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식사 : 육식 - 인류 진화의 열쇠, 불에 익힌 고기

부실이 2022. 2. 2. 21:40

1장 육식 : 육식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

 

* 인간, 육식을 통해 진화하다

약 5백만 년 전 아프리카 탄자니아 지역에 인간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최초의 인간은 침팬지처럼 잡식성 동물이었지만, 초식 동물로 분류해도 좋을만큼 식물성 음식을 많이 먹었다. 영장류는 등장 초기에는 덩치가 매우 작았고, 나무 위에 살면서 거의 전적으로 초식으로 연명했다. 그 후 꾸준한 진화의 결과 영장류 가운데 약간의 육식을 겸하는 종들이 생겨났지만,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영장류에게 육식은 간식에 지나지 않을 만큼 비중이 작다.

 

거의 모든 영장류는 간식을 정말 좋아한다. 영장류는 원숭이라고 부르는 여러 종류의 동물을 통칭하는데, 원숭이는 대개 나뭇잎이나 열매를 먹는다. 나뭇잎이나 열매에는 온갖 애벌레나 곤충이 들어 있게 마련이다. 요즘 사람들은 예컨대 복숭아를 파먹은 벌레를 보면 징그럽다며 버리지만, 원숭이는 잎이나 열매는 버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벌레를 먹는다.

원숭이는 간식을 얻기 위해 사냥을 했을까? 대개 원숭이는 덩치가 작아서 다른 동물을 사냥하기는커녕 여러 육식동물에게 잡아먹히곤 한다. 개코원숭이는 덩치가 크고 두뇌 용량도 큰 원숭이로 무리지어 다니면서 사냥을 한다.

침팬지는 개코원숭이보다 우월하고, 육식을 더 좋아한다. 침팬지는 개미, 흰개미, 애벌레, 말벌, 딱정벌레, 새알을 먹는데 때때로 개코원숭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원숭이, 어린 영양이나 돼지, 너구리를 비롯해 수십 종의 동물을 잡아먹었다. 그럼에도 식물성 음식을 약96% 먹는데 반해 동물성 음식은 약 4%를 먹는다.

 

인간도 처음에는 침팬지가 먹는 정도로 동물성 음식을 섭취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살았던 인간 화석의 구강 구조가 초식을 주로 하는 동물의 것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인간은 진화하면서 점차 육식의 비중을 높여왔다. 약 3백만 년 전 인류가 살고 있던 아프리카의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숲이 줄어들었고, 식물성 먹거리를 구하기가 힘들어졌다.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먹거리를 찾기 시작했고, 그때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다른 동물이 사냥해서 먹고 버린 사체 찌꺼기였다. 대개 사자나 표범과 같은 육식 동물은 사냥감의 내장 기관과 쉽게 뜯을 수 있는 살코기만을 먹는다. 그들은 인간과 달리 손이 없어서 뼈에서 살을 정교하게 발라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냥꾼이 포만감을 느끼고 떠나면 이번에는 하늘에서 온갖 새들이 내려온다. 새들은 사냥감의 뼈에 남아 있는 살을 날카로운 부리로 발라 먹는다.

 

그러고 나서도 사냥감의 몸에는 단백질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주로 단단한 뼈 속의 뇌와 골수다. 바로 이 뇌와 골수가 인간의 먹거리였다. 인류는 사냥감의 사체에서 골수와 뇌를 꺼내 먹으면서 두 가지 측면에서 진화했다.

먼저 뼈에서 뇌와 살을 발라내려면 도구를 정교하게 만들어야 했다.

약 3백만 년 전 호모 하빌리스가 최초로 도구를 만든 이유다.

둘째, 다른 동물의 뇌나 살을 먹으면서 단백질 섭취가 늘어났고, 그 결과 뇌가 커졌다. 인류는 점차 몸집도 커졌고, 호모 에렉투스 단계에 오면 성인 남성이 170센치미터나 되었다. 이 단계에서 인류는 협동하여 사냥하는 기술을 발전시켰고, 그 후 줄곧 고기를 먹는 존재로 살아왔다.

