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작은 책자에 가벼운 필치로 : 스케치북, 1300 ~ 1500년 피렌체
중세 피렌체는 13세기를 지나는 동안 도시가 윤택해지면서 5만여 명의 인구가 작은 지역에서 생활하고 일했는데 부유한 시민들은 눈을 즐겁게 하는데 거금을 썼다. 인상적인 건물, 보석으로 장식한 의복, 그리고 그림에 자금을 대느라 흘러나갔다. 벽화, 프레스코화, 나무판에 그린 그림, 태피스트리(무늬 넣은 양탄자)에 직조된 그림, 교회의 그림들이었다.
교회는 부유한 사람들이 현생에서의 지위를 두고 경쟁하는 공간이자, 자신들의 불멸하는 영혼이 내세로 빠르게 옮겨갈 수 있도록 선불금을 지불하는 공적인 무대였다. 그리스도, 성자들, 성모, 예언자들이 등장하는 그림에 대해 주문 의뢰가 쏟아졌다. 이는 유럽에 엄청난 예술적 혁신을 자극하고, 지금도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꿔놓는 창조적인 돌파구를 추동하게 된다. 13세기 말에 뭔가 극적인 일이 벌어졌고, 그러면서 그림이 그려지는 방식, 그림을 보는 방식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예술을 보는 방식이 바뀌었다.
치마부에 : 1240년 생. 비잔틴 양식의 마지막 거장.
그가 그린 현존하는 성모화 하나를 보면 그가 화법을 얼마나 진전시켰는지 드러난다. 종교적 이미지를 기계적으로 복제하는 방식을 물리친 것이다. 치마부에가 그린 성모마리아는 명암법을 써서 턱과 양손에 형체와 생명을 부여했다. 빛과 그림자를 처리하는 명암법은 이후 피렌체 화가들만의 특징적인 기법이 된다. 치마부에는 선임자들과 달리, 종이에 새로운 방식인, 사람들을 실물대로 그렸다. 치마부에는 운 좋게도 기독교 유럽에서 최초로 젊은 예술가가 그림을 그릴 종이를 구할 수 있었던 시기인 1250년대에 성장했다. 상인이 쓰는 원장과 잉크병을 들고 토스카나의 전원 지역을 돌아다닌 청년 치마부에는 스케치북을 발명했다.
조토 :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선도한 화가. 서양미술의 위대한 혁신가.
1280년 치마부에에게 그림을 배운 것은 좋은 출발이었다. 피렌체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서 조토를 찾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는 나무판이나 회반죽에 그림을 그렸고, 종교적 작품에 실물과 똑같은 초상을 집어넣었다. 파도바에서 그린 작품 가운데 [비탄]은 그의 회화술이 얼마나 멀리 나아가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이 그림을 보는 현대인이라면 가장 먼저 그림 속 장면의 사실주의를 알아챌 것이다. 모든 인물은 인체비율이 잘 잡혀 있고 포즈가 생생하며 살아 있는 듯하다. 비잔틴 예술의 등장인물과 달리 이들은 행동이 자연스럽다. 서로 교감하고 사건에 반응한다. 조토는 빛과 그림자, 시점 처리로 만들어낸 깊이의 착시를 통해 관객을 그들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인다. 이 작품의 구도는 독창성을 공표한다. 서양미술의 가장 위대한 혁신가로 꼽히는 조토는 회화의 새로운 방식뿐 아니라 그림을 보는 새로운 방식도 선사했다.
수련 중인 예술가가 이 모든 새로운 기법, 즉 빛과 그림자, 형태, 질량, 옷 주름의 관찰, 비율, 원근법, 자세,
생김새와 개성의 포착을 개발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다름 아닌 소묘, 그것도 많이 그리는 것.
종이가 나오기 전 서유럽에서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면 남자로 태어나 독신서약을 하는 편이 좋았다. 대개의 경우 양피지와 잉크는 성직자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양피지는 물리적 특질 때문에 빠른 스케치 작업을 하기에는 답답한 매체였다. 그에 비해 종이는 준비 작업 없이 사용할 수 있고, 첨필이든 펜이든 분필이든 목탄이든 똑같이 선을 그리면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잘 유지되었다. 가느다란 평행선을 그어 음영을 넣거나 깊이감을 줄 수도 있었다. 양피지 가격의 10분의 1인 값싼 종이 덕분에 예술가들은 ’항상 뭔가를 그릴‘ 수 있었다.
이 모든 재료의 장점은 스케치북의 크나큰 이점으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예술가가 한 작품에 들일 수 있는 준비 과정의 질이 크게 개선된 것이다. 수백 장짜리 원장이 제공하는 공간의 여유 덕분에 예술가는 개인적으로 사생하는 것이 가능했을 뿐 아니라 최종 주제, 디자인, 구도, 실행에 전념하기 전에 계획을 세우고 그림을 수정할 수 있었다. 꼼꼼한 준비 작업(최종 계획 또는 밑그림으로 이어지는 거듭된 습작)이 조토를 선임자들보다 상당한 우위에 서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의 복잡하고 정교한 구도, 그리고 실수를 용인하지 않는 매체인 프레스코(회반죽 벽에 그리는 벽화 기법)에서 발휘한 솜씨에서 보이는 우위. 스케치북은 나중에 참조할 만한 일련의 재료를 모아놓는 추가 기억장치였던 셈이다.
조토는 이 새로운 발명품들을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파브리아노의 제지소가 종이를 생산하기 시작한 때인 1267년경에 태어난 데다, 상업적으로 활기가 넘치는 최대 지역 상권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고품질의 종이를 언제든 용이하게 쓸 수 있었던 덕분에 치마부에가 보유한 것과 동일한 기술을 익혀 그 기량을 거장의 수준까지 올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스케치북 덕분에 어디든 가는 곳마다 얻은 영감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예술가가 그 작품을 통해 배우고자 한다면 직접 기록해봐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헤아리게 된다. 예술은 이런 식으로 성장한다.
견본서 : 코르누코피아
오랫동안 예술과 건축 견본을 공유하는 데 사용된 코르누코피아도 종이의 도입으로 변화를 겪었다. 현존하는 여러 사례에 등장하는 소묘의 다양성을 보면, 예술이 비잔틴의 장르화에서 멀어져 마음이 열리고 눈이 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조토의 스케치도, 준비 작업물도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없는 이유 : 후원자들은 예술가들의 스케치북은 수집하지 않았다. 펄프로 만들기 쉬웠으므로, 오래된 노트는 가장 쓸만한 페이지만 뜯긴 채 제지소에 되팔려 재활용되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수많은 낱장 소묘는 이런 식으로 스케치북에서 찢어낸 것들이다.
파사넬로 : 1395년 피사 출생. 온전한 상태로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스케치북
그의 스케치들을 한 권으로 묶은 코텍스(책) 발라르디(1415년경)는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데, 스케치북이 당시에 이미 얼마나 중요해졌는지 알 수 있다. 400쪽에 달하는 이 코덱스에는 그와 그의 도제들 그리고 동료들이 자신만의 기발하고 엉뚱한 생각에 따라 채운 여러 스케치북에서 가져온 여러 부분이 꿰매어져 있다. 르네상스 후기부터는 더욱 더 많은 예술가의 스케치북과 예비 단계의 소묘가 살아남게 되었다.
