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귀엣-고리 : 공주박물관 특별전

부실이 2023. 2. 5. 23:10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국립공주박물관 특별전 : 2022.9.27~ 2023.2.26.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귀엣고리귀고리의 옛말입니다. 지금은 귀걸이를 주로 쓰지만 귀고리를 더 오랫동안 표준어로 사용했습니다. [백제 귀엣-고리] 특별전은 복제 복식의 핵심이면서 삼국시대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생생한 증거인 백제 귀걸이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번 전시는 백제 한성시기에서 사비시기까지 여러 유적에서 출토된 다양한 귀걸이와 관련 유물들을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백제 귀걸이에는 이를 만든 장인과 착용한 사람들의 생각 등 당시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쁜백제 귀걸이를 살펴보며 그 속에 숨어 있는 백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 백제에서 만들다

금세공 기술이 뛰어났던 백제 사람들은 가는고리 모양의 귀걸이를 만들어 착용했고, 일부 귀걸이에는 고리에 드리개(수식) 장식을 이어붙여 아름다움을 더했습니다. 전체적으로 군더더기 없는 단정하고 실용적인 형태에서 은은한 멋과 품격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왕과 귀족의 소유물

백제에서 귀걸이는 어떤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을까요? 무령왕릉 출토 귀걸이는 당시 귀걸이를 소유했던 이들의 신분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귀걸이를 실제로 착용했을까요? 관 안에서 발견된 귀걸이의 위치를 보면, 적어도 무덤에 넣을 때에는 무덤 주인이 착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거주 공간에서 귀걸이가 발견되기도 하고, 불교 의식에서 귀걸이를 공양품으로 부처님께 바치는 것을 볼 때, 실제로 귀걸이를 착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백제 귀걸이가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1971년 무령왕릉이 극적으로 발견되었을 때였습니다. 놀랍게도 왕릉 안에는 무덤 주인이 무령왕(재위 501~523)과 그 왕비임을 알려주는 지석을 비롯한 5천여 점이 넘는 껴묻거리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 크기는 작지만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무령왕과 왕비가 양쪽 귀에 달았던 귀걸이였습니다. 금으로 만들고 녹색의 옥과 붉은색으로 장식한 이 귀걸이들은 그때까지 삼국시대 대표적 귀걸이였던 신라 귀걸이를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무령왕릉은 백제 귀걸이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만들었습니다.

장신구의 하나인 귀걸이는 사람의 취향이나 미감을 반영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또는 정치적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백제 귀걸이에는 이를 만든 장인과 착용한 사람들의 생각 등 당시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 귀고리와 귀걸이

삼국시대 귀걸이는 귀에 다는 고리의 굵기에 따라 가는고리 귀걸이와 굵은고리 귀걸이로 나눕니다. 백제 귀걸이는 가는고리 모양입니다. 그런데 왜 둥근 고리로 만들었을까요? 귓불에 구멍을 뚫어 안정적으로 하려면 고리 모양이 가장 알맞았을 것입니다.

고대부터 고리 모양의 귀걸이를 만들었고 이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집니다. 그 뒤 유교의 영향으로 귓불을 뚫는 것을 금하면서 고리 모양은 점차 사라지고 귓바퀴에 거는 모양으로 바뀝니다. 즉 귀고리가 귀걸이로 바뀌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귀고리라는 말을 표준어로 쓴 것을 보더라도 고리 모양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간결함의 미학

백제의 금속공예품 가운데 화려하게 장식하여 권위를 나타내는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등과 달리 귀걸이는 상대적으로 간결한 느낌을 줍니다.

백제 귀걸이는 둥근 고리에 금실 또는 사슬로 연결고리를 걸고 중간장식, 끝장식을 매달았습니다. 금실을 중간장식 안에 끼워 넣은 다음 아래쪽을 갈고리처럼 휘어 끝장식을 매달고 위쪽은 연결고리에 감아 고정하였습니다. 연결장식의 마감부는 보이지 않게 처리하고 끝장식을 단순화하여 간결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독창적인 귀걸이를 만들었습니다.

