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장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환자일기, 1952 ~ 현재
집중치료 : 1952년 코펜하겐에서 치명적인 폴리오(척수성 소아마비)가 발생한 데 따른 대응으로 발명되었다. 전후 영양실조로 약해진 인구 사이에서 이 병이 맹위를 떨치자 환자 수백 명(절반의 아이들)이 몸에서 나온 분비물에 숨이 막히거나 압도당한 상태로 코펜하겐의 블레그담병원에 나타났다. 몇 안 되는 육중한 철폐 인공호흡기만을 구비해놓고 있었던 병원 측은 절박한 사람들이 이렇듯 밀어닥치자 속수무책이었다. 새로 도착한 환자 8명 중 7명이 죽어나가는 상황이었다. 8월 27일에 열린 회의에서 마취 전문의 비외른 입센은 과격한 중재술을 제안했다. 바로 응급 기관절개를 통해 환자들에게 산소를 공급하자는 것이었다. 이 시술을 통해 폐가 스스로 공기를 넣고 빼는 수고 없이, 환자의 폐에 산소가 곧장 전달될 터였다.
첫 번째 환자는 비비 에베르트라는 열두 살배기 소녀였다. 비비에게 진정제인 소듐 티오펜탈을 다량 투여하고, 기관에 작은 구멍을 낸 뒤 관을 삽입해 고무 벌브로 공기가 곧장 폐로 흘러들어가게 했다. 비비가 회복되기 시작하자 입센이 이끄는 팀은 병동 전체에 이 시술법을 공개했다. 봄이 되었을 무렵 폴리오 환자 10명 중 9명이 생존했다.
입센은 이듬해에 세계 최초로 집중치료 병동(ICU)을 개설했다. ICU의 각 병상은 종합 생명유지 장치의 한복판에 놓여 환자의 몸이 호흡, 식음, 각성에 대한 부담 없이 모든 에너지를 병마와 싸우거나 트라우마에서 회복하는 데 쓸 수 있도록 했다. 이 개념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현대 의학을 구성하는 핵심요소가 되었다. 입센의 혁신책은 많은 생명을 구했다.
크리스티나 존스 : 전직 ICU 간호사로, 생화학과 심리치료 분야의 박사학위와 각종 자격증을 보유한 그는 환자가 병원에서 받는 돌봄과 회복으로 가는 길이 야기할 수 있는 어려움을 잘 아는 전문가다. 1990년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존스는 ICU에 있었던 환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머지사이드의 위스턴병원에 외래환자 전문 클리닉을 병원에 설립했다. 그가 본 환자들은 혼수상태에 빠진 동안 잠시 의식을 잃었을 뿐 아니라 섬망, 망상기억, 환각, 편집망상 증세를 호소했다.
카그라 망상 :
카그라 망상에 시달리면, 뇌가 익숙한 시각 자극(얼굴)을 그 뒤에 있는 그 사람에 관한 정서적 기억과 연결 짓지 못하게 된다. 가족과 친척들을 가게의 마네킹이나 밀랍인형으로 여기는 환자들도 있다. 가장 흔한 망상은 간호사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거에요. 산호호흡기에 의지했던 환자의 무려 80%가 그 같은 트라우마적인 기억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온 연구조사도 있다.
환각은 대체로 바삐 돌아가는 병원 환경이라는 이례적인 자극에 의해 발생한다. 게다가 얼굴을 모조리 덮는 코로나 병동의 보호복은 외계인 유괴라는 카그라 증후군과 비슷한 유형의 망상에 강력한 소재를 제공한다. 한 전문의는 진정제가 투여된 상태의 환자들에 관해 그들의 무언의 마치 편안하고 평온한 듯한 모습은 수면 상태로 오인될 수 있다. 사실 그들의 뇌는 점화된 상태인 때이다.
