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쓰는 인간 3

부실이 2026. 3. 18. 17:08

9장 오, 남들이 한 말을 기록하는 고통과 수고란! : 비망록, 1512 ~ 현재

에라스뮈스 :1512년에 발표한 [풍부함에 관하여]

독자들에게 작문과 수사법에 대한 지침을 제공했다. 교사와 학생을 대상으로 글을 쓰면서 코피아, 즉 풍부함의 기술을 활용하여 설득력 있는 주장을 만들어내는 법을 보여주었다. 이 기법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는 두 가지였다. 바로, 표현의 다양성과 주제의 다양성이다. 전자에는 은유법, 풍유법, 과장법, 의성법 같은 기법들이 포함되었고, 후자는 다양한 출처에서 가져온 여러 증거와 논거의 풍부한 축적에 좌우되었다. 광범위한 지식 또한 그 자체로 바람직하고 가치 있었다. 에라스뮈스는 ’모든 종류의 저자에 통달해야만 한 인간이 배웠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서술했다.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읽고 모으기를 독려했다.

이야기나 우화, 속담, 의견, 대비, 비교, 유사, 유추, 그밖에 과거에 행해지거나 말해진, 또는 다양한 국가의 관습에서 파생하거나 역사학자, 시인, 철학자, 성서의 여러 경전에서 비롯하거나 옛 시절, 근래의 역사에서 유래한 것들 그리고 우리네 삶이나 군대 또는 시민의 행동에 속한 것들, 관용이나 용기나 지혜에 관한 사례들과 같은 종류는 어떤 것이든. 그러나 사람들은 아주 오래되고 훌륭하며 국가와 관련된 여러 사례에 크게 감명받는다.

종이 노트와 치발도네가 도입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정보의 처리방식을 체계화함으로써 에라스뮈스의 비망록은(상인들의 원장이 재무에 대변혁을 일으켰듯) 노트를 정보기술, 즉 데이터가 저장되고 범주화되고 필요할 때 검색할 수 있는 하나의 하드웨어로 탈바꿈시켰다.

브라운소드의 기록 : 세익스피어의 커리큘럼 : 비망록 작성이 핵심적인 역할

브라운소드가 문법학교의 교사로서 남긴 커리큘럼은 세익스피어가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알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비망록 작성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습관은 젊은 시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거의 모든 희곡이 홀린셰드의 연대기, 프루타르코스의 영웅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같은 기존의 원재료를 변용하여, 이러한 작품들의 플롯, 등장인물, 이미지를 신선한 방식(다양한 출처를 섞어서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미셀 드 몽테뉴 : 에세이, 1580.

표제어에 따라 여러 사례와 반례를 조합함으로써 두려움, 나이듦, 카니발리즘, 편지부치기처럼 다양한 주제를 탐구하고 검토할 수 있었다. 107편의 에세이 한 편 한 편마다 각종 일화, 민간의 지혜, 고전 참고문헌을 차곡차곡 쌓아 모든 주제를 다각도로 살펴보는 단편작품으로 만들어 여러 관념과 선례를 점검하고 확인하고 분석했다.

존 로크 : 알파벳 순서와 주제에 따라 비망록을 작성하는 방법에 관해 전체를 할애한 책 한 권을 쓰게 된다.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는 종이의 질이 향상되고 더 부드러워지고, 더 저렴해지면서 훨씬 용이해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와 독일 남부, 프랑스는 최고의 종이를 만들어왔다.

존 벨 : 자기계발이라는 개념이 최고의 셀링 포인트

의 가장 큰 소득원은 자신이 쓴 [비망록]이었다. 1770년에 처음으로 발간된 이 책은 비망록을 써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시작하는 법을 모르는 향상심에 불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 로크의 방식을 몇 페이지로 발췌, 인용해 압축한 다음 학생, 즉 독서가와 여행자, 즉 관찰자양쪽 모두를 위한 예시를 제공했다. 이 단순한 발명품은 불티나게 팔렸고, 벨은 고수익을 누렸다. 첫 몇 페이지 말고는 전부 백지인 250쪽짜리 비망록은 권당 가격이 비쌌다.

 

10: 한 입구에서 다른 입구로 동양과 서양이 흐른다 : 세계양 1519~1522. 마젤란

노트의 초창기 응용방식 가운데 항해와 관련된 경우가 많다 보니 항해일지가 노트의 역사에서 눈에 띄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 우리는 상인들(최초의 노트 사용자들)이 노트를 들고 유럽을 돌아다닌 과정, 그리고 선원들과 그 밖의 여행자들이 각자 개인용 노트를 어떻게 창조적이고 실용적인 방식으로 사용했는지 보았다.

중세 베네치아 선원들의 경우 해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추정하는 정확한 방법은 육지의 고정된 지점을 참고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런데 16세기경에는 태양의 고도를 측정함으로써,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계절별 지구의 기울기에 따라 조정함으로써 위도를 합리적으로 추산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새로이 도입된 자기나침반 덕분에 향상된 방향 탐지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요인들, 그리고 콜럼버스가 이끈 항해의 막대한 재정적 수익금이 모험가들로 하여금 육지가 보이지 않는 먼 바다로의 항해를 시도하게끔 부추겼다. 그리하여 유럽에서는 원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프란시스코 알보 : 1519

스페인의 고급 선원으로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원정대에 합류하기로 계약을 맺었다마젤란은 스페인의 가장 유명한 뱃사람.

