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테이블 책, 1520 ~ 1670년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유럽의 여러 도시가 점점 성장하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상업이 그 어느 때보다 뒤얽히면서 16세기와 17세기 동안 도시생활은 지속적으로 더욱 복잡해지고 보다 근대화되었다. 중세의 생활리듬(각종 성인들의 날과 축일) 가운데 대다수는 고수하면서, 더불어 무역박람회, 극장공연 같은 새로운 것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시민들은 시계 보는 법, 그리고 약속 지키는 법을 배웠다. 국제무역의 발달로 사람들은 농업에서 벗어나 각종 도시직업으로 가게 되었으며, 여러 나라 땅의 주화가 영국에서 유통되었다. 이러한 복잡성에 대응하면서 이 시대는 노트문화의 황금기가 되었다. 테이블 책은 일상용품이었다.
테이블 책 : 작은 활자로 인쇄된 짤막하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력이었는데, 각 페이지마다 유용한 사실과 수치, 삽화가 실렸다. 책력으로서 테이블 책은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이 책자의 나머지 부분은 열 장쯤 되는, 펜으로 필기를 할 수 있었다. 이동 중일 때는 무른 금속 재질의 첨필로 작성할 수 있었다. 또는 최신 발명품인 흑연으로 만든 연필로 기록할 수 있었다. 그 지면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닦아내고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상인부터 군주까지 만인이 갖고 싶어할 만했다. 1616년 존 포스터는 테이블 책을 수익 있는 제품 유형으로 봤다. 귀족들끼리 오간 선물이기도 했다. 교양있는 도시 주민이라면 누구든지 갖고 싶어 할 만한 물건이었기에 수요층이 두터웠고, 그래서 높은 가격을 붙일 수 있었다.
세익스피어 : 작품 [햄릿]에서 테이블 책이 언급됨. 렘브란트 : 1633년 약혼녀 사스키아를 테이블 책에 스케치.
테이블 책은 1520년 네덜란드에서 출현했고 50년 뒤 런던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이후로 18세기까지 죽 이어진 듯하다. 당시 일반용지 노트의 가격 하락으로 경쟁력을 상실했을 것이다. 이 다재다능한 작은 물건은 엄청난 양의 기억하기 힘든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18장 일지로 기록된 여정 : 1699년 런던에서 아모이까지
17세기가 지나는 동안 유럽은 깔끔하게 정돈된 부기의 애호가가 선박의 항해일지 문화에 영향을 미칠 터였다. 그리고 시대가 진전되어감에 따라 항해일지는 전문화하면서 갈수록 상세해지고 흥미로운 사실을 드러내게 되었다.
1699년 동인도회사는 거의 100년 동안 런던에서 선박들을 파견하여 동양에서 무역(그리고 노골적인 절도)을 통해 얻게 될 상상을 초월하는 부의 몫을 두고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포르투갈인들과 경쟁했다. 그해 7월 320톤급 정도 되는 프리깃함(정찰, 경계 임무 수행)인 룩 호는 늘 하는 식으로 동양으로 항해를 앞두고 계약을 통해 승무원들을 고용했다. 우선은 비단으로 아주 유명하고 동인도회사의 공장, 즉 무역소가 있는 곳이기도 한 인도 서해안의 맨 위쪽에 자리한 무굴제국의 항구 수라트로 갔다가 내처 남중국 해안의 아모이(샤먼)로 이동한 다음 다시 수라트를 거쳐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선장 조지 시먼즈, 아들 제임스 시먼스 : 항해일지 작성.
망망대해에서 일지는 그 선박의 관찰된 위치, 이동한 거리를 기록하기 시작하는데, 정확하게 항목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위도는 하루에 두 번씩 측정되고, 진행 상황이 추산되며, 바다와 대기의 상태가 간결하게 기록된다. 룩 호가 마데이라에 도착하자 그 현장을 소묘로 그려낸다. 알보의 기록보다 훨씬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된다. 배는 하루에 200마일을 주파하면서 계속 질주한다. 수라트에서는 면직물을 사입했다.
이런 종류의 자료는 이제 지대한 중요성을 띠었다. 유럽의 회사들은 목적지로 가는 가장 빠르면서도 가장 안전한 경로를 필사적으로 알아내고자 했다. 관리가 잘 된 일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정해진 계절에 따라 세계 곳곳에서 예상되는 상황을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그림으로 취합될 수 있는 미가공 데이터를 제공했다. 계절성 폭풍우, 해류, 조수, 암석 등등을 경고해주는 것이다. 한편 고국의 후원자들이나 고용주들은 그의 이동 상황을 예측할 수 있고, 따라서 이익을 예상할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보험업자들은 수반되는 위험을 보다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중국 아모이에서 석 달을 보낸 뒤 짐칸을 채우기 시작한다. 설탕, 얼음사탕, 명반, 아연, 구리, 장뇌, 버밀리언, 수은이다.
런던에서 아모이까지 항해일지는 제임스 시몬스. 돌아갈 때는 선장 조지 시먼스가 작성.
제임스 시몬스는 아들로 추정되면 아모이에서 배에 타지 않음. 조시 시먼스는 스리랑카에서 병이 나서 죽음.
룩 호: 이제 배의 선장은 기업체의 간부로, 고국의 주주들을 위해 응당 진행상황과 날씨, 각종 사건을 완전히 기록해야 한다고 여겨졌다. 그러한 점에서 이 일지는 17세기에 일어난 꼼꼼한 기록 작성과 기술적 행정(더불어 멀리서 이뤄지는 식민지배)으로의 변화를 깔끔하게 구현한다. 아들 시먼스가 기재한 항목(새 : 앨버트로스)은 순수한 호기심과 발견의 기쁨을 보여준다. 300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어도 이러한 지적 개방성은 그를 상당히 호감 가는 인물로 만든다.
19장 내 생각에는 : 박물학자들의 노트, 1551 ~ 1859년
자연계에 관한 연구는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와 중세 내내 일관되게 이어졌다. 식물학과 동물학은 후기 르네상스 시대에, 그러고는 18세기와 19세기에 다시금 속도를 올렸다. 각 시점마다 노트는 새로운 쓰임새를 드러내며 박물학자들이 새로이 관찰하고 새로이 추론하는데 보템이 되었다.