상업혁명의 원료가 이미 예술혁명을 촉발한 터였다. 이탈리아 중부에서는 재산과 세력을 통해 독실함을 과시하고, 부가 급증하며, 사회적으로 한 수 앞선 환경 덕분에 치마부에와 조토 같은 젊은 인재를 위한 기회가 창출되었다. 그 온상에서 스케치북이 발명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전체에서 기분좋은 공명이 존재한다. 이탈리아 사업가들은 새로운 상업 도구와 기술, 개념적 틀을 개발하고 나서 예술가들에게 큰돈을 썼고, 그 돈을 받은 예술가들 역시 자신들만의 고유한 기술과 개념적 틀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다들 노트를 집으로 가져가서 훨씬 더 많은 쓰임새를 찾아내고 있었다.
* 법인, 자본가, 중상주의적 세계의 기원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주는 현존하는 원장을 작성했던 페루치가가 지금은 조토의 위대한 작품 중 일부에 대금을 지불한 가문으로 기억되고 있다.
4장 리코르다(기억하다 : 일상기록), 리코르단체, 치발도네 : 집으로 간 노트, 1300 ~ 1500년 피렌체
숫자를 능숙하게 다루게 해줌으로써 노트는 피렌체 상인들에게 그 가치를 입증했다. 이 유용한 발명품을 가게나 회계 사무소에 두는 것으로 성에 차지 않았던 그들은 사적인 방식으로 노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리코르단체 : 가계부
피렌체의 상업이 팽창함에 따라 자본가 계급의 관심 사안도 확대되었다. 수익을 토지와 부동산에 투자했고 임대료를 징수했다.
세금을 내고 지참금을 챙기거나 걷었으며,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벌금을 물고, 직원들을 고용하고, 도박을 하고,
서로 돈이나 주식을 빌려주었다. 이 모든 행위에는 기록 작성이 필요했다.
피렌체 기록 보관소에는 한 집안의 번성과 지위의 부침 과정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놓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경우가 많은 14세기와 15세기의 개인 재무 노트 수백 권이 남아 있다. 이 문서들은 역사학자들에게 귀중하다.
스트로치 가 :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한 농민이나 소작농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을 한다. 채무자가 빌린 돈을 갚지 못할 경우 그의 재산을 빼앗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소유한 땅과 은행 잔고를 불려나갔다.
리브리 디 리코르다와 리브리 디 파밀리아 : 회고록과 가서
1340년대에 피렌체를 덮친 재앙으로 인해, 피렌체인이 리코르단체를 쓰는 방식이 진화했다. 자손에게 조상의 위업을 가르친다는 목적. 가족사와 자신의 행적에 관한 저자의 설명이 결합된 것이 일반적이었다.
플리뇨 디 콘테 데 메디치 가 : 1374년 : 메디치가는 피렌체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구성원이었다. 그러니 플리뇨의 해석은 본인의 씨족집단(흑사병으로 3분의 2가 사망)이 그것의 중요성에 대한 감각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드러낸다. 이후 사촌 조반니가 더 큰 권력과 부로 가는 길 위에 집안을 올려놓았다.
부오나코르소 피티 : 1412년 : 상인의 아들로 모험심이 충만했던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런던까지 유럽을 두루 돌아다니는 와중에 싸움을 하고, 장사를 하고, 도박을 했으며, 교황, 황제, 프랑스 왕과 협상하고,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와서는 여러 공직을 차지했고, 열한 명의 자식을 둔 아버지가 되었다. 메디치가와 마찬가지로 피티 역시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썼다. 즉, 그는 자식들과 남들이 본인의 대담한 행동에 경탄하기를 바랐다.
그레고리오 다티 : 1362년 :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읽히도록 남몰래 장부를 썼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을 구성하는 소재로부터 나온 서사를 조작하지 않는다. 사업 제휴, 시민으로서의 책무, 이정표가 될 만한 집안의 대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한다. 견직물을 만들고 판매했던 다티는 종종 머리말을 적고는 아래쪽에 그때 회사와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약했다. 다티의 비밀 노트는 어느 정도는 회계장부이자, 어느 정도는 회고록이고 어느 정도는 족보다. 그의 고향 도시에서는 당시에 이미 보편화되었던 여러 장르의 개성 넘치는 조합인 것이다.
베네데토 델 마사리치아 : 1452년. 소작농 : 황소 6마리의 방목권으로 9리라를 지불. 이같은 거래 내역이 상세히 적힌, 11cm * 14cm인 작은 노트를 썼다. 이 노트는 수십 년 동안 이어지면서 온갖 종류의 거래를 망라하게 되었다. 지참금, 집세, 대출금, 생산물 판매량, 직물 구입, 건축 자재, 먹이. 이 수첩은 소작농의 삶에 관한 훌륭한 전체 그림을 제공한다. 그런데 베네데토는 노트를 작성한 적이 없었다. 대신에 어떤 거래를 기록해야 할 일이 생기면, 공증인이나 가장 가까이 있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에게 노트를 넘겼다. 이 노트에는 30여 개의 손들이 쓴 항목이 기재되어 있다. 장인들, 은행가들, 수사들, 사제들, 교사들의 신원이 모두 확인되고, 예루살렘 기사단 소속의 기사도 한 명 있다.
이 같은 기록물들은 베네데토 같은 소작농들의 승리였다. 소작농들을 지주들과 동등한 입장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만약 노트가 없었다면 지주들이 시골생활을 좌지우지 했을 테니 말이다. 거래 내역을 보면 흉작, 질병, 난동을 부리는 병사들 때문에 주기적으로 재앙이 닥쳤어도 그 노트의 주인이 영리한 수완가여서 재산을 착실히 불려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푸줏간 주인, 포목상 다섯 명, 견직공, 제황공, 은행가와 대금업자 다섯 명, 술통 제작자, 안장 제작자 두 명, 의류상 두 명, 양모공 두 명, 장인 목공, 가게주인, 금세공인, 재단사, 그밖에 업종과 지위가 불확실한 다섯 사람이 틀림없이 유사한 장부를 작성했다는 사실을 추론해낸다. 거래내역을 해명 가능하고 법적으로 인정되는 상태로 확실히 만듦으로써 노트는 부자들로부터 빈자들을 보호했고, 경제적 도약과 사회적 역량 강화의 수단이 되었다.
피렌체 도시민은 문맹이 드물었고 다른 유럽인보다 자녀교육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기회에서 앞선 문해력과 수리력이 현저한 차이를 만들어내곤 했다. 상인은 각종 수익률, 이자율, 교환비율, 보험료, 이익점유율을 협상하려면 숫자를 잘 다뤄야 했고, 남자가 그 도시의 공직에 참여하려면 논리와 자신감, 선례를 가지고 주장을 제시하면서 논쟁을 벌일 수 있어야 했다. 일상적인 상거래에 부기나 정치적 영향력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조차 매년 카사토(소득 신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따라서 스스로 글을 읽고 쓰는 능력과 산술 능력을 갖추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린 자녀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일은 어머니 몫. 남자아이들은 초등학교에 가서 글쓰기를 연습하고 기초 라틴어를 배웠다. 열한 살가량 되면, 아들이 장사에 나서기를 원하는 부모들은 아이를 사립 주산학교로 보내 상업 산수를 익히고 이탈리아 문학을 읽도록 했다. 교회나 법률 쪽으로 갈 아이들은 문법학교로 가서 라틴어, 수사학 그리고 당시에 이미 재보급되기 시작한 작품들을 쓴 로마 문인들을 공부했다. 여자아이들의 경우 들쭉날쭉. 가정교사와 과외. 또는 수도원 학교.