 

* 색을 더하다

백제 사람들은 다양한 색상을 활용하여 귀걸이에 특별함을 더하였습니다. 백제 귀걸이는 가운데 일부는 푸른색 옥, 검은색의 유리 장식을 연결하거나 겉면에 붉은색 안료를 칠했습니다. 반짝이는 금빛과 대비를 이루는 적, , , 흑색의 사용은 당시 백제인들의 미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로,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백제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구슬은 모두 31210점으로 금```흑옥`유리 등으로 만들었는데, 유리구슬이 전체 수량의 97%를 차지한다. 구슬은 주황색, 황색, 녹색, 청색, 자색, 적갈색 등 다채로운 색상을 띠며 단일색으로는 주황색이 가장 많고 남청색 계열의 비중이 높다. 이러한 구슬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속 장신구에 매달거나 왕과 왕비의 복식 또는 무덤 내부 장식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디자인하다

백제는 입체 장식과 평면 장식을 조합하여 다양한 디자인의 귀걸이를 만들었습니다. 한성시기에는 고리에 금실로 바로 끝장식을 매달거나 사슬로 끝장식을 연결한 간결성이 돋보입니다. 또한 공 모양, 원판 모양 등의 중간장식이 연결장식의 마감을 맞추는 역할을 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더하였습니다.

사비시기에는 연결장식과 중간장식이 일체형으로 만들어지면서 디자인이 하나의 유형으로 통일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 흑옥

흑옥은 아주 오래된 나무들이 습한 환경에서 열과 압력을 받아 변성된 흑색의 결정체이다. 검정색 혹은 진한 갈색을 띄며, 광택을 내기도 한다. 일부 흑옥에서는 나무결의 흔적이 확인된다. 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 안에 장식을 연결했던 끈이 남아있어 목걸이나 팔찌와 같이 연결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흑옥은 김포 운양동,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서산 부장리, 부여 능산리 절터와 왕흥사터 등 전시기에 걸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안료

백제는 다양한 종류의 공예품에 안료를 감입하여 장식하였다. 특히 공주 무령왕릉 출토 진묘수, 왕비의 베개와 발받침, `은장식 손칼, 왕의 귀걸이, 모자모양 금꾸미개 등에 안료가 남아 있다. 적색은 진사와 연단, 백색은 백토(고령토), 녹색`녹청(공작석), 흑색으로는 탄소가 사용되었다. 사비시기에는 부여 정림사지와 능산리사지, 익산 미륵사지 등 주로 사찰 유적에서 출토된 금속공예품에 안료가 남아 있다.

 

* 익산 왕궁리 금공방

금은 인류가 구리 다음으로 사용한 금속이다. 복잡한 제련기술이 없어도 쉽게 가공할 수 있고 산화되지 않은 성질로 기원전 3천 년 전부터 사람들은 여러 물건을 만들었다. 특히 늘어나는 연성과 얇게 퍼지는 전성이 강해 실용적인 목적의 도구보다 장신구를 만드는 귀금속으로 이용되었다. 백제에서 금제련법은 전통적인 형태인 사금제련으로 추정된다. 사금을 도가니에 넣고 녹인 뒤, 금성분을 추출하여 중간재인 금괴를 만들고 이를 가공해서 다양한 금제품을 만들었다.

순금은 매우 무르기 때문에 견고함을 얻기 위해서 합금을 하며, 합금 비율에 따라 색상이 달라진다. 합금에 첨가되는 금속은 주로 은과 동이며, 순금을 표시하는 K는 캐럿의 약자로 중량에 따라 24K(순금 100)18K(순금 75, 순은 12.5, 구리 12.5) 등으로 표시한다. 익산 왕궁리유적에서는 금제장식, 금못, 금실, 금박, 금덩어리 등 완제품과 반제품들이 출토되어 백제 금공방의 다양한 제작활동을 보여준다. 17~24K에 이르는 다양한 순도의 금제품과 금속제품의 표면에 금을 입히는데 사용하는 금`은 아말감 덩어리가 확인되어 백제 금속공예 기술을 엿볼 수 있다.

