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수정
한국과 프랑스의 경계에 서서 글을 쓰고 있는 작가, 번역가다.
이 책은 한국에서 대학까지의 교육과 사회생활을 경험한 저자가 프랑스에서 프랑스 남자와 함께 낳은 아이를 키우고 학교에 보내며 경험하고 관찰한 바를 기록한 이야기다. 딸 칼리의 출생을 시작으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에서의 디테일한 일상을 담았으며, 이후 아이가 성장하여 다니게 될 고등학교와 바칼로레아 시험에 대한 이야기들은 인터뷰를 통해 소개하고 있다. 경쟁을 최소화하고, 문학적 소양과 생각하는 힘을 가진, 공화국의 깨어 있는 시민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프랑스 교육의 현주소를 찬찬히 펼쳐낸다.
[저서]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이성의 사랑학, 월경독서, 파리의 생활 좌파들, {당신에게, 파리), 아무도 무릎 꿇지 않은 밤 등.
[역서]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자발적 복종, 10대를 위한 빨간책, 부와 가난은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등이 있다.
* 책 앞장, 뒷장의 어록
· 경쟁이 없는 빈자리에 자존감과 우정, 철학이 자리하다!
: 프랑스 아이와 한국 엄마의 프랑스 공교육 체험기
* 아이들은 행복을 만나러 학교에 간다!
: 토론하고 생각하는 공화국의 시민을 위한 프랑스만의 교육 이야기
* 질문하고 토론하고 연대하는 ‘프랑스 아이’의 성장 비결
* 교육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다!
아이를 어른처럼 존중하는 가정, 묻고 답하며 서로 다른 생각이 어우러지는 교실.
경쟁을 최소화하면서 자기다움의 매력을 만들어가는 ‘프랑스 아이’의 성장 이야기
* 들어가는 말
2005년에 태어난 아이.
아이를 키우는 일은 내게 새로운 사랑에 도달하는 과정이었다. 마침내 내게도 허락된 이 긴 사랑의 여정 앞에서 난 호흡을 가다듬고 길을 나섰다. 지금까지는 몰랐던 또 다른 사랑의 언어를 찾아내 건네고, 또 받았다. 그리하여 인생이 감추어둔 또 다른 보물을 캐내는 그 길을 아이와 함께 걸었다.
아이를 양육하거나 교육한다는 말은 내게 적합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생각을 주고 받으며,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어갔다. 처음에는 좁은 보폭으로 조심스럽게 걸었지만, 나중에는 씽씽 달려가는 아이를 잡으러 가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아이는 내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창을 열어주고, 나는 종중 나의 창가로 아이를 데려와 내가 바라보는 창으로 세상을 보게 해주었다.
* 네 살 된 아이를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이는 멀쩡히 거기에 있었다. 아이를 찾아 동네를 돌던 15분 동안 잠시 후 닥칠지 모를 내 인생의 결정적 비극을 확인하게 되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나는 지금까지 아이의 삶이 행복했는지 급히 점검했다. 그러고는 ‘후회 없이 행복한 시간을 누렸다면 어느 순간 인생이 멈춘다 한들 무엇이 아쉬우랴’라는 대범한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아이겐 아무 일도 없었고 내가 15분 동안 바들바들 떨며 흘렸던 식은땀은 순식간에 상쾌하게 증발해버렸지만 그 직전에 절박하게 던진 질문과 거기서 얻은 답변은 선명하게 이정표처럼 내 머리 위에 떠 있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아이가 누릴 오늘의 행복을 유보하지 말지어다.
아이가 커갈수록 사회와 접하는 관계망이 넓어지고 부모와의 접촉면은 줄어든다.
아이는 점점 더 먼 곳으로 항해해나가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구축해나간다. 엄마는 매일 밤 여전히 행복한 아이로 살고 있는지 확인할 뿐, 지하철에서, 길에서, 학교에서 세상과 만나고 부딪히며, 느끼고 경험하며, 웃고 울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아이를 팔 벌려 안아줄 뿐이다. 학교와 집 사이에서 얻은 것으로 제 세계를 축조해나가는 것은 오로지 아이의 몫이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까지 다니면서 아이가 경험한 학교라는 틀을 통해 프랑스 사회가 축적해온 양식들이 아이 속에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훌쩍 엄마를 넘어서서, 저만의 멋진 세상을 친구들과 함께 짓고 있는 아이의 모습, 학부모로 이 나라 학교를 겪으며 지내온 지난 13년의 관찰과 생각들을 책 속에 차곡차곡 담았다.