환자일기 : 공감
덴마크에서 유래한 발상. 1970년대 덴마크 간호사들은 환자들이 집중 치료를 받는 것과 더불어 집중치료에서 회복되기도 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환자들이 경험을 이해하도록 돕는 한 가지 방법으로 환자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즉 날마다 간호사가 환자들이 무엇을 했는지,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들이 어떠한지 알려주는 일기를 쓰는 것이다. 우리는 환자의 입장이 되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가 생각하기에 환자가 지금 그 일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 것 같은지 묘사하려고 노력한다. 이 일기에 으뜸이 되는 기조는 공감이다.
간호사들은 그날의 일기를 5분 정도를 쓴다. 회복되어 ICU에서 나갈 때 환자는 가지고 갈 일기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일기를 통해 파편화된 기억을 이어 맞추고, 몸에 생긴 변화를 설명하고, 자신의 병과 치료에 관한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다. 로즌이 혼수상태와 약물, 질병이 축적해놓은 ’의식의 층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파나갈 수 있는 환자 – 독자는 망상을 해독하여 본인의 생생한 기억과는 정반대로 그들을 돌본 간호사들이 실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얼마 안 있어 환자의 가족들도 이 일기 쓰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즉, 병원을 찾은 가족과 친척들은 전문가들이 쓴 것 옆에 나란히 자신들의 관찰내용과 생각을 남겨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를 통해 그 일기에 또 다른 차원이 부여되면서, 간호진과 환자의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직접적이고 비공식적인 소통 수단이 되었다.
스웨덴의 전문의 칼 베크만은 환자의 사진을 추가해서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새로 생긴 흉터의 연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다른 의사는 이러한 활동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규정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주기 위해서. 라고.
환자일기는 심리적 회복에 필수적인 부분이 될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험에 관한 수많은 연구가 환자의 삶의 질 회복, 특히 우울증의 시작을 예방하는 데 환자일기가 유효함을 증명했다. 그리하여 크리스티나 존스는 베크만이 그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자마자 그것을 머지사이드의 동료들에게 소개하는 데 필요한 보조금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관행이 금새 퍼지지 않았다. 환자일기는 의료 기록이나 간호 보고서보다 형식이 훨씬 비격식적이고 환자에게 직접적으로 쓰는 것이고요. 위스턴병원 화상센터 환자들의 사진을 넣는 것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가장 처음 자신의 일기를 보게 된 환자가 자기 사진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기에 의료진은 모든 환자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요청하는 경우 보여주게 되었다.
존스는 경험한 결과를 취합정리하면서 환자에 대한 일기 작성이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발생 확률을 60% 이상 낮추고, 공황발작, 플래시백(감정의 격렬함), 악몽을 예방하며, 불안과 우울을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게다가 필수용품인 백지 노트는 비용이 적게 들었다. 집중치료실들이 하나둘씩 이 관행을 채택했다.
마이클 로즌 : 시인. 방송인. 코로나19로 집중치료 받음.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1년이 지났을 때 화상채팅으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시련을 겪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은 목의 맨 아래쪽에 있는 거의 눈에 띠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기관절개 흉터뿐이었다. 그는 회복 병동에서 경계 상태였던 기간에 처음으로 그 일기의 존재에 관해 들었다고 했다. 의식이 돌아오고 나서 3주가 넘도록 그곳에 있었는데, 아내 에마가 그 일기를 받아서 남편이 발견하도록 밖에 내놓았다.
초반에 양가감정이 드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대다수는 크나큰 고통과 트라우마로 점철된 현장으로 돌아가기를 꺼린다. 로즌은 심지어 지금도 가끔씩 그 일기를 볼 엄두가 나지 않을 때가 있다고 인정한다. 아프다, 맛이 좋다 라는 감각 수준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렸다. 로즌은 묻는 질문뿐 아니라, 묻지 않은 두세 가지 더욱 흥미로운 질문에도 답하며 길고 자세한 문장들을 펼쳐놓는다. 노트를 봤을 때, 모든 단어가 보석, 보배 임을 알게 되었다.