콘라트 게스너 : ~ 1565년
1551년과 1558년 사이 그는 동물계에 관해 조사한, 목판인쇄 삽화가 풍성하게 들어간 4500쪽 분량의 책 다섯 권을 출판하였다. [동물지]는 관찰과 구체적인 정보, 신화와 우화가 결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풍성함은 생명과학에서 엄청난 진전에 해당했다.
[식물지]를 쓰는 데 사용한 그의 작업노트 중 두 권이 대학교 도서관의 소장품으로 현존한다. 게스너는 뭔가를 면밀히 관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그려보는 것임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의 노트 지면은 여러 소묘와 회화가 정보와 결합했다. 즉, 각 이미지 옆에는 그 표본의 서식지와 습성, 개체 수에 관한 메모가 자리한다. 이처럼 살아있는 생물에 대한 관찰내용에는 대체로 플리니우스와 갈레노스, 또는 게스너와 서신을 주고받은 국제적인 인적 네트워크로부터 가져온 인용구가 수반되어 있다. 게스너가 상세한 내용을 추가하고 주제의 특성을 숙고할 때 실제로 작동한 협업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수준이다.
게스너는 [식물지]를 쓰기 위한 준비작업을 했으나 1565년 흑사병으로 사망.
칼 린나이우스 : 1707년 스웨덴 출생. 훗날 칼 폰 린네로 알려지게 된다.
오늘날까지 알려진 체계를 개발한 사람. 그는 더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동시대의 모든 지식인들처럼 그도 열정적인 노트지기였다. 조수들과 함께 여행일지에 수많은 식물과 동물, 지질을 기록하고 묘사했다.
[마누스크립타 메디카]로 불리는 각종 목록과 표, 도해, 발췌문으로 꽉 채워진 500쪽짜리 노트를 포함한 비망록도 여러 권 작성했다. 린나이우스는 정보를 이차원적 언어 체계로 바꿔놓는 방식으로 축적하고 처리하고 있었는데 지면 공간을 철저하고도 편의적으로 사용하여 지도처럼 풍부한 정보를 시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스폴리나 보타니카]에서 린나이우스는 기존의 세 가지 분류 체계를 스웨덴 지역 세 곳의 식물군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시험해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자료를 모으자 그는 색인카드로 넘어갔다. 이 색인카드를(제본된 노트와 달리) 그의 목록에 새로운 항목을 무한정 추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결과적으로 식물에 관한 기록을 공통 표제에 따라 정리하는 작업은 그에게 종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했다. 그때부터 이 세계는 서로 다른 식물 종과 동물 종뿐 아니라, 서로 다른 속과 목도 거하는 곳이 되었다. 요컨대 그 뒤로 박물학자와 생물학자들이 유기체의 자연분류라고 불러온 것이 꼴을 갖추었다.
[자연의 체계] :
린나이우스의 가장 유의미한 성취. 1758년 10번째 개정판을 내면서 현대의 분류학자들도 여전히 감탄을 금치 못하는 고도의 정교함과 일관성에 도달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재작업한 책이다. 수년에 걸쳐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자연의 체계]는 특대형 11페이지에서 6000쪽이 넘는 분량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각 판본마다 개정 작업을 할 때 린나이우스는 백지와 활자가 인쇄된 지면이 번갈아 나오는 특별한 삽지 사본(책과 공책의 실용적 혼종)을 사용했다. 거기에다 이빨의 숫자와 형태에 따라 포유류를, 부리와 발에 따라 조류를, 지느러미의 위치에 따라 어류를 정리했다. 지구상의 알려진 생명체에 관한 눈부신 총체로.
린나이우스가 학문적 진공 상태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연구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그의 모험적인 대규모 자료 수집 계획은 광범위한 기술 체계(제지업과 인쇄기, 서적 시장, 그리고 국제 우편통신 체계, 여러 무역회사의 선박과 통상 거류지)에도 의존했다. 이런 체계가 없었다면 그의 활동은 새로운 차원의 추상화와 일반화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수준까지 결코 이를 수 없었다. 린나이우스는(초서, 콜베르, 로도스의 미카엘처럼) 상업적으로 서로 연결된 세상에서 살았다. 이러한 상업적 연관성의 지속은 생명과학에서 그다음의 위대한 이론적 비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찰스 다윈(1809 ~1882) : 1831년 22세 때 왕립해군함 비글호에 고용 계약.
측량선의 지휘자인 젊은 장교 로버트 피츠로이 함장은 해군의 규율이나 서열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서로 대화할 동료 선원을 물색했다. 피츠로이와 다윈은 딱 떨어지는 상호보완적인 역할로 이루어진 우정어린 업무관계를 구축했다. 선장의 과업은 남아메리카 연안 해역의 지도를 작성하는 것이었고, 선객의 과업은 내륙의 지질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고용계약을 맺을 당시 다윈은 스물두 살. 전문지식의 부족함을 에너지와 열린 자세, 그리고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열의로 보완했다.
그러한 면모는 비글 호의 첫 번째 기항제인 베르데 제도 곶에서 발현했다.
다윈은 자신이 본 모든 것을 포켓 노트에 기술했다. 크기는 12*8CM에 불과하고, 빨간색 가죽 표지에 황동 걸쇠가 달린 수첩이었다. 3주 뒤 비글 호는 리우데자네이루를 향해 출항했다. 이곳에서 항해의 패턴 자체가 확립되었다. 즉, 피츠로이가 해안선을 순항하면서 현지 수역을 측량하고 지도를 만드는 동안, 다윈은 뭍에 올라 관찰하고 표본을 수집했다. 피츠로이가 일을 마치면 다윈이 배에 다시 합류했고, 두 사람은 다음 목적지로 출항하는 식이었다. 각종 화석, 암석 표본, 흥미로운 야생생물의 사체 등을 수집.
이렇게 최소한으로 접근한 덕분에 현장수첩 15권 하나하나에 모두 광범위하고 다양한 항목이 기재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다윈의 눈을 붙든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갔다. 다윈은 각 노트마다 그 수첩을 처음 사용한 장소의 지명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그가 노트에 붙인 종이 라벨을 보면 왕립해군함 비글호가 이동한 광폭의 여정을 알 수 있다. 베르데 곶, 리우, 부에노스아이레스, 포클랜드, 바이아블랑카, 산타페, 반다 오리엔탈, 포트디자이어, 발파라이소, 산티아고, 갈라파고스, 코킴보, 로피아포, 데스포블라도, 시드니. 노트는 기자수첩처럼 위쪽으로 펼쳐지는데, 다윈은 그 작은 지면(17*13cm)을 가로질러 밑줄과 대시, 약어를 빈번하게 사용하면서 기록을 남겼다.
