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암병동

부실이 2021. 2. 19. 16:17

지은이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읽은 때 : 2000년

 

 

* 솔제니친의 생애(1918-2008) :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

그는 러시아 고전문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20세기 러시아 문학의 금자탑을 이룩한 대표적인 작가인 동시에 소비에트공산체제가 문학에 가한 온갖 탄압 속에서도 양심의 등불을 밝혔던 작가이다. 수많은 역경 - 당의 창작 간섭·검열·유형·투옥·추방 등 실제의 자기 경험을 통해서 더욱 사랑하는 조국 러시아와 그 땅에 생존하는 같은 시대 사람들의 수난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써왔던 것이다.

 

솔제니친 자신이 작가의 임무에 대해서 ‘정신과 양심의 신비, 삶과 죽음의 충돌, 영혼의 불멸 영혼의 불안에 대한 승리를 보편적이고 영원한 주제로 취급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조국의 불행한 운명과 비극, 모순을 파헤치면서 그 근원을 찾아내려는 끈질긴 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천만명 이상의 무고한 러시아 사람들이 스탈린 전제 시에 강제수용소와 감옥에 갇혔으며, 폭력과 테러의 바탕에 서 있는 독재체제의 허구성과 스탈린주의에 의한 소비에트 사회의 냉혹하고 부패되고 비인간적인 모든 면을 폭로, 고발하였으며, 그의 많은 작품 속에는 ‘비판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19세기 러시아문학의 찬란한 유산을 계승하여 인도주의와 비판정신으로 그것을 현대에 재현하였다.

 

솔제니친의 문학과 사상은 또한 그의 탁월한 작품구성과 간결하면서도 독특한 필치로서 묘사되는 문체 속에서 찬란한 인간기록으로 승화되고 있다. 그의 생에는 위대한 러시아 문학의 대가로서 뿐만 아니라, 현대에 사는 인간들의 수난과 역경에 대항하는 정의와 양심을 상징하는 역정이며, 일시적인 압제자들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탄압은 결국 인간정신을 말살할 수는 없다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그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솔제니친은 1918년 카프카즈 지방의 키슬로보드스크시에서 태어나서, 러시아 남부 돈강 유역의 로스토프시에서 자랐다. 그의 조부는 엄격한 그리스 정교의 열렬한 신자였다. 솔제니친은 조부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소설에서 현명한 할아버지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러시아의 이상주의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생활한 솔제니친의 아버지는 레프 톨스토이에 심취한 인텔리였고, 제1차 세계대전 때에 대학을 그만두고 독일 전선으로 달려간 애국사상에 불타는 청년이었다.(총기 오발사건으로 죽음) 그의 어머니는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으로서 러시아가 예술에 눈부신 발전을 가져온 시기에 예술에 관심을 가졌던 여성이었다.

 

1924년 어머니와 아들은 로스토프시에 살면서 어머니는 직업을 가졌으며, 작가의 유년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녀는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숙해서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으나 구시대 인텔리겐차로 낙인이 찍혀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1929년부터의 농업의 집단화와 사회적 혼란은 어린 솔제니친의 가정에도 식량의 부족과 궁핍한 생활.

식료품 가게 앞에서 오랫동안 장사진을 이루고 기다리던 교훈이 그에게 훗날 강제노동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인내와 용기를 주었다.

 

1941년 대학 졸업하고 독일군의 전격적인 공격으로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군에 입대, 포병장교로 복무. 1945년 체포되어 사상범 8년의 실형이 언도되어 모스크바의 형무소에 수감. 우연히 형무소내의 비밀경찰의 연구계획을 수행하는 과학연구소에서 죄수수학자로 일하게 됨.

죄수로만 구성된 이 연구소는 경찰의 감시 하에 기밀 사항의 연구를 하게 되었으며, 솔제니친에게는 명상에 잠길 수 있는 평온과 읽고 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의 자서적적 소설 [제1원]은 이 연구소 생활의 대부분을 상세히 수록하고 있으며, 그의 형기 8년 중 4년을 보냈다. 연구소 내에서 철학, 정치, 역사 등에 대한 광범위한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다. 아직 자기 학문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솔제니친은 이러한 토의는 그의 사상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미래의 작가로서의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되었다.

 

형기의 3년은 강제수용소 ‘라게리’에서 석공과 주조공으로서 강제노동을 하게 되었다. 이때 종양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53년 35세에 솔제니친은 형기가 끝나면서 카자흐공화국의 잔불주의 벽촌에 추방되었다.(암병동에 나오는 우시 쩨레크)

정치범은 형기가 끝나면 다시 추방처분을 받게 되어 유형수로서 벽지에서 주거의 자유가 없이 머물러야 했다. 그는 이 마을의 중학교 물리·수학 교사로 있으면서 희곡 ‘사슴과 라게리의 여인’과 장편소설 ‘제1원’을 쓰기 시작.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스탈린 비판을 계기로 솔제니친은 드디어 유형지에서 중앙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57년 명예 회복. 라쟌시에서 중학 물리·수학을 가르치며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함.

1962년(44세) 중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발표. 일약 저명 문인이 되어 모스크바에 고급생활을 제공하겠다는 작가동맹의 제의를 거절.

1968년(50세) ‘암병동’이 영국, 서독, 이탈리아에서 러시아어판으로 출간.

1970년 반소 작가로 작가동맹에서 추방됨.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선정됨.