노트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첫째로, 그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에 생긴 틈을 메우는 그 노트의 가치를 고찰하면서 사건을 정리하고자 하는 우리의 근본적인 욕구를 짚는다. 우리 인간들은 끊임없이 상황을 구체화하여 이해하고자 해요. 당신도 지금 그러고 있죠. 노트들을 이해하려고, 의식적으로 내 정신이 소멸되고 해체되어 사라지는 거대한 소실의 순간을 꽉 붙들려고 노력 중이에요. 이 기록들은 징검돌이에요. 늪지에 놓인 바위들이죠. 라고 그는 결론 내린다. 로즌은 회복기에서 벗어나자 환자일기의 또 다른 측면을 더욱 곱씹어 생각하게 되었다. 창안자들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측면을. 그는 보물, 즉 시련을 겪는 동안 자신을 보살핀 사람들의 이타성과 연민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유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상시에는 ICU의 간호사 한 명이 환자 한 명을 맡아서 돌본다. 로즌이 있었던 과밀한 코로나 병동에서는 그 비율이 간호사 한 명당 환자 네 명으로 뛰어올랐고, 병상의 숫자도 두 배로 늘었다. 그리하여 그다지 관련성이 없는 지식과 기술을 가진 이들까지 도우러 와주었다. 물리치료사들, 언어치료사들, 다른 분과의 간호사들, 치위생사, 한 명 심지어 보건교사 한 명까지. 다들 최전선에 있으면서 환자들을 간호하는 데 열중하고, 긴 야간근무가 끝날 때면 매일 아침마다 환자들의 일기에 최신 정보를 업데이트했다. 로즌은 이들의 글쓰기를 그 자체로 돌봄 행위라고 표현한다.
교육훈련을 받고 전문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인데, 거기에 이런 특별한 돌봄이 추가된 거죠. 제도적 혼란의 한복판에서 개개인의 인간다움에 관해, 현재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관해, 죽음에 직면하고도 삶에 관해 단언한 일기의 간명한 서술로 이겨냈다.
로즌과 같은 병동에 있던 환자 가운데 42% 가량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환자들의 일기는 가치 있다. 생존자들만큼이나 유족들도 그 진가를 알아보고 고마워하기 때문이다. 가족의 병이 진행되는 과정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환자일기가 전체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유족은 환자일기에 적힌 사랑하는 이가 받은 돌봄의 기록을 읽으면서 위로받는다. 또 본인들도 환자일기를 쓸 수 있는 경우 감정을 표출하는 안전공간이 생긴다. 환자일기는 간호사들이 고안한 것이었다. 실용적이고 연민에 기반하고 효과적인, 그러면서도 저렴한. 간호사들은 노트 작성의 새로운 장르, 즉 수혜자는 기록에 관여하지 않는 치료적 일기를 발명했다. 평범한 지면을 희망과 공감과 연민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29장 노트 연구, 1883 ~ 현재
장파울 리히터 : 경이로운 그림과 놀라운 과학적 관찰이 들어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는 300년 동안 그 진가가 저평가된 상태로 머물러 있은 뒤에야 응당한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뒤늦은 연구는 독일의 여행안내서 작가인 한 청년으로부터 비롯했다. 베데커 출판사를 위해 이탈리아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미술사에 관한 전문지식을 개발했다. 1878년 라벤나의 비잔틴 모자이크에 관한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 명성을 얻은 리히터는 런던으로 이주했고, 레오나르도의 노트를 그 예술가의 상속인인 프란체스코 멜치가 세상을 떠난 이후 최초로 완독한 사람이 되었다.
