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우리 몸이 세계라면 : 4장 죽음의 한가운데 있는 삶

부실이 2022. 1. 23. 16:02

* 김승섭

연세대 의과대학 졸업. 2016년과 2017년 고려대학교 최우수 강의상인 석탑강의상.

2018년 최우수 연구사인 석탑연구상을 수상.

천안소년교도소에서 공중보건의사로 일한 이후, 재소자 인권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구금시설 건강권 실태조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회역학자로서, 차별경험과 고용불안 같은 사회적 요인이 비정규직 노동자나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어떻게 해치는지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2014년 : 인턴·레지던트 근무환경 연구
2015년 :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건강 연구, 국가인권위원회의 ‘소방공무원의 인권상황 실태조사
2016년 : 한국 성인 동성애자·양성애자 건강 연구, 세월호 특조위의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조사 연구
2017년 : 한국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
2018년 : 천안함 생존자 건강 연구, 백화점·면세점 화장품 판매직 노동자 근무환경 및 건강 연구를 책임연구원으로 진행했다.
현재 : 한국 성소수자의 건강을 연구하는 ‘레인보우커넥션 프로젝트’의 책임연구원으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소송, 동성결혼 소송, 트랜스젠더 성별 정정소송, 군형법 위헌 소송에서 법정 증언을 하거나 전문가 소견서를 제출하며 참여한 바 있다.

환자를 치료하는 것만큼 사람들이 아프지 않도록 예방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 자기 삶에 긍지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오롯한 당신](공저)을 출판했다.

 

* 들어가며

전북 부안 백산(50미터) : 1894년 3월 동학농민군 봉기 한 곳.

어떻게 그 자그마한 언덕이 존엄하게 살고 존엄하게 죽고자 하는 사람들의 꿈을 감당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요. 고통받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었던 그 일상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언제든 오를 수 있었던 그 낮음 때문이었을까. 제 공부가 어떤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 백산으로부터 배우고 싶었습니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몸은 다양한 관점이 각축하는 전장입니다. 저는 그 관점들이 모두 동등한 수준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눈길을 주고, 권위에 굴하지 않고 비판적 질문을 던지는, 여러 가설과 경쟁하며 검증을 통해 살아남은 관점들이 그렇지 못한 관점들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의미를 준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당장은 사소해 보일지도 모르는 그 차이를 먼 훗날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간격이 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역사와 과학을 줄기 삼아, 인간의 몸과 질병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인 주제는 생산되지 않는 지식과 측정되지 않는 고통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을 병들게 하는 가난과 인종차별에 대해서, 표준화된 몸이 되지 못해 아파야 했던 여성의 몸과 가장 절실히 필요한 의약품이 가장 천천히 개발되는 세계의 논리에 대해서 나누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이해를 포기하지 않는 길을 함께 찾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모든 지식은 특정한 사회적 과정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지식이 생산된 역사적 맥락을 아는 일은 그 결과를 이해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조선의 민중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의학서적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의 고민과 인종주의 과학으로 조선을 통치하려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논하며, 겹겹이 쌓여 현재를 구성하는 역사를 당대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질문하고 검증하는 과학의 힘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습니다. 세계의 본질을 묻고 그 위에서 인간의 몸을 이해하고자 했던 그리스인에 대한 경탄과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불가침의 권위로 존재하던 히포크라테스 의학에 맞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과학자들의 도전, 직관이나 경험이 아닌 데이터를 근거로 치료의 효과를 판정하는 현대 역학 연구의 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어떤 명제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더 나은 설명을 찾아가는 과학적 사유는 인류가 세계를 보다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든든한 도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시간보다 준비하는 시간이 더 길었던 책입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논문과 책을 읽으며 여러 학자들의 글을 만났습니다. 직접 뵌 적 없는 분들이지만, 공부하면서 줄곧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글을 쓰다가 막다른 벽에 막혀 답답해할 때면, 어김없이 누군가가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서 길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학자들의 그 보이지 않는 노력에 빚지고 있습니다.

