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허송세월 : 김훈

부실이 2026. 1. 14. 23:09

* 허 송 세 월 : 김 훈

 

* 앞에 : 늙기의 즐거움

부고를 받을 때마다 죽음은 이행해야만 할 일상의 과업처럼 느껴진다. 애착하던 것들과 삶을 구성하고 있던 치열하고 졸렬한 조건들이 서서히 물러가는 풍경은 쓸쓸해도 견딜만하다.

 

나는 이제 높은 산에는 오르지 못한다높은 봉우리들을 올려다보면서 둘레길을 걷다가 돌아온다.

산꼭대기에서는 세상이 내려다 보이고 둘레길에서는 산봉우리가 올려다보인다.

내려다볼 때는 땅이 넓어 보이고 올려다볼 때는 하늘이 넓어 보인다.

내려다볼 때는 먼 것이 가까워 보이고 올려다볼 때는 가까운 것이 멀어 보인다.

내려다볼 때는 눈 아래로 많은 봉우리들이 나를 향해 밀려오는 듯싶지만

올려다볼 때 봉우리들은 첩첩 능선의 뒤쪽으로 사라져 간다.

 

오래 쓰던 등산장비를 후배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나니까 날이 저문 것을 알겠다. 산에 올라가기보다는 산수화를 들여다보는 편이 더 한갓지고, 아끼던 장비도 애착이 가지 않는다. 장비를 받아가는 후배도 나의 늙은이 행세가 민망했던지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한다. ‘멀쩡하니까 주는 거다. 너도 며칠 지나면 나처럼 되는 거야.’

담배. 네가 안 피우면 끊는 거다, 라는 이 단순한 말 한 마디에 나는 창피했다. 노스님은 고도로 응축된 단순성으로 인간의 아둔함을 까부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노스님의 말씀을 참으로 두려워했기 때문에 담배를 멀리할 수 있었다.

 

* 뒤에 : 새와 철모 : 생활은 크구나

똥바가지. 군용 철모에 긴 손잡이를 연결한 똥바가지를 보았다. 똥바가지는 전쟁의 야만성을 생활 속으로 용해시키면서 웃음 띤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산악 참호 속에서 전사한 병사의 넋이 생활용구로 변해서 돌아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말년]

의사가 또 말하기를늙은이의 병증은 자연적 노화현상과 구분되지 않아서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늙은이의 병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서 딱히 병이라고 할 것도 없고 병이 아니라고 할 것도 없다는 말이었는데,