리히터는 부담스러운 과업에 착수했다. 레오나르도의 육필 원고는 잉글랜드, 프랑스, 이탈리아 전역에 산재했다. 그런데 각양각색의 관리자들이 그때껏 노트를 이해하는 것보다 소유하는 데 더 열심이었다는 점에 리히터는 주목했다. 리히터는 5천여 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체계적으로 읽어냈고, 5년이 지나지 않아 출간 준비를 마쳤다. 1883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북]이 나오자 레오나르도가 이해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리히터는 노트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함으로써 레오나르도가 ’작가이자 철학자이자 박물학자‘, 동시대인의 시각보다는 근대과학의 가르침에 훨씬 더 부합하는 발견들을 한 사상가임을 드러내 보였다. 리히터의 편집자로서의 면모를 계승한 이는 딸 이르마였다. 레오나르도의 연구업적이 읽히지 않은 무명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해준 이들 부녀의 노력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했다.
종이는 그저 양피지의 값싼 대체물이 아니라 새로운 성능을 지닌 흥분되는 신소재였다. 또 사람들은 저렴해서가 아니라, 양피지 코텍스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을 종이 노트로는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종이를 채택했다.
다 롤드는 인적 네트워크의 역할도 강조한다. 즉, 지중해 지역에서 종이를 실어 날라 유럽 대륙 전역으로 확산시킨 통상로만이 아니라, 노트의 새로운 용도를 지역적으로 보다 발전시킬 수 있게 해준 사회적 연결 말이다.
상인의 원장은 고도화된 사업이 발달할 수 있게 해주었고, 치발도네는 토스카나 문학의 인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알붐 아미코룸은 어린 학생들의 우정을 물리적으로 구현했다, 등등. 각 경우마다 노트는 처음에 사회적`문화적 관계망에서 유래한 다음 그 관계망을 강화한다. 그러한 점에서 다 롤드는 종이(그리고 노트)를 그저 하나의 물품이 아니라 갈수록 복잡해지는 세계의 핵심 기술로 취급하는, 점점 성장하고 있는 역사학자 집단에 속한다.
켄 키에브라 교수 : 다양한 노트 필기 전략의 유효성을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봄.
키에브라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원생이었던 청년 시절에 플래처라는 교수로부터 강의 내용을 필기하지 말라는 지침을 받았을 때였다. 학생들에게 자료 인쇄물을 제공함으로써 플레처 교수가 노린 것은 실시간으로 필기하느라 주의가 산만해질 염려를 없애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키에브라는 메모장에 강의록을 요약해서 정리했다. 두 사람은 곧 차이를 조율했다. 키에브라는 생산적인 학자생활을 시작하면서, 노트 필기를 연구하여 교실에서 그 가치를 확립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사회사가 성장하면서 역사학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남긴 일기와 여행일지, 그밖의 기록을 주의깊게 살펴 보았다. 그러면서 다시금 결정적인 용어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1950년대 역사학자 자크 프레서르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신조어 ’에고도큐먼트(생활기록)‘는 현재 일기와 일지를 지칭하는 포괄적 용어로 널리 쓰인다. 2012년에는 최초로 ’생활기록‘에 할애된 학술적 일지가 등장했다. 현재 모든 종류의 에고도큐먼트는 자신의 분야에 대해 신선한 통찰력을 구하는 역사학자들의 마음을 끌고 있다.
페미니즘 역사학자들 : 뉴잉글랜드 지역의 조산사 마사 밸러드의 1785년부터 1812년까지 이르는 일기는 신생 미합중국의 소도시 생활에 관하여 확립된 기존의 이해를 바로잡는다. 로럴 대처 울리히가 검토한 그 일기는 여성들이 그때껏 추정된 것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활동적이었음을 드러내고, 여성들이 남성들만큼이나 많은 의료행위를 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814건에 이르는 출산 기록은 당연히 산과, 사망률, 연구통계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파블로 피카소 : 오랜 작가 생활 동안에 썼던 모든 스케치북을 보관했다. 1973년 그의 사후에 여러 습작과 예비 작업, 스케치북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한 비평가는 그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듯하다 라고 말했다. 1986년 그중 175점이 전 세계를 순회했을 때, 그저 그 예술가의 저장 강박 성향을 증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의 혁명적인 창작과정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독특한 창을 열어주기도 했다. 피카소는 이 스케치북을 어떤 장면의 충실한 묘사를 향해서가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나는 방향으로 사용했다.