 

책을 쓰는 과정은 제 공부의 가치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주제를 다루더라도 그 논의가 왜, 지금, 여기 필요한지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담배회사 내부문건에서 드러난 마케팅 전략이나 일제강점기 식민지 근대화론과 같이 정치적으로 예민한 주제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 민감한 주제들을 에둘러 가지 않고, 제가 연구자로서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단단한 땅을 찾고 그 위에서 가능한 것들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책을 쓰며 그렇게 세상이 던지는 질문을 두고서 제 공부로 부딪쳐보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연구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에게 감사하다는 말 전합니다. 세월호 참사부터 성소수자 차별까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부터 천안함 생존 장병 연구까지 먹먹하고 아픈 주제의 연구를 계속하면서도 전력을 다해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어, 저도 긴장을 놓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만나는 그들에게 더 나은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욕심이 제게는 계속 공부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영선과 세 딸, 지인, 해인, 리인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쉽지 않은 자리를 지켜온 동생 창섭이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 책을 존경하는 어머니 박숙희 님께 바칩니다. 2018년.

 

4장 죽음의 한가운데 있는 삶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습니다. 죽음은 인간을 하나로 묶는 공통분모이지요. 첫번째 글은 가장 많은 한국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인 암을 이야기합니다. 암의 발생원인과 그로 인한 죽음의 원인을 이야기하면서, 죽음의 불평등과 사회의 역할에 대해 질문합니다. 두번째, 중세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사망에 이르게 했던 흑사병을 다루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으로, 죽음의 주도권을 의학에 넘겨주면서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법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 자기 죽음의 주도권을 잃은 시대

남편이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녀도 의료진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삶의 모습을 남편도 원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치료가 중단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남편은 세상을 떠납니다. 결국 가까운 지인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아내와도 마지막 이별의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이 일화가 씁쓸했던 것은 질병과 죽음의 당사자인 환자가 철저하게 자신의 몸에 대한 주도권을 의학에 빼앗긴 채로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은 마지막까지 죽음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미루기 위해 더 많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로 인해 환자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어떤 형태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기회를 잃어버렸지요.

자신의 병명을 정확히 알고 있고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경우에도,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죽음을 피할지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그렇게,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삶의 일부이면서도, 말할 수 없는 무엇이 되었습니다.

 

* 죽음의 죽음 : 우리의 죽음은 언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켰을까?

 

[죽음 앞의 인간] : 필립 아리에스

18세기,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했고, 그런 죽음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일은 조롱거리로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죽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을 슬퍼했지만, 그러한 감정의 바탕에는 임박한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가까운 이들을 불러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작별인사를 하는 일이 의식처럼 행해졌습니다. 그렇게 죽음은 삶의 일부로 존재하는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죽음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산업화를 거치고 공중위생의 개념이 사회적으로 널리 퍼지면서, 죽음에 땀과 고름과 배설물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입니다. 임종의 시간은 더 이상 일상적으로 존재하며 삶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치러내는 의식이 아니라, 숨기고 피해야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은 그런 추한 죽음을 사회적으로 은폐하기에 가장 적절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상적인 죽음은 자신의 품격을 지키며 불가피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생명연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의료적 처치의 중단으로 인한 기술적 현상이 되었습니다.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이러한 변화를 두고 ‘죽음의 죽음’이라고 표현합니다.

 

* 현대의학이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과 고통을 살아낸다는 것

언젠가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이고, 또 어느 시점에는 병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차원에서 질병을 예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보건학과 개인의 질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의학 모두에서 질병은 기본적으로 없어져야 할 나쁜 것입니다.

[아픈 몸을 살다] : 아서 프랭크(사회학자)

내 몸을 전쟁을 벌이고 있는 두 편으로 나눌 수는 없었다. 종양은 나쁜 놈들이고 이에 맞서 건강한 원래의 내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종양까지도 포함하는 오직 하나의 나, 하나의 몸만이 있었다. 내가 여전히 하나의 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마음이 편해졌다.

 

이 책의 훌륭한 점은 병을 겪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고환암이라는 질병을 가진 몸을 살아내는 환자 당사자의 목소리를 충실히 적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내 몸의 일부였던 어떤 조직이 의사에게서 고환암 진단을 받는 순간 제거해야 할 나쁜 놈이 됩니다.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와 환자는 같은 질병을 두고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환자인 아서 프랭크에게는 종양까지도 포함하는 하나의 몸만이 존재한 것이지요.