1974년 1월 소련에서 강제 추방됨. 스위스에서 집필 중.

1994년 1991년 소련 붕괴 후 러시아로 다시 돌아왔다.

 

* 작품 세계

‘암병동’은 1967년에 완성된 작품이다. 그의 모든 작품에서의 특징은 소설 속의 각각의 인물이 독립성을 지니고 자기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교향악적인 장편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의 많은 장·단편, 희곡, 소품 등에서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다른 주인공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예속되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그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암병동’은 정확한 시간과 장소의 데이터를 구비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 시간은 우즈베크 공화국의 수도 타슈켄트의 종합병원의 암병동이다.

 

작품의 줄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53년 3월 스탈린의 죽음, 12월의 베리야의 처형, 1955년 2월의 말렌코프의 해임, 1956년 2월의 제20차 전당대회로 움직이던 해빙기 상황으로 변천되는 소비에트 사회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소설의 시사적인 인물로 묘사된 루사노프는 비단 소비에트 사회에만 기식하는 인물은 아닐 것이며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에도 있는 관료적 인물의 표본이며, 암에 침식된 환자로서 비굴한 관리의 심리묘사는 작가의 필치를 가장 비판적 리얼리즘에 접근시키고 있다. 루사노프와 대치되는 인물, 유형수 고스토글로토프는 솔제니친 자신이며, 그 시기와 소비에트 사회여건 속에서의 작가의 영혼일 수도 있다.

 

그는 병동에서 가장 특수한 인물이긴 하지만 추방생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인간의 정열과 재생하는 생명력을 회복기의 환자로서 보여주었으며, 생생한 육감을 느끼게 한다. 그는 관료사회체제에 도전하는 영웅인 동시에 학대받는 인간의 전형이며 불의와 부정을 항거하며 진실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부각되어, 작가의 의지로써 묘사해 나간다.

그밖에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계급을 대표하는 환자 등과 의사, 간호원·잡역부 등은 암과 그 치료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보편적인 인간상들이며 그들은 1950년대 소비에트 사회에 실재하던 구체적인 인간들이다. 암병동은 다시 말해서 소비에트 사회의 하나의 축도인 동시에 여러 가지 복잡한 인간관계의 파노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

 

솔제니친 그가 걸어온 험준한 생애와 모든 작품에서 진실을 추구하려는 염원과 사랑이 넘치고 있으며, 수많은 생명의 위협과 소비에트 사회에서의 문학인이 걸머져야 할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면서 조국 러시아에 대한 사랑, 러시아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애착, 러시아 대자연에 대한 사랑이 밑바닥에 깔렸으며, 그것은 그의 진실을 추구하려는 용기와 함께 그의 작품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19세기의 찬란한 러시아 고전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대에 사는 학대받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그들의 호소를 외치는 인도주의적 작가정신은 냉혹한 소비에트 사회체제에 대한 강렬한 비판정신과 그의 저항정신을 고취하였으며 솔제니친 문학, 진정한 20세기 러시아문학의 새 기원을 이룩한 문제의 작품들을 써냈던 것이다.

 

그의 추방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수용소군도’는 노동수용소의 내막을 폭로하는 외에 소비에트 사회체제의 방대한 범죄적 사실과 제도 자체의 근본을 파헤치는 날카로운 필봉으로 제2차세계대전 때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의 비인도적인 갖가지 비행을 열거하고 있다. 스탈린주의와 레닌주의는 사회주의와 혁명의 미명 아래 자행된 재산의 약탈과 테러 행위를 정당화했으며, 스탈린 사후에도 소비에트체제의 근원이 변동되지 않는 한 아무런 변화도 없었음을 역설하였다.

 

* 주요 등장 인물

* 고스토글로토프 : 주인공으로 영구추방을 당한 34세의 환자
* 루사노프 : 속물 관리의 표본인 환자.
* 돈초바 : 마마로 불리는 여의사로 방사선과 주임
* 간가르트(베라 코르닐리예브나) : 여의사로 애칭은 베가
* 에게니야 우스치노브나 : 외과의사
* 조야, 미다, 올림피아다 블라지스라보브나 : 간호사
* 오레시첸코프 : 노의사
* 에프렘(노동자 환자) :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죽음
* 좀카(소년 환자) : 다리 잘라내는 수술
* 시브가토프(타타르인 환자), 슐루빈(환자)
* 바짐(청년환자) : 흑소육종. 악성종양. 8개월이면 끝장남. 콜로이드 금으로 치료

 

[내용정리]

 

* 돈초바와 세 의사

돈초바 밑에는 세 사람의 의사가 있었다. 모두가 젊은 여의사였고 그 세 사람의 경험이 고르게 되도록, 또 진단의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3개월마다 부하의 부서를 바꿔서 외래진찰실과 방사선실 그리고 병실을 돌게 한다.

간가르트는 지금 병실의 담당의사였다. 이 일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위험하며, 연구가 제일 뒤떨어진 것은 방사선 조사의 정확한 양에 유의하는 일이었다. 종양에는 치명적이고 육체의 다른 부분엔 해가 미치지 않도록 방사선조사의 강도와 양을 계산하기 위해서 정해진 공식이라곤 없었다. 대신에 오랜 경험이 있었고 또 육감 같은 것이 있었으나, 그 외엔 환자의 상태를 일일이 검사하는 가능성 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또 다른 하나의 외과 수술로서 오직 방사선에 의해 맹목적이지만 장기적으로 실시하는 수술이었다. 건강한 세포는 전혀 상하지 않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었다.