다윈의 지질학적 임무는 고된 짧은 내륙여행 중에 작성된 바위층에 관한 상세한 묘사, 스케치, 도해가 숱하게 필요한 일이었다. 베르데곶 절벽 면은 시작은 소박했으나 경탄할 만한 수준의 성취를 이뤄낸 과제였다. 즉, 다윈의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산타페 노트‘에 기록된 안데스산맥의 황단면도로, 놀라우리만치 정확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바위들 가운데 대다수에서 화석이 산출되었는데, 영국에서는 탁송한 다윈의 표본이 도착했을 때 격렬한 논쟁을 촉발하게 된다.
’바이아블랑카 노트’에 다윈은 현존하는 지역 종과 분명히 관련되어 있는 고대 아르마딜로를 비롯한 풍부한 화석층의 발굴을 기록했다. 그는 유사한 퇴적층에서 말의 이빨을 발견하고는 의아해하다가 말들이 남아메리카에서 살다가 멸종된 뒤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자들과 함께 돌아왔으리라는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했다. ‘포클랜드 섬 노트’에는 그 시점에 유럽 바깥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데본기의 완족동물류를 발견한 일을 기록했는데, 모든 화석화된 유기체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졌다. 이노트에는 어떤 종이 명확하게 제한된 지역에 국한되어 있는 현상인 섬 고유성에 대한 다윈의 최초의 생각이 나와 있기도 하다. 모든 발견물이 지구의 역사와 종의 발달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하는 듯 했다.
유럽의 동물상과는 다른 남아메리카의 살아 있는 동물들은 다윈을 사로잡았다. 식량으로 쓰려고 총을 쏴서 죽인 레아의 사체를 통해 그는 날지 못하는 이 거대한 새가 실은 뚜렷이 구별되는 두 가지 종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내용을 ‘부에노스아이레스 노트’에 기술했고, 케임브리지로 보냈다.
비글호는 피츠로이의 책과 다윈의 책을 사이에 두고 최신 참고자료 도서관을 싣고 다녔고, 다윈은 현장수첩에 최소 19명에 이르는 저자들의 작품을 언급한다. 현장 노트를 가지고 서서히 작업을 진행해나가는 과정에서 다윈은 상인들이 원장에 옮겨 적을 때 분개장에 적힌 거래 내역을 선을 그어 지웠듯 수첩에 적힌 항목을 줄을 그어 지웠다. 그리고 현장 노트의 내용을 전부 옮기지 않았는데 다시 뭍으로 가야 할 경우에는 이미 취득한 정보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다른 노트를 가져갔다. 그러다 보니 노트끼리 서로 겹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독자가 기재된 항목을 시간순으로 읽으려면 이 노트에서 저 노트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
5년이나 집을 떠나 있을 줄은 몰랐던 다윈은 노트를 충분히 챙기지 못했기에 도중에 주기적으로 비축해둬야 했다. 그러다보니 평생 신경 써서 간수했던 노트 모음은 몇 가지 서로 다른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836년 10월 즈음, 비글호가 고국을 떠나 있은 지 5년 만에 팰머스의 부두에 들어갔을 때 다윈의 운기는 이미 상승세였다. 강연을 하고, 지질학, 조류학, 식물학, 동물학 표본의 목록을 작성하고 분류하는 작업에 더해 피츠로이와 공동 간행본으로 자신의 비글호 일지를 편집하고 출간하는 데 전념했다.
1837년 7월 그는 다른 노트를 쓰기 시작했다. ‘레드 노트’처럼 생각을 성찰하고 추측하고 따져 묻는 데 할애될 노트였다. 그가 ‘B’ 라고 라벨을 붙인 이 노트는 현재 다윈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을 최초로 생각해낸 공간으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그가 그린 ‘생명의 나무’ 도해 덕분이다. 공통조상에서 분화하는 다양한 종을 보여주는데, 다른 종이 생존하는 동안 어떤 종은 멸종한다.
간결한 도입부 ‘내 생각에는’ 은 결론보다 과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도해는 탐구 여정의 종점이 아니라 중간 기항지에 해당했다. 실제로 이 이론적 노트들은 산만하고 비선형적인 사고과정을 드러내 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다윈은 사례에 답하지 못하는 개념은 뭐든 거부했다. 다윈이 남아메리카에서 그랬듯 항상 노트를 손닿는 곳에 두는 습관을 유지했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미 ‘레드 노트’의 지면을 이론과 가설로 채웠던 다윈은 노트 지면 위에서 문제를 충분히 생각하는 데 익숙했다. 현장 노트는 즉각적인 비망록의 역할을 했고, 일지에는 살면서 겪은 사건들과 자신의 정서적 반응에 관한 서사를 구성했다. ‘레드 노트’와 학문적 노트들(변이 노트들)에서는 상상력을 마음껏 뛰놀게 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거리낌 없이 기록한 것이다.
다윈의 노트 작성 :
현장 노트에 방대한 양의 개략적인 메모를 한 다음 보다 조직적으로 정리된 문서로 옮겨서 분석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질문을 충분히 생각해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1839년 무렵 다윈이 ’E 노트’를 다 썼을 때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의 기본 틀이 상당 부분 개략적으로 이미 나와 있는 상태였죠‘ 라고 반 와이는 말한다.
변이 노트들은 과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에 속한다. 그리고 노트의 지적 잠재력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다윈의 이야기보다 더 분명한 사례는 있을 수 없다. 노트의 지면에 두서없이 급하게 메모를 휘갈겨 쓰면서 그는 현장 노트를 자신이 본 것을 관찰하고 따져 묻고 판단하도록 유도하는데 사용했다.
비글호에 승선했을 당시 다윈은 이러한 원재료들을 거의 2000쪽에 달하는 체계적인 과학적 기록, 그리고 기억을 환기하는 상세한 일기로 바꿔놓았다. 그러고 나서는 ’레드 노트‘와 그 뒤를 이은 노트들에서 훗날 항해 이후 10년 사이에 출간한 6권의 책을 통해 자신을 당대에 가장 높이 평가되는 과학자 중 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게 되는 주장과 사상들을 다듬어 나갔다.
