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시작 : 질문되어야 하는 것들
과학에서는 무엇보다 좋은 질문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잘못된 질문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답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역시 중요합니다. 합리적 사유에 따른 검증 가능한 절차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과학자들이 ‘효율적인’ 연구를 위해 사회적 약자를 착취하고도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합니다.
자신이 가진 기득권과 연구 과정의 윤리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론과 성과만을 주목하는 세상에서 ‘쓸모없는’ 질문으로 시작해 과학적 사유의 토양을 다진 그리스의 성취와, 자신의 권력에 질문하지 않았던 과학자들이 남긴 한 비극적인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쓸모없는’ 질문에서 시작된 과학 :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 과학이란 무엇인가
2010년 천안함은 어떻게 침몰했나?
이 질문에는 여러 대답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예민한 정치적 이슈 중 하나인 이 질문에 대답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론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사고 과정이 얼마만큼 합리적이었는가 따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과학적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조사 과정의 합리성을 따지는 것은 천안함에서 사망했던 고귀한 생명들과 살아남은 장병들의 아픔에 대해 한국사회가 마땅히 갖춰야 하는 예의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은 진리를 찾아내고 질문에 대한 정답을 알려준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의 목소리를 신뢰하는 것은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합리적 사고 과정 때문이지, 그 결론이 진리를 담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뉴턴의 법칙은 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확고한 진리의 묶음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에 질문을 던지는 비판적 사고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합리적 사유 방식이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면, 그 결과가 올바른 것인지 그 예측이 맞았는지보다도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한 과학적 접근은 인간 인식의 지평을 넓혀온 가장 든든한 도구였습니다.
* 신의 저주로 병에 걸린 사람들
고대 그리스에서는 한센병에 걸리면 공동체에서 격리되며 살아야 했습니다. 가족도 만날 수 없었고,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근처로 오면 가까이 오지 않도록 소리를 쳐야 했습니다. 한센병은 마이코박테리움 렙프래라는 박테리아 감염에 의해 생겨나는 만성병이지요.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치료 가능한 특정 박테리아에 감염되었을 뿐인데 균의 존재도 몰랐고, 치료할 수 있는 항생제도 없던 시절에는 신의 분노로 인한 천형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존엄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이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시간 인류는 질병이 신이나 귀신의 분노와 같은 초자연적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학사가인 황상익 선생님은 역사 속에서 수백 년 동안 의학의 의미를 두고 의(毉)와 의(醫), 두 글자가 경쟁을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는 밑변에 무당을 가리키는 무(巫)가 들어가 있고, 후자는 술을 가리키는 유(酉)가 들어가 있습니다. ‘의학, 의술’을 의미하는 의는 후자인 의(醫)입니다. 하늘의 뜻을 받아 땅에 전달하는 무당과 인간이 만들어 종종 약으로 쓰이던 술이 질병 치료를 놓고서 각축을 벌였고 결국 신의 분노와 같은 초자연주의적 원인을 이야기하던 의(毉)가 경험적 근거에 기초해 자연주의적 원인을 말하던 의(醫)에게 패배한 것입니다.
그 변화의 시작점에는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남겨놓은 저작들은 고대 그리스의 과학이라는 풍요로운 토양 위에서 피어난 경이로운 결과물입니다.
* ‘쓸모없는’ 질문에서 시작된 과학,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많은 이들이 고대 그리스에서 과학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왜 그리스의 과학을 사람들이 특별하게 생각할까요? 그것은 그들이 실용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세계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즉, 그 질문의 쓸모없음과 닿아 있습니다.
최초의 과학자로 불리는 탈레스는 물론이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그리스의 과학자들은 국가의 지원없이 세계에 대한 탐구를 진행했습니다. 과학을 위한 국가의 제도적인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그리스의 과학자들은 놀라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토지 측량이나 피라미드 건설과 같은 실용적인 목적 없이 세계의 구성원리에 대한 추상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쓸모없어 보이는 질문들이 모든 걸 바꾸어놓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철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이 생겨난 것입니다. 최초의 과학자로 알려진 탈레스의 질문은 그런 것이었어요.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탈레스는 이 추상적인 질문에 세상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답합니다. 현대인은 이 대답을 듣고 감탄하지 않을 거에요. 우리는 현대 물리학이 기본 입자인 분자나 원자를 그리고 더 작은 단위인 쿼크를 발견해나간 역사를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 질문이 인류 역사에서 가지는 함의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매우 단순해 보이는 이 주장은 우리 주변의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질료에 관해 진술하려는 최초의 시도이다. 이 주장은 물질 이론의 출발점, 즉 일상적인 지각의 수준 밑에 있는 물리적 세계의 구조에 관한 과학적 이론의 출발점이다.