 

* 귀고리 만들기

* 재료 준비하기(금판, 금선, 금못)

. 금선 : 금덩어리를 두드리고 열을 가한 후, 인발판을 통과시켜 원하는 굵기의 금선을 만든다. 인발판 : 다양한 굵기의 구멍이 뚫린 세공기구

. 금판, 금봉 : 금덩어리를 열을 가하여 두드려 납작한 금판과 둥근 봉을 만든다.

. 고리 만들기 : 금봉을 구부려 고리 형태로 만들고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는다.

 

* 귀걸이 장식 만들기

. (원형형 장식`하트형 끝 장식`달개) : 도구를 이용하여 원하는 모양으로 잘라낸다.

. 원통형 장식 : 집게 등의 도구를 이용하여 둥글게 만다.

. 하트형 끝 장식`달개 : 입체적인 틀 위에 올려두고 두드려 오목한 형태로 만든다.

 

* 추가장식 만들기(새김눈 장식, 금알갱이 붙이기)

중간장식, 끝장식 또는 달개에 새김눈 장식이나 금알갱이 등을 붙여 화려함을 더한다.

금알갱이 붙이기(누금세공기법) : 금속 표면에 금선 또는 금알갱이를 붙여 장식하는 방법

 

* 안료 감입`조립

금선으로 장식한 곳 일부에는 붉은색의 안료를 칠해 색을 입힌다. 여러 가지 구성품들을 금선 혹은 금판으로 연결하여 고정한다.

 

* 무령왕 귀걸이 : 국보

왕 관꾸미개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하나의 고리에 두 줄의 드림장식이 달려 있다. 짧은 드림장식은 금판을 둥글게 말아 만든 원통형의 중간장식을 연결하고, 그 아래 크고 작은 하트 모양 끝장식을 달았다. 고리와 중간장식, 끝장식을 연결하는 재료로 얇은 금판을 사용하였다. 고리와 연결 장식의 이음부를 감추기 위해 2매의 금판으로 고리 모양을 만들어 감쌌다. 긴 드림장식에는 작은 고리를 이어붙여 만든 공모양 장식에 나뭇잎 모양 달개를 달았다. 그 끝에는 금알갱이로 장식한 금모자를 씌운 곱은옥을 연결하였다.

 

* 신라 보문동 귀걸이

굵은고리-연결고리-중간장식-끝장식 구조의 신라 귀걸이다. 굵은 고리는 3개의 금판을 붙여서 만들었으며, 속이 비어 있다. 고리의 지름은 3`4cm로 신라 귀걸이 가운데 가장 크다. 굵은고리 아래 타원형의 연결 고리를 매달았다. 굵은고리와 연결고리 겉면에는 금실과 금알갱이로 거북등무늬와 꽃무늬를 정교하게 장식하였다. 중간장식은 작은 원형 고리를 여러 개 붙여 공 모양으로 만들었고, 그 사이에 달개를 달았다. 끝장식과 만나는 부분에는 반구형 장식을 연결하였다. 끝장식은 하트 모양으로 장식의 가장자리와 가운데에 금알갱이를 장식하였다. 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귀걸이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화려한 것으로 손꼽힌다.

 

* 귀걸이(무령왕 왕비)

왕비 머리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하나의 고리에 두 줄의 드림장식이 달려 있다. 고리는 반원의 금판 두 매를 서로 맞붙인 것으로, 속이 비어 있다. 연결고리는 원형의 금봉을 둥글게 말아 만들었다. 긴 드림장식은 사슬을 연결고리에 바로 이어 길게 늘어뜨렸으며, 사슬 사이에 원형 달개를 매단 금실을 꼬아 화려함을 더하였다. 끝장식은 탄환 모양으로 금판 2매를 땜으로 접합하였다. 짧은 드림장식은 금실을 연결고리에 감아 작은 고리를 이어 붙인 반구형 장식을 고정하였다. 반구형 장식은 2개로, 아래부분에는 청록색 유리구슬을 끼웠다. 유리구슬 아래에는 사슬을 연결하여 펜촉 모양의 끝장식을 달았다. 유리구슬 아래에는 사슬을 연결하여 펜촉 모양의 끝장식을 달았다. 사슬 사이에는 새김 장식을 한 나뭇잎 모양 달개를 달았다. 끝장식 가장자리를 따라 금알갱이 장식과 새김 장식을 돌렸다.

