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쓰는 인간 1

부실이 2026. 3. 16. 23:29

쓰는 인간 : : 종이에 기록한 사유와 창조의 역사

지은이 : 롤런드 앨런 / 손성화 옮김

 

* 롤런드 앨런

작가이자 출판인, 종이 문화사 전문가. 오랫동안 출판 업계에서 일해왔으며 영국 브라이튼에 살고 있다. 종이로 사유해온 인류의 역사를 다룬 [쓰는 인간]이 첫 저서다.

 

[책 앞 날개에]

[쓰는 인간]은 노트가 단순한 기록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정리하고 확장하는 창의적 공간이자 사유의 동반자임을 증명하는 책이다. 롤런드 앨런은 중세의 왁스판과 장부, 르네상스 시기의 메모장, 예술가들의 스케치북, 과학자의 노트, 현대의 불릿저널 그리고 전자 스프레드시트에 이르기까지, 노트북의 다양한 형태와 기능을 생생한 사례와 이야기로 풀어내며 기록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조명한다.

디지털 기술이 일상화된 오늘날에도 손으로 글을 쓰는 행위는 집중력, 자기성찰,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삶을 더 풍요롭고 의미 있게 만든다. 롤런드 앨런은 역사와 문화를 통해 노트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며, 창의적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들, 글을 쓰는 사람들, 삶을 성찰하고 기록하려는 이들에게 쓴다라는 행위의 가치를 생생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확인시킨다. 쓴다는 행위는 세상과의 소통이자 삶의 역사를 스스로 남기는 것이다.

 

[들어가는 말]

*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카 : 모도앤드모도라는 디자이너 상품 판매 회사를 운영. 모도앤모도가 직접 생산해서 보다 수익성 높게 판매할 만한 아이템이 있겠느냐고 질문그들은 새로운 시대에 속한 사람을 가상 신제품의 타깃 소비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 창조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거리낌 없이 옮겨다니는 사람. 마리아 세브레곤디는 디자인에 민감한 이 고객을 현대 유목민으로 명명했다.  체트윈 : 베스트셀러 작가. 몰스킨 노트(파리 투르에서 소규모 가업으로 하는 곳. 폐업)를 책에서 언급.

세브레곤디는

마티스와 피카소의 스케치북 전시, 작업 중인 헤밍웨이의 사진에서도 뜻하지 않게 진짜 몰스킨을 목격하면서 세브레곤디의 예감은 힘을 얻었다그는 이 상품에 이미 유서 깊은 내력이 깃들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 제품에는 채트윈의 공개적인 상품 추천을 읽은 전 세계의 수백만 명에게 힘을 발휘할 상업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신제품 홍보로도 훌륭두 사람은 2년이 소요된 제품 디자인, 결과물은 몰스킨 클래식 노트.

이 제품이 지닌 무형의 속성인 유용함과 정서를 

유형의 사양과 기민하게 연결함으로써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모두 판매하는 것이다.

 

1997년 모도앤드모도는 초도 생산물량으로 노트 3천권을 주문했다. 프란체스키의 바람대로 이윤 폭이 늘면서 모도앤드모도의 운명은 180도로 바뀌었다. 오늘날 여러 경영대학원에서 상품 디자인과 마케팅의 교과서적인 성공 사례로 가르칠만한 스토리다.

몰스킨과 채트윈의 책을 낸 출판사가 [송라인]의 신판을 이제는 누구나 알만한 검정색 하드커버에 고무줄 잠금장치, 둥근 모서리, 가름끈, 주머니까지 완비하여 출간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소비자들은 즐거운 여행 기록이 되길이라는 동기부여 문구가 돋을새김 된 무지 노트 한권과 함께 포장된 책을 구입했다.

 

내가 첫 번째 몰스킨을 구입한 때는 바로 이러한 갑작스런 대유행의 초창기였다. 또한 몰스킨이 견인하는 고급 문구 시장의 성장세에 동참하기를 염원하는 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몰스킨은 강력한 사회적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 세브레곤디가 상정한 디자이너, 저널리스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첨단기술 기업의 최고경영자들도 몰스킨 노트를 들고 다녔다.