 

환자는 X선 기계의 스크린에 비친 빛과 그림자의 흰 영상이 아니라, 간가르트를 신뢰하고 그 목소리와 시선을 고대하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이며, 구체적인 인간들인 것이다. 간가르트는 자기가 치료를 끝내지 못한 환자들과 헤어지는 게 서운했었다.

 

에겐베르지예프는 희망과 신뢰 그리고 기쁨마저 가지고 돈초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참되게 학문을 닦고 참으로 세상에 유익한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하여, 이런 소박한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기쁨이었다.

돈초바는 X선진단법과 X선치료법을 다 함께 익히고 있는 흔치 않는 의사들 중 한 사람이었다. 지식의 세분화란 시대적 추세에도 아랑곳없이 세 의사들에게도 이 두 가지를 다 파악하도록 애써왔다. 자기 혼자만 은밀히 알고 있으면서 남한테는 절대 가르쳐줄 수 없는 비법 따위는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간가르트가 자기 자신에게 느끼는 힘, 애원하는 환자들을 죽음에서 구원하는 힘, 그 원천을 따지고 보면 모두 돈초바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의사로서 자기 힘의 한계를 느끼며, 치료법의 불완전을 새삼 의식하고, 분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토록 얌전하고 예의 바르고, 감사하는 마음에 넘친, 슬픈 운명의 타타르인 시브가토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고통을 길게 연장시켜 주는 일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시브가토프 덕분에 돈초바의 학문적 관심의 방향까지도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구해야겠는 생각만 가지고 최근 골격병리학 연구에 깊이 들어가 있었다.

 

시브가토프가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추측하거나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고통이 너무나 오래 지속하는 동안에 과거의 생활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3년 동안이나 끊임없는 투병생활을 지낸 지금, 이 타타르의 젊은이는 병원에서도 제일 온순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했다. 마치 오랫동안 신세를 지고 미안하다는 듯이 자주 얄팍한 웃음을 지어 보이곤 했다.

 

* 조직검사의 이야기

드러난 배의 피부를 지나 피하지방과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여러 기관을 지나, 종양 덩어리를 지나, 위장을 지나, 동맥과 정맥을 흐르는 혈액을 꿰뚫고 임파액을 지나, 세포를 지나며 척추와 그 밖의 뼈를 뚫고, 다시 잔등의 피하지방과 혈관 상피세포를 지나 침대 널빤지를 꿰뚫고, 두께 4센치미터의 마루바닥을 지나, 또 기초 콘크리트를 지나, 드디어 땅속으로 어마어마한 X선은 흘러가고 있었다. 사람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전자장의 벡터, 좀더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마주치는 모든 것을 찢어버리고 구멍투성이로 만들어버리는 양자의 탄환을 말한다.

 

아무건 소리도 없이 이루어지며, 당하는 쪽의 조직은 전혀 아픔을 느끼지 하지 않는, 이 거대한 양자의 탄환은 맹렬한 사격을 열 두 번이나 받는 것과 같은 조사를 받는 동안 삶의 의욕과 생명의 감각과 식욕, 그리고 경쾌한 기분까지도 고스토글로토프에게 되돌려 주었다. 두 번이나 세 번째 사격으로 해방이 된 그는 꼭 알고 싶어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꿰뚫는 이 탄환이 왜 종양만을 공격하고, 육체의 다른 부분은 건드리지도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X선은 물론 아무거나 다 파괴해버립니다. 단지 정상적인 조직은 이내 원상태로 회복되지만

종양 세포만은 그렇게 되지 않는 거에요.

 

고스토글로토프는 이 여의사와 다투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단지 과도한 치료에 대해 경계해 두자는 것뿐이었다. 돈초바 그 인간에 대해서는 오히려 존경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처음 진찰을 받을 때부터 그의 종양을 손가락으로 확실하게 찾아내고 또 정확히 그 윤곽을 더듬어 냈기 때문이었다. 종양에도 무슨 감각이 있는 것같이 촉진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종양 자신이 말해준다. 의사가 손가락으로 종양을 알아내고 있는지는 환자만이 평가할 수 있었다. 돈초바는 X선도 필요치 않을 만큼 정확히 종양을 잡아냈다.

 

난 그저 자기의 생명을 처리할 권리를 주장한 것뿐이에요.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생명을 처리할 권리가 있어요. 선생은 그런 권리를 인정하지 않습니까? 선생은 어쩐지 올바른 입장에 서려고 하지 않는군요. 일단 치료를 맡게 되면 생각하는 것까지도 환자를 대신하려고 하고 있어요. 환자를 대신해서 생각해 주는 것이 선생의 지시가 되고, 5분간의 회의가 되고, 예정표와 계획이 되며, 그리고 병원의 명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난 수용소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 알의 모래알에 지나지 않아요. 또 다시,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선생이 종양을 격퇴하고 그 성장을 제지시켜 준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하고 있어요. 종양은 지금 방어전을 하고 있어요. 저도 방어전을 하고 있는 겁니다. 보통 병사들은 방어선상에 있을 때 제일 편안하답니다. 그런데 철저히 치료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어요. 암의 치료에는 끝이 없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자연의 과정에는 징후가 잘 드러나지 않는 포화상태라는 특질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큰 노력으로도 작은 결과밖엔 얻을 수 없어요. 나의 종양도 처음의 재빠른 타격에 의해서 지금은 완만하게 활동할 뿐입니다. 그래서 아직 목숨이 붙어 있을 때 퇴원시켜 달라는 겁니다.