 

많은 경우 환자는 자신의 질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의사가 고환암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환자도 자신의 몸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지만 질병이 발생한 현장이 의사에게는 외부의 공간이지만, 환자에게는 자신의 몸입니다. 의사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환자에게 몸은 자신의 것인 동시에 자신의 것이 아닌 무엇인가가 됩니다. 환자는 질병과 고통으로 인해 자신이 맺어온 여러 관계가 변화되고 그 속에서 고통을 살아내야 하지만, 의학은 환자의 그러한 경험에 관심이 없습니다.

의학은 통증이 삶에서 갖는 의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통증은 질환의 증상일 뿐이다. 의학은 아픈 사람의 통증 경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며 치료법이나 관리법에만 관심을 둔다. 의학은 분명 몸에서 통증을 줄여주지만, 그러면서 몸을 식민지로 삼는다. 이것이 우리가 의학의 도움을 구하면서 맺는 거래 조건이다.

이러한 거래 속에서 환자의 몸은 측정 가능한 외부의 영토이고, 의학을 통해 분석하는 대상이 됩니다. 의사들은 물론이고, 환자 자신조차 자신의 몸을 의학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환자의 몸이 의학의 식민지가 되는 순간이기도 하지요.

 

의학의 입장에서 고통은 기술적으로 측정하고 제거해야 하는 무엇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수량화는 그 고통을 직접 몸으로 겪고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거해야 하는 질병을 대하는 의사가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그 과정에서 그 고통을 직접 겪는 당사자들, 아픈 몸을 살아야 하는 환자의 입장에서 고통은 그 고유한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이반 일리치는 이러한 현상을 ‘의학의 복수’라고 불렀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질병과 죽음에 대한 물음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해야 고통과 죽음을 삶의 일부로 끌어안고, 그 과정에서의 주도권을 외부인이 아닌 죽어가는 사람 자신이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 묻는 것이지요.

 

현대 의학은 인간의 질병과 고통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인간의 고통을 줄이고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제공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질병과 고통 앞에 무력했던 과거와 다른 태도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현대 의학이 인간이 보다 존엄하게 살고 존엄하게 죽는 과정을 보조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의학의 몸에 대한 판단이 그 몸으로 살아가는 환자 자신의 판단보다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오래 사는 일과 고통을 없애는 일에 모두가 집착하는 세상에서,

일리치는 고통을 살아내는 일을 공부하고 실천했다.

- 2002년 이반 일리치 사망.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제리 브라운의 기고 글.

누구든 삶의 어느 순간에는 불가피하게 고통과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그 불가피한 죽음과 고통을 외부의 것으로 밀어내지 않고,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살아내는 길을 이반 일리치는 찾으려 했던 것이지요.

 

*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과학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 흑사병, 죽음이 일상이 된 중세의 풍경

중세에 페스트는 모든 것을 몰살시키는 동시에 전혀 이해될 수 없는 존재였다.

 

[데카메론]

조반니 보카치오가 이탈리아 피렌체에 흑사병이 휩쓸고 간 직후인 1350년부터 3년간 쓴 글입니다. 급속히 퍼져가는 전염병으로 인해 그 시기 당대인들이 느꼈던 무력감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환자와 말만 주고받아도 기름 묻은 것에 불이 확 옮겨 붙듯 퍼져 나가는 흑사병으로 인해 자신이 살던 집과 땅은 물론이고 친척까지도 버리고 떠나가는 상황이었던 거지요. 인류의 마지막이 온 것 같은 모습이었던 겁니다.

 

1347년 유럽 남부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당시에 거대한 사망이라고 불렸습니다. 중세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죽음에 이르게 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우리는 당시 유행했던 흑사병의 원인이 페스트균, 전염병의 원인이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라는 게 밝혀진 것이 19세기 후반이고, 흑사병의 원인인 균을 처음 발견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120여 년 전인 1894년입니다. 그러나 이 균이 발견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흑사병의 원인이 페스트균인지는 학자들 간에 논쟁이 있었습니다.