치발도네 : 잡문집
좋아하는 조각글을 발견하거나 유용한 내용을 찾게 되면 개인 노트에 옮겨 적는 것. 노트 자체는 크거나 작거나, 실용적일 수 있었다. 시와 기도문, 발췌물, 요리법, 노래, 목록 등. 치료법, 요리법, 해몽, 점성술 예언. 의학 처방, 종교적인 글, 기도문, 사랑 서정시, 성문 통행료, 통화 환율.
루첼라이 : 아들들을 염두에 두고 치발도네를 엮었다. 그들에게 보탬이 되도록 도덕계율, 사업과 시민의 의무에 관한 조언.
기베르티 : 조각가. 비트루비우스와 플리니우스의 번역문, 로마 건축양식 소묘, 피렌체와 시에나 예술의 역사, 자신의 회상록을 모았다. 이것들을 가지고 그는 자신만의 고유한 이론적 견해(광학, 비율, 해부학에 관한)를 엮어냈다. 그 모음집이 휴머니즘 예술교육의 기초를 형성하리라는 의도가 명확했던 것이다. 가업과 함께 이 노트들도 물려받은 손자 보나코르소 역시 본인의 노트를 남겼다. 조부의 가르침을 인용하되 수많은 종, 대포, 기중기, 승강장치의 도해가 추가되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치발도네는 완전히 다르다.
피렌체인은 자신들의 새로운 취미를 사랑했다. 연구자들은 기록 보관소의 치발도네를 보면서, 이 노트들의 인기가 시간이 흐르며 점차 올라가다가 피렌체가 유럽에서 지적 생활의 중추로 제2의 전성기를 누렸을 15세기에 절정에 이르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이제 책은 일상용품이 되면서 보통 사람들이 문자언어를 향유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전에는 수도원, 대학, 궁정 등 소수의 특권적인 장소에서만 이용할 수 있었던 문헌이 이제는 가정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필경사 베스파시아노와 포조와 이들의 동료들 :
코시모 데 메디치 같은 부유한 후원자의 자금 지원을 받아 유럽 곳곳의 수도원을 뒤져가며 암흑기에 살아남은 희귀한 고정 텍스트를 찾아내, 신선한 번역문, 재발견된 것들, 새로운 문학작품으로 가득한 필사본을 지속적으로 공급했다. 여러 해 동안 피렌체에 교황궁이 존재했다는 점 역시 학자들을 그 도시로 끌어들이는 요인이 되었다. 책을 읽고 토론하는 풍경이 새로운 도서관과 서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풍성한 지적 생활을 자극했다. 이러한 고급 문해력은 르네상스 시대에 지적 중량감을 더하면서 유럽문화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단테가 널리 읽히고 보편적으로 추앙받으며 새로운 문학의 토대가 되려면 필경사의 복제만으로 충분치 않았다. 그의 글이 훨씬 더 많은, 보다 다양한 독자에게 전해진 것은 좋아하는 문장을 이 치발도네에서 저 치발도네로 옮겨지고, 집에서 그것들을 읽고 또 읽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공유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능숙해지려면 몇 년씩 걸리는 격식체나 앤티크체가 아니라 상인과 공증인이 사용하던 속도가 빠른 필기체로 필사했다. 그렇게 노트는 독자에게 또 다른 독서 방식을 제공함으써 문학을 민주화했다.
페트라르카(1304 ~ 1374년) :
상업 생태계의 중요한 구성원인 공증인과 법조인의 습관과 재료를 채택했다. 오늘날 학자들은 낱장에 적힌 메모에서 종이 노트의 초고로, 마지막으로 고급 양피지에 쓰인 최종판으로 완성된 책까지 그의 아이디어가 진전되어 가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페트라르카는 40년 동안 [서정시집]에 수록될 시에 공을 들였다. 세상을 떠날 무렵 이 시인은 로마에서 이미 계관시인의 자리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카치오 (1315 ~ 1375년) :
치발도네를 통해 노트가 작가들을 돕는 또 다른 방식을 볼 수 있다. 즉, 향후 참조하고 인용하기 위해 영향을 줄 만한 것들을 수집하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청년시절 보카치오는 세 권의 치발도네를 남겼다. 두 권은 필경사들이 양피지에 쓴 것이고 한 권은 ’치발도네 말리아베키아노‘로 알려진 초고노트로 그가 직접 쓴 것이다. 학자들은 그의 영향력 그리고 [데카메론]을 비롯한 그의 작품에 미친 효과를 감별하기 위해 그 노트들을 살펴보았다. 보카치오의 치발도네는 인상적인 독서의 깊이를 드러낸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마호메트)의 생애, 에우리피데스, 플리니우스, 페트라르카와 주고받은 편지 등. 그러다가 그의 작품이 많은 치발도네에 등장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세네카 같은 고대 그리스로마 문인들과 나란히 놓인 상태로.
피렌체는 재발견된 고전 텍스트를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열쇠로 바꿔놓을 학자들에게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활기로 뒤끓는 이 도시의 문학 문화 속에서 그들은 수용적인 독자층, 토착어에 대한 자신감, 언제든 사용할 수 있게끔 준비된 각종 번역문과 주석, 인문주의자들이 창출한 새로운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그전부터 이미 대대로 고대 문헌을 향유해왔고, 그 문헌들에 담긴 지혜의 가치를 잘 알았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새로운 문학적 관행도 발달했다. 즉, 작가들은 작품을 쓰는 데 필요한 견본과 영감을 쉽게 수집할 수 있었고 그것을 연마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변호사와 상인의 기법을 변용할 수 있었으며, 내용을 공유하는 박식한 인구 가운데 많은 독자를 빠르게 찾아낼 수 있었다.
리코르다, 리코르단체, 치발도네는 피렌체가 상업적 우위를 확립한 13세기에 도래하여, 피렌체에서 최초로 배출한 위대한 문인과 화가들이 영향력을 발휘한 14세기 동안 인기가 상승했으며 르네상스가 꽃을 피운 15세기에 절정을 맞았다. 토스카나 사람들은 이 세 가지 유형 모두, 그리고 어떤 범주에도 딱 떨어지지 않는 혼용 노트에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기록했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급성장하는 문화를 찬양했다.
5장 로도스의 미카엘의 서, 1434년 베네치아 : 미칼리 노트 : 야망과 모험, 그리고 평생에 걸친 배움에 관한 이야기
롱과 와이스(역사학자)는 그 항목(조선, 항해, 수학에 관한 육필 비망록이라는 표제가 붙은)을 살펴보면서 흥미를 느꼈다. 400쪽짜리 중세노트, 한번도 검토된 적이 없는 이 노트는 내용의 독특한 다양성으로 인해 신비로움이 더해졌다. 그 노트에는 선박 건조 지침, 항해사를 위한 유럽 해안 안내, 베네치아 선단의 각종 규칙이 담김. 해군사의 노다지. 이 노트에는 점성술, 문장학 그리고 100쪽 분량의 수학 문제도 있었다. 노트의 주인은 미칼리 다 루오다라는 사람.