듣기에 편안했다늙음은 병듦을 포함하는 종합적 생명현상이다.

```사가 본래 각각 독립된 범주가 아니라 한 덩어리로 뒤엉켜 동시에 굴러가면서 삶의 기본 풍경을 이루는 것이라고

나는 늘 느끼고 있었는데노환에 대한 의사의 의학적 소견도 삶에 대한 나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송세월]

햇볕이 좋은 가을날에는 연못 속의 거북들이 바위에 올라와서 볕을 쪼인다. 거북은 파충류이고 나는 포유류인데, 공원 연못가에서 마주 보며 햇볕을 쪼일 때 진화의 수억만 년 시간과 공간은 햇볕에 증발되어 버리고 거북과 나는 직접 마주친다. 나의 얼굴과 거북의 얼굴, 산책하는 개들의 얼굴과 철새들의 얼굴도 모두 구조가 같아서 나는 이 동물들과 내가 유전적 친연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재의 가벼움]

화장장에 다녀온 날 이후로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 죽음이 저토록 가벼우므로 나는 이 가벼움으로 남은 삶의 하중을 버티어 낼 수 있다. 뼛가루 한 되 반은 인간 육체의 마지막 잔해로서 많지도 적지도 않고, 적당해 보였다.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 일상생활 하듯이, 세수하고 면도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녀온 이야기]

호수공원에 산책 나갔다가 두 다리로 걸음을 걷는 일의 복됨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 땅이 있어서 인간의 걸음을 받아주었다. 꽃들이 피어 있는데, 창세기 때 핀 꽃을 이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내 옆에 꽃이 피어 있었구나. 이걸 모르고 먼 데를 헛되이 헤매고 있었구나

[꽃과 과일]

꽃은 저 자신의 운명을 활짝 드러내면서 망설임 없이 핀다장미나 모란처럼 화려한 꽃이나 민들레, 달맞이꽃처럼 수더분한 꽃이나,

피어나는 꽃들은 모두 그 생명의 절정에서 거침없다꽃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피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의 운명을 펼쳐 보이려고 핀다. 꽃들의 운명은 언제나 완성되어 있고, 이것이 꽃들이 누리는 자유의 발현이다.

 

꽃을 저러한 색으로 피어나게 하는 내적 필연성에 관하여 식물 종자를 공부하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꽃의 종자 안에 그러한 형질이 들어 있고 그 형질이 유전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대도시의 거리에 심긴 가로수의 생애는 기구하다. 도시의 지하에는 매설물이 많아서 가로수의 뿌리는 땅속으로 깊이 뻗지 못하고 지표 밑으로 어지러이 구부러진다. 도시는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으로 덮여 있어서 비가와도 물은 땅으로 스미지 않고 배수관을 따라 빠져나간다도시의 가로수는 고해에 뿌리박고 있지만, 봄에 벚나무 가로수의 꽃은 찬란하고 잎은 기름지다. 나무에는 불우의 그림자가 없다. 박토에 박힌 가로수들의 뿌리는 공원에서 사는 유복한 꽃나무들의 뿌리보다 훨씬 더 강력한 생명의 기능을 갖는다. 가로수의 뿌리들은 대도시 고층빌딩의 땅 밑에서도 나무를 살리고 꽃 피우는 생명의 물질을 기어코 찾아내고 빨아들여서 꽃에게 보낸다. 나는 보이는 꽃과 보이지 않는 뿌리 사이의 은밀한 교신의 모습을 엿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도 확실히 존재한다.

 

[시간과 강물]

물을 잘 봐라. 흐르는 물을 보면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낀다. 물이 흘러가는구나’ 아버지는 흐름을 잇대어 가면서 미래로 나아가는 시간의 새로움을 말한 것이었다. 경험되지 않는 새로운 시간이 인간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고, 그 시간 위에서 무너진 삶을 재건하고 삶을 쇄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강물은 미래로 향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내 아버지의 강물과 하대치(태백산맥)의 새벽 시간에서 인간의 생명을 통과해 흐르는 시간의 힘과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시간 앞에서 인간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고, 시간과 더불어 새롭다.

 

[세월호는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

2014416일 오전 945, 세월호 선장 이준석은 팬티만 입고 59도 이상 기울어진 세월호를 탈출해서 해경 123(정장 김경일)으로 건너갔다. 기관실, 조타실의 간부 선원들도 피구조자의 행색을 하고 123정으로 건너갔다. 기울어진 배 안에는 승객 400여 명이 남아 있었다. 이 시간에 선내 방송은 현 위치에서 안전하게 기다리고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라고 승객들에게 거듭 외쳤다. 1030분 세월호는 뒤집혀서 승객들과 함께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304명이 숨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급변침으로 세월호가 기울기 시작하자고박 불량 상태로 과적되어 있던 컨테이너, 중장비, 트럭, 승용차 등의 화물이 갑판에서 분리되어 한쪽으로 쏠리면서 바다로 떨어졌다배는 더욱 기울고, 물이 차오르고 뒤집혀서 가라앉는다.

세월호가 복원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더욱 기울어진 주된 원인은 고박 불량이었다. 그것은 이윤이다.

 

2016년 봄, 이 사건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대법원의 선고가 끝났다. 이때부터, 문제가 모두 일단락되었으니 일상으로 돌아가자라는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이 참사는 대형 교통사고이며 그 희생자들은 재수 없이 그 사고에 얽혀든 불운한 소수의 사람들이므로 적절한 보상과 조문과 위령의 의전을 베풀어 줌으로써, 이 우연한 사태가 산 사람들의 평온한 일상의 영역으로 넘어오지 않도록 하고, 소비경제에 미치는 심리적 악영향을 막아 경기를 활성화하자는 것이 세월호 극복의 움직임의 핵심적 논리였다. 이 극복 움직임의 상당한 부분이 정치권력에 의해 작동되고 있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한국 사회는 이 거대한 비극의 의미를 내면화하지 않았고그 비극의 심층구조를 맞대면하지 않았고

미래를 향한 반성과 실천의 발판을 확보할 수 없었다

세월호 이후 10년 동안 한국사회는 일상적 노동과 생산과 생활의 현장 속에서 수많은 이준석, 김경일, 유병언과 만나게 된다

 

그 후 10년 동안 기업이 책임져야 할 영역 안에서 2만 명 이상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고, 그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팔다리가 부서지고 장기가 터지고 골병이 들었다. 또 정부가 책임져야 할 영역 안에서 대형`중형`소형 재난 사고가 거듭 발생해서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고, 20221029일에는 서울 이태원에 놀러 나왔던 시민 159명이 경찰의 도움을 절규하다가 깔려 죽고 밟혀 죽었다. 이 모든 비명이 모두 일상 속에서 벌어졌으니 돌아가야 할 일상은 어디인가? 세월호는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

 

지배체제가 다수 인간의 생명을 일회용으로 소모해 버리는 사태는 일제강점기 경부선`경의선`경경선(중앙선) 철도 건설 현장에서 대규모로 벌어졌다. 연선 현장을 따라서 수많은 조선 노동자가 작업 중 사고로 죽었고, 병들어 죽었고, 일본인 감독관들에 의해 타살, 사살, 처형되었다몇 년 전 일본에 가서 1930년대 징용된 조선인들이 희생당한 구리 광산, 무연탄 광산을 답사했는데, 그 현장에 순난자 위령비라는 것이 세워져 있었다. 순난은 어려움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뜻이다. 침략전쟁의 후방기지에 동원되어 야만적 수탈 노동에 희생된 죽음은 으로 미화되었고, 침략전쟁은 으로 위장되었다.

 

광복 후에도, 목숨을 수탈해서 목표를 이루는 생산 방식과 건설 방식은 여러 공화국을 거치면서 전승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착공한지 887일 만에 428km를 개통했다. 세계는 이 공사의 속도와 공격성에 경악했다. 공사는 노동자의 시체를 넘고 넘어서 전진했다. 이 공사에서 노동자 77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부 간 도로의 중간 지점 쯤 되는 금강휴게소에 죽은 노동자들을 위한 위령탑이 세워졌다. 경북고속도로가 개통되던 197077,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이 위령비를 제막하고 헌화했다.

 