흑사병으로 사망한 인간의 유골에서 오랜 시간 퇴화를 견디고 흔적처럼 남아 있는 미량의 DNA를 찾아내 재구성하고 분석합니다. 연구팀은 연구 결과를 종합해 결론을 내립니다. 유럽 국가에서 14세기 중엽 유행했던 전염병은 예르시니아 페스티스에 의한 것이 맞다고요. 다만, 오늘날의 페스트균과 증상에서 차이가 있는 건 당시 유행한 예르시니아 페스티스의 DNA가 오늘날 발견되는 균의 DNA와 온전히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흑사병의 원인균에 대한 논쟁은 이렇게 종결됩니다. 2천년 대 들어 꽃피우기 시작한 고고유전체학의 힘이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과학자들은 집요하면서도 정밀한 노력으로 작지만 튼튼한 이야기들을 쌓아 올립니다.

 

* 원인을 알 수 없는 병과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중세의 노력

: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필리프 6세는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던 흑사병에 대해 그 원인을 밝히는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명령합니다. 파리대학 의학부 교수진이 쓴 보고서는 1345년 3월에 있었던 화성과 목성과 토성이 함께 모인 천체의 변화로 유럽에 엄청난 재앙이 왔고, 그것이 바로 흑사병이라는 설명입니다.

 

질병의 원인에 대한 이해는 그 예방 및 치료와 직접적으로 닿아 있습니다. 폐암을 예방하기 위해 금연을 권하는 것도, 당뇨병 환자에게 혈당을 낮추기 위해 인슐린을 주사하는 것도, 그 원인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 예방과 치료입니다. 흑사병이 유행한 이유를 천체의 변화나 지진으로 인한 유독가스 발생으로 설명하는 사회에서 흑사병에 대한 효과적인 예방과 치료가 이뤄질리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중세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죽음을 당대의 제한된 지식으로 어떻게든 설명하고자 노력했던 역사이니까요.

 

당대 의사들은 흑사병이 나쁜 공기가 몸에 들어와서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미아즈마)

목욕과 운동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시 의사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진행한 흑사병 치료는 사혈입니다. 왜 사혈은 당대에 합리적인 치료로 받아들여졌을까요? 17세기 초 윌리엄 하비가 혈액이 신체를 순환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전까지, 유럽의 의사들은 혈액이 사지로 흘러가 사라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팔과 다리에 사라지지 못하고 고여 있는 피가 있는 경우에는 사혈을 통해 피를 빼내는 게 치료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세기 폐렴환자를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는지 검토한 루이박사의 실험 이후 사혈은 의학에서 점차적으로 그 입지를 잃게 됩니다.

 

* 전염병조차 여성에게 더 가혹했을까

: 15세기 문헌으로 유추하고, 현대 과학으로 증명하기

: 15세기 스웨덴에서 주교로 일했던 크누트손의 기록

가장 먼저 언급한 흑사병에 걸리지 않기 위한 대책은 종교적 반성입니다. 그리고 좀 더 실질적으로 오염된 곳을 피해 병을 일으키는 불결한 공기, 즉 미아즈마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조언을 하지요. 남향의 창을 닫고 전염시키는 남풍을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 데서는 흑사병이 유럽의 남부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점점 중부, 북부로 올라가며 퍼져 나갔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모든 육체적 욕망을 삼가야 한다는 말은 어떤가요? 크누트손 주교가 이 글을 써서 흑사병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남성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대의 성별에 따른 권력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흑사병 유행 당시 여성들의 삶에 대한 기록을 하나 더 살펴보지요. 흑사병 환자가 발생하면서 이들을 보살피는 간병인도 필요했을 겁니다. 흑사병에 걸린 환자를 돌보는 일은 모두에게 두려운 일이었겠지요. 그렇다면 환자를 돌보는 일은 누가 했을까요? 이 일이 아니면 생계가 막막했던 늙은 노파나 허드렛일을 하던 하층 계급의 여성들이 간병을 도맡았습니다. 타인의 건강을 돌보는 그들의 건강은 누구도 보살피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이들이 흑사병에 걸릴 위험은 높을 수밖에 없었지요.