호모 하빌리스가 사체 청소부에 머물렀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사냥꾼은 호모 에렉투스였다. 고기맛을 알게 된 인류는 좀 더 적극적으로 사냥을 하려했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진화가 이루어졌다. 인간은 몸에서 털을 없애는 방식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현존하는 모든 동물 가운데 인간이 가장 오래 달릴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의 몸에 털이 없어서 오래 달려도 체온이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호모 에렉투스가 자신의 몸을 변화시켜 사냥꾼이 된 후 구석기 시대 인간은 ‘고기를 먹는 존재가 되었다. 이때부터 신석기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인류의 반인 남자는 거의 전적으로 사냥을 하면서 살았다.

 

호모 에렉투스가 이룬 또 하나의 혁신은 불의 사용이다. 인류는 약 80만 년 전부터 불을 사용하였다. 불은 인간이 동물에 맞설 때 유용한 무기가 되어주었다. 또한 인간은 불을 사용하면서 음식을 익혀 먹게 되었다. 현재 인간이 주식으로 삼고 있는 밀, 쌀, 감자와 같은 음식은 자연 상태로는 소화가 거의 안 된다. 식물의 강한 세포벽을 깨지 않으면 그 속의 여러 영양소를 흡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동물의 사체를 먹으면 그 동물의 몸속에 살고 있던 온갖 세균과 기생충에 감염될 수 있다. 음식을 가열하면 나쁜 세균의 영향을 줄일 수 있을 뿐더러 씹기도 쉽고 소화도 훨씬 잘된다. 식물과 동물의 세포를 감싸고 있는 벽과 막의 강도가 약해지고, 세포 안에 존재하는 여러 성분의 결합력이 약해져서 소화하기 쉬운 상태로 변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불에 익혀 먹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치아가 작아지고 창자가 짧아졌으며 소화 시간도 많이 줄었다. 침팬지는 날것을 씹어먹느라 다섯 시간을 소모하지만, 인간은 한두 시간이면 생존에 필요한 영양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이렇게 신체가 변한 결과 뇌 용량이 커졌다. 창자를 유지하던 에너지가 줄어들면서 뇌에 투입할 수 있는 에너지가 늘어나 점차 뇌 용량이 커진 것이다. 따라서 육식, 그것도 고기를 불에 익혀 먹는 것은 인류의 진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 다시 풀을 먹는 동물이 되다

기원전 1만 년경, 인간의 삶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른바 신석기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신석기 혁명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이를 설명하는 학설로 ‘현명 역설’이라는 것이 있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탄생하여 7만~6만 년 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약 4만 년 전에 유럽에 도착했다. 그들은 현재의 우리와 외형적으로 완전히 똑같았고 두뇌 역량도 같았다. 그들은 지능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고도의 문화유산을 남겼다. 그들이 3만 년 전에 남프랑스와 북에스파냐의 동굴들에 그린 벽화는 예술성과 사실성이 매우 높아서 경탄을 자아낸다. 그들이 사용한 언어는 다양한 어휘와 문법을 갖추고 있었다. 현대 분자유전학에 따르면 그들은 육체적·정신적 능력이 오늘날의 우리와 거의 같았다.

 

그들은 사냥을 하거나 동물의 사체를 찾아 먹거나 온갖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며 이동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1만 년 무렵이 되어서야 근동 지역과 아나톨리아에서 최초의 정착생활이 시작되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현생 인류와 똑같은 지능과 외형을 갖추고 있었는데, 왜 농경이 좀 더 일찍 시작되지 않았는가? 이것이 '현명 역설'이다.

어떤 학자들은 신석기 혁명의 기원에 대해서 사냥의 부산물이라고 설명한다. 사냥꾼들은 무작정 동물들을 추적하다가 점차 동물들의 이동 경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동물들을 잡기 쉬운 곳에 야영지를 설치하고 오랫동안 머물기 시작했다. 야영지에서 그들은 먹다남은 음식을 버리기도 하고 배설도 했다. 이를 통해 작물의 씨가 뿌려진 뒤 그 작물이 다시 자라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이로써 작물의 재배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식량 생산 증대의 압력이 커졌기 때문에 농경이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인류가 먹이 사슬의 가장 위에 자리하게 되면서 인구가 계속 증가했고, 늘어난 인구를 먹여 살리려면 식량 생산의 변화가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곡물 재배가 시작되었다.