게스너처럼 다윈도 그의 연구를 성서의 진리에 대한 공격으로 인지한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피츠로이 역시 1860년 [종의 기원에 관하여]가 출간되자 격렬하게 거부하면서, 그 책의 탄생이 자신이 직접 기여했다는 사실이 고통을 준다고 주장했다. 피츠로이도 비글호 항해 이후 사회적 성공을 누렸다. 탁월한 업적을 여럿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장차 기상청이 되는 정부 부처를 설립했고, 일기예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으며, 최초로 강풍경보를 발령했다. 1865년 스스로 생을 마감.
20장 불멸하는 한 가지 방법 : 다이어리(일기)와 저널, 1600년 ~ 현재
레츠 데이트 북 : 1812년. 실용적
104쪽짜리 이 수첩은 두 페이지 펼침면에 각각 근무 주간을 배치했는데 왼쪽 면은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오른쪽 면은 목요일에서 토요일까지고, 날짜가 기재되어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이 콘셉트는 대성공. 매년 그는 개선한 제품과 변형한 제품을 연거푸 추가하면서 데일리 다이어리의 재판을 찍었다. 레츠는 자신이 만든 데이트북이 그간 오래도록 연간 책력이 수집한 것과 같은 실용적인 정보의 타고난 보금자리가 되어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실용적인 자료를 넣기 시작했다. 배의 도착과 출발 시각을 결정하는 조석표는 특히 인기가 있다고 밝혀졌다.
여성용 다이어리 시장도 생겨났다. 1819년 레츠의 경쟁자 한 명이 ’가장 우아하고 편리한 여성용 포켓북‘을 내놓았다. 이 수첩은 유행에 민감한 도시 여성에게 유용함을 뽐냈다. 레츠는 고객들이 미래를 계획하는 데 자신의 발명품이 도움이 되도록 의도했다. 다이어리는 전망적 데이트북인 셈이었다. 레츠의 고객들은 그 다이어리가 최근의 사건들을 기록할 수 있는 회고적 일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그리하여 레츠 다이어리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일기 쓰기를 주류 활동으로 바꿔놓는 데 기여했다.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현존하는 업무일지는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파피루스 기록에 있다. 기원전 2562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메레르라는 이집트 관리가 팀을 꾸려 투라의 채석장에서 기자의 대 피라미드 건설현장까지 나일강을 따라 16km를 돌을 실어 나를 때다. 심하게 훼손된 파피루스 낱장 한 면에 그는 오가는 일련의 여정을 기록해놓았다. 메레르의 이름 말고는 아무런 개인정보가 없는 것으로 봐서 이 기록은 그가 모시는 주인들을 위한 보고서임이 분명했다. 이처럼 내성의 기록이 없다는 데서 이것이 전형적인 고대세계의 문서임이 드러난다.
레이디 앤 클리퍼드 : 1616년. 53세 때 작위와 재산을 되찾았다.
초기의 일기 작가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로 꼽히는 레이디 앤 클리퍼드는 자신이 벌이는 일과 그에 대한 자신의 정서적 반응이 모두 담긴 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클리퍼드(여성), 에어(서민), 새뮤얼 피프스(공무원), 에벌린(왕당파 학생)은 중요한 움직임의 선두에 있었다. 피렌체 사람들이 치발도네에, 비텐베르크 사람들이 슈탐부흐에 홀딱 빠졌듯 잉글랜드 사람들은 일기를 채택했다.
왜 그랬을까? 여러 요인이 결합하며 서로 반응을 일으켰다. 즉, 사회적 이념적 긴장, 높은 식자율, 점증하는 사회적 유동성과 지위 불안이 모두 일조했다. 전반적으로 기록물이 급증한 것도 한 가지 요소였을 것. 원장, 비망록, 여행일지가 모두 이 시기에 급속도로 확산했다. 그런데 노트가 피렌체나 베네치아에 도입되었을 때는 일기 쓰기가 뒤따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체로 1640년대 종교 갈등과 내전 같은 잉글랜드를 뒤흔든 격변기에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1812년 존 레츠가 다이어리를 제작하기 시작할 당시에는 두 개의 시장이 존재했다. 즉, 미래를 효율적으로 계획하고자 하는 사업가들, 그리고 가까운 과거에 관한 서사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일기가 제공하는 기본 틀의 진가를 알아본, 대체로 여성인 일기 작성자들이다. 이 두 번째 시장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레츠와 그의 경쟁자들은 기막힌 타이밍을 누렸다. 레츠의 혁신적인 사업의 초창기는 장차 독자들과 필자들이 일기를 보는 관점을 바꿔놓게 되는 두 가지 출판물이 나온 시기와 겹쳤던 것이다. 존 에벌린의 일기는 1818년에 출간되었고 새뮤얼 피프스의 일기는 1825년에 발간되었다. 두 권 다 재판을 찍었고, 야심찬 일기 작가들에게 훌륭한 모델을 제공했다. 모방자들이 저마다 펜을 집어 들었다. 19세기는 평생을 가는 일기의 시대가 되었다.
일기 쓰기 습관은 이미 완전히 국제적인 것이 되어 있었다. 1939년 전쟁이 발발하자 종이와 펜을 들고 기록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일기 작가 중 다수는 유대인이었다. 나치박해의 매 단계마다 희생자들은 펜을 들었다. 이 광기가 끝났을 때 증언이 되리라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빅토어 클렘페러 : 유대인. 1932년에 일기의 성격이 달라졌다. 나치 국가가 유대인 시민들을 압박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면서부터다. 클렘페러도 그 유대인 시민에 속했다. 그는 점증된 억압을 13년 동안 기록했다.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아내가 아리아인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 드레스텐의 유대인 인구가 강제추방에 따라 점차 줄어드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게슈타포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그의 아내는 클렘페러의 기록을 어느 아리아인 친구에게 몰래 전달했고 일기는 살아남았다. 1960년대에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된 그의 일기는 나치 시대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21장 경찰수첩, 1829 ~ 현재
범죄 현장. 경찰은 수첩을 들고 등장하고, 자세히 사정을 기록하고, 영어 대문자로 이루어진 메모를 동반하는 체계적인 질문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자수첩처럼 위쪽으로 열리는 검정색 경찰수첩은 경찰봉과 호루라기만큼이나 상징적인 범죄 해결의 결정적 장치에 속하는 듯 보였다. 실제로도 여러 해 동안 순찰 경관들은 이 세 가지 물건을 모두 지참한 상태에서 거리로 파견되었다.