* 나오는 말
아이가 11살에 쓰기 시작한 책이 13살이 되어 마무리되었다. 그 사이 아이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기쁨과 만족, 행복뿐 아니라 슬픔과 불안, 절망도 알아가기 시작한다.
아이의 오늘이 웃음으로 가득하길,
슬픔이 충분히 위로받길,
억압이나 불의에 굴하지 않길,
절망 안에서 다시 희망을 발견하길 바라며,
하루하루 함께해왔다.
아침저녁으로 뜨겁게 안아주며.
프랑스 학교에 아이를 보낸 지 올해로 10년이다. 다행이도 아이는 학교를 좋아한다. 처음에 학교는 아이에게 우정을 쌓는 공간을 의미했다. 친구들과 만나서 놀거나 밥 먹거나 때때로 뭘 배우기도 하는, 그 다음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이해의 충돌을 어떻게 조절해가며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 그 지혜를 학교에서 배워갔다. 아이는 어디 가서든 친구를 금새 만들었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에서 삶의 가장 큰 의미를 터득해갔다. 학교는 효율과 경쟁보다 존엄과 다양성, 협력 그리고 자율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었다.
중학교에 가면서 학습한 바가 점수로 평가되는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수가 있되 등수가 없었던 까닭에 우정을 경쟁으로 훼손시키지 않고, 오직 자신과의 경주를 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민주주의와 학교는 같은 시기 같은 동기로 태어났다.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시민이 통치하는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그 시민 일반이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학교다. 그런 학교가 혁명의 정신을 가르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자유롭고, 존엄하다는 것을 아이들이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멋진 일이었다. 불평등이 가해질 때 항의할 수 있고, 자유가 위협받을 때 광장으로 뛰쳐나가 자유를 엄호할 수 있으며, 존엄이 짓밟힐 때 그것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아이는 학교와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생활을 통해 이 모든 가치들이 선언되고 위협받고, 다시 수호되는 과정을 겪어왔다. 선언만으로 지켜지는 것은 없다. 매일 이 선언을 부수려는 시도가 도처에서 이뤄질 때, 그것을 지켜내려는 노력 또한 숨 쉬듯 일상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내용정리]
* 프랑스에선 육아가 쉽다고요?
‘앞으로 두 분이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가는 동안, 부부간의 끈끈한 애정이 가정을 지탱하는 중심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자녀들을 다소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두 사람의 애정을 지키는 데 항상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 명심하셔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는 당연히 육아 패턴에도 차이를 가져온다. 프랑스여자들의 육아를 지켜보면 나를 아이의 요구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남편이 함께하는 삶의 패턴에 적당한 자리를 아이에게 내어준다. 나의 생활 리듬에 아이가 자신의 울음과 욕망을 절제하도록 훈련시킨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내 삶의 중심은 ‘바로 나야’라는 확고한 중심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수유하는 방식, 기저귀 갈아주는 패턴, 간식 주기, 휴가··· 모든 이에 이 가치관의 차이가 적용된다.
육아를 상대적으로 쉽게 만들어주는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양육자의 자기중심적 마음가짐이라면, 두 번째는 육아를 철저히 공적인 일로 받아들이는 이 나라의 시스템이다. 구체적으로 이 나라의 공교육 시스템을 누린 것은 아이가 세살 때부터였고, 그 시스템이 있었기에 난 지금까지 글을 쓰고 번역을 하면서 살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나라가 제공하는 혜택은 충분히 누렸으나 자기중심적인 주 양육자의 태도는 충분히 내게 스며들지 못했다. 딸이 커가면서 오히려 아이가 엄마와 자신 사이에 확고한 서로의 영역이 설정되도록 자율의 힘을 급속히 키워갔다. 프랑스 학교가 길러낸 독립적인 어린 시민이 한국 엄마의 끈끈함을 훌쩍 뛰어넘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아이를 한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며, 난 프랑스 아이의 엄마가 되어갔다.