-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 매클렐란 교수
당대의 시각으로도 탈레스의 생각에는 명백한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모든 물질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면, 상극의 성질을 지녀 물과 접촉하면 사라지는 불 역시 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명입니다.
한 세기 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모순에 답하기 위해 새로운 가설을 내세웁니다. 물보다 훨씬 추상적인 개념인 ‘무한’을 세상의 근본 물질로 이야기한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물과 불을 모두 설명할 수는 있지만, 과도하게 추상적인 내용이 되어 버립니다. 그다음 세대 학자인 아낙시메데스는 세상의 원초적인 물질은 공기(프네우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엠페도클레스가 등장해 앞서 말한 이야기보다 당대 사람들에게 더 설득력 있는 가설을 내놓습니다.
엠페도클레스의 주장은 히포크라테스 의학을 비롯한 그리스인의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론입니다. 세상이 네 가지 원소, 물, 불, 흙, 공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설입니다. 그의 이론은 직관적일뿐더러,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과가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이유를 흙의 성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과일이 흙으로 이루어진 땅으로 다가가는 힘으로 설명했습니다. 그 과정을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탈레스부터 엠페도클레스까지 이어지는 이들을 오늘날은 그들이 거주했던 지역의 이름을 따서 밀레투스학파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이론을 공부해보면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추상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에 답해가면서, 앞의 가설이 가지고 있던 한계를 뒤의 가설이 넘어서고 극복해가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같은 질문에 답하는 여러 가설이 경쟁하면서 더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지식이 살아남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과학적 사유의 핵심요소입니다.
‘세상의 근본 물질이 무엇인가‘라는 이 추상적인 질문에 대한 탐구는 소크라테스 시대를 거치며 질적인 도약을 이룹니다. 물론 이데아를 중심으로 인간이 감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세계 너머의 원리를 이야기한 플라톤과, 상대적으로 감각과 관찰에 기초한 저술로 중세 과학의 원형을 확립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라본 세상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연철학자들의 한계를 넘어, 세상을 일관된 체계로 인식하는 수준에 도달합니다. 흔히 ‘그리스의 기적’이라 불리는 성취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를 ‘기적’이라고 부르는 일을 불편해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과학의 민중사’를 쓴 클리포드 코너 교수는 ‘그리스의 기적’이라는 말이 그리스가 주변 문명권에 빚진 적이 없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20세기 초부터 ‘그리스의 기적’이라는 명칭이 통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와 닿아 있다고 코너 교수는 주장합니다. 당시 유럽, 특히 독일의 인종주의 과학자들은 그리스인을 자신들의 조상들로 여겼는데, 백인 우월주의를 주장하며 식민지의 유색인종을 지배하려던 제국주의 국가 입장에서는 그리스인의 놀라운 성취가 유색인종인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우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러한 지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리스인이 이루어낸 성취를 폄하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들은 비판적 사고와 합리적 사유 과정이라는 과학문화를 만들어냈고, 그 위에서 오늘날까지도, 과학의 주요 화두인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움직이는가?’ 라는 물음에 체계적으로 답했던 최초의 인물들이니까요. 신의 존재를 배제하고 세계를 설명했던 그리스의 과학문화는 인간의 질병을 이해하는 데에도 거대한 공헌을 합니다. 그 합리적 사유의 토양 위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의사인 히포크라테스와 그의 동료들, 즉 히포크라테스학파가 등장합니다.
* 히포크라테스 학파, 초자연적인 원인을 배제하고 질병을 생각한 최초의 사람들
2500여 년 전 그리스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신의 분노로 질병이 발생하고 나쁜 기운이 몸에 들어와서 아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들은 주술사들이나 떠돌이 사제 같은 사람들에게 의존했지요. 이 글에서 등장하는 신성한 질병이란 무엇일까요? 이 병은 한센병과 반대로 신이 특별히 선택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병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카이사르가 이 병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오늘날 흔히 뇌전증이라고 부르는 병입니다. 근육경련과 발작을 동반하는 이 병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뇌질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병을 두고 당대의 주술사들은 신성한 병이라고 부르며, 그 원인을 신에게서 찾았습니다. 주술사들은 치료를 위해 죽음을 의미하는 검은 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 주문을 외우도록 권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학파에게 주술사들의 설명과 치료는 ‘자연적 기원’을 갖는 이 질병을 두고서 신을 끌어와 사람을 현혹시키는 ‘사이비 과학’이었습니다.