최초의 경찰수첩은 수사가 아니라 복종을 용이하게 하는 물건이었다. 경찰관들에 대한 경찰력의 통제력을 구현했다. 그러나 순경들은 어디든 수첩을 들고 다녀야 하다보니 이차적인 기능이 불가피하게 발생했는데, 윌리엄스는 이를 ’내가 본 중요한 것들‘로 특징지었다. 실제로 우연히 어떤 범죄현장 내지 그 이후의 상황 또는 평소와 다른 뭔가 특이한 사항을 발견하면, 순경은 으레 상세한 내용을 기록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고는 경찰서로 복귀하자마자 사건발생기록부, 즉 각종 사건에 관한 주된 기록물의 역할을 한 그보다 큰 대장에 세부 내역을 옮길 터였다.
이때도 역시 새로운 항목이 기재될 때마다 경감이 일일이 확인했기에, 결과적으로 사건기록부는 지휘 계통의 상부로 올라가는 추가 보고의 기준이 되었다. 순경의 수첩은 경찰 체계가 발전함에 따라 점점 커진 관료 체제의 외곽에서 궤도를 그리며 돌았지만, 애초에 데이터를 조직 안으로 보내는, 내부로 향하는 도구였다. 경찰관들의 현장기록이 장차 수사에서 중심이 되는 중요성을 띠게 될 것이 분명해졌다. 그들은 목격자들이 진술한 내용을 기록하고 범죄현장을 묘사했으며 차량 번호판 같은 세부사항을 보존했다. 각종 위법행위와 체포 사례로 가득한 19세기와 20세기 초의 현존하는 사례들은 역사학자들에게 풍성한 정보원이다.
현재 영국 경찰들은 디지털 기기에 기록을 남기고, 면담과 심문 과정은 녹화되며, 신체에 부착하는 소형 녹화 장치인 보디캠으로 일반 국민과의 접촉 상황을 보존한다. 뉴욕에서는 2020년에 메모첩이 아이폰 앱으로 대체되었다.
22장 작가들의 노트, 1894 ~ 현재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유럽의 작가들은 이미 600년 동안 노트를 사용해 오면서 장르를 잇달아 발명하거나 재발명했다. 에세이, 여행기, 토착어 시, 희곡 등등.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많은 노트가 보존되었고, 빅토리아시대나 20세기의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참조할 만한 노트는 숱하게 남았다.
작가들이 노트를 사용하는 방법이 매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첫 번째로, 거의 모든 작가들은 습관적으로 노트를 당장의 직접적인 관찰에 사용한다. 즉, 나중에 활용할 요량으로 각종 단어, 문장, 장면, 아이디어, 일시적 순간들을 포착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일부는 초안을 작성하고 수정하는 데 노트를 사용한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어떤 책에 사용된 아이디어를 줄을 그어 지운 것은 대변과 차변을 맞추는 과정에서 줄을 그어 지우는 부기 작성 관행을 고대로 반복하는 셈이다.
그런데 제임스, 하이스미스, 크리스티 같은 작가들은 노트를 또 다른 세 번째 방식으로도 사용했다. 다름 아닌, 집필하는 바로 그때에 본인이 쓰고 있는 글에 대해 쓰는 것이다. 항상 존재하는 백지를 공명판 삼아 자기 작품과의 대화에 돌입하여 사려 깊은 판단을 하고, 그것을 정제하여 완성품을 개선할 수 있었다. 말과 글을 다루는 일을 하는 경우 노트는 매체일 수 있다.
23장 저장과 요리법 : 레시피북, 1639 ~ 현재
앤드리아 응우옌 : 오렌지색 노트 : 어머니의 요리법 노트
어머니 응우옌 띠 뚜옛(클라라 응우옌)은 미국국제개발처 근무, 아버지 꾸옥 호앙(게이브리얼) 남베트남 정부의 군정장관. 1975년 4월 베트남 전쟁 끝. 다섯 아이와 새로운 삶을 살 준비. 클라라는 공책에 요리법을 모으기 시작. 미국에서 베트남 식당을 열어 가족을 부양할 계획.
클라라는 오렌지색 노트에 ’엄마의 가정생활 책‘이라는 이름을 짓고 요리법을 옮겨 적었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식민지시대의 요리법이라든가, 매일 요리하기에는 품이 너무 많이 드는 음식을 비롯해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을 수집하는 데 집중.(월병) 클라라는 음식과 정찬 경험 두 가지를 모두 중시.
게이브리얼은 미국으로 빠져나갈 통로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여덟 식구가 작은 여행가방 두 개만 챙겨서 이동했다. 요리노트는 가방에 담겨 이동했다. 캘리포니아에 도착. 클라라는 재봉사, 게이브리얼은 교사 자리를 얻어서 일하게 되었다.
클라라의 오렌지색 노트는 시간이 흐르면서 내용물도 다시 한번 진화했다. 응우옌 가족이 로스엔젤레스에서 중국 식료품점을 한 곳 발견하면서 베트남 요리법이 복귀한 것이다. 클라라의 막내딸 앤드리아도 대학에서 경영학과 중국어를 공부했다. 20대 중반 무렵 요리법에 관한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다고 결심했다. 베트남 요리법으로 자신이 아는 그 맛을 미국의 독자들에게 가져다주기 위함이다.
첫 번째 저서인 [베트남 주방으로]가 세상에 나왔을 때, 이 책은 다수의 수상 후보로 지명되었고, 엔드리아가 이름을 떨칠 수 있게 해주었다. 클라라의 노트는 앤드리아가 물려받은 상태였다. 미국의 요리사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된 설명을 덧붙인 ’가정생활 책‘에서 가져온 요리법들을 비롯해 두부, 반미, 퍼(쌀국수) 같은 주제를 다룬 6권의 요리책이 더 나왔다.