마젤란은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가 부여한 과업즉 동인도의 향신료 제도 (현재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로 가는 새로운 서쪽 항로를 찾아내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그에게는 선박 5(트리니다드, 콘셉시온, 산안토니오, 산티아고, 빅토리아호)으로 구성된 선단, 말레이어를 구사하는 말라카를 포함한 270명의 승무원이 주어졌다. 그리스 키오스 섬 출신인 알보는 항해사로 합류했다. 920일 세비야에서 출항한 선단은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서 대서양으로 진입했다.

알보가 쉽게 읽히는 비격식 필기체로 작성한 그 기록은 현재 세비야의 한 기록 보관소에 있는데, 그 항해를 특별히 철저하게 또는 체계적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8천킬로미터에 이르는 첫 구간(리우데자네이루)을 지나는 동안은 기록하지 않았다. 선단이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주요 지형물을 기록하고, 태양의 위치를 활용하여 원정대가 얼마나 남하했는지 가늠하기 시작했다.

 

임무는 완수되었다. 항해일지의 한 페이지 반에 걸쳐 중대한 발견의 세부 내용이다. 이 항해의 핵심은 동인도제도로 가는 뱃길을 찾아내는 것인 만큼 마젤란은 곧이어 선단이 태평양 외해로 나가도록 지휘한다. 알보는 마젤란 선단이 지나간 새로운 섬들에 대한 이름을 열거한다. 섬의 위치를 알려주고, 어떤 섬에서는 어떤 상품(정향, 금, 생강, 시나몬, 백단)을 조달할 수 있는지, 어떤 섬이 우호적이고 어떤 섬이 그렇지 않은지, 선단이 어디에서 보급을 보충했는지, 화물을 어디에서 구입했는지, 아라비아 상인들을 어디에서 발견했는지 등등을 조언한다.

그들은 갑판 아래 짐칸인 선창을 가득 채운 채 출항하여 인도양을 가로질러 귀향길에 올랐다. 15225월 희망봉을 돌아 다시 대서양으로 진입한다. 2년 만이었다. 두 달 뒤 그들은 베르데곶 제도라는 환대받는 영토에 도달한다.

 

그들은 귀국했다. 그 항해에 관한 기록, 그리고 새로운 뱃길에 대한 값을 매길 수 없는 정보를 가지고 온 알보도 함께. 다섯 척의 배가 세비야를 떠났는데, 단 한 척, 빅토리아 호만 22명이 귀환했다. 알보는 마젤란 포함 사라진 248.

소수의 다른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인 안토니오 피가페타라는 이탈리아인 역시 일지를 썼다. 이 일지는 증정본으로 필사되었는데, 그 중 한 건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인 카를 5세에게 전해졌다. 항해의 관점에서 알보의 기록의 틈을 메워준다그 항해가 잇단 재앙을 견뎌내는 과정이었음을 드러낸다. 세 척의 배가 반란. 카르타 헤나, 멘도사, 케사다. 마젤란이 제압알보는 이 일련의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산티아고 호가 산타크루즈 강 근처의 사주에서 난파되었다는 사실도 기록하지 않는다. 마젤란해협을 통과하는 뱃길에서 산안토니오 호가 사라졌다. 굶주림 때문에 선원 19명을 잃었다.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는데 석달이 걸렸다. 마젤란은 세부 섬에서 발생한 충돌에서 살해당했다. 빅토리아호가 인도양을 횡단하는 동안 20명이 아사.

 

알보의 간과 : 훗날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 가능성 때문에 갖가지 음모와 반란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피가페타의 이야기를 보완하기 위해 순수하게 항해일지만 기록하기로 마음 먹었을 것이다피가페타는 마젤란의 손상된 이름을 회복시키는 데 얼마간 기력을 바쳐야 했다. 마젤란해협에서 사라진 산안토니오호는 스페인으로 돌아왔었다. 세비야로 돌아온 승무원들은 마젤란의 인격을 훼손. 고문과 압제를 자행했다는 이유로 고발. 마젤란의 아내와 아들은 가택연금에 처해졌고 충성한 선원은 투옥.

피가페타는 자신이 모셨던 함장의 명예를 회복하고, 세계 최초로 성공한 세계일주를 이끈 지도자이나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중요한 해협의 발견자로 우리에게 전해내려오는 이름이 귀환하는 빅토리아 호에서 선장 역할을 맡은 고급 선원 엘카노가 아니라 마젤란이 되도록 만드는 데는 혼신을 다하는 조직적 활동이 필요했다. 피가페타는 9년을 더 살다가 이탈리아로 돌아갔다피가페타의 노트 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가 마젤란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그 노트들을 사용한 방식은 사건 발생 당시에 직접 작성된, 게다가 효율적으로 활용된 기록의 힘을 잘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11장 청어의 왕 : 피시북, 1570년 네덜란드

유럽에서 번영을 구가한 항로는 지중해 무역로만이 아니었다. 북쪽으로 1천킬로미터 떨어진 북해와 발트해에도 그곳의 상인들과 상품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북부의 상업이 그 시절의 노트 가운데 가장 호기심을 자극하고 흥미로운 사실을 드러내 보이는 한 권을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제공했다.