경부고속도로는 국토의 척추 간선(幹線:본선)으로 한강의 기적의 서막이었고 근대로 가는 지름길이었는데, 위령비는 그 입구에 서 있다. 희생자들은 산업전사로 추켜세워졌고, 그 후 반세기 동안 전국의 노동 현장에서 수많은 산업전사들의 주검이 쌓여 갔다.

노동 현장에서의 비명들은 복잡하거나 난해한 병리학적 과정을 거치는 죽음이 아니다. 이 많은 죽음은 대부분이 날벼락이다. 일제강점기 철도 공사장이나 경부고속도로 공사장에서 노동자들은 죽었다그로부터 100년 이상 지나서 한국은 우주선을 올리고, K머시기들이 세계를 재패했는데, 작업 현장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죽는다. 식민지 시대나 조국근대화 시대나 K머시기들의 시대나 사고의 유형과 원인은 단순하고 원시적이고 반복적이다.

 

세월호 참사는 이 산업화되고 일상화된 죽음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시민의식을 각성시켰고, 결집시켰다. 20181210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작업 중에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젊은 노동자 김용균의 죽음은 생명의 안전뿐 아니라, 저임금, 불완전고용, 하도급, 외주화, 민영화, 중간착취 등 산업 전반에 누적됐던 구조적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일상생활의 안전과 노동 현장의 안전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행동은 거듭된 죽음의 배후를 이루는 조건들을 혁파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것은 지난한 과정이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달걀로 바위를 쳐서 겨우 얻어낸 결과물이었는데, 20241월부터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 적용하는 조항을 2년간 더 유예하자는 경제단체들의 공세로 법 자체가 무력화될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서는 이미 준비기간 2년을 주어서 법 적용을 유예해 주었는데, 다시 2년을 미루어 달라는 것이 경영자 쪽의 요구다.

 

밥을 벌어먹으려다 죽은 사람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별 수 없이 또 밥을 벌러 가야 하는 사람들을 향해,

지난 2년 동안 아무 준비도 안 한 사람들이 내가 감옥 가면 너희들은 모두 밥 못 먹게 된다고 하는 말은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들이대지 말고무엇을 우선 할 수 있는지 말하는 말을 듣고 싶다.

 

조국 근대화 이후 산업과 생활의 현장에 지층처럼 쌓여 있는 주검들은 X레싱 정신의 결여, 체질이 되고 생리가 된 무신경,

바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과 생명을 업신여기는 마음욕망과 목표를 향한 필사의 돌격에서 비롯되었다

묶고 조이는 일을 바로 하자.

 

[여름편지]

모든 생명은 본래 스스로 아름답고 스스로 가득 차며 스스로의 빛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이어서, 여름 호수에 연꽃이 피는 사태는 언어로써 범접할 수 없었다. 일산 호수공원의 꽃들은 언어 너머에서 피어났고 여름 나무들은 이제 막 태어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빛났다. 나무는 땅에 박혀 있어도 땅에 속박되지 않았다. 사람의 생명 속에도 저러한 아름다움이 살아 있다는 것을 연꽃을 들여다보면 알게 된다.

 

[걷기예찬]

걷기예찬이 예찬하고 있는 것은 우선 걸음을 걸어가는 인간의 몸의 조건이다. 직립보행하는 이 몸은 진화의 수억 년을 통과해 나온 몸이지만, 아직도 네 발의 추억을 간직한 몸이다. 당신들의 발바닥의 굳은살 속에 그 추억은 살아 있다. 그 몸이 걸어갈 때, 걸어가는 몸의 속도, 시선의 위치와 방향, 팔다리의 동작은 몸의 기능과 위상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한다. 그래서 걷기는 시원적이고 인류학적이다.

걷기는 세상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몸을 이끌고 나아가는 삶의 진행태로 다가온다. 걸어가는 몸속에서 시간과 공간은 연료처럼 사용되고, 다리로 땅을 밀어서 살아 있는 몸은 앞으로 나아간다. 정신성은 몸과 함께 간다.

 

[조사 를 읽는다]

문체의 중요한 부분은 조사와 다른 단어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논리적 구조를 조사에 의지하는 언어로 문장을 만드는 일은 벽돌을 한 개씩 쌓으면서 그 사이에 접착제를 쓰는 공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접착제가 끈기가 모자라거나 지나치거나 용도에 맞지 않으면 건물 전체가 뒤틀린다.

오등(吾等)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 3`1독립선언서 첫 문장

이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고 지향점이 선명하다. 주어, 동사, 목적어가 정확한 자리에 배치되어 있고, 주어가 조사를 부려서 문장 전체를 작동시키고 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문장 한 개로 정확히 선언하고 있다.

 

오등’(吾等)‘은 강력한 주어다한국어는 주어가 없거나 주어를 감추어 놓은 문장으로도 서정시를 쓸 수 있고 산문을 쓸 수 있지만,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는 문건의 맨 앞자리에 일인칭 군집 명사 오등을 내세운 이 짧은 문장은 무미건조한 문체의 장관을 이루었다. ’오등은오등이라고 쓴다면 선언의 힘은 주저앉는다.

오등두 글자를 보면서

나는 한국어의 역사에서 주어가 주인의 자리를 당당히 차고 있는 언어의 풍경을 보았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라고 느꼈다.

‘3`1독립선언서조선 민족대표의 이름으로 공포되었으므로 오등의 문건상의 주체는 민족대표 33인이지만

그 실체는 목적어의 일부로 쓰인 조선인이다()’의 한자 의미는 이제, 여기서 또는 이로써이다.

이 한자 한 개에 한국어 조사 가 붙어서 자에를 이루면 자에191931일 서울의 현장을 말하고,

이 울분과 고통을 독립으로 전환하려는 역사적 계기로서의 시점과 현장을 말한다.

 

‘3`1 독립선언서에서 선언의 목적어는

아 조선의 독립국임조선인의 자주민임이다. ‘이다라는 술어의 명사형이다.

독립과 자주는 관념적이지만 독립국이다’, ‘자주민이다는 사실이고 소망이고 지향이다

이다으로 명사화해서 선언함으로써 이 명사형은 언어의 혁명적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

 

조사를 순수 한국어로는 토씨라고 한다. ‘는 한문 문장을 읽을 때 문리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어려운 초보자들을 위해 한문 문구와 문구 사이를 한국어로 접속시켜 주는 연결사이다. ‘토씨라는 말은 단어로서 독립된 위상을 갖지 못하고 부수적 기능을 갖는다는 뜻이고, ‘도울 조도 마찬가지다.‘

 

[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

이제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지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이육사 ‘광야’ 중에서

이육사(1904~1944)는 이 시행에서 이제, 홀로, 여기라는 부사 3개를 쓰고 있다. 시행 한 줄에 부사가 하나씩 박혀 있다. 이 부사 3개가 시행에 출렁이는 리듬을 부여해서 흐름을 끌고 나간다. 언어의 흐름과 내면의 흐름이 합쳐져서 이 출렁거림은 강력한 돌파력을 갖는다. 부사 3개가 인간의 존재를 약육강식하는 세계의 비극 앞으로 돌이킬 수 없이 바짝 밀어붙인다. 이 문장은 지금, 여기에 처한 실존의 모습이다이 외로움은 고독이라기보다는 단독이다. 이 부사 3개에 힘입어, 시인은 세계의 비극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서 아득한 미래를 향해 운명을 전환시키고 시와 자신의 생애를 역사의 전위로 밀어붙인다. 이 부사들은 웅장하고 강력하다. 이것은 혁명가의 부사이다.

 

졸레졸레 도야지 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이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 백석 ‘삼천포’ 중에서

대체로 백석의 문장은 서술문으로서의 논리적 구조가 튼튼하면서도 복층을 이룬 구문 위에 감각적 표현의 세계를 이룬다. 나는 이 논리적 구조와 감각적 세계의 상호보완 관계 속에서 백석의 가장 중요한 대목들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아름답다 - 아름답게처럼 형용사는 부사어로 쉽게 전용할 수도 있지만, 인용한 시행에서 재릿재릿하니따사로이의 쓰임새는 형용사와 부사 양쪽 모두에 걸치면서 표현하려는 대상을 인간의 감각 속으로 끌어들인다귀밑이 재릿재릿하니는 햇볕을 받는 돼지의 느낌이고, 돼지 귀밑에 내리는 햇볕의 모양새이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인간의 느낌이다. 이렇게 해서 이 시 전체는 산문적 종결 없이, 형용사의 세계로 열려 있다.