 

사실 나는 나의 생활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았어요. 말하자면 앞으로의 생활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생활은 없었습니다. 앞으로 반 년 산다면, 반 년을 더 사는 겁니다. 10년, 15년 앞으로의 계획은 서 있지도 않아요. 그래서 필요 이상의 치료는 쓸데없는 고통을 줄 뿐이요. 그동안에 x선을 조사받을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고, 구토가 나고, 뭣때문에 그래야 하는 겁니까?

 

돈초바 : 나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분뿐일 거에요. 전과 달라진 데가 없어요. 여기로 올 때나 거의 마찬가지란 말예요. 한 가지 명백해진 것은 당신은 종양과는 싸울 수 있다는 겁니다. 아직 해볼 여지가 남았어요.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퇴원을 하겠다니. 5회, 10회가 문제되는 건 아닙니다! 1회라도 필요한 것만큼 하든가 안하든가 하는 거에요! 오늘 이후에는 하루에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 하는 거에요. 담배도 엄금하고 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절대로 필요한 조건은 우리를 신뢰할 뿐만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치료를 받는 거에요. 기쁨으로! 그렇지 않고는 낫지를 않아요!

 

생명을 구한다는 것, 이 병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생명이었으며, 그 이하의 것은 아니었다.

목숨만 구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장해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 평소부터 돈초바의 굳은 신념이었다.

 

* 방사선 후유증

문제의 요점은 말하자면, 10년, 15년 전에 대량 조사에 의하여 순조롭고 나무랄 데 없이 잘 치료가 끝나버린 x선 치료가, 이제와서 조사를 받았던 부분에 뜻하지 않게 조직파괴가 기형화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환자는 대량 조사에 의해서만 불가피했던 죽음에서 구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량의 조사로써는 아무 효력도 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 기형화된 환자가 찾아온다 하더라도, 그 기형은 이미 덤으로 살아온 세월과 앞으로 살 세월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노의사 오레시첸코프

무슨 일이건 하는 사람은 항상 어떤 결과, 선과 악을 낳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더 많은 선을 낳고 어떤 사람은 더 많은 악을 낳는 것 그것 뿐이다.

돈초바는 닥터 오레시첸코프를 만나서 상의할 사항을 메모하고 있었다. 마치 지금 세 조수에게 일을 가르치듯이, 예전 전쟁 전에는 그가 돈초바의 손을 붙잡고 자상하게 지도해주며, 시야를 넓게 가져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전 세계가 제아무리 전문화되어 가더라도, 넌 자기의 것을 꼭 붙잡고 놓쳐서는 안돼. 한 손에는 x선 검사를 다른 손에는 x선 요법을 말이야. 그런 사람이 따로 하나도 없게 된다고 해도, 절대 자기 자세를 흐트러뜨려서는 안되는 거야.’

 

너무 좋은 의복은 몸의 동작을 방해하는 것처럼 명예는 치료의 방해가 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것에 의하여 과오를 범할 권리를 빼앗기고, 깊이 생각할 권리도 빼앗기고, 실은 권태롭고 이완되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어도 그것을 감쪽같이 감추고, 모든 사람들은 기적적인 치료만을 고대하게 된다. 이러한 것은 질색이었다.

 

의사가 자기 전문 영역의 병에 걸린다는 것은, 그것은 참으로 성실한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말하자면 사진이 노출계나 시계와 같은 것 그러한 도구가 곁에 있으면, 눈으로 노출을 결정하거나 그저 감각으로 시각을 안다는 걸 아주 잊어버리고 말아요. 그래서 막상 도구가 없게 되면, 곧 긴장해버리는 거야. 그래서 의사는 좀 어려웠지만, 환자는 시험이 적었으니까 쉬웠어. 그래 의학은 정말 발전했을까? 의학은 새로운 것을 조금씩 얻었지만, 결국 이전의 좋은 것들은 손가락 사이로 싹 도망쳐 버렸지.

 

* 에프렘(나서 빈둥거리고, 커서 설치다 죽는 것 - 이것이 인생이 아닌가)

공포심으로 해서 그는 그저 일에만 집착하고, 되도록 수술을 연기해 보려고 애썼다. 여태껏 그는 생활에는 익숙해 있었으나 죽음에 대한 준비는 없었다. 죽음으로의 이 전환은 그에게 힘겨운 일이었으며, 또 그 전환의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그 죽음을 자기로부터 쫓아내기 위해 애써 매일 일하러 나갔다.