몰스킨 노트의 실질적 효능에 대한 심리학자들과 라이프스타일 구루들의 늘어나는 관심 역시 그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세브레곤디 본인도 몰스킨 노트의 단순한 형태가 그것을 완벽한 창조적 도구로 만들어준다는 뜻을 내비치면서, 사소한 것에서 탄생한 비범한 가능성이라는 감각을 주는 단순한 물건이라는 것이다.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 그리고 실체가 있는 물건을 생산하는 것과 관련된 뭔가가 오래된 기술을 새로운 기술보다 더 효과적으로 만든다.

 

* 나의 질문 : 책을 쓰게 된 동기

노트와 창의성 사이에 연관성이 있었을까문화와 산업에서 노트는 그 밖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와 관련하여 누군가의 노트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줄 수 있을까

일기를 쓰는 행위가 어떻게 행복, 최소한 만족감 정도라도 가져다준 것일까?

노트의 물리적 제약이 역설적으로 그것을 무제한적인 디지털 기기보다 유용하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노트는 실제로 어디에서 기원했을까? 누가 노트를 발명했을까?

사이먼(출판인) : 그걸로 책을 한 권 써보는 게 어때?

 

노트가 해마다 쌓여갔다. 할 일 목록을 쓰면서 더 믿음직한 사람이 되었다. 10년 세월이 흘러 현재 1000여 쪽에 달하는 메모, 문장들이 담겨 있다. 분류되지 않고 가공되지 않은 이 수첩들 안에 내가 꺼낸 질문들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노트가 실제로 도래한 시기를 알아내면서 이 이야기가 문화와 과학, 혁신과 발견 등 온갖 주제와 얽히고 설켜 있음을 깨달았다.

 

1장 노트가 등장하기 전 : 기원전 1000~ 기원후 1250년 지중해 지역

* 경첩이 달린 서판

가장 오래된 물품은 튀르키예의 어느 성의 진열장 안에 놓여 있다. 수천 년 전 상업과 지식의 중심지로 번영을 구가한 이 도시는 현재도 북적이는 휴양지다(보드룸).

보드룸 수중 고고학박물관 : 울루부룬 난파선은 이곳의 자랑거리. 박물관측은 나무와 상아 재질의 자그마한 물품 하나에 진열장 하나를 따로 내주었다. 바로 경첩이 달린 서판으로, 접어서 닫으면 한 손에 쏙 들어갈 만한 크기다. 정교한 목공 솜씨와 상아 경첩으로 보건대 이 디프티카(두개로 접히는 판)는 그 시절에 귀한 소장품이었을 것이다울루부룬 난파선은 지금껏 발굴된 가장 오래된 배로, 대략 기원전 130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난파선의 다른 유물들을 보면 이 디프티카가 복잡한 무역망에서 연원했음이 더욱 확실해진다.

서판은 최적의 환경에서 살아남았다. 점토 항아리 안에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 면도칼, 석류 몇 알과 함께 점토 항아리 안에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 배는 적어도 10곳에 이르는 문화권의 상품을 실어 날랐다. 오늘날의 여느 컨테이너선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다양한 화물을 운반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서판의 주인이 선원이나 상인, 외교관, 견문이 넓은 세계시민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이들이 글을 쓰는 용도로 이 서판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알지만, 무슨 내용을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디프티카 서판은 공간이 한정적이었다. 밀랍에 200자 정도를 새겨 넣으면 더 쓸 공간이 없었을 것.

 

파피루스 :

같은 시기에 고대이집트인들은 타지에서는 경작하기가 어렵지만 나일강변에서는 무성하게 자라는 키 큰 갈대로 파피루스를 제작했다. 파피루스는 점토판과 달리 실용적이었다. 둘둘 말아서 긴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 수 있기에 점토판이나 밀랍판보다 더 긴 글을 쓰는데 사용할 수 있었다. 파피루스가 건재하는 한 거기에 적힌 글 또한 건재했다. 따라서 울루부룬에서 발견된 배에도 낱장 또는 두루마리로 된 파피루스 문서(편지 그리고 선하증권처럼 귀한 화물과 관련된 서류였을)가 실렸을 개연성이 있다.

울루부룬 난파선이 가라앉고 나서 약 100년이 지난 뒤 이 불운한 배에 실렸던 화물을 지속적으로 공급했던, 고도화된 경제는 와해되고 말았다. 일련의 전쟁과 그 밖의 재난으로 인해 그리스에서 레반트 지역(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까지 거의 모든 도시가 파괴되었다. 정착민 수가 격감했고 여러 문화와 무역망이 통째로 증발하듯 사라졌다.