 

어떤 연구자들은 기후의 변화를 중시한다. 약 1만 1천 년 전에 갑자기 온도가 떨어지면서 사냥과 채집이 힘들어졌다.

종교의 역할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있다. 구석기 시대 말기 이래 종교가 발달하고 사제 계급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특정한 장소에서 종교 의례를 행하곤 했다. 그 장소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정착이 시작되었고, 그 후 농경이 발전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석기 혁명이 인류의 역사에서 산업혁명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데 동의한다. 신석기 혁명을 통해 인류는 정착 생활을 시작했고, 그 후 식량의 잉여가 생기면서 문명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고, 인류는 커다란 진보를 통해 삶의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음식의 측면에서 신석기 혁명은 고기를 먹는 인간에서 풀을 먹는 인간으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고고학자들은 최초로 신석기 혁명이 일어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유골들을 계속 수집하여 비교해왔는데, 신석기 혁명 이전의 사람들이 오히려 더 건강했음이 밝혀졌다. 또한 오늘날 구석기 시대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원시 부족들을 조사해본 결과, 그들은 하루 2~4시간 노동으로 상당히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늘 식량을 일정한 만큼 남겨두므로 기아나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인류학자 마셜 샐린스는 이를 보고 구석기 시대의 사회를 ‘최초의 풍요한 사회’라고 지칭했다.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인류 사회는 궁핍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영양부족에 시달렸으며, 몸집이 작아졌고, 치아도 재대로 형성되지 않았다. 농사를 짓느라 디스크 탈출증, 관절염, 탈장 등 그 전까지 몰랐던 온갖 질병에 걸리게 되었다. 아이들은 모유를 먹는 기간이 짧아지고 이유식으로 죽을 먹게 되면서 면역력이 약해져 병에 걸렸다. 특정 곡물을 주식으로 삼으면서 특정 영양소가 결핍되었다는 점이다.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은 니코틴산이 부족해서 펠라그라병에 걸렸으며, 쌀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은 티아민이 부족해 각기병에 걸리기 쉬웠다. 따라서 농경사회로의 전환은 사람들 대다수에게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었다.

 

* 육식이 늘어나며 바뀐 세상

농경사회는 그 내부를 고기를 먹는 인간과 풀을 먹는 인간으로 나누었다. 17~18세기 이전 대다수의 농민은 풀이나 죽을 먹는 사람으로 비참하게 생활했던 반면, 소수의 지배층은 고기를 먹는 사람으로 배부름과 안락을 누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배층의 중요한 특징은 고기를 먹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최초의 나라인 상나라 시대부터 제사 공동체가 있었다. 이와 같이 모여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제물로 바쳐진 소, 돼지, 염소와 같은 고기를 나누어 먹는 집단을 의미한다. 이 제사를 주관한 후 고기를 나눠주는 사람이 재상이었고, 그는 훗날 국가의 관리가 되었다. 후대에 이 공동체는 약해지거나 없어졌지만, 고기를 먹는 사람이 곧 지배층이라는 관념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래서 피지배층은 줄곧 지배층을 고기를 먹는 사람이라고 부르곤 했다.

 

중세까지는 서양 사람들도 대부분 고기를 많이 먹지 못했다. 상류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고기를 먹는 것은 연례행사와 같았다. 그런데 14~15세기 이후 서양의 고기 섭취량이 증가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는데 먼저 가축의 품종 개량이 활발해졌다. 중세에 거의 모든 가축은 크기가 현재의 40~60%였다. 닭은 1년에 달걀을 50~100개밖에 생산하지 않았다.