자유, 평등, 해탈, 초월 같은 개념어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상태는 형용사적 세계일 것이다 가난함빈곤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가난을 모른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겪는 삶은 빈곤이 아니라 가난함이고 차별받는 사람이 원하는 세상은 평등이 아니라 평등함이다. 해탈한 도인들의 자유는 동사나 명사의 세계가 아니라 중생들은 알 수 없는 어떤 형용사적 세계일 것이다. 옛글에 나오는 동양 고승들의 난해한 돌출 행동은 그가 마침내 혹은 갑자기 도달한 어떤 형용사적 세계의 비언어적 표현이다. 형용사적인 세계를 서술문의 형태 안에 들여앉히려는 노력은 오래 거듭되는 중생고이다.

 

[먹기의 괴로움]

코로나19가 부수고 지나간 폐허에서 아직도 많은 사람이 삶의 동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미 부서진 삶의 자리를 물가고가 다시 부수고 있다.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 에너지 가격 상승, 고금리와 고환율,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곡물 수출 동결 등이 이 물가고의 원인이라고 설명했다정부의 설명을 듣고 보니 이 물가고는 가뭄이나 홍수, 지진 같은 자연현상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세계 경제의 구조와 국제무역의 흐름을 쥐락펴락하는 거대한 세력에 의해 조정되고 통제되는 인위의 산물임을 알겠다사람들은 이제 노동을 임금으로 바꾸어서 시장에서 살아야 하고, 금융자본과 거대기업이 장악한 유통망 속에서 한 명의 무력한 소비자로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물가고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모두 압도한다. 물가고는 중생고의 종합판이고 완결판이다.

물리적 강제력을 쓰지 않아도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처지에 맞는 식당과 메뉴를 선택한다. 가격이 시장에 질서를 부여하는 힘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도 한다. 이 거리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은 작동되고 있지만, 그 작동의 결과는 자유와 조화가 아니고 억압과 구속이다. 이 억압과 구속은 밥을 사 먹는 사람과 밥을 팔아서 밥을 먹는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노동으로 먹고사는 그날그날 속에서 5천원짜리 밥 세끼와 아이들 먹는 분유와 군것질, 기저귀와 치약을 잘라 버릴 수는 없다. 더 이상의 퇴로가 없는 한계선에서 인간은 이 보이지 않는 몽둥이와 쇠사슬에 굴복하는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시장에서 한 사람의 소비자로 살아가는 인간은 자력으로 쇠사슬을 끊을 수 없고, 시장에서 달아나서는 살 자리가 없다.

밥은 밥을 넘기는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에 깊이 각인된다. 이 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인간은 사슬에 결박된 상태에서도 고귀하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무엇이 그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먹는다는 행위의 보편성과 절대성이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밥이 아무리 싸고 남루해도 먹는다는 행위는 인간에게 경건한 것이라고 이 동네 식당은 가르쳐 주고 있다. 밥은 생로병사의 기본 토대이다.

 

[박물관의 똥바가지] :

나는 밥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므로, 우선 밥을 먹는 일에 관련된 유물들을 들여다보았다. 절구, 맷돌, 항아리, 젓독, 김장독, 장독, 술독, 밥그릇, 국그릇, 주전자, 접시, 쟁반, 냄비, 뚝배기, 보시기, 탕깨(탕기).

한없는 물건들은 제가끔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표정들의 일관된 질감은 사람의 일상 속에서 필수불가결한 것들이 지니는 단순성과 현실성이었다. 이 물건들은 문화적 가치의 위계를 다투지 않고 스스로 낮은 자리에 처하면서 삶의 내용을 실물의 직접성으로 가득 채운다. 이 물건들이 입을 벌려서 말을 한다면 순하고 과장 없는 형용사와 부사, 주어와 동사로 구성되는 단순한 구문, 경험을 통과해 나오면서 모서리가 깍이고 단단해진 단어들, 들뜨거나 웃자라지 않아서 알곡이 많이 달린 생각들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산전수전을 겪은 노인이 삶의 내용과 질감을 모두 쏟아내는 장강대하의 이야기가 리듬에 실려 출렁거리며 쏟아져 나올 것이다.

 

고구려 옛 무덤 속의 벽화에는 까치뿐 아니라 씨름, , 음악회, 사냥, 야유회, 나들이, 아궁이, 부엌, 안방, 거실, 마차``` 같은 민속자료들이 그려져 있다거칠게 말해서, 고구려 무덤 속 벽화는 시대가 올라갈수록 사실적이고 내려올수록 관념적이다. 고구려가 만주를 장악하고 백제의 북쪽을 압박하던 4세기 무렵의 고구려 무덤 속은 죽은 자가 살았을 때 누리던 생활의 활기로 왁자지껄하다. 고구려 사람들은 생시의 일상을 저승에까지 가서 누리는 것을 내세의 지복으로 여겼다. 고구려 무덤 속에서 사내들은 말달리면서 사냥하고 여자들은 모여서 춤추고, 부엌에는 고기가 통째로 걸려 있고 주차장에는 바퀴가 커다란 마차가 세워져 있다. 고구려의 옛 무덤 속에는 민속박물관이 차려져 있는 셈인데, 이 박물관은 파주 민속박물관과 이어져 있다.

 

고구려 무덤 속의 밤하늘에서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에서 헤어지고 있다.(덕흥리고분 앞방 남벽) 애인을 보내는 직녀는 은하수의 가장자리까지 따라왔는데, 이 강물을 넘어가지는 못한다. 견우는 이미 소를 끌고 강물을 건너갔다. 개가 직녀를 따라왔다그림 속의 소는 한국 농촌에서 일하는 일상 속의 소이고, 개는 마을에서 돌아다니는 평범한 개다. 이 개는 주인님의 사랑과 이별에 대해서 아무런 물정도 모르고 따라왔다. 애인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은하수를 넘지 못하는 직녀는 마을로 돌아가야 하고, 개가 뒤를 따라갈 것이다. 소 모는 남자와 베짜는 여자는 농경사회의 노동자들이다.

 

고구려의 무덤 속에서 노동과 사랑과 이별은 생활 속으로 수렴되고 있다. 소는 견우를 따라가고 은하수 너머의 밭을 갈고, 개는 직녀를 따라서 마을로 돌아간다. 이 개는 마을에서 사는 개다. 평양성이 불타고 안시성, 국내성이 풀밭이 되고 여러 왕조들이 차례로 무너져도 생활은 영원하다. 이 한없는 생활의 증거들이 국립민속박물관 파주에 모여 있다.

 

[수제비와 비빔밥] : [백제기술, 흙에 담다]

2022년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백제의 장인들이 흙을 반죽해 여러 가지 생활용구와 조형물을 제작하던 기술을 보여 주는 전시회가 열렸다. [백제기술, 흙에 담다]

흙으로 만든 토기, 기와, 벽돌, 항아리, 굴뚝, 벽화조각, 인물상 등 수백점을 볼 수 있었다백제의 장인들이 흙으로 만든 인물상의 표정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때로는 익살스러웠다. 자의식에 도취해 있거나 스스로 권력을 의식하거나, 복종을 강요하는 표정은 없었다. 흙이라는 재료는 권력적 표상을 만들어 내기에는 질감이 합당하지 않았고, 재료 자체의 표현력이 모자랐을 것이다. 백제의 장인들은 흙과 물성의 한계 안에 머물면서 흙의 평화와 깊이를 조형물의 질감과 표정으로 완성해 냈다. 그릇의 표면이 거칠어지면 물로 손질을 해서 매끄럽게 만들어 놓지만 흙의 자유와 너그러움은 여전히 그릇에서 숨쉬고 있다.

 

반죽은 부정형의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모든 형상과 용도로 빚어질 가능성을 예비하고 있다. 흙을 반죽할 때, 옹기장이들은 새롭게 태어나는 흙의 숨결을 손바닥으로 느낀다. 옹기장의 마음은 손바닥을 통해서 물질 속으로 건너간다. 인간의 몸과 마음과 물질이 구획을 허물고 소통한다. 이 행복은 사물을 주무르는 생산자의 기쁨이다. 물질의 형질을 바꾸어서 세계를 개조할 수 있다는 옹기장이의 꿈은 신석기 이후로 지금까지 작동하고 있다. 반죽은 가마의 불 속에서 변환을 이루는데, 옹기장이는 이 요변의 모든 비밀을 경험할 수 있지만 설명할 수는 없다.

 

[몸들의 평등]

심장은 피를 몸속의 먼 오지로 보내고, 허파는 지쳐서 돌아오는 피를 싱싱한 피로 바꾸어서 심장을 회복시킨다고 쓰여 있었다. 심장은 자발적 리듬의 힘으로 피를 내보내고, 다시 돌아와 싱싱해진 피의 힘으로 그 자신이 새로워진다는 것이었다.

지나간 피와 다가오는 피가 흐름으로 이어지면서 이 모든 쇄신과 소생의 과정은 스스로의 리듬에 맞추어서 지속적으로 전개된다. 피는 단절되지 않고서 국면을 전환한다. 몸의 먼 변방 오지에까지 나가서 다른 많은 피로들을 씻어 준 피는 지친 몸을 이끌고 심장으로 돌아와서 새로워진다. 심장은 개인의 것이면서 누구나의 것이었다. 심장은 절대적 개별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작동시키고 있었다.

 