 

푸길라레 : 휴대용 서판

청동기와 지중해 동부의 그리스문명을 계승한 로마인들이 울루부룬 스타일의 소형 서판을 가져다가 푸길라레, 즉 휴대용 서판이라고 하며 사용하게 되었다. 로마사람들은 판의 크기를 키우거나 판의 개수를 추가하는 식으로 서판의 용량을 늘렸다. 그리하여 세 장짜리 서판이 보편화되었는데, 폼페이에서 살아남은 유물 중에는 여덟 장짜리도 존재한다. 로마인 남성들이 서판을 든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에는 그 맥락이 언제나 사업적인 측면, 즉 진지한 가산 관리를 뜻한다.

 

양피지 : 페르가몬에서 발명

로마인들은 판독 가능한 영구적인 기록을 원할 때는 보통 파피루스를 사용했는데, 여의치 않으면 기다란 나무조각인 목간에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이들이 보유한 내구성이 가장 뛰어난 재료는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그리스 왕궁인 페르가몬에서 발명된 양피지다. 양피지는 만들기도 어렵고 값도 비싸다.

 

양피지 코덱스 : 장정한 책

기원 후 80년 무렵, 로마에서 누군가가 최초로 파피루스 낱장을 묶은 뒤 이를 양피지 표지로 감싸서 장정한 책을 만들어냈다.

이 혁신적인 판형인 코덱스는 유용성이 입증되면서, 기독교의 확산과 더불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크기와 범위가 다양해졌다. 고유한 성서가 함께했기 때문이다.

코덱스 시나이티쿠스 : 694쪽에 달하는 송아지가죽이나 양가죽 피혁지에 쓰인 이 신약성서 필사본은 정교함의 극치인 4세기의 수준 높은 제본술을 보여준다. 이 성서 사본은 코덱스가 두루마리보다 유리한 주요 장점들을 뽐낸다. , 이 페이지에서 저 페이지로 본문을 쉽게 옮겨 다닐 수 있고, 펼쳐놓을 평평한 탁자가 필요하지 않다. 양면에 글을 쓸 수 있고 아주 긴 글을 작성하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양피지 코덱스는 엄청난 진보에 해당했다.

 

채륜 : 한 왕조의 환관. 종이를 발명한 장본인.

식물성 섬유를 으깨어 걸쭉하게 만든 펄프를 고운 체에 걸러 물기를 뺀 뒤 건조하면 내구성 있고 쓰임새가 다양하며 가격도 적당한 재료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국인들은 종이를 곧바로 글쓰기 재료로 삼지는 않았다(일상용으로는 죽간을, 중요도가 높은 문서의 경우 비단을 선호). 대신 종이는 중화제국 전역에서 다종다양하게 응용되었다. 그 사이 로마제국의 지중해 지역과 근동에서는 코덱스가 전체적으로 확산되었다. 종이는 원료가 다양하다는 측면에서 유용했다. 대마, 뽕나무 껍질, 낡은 어망으로도 양질의 종이를 만들 수 있었다. 아마 섬유는 특히 효과적이었다.

 

첫 번째 밀레니엄(1~1000)의 중반기 몇 백 년 사이 : 종이

로마제국은 쇠하고 중화제국은 성하면서 각각의 혁신이 비단길을 따라 서로 가까워졌다. 종이가 서쪽으로 움직이는 동안 코덱스는 동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800년 즈음 중간지점, 즉 칼리프가 다스리는 압바시야(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만나게 되었다. 당시 바그다드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로 부상하는 중이었다. 종이는 파피루스를 새로이 대체했다. 그 뒤로 이어진 400년 동안 페르시아, 아라비아 등지의 무슬림 지식인들은 기독교 유럽의 경쟁자와 지식인을 앞질렀다. 유럽의 기운이 서서히 기우는 사이, 칼리프가 다스리는 이 지역은 법률, 의학, 수학, 철학, 예술, 무역, 문해력, 즉 문명의 모든 진취성 측면에서 범세계주의적 황금기를 누렸다. 이슬람 도시들은 무수한 장서를 갖춘 도서관과 서적상 거리를 뽐냈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공급량이 풍부한 종이는 정부관리와 학생, 교사, 온갖 분야의 사상가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종이가 사상과 문화의 확산에 대변혁을 일으킨 바로 그때, 서유럽에서는 다수의 문화장벽이 종이의 채택을 가로막았다. 우선 한 가지는 보호주의였다. 칼리프들은 제지소가 자신의 세력권 전체에 두루 확산되는 양상은 반기면서도, 제지업자들이 그 밖의 다른 곳으로 기술을 가지고 가게끔 놔두지 않았다. 마그레브(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를 포함하는 아프리카 북서부 지역을 이르는 말)나 레반트 지역 상인이 유럽으로 수출하는 종이 물량 역시 그다지 많지 않았다.

