동촉, 동완과 같은 일본과 중국에서 확인되는 유물들이 동시에 출토되어 4세기대 금관가야의 국제적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무덤 하나입니다. 이러한 출토유물을 볼 때 108호분의 주인공은 대외 교류의 일선에서 활약했던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한반도에서 최초로 출토된 다량의 동촉과 옥촉은 일본 기내 지역과의 긴밀한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대성동 108호분의 주인공들은 가야 출신 귀족 남성 무사와 일본 출신 여성으로 추정되며, 이들 외 순장자 1인도 함께 묻혔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공들이 대외 교류에 관여하며 다양한 유물을 소유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양한 국적과 신분의 무덤인 108호분을 통해 가야의 다종 다양 다채로운 모습을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 대성동고분군 첫 만남부터 열 번째 만남까지

대성동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는 구릉은 애구지라 불리는데 작은 구지봉 혹은 제2의 구지봉이라는 의미로 구지봉과 함께 금관가야인(금을 관리하는 가야사람)들이 신성시했던 장소로 추정합니다.

대성동고분군은 1990년부터 2020년까지 10번의 발굴조사를 진행하였고 첫 번째 발굴조사 후 199118일 국가사적 제34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습니다.

이번 대성동고분군 10차 발굴조사는 2019년 대성동고분군 주변 CCTV 설치를 위한 굴탁공사 중 폐기물 층이 확인되어 폐기물 층의 범위와 아래 문화층의 분포 확인을 위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목관묘와 목곽묘 각 27기를 비롯하여 옹관묘 3, 청동기 수혈 1, 수혈 4기 등 총 62기의 유구와 683점의 유물을 확인하였습니다.

 

* 108호분

108호분은 대성동고분군에서 39호분과 더불어 도굴되지 않은 목곽묘이며 길이 468cm, 너비 352cm, 잔존 최대 깊이 58cm 규모로 대성동고분군에서는 중형급 무덤에 속합니다. 108호분은 무덤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와 함께 출토된 다종, 다양, 다채로운 유물들은 금관가야의 대외교류와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본 전시는 무덤에서 유물이 출토된 위치와 방향을 최대한 반영하여 당시 무덤의 형태를 이해하기 쉽게 기획하였습니다.

 

* 대성동 108호분을 통해 본 다종 다양 다채

108호분은 동경, 동촉, 옥촉, 동완과 같은 일본과 중국에서 확인되는 유물들이 동시에 출토되어 4세기대 금관가야의 국제적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무덤 중 하나입니다. 특히 한반도에서 최초로 출토된 다량의 동촉과 옥촉은 일본 기내지역과의 긴밀한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대성동 108호분의 주인공들은 가야 출신 귀족 남성 무사와 일본 출신 여성으로 추정되며, 이들 외 순장자 1인도 함께 묻혔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공들이 대외교류에 관여하며 다양한 유물을 소유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다종

108호분에서는 금관가야를 대표하는 철기뿐 아니라 토기와 여러 가지 청동유물, 유기물, 석제품 등 다양한 재질과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물들을 통하여 일본, 중국 등 바다 너머 주변 지역과의 교류를 볼 수 있습니다.

 

* 다양

108호분에서는 금관가야를 대표하는 철기유물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환두대도, , , , 화살촉, 투구 등 무기류, 철겸, 철부, 도자와 같은 다양한 농공구 뿐만 아니라 이러한 다양한 철기를 제작하는 소재인 철정까지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가야의 최고 수출품인 철을 이용하여 얼마나 다양한 물건을 만들었는지 상상해봅니다.

 

* 다채

108호분에는 금관가야 김해에서 제작된 유물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서 확인되는 유물들도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한국, 일본, 중국의 다종다양한 유물과 빨강, 파랑, 초록, 검정 등 각 유물이 가지고 있는 다채로운 색감을 단일 무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물들의 출토양상은 당시 금관가야인들의 다채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 가야고분군

가야고분군은 1세기부터 6세기까지 한반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가야의 정치체계와 매장문화를 보여주는 가야 지배층의 무덤들이다.