[새 날개 치는 소리를 들으며]

새들의 생명은 파충류의 생명과 섞여 있다. 뱀이 진화해서 새가 되었다고 생물학 책에 나와 있다. 어떤 새의 종아리에는 지금도 비늘이 남아 있어서, 그 증거가 되고 있다. 얼마나 큰 소망과 그리움이 뱀을 날게 하는 것이며 새들을 대륙 간 비행으로 몰아내는 것인가를 나는 생물학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생물학 책에는 그리움은 없고 적응만 나와 있다. 두 단어는 같은 뜻이 아닐까.

대륙을 건너다니는 새들은 모두 그 고단한 종족의 후예들이다. 난생하는 것들은 인륜이 없고, 대륙 간을 날아서 다니지만, 짐 보따리가 없다. 새들의 운명은 유전자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새들은 2억 년 전 쥐라기 시조새 화석에서 날아오른다. 새들은 진화의 수억만 년 시간과 공간을 건너와서 한강 하구에 내려앉는다.

 

머물지 않고 옮겨 사는 저들의 가혹한 운명은 가벼워 보인다.

이 마을에 오는 새들이 작년이나 재작년에 왔던 새들인지는 확실치 않다. 새들이 해마다 이 마을에 오는 걸로 봐서, 늙은 새들이 바람 속에서 죽더라도 새로 태어나는 새들에게 일산 호수공원에 가면 사나운 것들이 없고 먹을 것이 많다는 정보는 주입하는 것이지 싶다. 그렇다면 이 마을에 오는 새들의 집단은 정보와 혈통이 유전되면서 특수한 친연관계를 이루는 무리가 아닐까 싶다.

 

[고속도로에 내리는 빛 - 겨울의 따스함]

코로나 재난으로 여러 사업자들이 무너지고, 상심한 사람들이 벼랑으로 내몰리고, 북극 한파에 한강이 얼어붙어도 노동의 자리로 향하는 자동차의 대열은 일출을 앞둔 새벽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대열이었고, 삶을 단념하지 않는 사람들, 기어이 살아 내야 하는 사람들의 강력한 생명력의 분출이었다. 산 사람들의 살려는 의지가 도로에 가득 차서 후미등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도로는 생활의 길이었고, 생명의 길이었고, 고해를 건너가는 길이었다. 고해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고해를 건너갈 수가 없다. , 길이 막히는 풍경이 이처럼 장엄할 수가 있구나```

 

[청춘예찬]

찰스 다윈(1809~1882)[종의 기원]은 수많은 수집물과 관찰 기록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정보들은 자신이 직접 채집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그가 신뢰할 수 있는 다른 연구가들로부터 얻은 것도 있다. 수백만 년 동안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명이 전개외 오는 과정을 더듬어 가는 징검다리로 삼기에 이 정보들은 너무도 빈약했지만, 다윈은 미리 설정된 원리로부터 현실의 구체성을 연역해 내지 않았다.

 

다윈은 생명의 구체성과 다양성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계통을 세움으로써 수백만 년의 시공을 거슬러 올라갔다. 원리로부터 출발해서 구체성으로 내려오는 과정은 그 사유의 전개과정에서 논리정합성에 오류가 없다 하더라도 연역의 단계가 길어질수록 현실의 구체성으로부터 멀어진다. 주어와 술어를 무리 없이 연결시켰다고 해서 그 구도 안에 진리가 들어앉지는 않는다.

다윈의 글은 사실을 들이대며 원리를 말해야 하고, 검증되지 않은 원리를 부수어야 하는 자의 고통스런 성실성과 하나의 사실에서 다른 사실로 건너뛰면서 사유를 끌고 가야 하는 자의 두려움을 보여 준다. 박물학에 소양이 없는 나는 다윈을 글을 읽을 때 그가 말하려는 진리의 내용보다도, 사실과 정보를 대하는 그의 마음과 행동의 풍경을 우선 읽게 된다. [비글호의 항해기]가 나의 성정에 맞는다.

 

[종의 기원]에 의해 인간은 수만 년의 백내장을 걷어 내고 저자신의 새로워진 눈으로 시간과 공간과 생명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새롭게 열린 이 시야는 매우 넓었으나, 수백만 년 동안의 지층에 생명의 증거물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넓은 시야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증거와 사유를 이끌고 건너가기에는 물증이 허술하다는 것을 다윈은 알고 있었다. 다윈은 멸종의 희미한 흔적을 붙잡고 그 시간과 공간을 건너갔다.

 

[종의 기원] 서문

나는 종이라는 것은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며``` 소위 동일한 속이라고 부르는 집단에 속해 있는 종들은 어떤 다른(대개는 멸절한) 종의 직계 자손들이라는 점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다. 이 말은 개별적으로 창조된 생명의 존재를 명백히 부정하고 있다.

 

아마도 지구에 살았던 모든 유기체는 처음으로 생명력을 가지게 된 어떤 하나의 원시형태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결론에서 다윈은 [종의 기원]생명의 기원에까지 밀어 올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미수에 그치고 있다.

이런 대목들의 어조는 젊은 다윈으로부터 많이 떨어져 있는 듯하다. 다윈을 읽을 때 나는 다윈이 생명의 구체성으로부터 원리쪽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윈은 종의 전개 과정을 더듬어 올라가서 생명의 기원으로 향하고 있지만, 생명력의 기원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생명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변하고, 변하지 못하는 것들이 멸절된다고 할 때, 그처럼 스스로 변하는 힘의 원천과 기원은 무엇인가를 나는 다윈의 글에서 읽을 수가 없었다. 다윈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잘 알아서, 그 한계를 범하지 않는다.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한계가 없는 형태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 1784년에 정약용(1762~1836)은 스물두 살, 정약전(1758~1816)은 스물여섯 살, 이승훈(1756~1801)은 스물여덟 살, 이벽(1756~1785)은 서른 살이었다.

이 청년들은 인간세의 인륜도덕과 물리적 시공간의 운동법칙은 범주가 다른 것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에 눈뜨기 시작한 당대의 엘리트 지식인이었고 조선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었다.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이미 생원시에 합격해 있었다. 이벽의 누님 이씨 부인은 정씨 집안의 맏아들 정약현과 혼인했다. 이 청년들은 사돈댁을 오가며 학문으로 교류했고 혼맥으로 인연되었다.

정약현의 아내이자, 약전`약용 형제의 큰 형수인 이씨 부인은 서른 살에 죽었다. 1784년 봄에 약전, 약용과 이벽은 마재(팔당호 물가마을)의 큰형님 댁에 모여 젊어서 죽은 이씨 부인의 4주기 제사를 지냈다.

 

조선의 19세기는 천주교도를 박멸하는 고문과 학살로 시작되었다.(1801년 신유박해). 이 참극은 성리학의 왕조 조선이 서양 문물과 사상을 퇴치하는 문명충돌이었고, 체제를 수호하는 비상조치였고, 왕조 내부의 권력투쟁이었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세상을 미리 본 사람들의 순교 사태였다.

1784415일에 지식인 청년 세 명을 태우고 팔당나루를 떠난 돛단배를 타고 가던 중 이벽은 정씨 형제 두 명에게 한 권의 책을 보여 주면서,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정약용은 예순한 살이 되어 그날을 회고하면서 말했다천지조화의 시초, 사람과 신, 삶과 죽음의 이치를 듣고 황홀함과 놀라움과 의아심을 이기지 못했는데, 마치 [장자]에 나오는 하늘의 강이 멀고 멀어 끝이 없다는 것과 비슷했다.

 