 

한번 그런 병에 걸리게 되면 전문적인 기능도, 요령이나 좋은 생활도, 일도, 급료도, 이 모든 것이 무로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이 무력감이나 최후까지 암이 아니라는 자기기만으로부터 명확해진 것은 사람은 모두 겁쟁이라는 것과 과거 생활에서 무엇인가 놓쳐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병원을 거닐면서 생각나는 것은 까마 강가에서 죽어간 노인들의 일이었다. 러시아인도 타타르인도, 우드무르인도, 모두 다 한결같이 거드름을 피우거나, 덤비거나 죽지않겠다고 버티지도 않고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청산할 여러 가지 일들을 미루지 않고 조용히 준비를 갖추었으며, 그 노인들이라면 제아무리 암이란 소리를 들어도 아마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 사람의 말 상대는 바로 이 책인 것이다. 그 책에 씌어 있는 힌두교도의 신앙에 의하면 우리는 아주 죽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만은 동물이나 다른 사람한테 옮겨간다는 것이다. 뭣이든지 모조리 없어지게 내버려두지 말고, 어떤 자기 것을 남겨두고 싶었다. 죽음을 초월한 뭔가 자기의 것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이 죽을 운명의 사나이 에프렘으로부터 자기자신이 떨어져 나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마치 이웃 사람의 죽음을 보듯이 에프렘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렇게 이웃 예프렘의 죽음에 대해서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는 내부의 그 무엇만은 절대로 죽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이 병실에서 예프렘의 솔직한 마음은 평소에도 마음에 들었다.

 

* 에게니아 우스치노브나

외과의 부부장 에게니아 우스치노브나한테는 외과의다운 데라곤 하나도 없었다. 이 부인은 지금 60세가 넘었으나 뒷모습은 아가씨였다. 여의사는 여태까지 살아온 동안 외과의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소설에 나오는 카자흐인 에로시카가 유럽 의사에 대해서 말하는 대사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 뜻도 이해하고 있었다. ‘무턱대고 잘라내는 것 밖에는 몰라. 우리 시골의사가 진짜지. 약초를 쓸 줄 알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메스 대신 방사선이나 화학 약품, 약초에 의한 치료방법이라든가, 아니면 빛과 색채, 그리고 텔레파시에 의한 요법이 환자를 구하게 되고, 외과 의사가 인간의 문명에서 자취를 감출 운명이 되더라도 우스치노브나는 결코 그것을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 좀카가 스초바 아주머니에게 : 왜 운명은 이다지도 공평하지 않을까요. 왜 어떤 사람은 한 평생을 평온무사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무엇이나 제대로 되지 않을까. 그런데도 사람의 운명은 그 사람 나름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 하느님 뜻대로에요. 하느님은 모든 것을 통촉하고 계시니, 우리는 참아야 해요.

 

* 죽음에 관하여

우리는 일생동안 한 가지 것만 설교를 들어왔어. 너희들은 집단의 일원이다 라고 말이야.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의 일이지 죽을 때가 되면 집단에서 풀려나게 되는 거야. 물론 그때도 집단의 일원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죽는 순간은 혼자가 된단 말이야. 종양은 한 사람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지, 집단 모두에게 덤벼드는 것은 아니야.

 

고스토글로토프는 흥분해 있었다. 자기가 그렇게 오랫동안 연설을 하고 또 그 연설에 모두들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는 별안간 되돌아온 생활 감각에 매달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두 주일 전만 해도 그 생활에서 영원히 소외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 생활 감각은 도시의 사람들이 부닥치는 일들을 해결해 주지도 않았다. 집이나 재산 또 사회적 명성이나 돈 같은 것을 가져다주지 않았으며 얻게 된 것이라곤 본질적인 기쁨, 고스토글로토프가 아직 잊어버리지 않았던 그런 기쁨이었다.

말하자면 누구한테서도 명령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대지를 걸어 다니는 권리, 혼자 있을 수 있는 권리, 도망 방지용 조명에 눈이 부시지 않고 별을 바라볼 수 있는 권리, 자기 손으로 불을 끄고 어둡게 하고 잠잘 수 있는 권리, 편지를 우체통에 집어넣을 수 있는 권리, 일요일에 휴식할 권리, 냇가에서 수영할 수 있는 권리, 그 밖의 여러 가지 권리들.

그러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멋있는 권리로 해서 지금 다시 건강이 되돌아온 것이다.

 

조야는 고스토글로트프가 추방된 것은 살인 때문이 아니라는 것, 결혼하지 않았던 것은 육체적 결함에서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몇 해가 지난 지금도 옛 애인에 대해서 이렇게 부드럽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사람이 참으로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고운 얼굴보다는 고운 마음씨라는 것이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고난을 이겨나가는 인내와 힘을 조야는 이 사람에게서 강하게 느꼈다. 그것은 놀이의 상대가 되는 사내아이들한테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저녁 무렵 부드러운 황금빛 태양은 고스토글로토프의 핼슥한 낯빛을 싱싱하게 되살리고 있었다. 그 따뜻한 빛 속에서 이 환자가 결코 죽지 않고 쾌유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범죄자란 욕심이 많은 녀석들이야. 남한테 붙어서만 살 수 있는 기생충이니까. 이미 자빠져버린 인간을 짓밟고, 차고 하는 것이 놈들이 즐기는 짓이란 말이야.

 

* 루사노프

몇 시간 사이에 루사노프는 자기의 지위라든가 공적 그리고 장래의 계획 따위의 모든 것을 상실하고 자기의 내일조차 예측할 수 없는, 70킬로 무게의 흰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모범적인 루사노프의 가족과 규모 있는 생활, 호사한 주택 - 이 모든 것들이 이 며칠 사이에 그에게서 떨어져 종양의 저쪽으로 가버린 것이다. 종양은 담장처럼 가로놓여, 이쪽에 있는 것은 루사노프 혼자인 것이다.