1966년 경매를 받은 노트의 새 주인이 연구 목적으로 필사본을 열어보라고 허락.
앨런 스탈 : 중세 베네치아 화폐제도 전문가. 베네치아 기록 보관소에 대해 전문가.
롱, 스탈, 맥지 삼인조 전문가. 디브너 연구소에서 필사본 소유주의 제안이 공식적으로 수락됨. 지원금도 해결.
전체 사진 세트가 필요. 전문사진가가 한 장씩 일일이 촬영한 다음 디브너 연구소의 금고에 보관했다가 이 이미지들을 스캔하여 맥지가 인터넷 포털로 발송할 수 있도록 한 덕분에 연구팀은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텍스트는 프란코 로시가 전사한 다음 스탈이 영어로 번역. 연구팀은 그 노트가 미칼리의 중년기, 1434년에 대부분 쓰였음을 확인했다. 또 저자의 관심사와 우선순위의 변화를 반영하는 전적으로 특유한 개성적인 패치워크(이어붙이기)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만프레도니아 : 16세의 소년 미칼리. 로도스에서 성장. 어느 배의 노예로 만프레도니아에 왔을 개연성.
베네치아 갤리선을 움직이는 것은 노예들이 아니라 급여를 받는 자유민들이었다. 그러니 미칼리는 관심을 갖고 그 배를 보았을 것이다. 베네치아 갤리선의 선장은 피에트로 로레단으로 베네치아의 주요 귀족 가문의 자제였다. 그 갤리선은 베네치아 경호선단으로 베네치아의 선박과 식민지, 귀중한 화물을 보호하는 해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지중해 지역은 경쟁자들로 득실댔다. 해마다 베네치아 선단이 파견되어 지중해와 흑해를 가로지르며 화물을 호위하고 적선을 공격했다. 로레단의 갤리선도 그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프레도니아에 들른 참이었다. 소년은 사공 자리 하나를 얻었다.
200개 집안의 협소한 인력풀에서 배출되는 상인들이 자기네 화물을 그 도시국가의 상선에 실을 권리를 따내려고 입찰했기에, 해마다 일군의 새로운 귀족들이 경호선단을 지휘하는 자리에 선임되는 일어 벌어졌다. 이렇게 신규 임명된 제독과 선장들이 해마다 항해사와 승무원단을 새로 선발하게 되었다. 위계는 엄격했고 경쟁방식으로 진급이 이루어졌으며 고용 보장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디브너 연구팀은 노트의 한 대목을 통해 미카엘이 이런 시스템에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과정을 따라갈 수 있었다. 로레단의 배에 승선한 지 33년이 지나 중년이 된 미카엘이 경력 전체를 깔끔하게 조망해 적어둔 덕분이었다. 매년 맡게 된 근무에 대해 그는 상선을 탔든 경호선단에 있었든 자신의 지위와 자신이 모신 함장들을 기록해놓았다. 참여한 전투, 그리고 그 범위가 현재 벨기에에 속한 슬뤼에서 루마니아의 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이르는 자신이 항해했던 항구들도 언급했다. 13페이지 분량인 이 부분은 현존하는 것 중 유럽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전문 이력서다.
베네치아에 고용되어 일하게 된 뒤로 미카엘은 베네치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리스어가 미카엘의 모국어. 어릴 때는 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미카엘은 격식체로 글을 썼는데, 그가 잠재적 고용주들을 대상으로 이 글을 작성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디브너 연구팀은 미카엘의 기록과 기록 보관소의 내용을 연결 지음으로써 미카엘의 출세 과정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는 지중해 동부에서 4년 만에 지위가 올라갔다. 1403년 그가 탄 배(군대 소속)는 모돈(메토니)으로 파견되어 제노바 선단을 물리치고 경쟁 도시 국가들간의 힘겨루기에서 우위를 되찾았다.
이듬해(19세) : 베네치아의 상선에 오르다. 잉글랜드와 플랑드르 지방으로 항해. 면직물 그리고 비단과 향신료 같은 사치품을 실은 갤리선 네 척의 호위함. 미카엘은 전투의 위험이 덜한 상태였을 뿐 아니라 포르타타, 즉 도중에 내다팔 화물을 한 상자 가져올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하기도 했다. 시칠리아에서 사우샘프턴까지 가는 동안에 들른 중간 기착지에서 선원들은 해안으로 몰려가 후추, 생강, 직물, 무기를 비롯해 사물함에 보관해둔 고가품을 팔곤 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렇게 얻은 수익을 베네치아 로 가져갈 토산품에 투자할 수 있었는데, 월 12파운드인 기본급보다 이런 거래를 훨씬 중하게 여겼을 것이다.
매년 가을마다 베네치아로 돌아오면 선원들은 하선한 뒤 그 도시에서 겨울을 났다. 미카엘은 이 휴식기를 독학에 사용했다. 이때 그는 읽고 쓰는 법을 배웠을 뿐 아니라 일생에 걸친 놀랄 만한 열정, 수학을 발견하였다. 첫 180페이지는 오로지 수학 문제, 게다가 굉장히 복잡한 수학 문제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기용한 전문가 프란치 교수는 미카엘의 실력을 높이 사게 되었다. 미카엘이 따른 표준 수업 계획서는 직접적으로 관련된 현실적인 상황에서 발생할 만한 모든 문제를 제시했다. 따라서 미카엘이 기재한 첫 번째 항목이 이윤과 가격 책정에 관한 문제 제기였다. 그 밖에도 시장, 주사위놀이, 변호사사무소, 부둣가, 건설현장에서 이뤄지는 시나리오들이 등장한다.
4년 뒤 미카엘은 사다리의 위쪽으로, 상급 이물사공(프로데르) 중 한 사람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 역할로 돈을 더 벌었고, 결정적으로 그 배의 상급 항해사들의 눈에 더 잘 띄게 되었다. 그는 프로데르로 2년을 보낸 뒤 노키에로의 자리로 올라갔다. 노를 젓는 게 아니라 전투에 나가 싸우도록 되어 있는 하급 항해사였다. 7년 뒤 그는 파론(갑판장 또는 항해사와 비슷한 직책)으로 진급. 이 시기에 그는 생활기반이 안정되어, 베네치아 사람인 도로테아와 결혼하면서 시민권을 취득했다. 1415년 아내 사망.
1416년 31세 무렵 : 미카엘은 베네치아 해운업계에서 출중한 인물로 자리매김. 이민자인데다 항해사로 진급하는 데 성공한 소수의 갤리선 사공 중 한 명으로 성공. 그해 5월 15년 쯤 전에 처음으로 노를 잡게 해준 귀족 로레단이 이끄는 선단에서 명예를 얻었다.
갈리폴리 앞바다에서 베네치아 선박을 괴롭힌 튀르키예 선단을 무력으로 진압. 베네치아는 에게해의 패권을 되찾았다. 미카엘의 경력은 그가 이 승리에 일조한 덕을 봄. 그의 이력서에는 1417년 또 다시 승진. 호모 데 콘세이오(이등항해사).