 

종이 제한 정책 :

유럽 인구 가운데 식자층 비율이 가장 높은 성직자들은 양피지 외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종이가 수상쩍은 이교도로부터 나왔다는 점, 낯설다는 점, 또는 아마 헌 옷이 재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저어했다.

시칠리아에서 독일 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유럽 영토를 다스린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1221, 공문서를 쓸 수 있는 재료를 종이가 아니라 양피지에 국한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기독교도들도 종이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회의적이었다.

 

1212. 라스 나바스 데 톨루사 전투 : 기독교 영토 회복 전쟁 

사티바 종이 :

발렌시아 지방의 내륙에 자리한 비옥한 평원 지대로, 도시를 에워싼 크레비옌트 산맥에서 발원한 풍부한 물이 흐르는 곳이었다. 500년 동안 이슬람권이 소유한 땅으로, 수백 년 동안 양질의 아마 직물로 명성이 자자했다. 아마와 깨끗한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에 무슬림 제지업자들은 이곳에 정착.

1150년 무렵에는 사티바 종이가 이슬람권 전역에서 질이 좋기로 유명세를 떨쳤다. 카탈루냐 지방의 통치자이기도 한 아라곤의 하우메 왕은 팽창하는 왕국의 변경에 가까이 위치한 사티바를 탐냈다. 1244년 성공.

그에게 사티바의 제지업이 눈에 들어왔다. 뛰어난 행정가이자 군사작전가인 하우메 왕은 종이에 푹 빠져 있었기에, 드디어 사티바의 공방들을 관할하게 되었을 때 그 사업이 유지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무슬림 제지업자들은 장사를 계속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이들의 아마 수요를 현지의 공급량이 따라가지 못하자 해외에서 선적한 낡은 아마천을 면세로 수입하도록 허용.

 

하우메 정권 자체가 무슬림 제지업자의 최대 고객이었다. 역사학자들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하우메 왕의 오랜 통치 기간 동안 (1213~1276) 공식 문서와 기록물 양이 10년마다 두 배씩 증가했다고 한다. 그가 팽창하는 왕국에 각종 규칙을 부과하고, 세금을 매기고, 법치를 장려했기 때문이다. 바그다드의 관료들처럼 하우메 왕은 각종 증서, 영장, 규정, 공증서, 공식 서신 등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서류 작업이 필요한 행정 체계를 창출했다. 종이 수출 역시 기하급수로 증가했다. 사티바 종이는 비잔티움의 고객들에게까지 발송되었다. 또 하우메의 왕국 전체는 물론 마요르카 섬과 프로방스 지방까지 제지업이 확산되었는데, 이 지역의 공방들은 최초로 자신들의 제품에 워터마크(문서나 사진 등에 저작자 등을 밝히기 위해 흐릿하게 삽입된 이미지)로 상표를 찍었다.

 

종이는 하우메 왕의 행정 체계를 강화했고, 그가 영토 전체에 법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데 종이는 평민들이 살아가고 일하는 방식도 완전히 바꿔놓았다. 해가 갈수록 지중해 통상로가 더욱 바삐 돌아가게 된 것이다. 신종 상인들은 갈수록 정교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통상을 깨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회사를 세우고, 공동투자를 하고, 유럽 전역으로 상품을 실어 나르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노트를 가지고.

 

2장 적색 장부, 백색 장부, 직물 장부 : 마르세이유 항구도시

1299년 프로방스는 여러 경제권이 서로 연결되는 교차로로, 유럽에서 가장 분주한 지역에 속했다. 도로와 강을 통해 통상로는 북쪽으로 샹파뉴 지역과 저지대 국가들의 양모 시장으로까지 이어졌다. 한편 북적이는 지중해의 항구도시 마르세이유는 이탈리아, 스페인, 발레아레스제도, 북아프리카에서 온 배들을 받아들였다. 소금, 포도주, 기름, 곡물, 올리브, 염료를 수출하고, 비단과 향신료, 직물을 수입했다. 상인들은 북부의 독실한 신도들과 수익성 좋은 교회 땅에서 나온 은을 로마로 가져가는 교황의 중개상들과 교역로를 나눠 썼다.