 

이제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던 허울이 벗겨지고 말았다. 공포도 가슴 언저리에 스며들어 멍울지고 있었다. 로지체프가 들어와 때리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두려웠다. 재판이나 사회적 제재나 굴욕을 그는 겁내지 않았으나 그에게 매 맞는다는 것은 몹시 두려웠던 것이다. 로지체프와는 꼼소몰에서 이전에 같은 조직에 속했던 친구 사이로서 숙소도 공장으로부터 두 사람이 배정받았던 것이다. 나중에 반목이 심해진 결과 상부에 음해성 정보를 올렸다.

 

1937년에서 8년에 걸쳐, 그 너무나 좋았던 시기에는 사회의 분위기가 눈에 띌 정도로 깨끗해지고 호흡하는 것이 편했지 않았던가! 사기·중상·비방을 좋아하는 자, 거추장스런 지식인, 그러한 녀석들이 다 사라지고, 잠잠해지고, 숨을 죽였으며, 반면 끝까지 원칙에 충실하고 끈기있는 루사노프의 친구나 루사노프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크게 활기를 치며 다녔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져버려, 무언가 애매하고 불건실한 시대로 되버렸다. 한때 시민으로서의 최선의 행동을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부끄럽게 생각하여야 했다. 오히려 자기에게 닥치는 위험을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루사노프가 하는 일 중에서 구체적으로는 본인에게 아무런 압력도 가하지 않으면서 한 인간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실감.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두 세 사람 손에 의해서, 또는 몇 차례 전화를 주고받고 하는데서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루사노프의 심사평으로 도시에서 추방된 사람들이(구준, 로지체프) 명예회복을 해서 돌아온다는 정보로 떠는 루사노프.

당시는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과제였습니다. 도덕적으로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숙청은 밀고를 좋아하는 인간이 없이는 불가능하답니다.

 

평소 그의 고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제 병에 몸을 내맡겨버렸다. 처음에는 초조했으나 그후부터 공포의 대상이었던 종양도 지금은 당당히 주권을 선언하고, 이미 루사노프 자신이 아니라 종양이 미래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충성심과 정확성과 인내심 이외에 아무런 장점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광속에 가까운 속력 : 바짐

난 운명을 받아들였어. 하지만 오래 산다고 해서 인간이 반드시 값있는 생활을 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나한테 남겨진 현재 최대의 문제는 앞으로 얼마나 일할 수 있겠는가 하는 거야.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은 뭔가 해야 돼. 나는 앞으로 3년만 필요해.

 

바짐의 시간에 대한 탐욕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습관인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을 아주 싫어했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자식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바짐! 1분을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이야, 한 시간을 하루를, 일생을 헛되게 보내게 되요’

소년시절부터 시간을 이토록 절약하고, 그 시간 절약의 정신을 두 동생한테 전해주었고,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어른들이 읽는 책을 읽게 된 것도, 6학년 때 집에 화학실험실을 꾸며놓은 것도, 다 앞으로 발생될 종양과의 경쟁을 시작한 징조가 아니었겠는가? 바짐한테는 이것이 적의 모습도 안 보이는 맹목적인 경쟁이었다.

 

흑소육종의 환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도 그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바짐의 시간과 질량은 마치 광속에 가까운 속도라 날아가는 듯했으며, 다른 사람과는 달랐던 것이다. 시간의 용적은 커지고 질량은 압축되었다. 이 젊은이한테는 몇 년의 세월은 몇 주일로, 며칠은 몇 분으로 압축되었다. 정말로 서둘게 되는 것은 이제부터였다.

 

* 아름다운 회상 : 카드민 부부

어려서부터 러시아의 숲과 들판에 정신적인 유대를 가지며 중부 러시아의 조용하고 호젓한 자연에 익숙했던 러시아인이, 타의에 의하여 이 고장에서 영원히 추방된 순간부터 이 초라하고 광막한 자연에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신기한 노릇인가.

카드민 부부는 항상 이렇게 되뇌이는 것이다. ‘참 좋아요! 예전 생활보다 얼마나 좋은지 몰라! 이렇게 매력적인 장소로 와서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어! 인간의 행복이란 생활수준에서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접촉, 그리고 우리들이 생활을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마음의 접촉도, 생활을 어떻게 보는 것도, 우리들 마음에 달렸으며, 즉 사람은 행복을 바라기만 한다면 항상 행복할 수 있으며, 그것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드민 부부처럼 살아가고, 사물의 현재 그대로의 모습을 즐기는 것! 조그마한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야말로 현명한 사람인 것이다.

 

낙관론자란 어디로 가든지 좋지 않은 일 투성이지만, 우리는 그래도 운이 좋았어, 하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함부로 탄식을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비관론자란 어디든지 좋은 일뿐인데 여기서만은 좋지 않은 일들 뿐이라고 자기 운명을 늘 한탄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우유나 고기는 시장에서 살 수 있으나, 개의 충성을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들의 동물에 대한 사랑은 사람에 못지 않았으며, 고양이에 대해서는 항상 웃음 거리가 많았다. 그러나 우선 동물에 대한 사랑을 잃게 되면, 다음은 필연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도 잃게 되는 것이 아닐까?