파울 클레는 스케치북 안에서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선, 디자인, 색채를 아주 독창적으로 탐구했는데, 그 결과물들은 레오나르도의 [회화론]과 자주 비교될 정도다.
프리다 칼로는 또 다른 방향으로 갔다. 스케치북도 일기도 아닌, 새로운 종류의 시각 저널이었던 노트를 채운 것이다. 힘들여 만든 공식적인 회화 작품과 달리, 즉흥적이고 외견상 미리 계획하지 않은 듯한 이 기록들은 단어와 이미지의 빼어난 조합으로 변화하는 감정을 포착한다.
벨러 버르토크 : 민속음악학자
헝가리 젊은 학생. 1904년. 민요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 버르토크는 친구 졸탄 코다이와 카르파티아산맥의 여러 곳을 여행했다. 두 사람은 농민과 양치기, 돼지치기 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찾아내어 헝가리와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노래를 이끌어내곤 했고, 버르토크는 그 선율을 음악노트에 기록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찾아낸 것에 놀랐다. 클래식 전통 바깥에 있는 풍성한 음악에.
버르토크는 이 원정에서 1천여 곡의 민요 선율을 전사했다. 1914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두 사람은 노트를 16권이나 채운 상태였다. 이 자료는 장차 버르토크의 작곡 활동에 있어서 매장량이 풍부한 영감의 광맥임을 입증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현장 조사와 후속 분석으로 인해 그는 세계 최초의 민족음악학자로 꼽히게 된다. 이 방대한 음악을 전사하는 과정에서 버르토크는 그 선율이 대부분 5음 음계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클래식 음악가들이 원시사회의 골동품으로 간주했던 오 개 음들의 조합은 폭넓고 다양한 효과를 가능하게 했다.
대중가요는 로큰롤이 도래하면서 변화했다. 가장 위대한 전기기타의 거장인 지미 핸드릭스는 악보를 읽을 줄 몰랐다.
비틀스 : 앨범을 제작할 때마다 그 기간 동안 멤버들은 노래를 짓기 위해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따로 확보해두곤 했다.
밥 딜런 : [블러드 온더 트랙스] 앨범이 될 밀도 높고 다면적인 노래들을 쓴 스트링 메모장.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 대부 영화 감독.
20세기 최초로 등장한 새로운 예술 매체 역시 새로운 노트 포맷을 변용하는 창작자들에게 보답했다. 코폴라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테마를 대본과 그에 따른 영화를 어떤 식으로 조각했는지(프롬프트 북 : 영화 대본의 사본), 또한 상업용 소설을 우수한 명화로 꼽히는 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30장 뇌의 다른 부분 : 예술가 관찰하기, 2022년
험프리 오션 : 오션은 창작 행위를 하는 중에 살아 있는 뇌를 관찰당한 최초의 예술가.
자기공명영상MRI 스캔은 노팅엄대학교에서 발명된 때인 1970년대 말 이후로 뇌 주변의 혈류도 포함해서 해부학과 생리학의 많은 측면을 탐지하고 기록할 수 있다. 1999년 미국의 심리학 교수 로버트 솔소는 훈련된 전문적인 직업 예술가를 구별 지을 만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 MRI 기술을 활용한 실험을 설계했다. 솔소는 심리학과 예술이 교차하는 지점들을 전문으로 연구한다. 그런 그가 판단하기에 오션은 여러 해 동안 근면성실하게 그림을 그려왔기에 완벽한 연구대상자였다.