청어 : 살이 기름지고 잔가시가 많은 작은 생선. 수세기 동안 북부 유럽의 모든 민족이 이 물고기를 쫓아다녔다. 1570년대 즈음 네덜란드인들이 청어 무역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들이 특별히 고안한 헤링 버스로 불린 어선 수백 척이 해마다 세틀랜드제도, 스코틀랜드, 아이슬란드 연안의 풍부한 심해 어장으로 출항하곤 했다. 그곳에는 수십억 마리에 달하는 청어 떼가 수 킬로미터에 걸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어선들은 그물 한가득 청어를 잡을 수 있었다. 기발한 네덜란드인들은 금방 상하는 청어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선원들은 어망 한가득 물고기를 끌어올리고 난 다음날 오전에 잡은 생선의 내장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손질한 청어를 소금을 채운 커다란 통에 보관하는데, 그렇게 하면 소금물이 생선의 부패를 막고, 유문맹낭에서 분비되는 소화효소 트립신이 생선살을 부드럽게 하면서 더욱 감칠맛이 돌게 만들었다.

 

매년 약 500척의 하링바위선으로 구성된 네덜란드 선단이 파견되어 거의 2억 마리에 달하는 청어를 잡았다. 이 정도 물량은 네덜란드 인구가 소비하고 남아 청어는 대부분 발트 해 시장인 독일, 폴란드, 러시아로 수출되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목재와 곡물을 다시 실어왔고, 남쪽으로도 그와 유사하게 염장에 쓸 프랑스와 스페인 산 바다소금으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양쪽에서 모두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이 상업은 네덜란드 경제의 주된 동인 가운데 하나로, 그 시대의 성공신화였고, 다들 그 중요성을 이해했다. 수익성이 큰 이 어선단은 요새화한 항구에서 호위를 받으며 무리지어 항해했고, 네덜란드의 조선공들은 외국인에 하링바위선을 건조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트립신 덕분에 네덜란드의 염장 청어는 고급품으로 취급되었고 당국은 이 수출품의 품질을 면밀히 감시하면서 승인을 통과한 통에 일일이 달군 쇠붙이로 품질보증 인장을 찍었다. 따라서 성공한 생선상인은 상당한 소득을 얻음과 동시에 공동체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1570년에 가장 번성하고 가장 저명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아드리안 쿠넌이었다. 그런 그가 독특하고 근사한 노트 한권을 남겼다.

 

아드리안 쿠넌 : 어부의 아들 북해 연안 스헤베닝언에 살았다. 이 도시의 공식 어시장에 소속된 경매인이자 허가를 받고 해변에서 표류물을 수집하는 비치코머였던 그는 63년을 사는 동안 평생 해양생물과 접촉했다. 그의 피시북은 자신의 지식을 모아서 쓴 육필 개요서로, 수산업뿐만 아니라 쿠넌이 살던 시대에 대한 이해와 질서를 설명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네덜란드 도처에서 어부들이 잡은 생선을 팔러 스헤베닝언으로 옴. 쿠넌은 본인이 접한 모든 생선을 자기 노트에 수집하게 됨. 쿠넌은 진귀한 어류가 잡힌 날짜와 장소를 기록한 다음, 권위자들의 책 내용을 덧붙였다. 정확한 삽화를 추가. 쿠넌이 그려넣은 많은 그림은 이 지식이 전달되고 해석될 수 있는 방식을 바꿔 놓았다.

쿠넌은 청어(잡히는 장소와 염장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관련된 어부의 사연)에 한 절을 통째로 할애한다. 쿠넌은 장식이 그려진 글 상자 안에 기록을 모아 담은 뒤 지면을 어두운 색조의 수채화 물감으로 엷게 채움으로써 그것을 배경으로 테를 두른 텍스트와 그림 판이 돋보이도록 만들었는데, 그의 이름과 모노그램(합일문자)이 첨부되기도 했다. 청어에 관한 절에는 북해에서 청어가 발견될 만한 위치를 보여주는 어장도도 들어가 있다800쪽이 넘는 분량에 각 페이지마다 글과 그림이 꽉꽉 들어차 있다.

 

쿠넌은 직업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성공을 누렸다. 공직을 따내면서 지속적으로 점점 더 부유해졌다. 쿠넌은 책을 오라네 왕자에게 헌정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그 책을 자랑했을 것이다. 그는 레이던에서 열린 박람회의 전시 허가를 얻었다. 판도멜러는 이 노트를 수생계에 관한 종이 분더카머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본다면 전적으로 시대에 발맞춘 물건이다수년 동안 이루어진 탐색과 기록 활동이 없었다면 쿠넌은 피스북을 쓰는 데 필요한 원재료를 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노트는 학자들, 그리고 아마추어 학자들이 지식의 근거를 고대에 쓰인 것에만 두지 않고 본인의 경험론에도 기초하고자 애쓴 순간을 보여준다이 노트에는 네덜란드만의 특질도 존재한다. 토착어 지식망 역시 번성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피시북은 지식의 민주화를 구현한다.