* 탄생 설화
2005년 5월 배 속의 아이 소식을 접한 순간 오로지 기쁨으로 아이와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기 전, 신생아 훈련소에 입소하여 철저히 교육이라도 받고 나온 듯, 나는 알지 못하는 신생아로서의 행동 수칙을 이미 척척 알고 행동했다. 유전자라는 지도가 우리 몸에 새겨져 있어서겠지만, 아이가 태어난 이후, 매 순간 나를 훌쩍 뛰어넘는 이 생명체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보다 아이가 더 잘 알고 있다는 그 직관적 믿음에 이끌렸던 것은.
태아일 때부터 인간의 성장은 생명체가 지구상에 처음 나타나 오늘날 인류에 이르기까지의 진화과정을 압축하여 재현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물에서 태어난 최초의 생명은 육지로 올라와 네 발로 걷다가 어느 날 직립을 한다. 그리고 외마디 소리를 내뱉던 인간은 손과 뇌신경을 발달시키는 다양한 움직임 끝에 혀를 움직여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다. 아이를 키우는 1~2년 사이에 수십억 년 간 진행된 생명체의 진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마침내 걷고, 말하고, 감정을 표현하고, 고집을 부리다가도 사랑을 건네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그 모습을.
* 엄마가 불행하면 모두가 불행하다
서른 즈음 깨달았던 것 중 하나는 어지간한 심리적 고통은 객관화라는 거울 앞에서 치유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산후 우울증을 예방하기 위해 병원 측이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사실상 내겐 위로였다. 병원 측은 출산 전에도 예비 부모를 위한 사전 교육 차원에서 이런 자리를 여러 차례 마련했다. 부부가 함께 모이거나 예비 엄마 혹은 예비 아빠들만 따로 모여서 각자의 불안과 궁금증을 나누며 미래를 준비하게 했다. 이런 자리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산부인과 의사이거나 산파 혹은 심리학자들, 그들은 해답을 주기보다 사람들이 각자 염려하는 바를 토로하게 했고, 열려 있는 해답들을 제시하곤 했다.
나도 출산 13일 만에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 거리를 산책했다. 3월 중순의 파리는 여전히 쌀쌀했지만 경이의 눈으로 나와 아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엄마가 된 이후 달라진 세상을 내딛었다. 하나의 투명한 다리가 놓인 듯, 사람들은 그 보이지 않는 다리를 타고 내게 쉽게 건너와 말을 건넸다. 그들 하나하나를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 아기들을 보면, 단박에 넋을 빼앗기는 것은 나만의 습관은 아니었다. 갑자기 세상과 나 사이에 있던 마음의 둑 하나가 툭 무너지고 그 위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 어쩌다 출산대국
지구의 포식자 서열 중 최상위를 차지하는 인류의 개체수를 억제해줄 존재는 인류 자신뿐. 2015년 유럽의 평균 출산율은 1·6명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 인구가 계속 늘어나 70억 명에 이른다. 아이들이 태어나는 속도는 급속히 떨어졌지만, 의학의 발달이 사망 속도를 지연시켰다. 모두가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비상등을 켜고 있던 와중에 유독 프랑스는 20년 전부터 출산율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2020년에 1·88명.
프랑스의 출산율 증가는 출산의 주체인 여성이 기꺼이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 방향으로 사회가 진화해온 결과다. 우리나라가 저출산 국가의 반열에 오른 것은 사회적 모순들이 해결되지 않고 계속 축적되어 더 이상 여성들이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지 않은 사회가 되어버린 탓이다.
프랑스의 출산율을 끌어올린 환경으로 하나의 전쟁과 사람들의 윤리적 감각을 송두리째 뒤흔든 혁명 그리고 바뀐 시대의 패턴을 정책에 반영하길 게을리하지 않은 정치권이었다.
프랑스가 오늘날과 같은 사회보장제도의 골격을 갖춘 것은 1946년이다.