MRI 결과에 따르면 통제군 피험자는 우측 후두정엽 영역을 사용하여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드러났다. 오션은 공간 인식과 연관된 우측 중전두 영역으로 혈액이 몰려갔다. 작업 중인 오션의 정신은 얼굴을 하나의 얼굴로 여기는 게 아니라, 여러 형태의 모음으로 봤다. 이 때문에 그는 딱 봐도 아주 비슷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초상을 만들어낸다.
오션은 또 다른 예술 – 과학 연구에 참여했다. 이번에는 시선 추적 장치를 착용한 실험.
연구진(찰렌코)은 오션의 한쪽 손에 동작 센서를 부착한 다음 그가 초상화를 그리고 채색할 때 눈과 손의 움직임이 어떤 상관관계를 보여주는지 정밀하게 측정했다. 첫 번째로, 오션은 선을 그리거나 색을 칠하는 동안 그러지 않을 때와는 달리 눈을 움직이고 고정했다. 오션의 손도 다르게 움직였다. 연필로 재빨리 종이에 예비선을 긋고 나서 그것을 위치를 표시하는 데 썼다.
솔소와 찰렌코의 관찰내용은 훈련이 한 예술가의 정신과 신체 활동을 복잡하고 연결된 방식으로 완전히 바꿔놓음을 시사했다. 즉, 안구 운동과 시선 고정, 신호 처리, 손의 움직임을 말이다. 그들은 이러한 방식들이 오션이 받은 교육과 꾸준하고 규칙적인 훈련에 따른 결과이고, 유사하게 훈련된 예술가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리라고 추정했다. 오션은 다른 의견을 냈다.
복셀 기반 형태 분석기법(VBM)이라는 것이 발명되면서 곧 해결이 가능해졌다.
또 VBM은 표면 아래, 그것도 대뇌의 안쪽 깊숙한 곳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뇌가 호두처럼 생긴 독특한 겉모습을 띠게 만드는 물결 모양의 겉층은 유명한 회백질이다. 신경세포인 뉴런이 풍부한 이곳에서 대부분의 연산작업이 일어난다. 그 아래에는 백질이 있다. 수십억 개의 연결 세포로 이루어지는데, 서로 다른 회백질 영역 간에 연속적으로 신호를 전달한다. 어떤 사무실 모든 책상마다 놓인 컴퓨터들이 회백질에 해당하고, 그 컴퓨터를 연결하는 길게 이어진 케이블 같은 것들이 백질에 해당한다. 회백질과 백질 둘 다 대단히 중요하다. 실제로 사고를 담당하는 물질은 회백질이다.
리베카 체임벌린 연구팀 : 모든 관찰 내용은 예술가가 그림을 그릴 때 뇌의 특정 영역을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영역들을 영구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보디빌더가 근육을 축적하듯 회백질을 축적한다.
우리는 찰렌코, 솔소, 체임벌린의 실험을 통해 눈에 띄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오랜 훈련은 예술가에게 이례적일 만큼 집중적으로 자신의 시선을 향하게 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것은 예술가들이 뇌의 여러 영역을 새로운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훈련시키고, 뇌의 신경망 구조 자체마저 변화시킨다. 오션의 특이한 사고 패턴(그리고 특이하게 발달된 그의 뇌)은 훈련된 예술가들에게는 전형적인 것이었다.
이 연구는 신경학적 차원에서 그들이 왜 디지털기기 사용자들을 능가하는 결과를 내놓았는지 설명한다. 근육을 쓰는 일이 개입되는 경우 우리는 기억을 더욱 잘 암호화하기한다. 종이 자체의 촉감과 감각 특질뿐만 아니라 지면 위의 기록이 고정된 위치를 가진다는 점도 영향을 준다. 반면 화면 위의 기록은 스크롤 해서 넘어가버리거나 아예 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요인들이 다 합쳐져서 결과적으로 ’보다 심층적이고 더욱 탄탄한‘ 인지 과정을 낳는다. 게다가 이 연구는 ’기억, 시각적 심상, 언어와 연관된 뇌 활성이 그 같은 정보의 보다 심층적인 암호화 과정은 물론이고, 특정한 정보를 검색하는 동안에도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참가자들보다 종이 노트를 사용하는 참가자들이 더 강력했다 라고 결론 내린다.