육분의와 크로노미터가 발명되어 선원들이 육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게 되기 전에는 포로톨라노가 중요한 항해 수단이었다. 조수와 방향에 대한 편람으로, 항로의 주요 지점 사이에 있는 육지의 중간지점을 통해 먼 바다에서 항해 중인 선원들에게 길을 알려주는데, 나침반과 함께 사용했다. 항해사는 암초나 바위를 피하고 해안을 따라서 또는 개방수역을 가로질러서 진로를 따를 수 있었다.
포르톨라노(해도)와 나침반이 있으면 숙련된 선원은 누구든지 유럽 전역의 해안지대 주변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었다. 인쇄술이 나오기 전인 시절이니 손글씨로 쓴 사례들을 지키려고 애썼다. 수세기 동안 선원들 사이에서 대물림되었다. 대체로 양피지에 쓰였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미카엘은 자신의 포르톨라노에 담긴 지침들은 플랑드르 바다의 도선사 추안 또는 피레스의 공 덕분임을 밝힌다.
미카엘은 평민이었기에 결코 선단을 통솔하거나 본인 소유의 화물을 베네치아 갤리선에 실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매년 나오는 하급직 가운데 가장 각광받는 자리는 개인이 임명한 것이 아니라 무려 17명의 후보자가 단 하나의 역할에 입후보하는 선거를 통해 주어졌다. 따라서 미카엘의 기록은 대단한 결과였다. 1431년 프로토피노 연안에서 제노바인들을 상대로 싸우다 부상.
1433년(48세) 미카엘은 이력서를 꼼꼼이 작성. 달력표, 복무규정, 포르톨라노를 추가했다. 황도십이궁을 표현한 채색 삽화 12점을 그려냈다. 1436년 새 노트를 손에 든 채 미카엘은 성공적인 선거를 치러냈고 탐냈던 역할인 플랑드르 상선단의 아르미라이오 자리를 처음으로 따냈다. 미카엘은 8차례나 더 항해에 나섰다가 1445년 에순 살 즈음 ’대저울의 자리‘를 받았다. 이는 베네치아에 특히 괄목할 만하게 기여한 엄선된 숫자의 선원들에게 연금을 주어 명예퇴직을 시키는 방식이었다.
미카엘은 시간 순서대로 된 계산, 포르톨라노, 항해 수학을 다른 노트에 베껴 쓴 다음 피에트로 디 베르시라는 젊은 항해사에게 팔았다. 매년 콜레조 선거에 나갔던 피에트로는 미카엘의 노트 복제본을 명함으로 사용한 듯하다. 그리고 미카엘은 이력서에 가정생활에 관한 세부 내용을 추가했다. 아내들과 아들의 죽음을 표시. 이 노트가 공적 문서라기보다 사적 문서가 된 뒤에야 비로소 미카엘은 세 번 결혼했으며, 아들 테오도리노가 1422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1441년에 초안이 작성되고 4년 뒤에 유언 보충서가 추가되어 수정된 그 유언장은 질병, 사별, 잠식하는 가난이라는 상황을 담았다.(베네치아 기록 보관소에서 스탈이 발견)
로도스의 미카엘 서 :
당당하고 분명한 이 제목은 책과 잘 어울린다. 수많은 자서전보다 미카엘의 내면생활을 더욱 솔직하고 완전하게 표현한다. 즉, 그의 지적 성장, 그의 영적 욕구, 그가 자랑스러워했을 경력, 미신적인 동시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신앙심을 간증한다. 노트의 주인이 세계 최고 조직의 일부가 되는 상황에서 느낀 소속감을 구현한다. 그 노트는 미카엘의 정체성, 그의 자아상, 그의 자의식을 구현한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놀라울 정도로 오늘날에 가까운 방식으로. 연구작업은 완료되었고, 디브너 연구팀은 해산했다. 그리고 이들이 펴낸 판본의 미카엘의 책은 출판되기에 이르렀고 극찬을 받았다.(1500쪽 세 권의 책으로)
6장 악처들 그리고 양모로 틀어막은 입 : 잉글랜드로 가는 노트, 1372~1517톁
제프리 초서 : 1343 ~ 1400년 : 켄터베리 이야기
이탈리아와 잉글랜드를 잇는 무역로 네트워크에 있다. 초서는 에드워드 3세 밑에서 외교관으로 일했고 1372년 12월 서른 살 무렵 무역특사로 런던에서 제노바로 파견되었다. 자유항 거래에 합의함으로써 제노바 상인들이 잉글랜드의 양모 수출에서 큰 몫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여 두 도시 간에 거래가 증가하도록 하는 책무를 맡았다. 초서는 이 공식 임무를 성공적으로 이행.
제노바에서 공식 업무를 마무리 지은 뒤 초서는 내처 남쪽으로 내려가 피렌체로 가서 바르디 상사 측 사람들을 만났다. 바르디 상사는 불과 몇 달 전 잉글랜드 왕에게 약 7000피오리노 금화를 빌려준 터였다. 이 비밀 회동이 진행되는 동안 초서는 허가를 받아 그 도시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초서는 선도적인 토스카나 작가들이 높이 평가받는 점에 주목. 페트라르카는 로마와 베네치아, 나폴리 궁정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보카치오는 피렌체의 문화 대변인이 되었다. 초서는 개인용 노트가 풍부하고 저렴한 점을 목도했을 것이다. 모든 회의마다 사무원들이 참석하여 상세한 원장을 참조했을 테고 가정집에 초대받은 경우에는 치발도네, 리코르단체 리브리 디 파밀리아를 봤을 것이다. 덜 부유한 피렌체인들이 소유한 서적의 숫자만으로도 부러웠을 것이다. 초서가 1372~1373년 피렌체에서 보낸 몇 개월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추정할 수 있다.
초서가 외교관으로서 이룬 성취는 귀국 후 보상을 받았다. 초서가 맡은 그다음 역할은 런던의 수출입을 관리감독하는 일이었다. 이탈리아 인맥, 유창한 다국어 실력, 외교적 수완을 보유한 그는 타고난 적임자였다. 12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면서 이 안정기에 글을 많이 쓰게 되었다.
1378년 초서는 이탈리아를 다시 방문한다. 밀라노공국에 외교사절로 가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저술에 영향을 주게 될 필사본을 여러 권 입수한다. 돌아오자 [켄터베리 이야기]의 집필을 시작한다.
초서가 이탈리아 문학 문화와 노트를 접촉한 일이 어떤 식으로 그의 저술 방식에 영향을 미쳤을까? 첫째 그는 치발도네를 아이디어, 참고자료, 인용구 그리고 뭐든 유용해 보이는 부작위로 떠오르는 생각을 저장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이탈리아식 관행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둘째, 페트라르카처럼 초서 역시 다수의 초고를 써볼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이점을 누렸다. 즉, 또 다른 시에서 초서는 그렇게 한 다음 최종 버전을 자신의 필경사 애덤에게 넘겨 튼튼한 명품 양피지에 베껴 쓰도록 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초서 본인은 노트를 사용했고 노트에 대한 글을 썼으며 노트가 사용될 수 있는 갖가지 방식을 알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제지소 그리고 상품이 잘 갖춰진 비아데이 리브라이의 카르톨라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그의 동포들은 그러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독자층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첫 100년 동안 [켄터베리 이야기(1405~1410년)]의 필사본은 55편이 살아남는다. 그런데 단테의 [신곡]은 그에 상당하는 수치가 800편을 넘어간다. 초서의 동시대인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분명 단테의 작품에서 뽑아 쓴 발췌문들이 차발도네를 통해 널리 퍼졌다는 점이다.