사회보장법은 당시 모든 프랑스 국민들이 동등하게 생존과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절실한 시대정신이었는지, 그리고 복지를 이루는 주된 힘은 자본의 여력보다 성숙한 시대정신임을 엿보게 한다.
이후 1960~70년대까지 이 사회보장제도에서 제외된 직군들을 빠짐없이 수혜자로 포함시키는 보완의 과정이 이어졌다. 의료보험(질병·출산및 양육·장애·사망), 산재보험, 퇴직연금, 가족수당(출생수당·기본수당·양육수당·장애아동수당·새 학기 보조수당 등)이 그 내용이다. 1969년에는 공연예술, 영화, 방송 계열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실업급여를 비롯한 4대 보험의 수혜 대상이 되도록 제도 개선책이 마련되었다.
1968년에는 ‘68혁명’이 있었다. 그 사건은 이후 10년간 프랑스 사회의 고루한 가부장제 관습들, 특히 오랜 가톨릭 국가의 구태들을 통쾌하게 벗어던지게 했다. 곳곳에 여성운동 단체가 생겨나고, 그들의 억압되었던 욕망과 권리에 대한 요구가 일거에 폭발하면서 세상은 혁명의 시간을 겪는다. 가족주의, 가톨릭 중심의 경건주의, 가부장제를 밀어버린 그 자리에 페미니즘, 개인주의 다원적 문화와 예술이 들어섰다.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가족의 가치를 위해 희생되던 여성들이 제 몫의 삶을 요구했다. 1975년에는 낙태가 합법화. 1982년에는 낙태가 의료보험의 적용을 받는 시술이 된다. 이 일은 피임이 완전하지도 자유롭지도 않았던 당시에 여성들에게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부여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
프랑스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다. 오래전부터 결혼 관계 밖에서 태어난 아이와 결혼 관계 안에서 태어난 아이의 숫자는 50대 50이었다. 이 아이들에 대한 사회적 구별 혹은 차별은 전무하다. 결혼한 커플과 결혼하지 않은 커플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는 이유는 어떤 사회적 압박 때문이 아니라 법적인 편의나 세제상의 혜택들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68이 가져온 윤리 혁명의 결과였다.
현재 프랑스에는
결혼 외에도 시민연대계약과 동거 등 다양한 커플의 결합 형태가 있다.
그들이 어떤 형태의 결합을 선택하든 실질적으로 어떤 제약도 받지 않으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역시 똑같은 사회적 혜택을 받는다.
이토록 다양한 형태의 커플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면서
정상성의 범위가 무한대로 확대되고, 더불어 안정성의 개념 또한 확장된다.
어른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데로 초점을 맞추어
커플의 형식을 취하고 그 선택에 만족하는 한,
아이들은 함께 자신의 행복을 충분히 조율해나간다.
완고한 둑과 같던 가족의 형태가 무너지자
사람들은 형태를 넘어선 삶의 질에 집중했고,
그 결과 훨씬 쉽게 행복에 이르기 시작했다.
* 일단 낳으시면 아이는 나라가 같이 키웁니다
프랑스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120만원의 출산지원금을 받고 2세까지 24만원의 기초수당을 받는다. 2세부터 20세까지의 자녀가 두 명 이상 있는 가정은 가족수당을 지급받는다. 자녀가 둘인 경우 1인당 약 20만원, 셋인 경우 30만원의 가족수당이 지급된다. 자녀가 열네 살이 넘으면 1인당 8만5천원이 추가 지원된다. 특히 자녀가 셋 이상인 경우에는 거의 모든 공공요금에 할인율이 적용되어 가족 모두가 할인받는다.
프랑스에서는 현재 약 11%의 아이들이 한 부모 가정에서 자라고 있고, 그중 93%는 엄마와 자녀로 구성된 가정이다. 이러한 가정은 당연히 두 부모 가정보다 많은 지원을 받아 아이 한 명당 매달 약 78만원씩을 지급받는다.
학기 초에도 자녀 당 약 52만원씩 학용품 구입 보조금이 지급된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비는 무료인데다가 대학교 등록금(약 24만원)도 우리나라에 비하면 거의 무료라는 생각이 드는 수준이다.