앤드리아는 어머니로부터 음식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노트를 쓰는 습관 역시 물려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강박적으로 새 노트를 구입한다고 고백한다. 모든 요리법이 수기로 새로운 초안에 기록된 수정이나 개선 사항에 따라 다양한 버전을 거치다 보니, 책을 쓸 때마다 여러 권의 노트를 채우게 된다. 이 노트들을 통해 어떤 책 또는 요리법이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거슬러 올라가서 추적할 수 있다. 클라라는 노트를 순전히 비망록으로 사용한 데 반해, 앤드리아는 노트들을 지면에서 정제하고, 발전시키고, 생각하는 데 활용한다. 노트들은 창조성, 직업적 자부심 그리고 고국의 음식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을 상징한다.
24장 자신을 표현하라 : 자기돌봄 저널링, 1968 ~ 현재
1968년 제이미 페니베이커 :
심리학 교과서를 입수했고, 그 과목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하여 현대 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 경력으로 꼽히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전환점이 된 그 결정적인 순간 이후로 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우리가 신체적 자아를 어떻게 인지하는지였다. 우리의 감정, 심박동수, 배고픔 등.
1977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페니베이커는 이 주제에 관한 책을 쓰는 작업에 착수했다. 학부생으로 구성된 팀과 함께 연구를 진행해나가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종류를 불문하고 자신에게 어떤 증상이 발생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을 만한 요인을 묻는 설문지를 고안했다. 사람들이 속상한 경험에 대해 글을 쓰면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표현적 글쓰기는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 어떤 주제가 정서적 트라우마를 유발한다고 간주할지 결정하는 것은 글 쓰는 이의 소관이다. 어떤 식이든 글쓰기의 구조는 참가자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그렇기는 해도, 만약 참가자들이 글을 쓰면서 트라우마적 경험에 대한 이점을 확인하거나, 자신만의 고유한 대응 전략을 만들어내는 경우, 더 많은 혜택을 누릴 개연성이 커진다. 글쓰기에서 통찰의 언어(이제 나는 ```을 깨닫는다)나 이유의 언어(한 가지 결과는 ```였다)를 사용하는 것은 감정을 처리했으니 앞으로는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되리라는 신호다.
만약 새로운 트라우마를 겪게 되면, 그것에 대한 글을 언제 쓰기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곧바로 쓰기보다는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한두달이 지난 시점이 가장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글을 하루만에 완성하건, 며칠 또는 몇 주에 걸쳐 완성하건 상관 없다.
트라우마를 언어적으로 처리할 때 우리는 감정에 이름과 꼬리표를 붙여야 한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결과적으로 삶의 만족도를 향상시킨다고 알려졌다. A – D 감정이론이라고 하는 이 이론에 따르면 아날로그 감정(비언어적이고 불분명하며 정리하기 어렵고 부정확하다)이 디지털(언어적이고 인지적이며 정리하기 쉽다) 말모듬으로 바뀌게 된다.
브로드벤트 : 글쓰기가 보다 정서적인 것에서 보다 인지적인 것으로 가는 거죠.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 간의 차이를 신경 써서 확인할수록 그 감정들을 이해하고, 장래에 효과적으로 행동할 개연성이 커진다. 우리의 경험, 그리고 그 경험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일관성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하는(지면이 더 용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해 표현적으로 글을 쓸 때, 사람들은 그것을 남은 인생의 맥락 안에 두게 되고, 그러면서 그것이 지니는 영향력을 줄이게 됩니다.
25장 파란색, 초록색, 빨간색, 노란색 : 선거운동, 1977 ~ 2003년 플로리다 주
유명한 노트지기 : 토머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 밥 그레이엄.
밥 그레이엄(D 로버트 그레이엄 : 본명) : 1977년 당시 플로리다 주지사 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사 지지율이 1%에 머물렀던 밥 그리이엄은 직업현장 방문을 본인 선거운동의 기반으로 채택했을 때 회의적인 반응에 직면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의 대응은 전심전력이었다. 가급적 오랜 시간 동안 일할 수 있기 위해서. 선거운동 팀도 그레이엄의 이 모든 기획을 수긍했다. 그레이엄은 투표일 전까지 1년 반 사이에 무려 100일을 꽉 채워서 플로리다 주의 업무현장 100곳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자들은 교실, 게잡이 배, 제지소를 두루 따라다니면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키워나갔다. 9개월 뒤 지지율이 1%에서 8%로 올랐다. 민주당 경선 승리. 주지사 승리.
그레이엄은 이목 끌기용 선거유세 활동으로 이 계획을 시작했지만, 경험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진실했다. 그리고 허물없이 기꺼이 자리바꿈에 임하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한시적 동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그가 처리해야 하는 새로운 정보의 양(이름, 숫자, 사건)이 엄청나다 보니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이 기획과 관련하여 책을 쓰려고 생각했기에 모든 정보를 기억하고자 했다. 부친의 사례가 해법으로 제시했다. 낙농업자로 땅이 가산의 근간을 이루었던 아버지 그레이엄은 수시로 수첩을 꺼내 수리해야 할 울타리나 치료해야 할 소를 기록하곤 했다. 실제로 농민들은 대부분 비슷한 노트를 사용했다.
밥 그레이엄은 노트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작성한 메모는 모든 것을 아울렀다. 동료들의 이름, 그들이 보유한 기술이나 자질에 관한 상세한 내용, 그들의 임무, 그날 있었던 일의 정확한 시각, 시간이 흐르면서 이 기록들은 엄청나게 유용한 자원이 되었다. 그레이엄은 아주 적은 돈으로 어려운 처지에서 살아가는 플로리다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공감하게 되었다. 아들 그레이엄은 매일 노트를 작성하는, 이 습관은 그가 새로 맡은 자리에서 나오는 그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일들을 운용해나가는 데 보탬이 되는 이점이 있었다.
그레이엄은 노트 두 권을 갖고 다녔다. 현재 작성 중인 노트 한 권과 이어서 쓸 노트 한 권. 각각을 곧바로 분간할 수 있도록 그는 단순한 순환 체계를 고안했다. 그러니까 파란색 노트 뒤에 초록색 노트, 그 뒤에 빨간색, 빨간색 뒤에 노란색 노트.