 

12장 슈탐부허 : 우정 노트.  기념 문구를 적어넣은 기념첩 내지 방명록. 1645년 북부 유럽

학생들은 교수나 지역의 주요 인사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서명을 부탁. 자필 서명과 날짜, 도덕적인 좌우명 내지 경구, 개인적으로 우정이나 존경을 표현하는 문구가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의 노트에 모아진 고유한 연줄들이 교육과 공유된 신앙심에 기초한 사회적 연결망 안에서 노트 주인의 위치를 공고히 할 터였다. 그것은 형성적 관계의 구현으로서 귀한 증표가 된다. 교수들은 교육의 일환으로 여행을 과제이자 임무로 추천. 1575년 네덜란드 레이던에 최초로 대학이 생겼고, 그곳의 학생들은 열성적으로 슈탐부흐를 가져와 사용했다.

알붐 아미코룸 : 친구 앨범

성자는 보통 자기 집안은 문장을 그려 넣곤 했고, 요청하여 받은 글들은 저마다 지면에 뜻이 맞는 두 개인의 정신적 결속을 약속했다. 사람들이 서로의 알붐 아미코룸에 차별화되는 내용을 기재하려고 경쟁하다 보니 온갖 종류의 헌사가 등장하면서 각종 시, 노래, 스케치, 초상화, 풍경화가 전통적인 성경구절과 다투었다. ‘문화적 단편들을 수집하고자 하는 이러한 충동은 같은 시기에 나온 다른 노트들, 특히 비망록의 특징이다기회를 발견한 출판업자들은 전용으로 제작된 노트를 찍어냈다. 가장자리에 꽃그림을 넣거나 고전적인 포르티코가 있는 내지를 써서 그 안에 적힌 메시지가 어떤 아름다움 내지 품위를 지니도록 만들었다.

율리아나 더 라우설 : 알붐 아미코룸을 남김. 1669. 구혼자들에 관한 우화같은 그림, 스케치와 더불어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많은 알붐이 원래 주인에 의해 아들이나 형제, 조카에게 대물림되었다. 여러 세대가 쓴 헌정 글이 수록된 사례들이 존재한다. 네덜란드는 헤이그에서만 관리하는 알붐이 700권에 달한다.(영국, 프랑스, 지중해지역은 알붐이 없다)

 

야코뷔스 헤이블록의 알붐 : 1645. 가장 유명한 알붐 아미코룸.

독일에서는 알붐 아미코룸이 17세기와 18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모차르트, 베토벤도 한 권 보유했고, 괴테도 그랬다. 작곡가들은 슈탐뷔허에 스케치를 남기는 습관을 들였다. 하이든, 쇼팽, 슈만, 멘델스존, 슈베르트는 친구들을 위해 음악곡 한 토막을 써주었고, 리스트가 자신을 흠모하는 여성팬들에게 해준 일부 친필 서명들이 악보를 온통 채웠다.

 

16세기에 남성 귀족들 사이에서 생겨났다가 17세기와 18세기에는 중산층의 관행이 된 알붐 아미코룸은 19세기 무렵에는 부르주아 계층, 그것도 주로 여성의 취미로 간주되었다. 알붐 아미코룸이 흠모와 애정, 존경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한편 사회적 접근을 공식화함으로써 이성과의 접촉에서 아주 약간의 부적절함의 낌새조차 피해야 했던 젊은 여성들에게 유용한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20세기에 알붐 아미코룸은 또 한 번 진화하여 처음에는 여자청소년의 우정 노트가, 그리고 나서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어린아이들이 이따금 썼던 운문이 추억 앨범이 되었다직계후손인 사인북은 20세기 중반에 전성기를 누렸다.

 

13장 여러 보석들 : 하인리히 시카르트의 산업 관찰기, 1598년 독일과 이탈리아

중세 말기는 유럽에서 발명 붐이 일었던 때다. 1280년대에 피사에서 안경이 만들어졌다. 기계식 시계와 괘종시계가 나왔고(파리는 1370), 제분기, 선박, 펌프, , 대포, 승강장치가 등장했다. 이러한 진보는 당연히 제도(기술도안)의 증가를 수반했다. 현존하는 사례는 대부분 최종 도안이다. 그런데 그보다 뒷 시기에 나온 노트 일습이 실제로 살아남아 창작과정은 물론이고 유럽의 여러 도시와 문화, 경제를 완전히 바꿔놓은 기술 이동의 과정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하인리히 시카르트 :

15981월 하인리히 시카르트는 이탈리아 북부의 산업도시들을 둘러보는 여행길에 올랐다.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이며 엔지니어로 산업 관련 문제의 만능 해결사였다. 이 역할로 그는 유명해졌다프리드리히 공작은 시카르트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의 산업명소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 가지고 돌아올 때 자신의 공국에 이득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시카르트가 받은 업무 지침은 운하, 소금광산, 다리, , 제분소, 도시에 유용할 만한 것이면 뭐든지 계속 눈여겨 볼 것시카르트는 A5 정도 용지를 접어서 만든 접책을 들고서 거기에 스케치를 하고, 일기를 쓰고 여행길에서 마주친 기계장치의 도안을 그릴 터였다. 그 지면들은 사명을 띤 어느 호기심 많은 숙련된 전문 지성인의 생생한 인상을 전달한다.

울름(도시) : 배수장치 두 가지.

란츠베르크에서 : 시카르트는 지붕다리 설계를 포착하고 스케치하여 어떤 건축업자든 작업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도안을 그려낸다.