이승훈은 그의 부친 이동욱이 1783년에 동지사의 서장관이 되어 북경에 갈 때 아버지를 따라가서 서양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얻고 천주교 교리 서적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승훈의 행동은 그 자신의 신앙심에 따른 것이었지만, 사전에 이벽의 권유가 있었다. 이승훈은 1784324일에 귀국했고, 이벽은 415일에 정씨 형제에게 배 위에서 한 권의 책을 보여 주었다. 이 책이 이승훈으로부터 얻은 것이라면 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첨단의 서책과 정보가 매우 빠르고 긴밀하게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쟁의 아수라 속에서 천주교인으로 모함을 받아 환로(벼슬길)가 험난해지자 정약용은 1797년 임금에게 자명소를 올려서 면직을 요청했다. 이 상소문에서 정약용은 그 한권의 책을 읽었고, 한때는 마음속으로 좋아해서 사모했고 내용을 거론하며 남에게 자랑했습니다. 라고 자백했다. 정약용은 이 상소문에서 천주교의 교리를 극언으로 비판하고 자신은 천주교를 이미 떠났다고 호소했다. 임금은 정약용의 진정성을 이해했으나 정약용과 젊은 그들은 죽음으로 내몰리는 참화를 피할 수 없었다형틀에 묶인 정약용은 천주교인들을 적극적으로 고발했다. 정약용은 이승훈과 조카사위 황사영(1775~1801), 주문모신부(1752~1801)를 지목했고, 천주교인들을 효과적으로 색출해낼 수 있는 방안을 포도청에 조언했다. 정약용은 사형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정약전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 받은 후 교회 모임에 여러 번 참가했고, 그의 동생인 순교자 정약종(1760~1801)에게 전도했다. 정약전은 그 후 천주교와 결별했으나 신유박해 때 다시 기소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이벽의 집은 서울 수표교 인근이었다. 북경에서 세례 받고 돌아온 이승훈은 이벽의 집에서 신자 모임을 갖고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세례식 모임이 한국천주교회의 창설로 인정되어 있다. 거대하고 무서운 박해가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이벽은 그 다음 해에 페스트로 사망했다.

 

형틀에 묶인 이승훈은 가혹한 고문 끝에 자신이 정약용에게 세례 준 사실을 폭로하고 정약전을 혐의에 연루시켰다. 국문장에서 정약용과 이승훈은 서로를 원수라고 부르며 고발했다. 이승훈(1756~1801)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클로드 샤를 달레 신부는 그의 저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그는 천주교인이라고 참수당했으나 배교자로 죽었다고 썼다.

그 한 권의 책으로 멀고 높은 곳을 바라보던 정약용은 형틀에 묶여서 가깝고 비루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고발로 여러 사람들이 잡혀 와서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간의 언어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정약용은 강진에 18년간 유배되었고,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배지에서 정씨 형제는 내세의 하늘이 아니라 현세의 땅과 인간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정약전은 흑산해역의 물고기들을 관찰해서 [자산어보]를 썼다. 그는 고전이 아니라 물고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섬의 주민들과 어울려서 술 마시며 놀았고, 섬의 여자와 혼인해서 두 아들을 낳았고, 공부방을 차려놓고 어부의 자식들을 가르쳤다. 그는 유배지의 현실을 받아들였고, 거기에 동화했고 그 위에서 희망을 건설해 나갔다유배지 강진에서 정약용은 산천의 자연을 즐겼고 시대의 타락을 괴로워했고 청년들을 모아서 가르쳤고, 수많은 저술을 통해서 난세를 수습하는 경륜을 전개했다.

 

황사영의 생애와 죽음은 순결하고 참혹하다. 황사영(1775~1801)은 열다섯 살에 진사로 급제해서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왕조의 금지옥엽으로 입신했고 만고역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현실에 절망했다. 그의 절망은 완벽했으므로 환영이 오히려 현실로 느껴졌다. 수배망이 좁혀지자 그는 충북 제천 산골에서 밀서를 썼다.(황사영 백서)

밀서에서 그는 조선 조정의 부패와 야만적 신앙 탄압을 고발하고 서양 여러 나라의 함대와 병력으로 조선을 겁박해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의 백서는 당대의 흉흉한 민심으로 웅성거리고 있다. 밀서가 발각되자 조선 조정은 경악했고, 박해는 더욱 잔혹하고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황사영은 다시 끌려나온 정약전, 정약용 등과 대질되면서 고문당했고,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다.

 

황사영은 초야의 포의임에도 불구하고 당대 현실의 야만성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 야만성의 현실적 뿌리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그는 순결했으므로, 순결한 만큼 세상에 분노했고, 순결한 만큼 세상물정을 몰랐다. 그는 세상물정에 아둔한 만큼 담대했고, 담대한 만큼 무모했다. 그는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아마도 그때 내가 동료 신앙인으로서 황사영의 곁에 있었더라면 나는 그의 행동을 말렸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인간이지만, 그의 순결하고 또 거침없어서 무모한 청춘의 영혼이 살아남아 이 가짜뉴스로 어수선한 시대를 향해 한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황사영이 사형당한 후 104년 후에 안중근(1879~1910)이 사형당했다. 100년 동안 조선은 무너져갔다. 조선의 계년은 서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와 같았다. 시대를 전환하려는 노력들은 모두 실패했다. 안중근은 서른한 살에 죽었다. 안중근은 살인범으로 처형되었지만, 천주교 신앙인으로 죽었다. 안중근은 적의 수뇌를 쏘아 죽이고 적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적의 사형대에서 교수되었다. 황사영은 그가 증오하고 저주했던 정치권력의 사형장에서 육시되었다. 장소는 달랐지만 이 두 청년은 모두 그 시대의 사형장에서 죽임을 당했다. 시대가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들도 시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안중근은 1897년에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영세 받고 입교했다. 빌렘 신부는 사형 집행 직전에 여순의 감옥으로 면회 와서 안중근에게 고백성사와 영성체를 베풀었다. 그가 하느님께 간구한 것은 동양의 평화였지 이토의 목숨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중근은 의병부대를 지휘하던 시절에도 포로로 잡은 일본군 병사를 석방해 주었다. 살인은 그의 목적이 아니었지만, 이토는 약육강식하는 야만적 세상의 지배자이며 관리자였다.

 

[안중근의 침묵]

안중근은 그의 시대를 뛰어넘는 불멸의 아이콘이다. 이 세상의 악을 격파하고 현세의 땅 위에서 평화를 이루려는 소망을 향해 몸과 마음을 던지는 젊은 안중근의 넋은 한국인으 마음속에서 영생하고 있다안중근은 믿음 깊은 천주교 신앙인이었지만, 그의 생애는 당시의 한국천주교회의 프랑스인 성직자들과 커다란 갈등을 겪었다. 이 갈등의 성격은 세속의 길과 신앙의 길이 부딪히는 교리적 측면에서부터 식민지 현실의 울분과 제국주의적 세계경영이 부딪히는 정치적 충돌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중층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 여러 층위들은 결국 성과 속의 갈등으로 귀결된다안중근은 서로 대립되는 이 두 방향의 길을 하나로 틀어쥐고 나아가려 했고, 프랑스인 성직자들은 세속의 길과 신앙의 길을 엄별해서 신자들을 속죄와 구령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하느님의 뜻으로 현실의 땅 위를 걸어갔고, 프랑스인 성직자들은 하느님의 뜻으로 내세를 가리키고 있었다.

안중근의 집안은 부친 안태훈의 주도에 따라서 빌렘 신부에게 세례 받고 입교했다.

황해도 지역의 한국천주교회는 안중근 가문의 세력에 힘입어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고, 안중근 가문은 지역사회에서 천주교회와 서양인 성직자들의 정치적 위상에 기대고 있었다. 안중근 가문과 천주교회는 세속적인 공생관계에 있었지만, 이 무렵 안중근의 신앙은 영적인 순수함에 가득 차 있었다. 안중근은 빌렘 신부를 모시고 지역을 순회하면서 설교했다. 안중근은 외래 사상을 접해 본 적이 없는 지역민들 앞에서 인간 영혼이 불멸을 강조했고,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존귀함을 역설했다. 안중근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이 인류에게 주는 축복을 말했고, 사후의 상과 벌을 말했고, 현세에서의 권선징악을 말했다.

 

