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울산박물관 2 : 삼한`삼국시대의 울산

부실이 2023. 2. 26. 12:31

* 달천철장 - 삼한시대 철 생산의 중심

철은 삼한시대에 처음 전해진 이후, 소국들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소재였다. 울산 달천철장 유적에서는 철의 원료인 토철과 철광석을 캤던 채광 시설이 발견되었다. 다양한 출토 유물로 보아 달천철장은 기원전 1세기경부터 근현대까지 철광석 생산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달천철장에서 채광된 철광석은 삼한시대부터 울산 및 경주 등 인근 지역으로 옮겨져 철제품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달천철장에서 일본 야요이 토기와 낙랑 토기가 발견되어 이들 지역과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달천을 중심으로 하는 울산지역의 철 문화는 삼한시대 울산지역 정치 집단이 성장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으며, 사로국이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 철광석 : 달천 철광석의 바코드, 비소 As

달천철장 철광석 속에는 다량의 비소(As)성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국내에서 유일하며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드물다. 따라서 철기 유물을 분석하여 비소 성분이 검출되면 재료가 달천철장에서 온 것을 알 수 있다. 경주 황성동 제철 유적, 중산동 제철 유적에서 출토된 철기에서 비소 성분이 검출되어 달천철장의 재료로 철기를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 덧띠토기를 사용하고 널무덤을 만들다

전기 삼한시대 울산 사람들은 주로 적갈색 덧띠 토기를 사용하고 널무덤을 만들었으며,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덧띠 토기는 토기의 구연부에 점토띠를 만들어 붙인 토기로, 처음에는 점토띠 단면의 형태가 원형이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삼각형으로 변했다. 주로 단지`바리`항아리`굽다리 접시 등으로 만들어졌다. 덧띠 토기는 철 문화와 함께 중국 동북지방에서 새롭게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널무덤은 땅을 파고 통나무나 나무판으로 된 관을 놓아 만든 무덤이다. 무덤 안에는 한국식동검, 덧띠 토기, 철기 등을 같이 묻었다. 울산에서는 달천 유적, 교동리 유적, 창평동 유적 등에서 확인된다.

 

* 삼한시대의 마을 유적

울주군 삼남읍 단독 구릉에 위치한 교동리 유적에서 삼한시대의 대형 건물 4, 건물 280, 무덤 30, 목책열 2기 등이 발견되었다. 이는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조사된 삼한시대의 유적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마을 유적이다. 이 유적을 통해 기원 전후한 시기에 강력한 세력을 가진 집단이 교동리 일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 철기의 사용과 여러 나라의 등장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고조선 멸망(기원전 108)을 전후하여 한반도 북부 지역에는 부여`고구려`옥저`동예가,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 사회가 성립하였다. 이 시기를 삼한 또는 초기철기시대라고 한다. 삼한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사회였다. 철 문화의 보급은 철제 농기구와 철제 무기의 발달로 이어져, 생산력 증대와 함께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또한 교역이 활발해지고 경제 기반이 확대되면서 일부 집단은 소국으로 성장하였다.

삼한시대 울산은 진한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우시산국과 굴아화(), 그리고 거지벌()을 지금의 울산 지역에 있었던 정치 세력으로 추정하고 있다. 풍부한 철생산지인 달천철장과 대규모 마을이 발견된 교동리 유적, 중국제 유물이 출토되는 창평동 유적과 대대리 하대유적, 그리고 중산동 유적에서 확인되는 유구와 유물은 삼한시대 울산 지역 정치 집단의 존재와 위상을 보여준다. 또한 중국`북방 지역과 교류했던 사실도 알려준다.

 

* 청동솥

발이 세 개 달린 청동솥은 대대리 하대유적 23호 덧널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출토 당시 청동솥 주위로 많은 양의 숯과 불 맞은 흙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무덤을 만들 때 불을 피워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청동솥은 원래 중국에서 주로 만들어 사용된 것으로 소유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이러한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 권위와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물로 청동솥을 무덤에 묻은 것으로 보인다. 하대 출토 청동솥은 중국 한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솥이 만들어진 시기와 무덤에 부장된 시기가 2~300년 정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동 솥의 출토를 통해 대대리 하대 유적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집단이 북방과 대외 교역을 주도한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 하대 유적과 우시산국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 하대 마을 뒷산에서 삼한시대의 이 지역 최고 지배자들 무덤이 발굴되었다. 2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총 81기의 덧널무덤이 확인되었으며 무덤 내부에서는 엄청난 양의 와질 토기와 철기`장신구 등의 껴묻거리가 발견되었다. 특히 중국제 청동솥이 발견된 23호 덧널무덤은 길이 7미터, 너비 4미터가 넘는 대형으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삼한시대 후기 무덤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유적의 규모, 출토 유물의 수준을 통해 하대 유적이 위치한 웅촌면 일대가 우시산국의 중심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하대유적이 우시산국의 중심 지역이 맞다면, 우시산국은 부산 지역의 거칠산국, 경주 지역의 사로국과 비교하여 뒤지지 않는 강력한 세력을 가진 소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새로운 토기를 만들고 덧널무덤을 만들다