당시는 번개가 치면 제우스 신이 화가 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폴론 신의 분노로 전염병이 유행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의 자연현상을 초자연적인 신의 의도로 설명할 때, 히포크라테스 학파는 단호하게 초자연적인 원인을 배제하고 질병 발생을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몸과 질병의 발생에 대해 그들만의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했던 자연철학자들처럼, ‘인간의 몸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해 그들은 답하고자 했습니다. 히포크라테스는 학파의 저술 중 하나인 ‘인간의 본질에 관하여’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인간의 구성요소들이라고 내가 내세울 것들이 관습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언제나 동일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힐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피와 점액과 황담즙과 흑담즙이 그 구성요소들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몸은 네 가지 체액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균형과 조화가 무너질 때 병이 발생한다는 4체액설에 대한 내용입니다. 특히, 세계가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던 자연철학자 엠페도클레스의 영향이 보입니다. 4체액설은 로마 황제 주치의였던 갈레노스 의학 이론의 핵심이 되고, 이후 1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중세 서양의학을 지배합니다.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저작 중 보건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책은 ‘공기, 물, 장소에 관하여’ 입니다.
2500년 전 히포크라테스 학파는 사람들이 건강하게 지내기 위해서 의사가 가장 먼저 봐야 하는 것들은 공기와 물과 장소라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사회적 맥락에서 많은 차이가 있지만, 오늘날로 가져온다면 미세먼지 없는 공기와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상수도 시설과 안전한 주거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공기, 물, 장소에 관하여’가 중세에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19세기를 거치며 히포크라테스의 저작 중 가장 많이 읽히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현재성 때문입니다. 아픈 당사자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다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환경을 어떻게 바꾸어나가고 그 과정에서 사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논하는 이 글은 중요한 역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 왜 우리는 2500년 전 인물에 대해 말하는가
오늘날 현대 의학이 이뤄낸 놀라운 성취는 대부분 지난 200년 동안 거둔 것입니다. 결핵이나 콜레라의 원인이 세균이라는 점을 알게 된 것은 불과 150여 년 전이고, 그러한 감염병을 치료하기 위한 항생제가 개발된 역사는 100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2500년 전 히포크라테스 학파는 질병이 인간의 몸을 이루는 4체액 간의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가정했습니다. 따라서 치료는 체액 간의 균형을 맞추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점액이 너무 많으면 구토를 유발하는 약을 줘서 점액을 몸에서 빼내고, 피가 너무 많다면 바늘로 찔러 피를 빼내는 사혈을 하는 것이지요.
치료 효과 측면만 본다면,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조언은 질병이 발생했을 때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신을 찾아 예배당에 가 기도를 드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행위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질병의 원인을 초자연적인 신의 분노로 설명하는 가설은 검증될 수도, 검증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죄를 뉘우치는 것뿐이지요. 그러나 4체액설은 초자연주의적 원인을 배제한 상황에서 인간이 질병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검증 가능한 가설입니다. 실제로 사혈의 효과를 검증하는 과학적인 실험은 2천여 년이 지난 후에서야 가능했지만요. 과학철학자 칼 포퍼가 이야기했던 반증 가능성, 즉 검증하고 논박될 수 있는지 여부는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나누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것이 2500년 전에 쓰여진 히포크라테스의 저작에 대해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그건 그들이 질병의 원인에 대해 초자연적 원인을 배제하고 인간의 질병에 대해 과학적으로 사고했던 최초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500년 전 그리스 사람들은 질병이 신의 분노와 같은 초자연적 원인에 따라 설명된다는 당대의 관념에 맞서, 기초적인 해부학과 생리학의 지식조차 없던 시기에 인간의 질병을 자연적 원인에서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했던 4체액설을 비롯해 질병의 원인에 대한 설명은 이후 후대 과학자들에 의해 반박되고 더 나은 가설로 대체되지만, 초자연적인 원인을 제외하고 검토 가능한 가설을 세우고 보다 나은 설명을 찾아간 그들의 사유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수천 년을 건너 살아남습니다. 그 위에서 우리는 질병의 원인에 대한 더 나은 설명과 보다 효과적인 치료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과학의 힘입니다.