 

* 모래밭으로 사라지는 강

우리의 츄강은 바다나 호수, 그 밖의 큰 강으로도 흐르지 않습니다. 모래밭에 사멸하는 강! 어디에도 흐르지 않고, 가장 좋은 물과 힘이 중도에서 사라져버리는 바로 이것은 너무나 우리 죄수들의 생애와 흡사합니다. 우리도 또한 아무것도 못하고 말게 될 겁니다. 명예스럽지 못한 죽음을 강요당하는 겁니다. 우리의 가장 좋은 부분, 우리가 아직 쇠퇴하지 않았던 시기라면, 그것은 굽이쳐 흐르는 큰 강의 한 구간에 불과하며, 우리의 추억, 우리의 상봉이나, 대화나, 협조로 이루어지는 것들은 두 손에 떠올린 물만큼 작은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래밭으로 사라지는 강. 그러나 그 마지막 한 구간까지도 의사들은 우리한테서 빼앗아버렸습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대신해서 호르몬요법 같은 무서운 치료법을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불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생명을 부지해야 하지만.

그렇다면 이런 것은 어떨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생명에 색채나 향기, 감동을 주는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것은 어떨까요? 소화나 호흡, 근육운동, 두뇌활동 밖에 없는 생활을 감수해야 합니다. 목석과 같은 생활, 도식으로 돼버립니다. 이것은 지나친 대가가 아닐까요? 이런 댓가를 치르게 한다는 것은 모독이 아닐까요? 군대에서 7년, 수용소에서 7년 - 생지옥 같은 세월을, 아득한 두 번의 7년이 지난 후에 남녀의 구분을 식별할 수도 없게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주문은 아닐까.

 

좀까 : 그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발은 이미 좀까한테 인생에 없어서 안될 귀중한 것이 못되고, 단지 귀찮은 짐, 한시라도 빨리 내던져야 하는 짐처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 달 전에는 이 세상의 종말처럼 느껴지던 수술도, 지금은 구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가치판단의 기준이란 이렇게 변동하는 것이다.

 

* 베라

이렇게 신뢰하며, 믿고 몸을 맡길 수 있는 일이야말로 여간해서는 의심을 풀지 못하는 고스토플로토프한테는 큰 즐거움이 되었다. 이 상냥한 여인, 공기처럼 가벼운 여인, 조용히 움직이며, 신중히 생각하는 여자는 결코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지 각별한 사고방식을 가져야 해요!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각별한 사고방식을 가져야 돼요!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뿐이라면 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어요?

 

베라의 말은 고스토플로토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고뇌에 싸인 그를 구원의 방향으로 밀어올렸다. 그리하여 소년의 장난감 고무총에서 튕겨나간 돌맹이처럼 윙 소리를 내며 일상의 반복에서 벗어나 훨씬 예전의 곳으로 착륙하는 것이다. 그곳은 고스토글로토프의 유년시대였다. 베라가 지금 말한 것은 소년 시대의 고스토글로토프의 사고방식이었던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은 함께 있을 때의 안전감, 보호해 주고 감싸주는 느낌인 것이다. 모든 시민적인 권리를 빼앗긴 고스토글로토프한테서 베라는 어쩐지 이러한 든든한 마음을 느꼈다.

 

* 슐루빈(수용소에서의 경험으로 침묵하기 쉬운 사람은 내용이 풍부한 사람)

16세기에 프란시스 베이컨은 우상의 학설이라는 것을 제창했어요. 말하자면 세상의 인간들은 순수한 경험에 의하여 살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편견에 의하여 경험을 더럽히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 편견이 곧 우상이거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편견 : 종족의 우상
무엇이든 인간의 관점으로만 다른 존재를 판단할 때 생기는 오류.
노래하는 새 ⇨ 울고 있는 새
개인에게 특유한 편견 : 동굴의 우상
개인 각자의 종교, 교육, 교양, 습관, 환경, 호오, 격정 등으로 인해
공정한 견해와 판단을 그르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베이컨은 여러 사람들과 협동하고 상호비판을 통하여
이 우상을 극복할 것을 제안한다.
개인적 특수성 → 우물 안 개구리
시장의 우상
시장의 우상은 언어 때문에 생기는 편견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에서는 수많은 말들이 오간다.
그런데 언어 자체가 편견을 만들기도 한다.
언어의 잘못 → 인어라는 말이 있으니 인어는 있다. 흡혈귀. 드래곤
극장의 우상
권력가, 배우, 지식인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선동당할 때 발생하는 오류(국회의원)
이는 마치 배우가 극장에서 연출하는 연극 속의 주인공과 같이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함을 말하는 것이다.
→ 어떤 유명한 학자가 지구는 평평하다고 하니, 지구는 평평하다.

그 모든 우상의 머리 위에는 공포의 하늘이 있었어! 회색 구름이 낮게 덮인 공포의 하늘. 이따금 저녁녘에 태풍도 아닌데 진한 회색빛 두꺼운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평소보다 일찍 어두컴컴해지고, 우울한 분위기에 잠기게 돼요.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돌집이나 지붕 밑으로, 불 곁으로, 친한 사람 곁에 숨고 싶어지지.

 

그런 하늘 아래서 나는 25년간 살아왔던 거야. 구원은 오직 머리를 숙이고, 침묵하는 것뿐이었어. 마누라를 위해서, 때로는 아이들을 위해서, 또 어떤 때는 죄 많은 나의 육신을 위하여 계속 침묵하지 않을 수 없었어. 하지만 마누라는 죽었어. 나의 육신은 지금 똥주머니에 지나지 않아. 옆구리에 구멍을 뚫리고 말이야.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어찌된 탓인지 몰인정한 놈으로 되고 말았어.