끊임없는 메모 습관은 조직적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그레이엄의 참모들은 그 노트들이 ’직무와 관련한 기억을 환기하는‘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도움이 되었고, 문자 그대로 수백 가지의 추구할 만한 아이디어를 산출했다고 증언했다. 그레이엄은 일을 시작하거나, 사람들을 만나서 인사하는 자리에 가거나, 선거유세차 잠깐 들르는 곳에 가게 될 때마다 대화를 나누는 모든 사람에게 지금 쓰고 있는 노트를 건네면서 이름과 주소를 적어달라고 청했다. 몇 해에 걸쳐 수천 명이 이런 식으로 그의 수첩에 인적사항을 남겼고, 그레이엄이 이름을 가져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며칠 뒤에 만나서 반가웠다는 얘기를 전하는 그의 친서를 받게 되었다. 이 습관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알붐 아미코룸을 고대로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주지사 선거에서 두 차례, 상원의원 선거에서 세 차례 승리한 것이다. 그레이엄의 노트는 두드러질 정도로 효과적인 정당조직의 결정적 톱니였다.게다가 그레이엄은 선거운동을 펼칠 때만큼이나 정무도 효과적으로 보았다. 주지사로 8년 동안 재임한 시기에 플로리다 주의 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그가 자리에서 떠날 때 그의 지지율은 80%를 넘었다. 밥 그레이엄은 정치적 사다리의 다음 단계, 대선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2008년 은퇴 선언. 그의 노트 4000여권은 플로리다 대학교로 갔다.
26장 사소하지 않은 : 기후일지, 1859년대 ~ 현재
마이클 퍼브스 :
마이클 퍼브스는 20여 년 동안 일주일에 30~40시간을 들여 오래 전에 항해를 중단한 선박들에 관한 노트를 연구해왔다. 20년 동안 캐나다 최북단 유콘에서 기상학자로 일했는데, 그곳은 주변 환경이 경각심을 일깨웠을 지역이었다. 유콘을 떠나기 전 그는 기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보는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렇게해서 발견된 사실들은 아찔했다. 바로, 기상 상태가 지구 위로 600 내지 700km를 이미 움직여갔다는 사실이었다. 북쪽으로의 대이동 2010년.
올드웨더프로젝트 :
현재 기후변화가 어떤 식으로 발생하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과거에 기후가 어땠는지 알아야 한다. 달리 말하면, 실로 엄청난 기상 측정 자료들을 기온, 기압, 습도, 바람, 운량, 강수량 등으로 구성된 일종의 논리 정연한 전 지구적 그림으로 조합한다는 뜻이다.
항해일지 : 19세기는 역사상 최초로 선박들이 망망대해에서 위치를 정확하게 지도에 표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기와 바다의 상태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만약 과학이 그런 미가공 수치들을 낡아가는 지면에서 추출하여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할 수 있다면, 기존의 기후모델에 유의미하게 보탬이 될 것이다. 올드웨더프로젝트는 필요한 인력을 크라우드소싱 하기로 했다. 기후과학을 진전시키는 데 퍼브스처럼 공공심을 지닌 시민들의 선의를 활용하는 것이다.
10년이 흘러 이제 올드웨더 팀은 연구조사 업무를 기후학자들이 특별 관심 지역을 고심해서 다루는 데 도움을 주는 구체적이고 선별적인 프로젝트로 구조화해 놓았다. 그중 첫 번째 프로젝트인 올드웨더아크틱은 퍼브스에게 까다로운 도전과제를 주었다.
케빈 우드 : 고급 선원이었다가 미국해양대기관리처, NOAA 소속 기후사학자가 됨.
케빈 우드는 당시 빙하 범위에 관한 연구에 한창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기후모델들이 역사적으로 해빙의 위치를 얼마나 정확하게 추정하고 있는지, 그리고 해빙 형성의 패턴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야 했다. 퍼브스는 최초로 받은 요청사항을 기억하고 있다. USS 배어호 1920 : 이 배가 언제 어디서 빙하를 보는지, 그리고 그 전후 이틀간의 기상 상태를 알려주기 바랍니다.
퍼브스는 자료를 수집했고, 우드는 기후모델에서 산출된 빙하의 위치와 베어 호가 실제로 발견한 것을 비교했다. 결과의 조짐이 좋아 보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좀 더 많은 일지를 가지고 시도해 보았고, 우드는 규모를 확대해보자고 제안했다. 빙하를 목격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뿐 아니라, 항해의 모든 기상 상황까지 추가하여 더욱더 많은 항해일지를 전사하자고 말이다. 그는 항해일지의 디지털 스캔 작업에 필요한 돈을 마련했고, 퍼브스는 전사 업무를 해줄 자원자들을 선임했다. 그러고서 두 사람은 작업에 착수하여 그린란드와 캐나다 북부 주변의 동결 해역에서 운항한 연안경비함, 포경선, 쇄빙선을 비롯한 여러 선박을 포괄하는 188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이르는 엄청난 시계열(평균) 자료를 완성해냈다.
19세기에는 각국 해군의 항해일지가 갈수록 공식적이고 상세해졌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OWP에 유용해졌다. 1시간마다 속도와 진행방향을 측정해서 기록하는 일은 이제 표준 규범이 되었고, 함장들은 7~10회 정도로 매 시간마다 기상을 측정하도록 권유 받았는데, 대체로 당국에 새로운 자료를 보내는 대신 새로운 관측 장비를 받았다. OWP에서 전사한 가장 오래된 항해일지는 185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최근에 전사한 것은 1955년에 나온 항해일지로, 다름 아닌 전 세계의 전자식 기상관측소들이 자동으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한 때였다.
올드웨더의 작업절차는 시간이 흐르면서 진화해왔다. NOAA인 과학적 파트너가 관심 시기나 지역을 확인한다. 관련 있는 항해일지가 한 쪽씩 스캔 작업을 통해 디지털화된 뒤 전사 작업을 할 자원자들에게 배부된다. 이들은 기발한 스프레드시트를 사용하는데, 항해일지의 지면 이미지 위에 그들이 채워야 하는 셀로 이루어진 격자 선이 덧씌워져 있어서 작업 속도는 올라가고 오류 발생 비율은 줄어든다.
일지의 전사가 완료되면 작업자들은 완성된 스프레드시트를 퍼브스와 그의 동료들에게 다시 보낸다. 그러면 퍼브스 등은 전사된 데이터를 취합하여 맞춰보면서 품질관리 확인 작업을 한 뒤 콜로라도 주의 NOAA로 보낸다. NOAA는 결국 전사한 자료를 기후모델링 슈퍼컴퓨터가 파악할 만한 형태로 변환한 다음 이 정보를 자기네 기후 데이터베이스와 포괄적국제해양대기데이터세트로 보낸다. 이 거대한 데이터세트에 추가되는 모든 스프레드시트는 세계 기후에 관한 우리의 그림에 약간의 디테일을 더한다.