 

* 가야 귀걸이 : 합천 옥전

고리-연결고리-중간장식-끝장식 구조의 가야 귀걸이다. 무덤 안 시신의 머리쪽에서 발견되어 실제 착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리는 금판을 이어 붙여 만든 것으로 속이 비어 있다. 금봉을 구부려 만든 연결고리에 금판을 감아 중간장식과 사슬을 연결하였다. 중간장식은 2개로, 하나는 속이 빈 공 모양이고 다른 하나는 원형 고리를 이어붙인 육면체 형태이다. 육면체 장식에는 금실로 나뭇잎 모양 달개를 연결하였다. 중간장식 아래로 연결된 금선에 2줄의 사슬을 짧게 연결하였으며 산치자 모양의 끝장식을 연결하였다.

 

* 고구려 귀걸이

고구려는 굵은고리와 가는고리 귀걸이를 만들어 착용하였습니다. 특히 굵은고리에 작은 고리를 이어 붙여 만든 공 모양의 장식과 나뭇잎 또는 추 모양의 끝장식을 연결한 귀걸이는 고구려만의 특색을 보여줍니다.

고구려의 귀걸이는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신라로 전해졌습니다. 신라의 무덤에서는 고구려에서 만들었거나 고구려 귀걸이를 모방하여 만든 것들이 확인되기도 합니다. 고구려 귀걸이는 연결고리와 중간장식, 끝장식을 땜으로 접합한 일체형의 구조가 특징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백제 사비시기의 귀걸이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 동아시아의 연결고리

4~6세기는 동아시아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각 나라들은 주변 나라들과 갈등을 겪기도 하며 때로는 연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백제를 비롯한 고구려, 신라, 가야의 귀걸이 등 각종 금속공예품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역사 기록뿐만 아니라 귀걸이로도 당시 나라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굵은고리를 만든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가는고리를 만든 백제, 가야, 왜는 서로 긴밀한 국가적 교류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귀걸이를 착용하는 풍습이 유행하지 않았지만 세공기술과 도안 등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 다양성의 추구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 신라, 가야는 지배층의 기호에 맞는 독특한 디자인의 귀걸이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귀걸이들은 당시의 관습과 사고, 정치와 경제력 등을 짐작케 합니다.

백제 귀걸이는 단아함을 기본으로 왕과 왕비의 귀걸이에는 세련되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담았습니다. 고구려 귀걸이는 일체형으로 선이 굵고 강건하며, 신라 귀걸이는 정교하고 화려함의 극치를 보입니다. 가야 귀걸이는 백제의 영향을 받아 간결하지만, 여러 줄의 장식을 연결하거나 독특한 끝장식을 달았습니다.

 

* 권위와 아름다움을 드러내다

고대 사회에서 귀걸이는 단순히 귀를 꾸미는 장신구가 아니라 착용한 이의 사회적 신분이나 권력을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물이었습니다. 백제에서도 왕족, 귀족, 지역 유력자, 관인 등이 귀걸이를 주로 착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신분이 높은 사람의 무덤에서 귀걸이가 주로 발견되는데, 대부분 머리 쪽에 놓여있어 무덤 주인이 착용한 채 묻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백제는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지방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일종의 선물로 귀걸이를 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뒤 위기를 극복하고 중흥 기반을 마련한 무령왕과 왕비는 화려한 귀걸이로 자신의 권위를 드러냈습니다. 수도 사비로 옮긴 뒤에는 관등제를 정비하면서 관리의 등급에 따라 무덤의 크기와 껴묻거리 종류를 나누었는데, 그 과정에서 귀걸이는 관등제에 편입된 귀족들의 위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 공주 수촌리 4호 돌방무덤 출토유물