영국의 치발도네 : 런던의 포목상 존 콜린스. 1517년 엮음
332쪽 분량의 2절판 지면에는 시, 수수께끼, 역사적 연대기, 인용문, 왕과 왕자들의 행적, 법적 주의사항, 양피지에 금박 입히는 법에 대한 설명, 런던의 교회 목록, 일기예보 등등. 치발도네와 마찬가지로 콜린스의 노트 역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문학적 선호를 표현하고, 가장 좋아하는 텍스트를 모은 선집을 만들고, 대단히 위계적인 번성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랑스러워했다. 런던 : 낮은 문해율, 덜 혁신적인 상업, 더 계층화된 사회, 더 비싼 종이 그리고 궁정을 제외하고는 활동이 거의 없는 더 잠잠한 지적 네트워크.
7장 수를 누린 LHD 244 : 화음을 넣어 노래하기, 1450~1600년 볼로냐
보카치오가 초서에 미친 영향력에 관한 이야기는 북쪽으로 향하는 지식의 이동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아이디어는 남쪽으로 흐르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티치아노는 모두 네덜란드 화가들이 가장 먼저 통달했던 유화 기법을 아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현재 멜버른의 한 도서관에 있는 작은 노트 한 권도 유사한 문화 전송에 대한 독특한 통찰을 제공한다.
루이즈 핸슨다이어 :
중세 필사본과 초기 활자본의 팬. 서가번호 LHD 244로 알려진 물품은 놀라운 사연을 들려준다. A6(100*170)가 조금 안되는 크기에 118쪽짜리 지면으로 이루어진 작은 노트는 15세기 후반기 이탈리아에서 작성되기 시작했고, 100여년 동안 다양한 손에 의해 주석이 달리면서 계속 사용되었다. 이 노트는 만듦새가 굉장하다. 안에는 최소 7가지 종류의 종이가 들어가 있는데, 4쪽에서 24쪽까지 그 범위가 불규칙하게 묶인 상태로 제본되어 있다. 페이지가 해지고, 내지가 헐거워져서 풀을 붙여 고정해놓은 부분이 두어 군데 있다. 그 과정에서 48페이지가 유실되었음을 보여주는 아주 오래된 쪽번호는 사용 빈도가 아주 높았음을 드러내는 흔적이다.
낡고 앞뒤가 안 맞고 변변찮아 보일지언정 LHD 244는 음악학자들에게는 귀한 보물이다. 그 안에는 빠짐없이 전부 배껴 쓴 음악논문과 다른 출처에서 가져온 주석이 뒤섞인 채 담겨 있다. 즉 통틀어 40개인, 주로 음악이론을 다루는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로 작성된 텍스트가 부분부분 들어가 있다. 40쪽에 이르는 대위법(화음기술)에 대한 소개로 시작한 뒤 이어서 오늘날 팔분음표, 사분음표, 이분음표 체계의 전조가 되는 방법을 활용해 멜로디와 리듬의 기보법을 다룬다. 성 프란치스코의 단식 목록, 프란치스코 성인들에게 헌정된 교송 모음을 비롯한 다른 발췌문들은 이 노트의 주인이 프란치스코회 수사이었음을 시사한다.
LHD 244는 치발도네와 유사하다. 그러나 세부 제작 과정을 보면 오락적인 선집보다는 약간 더 복잡하고 숙고를 거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곳에 존재했던 그 같은 텍스트들의 알려진 날짜와 결합하여 종이와 글씨체, 음악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 노트는 15세기 후반기에 작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1600년까지 여전히 내용이 새로 추가되고 논평이 달리고 정정이 이루어지면서 이례적일 정도로 긴 가용수명을 줄곧 누리게 되었다.
스토슬이 동료들과 함께 그 텍스트를 자세히 검토하여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어떤 종류의 음악을 만들고 있었는지 알아내게 되었을 때, 그들은 LHD 244가 그 사용기에 일어난 크나큰 변화를 증언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노트는 지멜이라고 알려진 영국에서 발생한 화성의 혁신을 기록하고 있다. 지멜은 하나의 성부를 제창하는 등 둘 이상의 목소리가 별안간 다성음으로 나뉘면서 풍성하고 질감이 상당한 기량을 요하는데, 흔히 하듯 즉흥적으로 연주되는 경우에 특히 그러했다. 그러다보니 14세기가 지나는 동안 영국의 작곡가들과 음악가들이 그 형태를 가다듬는데 수십 년이 걸렸고 그후 15세기에 유럽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이 노트의 생애의 다른 쪽 끝에서는 두 가지 목록이 베이스 선율 위에 화음을 넣는 것에 대한 33가지 상세한 조언을 제시한다. 이 요령들은 17세기 초 음악의 새로운 발전을 반영한다. 바로 바소 콘티누오(통주저음) 연주법이다. 한 악기가 지정된 반주를 연주하는 가운데 또 다른 악기가 조화로운 음색을 더하면서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이 화음은 악보에 나와 있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음악가의 소관으로 남겨져 있었다.
LHD 244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진화한 한 가지 예술형식을 포착하고, 그것이 음악가들 사이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 독특하고 유일무이하다. 음악이론에 관한 이러한 정식 연구는 클래식음악이 전례적 성가에서 훗날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이 대가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화성적 정교함으로 발전해간 과정을 보여준다.
LHD 244의 심각한 상태와 겹겹이 달린 주석은 이 노트가 작업노트였음을 드러낸다. 이 노트는 수십 년 동안 줄곧 상용되었다. 이 노트의 주인들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나 본인이 작곡하여 작품을 만들어낼 때마다 매일 같이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참조했던 것이다.
실용적인 이 노트는 분명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며 가치를 획득했을 것이다. 갈수록 지식과 뉘앙스가 서서히 부착되면서 커진 것이다. 자식이 없는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계승해온 신실하고 한결같은 그들의 동반자였던 이 노트는 아마도 그 수도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죽어가면서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 합심하는 동안 사제 간에 점점 깊어진 유대를 상징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8장 아, 이러다간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겠구나! : 두 노트지기, 1455~1519년 이탈리아
부기와 회계라는 실용적 기술과 개념적 혁신은 느리게 퍼져나갔다. 상인들은 본인의 필요에 따라, 그리고 원리를 제대로 파악한 정도에 따라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기법들을 적용했다. 부기의 각종 개념과 틀은 전문적인 훈련을 요했기에, 이탈리아 전역에 주산학교가 확산되었다.
양모 공급업자나 지주들은 이탈리아 고객들이 가지고 있는 원장의 지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짐작만 했을 뿐, 거래 내역을 차변과 대변에 둘 다 기록하는 동시에 복잡한 방식으로 그 두 항을 맞추면서 이 원장에서 저 원장으로 거래 내역을 옮겨 적는 기술을 습득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이 전문지식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유랑생활을 하던 어느 프란치스코회 수사 덕분이었다.