각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가야 각국들은 독자적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비교적 동등한 수평적 지위로 결속했다. 묘제와 부장품의 세부양식, 교역품은 인접지역이나 다른 가야세력과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했던 개별적인 가야세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맹을 형성하였음을 보여준다.

가야의 7개 고분군은 중앙집권화된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이전의 한반도 고대의 문명을 보여주는 가장 독보적인 증거이다.

 

* 대성동고분군 사적 제 341

대성동고분군은 1세기부터 5세기까지 철 생산과 국제교역을 통해 전기 가야연맹을 주도했던 금관가야 지배층의 무덤들이다. 옛 김해만을 조망할 수 있는 김해분지 중심부의 독립된 낮은 구릉지에 분포한다.

1`2세기에는 구릉지의 낮은 쪽에 목관`목곽묘가 들어서다가 3세기부터 5세기 전반까지 대형 목곽묘가 구릉지의 정상부를 따라 조성된다. 고분군은 봉분을 높게 쌓아올리지 않는 전기가야의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가야 지배층 고분에 널리 행해진 순장이 대성동고분군에 가장 먼저 나타난다.

목관묘에는 와질토기, 청동거울, 철기 등을, 2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대형 목곽묘에는 중국의 청동거울, 일본의 바람개비모양동기 등 교역품을 부장하였다. 3세기 후반에 출현한 가야식 토기는 낙동강 하류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전기가야 분포권을 나타낸다. 4~5세기 목곽묘에 부장된 철제무기와 교역품은 중국-가야-일본열도로 이어진 국제교역이 매우 활발했음을 보여준다대성동고분군은 전기 가야연맹을 주도한 금관가야의 발전, 계층구조, 대외관계를 잘 드러내는 대표 고분군이다.

 

* 대성동고분군 무덤 배치의 특징

대성동고분군에서는 2차에 걸쳐 분묘들이 중복축조되었음이 판명되었다. 1차는 3세기말, 2차는 5세기 초의 일이다. 이러한 분묘의 중복축조는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유례가 없는, 김해지역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1차 분묘중복축조는 이 무렵 김해로 갑자기 대거 유입된 순장`도질토기`북방계 갑옷 및 투구`기승용말갖춤 등의 북방문화를 근거로, 이 문화를 소유한 북방주민이 김해로 이주함에 따라, 전시기의 분묘를 파기하고 그들의 무덤을 축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즉 특정 북방주민의 이주설이다. 그 외 분묘중복은 친족관계에 있는 분묘들이라는 견해와 묘역부족으로 인한 현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2차 분묘축조현상은, 이후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하여 김해지역에서는 지배자의 무덤이 축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금관가야의 쇠퇴를 이해하는데 극히 중요하다. 이곳 노출전시관의 부지에서도 많은 무덤들이 중복축조되어 있었으며, 29호분과 39호분의 목곽묘도 그러한 중복현상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 대성동고분군의 순장

순장은 주인공을 모시던 시종이나 신하를 죽여 함께 묻는 장례 방식으로 통치자가 행사하는 강력한 권력의 표현이다. 순장은 대성동고분군의 대형무덤에서 주로 확인되며, 대성동고분군의 순장자는 덧널 안 또는 충전토 안, 구덩이형 딸린덧널 내에 매장하였다. 가야`신라권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순장묘는 대성동 29호분이다. 왕급 무덤은 시기에 따라 으뜸덧널 안에 1~5인 순으로 순장자 수가 늘어나며, 5세기 초가 되면 중형무덤에도 2인의 순장자가 덧널 안에 묻힌다.