공주 수촌리유적은 백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강력한 지방 세력이 남긴 무덤으로 이들은 웅진 천도에 도움을 준 재지세력이다. 4세기 후반~5세기의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등에서는 당시 최고 세력이 사용했던 금동관모, 금동신발, 귀걸이, 중국 도자기, 말갖춤, 무기류, 토기류 등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특히 백제 중앙의 무덤 양식인 4호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모는 수촌리 세력의 높은 위상과 백제 중앙 정부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 귀걸이, 금동관모, 금동신발, 대롱옥, 구슬, 청자잔, 흑유병, 흑갈유항아리, 뚜껑있는 바리, 곧은목항아리, 넓은 입 항아리, 그릇받침, 큰칼, 손칼, , 물미, 화살촉, 화살통 꾸미개, 발걸이, 재갈, 허리띠고리, 환형금구

 

* 백제와 신라의 왕비 장신구

한국 고대사회에서는 왕비는 왕의 배우자이자 최상층부의 일원으로 당시 정치권력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백제와 신라의 왕과 왕비 무덤으로는 무령왕릉과 황남대총이 있습니다. 황남대총은 신라 마립간 시기에 조성된 거대한 무덤으로 남분은 왕, 북분은 왕비의 무덤입니다. 당시 높은 신분의 여성을 부인이라 칭했는데 두 무덤에서 부인(夫人)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유물이 확인되었습니다. 백제와 신라의 왕비가 그 지위와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착용한 장신구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 황남대총

경주 황남대총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먼저 축조된 남쪽 무덤에 덧붙여 북쪽 무덤을 만들었다. 남북 길이가 120미터에 달하며 화려한 황금 장신구에 막대한 부장품으로 왕릉임에 이견은 없지만 무덤 주인공은 논쟁중이다. 왕비 무덤은 관과 부장품 수장부가 하나의 덧널 안에 있는 단곽이며 출토유물은 금관 등 35769점으로 국내 최대 규모이다. 왕비는 금관과 금허리띠, 굵은고리 귀걸이와 드리개, 목걸이, 가슴걸이, 팔찌, 반지 등 당시 최고 위계의 위세품을 착장하고 있었다. 특히 왼팔에는 실크로드를 거쳐 온 금제감옥 팔찌를 착용하고 있었다.

 

* 무령왕릉

무령왕릉 안에는 왕과 왕비의 관이 남아 있어 왕과 왕비가 착장했던 장신구를 구분할 수 있다. 왕은 관식, 귀걸이, 허리띠, 신발, 큰칼을. 왕비는 관식, 귀걸이, 목걸이, 팔찌, 금동신발, 손칼 등을 가지고 있다. 왕과 비교하여 왕비는 허리띠와 큰칼이 없고 목걸이와 팔찌가 있다. 특히 쌍을 이룬 팔찌를 같은 팔목에 착용하고 있는데 다라작명문이 있는 은팔찌 1쌍은 왼팔에 각목문이 새겨진 금팔찌 1쌍은 오른팔에 착용했다. 그리고 발쪽에 소형의 마디팔찌 2쌍과 각목문 금팔찌 1, 은팔찌 쌍 등 팔찌 4쌍과 작은 금귀걸이 2쌍이 놓여 있어 왕비가 어릴 때 사용한 것을 함께 묻은 것으로 여겨진다.

 

* 사리갖춤

2007년 발굴조사된 부여 왕흥사지는 백제 왕실의 사찰이다. 목탑 심초석 한쪽에 마련된 사리공에서 청동제 사리외합, 은제사리호, 금제사리병 등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외합 표면에 새겨진 29자의 명문을 통해 위덕왕(554~598)577년에 죽은 왕자를 위해 왕흥사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공양품으로 구슬과 장신구 등이 목탑 심초석 남쪽 주변에 흩뿌려진 채로 발견되어 백제 사비기의 사리공양 의식을 보여준다.