오션이 스케치북과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그의 훈련이 정신에 미친 경과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제 나는 조토가 썼을 가상의 스케치북의 존재를 훨씬 더 자신하게 되었다. 이는 선배들이 결코 하지 않았던 대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묘사하는 데 숙련된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이, 문화적으로는 물론 신경학적으로도 당대의 산물임을 암시했다. 다시 말해 종이 스케치북은 새로운 작업 방식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뇌 주변 혈류와 회백질의 증가를 변화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 맺음말 : 오토는 평소 노트를 들고 다닌다 : 확장된 마음, 1938 ~ 현재
내 노트 뭉치는 지금도 여전히 내 책상 옆 손 닿는 곳에 있다. 여러 해 동안 그것들을 채우면서, 이어서 그보다 오랜 시간 동안 그 속에 든 내용들을 캐내면서 그 페이지들, 메모들과 아이디어들, 목록들, 낙서들을 훤히 알게 되었다. 상자 안에는 20년 치 나의 일기장과 스케치북이 들어 있다. 해럴드 할아버지가 1938년, 1939년, 1940년에 쓴 아주 작은 레츠 일기장 세권과 함께. 할아버지 : 리투아니아 상선회사에 근무. 전쟁이 나자 1939년 고향인 런던으로 돌아가 영국육군에 입대. 할아버지의 일기를 읽으면서 나도 일기를 쓰게 되었다. 일기나 일지를 쓰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단어를 더할 때마다 그것의 가치는 커진다. 즉, 더 지저분해질수록, 더 너덜너덜해질수록 더 귀중해진다. 게다가 이 가치는 이성적으로 보이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불운이 닥쳤음에도 충만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 오토라는 뉴요커를 가상의 인물로 내세웠다. 오토는 알츠하이머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리고 그도 생활을 구조화하도록 도와주는 환경 정보에 의지한다. 오토는 평소에 어디든 가는 곳마다 늘 노트 한 권을 들고 다닌다.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면 적어 둔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옛 정보가 필요하면 찾아본다. 오토에게 있어서 그의 노트는 대체로 생물학적 기억이 하는 역할을 한다.
오토의 노트에서 페이지 한 장을 찢어내는 것은 잉가의 머리를 가격해서 그를 아프게 하는 것만큼이나 그를 아프게 할 수 있었다. 노트와 일기를 마음이 확장된 것, 즉 어쩌다 보니 우리의 두개골 바깥에 존재하게 되었으나 그 외에는 생각하고 살아가는 일에 필수적인 신념과 인지 체계의 일부라고 이해하면, 그것들과 형성하는 기이한 유대감의 힘을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나의 일기를 읽는다면 당신은 나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노트의 도입이 우리의 마음을 확장하는 한 가지 방법을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노트가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강타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노트와 함께한 유럽의 모험담을 여러 확장(지적, 경제적, 창조적, 정서적) 가운데 하나로 본다. 호기심 어린 마음들이 노트가 선사한 백지와 상호작용하고 그것을 채우면서 확장되었듯 말이다. 마리아 세브레곤디는 몰스킨의 물리적 단순성(디지털 경쟁 상대들에 비해)이 창의성을 촉발하는 제약 이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얼리어댑터들에게 노트의 백지는 제약 없는 지평에 해당했다. 그들에게는 그보다 정교한 인지 기술이 없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창조하고, 탐구하고, 기록하고, 분석하고, 생각하는, 도전이 될 만한 일을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가 구성하고, 정리하고, 기억하게(나아가 병자들을 돌보게) 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고, 좋은 것들은 진가를 알아보고 나쁜 것들은 균형 있는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보다 충만한 삶을 살게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