* 질문하지 않은 과학이 남긴 것 : 비윤리적 지식 생산 과정을 말하다
터스키기 실험은 국가가 민주주의의 가장 근본이 되는 국민과의 신뢰를 무너뜨린 사건입니다. - 빌 클린턴
* 치료 대신 관찰의 대상이 된 환자들 : 미국 터스키기 사건
약 40년간 미국 앨라배마 주 메이컨 카운티에서 벌어진, 정부 주도하의 생체실험. 1932년에 시작되어 1973년 중단되었다. 잠복 매독을 앓고 있던 흑인 남성들을 선별하여 병을 의도적으로 치료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관찰한 비치료 실험이다.
터스키기 실험의 포인트는 의사가 환자들에게 매독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고, 다른 잡병을 치료해주는 척 위약을 주며 매독의 진행 양상을 살핀데 있다. 피험자들에게 질병의 실체도, 실험 목적도 고지하지 않은데다 치료 기회마저 박탈해버렸다는 점에서 의학 윤리를 어긴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된다.
1932년 미국 공중보건국에서는 매독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려고 하고 있었다. 당시 의학계는 흑인 남성이 의학적 지식도 없고 성적으로 문란하여 백인보다 매독에 감염되기 쉽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기에, 실험 설계자들은 흑인 소작농이 다수 거주하는 앨라배마 주 메이컨 카운티에서 매독 관련 생체 실험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실험 목적은 매독 환자를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뒀을 경우 해당 질병이 어떻게 환자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실험자들은 메이컨 카운티에 거주하는 소작농 중에서, 후기 잠복 매독을 5년 이상 앓아 온 25세 이상의 흑인 남성을 선별했다. 최종적으로 선별된 사람은 총 600명이었고, 이 중 매독에 걸렸던 사람은 399명이며 매독에 걸리지 않은 대조군은 201명이었다.
피험자들은 매독 얘기는 듣지도 못했고, 그저 '악혈(Bad blood)' 연구를 도와주면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는 안내를 받았다. 이러한 인센티브는 간단한 건강 검진, 백인이 아닌 흑인 간호사의 상담(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던 간호사 리버스), 진료소를 오가는 교통편, 검진 당일의 한 끼 식사, 경미한 질병에 대한 무료 치료, 사망 후 장례비 지급 보장 등등이 포함되었다. 그들이 악혈 치료제라고 받은 위약은 실제로는 아스피린과 철분제였다.
페니실린을 이용한 매독 치료가 1950년 들어 일반화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피험자들을 치료하지 않은 데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내부자에 의해 비밀이 폭로될 때까지 이 실험에 대해 정부가 쉬쉬한 것도 사실이다. 수십년간 방치된 피험자들 중 일부는 아내에게 매독을 감염시켰고, 피험자의 자녀들 일부는 선천성 매독을 갖고 태어났다. 30여명은 매독이 직접적 원인이 되어 사망했고 100여명은 매독이 유발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피험자들 일부(96명)는 별개의 루트를 통해 페니실린 치료를 받았다.
정부는 해당 지역 의사들과 보건소에 공문을 보내 생체실험에 참여한 흑인들이 병원에 올 경우 그냥 돌려보내라는 요구를 했다. 그리고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터스키기 지역 청년들이 미 육군에 징집되었을 때 매독에 걸린 것이 발견되어 치료하려고 했지만 공중보건국에서 청년 256명의 명단을 건네며 이들을 치료하지 말라고 요청했고 육군이 이를 받아들이는 사건도 일어났다.
1966년 공중보건국에서 성병 조사 임무를 맡고 있던 피터 벅스턴이 실험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나 묵살당하자 6년 후인 1972년에 직장을 그만두고, 신문기자 친구에게 제보하여 이 실험은 세상에 알려졌다.
결국 1973년 실험은 중단되었고 미국 상원에서 청문회까지 열리게 되었지만 생체실험에 직접 참여했던 의사들은 결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은 어차피 가난해서 치료도 못 받고 죽을 사람들인데 그냥 죽을 바에야 의학발전에 기여하고 죽는 게 낫지 않는가"라고 발언하여 공분을 샀다. 이 터스키기 실험을 주도한 게 바로 죽음의 천사로 악명을 떨친 미 공중보건국의 '존 커틀러(1915 - 2003)' 박사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인간존중, 선행, 정의'의 3대 연구 윤리 원칙을 천명한 벨몬트 보고서(1979)가 작성되었으며,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전문분야별 윤리강령 구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오늘날 미국 흑인 사회에 반지성주의, 반엘리트주의, 그리고 학계에 대한 불신이 생기는데 기여를 한 사건이며 2021년 현재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백신을 불신하는 흑인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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