 

흑사병 유행 시기에 그 이전의 건강 상태에 따라 사망률에 차이가 생겼다는 연구나 남성에 비해 여성의 사망위험이 더 높았다는 연구는, 어찌보면 결과 자체가 놀랍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이 질문들에 답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거에요. 그러나 이들의 연구가 있어 우리는 중세 유럽을 바꾸어놓은 대규모 재난 앞에서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보다 나은 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밝혀낸 이러한 죽음의 불평등은 세계적으로 대규모 재난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오늘날, 그에 대해 보다 적절히 대응하고 또 그 피해 상황을 분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함의를 제공합니다.

 

* 채찍질 고행단, 이 잘못된 광신도들을 조롱하기란 쉬운 일이다.

흑사병이 계속 퍼져 나가자 중세 유럽에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두 사건은 인간이 질병의 원인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 질병의 전파와 치료에 대한 과학적 관점을 견지하지 못할 때, 죽음의 전염병을 인류가 어떻게 대처했는가에 대한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는 채찍질 고행단이고 또 하나는 유대인 학살입니다.

 

채찍질 고행단, 십자가 형제단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흑사병의 광풍 속에 등장합니다. 이 고행단의 모습을 초창기에 사람들은 환영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부패한 교회 조직을 가혹하게 비판했으니까요.

사람들에게 고행단이 환영받고 인정받으면서 힘이 생겨났고, 본래 추구하던 모습과는 달리 점점 변질되어 갑니다. 어느 시점부터 이들은 메시아를 흉내내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고행단이 아니라, 스스로를 성스러운 군대처럼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존 교회와 교황의 특권을 침범하기 시작합니다. 교황이 아닌 자신들에게 악마를 물리치고 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죄를 사면하며 구원을 팔기 시작했던 거지요.

 

이에 1348년 5월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6세는 공공장소에서 회개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파문을 경고하며 고행단의 순례를 금지시킵니다. 교회에서는 이들 고행단을 처벌하기 시작합니다.

이 잘못된 광신도들을 조롱하기란 쉬운 일이다. 그들의 미신은 우습고 그들의 행위는 외설적이며 그 동기는 불길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이 고행단들이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절망적인 공포를 기억해야만 한다. 이들은 극심한 고통과 불편함에 헌신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영혼과 영광을 위한 측면도 있지만, 자신이 희생하면 하느님이 그의 백성을 멸망의 저주에서 덜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다. 성인은 거의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악한도 없었다. 재난이 협박하자 죽음이 그를 덮칠 때까지 비참한 절망 속에서 기다리느니 아무리 헛되더라도 뭔가 저항하는 몸짓을 하려는 이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 필립 지글러

오늘날의 시각이 아니라, 14세기 중엽 끊임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에 놓여 있던 무력한 당사자의 눈으로 우리가 십자가 고행단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럴 때에 당대를 살아가던 그들의 행동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지요.

 

* 희생양, 질병의 책임을 약자에게서 찾은 사람들

공동체가 위기에 처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그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희생양을 찾아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당시 어떤 사람이 희생양이 되었을까요? 사회적 약자입니다. 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사회적으로 인기가 없는 소수파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존재가 피부색이나 성별 등으로 쉽게 식별 가능하다면, 더욱 희생양으로 선택되기 쉽겠지요. 흑사병 유행 당시 유럽에서 나병환자와 유대인은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병은 나균에 의해 발생하는 만성감염병입니다. 병이 진행되면 통각 능력이 상실되어, 신체 말단이 감염되거나 썩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과거 나병은 불치병으로 신의 저주처럼 묘사되던, 그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공동체에서 추방되던 병이었습니다.