 

*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주요 내용은 고구려가 경자년(400)에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왜를 격퇴하였고,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니 즉시 항복시켰다는 것이다. 이때의 왜는 가라와 왜의 연합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철의 왕국 가야

덩이쇠는 철기를 만드는 소재이면서 가치교환의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대성동고분군에서는 덩이쇠 뿐 아니라 철기를 이용한 말갖춤과 무기, 갑옷 등이 출토되었다. 말갖춤에는 재갈과 발걸이, 안장, 말 갑옷과 투구, 다양한 말 장식물이 있는데, 대성동 1호와 91호에서 금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말갖춤새가 출토되었다. 널무덤단계에는 쇠짧은 칼과 창, 쇠화살촉 등의 무기류가 출토되었으며 청동제도 등장하였다. 덧널무덤단계에는 고리자루큰칼과 긴칼이 새롭게 나타나고 쇠갑옷과 투구의 발전에 맞추어 쇠화살촉도 변화하였다.

 

* 금관가야의 대외교류

금관가야는 동아시아의 주요 철 생산지로 기원전 2세기 무렵 이미 철 생산을 시작하여 3세기 무렵에는 낙랑, 대방, 마한, 동예, 왜 등지에 수출하였다. 대성동고분군에서는 금관가야의 경제적 대외활동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4세기대 북방계 유물은 전연을 비롯한 북방지역에서 입수한 것이고, 중원계 유물은 동진에서 직접 입수했거나 전연을 거쳐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유물들은 금관가야가 중국`북방-서해안-남해안-왜의 교역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음을 입증해주는 증거물이다.

 

* 금관가야의 토기

대성동고분군에서는 부드럽고 세련된 곡선미를 특징으로 하는 가야 토기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토기는 항아리와 화로모양토기, 다양한 형태의 그릇받침, 굽다리 접시 등이 있다. 이후 금관가야 토기는 대가야와 아라가야 토기의 원형이 되었다.

 

* 금관가야의 무사

금관가야의 무사갑옷은 철판을 재단하여 만든 판갑과 작은 비늘모양의 쇠조각으로 구성된 비늘갑옷으로 구분된다. 갑옷의 부속구로는 목가리개, 허리가리개, 팔가리개 등이 있다. 또한 쇠투구도 갑옷과 세트를 이루면서 출토된다. 갑옷과 투구는 북방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상위계층의 전유물이었다.

 

* 금관가야의 말갖춤

널무덤에서 출토된 말갖춤새로 볼 때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최소한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말이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말갖춤새 가운데 중국에서도 출토된 사례가 없는 장식말갖춤새가 확인되는 사실로 볼 때 금관가야가 적극적으로 대륙의 문화를 수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철로 모방 하거나 개량화하여 발전시킨 말갖춤새들은 금관가야 문화의 독자성을 잘 보여준다.

 

* 왜 문물의 보물창고, 대성동 88호분 덧널무덤

대성동 88호분 덧널무덤은 남북향으로 위치하고 덧널의 맞물림흔적은 자로 추정된다. 도굴이 전체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봉분의 함몰토에서 청동투겁창 1, 쇠도끼 14, 큰항아리 1점이 수습되었고, 바닥에서 뼈화살촉군`쇠화살촉군, 덩이쇠 4, 가지창 1, 바람개비모양 청동기 13, 금동허리띠, `동제 칼집장신구, 가락바퀴모양석제품 2, 원통모양청동기 3, 토기 5, 옻칠흔 등이 조사되었다. 특히 바람개비모양 청동기는 왜계`위세품으로 우리나라에서 대성동고분군에서만 출토된다. 한 부덤에 부장된 바람개비모양 청동기의 수량이 일본을 능가하는 점에서 금관가야와 왜의 교섭은 대성동고분군집단이 철저히 통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 금관가야 왕들의 마지막 안식처, 대성동고분군 : 대형덧널무덤의 특징

대성동고분군의 덧널무덤들은 무덤구덩이의 크기에 따라 면적 20제곱미터 이상의 대형 덧널무덤과 40제곱미터 이상의 초대형덧널무덤이 있다. 특히 전기가야시기에 초대형덧널무덤은 다른 지역에서 발굴된 적이 없다. 초대형덧널무덤은 왕과 왕비 등 왕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고, 그 아래의 대형무덤은 유력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된다. 4세기 이후 대부분의 대형덧널무덤에는 시상석과 꺽쇠가 존재하며 모든 왕급무덤에서는 순장자가 확인된다.