 

* 미륵사

미륵사는 백제 무왕(600~641)대에 창건한 사찰로, 서석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창건 당시 봉안한 사리갖춤 일체가 발견되었다. 석탑의 중앙 첫 번째 심주석에 봉안되었는데, 사리공을 조성한 뒤 사리호와 발원문을 적은 금제사리봉영기를 안치하고 각종 공양품을 채워 넣었다. 공양구는 수리 흔적이 있는 은제 관식과 백제의 관등이 새겨진 청동합, 명문이 있는 금판, 과대 장식, 귀걸이, 구슬 손칼 등으로 이는 발원자인 백제 왕후를 비롯한 귀족들의 희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장신구가 사리공에서 발견되는 이유는 당시 발원자들이 몸에 지니고 있던 장신구를 공양품으로 매납하는 사리공양 의례가 행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부처님께 바치다

부여 왕흥사지와 익산 미륵사지에서는 귀걸이를 비롯한 다양한 색의 유리구슬과 허리띠꾸미개 등 각종 장신구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불탑에서 나온 이러한 공예품들은 백제 왕실과 귀족 계층의 신앙과 생활문화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불탑을 만들 때 펼쳐진 불교 의식에 참석한 이들이 부처님의 공덕을 높이거나 복을 빌기 위해, 몸에 지녔던 진귀한 보물들을 부처님께 바쳤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사찰 내에 위치한 모전석탑은 현존하는 신라 최고의 석탑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탑이다. 수리 과정에서 석함이 발견되었으며, 그 안에서 사리장엄구와 각종 공양품이 확인되었다. 분황사 공양품에는 여성용품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이는 발원자인 선덕여왕의 봉헌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은제이전은 인도나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사용한 귀걸이로 귀불에 구멍을 뚫어 삽입한다. 이와 유사한 귀걸이가 경주 황룡사지 9층 목탑 사리공과 칠곡 송림사 전탑 사리석합에서도 출토되었다.

: 귀걸이, 가위, 집게, 바늘`바늘통, 유리제품

 

* 전시를 마치며

이번 전시는 백제 복식의 핵심이면서 삼국시대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생생한 증거인 백제 귀걸이를 주제로 하였습니다. 고대 귀걸이는 장신구로서 지배자의 권위와 위상을 드러내는 상징물입니다. 또한 그 안에는 당시 사회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작은 고리 모양의 귀걸이는 백제의 영역을 보여주는 지표이자 동시에 백제 사람들이 선호하는 미감을 보여주는 유물이기도 합니다. 장인들은 단순한 고리부터 간결하고 세련된 장식이 달린 귀걸이까지 만들었습니다.

백제 귀걸이는 크기가 작아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습니다. 한눈에 잘 띄지 않지만 오래 자세히 살펴보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백제 사람들의 이야기와 백제 장인이 남긴 아름다움을 만나보셨기를 바랍니다.

 

* 답사 후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국립공주박물관 특별전 '귀엣-고리'의 부제목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이다.

공주에서 태어나고 대한민국 국민이 사랑하는 시인 나태주님의 시 '풀꽃'에서 빌려온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고대의 무덤이나 기타 다른 곳에서 나온 유물 중에 귀걸이는 크기는 작지만 작지않게 해석하는 유물이다.

왕과 왕비 또는 고위급의 무덤, 사찰의 사리함에 귀걸이가 담겨 있었다. 최고 통치자의 무덤에서는 권위의 상징으로,

사찰에서 발굴되는 귀걸이는 사찰의 행사에 참여한 고위급 인사가 부처님께 시주한 공양품으로 해석한다. 

 

백제의 고도로 인정받은 익산의 왕궁 사찰 제석사지에는 금공방터가 있었다. 

하나의 유적과 유물이 전체를 증명하는 유력한 증거 중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알겠다.

'귀걸이'에 대한 대략적인 공부를 하는 답사가 되었다.

백제의 귀걸이, 신라의 귀걸이, 가야의 귀걸이는 유물로 박물관에 가면 이미 많이 볼 수 있다.

가는 귀걸이 고리와 굵은 귀걸이 고리는 백제와 가야, 신라와 고구려를 구분하는 중요한 구분점임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