14세기 이후 여러 가축의 품종 개량이 시도되었다. 우수한 품종을 수입했고 좋은 개체끼리 교배도 했다. 소는 헝가리 지역의 소들이 들어왔고 돼지도 우리에 가두어 키우고 우수한 개체끼리 교배시키는 일이 늘어났다. 토끼는 원래 에스파냐 지역에서 사육되었는데, 800년경 카롤루스 대제 때 프랑크 제국에 들어온 뒤 점차 북쪽으로 전파되어 12세기에는 영국에서도 사육되었다.

 

둘째, 가축 사료의 재배가 크게 늘었다. 16세기 농업혁명 과정에서 순무, 귀리와 같은 작물의 재배가 확대되면서 사료 작물이 크게 늘어났고 가축 사육이 증가했다. 이 과정은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배설물은 거름으로 사용되므로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할 수 있었다. 고기 소비량도 점차 크게 늘어났다.

가축의 품종 개량 외에 어류 소비의 증가도 단백질 제공에 기여했다. 15~16세기 서양인이 세계의 바다를 장악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서양의 조선술이 중세 말에 크게 성장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중세에 이미 서양인은 아메리카 대륙 동쪽까지 진출하여 대구를 비롯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았고, 어업은 중세 말부터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국가의 주요 산업이었다. 특히 네덜란드는 1400년부터 청어를 대량으로 포획하고 염장하여 수출함으로써 근대 초 부강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셋째, 유럽의 주변 지역에서 중심 지역으로 육류의 공급이 대폭 증가했다. 중세 유럽의 역사는 서기 1천년을 기점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시작된 혼란과 퇴보의 시대가 1천년에 비로소 끝나고 안정과 번영이 다시 찾아왔다. 유럽 전역에서 인구가 증가하고 시장이 부활하고 도시가 생겨났다. 이후 지속적으로 경제가 성장하고 강력한 활력이 사회 전체에 퍼져나가면서 유럽 주변부와 중심부 사이의 교류와 교역이 크게 증가했다.

이런 활력은 음식의 측면에서 보면 육류 소비의 증가를 가져왔다.

독일 전역에서 육류 소비가 크게 늘자 주변부 지역에서 많은 소가 수입되었다. 소뿐만 아니라 소의 부산물인 버터와 치즈도 네덜란드 및 북부 독일, 스칸디나비아에서 독일과 중부 유럽으로 대량 수입되었다. 이렇게 고기와 고기 부산물의 수출이 늘어나면서 네덜란드, 독일 북부, 덴마크 지역에 거대한 방목지가 조성되었고, 밀 농사와 가축 사육을 병행하는 혼합농경이 발달했다.

 

고기 소비의 증가는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우선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 중세 후기(1400년) 평균 수명은 약 30세였는데, 근대 초(1700년)에 33세 이상으로 늘어났다. 평균수명의 증가는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고 덕분에 근대 초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풍부한 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인력으로 유럽은 여러 전쟁을 치렀고 농업혁명, 산업혁명을 이루었다.

 

근대 초(1800년) 인구가 증가할 때마다 여성이 훨씬 많이 증가하여, 성비의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자연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많다. 약 105대 100.

고대·중세에는 남자가 여자보다 오래 산다고 생각했다. 14세기 이후부터 여성이 남성보다 오래 살게 되었다. 남녀의 성비가 역전된 것은 무엇보다 단백질 섭취 증가가 중요하다. 여성은 생리, 출산, 육아를 통해 많은 철을 소비하고, 그 때문에 만성적으로 빈혈에 시달리기 쉽다. 따라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 많은 철을 흡수해야 하는데, 식물성 음식에서 흡수하는 철은 적기 때문에 육류 섭취를 통해 철을 보충해야 한다. 그런데 14세기 이전에는 육류 소비가 너무나 적어서 여성들의 입에 들어갈 고기가 없었다.

 

중세 중기 이래 경제가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가축 사육이 증가하면서 농민들의 단백질 섭취가 증가했고, 여성의 영양상태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이는 여성의 건강을 개선시켜 수명을 늘렸고 그 결과 15세기 이후 여성이 남성보다 많아졌다.