 

* 대성동고분군 널무덤의 특징

대성동고분군에서는 71기의 널무덤이 조사되었다. 널은 대체로 두께 3cm 내외의 판재를 자형으로 조립한 것이 대부분이다. 널무덤은 바닥 중앙에 요갱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도 구분되는데 요갱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널무덤에서는 각종 토기, 철기, 칠기,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으며, 출토된 토기의 종류는 쇠뿔손잡이항아리, 주머니호, 항아리 등이다. 이들은 주로 와질토기로 삼한시대의 토기 갖춤새를 잘 보여준다. 대성동고분군의 널무덤 형성 시기는 대부분 2세기 전반에 속한다.

 

* 대성동 고인돌의 특징

대성동 고인돌 1호는 애구지 정상부에 위치하며 2단으로 땅을 팠다. 무덤칸의 뚜껑돌은 7개의 편평한 돌로 이루어졌으며, 매장 구조는 돌덧널 모양이다. 내부에서는 붉은 간토기 1점과 화살촉 28점이 출토되었다. 이를 토대로 금관가야 이전에도 대성동고분군이 자리한 구릉은 중요한 매장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116차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대성동 84호는 애구지 능선상의 남쪽 사면의 비교적 완만한 곳에 단독으로 조성되었다. 이 무덤은 무덤구덩이를 2단으로 깊게 판 후 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덮은 뚜껑널무덤이다. 뚜껑돌 위는 돌과 흙을 섞어서 2단으로 덮었다. 84호에서는 기원전 5~4세기에 속하는 간돌칼 1, 간돌촉 6, 붉은간토기 1점이 바닥에서 출토되었고, 포타쉬계열(내륙식물의 재에서 얻은 재료)의 고리모양유리구슬들이 널무덤 내부흙과 뚜껑돌 위에서 수습되었다.

 

* 수로왕 이전의 무덤, 대성동 고인돌

김해시 중심부는 북서쪽의 경운산, 동쪽의 분성산, 남쪽의 임호산 등 구릉성 산지들로 분지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해반천을 기준으로 동`서로 양분된 김해 시가지 일대의 무문토기시대 유적 분포 현황을 살펴보면 경운산의 남사면 끝자락에 위치한 내동고인돌과 해반천 서쪽 저지대에 위치한 구산동고인돌을 제외하면 모두 해반천의 동쪽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특히 도로시설 확충, 주택 개발로 인한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많이 이루어진 결과 해반천 동쪽 일대는 주거지, 환호, 경작지 등 다양한 무문토기시대 유적이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2014년 대성동고분 9차 학술발굴조사에서 드러난 고인돌 1호는 금관가야의 무덤영역으로 알려졌던 애구지가 무문토기시대부터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고 김해만의 중심, 애구지

대성동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는 구릉은 애구지라 불리는데, 작은 구지봉 혹은 제2의 구지봉이라는 의미로 구지봉과 함께 금관가야인들이 신성시 했던 장소라고 추정한다. 이 애구지의 대성동고분군은 수로왕 탄강지인 구지봉에서 남쪽 약 600미터, 수로왕릉에서 북서쪽으로 약 300미터, 금관가야 왕궁터가 전해지는 봉황동유적에서 북쪽으로 약 500미터에 위치한다. 김해지역은 선사시대부터 넓은 내만을 형성하여 오랫도안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조선시대까지 해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고대인들은 해안 가까이에 거주하며 중국대륙과 왜를 이어주는 해상교역을 해 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애구지의 금관가야인들 역시 이를 활용하여 활발하게 해상교역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무덤에서 출토되는 여러 가지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4세기의 세계