포경선의 데이터는 특히나 가치가 있을 수 있다. 해빙의 끝자락에서 먹이생활을 하는 북극고래를 잡았기에 그 항해일지를 통해 해빙이 남쪽으로 어느 정도까지 펼쳐져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포경선들은 일지를 훨씬 덜 체계적으로 작성했다.
올드웨더 팀의 활동은 구체적으로 어떤 성과를 이루었을까? 이들이 작업한 데이터는 주요한 기후 복원 5건에 반영되었다. 연구자들이 활용할 만한 더 나은 자료를 제공한 것이다. 올드웨더 아크틱이 해빙 전문가들이 사용한 모델을 입증한 덕분에 우리는 지구 가열화로 인해 그동안 해빙이 얼마나 녹았는지 아주 확실하게 정확히 알고 있다. 또 수집된 바람과 기압계의 측정치 덕분에 역사적인 허리케인을 오늘날에 부는 허리케인과 비교할 수 있다.
올드웨더 팀이 그동안 수십만 쪽에 달하는 항해 일지 자료를 전사하기는 했지만, 수백 개의 데이터 포인트로 이용 가능한 것을 간신히 다룬 정도였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기록 보관소 한 곳만 해도 700미터에 달하는 선반 공간을 차지하고, 뉴베드퍼드 고래잡이박물관은 포경선 장부 수만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스페인, 독일, 영국 등지의 해군은 정보가 거의 입력되지 않은 상태였다. 올드웨더는 자원봉사자에 의해 굴러가는 최대 규모의 프로젝트로, 열정적인 아마추어들이 전 세계에서 정보를 입력해서 보내고, 19세기의 아날로그 글씨를 중요한 데이터로 탈바꿈시킨다.
27장 주의력 결핍 : 블렛 저널링, 2010년 브루클린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진단을 받은 라이더 캐롤 : 학교를 참고 다닐 만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절실한 필요에 직면한 어린 라이더는 자신만의 해법을 찾아낸다. 즉, 목록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문서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중요 항목 앞에 붙이는 그래픽 문자인 불렛 포인트들이 지면을 채웠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는 여러 개념을 가급적 효율적으로 간결하게 바꿔 씀으로써 주제에 집중하도록 정신을 단련하여 수업내용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메모를 알아보기 쉽게 만들기 위해 그는 대문자로 쓰는 훈련을 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어서 결과적으로 훨씬 더 집중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라이더는 백지의 가능성을 받아들여 고등학교 과정을 통과해나가는 동안 더욱더 정교하게 목록을 작성했다. 노트에 낙서를 끼적이는 것이 실제로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래서 나의 예술적 성향을 필기 방식에 적용해 캘리그래피를 시작하게 됐어요. 그는 더 짤막하고 덜 성찰적인 내용을 시각적으로 매력 있는 레이아웃으로 기재하는 것이 유지하기도 참조하기도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마다 고유한 블렛 심벌이 있는 4가지 범주를 사용하여 목록에 적힌 항목을 관리하는 방식을 점차 발전시켜나갔다.
대학에 가서 미술과 문예창작을 복수전공 : 복잡한 정보를 독자들이 곧바로 소화할 수 있게끔 전달하기 위해 그래픽디자이너들이 사용하는 그리드와 레이아웃, 스타일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이러한 개념들 역시 그의 노트 레이아웃에 영향을 미쳤다. 라이더는 각종 이벤트, 아이디어, 의견, 그 밖의 유용한 생각들을 자신이 해야 하거나 이미 완료한 일과 동일한 일일 목록에 기록하는 다음과 같은 실천법을 개발했다. 일지는 이제 플래너(일정계획표)일 뿐만 아니라, 일기(간결한 일기)와도 비슷해졌다. 모든 블렛 포인트마다 이렇게 자문하곤 했던 것이다. 필수적인가? 중요한가? 만약 두 질문에 대한 답이 모두 아니다인 경우에는 새 목록으로 옮기지 않는 식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지도 못한 이점들이 이 체계에서 생겨났다. 라이더의 노트들이 비망록을 훨씬 넘어서는 정체성을 드러내면서이다. 교실에서 필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처음에 본 것보다 노트에는 훨씬 더 많은 쓰임새가 있다는 사실을요. 그렇게 해서 노트를 실제로 생각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했죠. 그는 생각을 외재화하는 것의 힘을 이미 발견한 터였다.
ADHD에 시달리는 환자의 흩날리고 헝크러진 사고과정에 대한 대응으로 표현한다. 내 생각을 처리하고 그것을 다른 곳에 두는 도구를 갖고 있을 때 사고과정이 훨씬 더 향상돼요. 그러니까 기록은 내가 선천적으로 갖지 못할, 나의 생각과 소통하는 기회죠.
라이더의 노트는 무한하게 응용되는 하나의 플랫폼이 되었다. 물론 이는 지난 몇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직접 발견해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ADHD를 관리하는 방법을 신중히 탐색하다 보니 라이더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그것에 대해 더 오랫동안 더 치열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보다 앞선 피렌체의 회계사,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근세의 과학자 들처럼 라이더 역시 노트를 정신에 필요한 중대한 도구, 즉 무형의 생각을 보다 용이하게 조작될 수 있는 더욱 구체적이고 명확한 글로 표현된 개념으로 바꿔놓는 수단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뛰어난 커리어, 창조적 성공, 만족스러운 스타트업 창업에도 불구하고 라이더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자신의 일지가 대단히 효과적으로 결집시킨 효율성과 에너지, 창의성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서 부적절하게 이용되었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그는 이 위기로 인해 2000년대에 마음챙김 사고방식이 주류가 된 순간과 이어지기도 했다.
라이더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 행위가 단기적으로 스트레스를 완화할 뿐 아니라,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고무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라이더가 언급한 대로라면 개인적 통찰을 삼각 측량하는 것, 즉 당신의 행동과 경험을 상호 연관시키는 것, 당신의 통찰을 기록하는 것, 자기를 훨씬 더 인식하게 되는 깃이다. 또 하나의 전형적인 밀레니얼 서사 양식이다. 다름 아닌 거듭되는 진화, 자기계발의 서사, 다시 말해 성장 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