유럽인의 고기 소비량이 전반적으로 크게 증가한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19세기 초부터 인조 목초지가 널리 퍼졌고, 과학적인 목축이 발전했으며, 신대륙의 아르헨티나 등에서 고기가 많이 수입되면서 유럽인의 1인당 고기 소비량이 실질적으로 크게 늘어났다.

 

* 서양을 따라잡으려면 고기를 먹어라!

육식의 증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사회를 변화시켰다. 먼저 육식의 증가는 칼로리 공급의 증가를 가져왔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건강이 개선되고 근력이 좋아졌다. 힘이 세져서 사람들이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가축의 증가로 가축 배설물, 곧 비료가 늘어난 덕분에 농업 생산량이 증가했다. 이에 힘입어 서양은 동양보다 많은 식량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동양을 추월할 수 있었다. 이 주장은 서양의 근대화라는 주제에 대해 매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지만, 거대한 역사 현상을 하나의 작은 요소로 단순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중국, 일본,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예로부터 소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다. 종교적 금기도 있었고, 소가 농사일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국가가 직접 소를 관리했으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소를 잡지 못하도록 했다.

 

일본의 서양 따라잡기 운동.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적극적으로 근대화에 나섰는데, 육식이 서양인을 튼튼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소고기를 편안하게 먹을 수 있도록 소고기 전골 같은 일본식 소고기 요리법들이 고안되었다. 물에 여러가지 양념을 섞은 후 소고기를 끓여 먹는 요리다.

돈가스도 일본이 개량한 서양 요리의 대표적인 메뉴다. 이 요리는 15~16세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선원들이 일본에 전해준 것이다. 이 요리는 1895년 개발되어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고 주변나라에도 전파되었다. 고기 문화가 확산되자 일본인의 평균 키가 커졌고 체력 면에서 뒤지지 않는 일본인이 탄생할 수 있었다.

 

* 중요한 건 균형이다

근대 초 대항해 시대에 유럽인들은 작은 범선을 타고 항해에 나섰다.17세기 후반 유럽에서 동남아시아까지 항해하는 데 편도로만 평균 8개월이 걸렸다. 이렇게 긴 항해 동안 선원의 절반이 죽어나가기도 했는데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은 질병으로 대개 괴혈병에 걸렸다.

비타민 c가 부족해서 생기는 괴혈병은 선원뿐만 아니라 전근대의 일반인도 쉽게 걸렸다. 겨울철에 채소가 드물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먹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병에 걸리면 초기에는 마치 몸에서 피가 빠져나간 듯 창백해지고 무기력해지며, 점점 쇠약해져서 몸 곳곳에 염증이 생기고, 치아가 빠지며, 혈변을 보고, 시력이 약해지다가 사망하게 된다.

이후 해외 항해를 준비하는 선장들은 라임을 비롯한 과일과 채소를 최대한 많이 준비했다. 괴혈병 극복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은 18세기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었다. 항해에 양배추를 소금에 절여 준비.

 

* 읽은 소감

고기를 먹기 시작하는 시원은 인류의 역사와 같이 한다.처음에는 덩치 큰 동물이 먹고 남은 뼈에 붙은 고기와 뼈 속의 골수를 먹었는데 도구를 이용할 줄 아는 손이 있어서이다.

호모 하빌리스에 이은 호모 에렉투스는 불을 사용할 줄 알아서 익힌 고기를 먹으면서 음식을 먹는 시간을 줄이고 소화되는 시간도 줄어들면서 남는 시간과 에너지는 진화의 속도를 빨라지게 했다.

고기를 먹는 사람은 부유층, 지배층을 상징하고 곡식은 가난한 자들의 몫이었다.

15세기가 되면 가축의 수가 많아져 고기에서 소외된 여자들도 고기를 먹으면서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남자와 여자의 성비가 역전되었다고 한다. 유럽인이 고기를 많이 먹게 된 때는 19세기가 되어서야 가능했다고 한다.

고기를 통해서 역사를 살펴보는 방식은 재미있고 유익한 역사공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