베네치아 : 항구의 갑문, 배를 물 밖으로 들어 올리는 말이 끄는 윈치, 기발한 가로등의 약도를 그렸다.

카살레 몬페라토 : 요새화하면서 재정비한 곳이었다. 그 요새의 혁신적인 육각형 평면도는 시카르트를 사로잡았고, 그는 재료, 노동력, 비용, 소요시간, 해자의 깊이와 너비 등 건설과 관련된 내용을 광범위하게 기록했다.

 

시트르트의 두 번째 여정 프리드리히 공작은 외교사절로 임무를 맡아 로마로 가는 길에 시트르트도 같이 감. 이 여행기는 밀라노에서 시작하여 카살레의 요새를 재방문한 뒤 제노바에 이른다.

로마 : 시트르트는 기계적인 것과 관련된 진기한 것들을 살펴본다. 티베르 강의 부력 수차는 이해하기 쉬운 내부 단면도로 그려져 있다. 돌아가는 길에 요새, 마차, 제분기 기어, 분수, 조각상, 파사드, 평면도.

페라라 : 교회, 팔라초, 석회로, 견방적기, 도시의 요새 도면, 올리브유 압착기.

만토바 : 서스펜션이 장착된 마차 도면.

 

16005월 시카르트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먼저 할 일은 그동안 작성한 기록과 그림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노상에서 노트처럼 사용한 작은 종이첩을 한데 모아 A에서 D까지 라벨을 붙인 책으로 제본했다. 노트 네 권에는 모두 쪽수를 매겼는데, 특히 C권에는 나 하인리히 시카르트가 이탈리아 여행에서 사랑한 여러 보석들이라는 표제를 넣어 극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속표지를 만들었다. 19세기에 다시 제본되기는 했어도 너덜너덜해진 지면들은 그것이 이탈리아의 들판에서 탄생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얼마나 빈번히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시카르트의 노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와 닮아 있다. 호기심과 열린 자세, 놀라운 관심 영역, 필기 메모와 관찰 소묘의 결합이라는 면에서 그러하다. 두 사람 다 기어, 래칫, 지레, 톱니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상이하다. 레오나르도의 노트는 눈에 띄지 않게 갇히는 바람에 경이로운 발상들의 막다른 길이 되고 말았다. 시카르트는 프리드리히 공작과 그 상속인들의 아낌없는 자금 지원 덕분에 마음껏 건설작업을 해나갔다.

포플로브의 말에 따르면, 펠가르트(독일)에서 시카르트는 제지소, 축융소, 상수도와 배수시설을 갖춘 통합 산업지구를 고안했다’. 그는 새로운 르네상스양식을 들여와 여러 성과 교회를 건설하고 재건했다. 터널, 정원, 분수, 제분소, 가정집을 지었고, 도시 두 곳 전체를 맨 땅에서부터 건설했다. 1615년에 화제로 무너졌던 오페나우를 재건하고, 중앙광장을 에워싸도록 배치된 거리에 수백 채의 건축물이 들어선 새로운 성읍 프로이덴슈타트를 구상한 것이다.

 

시카르트의 노트는 현지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도 동원되었다. 그는 대강 그린 밑그림을 정밀한 기술도안으로 발전시켰는데, 작업에 관여하는 장인들과 공유하기 쉽도록 낱장 용지에 그렸다. 예를 들면 펌프를 그린 한 그림에는 음영을 넣고 채색을 하고 세세한 부분을 표현해서 금속공, 석공, 목공이 협업을 통해 작동 가능한 형태를 제작할 수 있도록 해놓는다. 다시 말해 바퀴와 크랭크축, 지레, 물수평기, 파이프작업이 하나같이 완벽하게 알아보기 쉽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르네상스 시대를 기술 진보의 측면에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대한 화가들이나 휴머니즘 사상가들보다 이 시대의 기술자들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훨씬 더 많이 변화시켰다. 이제는 벽난로와 유리창이 있는 가정집이 지어졌고 상수도를 갖춘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새로운 펌프 설계 덕분에 광산을 파내고, 소금과 석탄, 금속광석을 채굴할 수 있었다새로운 제분기 설계 덕분에 수력과 풍력이 습지 배수, 올리브 압착, 나무판자 톱질에 활용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산업(제지)이 유럽 대륙 전체로 확산되었다. 18세기 산업혁명은 흑사병 이후의 세계에서 일어난 근면혁명에 뿌리내리고 있다. 기술사가들은 시카르트를 기계와 산업설계의 확산에서 주요한 인물로 간주한다.

   

14장 오래 머물지 않게 하라 : 여행자들과 그들의 노트, 1470~현재. 브르스 채트윈

프랜시스 베이컨 : 비망록, 치발도네 양식인 발췌문 모음집, 다양한 법 영역에 관한 노트 9, 그리고 가계부와 철학`과학 탐구용 노트가 포함된 28권의 노트. 1587년에 쓴 소론 [여행에 관하여]에서는 해외로 향하는 청년들에게 노트 필기를 하라고 조언.