프랑스의 복지제도는 모든 사람을 포섭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케이스에서 벗어나는 사람들도 제도가 따라가며 각별히 돌본다. 정상성의 범위를 그어놓고 거기서 벗어나는 사람들은 복지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하는 잔인한 차별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방식이다.
1982년부터 전체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연 5주의 유급휴가, 2000년에 시작되어 모든 기업에 적용된 주 35시간의 노동 역시 삶의 여건을 풍성하게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일하는 시간이 가장 적은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탄탄한 의료보험 제도와 무상에 가까운 교육 제도, 자유로운 형태의 결합을 허락하는 사회적 분위기, 거기에 더욱 넉넉해진 자유 시간, 이 세 가지 요소가 충족되자 프랑스 여자들이 평균 두 명 정도의 아이를 낳는 시절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 라 크레쉬(공립 탁아소 : 신뢰감)
4개월의 출산 휴가가 끝나면, 프랑스 여자들 대부분은 직장으로 복귀하고, 아이들의 83%는 탁아소나 그 유사 시설에 간다. 라 크레쉬라고 말할 때 풍기는 느낌은 신뢰감 그 자체다. 아무 의심도 없이 거기서 아이들이 무탈하게 지낼 거라 믿고, 부모들은 오로지 탁아소에 자리를 확보하는 데만 최선을 다한다.
자리가 넉넉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비혼모나 학생 엄마들이 일 순위다. 그 다음 풀타임으로 직장에 다니는 여성, 파트타임이나 프리랜서로 일하는 여성들에게로 순번이 돌아간다.
하루 몇 시간만 아이를 맡기는 유아휴식소도 역시 공공 육아시설로 운영된다.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중인 엄마들 또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엄마들이 아이를 맡길 수 있도록 유연하게 운영되는 시설이다.
그밖에 정부로부터 보모 자격증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집에서 최대 네 명 가량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가정형 육아시설도 일부 존재한다. 20~59세의 프랑스 여성 중 가정주부의 비율은 14%에 불과하다. 그들도 한때 일을 하다가 자녀의 수가 늘어나면서 가정에 머무르길 선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회가 믿을만한 보육시설을 운영하는 것은 프랑스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근간이다.
유학생 시절 나 역시 베이비시터가 되어, 오후 6시에 아이를 탁아소에서 집으로 데려와 씻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힌 후, 간단한 이유식을 먹였다. 그리고 7시에서 7시 30분 사이에 아이와 놀아주는 것이 나의 미션이었다.
매일 아이를 찾을 때마다 탁아소의 보모는 아이가 낮잠을 잤는지, 얼마나 먹었는지, 혹시 열이 있는지, 오늘 무슨 말을 했는지 등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곳에 아이를 찾으러 오는 엄마 혹은 아빠 또는 나 같은 베이비시터들과 탁아소 보모들 사이엔 평등과 신뢰와 기쁨이 공존했다. 함께 아이를 키워나가는 그 모든 파트너들 속에 속하여 은은한 연대의 감정을 느끼던 그 시절, 온전히 행복했다.
* 아이는 이제 공화국의 시민
출생신고 : 아이가 태어나고 사흘 이내에 출생신고를 안 하면 재판에 회부된다. 재판에 회부되고 나면 최소한 벌금형이라도 받게 되어 있다.
이토록 유난을 떠는 이유는 신생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프랑스 정부의 입장은 아이들이 태어나면 프랑스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를 불법으로 빼돌리는 것을 막고 아이가 시민으로서 충분히 보호를 받게 하기 위함이다.
아이가 불법체류자일지라도 산부인과 병원에서 무료로 아이를 출산할 수 있으며, 미성년자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 그 가족은 정착의 의지를 가진 것으로 판단되어 법으로 보호받기 시작한다.
1년 등록금이 20만원 수준인 대학까지 학비는 거의 무료지만 부모의 형편이 어려운 경우 중학생부터 장학금을 신청할 수도 있다. 부모의 경제 수준과 상관없이 누구든 대학교육까지 받을 수 있는 보편적 복지가 제공되는 것은 이 사회가 여전히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구호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환기시킨다. 또한 이는 각자의 학력과 경제 수준에 상관없이 일정한 존엄을 지키고 프랑스의 가장 소중한 특징인 ‘지적 호기심 충만한’사회를 유지하는 바탕이 된다.