국내와 동아시아 : 고구려, 부여, 백제, 신라, 가야 / , 전연, 전진, 동진

서아시아, 유럽 : 유연, 쿠샨왕조, 굽타왕조, 바카타카왕조, 사산조 페르시아, 로마 제국

 

* 금관가야 김해

김해의 금관가야는 변한의 12개 소국 중 구야국이 성장하여 발전한 나라이다. 일연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수로왕이 서기 32년에 세운 후 532년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할 때까지 10대의 왕을 거치며 491년간 존속하였다고 한다. 가야의 역사는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와 연합하여 가야를 공격했던 때를 전후하여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나누어지는데, 금관가야는 전기가야의 중심 국가였다. 김해지역에 자리잡았던 금관가야의 고유한 문화는 무덤에서 출토한 유물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아가리가 밖으로 꺽인 굽다리접시, 화로모양토기, 고사리문양 판갑옷, 비늘갑옷, 덩이쇠, 철제 말갖춤새 등이 있다. 김해는 철의 주요 생산지로서 우수한 철기 생산 능력을 갖춘 철기 문화의 중심지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철을 매개로 중국 동북지역 및 왜와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금관가야는 전기가야의 맹주국이 되었다.

 

* 답사 후기

인터넷에서 대성동고분박물관 특별전 '다종 다양 다채' 자료를 확인하고 고분박물관을 먼저 보고 특별전 해설을 들었다.

10차 발굴 때 도굴되지 않은 무덤 108호분을 발굴하였고 그 무덤의 주인공은 고급 무사계급의 부부로 추정되었다.

무덤 안에는 부장유물이 온전하게 있어서 유물을 통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었다는 점이다. 

무사의 부인은 일본계 여인으로 추정하는 것이 여인의 죽음자리를 장식하는 방식과 같이 묻힌 유물이 그러했다는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는데 기억이 확실한지 자신은 없다.

국제적인 결혼, 일본과 중국계 유물, 순장자. 충분히 다종 다양하고 다채로운 내용이다.

식사를 하면서 답사를 함께 한 중학생 1학년 손녀에게 아들이 물었다. 박물관에서 본 것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 하나만 말해봐! 했더니 손녀는 임나일본부설이라고 했다. 물론 답사 마지막 부분에 있었고 설명하는 자리에는 남자 어른분이 질문을 하자 해설사의 설명이 그곳에서 있었다. 

임나일본부설은 아직도 공부가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함에도 손녀의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 내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2021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는 '함평 예덕리`신덕 고분, 비밀의 공간 숨겨진 열쇠' 특별전을 했다. 내용은 함평 예덕리`신덕리의 고분 모양이 그 당시 일본의 전방후원본, 장고형 무덤 양식이었다. 그래서 이 무덤의 양식으로 보아 일본과 연관성이 충분히 있는데 이것을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는 무덤 양식이라고 해석했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일본의 해석을 반박하기 위해서 유물이나 유적으로 증명하려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함평 예덕리, 신덕리 고분에 대한 해석은 이러했다. 문화 전파설. 문화는 사람이 왕래함에 따라서 같이 오간다. 일본인 집단이 정치적으로든 교역으로든 함평지역에 머물면서 자신의 무덤을 자신의 방식대로 만들었다고도 본다. 

일본의 무덤양식을 선진 양식 또는 나도 따라하고 싶다고 여긴 함평지역의 지도자급 사람은 그런 무덤양식을 시도했을 것이다.

대성리고분군에서는 일본문화의 대표주자인 바람개비모양 동기가 본국 일본보다 더 많이 출토되었다.  청동솥과 동물모양허리띠고리 등은 북방문화적 유물이다. 당시 가야는 일본보다 우수한 철기와 토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손녀와 우리 가족 일행 5명에게 들려주는 임나일본부설은 나에게 들려주는 공부이기도 하다.

들으면서 배우고 배운 것을 말하면서 배우는, 지식이 축적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