 

윌리엄 우스터 : 1470년대 세인트 마이클스 마운트에서 그레이트 야머스까지 잉글랜드 남부를 일주하는 일련의 여정에 나섰을 때 자신이 본 모든 것에서 흥미를 발견하는 인간이었던 우스터는 독특하면서도 매우 실용적인 판형에 기록을 남겼다. 이 시기에 잉글랜드에서는 기성품으로 제작된 노트가 없어 임시변통으로 공책을 만들었다. 홀스터 북우스터의 홀스터 북은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 여행자들의 기록과 일지는 적어도 우리에게 전해 내려올 정도의 것이라면, 일반적으로 현장에서 작성된 형태이기보다 깨끗한 사본 내지 간행본의 형태로 전해진다.

 

루이지 다라고나 추기경 :

1517~1518년 로마를 떠나 유럽을 광범위하게 훑어보고자 했는데 안토니오 데 베아티스라는 이탈리아인 성직자를 고용하여 모험에 관한 일지를 작성하게 했다. 다라고나는 19세에 추기경이 되었을 정도로 연줄이 탄탄했다. 40대에 접어든 그는 예술에 대한 애정, 왕족과 어울리고 싶다는 강한 소망을 품고 있었기에 먼 길을 떠났다. 일행의 여행 경로는 알프스산맥을 넘어 바이에른 주로 가서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있는 도시들을 지나 저지대국가들과 프랑스 북부, 프로방스, 리구리아해안을 누볐다일생일대의 여행은 보람찬 동시에 기력이 소진되는 일이었다. 추기경은 1년 뒤 눈을 감았다. 데 베아티스는 자신이 쓴 [여행안내서]의 사본을 판매용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인쇄술이 확산하면서 서적상들은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앞으로 넓은 시장을 개척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독자들은 항상 이역만리에 관심을 보였다. , 피렌체의 치발도네 중에는 마르코 폴로가 때마침 종이 노트가 널리 보급된 시기인 1300년에 제노바의 어느 감옥에서 쓴 여행서인 [동방견문록]에서 발췌한 문장들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사람들은 탐험가, 상인, 선원, 모험가들의 더 많은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대니얼 디포 1719년에 나온 [로빈슨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의 속표지는 그 안에 든 이야기가 허구라는 낌새를 풍기지 않는다. 대니얼 디포가 자신의 이야기를 풍성한 디테일로 가득 채운 덕분.

 

허먼 멜빌 : 3년에 걸친 남양 여행에 관해 쓴 상세한 일지들은 성공한 두 권의 넌픽션 작품인 [타이피, 오무]로 귀결된다. 멜빌은 늘 주머니에 작은 노트 한 권을 넣어 다녔고, 매일 밤마다 제대로 된 정식 일지를 작성했다.  모비 딕 : 이슈미얼은 자신의 이야기를 중단시키고는 딴 길로 빠져 고래사냥의 현실을 신문기사 쓰듯 상세히 전한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런 식으로 픽션과 논픽션이 뒤섞이는 것을 소화하기 힘들어했고, 모비딕은 판매 속도가 지지부진했다. 1920년대에 재발견되고 재평가되기 전까지 멜빌의 혁신은 모방하는 사람들, 소수에게만 영감을 주었다.

 

마크 트웨인 : 어디든 노트를 들고 다녔는데, 미시시피강의 증기선을 모는 견습 조종사가 되기 위해 수련받는 동안 들인 습관이었다. 선장 빅스비는 조언했다. 조종사가 되는 방법은 이 강을 통째로 외우는 것이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레먼스에게는 여러 도시, 기항지, 사주, , 강굽이, 직선 유역 등등의 이름이 꽉 들어찬 수첩이 생겼다. 그는 이 습관을 유지하면서 모든 것을 기록했다.

 

페트릭 리 퍼머 : 그린 다이어리

18세 때 유럽을 도보로 횡단했다. 로테르담에서 이스탄불까지자칭 지루함을 모르는 사람인 그는 우연히 접하게 된 모든 것(사람, 건축물, , 노래, 단어, 관습, 신화, 종교, 역사)에서 흥미를 발견했다. 1937년 루마니아에서 캉타퀸젠과 연애를 하면서 그린 다이어리를 만들기 시작. 전쟁이 나서 영국으로 돌아감. 1965년 캉타퀸젠은 이 노트를 보관이 유물을 가지고 리 퍼머는 두 권의 회고록 [선물 받은 시간][숲과 강 사이로]를 내놓았다. 그린 다이어리는 우리에게 하나의 물건으로서 노트가 지닌 힘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브루스 채트윈 : 1940 ~ 1989. 송라인. 여행기

자신의 이론을 소설이라는 틀에 넣음으로써 채트윈은 학술적인 내용에 관한 사실 확인 책임에서 벗어났다. 또 소설가의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그 이론들을 독자에게 보다 설득력있게 납득시킬 수 있었다. 이 교묘한 손재주 덕분에 [송라인]은 모비딕 이후로 가장 야심찬 픽션과 넉픽션의 결합으로 꼽힌다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문화와 신앙에 대한 지구적 관심이 촉발되었다. 그 책의 등장 인물들 중에 반감을 갖게 된 사례도 발생. 파리의 몰스킨 노트 41, 다른 노트 5권을 비롯한 그의 기록물은 현재 옥스퍼드대학교 보들리언도서관에서 보유하고 있다.

 

15장 폐기 장부 : 아이작 뉴턴(1643 ~ 1727) 수학

바너버스 스미스 : 164463세에 부인과 사별. 30살 과부이자 아들이 있는 애스큐 뉴턴과 재혼. 7년 뒤 사망.