 

개인기업은 확실히 유연한 것이긴 하지만, 그 좋은 점은 좁은 범위 안에서만 성립되는 거야. 개인기업은 브레이크를 걸어두지 않으면 반드시 동물인간이라고 할까, 거래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놈들이 나타나게 돼요. 한정 없이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밖에 모르는 놈들이지. 자본주의는 말이야. 경제적으로 파탄나기 전에, 이미 윤리적으로 파탄하고 있어요!

 

사회가 급격히 변할 때, 우리는 생각했었지. 생산수단을 바꾸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인간은 곧 변한다고 말야! 인간도 생물의 일종이었으니까. 그것이 변하는 데는 몇 천년이 걸려요!

사회주의는 물질의 과잉된 상태에서는 건설할 수 없어요. 들소처럼 되어버린 인간은 그 물질까지도 짓밟아버리니까 말이야. 그리고 지치지도 않고 증오에 찬 말로써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좋지 않은 일이야. 사회생활을 증오의 기초 위에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도덕적 사회주의란 그러한 거야! 인간은 행복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란 것도 또한 시장의 우상이니까. 상호부조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돼요. 먹이를 찾아다니는 짐승에게도 행복은 있어요. 상호부조를 할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이야!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란 말이야.

 

* 돈초바

수없이 여러번 되풀이하고, 종횡으로 낱낱이 알고 있는 줄만 알았던 사실이, 이렇게 갑자기 생소하고 보지도 못한 것으로 변모해버리다니, 돈초바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돈초바로서는 이때까지의 인간의 육체는 다 똑같은 구조로 보았다. 하나의 해부도는 모든 것을 해명해 주었던 것이다. 일상생활의 생리도 감각도 모두 같은 것이었다. 정상적인 것과 정상이 아닌 모든 것은 권위 있는 서적에 의하여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며칠 동안에, 돈초바 자신의 육체가 그 질서정연한 위대한 시스템으로부터 굴러 나와서 추락해버렸다. 그리하여 육체는 지금, 여러 가지 장기를 쑤셔넣은 보잘것없는 하나의 주머니에 불과했다. 어느 장기가 언제 발병할 것인지, 언제 외칠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자기 병의 진행 상황이나 치료에 있어서의 자기의 새로운 입장 같은 것이, 지금 돈초바로서는 마치 그의 아들 그림처럼 아주 이상하게 보였다. 돈초바의 과거의 생활에는 화려하거나, 즐거운 것이라곤 없었으며, 그저 일과 불안의 반복이었던 것 같았으나, 지금 와서 보니 그 생활은 얼마나 멋있는 것이었던가! 이 생활에 이별을 고한다는 것이 눈물겨운 괴로움이 아닌가!

 

언뜻 느끼게 된 것은, 20년 동안 일했던 이 고장에서 돈초바를 붙잡는 것이라곤 무엇 하나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기의 병을 감추고 있을 무렵에 예상했던 것이 맞았다. 만일, 누구라도 한 사람에게 앓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면, 모두가 전력을 다해서 움직이게 되고, 이쪽은 이제 아무 할 일도 없이 되어버릴 것이다. 모든 일상적인 관계, 항구적인 것으로 보였던 인간관계는 며칠이 아니라 몇 시간 사이에, 찢기고 망그러지고 말 것이다. 병원에서나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사람, 바꿀 수 없는 사람이었던 돈초바가 이제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갔다. 제아무리 이 땅 위에 집착하여도, 영원히 존속할 수 없는 우리들!

 

* 고스토글로토프

전부 죽는 건 아니야. 부서진 조각이야. 나의 내부는 전부가 나의 것이 아니야. 이따금, 분명히 그렇게 느끼게 돼. 뭔가 절대로 근절할 수 없는 아주 고귀한 것이 내부에 도사리고 있어요! 세계 정신의 조각과도 같은 것이야.

 

백화점에서 그가 산 물건은 아이론 하나 뿐, 그것은 오랜 시간을 들여서 결국 하잘것 없는 것밖에 사지 못했을 때의 피로와 비슷한 것이었다. 

 

다람쥐는 누가 강요하거나, 먹이를 미끼로 꼬인 것도 아닌데, 그 바퀴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다람쥐는 아마 그 허황된 행위, 허황된 운동에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 처음에는 틀림없이 호기심에서 발판에 가볍게 닿아 보았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끝이 없는 놀음이 되리라는 것을 다람쥐는 몰랐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 알았을 텐데 미친 듯이 계속 돌고 있었다. 다람쥐의 앞발은 층계를 높이 올라갈 수는 없었다. 이 우리 안에는 쳇바퀴를 멈추게 하거나 아니면 다람쥐를 바퀴에서 구출해 내려는 외적인 힘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람쥐에게 쓸데없는 짓이라고 가르쳐줄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 불가피한 해결은 단 하나가지 - 다람쥐의 죽음인 것이다.

 

덤으로 붙여진 짧은 여생을 오늘부터 시작하면서 그것이 과거의 생활과는 아주 다른 것이 되기를 고스토글로토프는 기대했다. 다른 동료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나 고스토글로토프는 살아남았다. 그는 암으로도 죽지 않았다. 추방생활은 이제 달걀 껍질처럼 깨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