후기 삼한시대에는 와질 토기를 새롭게 만들어 사용하였다. 무덤도 널무덤을 사용하다가 2세기 말경, 대형의 덧널무덤을 만들어 많은 양의 토기와 철기를 껴묻거리로 묻었다. 덧널무덤은 다양한 크기의 무덤이 무리를 지어 분포하며, 크기와 껴묻거리의 양에 따라 신분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크기가 7~8미터가 넘는 초대형 덧널무덤의 등장은 앞 시기보다 더 강력한 세력을 가진 새로운 지배자가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울산 지역에서는 대대리 하대 유적, 중산동 유적, 다운동 유적, 대안리 유적 등에서 삼한시대 후기의 널무덤과 덧널무덤이 확인되었다.

 

* 새로운 토기의 등장, 와질 토기

와질 토기는 삼한시대 후기에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한 토기이다. 회백색을 띠고 두께가 얇으며 무른 재질의 토기이다. 고운 점토를 사용하여 물레를 돌려 만들었으며 두드림 무늬를 새겨 9백도 정도의 밀폐된 가마에서 구워냈다.

이른 시기의 와질 토기는 쇠뿔모양 손잡이 항아리, 주머니모양 항아리`짧은목 항아리`시루 등이 만들어졌으며, 이후에는 뚜껑 있는 굽다리 곧은입 항아리`뚜껑 있는 긴목 굽다리 항아리`화로모양 토기`오리모양 토기`굽다리접시 등 새로운 형태의 와질 토기가 만들어졌다.

 

* 삼한시대 울산 철 문화

삼한시대 울산 철 문화의 시작은 기원전 4세기 무렵 한반도에 철 문화가 전해진 이후, 전국적으로 철기 문화가 보급된 시기와 비슷한 기원전 1세기 경이다. 이후 2세기 후반이 되면 울산은 영남에서 가장 많은 철기를 사용하는 지역이 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진한의 철 생산 중심지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삼한시대 이른 시기에 발견되는 철기의 종류와 양은 적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철기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출토량도 증가하다가, 덧널무덤 단계에서 철기 사용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 단계가 되면 권위를 상징하거나 장식성을 강조한 철기도 등장한다.

 

* 쇠납작 도끼

편평한 판모양의 도끼이다. 이러한 판모양 도끼는 삼한시대 철 문화의 중심지인 영남지역에서 유행한 진`변한의 특징적인 철기이다. 실제 도구로도 사용하거나, 중간 재료 혹은 화폐로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 울산, 신라에 속하다

삼한시대의 여러 나라들은 점차 주변 지역을 통합하면서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다. 압록강 유역에는 고구려, 한강 유역에는 백제, 경주 지역에는 신라, 낙동강 유역 중심으로 가야 연맹체가 세워졌다. 한반도에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하는 여러 고대 국가가 존재한 시대를 삼국시대라고 한다. 삼국시대도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사회였다. 고대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군사력과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수취제도를 정비하고 철제 농기구를 보급하여 생산력을 높여 나갔다.

울산은 3세기 무렵부터 지역 집단별로 서서히 신라에 통합되어 4세기 무렵에는 본격적으로 신라의 지방으로 편입되었다. 편입된 이후 토기`무덤 만드는 방식 등에서 신라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신라 문화권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울산은 여전히 신라의 주요 철 생산지였으며, 수도인 경주 지역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정치`군사`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요 유적으로 중산동 유적과 다운동 유적, 조일리 고분군, 삼정리 하삼정 고분군 등이 있다.

 

* 단단하고 다채로운 삼국시대 토기

삼국시대가 되면 도질토기라 불리는 새로운 토기가 등장한다. 도질 토기는 두께가 얇고 두드리면 쇳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하며 색깔은 회청색이다. 고운 흙을 사용하여 빠른 속도로 물레를 돌려 그릇의 형태를 만들고 천도 이상의 고온 가마에서 구워냈다. 토기 표면에 무늬를 새기거나 흙으로 만든 인형을 붙이는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울산과 경주 지역에서는 4세기 무렵까지 와질 토기가 계속 사용되다가, 이후 울산이 신라에 편입되면서 신라 양식의 도질 토기가 점차 울산지역에 전파되었다. 이러한 신라 양식의 도질 토기는 무덤과 생활 유적에서 많이 발견된다.