국제무역은 제노바인과 피사인, 베네치아인 등 이탈리아 출신 국외 거주자들이 꽉 잡고 있었다. 그중 최고는 피렌체인이었다. 1300년 무렵에는 피렌체 사람들이 정착한 지역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이들을 5원소라고 할 정도였다. , 공기, , 불처럼 어디에나 있다는 뜻이었다.

 

* 상인 조반니 파롤피

진취적인 경제 이민자. 피렌체인. 프로방스 지방의 님이라는 도시에 가게를 차린 그는 돈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거래할 요량으로 지점을 여럿 설립했다. 살롱드크로라는 소도시에 낸 지점을 운영하기 위해 피렌체 사람 둘을 채용했다. 구매책임자 바케라 발도비니와 장부 기재를 담당한 아마티노 마티노 마누치. 이 주요한 역할에는 고도의 금융 지식과 명석한 머리 그리고 깔끔한 필체가 반드시 필요했다. 마누치 그가 작성한 장부 가운데 한 권을 통해(절반 남음) 이탈리아인이 어떻게 프랑스 남부의 무역을 장악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남은 부분은 피렌체의 국립기록 보관소가 보유하고 있다. 바로 2절판 원장으로 원래는 250쪽이었으나 그 중 절반이 소실된 상태다. 마누치가 그 사업에서 최소 7가지 원장과 장부에 항목을 기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색 장부 : 전년도 총계정원장

적색 장부 : 파롤피의 밀, 보리, 귀리, 올리브유, 포도주, 양모, 방적사 거래기록.

직물 장부 : 모직물 매매를 다루는 장부.

현금출납부, 그리고 마누치와 발도비니가 본인의 근무 순번마다 붙는 일일 경비를 기록하는 장부 두 권이 그에 속했다.

 

이 모든 서류 작업이 과연 필요했을까? 그들이 놓치지 않고 기록한 수치의 다양성을 감안하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다. 매장 두 곳과 창고 두 곳의 임대 비용을 지불하고, 잔여 임대 기간의 가치는 대차대조표에 추가해야 했다. 동물과 인간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줘야 했다. 또 고용인은 보수를 받아야 했고 경비는 으레 상환되는 것으로 여겼다. 곡물이나 올리브유, 직물, 라벤더, 염료가 피렌체로 발송될 때마다 화물 운송료는 선불로 지급되었다. 또 수입세와 수출세를 거래품목에 따라 다양한 통화와 서로 다른 요율로 지불해야 했다.

 

아를의 대주교는 영지에서 나온 생산품을 파롤피의 회사에 팔고 고급 직물을 구매했다. 그런데 그는 연이율 15%로 돈을 빌리기도 했다. 그밖에 많은 고객이 직물과 소금을 비롯한 수많은 상품을 사고팔았다. 그리고 아마티노 마누치는 각 상품의 수익성을 주의깊게 추적 관찰했다. 그는 모든 선적물의 순익과 낭비되는 재고량을 계산하여 그 수치를 취합함으로써 각 거래마다 실적을 알 수 있게끔 하기도 했다. 구매자와 판매자는 대체로 장래의 일정 시점에 미리 정한 가격으로 물품을 구입하기로 계약했는데, 사실상 일종의 선물시장을 구축한 셈이었다. 아마티노의 사무소는 환전소 역할까지 하면서 프랑스 화폐를 안정적인 피렌체 화폐인 피오르노(플로린) 금화로 바꿔주었다.

 

아마티노는 살롱과 님 지역 사이에 줄기차게 오가는 상품과 현금의 흐름을 충실히 기록했다. 덕분에 원장의 모든 페이지가 발도비니와 마티노의 사업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중세에는 모든 회계 실체가(교회 제외) 개인이었다. 왕에서 평민까지 내가 곧 나의 회사고, 나의 회사가 곧 나였다. 살롱 사무소를 님의 본사와 별개인 실체로 간주하였다. 엄청난 개념의 도약에 해당했다. 또 다른 중요한 진전으로서 이 원장은 회계 기간을 12개월을 1회계연도로 삼았다. 대수 대립(대변 항목과 차변 항목을 맞춘 자산과 부채 관계)이라는 개념. 마누치는 원장에 전부 리브르화(프랑스 화폐)로 바꿔 처리했다.