한국인들에 대한 빌렘 신부의 강압적인 태도도 불화의 원인이 되었다. 안중근은 빌렘의 강압적 태도가 성직자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교인들 앞에서 공언하고, 서울로 가서 뮈텔 주교에게 고한 뒤 로마 교황에게 품신해서 이 같은 폐습을 막아야 한다고 교인들을 선동했다. 빌렘은 이 말을 전해 듣고 노해서 안중근을 마구 때렸다. 이 사건은 빌렘이 먼저 사과함으로써 화해되었다일상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일을 참지 못하고 여기에 개입해서 바로잡으려는 안중근의 심성은 이처럼 직선적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안중근 시대에 한국에 파견된 서양인 신부들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보여준다.

하얼빈역의 거사 후 계속된 신문과 재판의 과정에서 일본인 검찰관과 재판관은 안중근의 살인을 신앙에 대한 배반으로 몰고 가서 안중근의 양심상의 정당성을 파괴하려고 집요하게 달려들었다안중근 : 성서에도 살인은 죄악이라고 했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다. 안중근의 논리는 신앙의 길과 세속의 길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토를 죽인 자신의 행위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조부치(감찰관) : 그대가 믿는 홍 신부가 이번 범행 소식을 듣고 자기가 세례 준 사람 중에서 이런 사람이 나온 것은 유감이라고 한탄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그대는 자신의 행위가 사람의 도리와 종교의 취지에 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안중근의 침묵은 신앙과 현실의 간극에 끼인 그의 깊은 고뇌를 느끼게 한다. 나는 이 침묵이 가장 현명하고 거룩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안중근은 이 위태로운 신문에 침묵함으로써 현세의 교회와 화해할 수 있는 마지막 통로를 열어 놓았다. 이 통로를 따라서 빌렘은 여순 감옥의 안중근에게 왔다.

 

[아이들아,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아라]

어린이집 노란 버스의 아동보호네 글자가 갖는 공적 개방성은, 어린이집 노란버스가 떠날 때마다 엄마와아이가 작별해야 하는 슬픔을 위로한다. 사회의 공공성이 개인을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나의 동네는 살 만하다내 새끼 지상주의는 유전병이나 풍토병과도 같아서 부모들은 눈 가린 경주마처럼 제 자식만을 들여다보았고,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의 관계를 헤아리는 기초적 지성의 시선을 상실했고, 특히 엄마들은 내 새끼의 늪에 빠져서 스스로 완매(頑昧: 완고한 어리석음)한 모성의 노예가 되었다.

지금 어린이날은 미래를 감당해야 할 후배 세대로서, 사회 전체가 함께 보호하고 올바르게 길러 내야 할 공적 존재로서 어린이를 성찰하는 바탕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오직 내 새끼를 데리고 나가서 좋은 음식 먹이고 놀이기구 태워 주고 응석을 받아주는 날에 불과하다.

지금 내 새끼 지상주의는 이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학교와 교사를 괴롭혀서 교육의 근본을 파괴하고 사회 계층 간의 적대의식을 고조시킨다. 국회 청문회에 나온 고위직 후보자들은 하나같이 위장전입의 전과가 있다. 이 위장전입은 모두 부동산 거래의 이익을 노린 것이거나 내 새끼를 명문 중고등학교에 보내고 명문 대학에 보내서 기득권을 세습해 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 위장전입은, 맹모삼천이나 애끓는 부정의 프레임 속에서 사면된다. 위장전입은 실정법을 위반한 범죄인데, 위장전입만으로 공직 임명에서 탈락한 후보자는 없다. ‘내 새끼의 위력은 헌법도 국회도 여론도 당해 낼 수가 없다.

 

중진급 국회의원이 월급 많이 주는 대기업에 자기 자식을 부정취업 시키고, 끗발 좋은 부모들이 권력자들에게 자기 자식의 취업을 부탁해서 남의 자식의 취업 기회를 박탈하는, 이 오래된 갑질의 전통도 아이고 내 새끼야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내 새끼를 앞세운 이 갑질의 전통은 유구하고, 밥술이나 먹게 되자 이 갑질은 더욱 권력화되고 일상화되었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내 새끼갑질 앞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졌겠는가. 끗발 없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그날그날 힘들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이 더러운 세상에 만정이 떨어져서 아기를 낳지 않는다.

 

[아이들아,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아라 2]

동학의 초기 지도자들은 어린이를 자유롭고 창발적인 개아로서 인식했을 뿐 아니라, 어린이는 사회의 공적 구성원이며 공동체의 미래를 열어 나가는 인적 자산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아동관은 어린이를 사적 혈육과 가문의 틀 안에 가두어 놓고 장유의 질서와 충효의 이념을 일방적으로 주입했던 수백년 역사의 어둠을 걷어내는 개벽이었다.

 

동학의 경인(敬人) 사상은 하느님은 초월자인 동시에 인간의 내면에 살아 있다고 가르쳤고, 이러한 인간관은 2세 교주 최시형에 이르러 여성과 아동을 한울님으로 존중하는 교리를 구축했다. 최제우(동학의 교조. 1824~1864)와 최시형(동학 2세 교주. 1827~1898)의 시대에 조선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무너지고 있었다.

 

최제우가 사도난정의 죄인으로 처형된 후 최시형은 관의 추적을 피해 36년 동안 강원도의 산간오지 마을로 숨어 다니면서 아동존중, 양성평등의 가르침을 백성들 사이에 씨 뿌렸다. 이 씨앗은 반상적서와 가문과 당색을 주축으로 하는 조선의 쇠사슬을 거부하고 있었다. 최시형은 스승 최제우가 영성체험으로 터득한 마음의 빛을 하층민들의 일상생활과 생산노동 속에서 키워 냈다. 최시형은 좌도난정의 죄로 1898년 교수형으로 순도했고, 교통은 3세 손병희(천도교 3세 교주. 1861~1922)에게로 넘어갔다.

 

어린이날을 창시한 방정환(1899~1931)3세 교주 손병희의 셋째 딸 손용화와 혼인해서 스승의 사위가 되었다. 방정환은 한국 최초의 직업적 사회활동가라고 불릴 만하다그는 동학의 교통으로부터 이어받은 아동존중 사상을 사회적으로 실현했다. 그는 젊은이늙은이와 대등한 어린이라는 말을 지어내서 통용시켰고, 어린이운동 조직을 만들었고, 어린이잡지를 발행했고,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동화와 동요를 구연했다. 그는 시대의 앞날을 열어 내는 사상적 선각자였고, 사회운동을 위해 사람을 끌어모아서 작동시킬 줄 아는 현실 속의 활동가였는데, 이 운동의 물적 토대는 천도교의 조직과 자금이었다.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는 192351일 천도교회당 앞마당에서 열렸다. 스물네살의 청년 방정환과 그의 젊은 벗들이 이 행사를 기획하고 지휘했다. 이날 행사는 놀이와 공연이 어우러진 축제로 진행되었고 안국동, 종로를 지나 가장행렬로 마무리되었다. 이날 행사를 알리는 전단 12만 장이 배포되었다. 당시의 종이와 인쇄 사정으로 봐서 12만 장은 놀라운 물량이었는데, 물량보다 더 역사적인 것은 그 전단의 내용이었다.

 

[소년운동의 기초조건]

.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어린이날의 약속]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내 아들놈, 내 딸년 하고 자기 물건처럼 여기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새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젊은 방정환의 이 외침을 들으면 요즘의 어린이날이 얼마나 퇴행적인가를 다들 알 수 있다. 지금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면서 삶과 미래에 영감을 얻는 어린이는 없다. 어린이는 어른이 만든 목줄에 짧게 묶여 있다. 어린이는 내 새끼일 뿐이다. 집집마다 아이고 내 새끼야를 외치는 날은 방정환이 설계한 어린이날이 아니다. 지금의 어린이날은 내 새끼의 날이다. 다들 제 자식만 끌어안고 있으면 이 나라의 모든 어린이들은 남의 자식이 된다.

 

 

[박경리, 신경림, 백낙청 그리고 강운구]

사진가 강운구의 인물사진전 [사람의 그때]가 부산 고은 사진미술관에서 열렸다. (2021) 이 전시회에는 현대 한국의 문학인과 화가 160명의 얼굴 사진이 걸려 있다. 화가 허백련(1891~1977)에서 소설가 임철우에 이르는 60년 동안의 사람들이다. 이 사진들은 1971년 이후에 찍혔다.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또는 대상)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은 강운구 사진의 중요한 바탕을 이룬다. 이 관계 설정은 태도나 시각의 문제이면서도 심리적 배경의 문제이다. 관계 설정은 사진의 본질에 깊숙이 작용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의 인물 사진들 속에서 이 관계는 고요하고 평화롭다강운구는 이 관계 설정에 대해서 스스로 말했다. 사람들을 찍으러 갈 때마다 지러 간다고 나는 나에게 말하였다. 찍히는 대상들이 이겨야 그 사람 모습이 그 사람답게 찍힐 것이라고 나는 굳게 생각했다.