 

유대인과 나병 환자는 모두 사회적 약자이지만, 사람들은 후자에 대해 시기하거나 질투하지는 않았습니다. 흑사병이 유행하던 당시, 유대인인들의 모든 공직 진출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땅을 소유할 수도 없었고, 장인으로 일할 수도 없었지요. 그들에게 허용된 주요 직종 중 하나는 사채업이었습니다. 사채업의 성격상 돈을 받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무자비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수백 년 쌓인 유럽에서 그들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것이지요. 소수자라는 낙인, 사채업으로 형성된 증오에 더해 경제적인 이유도 함께 작동합니다. 사채업자인 그들이 처벌받거나 사망한다면 빚을 갚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유대인들에게 흑사병 유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폭력적인 과정에 기여한 요소가 하나 더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실제로 병에 덜 걸렸던 것이지요. 게토에 고립되어 생활했기 때문에 외부와 접촉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유대인의 생활규칙에서 손을 자주 씻도록 하는 위생습관이 있었던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유대인 의사로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은 그는 랍비의 지시로 우물에 흑사병을 퍼트리는 독을 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백을 계기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기 시작. 1348년 4월, 프랑스 툴롱에서 유대인 40명이 자신의 집에서 살해당합니다. 그렇게 유대인 학살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지요. 1349년 2월, 유럽 최대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던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수백 명의 유대인이 공개적으로 화형을 당합니다. 남은 유대인은 그 도시에서 추방되고 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은 기독교인들이 탈취하지요.

학살은 독일 전역으로 퍼지고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흑사병의 공포 앞에서 사람들은 당시 사회적 약자인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유대인은 죄가 없지만 있다고 인정해야만 하는 희생양이 되었고, 공동체의 공포와 분노 표출의 대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 이탈리아 피스토이아 정부의 대응

몇몇 도시들은 흑사병에 맞서 보다 합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갑니다. 피스토이아는 흑사병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보건위생규정이라고 이름 붙인 법령을 만들고 적극적으로 대응합니다. 가장 인상적인 변화는 장례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장례식은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흑사병 유행 기간 동안 피스토이아에서는 장례식에 사람을 소집하는 것 자체가 금지됩니다. 사망한 사람의 집에 조문객이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고,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장례미사 참석은 가족으로 제한하고, 조문객들은 교회의 입구까지 오는 게 허용된 전부였습니다.

 

*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과학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하거나 원인이 밝혀졌어도 치료법이 없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유행할 때마다 ‘흑사병’이라는 단어는 역사 속에서 소환됩니다.

1980년대 초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지만 그 원인을 알지 못하는 공포 속에서 ‘현대판 흑사병’이라고 불렸던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 에이즈(면역이 결핍되 나타나는 상태)에 대해 생각해보지요.

질병의 원인에 대한 비과학적 설명이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맞물려 당시 사회적 소수자였던 유대인 학살로 이어졌던 사례를 보며, 저는 오늘날 한국에 만연한 HIV 감염에 대한 공포와 낙인을 떠올립니다. 지난 30년간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HIV 감염은, 20세에 HIV에 감염되더라도 평균 70세까지 살 수 있고 약을 꾸준히 먹어 체내 바이러스 농도가 일정 수준 미만으로 떨어지면 콘돔 없이 성관계를 해도 상대방에게 전염되지 않는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HIV 감염인은 에이즈 합병증이 아닌 자살로 죽고 있습니다. 한국의 HIV 감염인들의 자살로 인한 사망은 동일 연령 비감염인에 비해 10배 이상 높습니다. 질병에 대한 비과학적인 낙인과 혐오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원인을 파악할 수 없는, 당장은 치료법을 가지고 있지 못한 치명적인 전염병이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는 그 무지의 공포 속에서 계속해서 선택을 해야 할 겁니다. 그때 흑사병과 제2의 흑사병이라고 불리며 등장했던 수많은 전염병 유행의 경험을 기억하며 우리가 조금 더 윤리적이고 과학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 읽은 후 소감

환자가 멀지 않은 죽음을 앞두고 18세기와 19세기 이후에 죽음을 대하는 자세들에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다.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만해도(1980년 이전) 병원에서 돌아가시는 분보다 집에서 돌아가시는 분이 많았다.

전국민 의료보험이 시행되기 전과 후의 시기로 나누어도 될 것 같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죽음에 관해서는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서 비교적 건강할 때 생각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하는지 가끔가끔 이 질문에 부딪치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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