마지막의 이 두 개념이 통합되어 소유주 지분(사업의 가치)과 이윤을 계산하는 데 쓰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 모든 분투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감가상각, 즉 자산의 가치를 장래에 유용할 기간과 연결하는 장부 가격 평가절하에 마누치가 능통했다.

 

파롤피 원장이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문서인 이유는

이 노트 한 권이 우리가 처음으로 회계와 관련한 추상적 개념들, 그리고 그 개념들이 즉시 운용되고 사용되는 실무기법을 전부 한번에 볼 수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수준 높은 문명들(그리스, 아랍, 중국)도 오로지 현금과 재고의 흐름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파롤피 원장은 최초의(현존하는) 복식부기, 손익계산 사례였다.

 

마누치는 이 새로운 체계의 규칙들을 자신 있게, 일관되게 적용한다. 그만큼 실천하면서 경험치를 쌓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추상적이고 파악하기 힘들기로 악명 높은 이 기법들은 최첨단 기술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탈리아 상인 공동체 바깥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심지어 공동체 내에서도 엄격히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기법들이 왜 그토록 중요할까?

결정적으로 복식부기는 어떤 사업의(양모든 올리브유든 환전이든) ’거래 또는 투자의 각 유형에 대한 개별 이윤 수치를 보여줄수 있어서 오로지 총 이윤 수치만을 보여줄 수 있는 단식부기보다 더 나은 결과물을 내놓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다양한 수익 흐름을 보유한 고도화된 사업의 성장을 촉발했다.

 

파롤피의 회사는 수백 개에 이르는 피렌체의 무역 전초기지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피렌체는 강력한 국제적 영향력을 지닌 상인은행이 무려 80개나 되는 도시였다. 그중 세 곳(바르디가, 페루치가, 아차이우올 리가)은 오늘날 경제학자들에게 슈퍼기업으로 알려진 회사들과 같은 규모의 부를 축적했다.

페루치가만 해도 필리알리라는 해외지점이 최소 15개에 이르렀다. 멀리 동쪽으로 로도스와 키프로스에까지 사무소가 있어서 수익성이 뛰어난 향신료, 비단 등 사치품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보다 조금 소박한 런던 지점은 잉글랜드의 양모와 궁색한 왕들을 연결해주었다. 잉글랜드 왕들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자금을 대기 위해 고리로 막대한 돈을 빌렸다. 페루치가의 각 지점은 동업자(가족 구성원 중의 한 명)와 봉급을 받는 일단의 직원들이 운영했는데, 파롤피의 님 사무소보다 훨씬 규모가 큰 사업을 계약했다. 현존하는 페루치 원장을 보면 아주 꼼꼼하게 정리된 노트에 상세한 회계 기록이 작성되어 있어서 사업이 줄곧 흥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양모와 직물, , 금이 모두 움직인 덕분에 피렌체는 금세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꼽히게 되었다. 그러나 영토는 여전히 협소했고, 인구도 그리 많지 않았다. 피렌체의 양모 염색업자와 방직공들은 숙련된 기술을 보유했으나, 타 지역 경쟁자보다 우위에 설 만한 기술적 강점이 없었다. 경쟁 도시 틈에 끼어 포위된 형국이었던 피렌체는 군대도 없고 농지는 척박했다. 게다가 주요 경쟁자인 제노바나 베네치아와 달리 바다에 직접적으로 면한 혜택을 누리지 못한 탓에 조선업으로 이익을 볼 수도, 십자군원정이 선사한 해운의 기회도 잡을 수 없었다. 해안 자체가 없으니 해군도 없었고 따라서 식민지 전초기지도 없었다. 게다가 정치적 파벌 싸움으로 인해 한바탕씩 내전을 치뤘다. 이 모든 장애물이 있는 상태에서 피렌체 시민은 어떻게 그같은 상업적 우위를 점했을까?

 

피렌체는 몇 번이고 거듭해서 외견상 약점을 긍정 요인으로 바꿨음을 지적한다. 이웃들이 우호적이지 않았기에 피렌체 시민들은 원거리망을 창출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궁극적으로 수익성이 더 큰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도시국가가 프랑스나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피렌체 시민이 비교적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는 뜻이다.