1664년 고향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바너버스 스미스의 비망록을 서가에서 끄집어냈다. 그리고 재사용된 성서가 많이 들어 있기는 해도 유용하게 잘 쓸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표지에 권리 설정 일자를 기입하고, 그 벽돌책에 폐기 장부(거래일지)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 시절에 글을 쓰는 모든 사람에게 폐기 장부는 그때그때 봐가면서 제일 처음 대충 메모하는 공간이었다추후 필요한 내용을 발췌하여 정식 원장에 옮겨 적는 식이었다이는 뉴턴의 의도와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그가 이 노트를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도구로 간주했다는 것그리고 이곳에 뭘 적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이 읽게 될 경우 편집을 거쳐 보다 깔끔한 그릇에 옮겨 담아야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

 

뉴턴이 노트를 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에 흑사병이 도래했다. 1665년 고향 링컨셔에 상주하는 동안 폐기장부에 파묻혔다. 뉴턴은 금세 페이지를 채워나갔다. , 타원, 포물선, 곡선으로 이루어진 도해들이 그것을 가로지르는 접선, , 축과 함께 줄을 그어 만들어놓은 여백에 들어앉아 있다. 긴 연산이 일련의 수학기호들로 지면을 가로지르며 지나가고, 뉴턴의 글씨는 그가 제시하는 것의 논리를 자세히 설명해준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줄을 그어 삭제한 표시, 삽입, 교정은 그의 사고과정을 보여준다. 그렇게 하고나서는 다시 그전으로 돌아가 하던 것을 계속 이어간다.

평범한 성직자의 모음집으로 출발했던 그 노트는 에너지와 발명으로 흥성거리기 시작했다. 중력과 부력 등에 관한 몇 가지 문제를 배치하고는 우리 앞에서 그것을 해결해 나간다. 옆에 있는 도해는 필요한 실험 장치를 보여준다. 그 범위가 무한대에 가까운 풍성한 상상력이 격발한다. 이 노트에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보편적인 문제, 자신이 발견하는 해법을 확장적으로 기록했다. 역사학자들이 뉴턴의 기적의 해(1665)라고 하는 시기의 물리적 구현이다.

 

유럽은 고대 그리스인들로부터 기하학, 즉 레오나르도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가들을 사로잡은 고정된 점, , 형태에 관한 수학을 물려받았다. 기하학은 로도스의 미카엘의 마음을 그토록 움직인 아랍에서 발견된 대수학으로 보완되었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움직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다시 말해 공의 비행이나 달의 궤도, 떨어지는 물체의 가속도를 객관적인 수치로 계산하지 못했다. 이는 뉴턴이 스스로 설정한 도전과제였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미적분학으로 알고 있는 유율이라는 수학이다.

수학사학자들은 폐기장부의 이 지면들을 뉴턴의 사고과정을 재현하는 데 활용해왔다. 이 시기에 관한 전문가 : 이것은 뉴턴 수학의 기원이고, 따라서 뉴턴의 아주 중요한 사상 가운데 대다수가 담긴 원본 필사본이다라고 관찰한 바를 말한다. 뉴턴은 이 노트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해 불가였던 운동과 관련한 문제들을 미분이 어떻게 풀 수 있는지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미적분학은 현대의 이론물리학에서 아주 결정적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제학, 공학, 보건의료, 공기역학, 전자공학도 하나같이 뉴턴의 유율법에 기대고 있다.

 

폐기 장부에서 이루어진 계산들은 뉴턴의 저서 [프린키피아]의 토대가 되었다. 이 기념비적인 저작 덕분에 그는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고, 과학사의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러나 뉴턴의 폐기장부는 현대세계를 가능하게 만든 연산을(홀로) 발명해낸 고립된 천재의 물리적 구현이다뉴턴은 폐기 장부의 작성을 노트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할 때까지 몇 번이고 거듭해서 그 운용방식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목적은 예전의 생각을 바로잡거나 정제하는 것일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정돈된 질서를 부여하고, 자신의 관점에서 본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방식을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 독일의 수학자. 뉴턴과 동일한 영역에서 깜짝놀랄 만한 고유한 진전을 이룬 상태였다. 책을 출간하고 자기 힘으로 그 영역을 장악하게 된 때가 왔을 때 뉴턴은 혼자서 미적분학을 발명했음을 입증하기 위해 폐기 장부의 해당 페이지를 복사해서 공유했다.

 

뉴턴의 폐기 장부는 그의 기억만이 아니라 정신의 확장이었다그보다 작은 노트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준다십대였을 때 뉴턴은 작고 값싼 노트조차 온갖 종류의 아이디어를 보관하는 저장소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아이디어를 병치함으로써 연결이 분명해지도록 하고데이터를 유의미해질 만할 때까지 보유하며각종 계산과 관찰내용을 질적 저하 없이 보존하는 것이다.

 

16장 두 노트 이야기 : 푸케와 콜베르, 1661 ~ 1680년 파리

푸케 : 17세기 프랑스의 최고 부자. 카세트(비밀노트) 라는 두 권의 노트로 자승자박의 길을 갔다. 콜베르는 노트의 도입부에서 푸케가 정치적 지지와 동맹에 따라 범주화한 긴 장부를 발견했다. 푸케는 도박으로 보석, 시골의 땅을 손쉽게 차지. 그에게 저당 잡히고 만 궁정 신하들이 수두룩했고, 이들의 빚은 카세트에 기록되었다.