루카 파치올리(1447 ~ 1517년) : 이탈리아의 수학자,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료이며, 복식부기의 개발자로 근대 회계의 탄생에 지대한 역할. 파치올라는사에 족적을 남길 수 있게 해준 두 가지 재능을 보유했다. 수학과 네트워킹이었다. 산세폴크로라는 고향마을에서 주산 교육을 받은 뒤 파치올리는 1464년 베네치아로 옮겨 갔다. 십대였던 그는 리알토에 있는 학교에서 학업을 이어나가며 모피상 안토니오 롬피아시의 세 아들의 가정교사로 일했다. 파치올리는 한 세기 전에 로도스의 미카엘이 수집한 것과 유사한 실용적인 문제로 상업산술을 가르쳤다.
당시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국가 중 한 곳이 되어 있었다. 이 도시는 산업과 지식의 중추이기도 했다. 게다가 파치올리가 롬피아시의 세 아들을 가르치는 동안 그곳에서 최초로 인쇄기가 탄생했다. 1468년 마인츠 출신 독일인 형제가 베네치아에 정착했고, 1년이 지난 뒤부터 책을 인쇄하기 시작했다. 5년이 지나지 않아 베네치아에서는 인쇄소 12곳이 가동되면서, 두꺼운 종교서와 고전의 아름다운 판본을 제작했다.
1470년(23세) 롬파시아 집안을 떠나 파치올리는 로마로 이주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우정을 나누기 시작했다. 파치올리보다 43년 위인 알베르티는 이미 원근법을 뒷받침하는 수학을 계산해냈다. 파치올리를 만날 당시 교황청 상서원의 서기관이었던 그는 청년 파치올리의 멘토가 되어 바티칸의 도서관을 개방해주었다.
1472년 알베르티가 세상을 뜨자 파치올리는 프란치스코회 수사가 되어 여행길에 올랐다. 바티칸 인맥 덕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통상적인 청빈 의무로부터 면제되는 특별허가를 얻어낼 수 있었고, 수도원에 정주하지도 않았다. 대신 파치올리는 성직자 지위로 보호받으면서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를 자유로이 돌아다녔고, 그 후로 20년 동안 로마, 자다르, 페루자, 나폴리, 우르비노 사이를 오가며 여행하고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여기저기 이동해 다니는 생활방식은 그의 조사활동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여행길에서 배움을 얻을 만한 수학자들을 찾아냈고, 희귀 필사본을 찾아 수도원의 서고를 뒤졌다. 1494년(45세) 초 베네치아로 돌아왔을 때 그는 상당한 양의 필사본을 챙겨왔다.
베네치아는 현지에서 생산되는 저렴한 종이를 등에 업은 동시에 교육용 도서와 학습 안내서라는 좀 더 믿을 만한 시장을 발견하면서 신생 출판 산업이 일어난 상태였다. 이제는 든든한 연줄을 확보한 파치올리는 후원자와 출판업자를 모두 찾아냈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유서 깊은 귀족가문으로 꼽히는 집안의 자손인 마르코 사누도로부터 자금을 확보한 상태에서, 수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파치올리는 자신이 가져온 엄청난 필사본을 파가니노 데 파가니니에게 넘겨 책의 인쇄를 맡겼다. 그가 1년간 들인 노고는 중대한 결실을 낳았다. 자신이 알아낸 수학 지식을 총망라하여 집대성한 야심작인 파치올리의 [산술집성]은 모든 종류의 다양성을 묶어버리는 ’헐렁한 괴물‘ 같은 책이다.
루카 파치올리는 라틴어가 아니라 일상적인 비격식체인 토스카나어로 써서 기초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은 이론과 실용산술에 관한 일반논문과 대수학, 통화 변환, 곱셈표, 이탈리아 국가들의 도량형, 유클리드기하학의 요약, 아르키메데스와 유클리드,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에 관한 설명 소개를 결합해놓았다.
[산술집성] 제9권에서는 간결하면서도 굉장히 알아보기 쉽도록 복식부기 과정을 제시했다. 상업산술을 가르치면서 수십 년에 걸쳐 갈고 닦은 프라(형제) 루카의 명쾌한 지침들은 복식부기의 원칙과 실제를 명확하게 지시한다. 그는 아라비아숫자를 사용하는 법, 손익계정을 만드는 법, 재무제표의 초안을 작성하는 법, 연말에 결산하는 법 등을 설명한다. 또 파치올리의 ’베네치아식‘대변`차변 열의 채택이 제공한 명확성의 진가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마누치 시대 이후에 도입된 간단한 레이아웃 요령으로, 등식의 양변을 보다 용이하게 시각화하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기법들 덕분에 이탈리아의 상업은 200년 동안 흥성하면서 바르디 가와 메디치 가 같은 다국적 기업을 추동하고 제노바, 베네치아, 피렌체의 광범위한 무역망을 지탱했다.
그런데 이제 파치올리는 이 같은 연결성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그는 정부당국과의 거래를 원활히 하고, 세금을 조정하며, 동업관계의 경계를 분명히 설정하고, 경비를 관리하며, 부업으로 별도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출장비 내역을 처리하며, 계산서를 만들고, 결산하고, 회계연도 말에 마감하는 부기가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 보여주었다.
그는 상업산술에 편지 쓰기, 기록 관리, 서류 철하기에 관한 훌륭한 실무 지침을 추가했다. [산술집성] 제9권은 15세기가 제공할 수 있었던 경영대학원 교재에 가장 근접한 것이었다. 이 책의 독자들이 소화한 제일가는 교훈 가운데 하나는 모든 사업에는 최소한 4권의 백지장부(일기장, 분개장, 총계정원장, 서신용 대장)가, 폐기 대장까지 총 5권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이었다. 이 장부들은 큰 문제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제대로 관리되어야 했다. 경영서로서 이 책을 원하는 독자도 있었지만, 순전히 수학과 기하학을 배우고 싶어하는 독자도 있었다. 두 독자층이 한꺼번에 파치올리의 벽돌책으로 달려들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 (1452 ~ 1512년). 피렌체
파치올리는 당대의 수학 지식을 모으고 보급함으로써 이뤄낸 놀라운 성취 덕분에 유럽 지성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꼽히게 되었다. 1496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신의 후원자인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베네치아에 있던 파치올리를 밀라노로 불러들이라고 권유했다. 레오나르도는 어린 시절부터 백지장부를 쓰는 사람들 틈에서 생활했다. 빈치라는 소도시에서 자란 소년 레오나르도는 주산학교에서 기초적인 상업산술을 교육을 받았고, 부기의 중요성을 배웠다. 그의 부친과 조부는 모두 공증인이었는데, 각종 증서와 계약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데 작은 노트를 사용했고 가계부를 썼다. 십대 시절에 치발도네와 관련된 지역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피렌체에서 성공한 예술가 안드레아 델 베르키오의 도제가 되었는데, 베르키오가 서적 공방을 운영했다. 베르키오 본업은 메디치가를 위해 조각품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치발도네를 주문받아 제작하기도 하였다.
1496년 파치올리가 레오나르도의 노트를 보았을 때 놀랐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 양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1만3천페이지가 살아남았는데, 전문가들은 원본 전체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이라고 한다. 이는 레오나르도가 1년에 약 1천 페이지의 속도로 노트를 채워나갔음을 의미한다. 각종 소묘, 도해, 특유의 거울 글씨 등.
레오나르도 역시 서로 다른 목적에 따라 서로 다른 판형의 노트를 썼다. 공식적인 2절판 대형 장부부터 허리띠에 끼워 넣고 다니는 포켓북까지 다양하다. 그는 하루에 몇 시간씩 노트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집요함은 레오나르도가 지닌 중요한 핵심 자질 가운데 하나였다.