경작지가 부족했던 피렌체는 산업 인구의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의 통치자들과 무역 제휴관계를 맺었다. 강력한 세습 통치자가 없었던 덕분에 선도적인 피렌체 시민들은, 귀족 출신보다 동업자조합인 길드의 회원 자격과 시민활동을 더 높이 사는 보다 다원주의적인 정치체제를 창출할 수 있었다. 이 도시국가는 최초로 금화인 피오르노(플로린)화를 주조했는데, 유럽 전역에서 이 화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피렌체인들은 그들의 통상로를 따라 원거리 금융망을 운용하면서 교회 대신 돈을 옮겼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거액의 자본금을 만질 수 있게 되어, 양모에 투자하거나 고금리로 대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매매업의 형식을 갖춤으로써 피렌체인들은 전문화하고 규모를 키웠다. 오늘날 벤처 자본가들은 투자 가능성을 평가할 때 뭐든 불공정 경쟁우위가 될만한 요소, 즉 우위를 점하게 할 아주 뛰어난 속성 내지 자질 등이 있는지 묻는다.

 

1299년 당시 토스카나 지역민들은 그같은 독점적 경쟁우위 요소를 하나 보유하고 있었으니, 다름 아닌 부기였다.

피렌체 상인은행이 번성한 이유는 누구보다도 사업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대변과 차변의 비밀이 이탈리아 전역으로, 유럽으로 퍼져나가자  피렌체는 상대적으로 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우리는 15세기(메디치가와 전성기 르네상스의 시대)를 피렌체의 황금기로 여기지만,

이 무렵에는 이미 베네치아가 상업이나 인구 면에서나 앞선 상태였다.

피렌체인에게는 경쟁우위 요소가 하나 더 있었다부기는 결국 새로운 정보기술이 있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마티노 마누치는 매일 사용했던, 종이로 만든 노트가 있었다.

 

1244년 이후 몇 년 사이, 종이를 사용하는 것이 수월해지기 전에 이탈리아 상인들은 거래 내역을 기록하는 데 양피지 장부를 이용했다. 그러나 종이 원장이 도입되자 그들은 우수한 상품임을 알아보았다. 양피지는 잉크가 평면에 말라붙는 반면 종이는 잉크가 스며든다. 양피지는 긁어내고 다시 쓸 수 있어서 차후에 수정을 할 수 있는 반면, 종이는 영구적인 매체가 된다.

유사한 이유로 장부는 언제나 원장으로 묶였다. , 낱장은 끼웠다 뺐다 할 수 있는 기재 항목은 쉽게 조작될 수 있지만 쪽수가 매겨진 원장은 위변조가 어려웠다. 이는 결과적으로 상인들이 횡령의 우려 없이 아랫사람이나 지점에 위임하는 일이 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무역상들이 사업 범위를 확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구매목록, 매출액, 대출금, 거래조건은 다시 쓰기 쉬운 양피지 조각에 기록되지 않았다. 분쟁 발생시 법정에서 증거로 받아들여지는 영구 기록으로 신중히 다뤄지게 되었다.

복식부기와 상호 참조라는 새로운 기법이 쓰이면서 상인이 작성해야 할 기재 항목의 숫자가 늘어난 탓에 그 어느 때보다 원장이 많이 필요해졌다. 이는 종이 가격이 저렴할 때만 감당할 수 있는 일.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종이는 영세 상인도 각각 수백 쪽에 달하는 원장을 예닐곱 개씩 두고 쓸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해졌다. 파롤피 원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피렌체 상인은 대부분 피렌체에서 동쪽으로 200km 떨어진 파브리아노(종이박물관 있음)라는 이탈리아 중부의 소도시에 기대고 있었다. 1260년대 말 키아벨리가에서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고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미 이 집안의 제지소가 수익성 있는 성공 사업이 되어 있었다.

 

키아벨리가의 종이 사업 : 기계화 : 수차 이용

키아벨리가가 이룬 위대한 혁신은 기계화였다. 다시 말해 아펜니노산맥의 눈녹은 물로 수차를 돌린 것이다. 수차로 망치를 움직여 못이 박힌 망치 머리가 아마 천이 담긴 통을 쿵쿵 내리치면 아마천이 분쇄되면서 차츰 균질한 반죽 상태가 되었다. 수력을 활용함으로써 파브리아노의 제지업자들은 생산율을 높일 수 있었고, 그러면서 가격 인하를 이끌었다.