 

* 삼국시대 울산 철 문화

삼국시대가 되면 이전보다 철기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사용량도 증가하여 철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는 철 생산 유적과 제작 도구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또한 철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달천철장 이외의 철광석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철 문화는 무덤의 형태와 함께 변화한다. 가장 이른 단계인 덧널무덤에서는 방어용 무기인 갑옷과 투구가 등장한다. 다음 단계인 돌덧널무덤에서는 철기의 양이 증가하고 말띠 꾸미개`말띠 드리개`안장과 같은 새로운 말갖춤이 등장한다. 이후 돌방무덤 단계에서는 발견되는 철기의 종류와 양이 뚜렷하게 감소한다. 이것은 장례 풍습의 변화에 의한 것으로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다양한 철기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고리자루 큰칼

고리자루 큰칼은 소유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이다. 약사동 돌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이 칼의 자루에 고리모양을 만들고 안쪽에 세잎무늬 장식을 더했다. 세잎무늬 고리자루 큰칼은 이승에서 지니고 있는 권세를 내세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화려하게 꾸며 무덤에 껴묻거리로 묻은 것으로 보인다.

 

* 갑옷

갑옷은 전사의 몸을 보호하는 무기 중의 하나로 쇠`가죽`뼈 등으로 만들어졌다.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며 가죽`뼈 등은 썩고 쇠만 남아있다. 쇠로 만든 갑옷은 낙동강 하류지역은 김해와 부산, 그리고 경주와 울산 등지에서 출토된다. 중산동 유적에서 출토된 이 갑옷은 몸을 보호하는 세 개의 큰 판으로 되어 있으며 목을 보호할 수 있는 판도 있다. 삼국시대 이른 시기에 제작된 갑옷으로 형태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 장신구

삼국시대 금``금동으로 만든 장신구는 장식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권력과 부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특히 귀족`평민`천인 등으로 신분이 구분되는 삼국시대 사회에서는 주로 왕과 귀족이 소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울산에서는 조일리 고분군, 삼정리 하삼정고분군의 지배층 무덤에서 금동관이 발견되었으며, 다른 무덤에서도 귀고리, 허리띠가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울산 지역 지배층의 권력과 신분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 당나라식 허리띠 장식 : 신분과 지위의 상징

당나라에서는 신분과 품계에 따라 허리띠를 맸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 통일 이후 사회 정비를 위하여 당나라 복식제도 따르는 과정에서 당나라식 허리띠가 등장하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사회에서 허리띠는 만들어진 모양과 사용된 재질에 따라 허리띠 주인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었다. 또한 허리띠가 사용된 시대의 의관제도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신라에서는 주로 왕의 무덤에서 금과 은으로 만든 화려한 허리띠가 출토되었다. 울산에서도 다양한 허리띠가 출토되었다.

 

* 신라 대외 교류의 창구

7세기 중엽이 되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당 전쟁을 거처 대동강-원산만 이남 지역의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루었으며, 신라의 북쪽 지역에는 발해가 세워졌다. 이 시기를 통일 신라시대, 혹은 남북국시대라고 한다. 통일신라는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불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으며, 중앙아시아와 이슬람 문화권과도 교류하였다.

울산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통일신라 시대가 되면서 그 기능이 더욱 강화되었다. 반구동 유적에서 발견된 항구 시설은 신라의 대외 진출과 선진 문물을 들여오기 위한 국제항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수도 경주의 방어를 위해 울산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인 북구 천곡동과 달천동 일대에 관문성(722, 성덕왕 21)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울산은 통일신라의 중심 도시로 역할이 강화되면서 상당한 경제력을 갖추었으며, 경주에 버금가는 영축사와 같은 사찰이 곳곳에 세워졌다.

 

* 반구동 유적 - 통일신라시대 국제항

울산 중구 반구동 유적은 구릉의 충적지 중앙에 위치한다. 이곳은 현재 육지지만, 퇴적층 분석 결과 과거에는 바다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구와 유적이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자연 암반을 활용하여 세운 건물이 확인된다. 이 건물에 사용된 기와가 경주 황룡사의 연꽃무늬 수막새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이 건물은 중요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는 목책 시설(경계나 방위를 위해 설치한 시설)이 확인되는데, 목책은 구릉과 동천의 경계에 해당하는 습지에 위치하며 220미터 정도의 길이에 2열로 조성되어 있다. 고려시대는 흙으로 쌓은 성이 중심시설로 확인된다.

이를 통해 반구동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건물이 있었으며, 통일신라~고려시대가 되면 목책시설과 토성과 같은 항구 관련 시설을 갖추고 신라의 대외 창구이자 국제항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400여 점의 다양한 출토 유물을 통해 이곳은 당시 울산 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 목간

목간은 일정한 크기로 잘라 만든 나무판에 글을 적어 놓은 것이다. 반구동에서 발견된 목간은 소나무를 깍아 만든 것으로 앞뒤에 글을 써 놓았다. 32글자로 추정되며 형태로 보아 물건에 매단 꼬리표로 보인다.

 

* 중국제 도자기

반구동 유적에서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자와 백자편이 발견된다. 당시 중국 자기는 최고급 수입품으로 국제항이 있었던 반구동을 통해 수입되어 소비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