푸케가 지위를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왕정을 사취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는 나라의 세수는 축소하고 지출은 부풀리는 식으로 왕에게 프랑스의 회계 정보를 사실과 다르게 전달했다. 푸케는 나라에 돈을 빌려주는 은행가들로부터 은밀하게 막대한 수수료를 챙겼고, 구시대적인 방식으로 국가의 관세, 조세, 부담금을 거두는 징세청부인들에게 뇌물을 요구했다.

 

이러한 부패는 국가 공무원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푸케가 우정국장 무슈 드 누보를 매수하여 경쟁자들의 편지를 가로채게 한 사실이 카세트를 통해 확인되었다. 그간 콜베르의 수사를 오랫동안 방해했던 정보누설이 설명되고, 콜베르의 푸케 체포계획을 은폐한 강도 높은 비밀유지가 정당화되는 대목이다. 카세트가 기록한 방대한 연줄의 범위 자체가 그를 보호하기도 했다. 푸케는 사형을 면하고 대신 추방형과 재산몰수형을 선고받았다.

 

콜베르 : 1619 ~ 1683. 루이 14세 시대의 재무장관(1665~)· 해군장관(1668~).

부르주아 계층. 랭스의 상인 집안 출신으로, 파치올리의 체계에 따라 부기 기술을 배웠고, 근면성실함과 행정 수완 덕분에 출세했다. 마자렝은 왕에게 콜베르를 추천했다나라의 행정은 여전히 중세에 머물러 있었다. 즉 국고는 혼란과 부패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푸케가 빠지면서 콜베르는 방법론을 중앙정부에 적용할 자유재량이 생겼다. 그것의 성패는 전적으로 서류작업에 달려 있었다.

콜베르에게 당장의 우선 과제는 국가의 세수에 질서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파치올리의 복식 부기법에 기초한 3종의 회계장부 체계를 고안했다. 첫 번째 장부는 분개장으로, 필요자금의 출처와 함께 일일 지출 내역이 기록되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원장으로, 국고의 수입(자금대장)과 지출(지출대장)을 보다 상세히 기록한 것이었다. 파치올리의 체계와 마찬가지로 상호 참조 덕분에 불일치와 누락을 발견하기가 쉬웠다. 신성한 통치권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일하고자 하는 자발적 의욕을 겸비한 국왕은 이제 결손 부분을 보완하여 바로잡게 되었다. 매달 그는 콜베르와 함께 3가지 회계장부를 점검하면서 분개장의 계산된 잔고를 살펴본 뒤 직접 승인했다.

 

10년이 지나 콜베르는 국가의 세수를 극적인 수준으로 증대시켰다. 300년 전 피렌체와 베네치아 상인들처럼 콜베르는 원장에 기반을 둔 사업 기법을 가져다가 정보 관리에 적용했다. 각각의 목적에 따라 서로 다른 노트를 사용한 것이다. 그는 공무원 수백 명을 채용하여 프랑스의 경제와 정부의 모든 측면, 즉 각 종교기관이 내야 하는 세금 규모를 결정하는 복잡한 합의망은 물론이고 농장과 작업장, 항구들을 조사했다. 그는 사안별로 명세표를 배정한 다음 각각 그 안에 들어간 데이터를 종류별로 분류했다. 공공 서고와 콜베르의 개인 서고로, 오늘날까지 현존한다. 정규직 직원 여럿이 각종 목록과 색인, 상호 참조로 이루어진 복잡한 체계를 활용하여 그 명세표들을 처리했다.

 

명세표는 프랑스의 도로와 운하의 상태에서 군대, 포도밭, 유리공장, 맥주공장까지 모든 것을 아울렀다. 콜베르는 관련된 모든 정보와 수치, 선례를 지면에 모아서 정리한 뒤에야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그의 의사결정 방식이었다.

콜베르는 왕에게 황금노트를 만들어주었다. 해마다 그는 국가회계를 아주 작은 책자 하나로 요약했다. 3*4인치(7*10cm)에 불과해 언제나 외투 주머니에 휴대할 수 있었다. 루이 14세가 언제고 지출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최신 수치와 데이터가 쉽게 손 닿는 곳에 있었던 셈이다.

 

콜베르는 상인으로서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를 하나의 회사처럼 운영했다. 루이 14세를 회장으로 모시는 최고 경영책임자로. 그리고 프랑스 경제를 근대화함으로써 나라의 힘을 키우기로 결심했다. 유리제조공, 조선공, 레이스 제작공들은 모두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엄격하게 규제받았다. 콜베르는 루이 14세를 설득하여 프랑스의 사회기반 시설에 신경 쓰도록 했고, 왕의 군대에 자금을 댔으며, 귀족들이나 민중 사이에서 반발을 초래하는 일 없이 세수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쓰는 인간 5  (0) 2026.03.19
쓰는 인간 4  (2) 2026.03.18
쓰는 인간 2  (1) 2026.03.17
쓰는 인간 1  (1) 2026.03.16
살아갈 날을 위한 괴테의 시 : 이종원  (1) 2026.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