그의 이 고백은 인물(또는 대상)을 대하는 사진가로서의 태도에서 핵심적 진실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조형의지를 앞세워서 인물을 향해 달려들지 않는다. 그는 카메라를 숨기는 것처럼 작동시킨다. 그는 인물로부터 멀리 물러섬으로써 인물이 스스로 드러나게 한다.

강운구의 인물 사진들 속에서 인물들은 피사체의 수동성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찍히는 사람은 자신의 빛과 자신의 어둠을 거느리고 자신의 표정을 자생시키고 있다. 인물들은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보여지는 사람들인데, 강운구의 카메가가 그 보여지는 것들을 본다. 그 보여짐을 향해 셔터를 누를 때 인물은 고정되지 않고 풀어진다.

 

박경리(1926~2008)의 사진

1976년 서울 성북구 정릉동의 자택에서 찍었다. [토지]의 앞부분이 단행본으로 막 출간된 때였다. 1972년 박정희의 유신통치가 시작되었다. 1973년에 박정희는 동경에서 김대중을 납치했다. 1974년에 육영수가 피살되었다. 1975년에 베트남에서 미군이 패전했고, 박정희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19749월에 박경리의 사위 김지하는 군법회의에서 무기정역이 확정되었고, 1975년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석방된 지 1개월 만에 김지하는 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1976년 김지하의 재판은 계속되었다. 김승옥이 군사재판에 나와서 김지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사진 속 쉰 살의 박경리가 이 암흑과 야만의 세월을 건너가고 있다. 그의 얼굴은 글 쓰는 실무형 노동자의 표정이다. 사진 속의 박경리는 참으로 제자리에 있다. 이 사각형의 어둠 속에서 박경리는 [토지] 속에 전개되는 생명의 세상을 설계하고 있었다.

 

전시장에 걸린 160명 중에서 72명이 작고했다.(202112월 기준)

사람은 지나가지만 사람됨은 지나가지 않는다짓밟히고 억눌린 시대에도 사람은 사람다운 표정과 체취와 온도를 지니고 있었고

억압에 매몰되지 않았다많은 것들이 지나간 뒤에야 지나가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표정들이 이 전시장에 걸려 있다

 

[여덟 명의 아이들을 생각함]

지금 큰아이가 열두 살인데, 좀 더 자라서 빨래라도 할 수 있을 때까지 밥을 해 주고 싶었다나는 이 말의 진정성을 믿는다. 이 젊은 어머니는 그 절망적인 패륜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간성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다. 나의 믿음이 그렇기를 바라는 소망이라 하더라도, 믿음과 소망이 겹쳐지는 마음의 풍경도 인간사의 영역 안에 속한다.

이 젊은 어머니는 아이 두 명의 사체가 들어 있는 냉장고의 문을 수시로 여닫으면서, 그 안에서 저장된 식재료를 조리해서 남은 자녀 세 명의 끼니를 챙겨 왔다. 그 밥상에 다섯 식구가 둘러앉아 저녁을 먹을 때 이 어머니의 심경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하는 일은 괴롭다. 밥 먹기가 어려워서 두 아이를 죽인 어머니는 경찰에 잡혀와서 살아 있는 자식들의 밥을 걱정했다.

 

검사가 이 젊은 어머니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는 네 명이 된다. 아마도 열두 살 난 큰 딸은 좀더 자라면 동생들을 위해 빨래를 하고 밥을 해야 할 터이다이 네 아이는 어머니가 없는 세상에서 성장기를 보내야 한다. 이것은 인간 세상의 가장 참혹한 불우이고 박탈이다. 아이들은 일생 동안 이 고난의 족쇄에서 풀려나기 어렵다. 이 아이들은 특정한 개인이나 국가 사회에 대해서 책임져야 할 어떠한 행위도 행위하지 않았다. 이 아이들은 그 가난한 어머니의 자식일 뿐이다.

 

나는 이 세계와 인간의 영원한 불완전성을 말하려고 한다. 법의 적용과 집행이 법으로서 정당한 것이라 해도, 이로써 인간세상에 정의가 구현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이 불완전성은 세계의 본래 스스로 그러한 운명이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 세계의 불완전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 불완전성을 해결할 수 없지만 그 불완전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세계와 인간을 대하는 마음에서 겸손과 수줍음과 조심스러움을 갖출 수 있다. 겸손과 조심스러움을 상실한 태도가 이 불완전한 세계 위에 지옥을 완성한다. 이 지옥의 이름은 파시즘이다.

 

2023년 콜롬비아 산악지대에 추락한 경비행기에서 40일을 견디며 살아남은 네 남매.

한 살 짜리 막내도 살아서 울고 있었는데, 수색대는 이 울음소리를 추적해 들어가서 아이들을 구해 냈다. 수색대는 아 아이들의 외할머니 마리의 육성녹음을 산악지대에 확성기로 방송했다. ‘우리가 너희를 찾고 있으니, 절망하지 마라.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흩어지지 말고 한곳에 머물러 있어라‘ 

아이들은 외할머니의 말대로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13, 9, 4, 1)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막내의 울음소리와 외할머니의 육성녹음을 생각하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막내의 울음소리는 인간이 인간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함께 모여서, 존재와 존재를 서로 의지하면서, 나의 고난으로 너의 고난을 위로함으로써, 아이들은 밀림의 40일을 견디어 냈다. 불완전한 세상에는 그 불완전을 살아 내는 불완전한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허약하지만 소중하다.

 

[인생의 냄새]

코로나를 앓고 났더니 냄새를 맡는 기능이 약해졌다. 냄새의 강도를 감지하는 능력이 약해져서 냄새는 가물가물하다. 냄새를 못맡게 되니까 냄새가 귀한 줄을 새삼 알게 되어서, 가느다란 냄새도 깊이 들이마시게 되는데, 냄새가 지나가면 실체는 없고 기억만 남아서 냄새는 몽환으로 변한다. 내 생애 속에서 냄새가 차지하는 영역은 넓었으므로 후각이 약해진 병은 내 노년의 불운일 테지만, 지금도 무슨 냄새가 조금만 스쳐 가면 그 냄새가 불러일으키는 생애의 풍경이 마음속에서 전개된다.

내 소년시절에는 똥 냄새가 가장 일상적이고 지배적인 후각 환경이었다. 그 냄새는 마을의 냄새였고 시대의 냄새였다. 집집마다 마당 한구석에 푸세식 변소를 설치해 놓고 있어서 똥 냄새는 늘 마을 전체에 자욱했다. 이것은 일상의 냄새였고 살아 있음의 증거였다.

 

소년시절을 지배했던 똥 냄새에는 복잡한 무늬들이 겹쳐져 있다. 밥을 먹고 산다는 일에 대한 운명감, 내 몸을 빠져나가는 내 먹이의 결과물에 대한 낯섦과 친숙함, 그 양면의 모순이 합쳐지는 신기함, 온 동네 똥 냄새가 다 합쳐져서 군집을 이루는 세력의 거대함, 그 육중한 냄새가 마을에 깔릴 때의 안정감, 이 더러운 동네에 대한 비탄```. 이처럼 뒤엉킨 정서의 복합체를 분석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후각이 무디어진 지금도 이 냄새의 무늬들은 선명하다.

 

햇볕 냄새는 가벼워서 눌어붙지 않았고 천지간이 가득 차면서도 질량감이 없어서 걸리적거리지 않았다. 나는 이처럼 좋은 것이 세상에 가득 차서 모두 공짜라는 현실이 놀라웠다. 소년시절의 똥 냄새와 햇볕 냄새는 내 마음의 기층구조를 이룬다. 지금도 공원 나거서 햇볕을 쪼이면 이 두 가지 냄새가 마음의 저변에서 피어오르고 그 냄새는 또 다른 많은 냄새를 살려낸다. 냄새가 사라져도 냄새의 자취는 사라지지 않는다.

 

최루탄 냄새는 내 청년기의 지배적인 냄새였다. 군사정권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를 최루탄으로 해산시켰다. 최루탄 냄새는 콧구멍, 눈구멍, 목구멍을 쑤셨다. 고춧가루처럼 매웠고, 전파력이 강해서 삽시간에 거리 전체에 퍼졌다.

이 냄새는 말을 하려는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모이려는 사람들을 헤쳐 버릴 수 있었지만, 이 냄새에 대한 사람들의 적개심을 더욱 크게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이 냄새 속에서 외치고 또 외쳤고, 그 사람들 위에서 최루탄은 거듭 터졌다. 이 냄새는 정치의 냄새였고, 정치를 거부하는 냄새였다.

 

마음속에 그릇됨이 없고 질투와 성냄이 없고``` 악을 짓지 않고``` 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참성품에 변함이 없는 것``` 이러한 향기는 각자의 안에서 풍기는 것이니, 결코 밖을 향해 구하지 말라.

- 육조 혜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