 

사이징 : 종이의 칠 작업(젤라틴으로 풀 먹임)

또 다른 주요 혁신 역시 고품질의 결과물을 낳았다. 바로 사이징이었다. 사이징은 종이의 칠 작업을 이르는 말이다. 파브리아노의 제지업자들은 젤라틴으로 풀 먹임을 했을 때 전분보다 더 부드러운 마감 상태를 보이고, 그렇게 만든 자신들의 종이가 동양의 종이나 양피지보다 펜촉으로 쓰기에 더 수월함을 발견했다. 젤라틴은 푹 고은 동물 뼈에서 나왔으니, 파브리아노 종이의 품질은 식물성 섬유를 동물성 단백질로 코팅한 데서 나온 셈이었다.

 

더욱 질 좋은 종이를 보다 빨리 만들어낼 수 있게 된 키아벨리가는 자신들이 보유한 신기술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았고, 그렇기에 그 기술들을 지켜냈다. 이들의 보호주의는 성공했다. 50년 동안 파브리아노 사람들이 이탈리아의 종이 생산을 장악했고, 독일과 플랑드르 지방, 잉글랜드로 수출하면서 유럽 대륙에서 으뜸가는 상품으로 여겨지며 사티바(스페인)의 종이 생산을 대체했다.

대량 종이 생산 체제의 도입은 피렌체의 경제에 잇따라 또 다른 활력을 불어넣었다.

파브리아노의 종이는 대부분 피렌체를 거쳐갔고그러면서 돈이 되는 수출 기회를 창출했다.

또 현지의 높은 수요 덕분에 피렌체는 또 다른 신종 상거래를 육성할 수 있었다.

문구점인 카르톨라이와 서점인 리브라이가 번창한 것이다.

이 가게들은 부기 담당자들이 소비하는 재료를 갖춰놓고 있었다.

즉 원장, 잉크, , 양피지 그리고 상인들이 서로 간에도 숱하게 발송하는

편지를 쓰는 데 사용한 낱장 용지(서신 혁명과 부기 혁명은 밀접한 관련).

파브리아노와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이 피렌체가 상업을 장악한 또 한 가지 이유를 제공한다. 궁극의 경쟁 우위인 셈이다.

 

슈퍼기업들은 지금도 은행이 운용하는 방식과 똑같은 지점망을 만들어낸다. , 해당 원장에 면밀히 기록된 환어음이 재산을 이리저리 옮길 수 있게 해주었기에 고객은 현금을 들고 다니는 위험한 방식 대신에 팔레르모에서 은화를 입금하고 안트베르펜에서 출금할 수 있었다. 민족국가들, 특히 잉글랜드는 국적을 초월한 교회가 그랬듯 은행가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역사학자 제이컵 솔 : 복식회계가 없었다면 근대 자본주의도, 근대 국가도 존재할 수 없었다.

오리에타 다 롤드 : 역사학자이자 종이 전문가. 개념의 혁신, 진보적인 대량생산, 정보기술, 수익성이 뛰어난 수출품, 풍부한 현금이 교차하는 이 지점을 한 단어로 환기했다. 실리콘벨리.

 

장기간 지속된 피렌체의 성장은 1330년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북부와 남부의 전쟁으로 양모와 곡물 거래가 중단된 때다. 그러다가 1348년 흑사병으로 피렌체 시민의 절반이 목숨을 잃으면서 피렌체 경제는 완전히 붕괴했다. 피렌체 인구는 500년 동안 펜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할 터였다.

그사이 이탈리아 북부 전역의 경쟁자들(베네치아, 제노바, 피사)은 피렌체의 부기 기법을 채택하여 고도화된 고유한 사업 방식을 창출했다. 나아가 부기의 신비는 피렌체만의 독특한 혁신이라기보다 이탈리아의 혁신으로 간주되었다. 200여 년 동안 널리 퍼지지 않았고, 그동안 이탈리아는 유럽의 무역을 장악했다.

부기가 도입되면서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회계라는 새로운 과학은 크기와 모양이 실로 다양한 노트를 필요로 했다.

그런데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양적으로 늘어나다 보니

피렌체인이 영위하는 삶의 다른 모든 영역으로도 넘쳐흐르게 되었다.

상상력에 불꽃을 일으키고 새로운 쓸모에 대한 영감을 자극했다.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쓰는 인간 3  (0) 2026.03.18
쓰는 인간 2  (1) 2026.03.17
살아갈 날을 위한 괴테의 시 : 이종원  (1) 2026.02.18
허송세월 : 김훈  (2) 2026.01.14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장 지글러  (2) 2026.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