레오나르도는 뭔가를 분석적으로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그것을 그려보는 것임을 잘 알았다. 이러한 그리기 습관은 그의 가장 중요한 분석 도구 가운데 하나와 맞물렸다. 바로 유추다. 예술가는 자연을 자세히 그리다 보니 기저에 깔린 구조와 겉으로 드러난 디테일을 모두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레오나르도는 일단 관찰하고 나면,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한 창조적인 작업을 시작하곤 했다. 그의 설계는 고용주들의 가장 실제적인 필요에 부합할 만한 것들이었다. 운하, 갑문, 제분소, 해자, 그리고 그런 것들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토공기계와 준설기, 채굴기```
그는 전장을 가로질러 금속을 날리는 대포와 무대용 대포를 설계했다. 레오나르도의 그림 실력은 베르키오의 작업실에서 받은 예술교육의 수준을 반영했다. 과학적 관찰 능력 덕분에 선배들을 능가할 수 있었다.
1498년 파치올리 : [신성비례] 책을 완성. 레오나르도가 삽화를 그려줌. 기하학 개념을 명확히 설명하는 원, 삼각형, 사각형들이 가득했다. 필사본 형태로 책을 배포했다. 광범위한 독자층을 권세 있는 명문가의 독자층과 맞바꾼 것이다.
피렌체의 레오나르도 : 1500년 프랑스의 밀라노 점령으로 만토바로 옮김. 피렌체로 이주, 1508년까지.
포트폴리오 활동. 군사장비와 방어시설 설계, 아르노 강의 운하화 계획,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 이사벨라 데스테가 초상화 작업, 해부작업 진행, [새의 비행에 관한 코덱스], 기하학`물리학`해부학`역학의 뛰어난 통합, 주행기록계의 도해 등 갖가지 내용으로 노트 작업.
피렌체의 파치올리 : 대학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치는 자리를 맡았다. 지방 귀족에게 [신성비례]의 사본을 만들어주기로 함. 피렌체 당국의 요청으로 교육용 기하학 입체 일습을 제작.
1508년 : 레오나르도는 새로운 후원자를 이미 구한 상태. 부유하고 권세 있는 후원자, 프랑스왕 루이 12세였다. 넉넉한 보조금을 지원받으면서 그는 밀라노, 로마, 피렌체, 볼로냐를 오가며 수십년 동안 한결같이 해온 개성 넘치는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 소묘, 글쓰기, 탐색의 길을 추구해갔다.
파치올리는 베네치아의 인쇄소로 돌아갔고, 세 권의 책을 출간. 신성비례, 주석을 단 유클리드기하학 번역서, 장대한 산술집성의 재판이었다. 세 권 모두 성공했다. 몇 년 동안 페루자와 로마에서 교단에 섰다가 은퇴하여 고향 산세플크로로 돌아갔고, 1517년 생을 마감했다. 프라 루카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저작권이 만료되면서 [산술집성]의 실용적인 짧은 챕터들이 기하학과 순수수학의 덩어리 안에 묻혀 있다가 발굴 될 수 있었다. [산술집성]의 내용 가운데 부기를 다루는 부분은 27페이지에 불과했다.
1540년 : 도메니코 만초니라는 베네치아의 인쇄업자가 출처를 표기하지 않은 채 그 내용을 발췌하되, 파치올리의 요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수백 가지 유용한 예제를 추가했다. 만전을 기하고자 만초니는 책의 제목을 이중 원장으로 변경했다. 이 책은 루카의 원서보다 잘 팔려서, 6, 7판까지 찍을 정도였고, 그 여파로 개작물과 번역물이 쇄도했다.
네덜란드의 작가 얀 임핀 크리스토펄스 : 파치올리가 취합해서 정리한 피렌체-베네치아식 기법은 상업 실무뿐 아니라 유럽경제 전체를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시몬 스테빈 : 안트베르펜 : 상인의 사무원으로 1570년대에 복식 기장을 배웠다. 1590년대 즈음 그는 나이 어린 오라녜의 모리스 왕자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이탈리아 방식으로 부기를 가르침으로써 네덜란드가 유럽 국가 중에서는 최초로 제대로 된 정부회계를 향유하는 국가가 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번창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웃국가들도 그 뒤를 따랐다. 오늘날 모든 기업이 13세기 피렌체에서 고안된 규칙에 따라 대차대조표와 손익을 계산하듯, 모든 자본주의국가는 그와 유사하게 합리적이고 조직된 체계에 따라 나라를 운영한다. 파치올리의 [산술집성]은 결과적으로 역대 가장 중요한 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레오나르도 : 1519년 유언장에 서명. 책과 그림, 도구들을 젊은 조수인 프란체스코 멜치에게 남긴다. 레오나르도의 노트가 조금이나마 살아남은 것은 다름 아닌 멜치 덕분이다. 그는 노트를 분류하여 레오나르도가 쓴 글 가운데 본질적인 한 부분을 그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외부인들도 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구도, 빛, 해부학 같은 주제에 관한 레오나르도의 사상을 소화하는 그 논문은 수년에 걸친 탐색의 결실로, 1500년대에 융성한 한 유파 전체에 영감을 주었다.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반복된 레오나르도의 강박적인 노고(관찰, 소묘, 글쓰기, 메모, 목록 작성, 관측, 추측, 설계, 이론화, 공상)는 여전히 딱 한 부로만 남아 있었다. 오직 멜치만이 판독할 수 있는 글씨체로 보존된 채. 레오나르도의 노트는 수많은 손을 거쳐 갔다. 보물처럼 귀하게 여기는 주인들과 방치하는 주인들을 오가며 전해졌다. 프란체스코 멜치는 앞쪽 진영에 속했다. 그는 50년 동안 그 노트들과 기록물을 맡아서 보관했다. 그의 아들 오라치오는 후자에 속했다. 그것들을 물려받자 집안의 저택인 빌라 바프리오의 다락에 팽개쳐두었다. 노트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오라치오는 건축가 마젠타에게 보관을 맡겼다. 이때부터 그 소장품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레오나르도는 파치올라와 함께 베네치아로 가서 책을 출간하지 않았을까? 노트에 적힌 글을 정리했더라면 무리없이 후원자와 인쇄업자를 찾았을 테고, 친구와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이 인쇄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방대한 이 노트들은 인쇄에 착수할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다. 가령 멜치의 사후에 나온 [회화론] 판본은 무려 18권에 달하는 노트들의 원문과 대조`확인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할 터였다. 다른 문제도 시각적 작업, 특히 해부학 습작들에 수반되었다. 목판화나 동판화로 옮겨서 제작할 경우 그림의 질을 용인할 수 없는 수준까지 타협해야 하리라고 판단했다. 모든 디테일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 과학자에게는 위험 부담이 너무도 큰 일이었다.
만약 멜치가 그 노트들을 베네치아나 어느 대학교의 도서관이나 피렌체의 카르톨라이(문구상)로 가지고 갔더라면 누군가가 읽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본인도 대단한 노트지기였던 갈릴레오는 분명 크게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만약 레오나르도의 통찰을 16세기의 여러 독자들과 학생들, 교수들이 구할 수 있었다면, 어떤 지성의 꽃들이 피어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