이렇게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꼼꼼한 사회적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2008년 유럽에 밀어닥친 금융위기 이후 유럽연합이 주도하는 국가 재정 축소와 민영화 그리고 복지 축소의 기조 속에서 프랑스 사회의 빈곤층이 급격히 양산되고 있다.
최근 통계 : 프랑스의 다섯 가구 중 한 가구가 빈곤층에 속하며, 열 가구 중 한 가구는 극도로 불안정함, 프레케르 상태에 놓여 있다. 프레케르는 작금의 프랑스 사회를 표현하기 위해 자주 등장하는 형용사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정성을 잃어버린 삶을 뜻한다. 직장도 주거도 수입도 일정치 않은 부모 밑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간다.
* 아빠들에게도 출산휴가를!
출산휴가를 5주에서 6주로 늘려달라는 서명 운동 : 이 주장 속에는 ‘새로운 유형의 남자를 창조’해야 한다는 대범한 의도가 담겨 있다. 남녀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의 감동과 일들을 함께 나누며 자녀 양육의 진정한 협업자가 되어야 하고, 여자가 일방적으로 짊어지고 감수하던 직업적 희생과 육아의 스트레스를 이제 남자가 나눠야 한다는 속 깊은 의지가 담겨 있다.
아이를 낳은 직후 엄마라는 초능력자의 어깨 위에 모두 던져지는 짐들을 묵묵히 감당하다 보면 우울과 마주하게 되며, 그 우울은 이후 아이 돌보기 노동에서 지속적으로 배제되는 대신 사회적 경력 쌓기에 집중하는 남편을 통해 더욱 고착화되도록 현 시스템이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녀가 육아와 가사노동의 의무를 함께 지도록 설계하려는 사회적 시도 자체가 많은 여성들을 산후우울증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다.
칼리의 주치의 닥터 샴페인
닥터 샴페인은 3~4일 동안 15~20분 정도 우는 아이를 내버려두면 자기가 아무리 울어도 부모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그리하여 더 이상 아이 울음으로 저녁 시간을 위협받지 않고 평화를 보장받는 프랑스 커플들의 오랜 비법을 전했다. 때로 우는 아이를 그대로 두는 훈련을 일주일까지 연장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부분의 프랑스 부모들은 이런 식으로 아이의 ‘규칙적 생활’과 자신들의 ‘자유’로운 저녁시간을 보장받아, 일찌감치 아이를 재우고 차분하게 저녁 식사를 즐긴다. 그리하여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가족의 삶은 철저하게 부부 위주로 흘러갈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 프랑스 육아철학의 기초를 만든, ‘돌토’라는 신화
돌토 중학교 : 그 이름은 프랑수아즈 돌토라는 어린이 정신분석학자이자 아동교육 이론의 선구자에게서 따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그녀의 손길이 절실한 아이들이 모인 학교에 그녀의 이름이 붙어 있는 셈이었다. 아동심리와 아동교육계의 프로이트 같은 존재감을 갖는 그녀는 프랑스 전역의 학교와 집에서 실천되는 프랑스 아동교육의 기초를 닦고 널리 전파한 사람이다.
언니가 죽은 이후에 상실의 고통으로 살아 있는 딸을 구박하던 히스테릭한 엄마는 현대 프랑스의 아동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동정신분석학자 프랑수아즈 돌토를 키워낸 토양이었던 셈이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침몰하지 않고 고통이 건넨 질문들을 자양분 삼아 세상에 의미 있는 작업을 행하는 것이 그녀에게 필생의 과제로 주어졌다.
아동교육과 의학에 관심을 가졌던 그녀는 의학공부를 시작한다. 정신분석학도로서 그녀가 다룬 주제는 ‘고통 받는 어린아이와 그들이 맺는 어머니와의 관계’였다. 당연히 자신의 어린 시절의 고통들을 파고들었다. 이후 1세기 동안 프랑스 부모들이 금과옥조로 삼은 몇 가지 명료한 결론을 내놓는다.
1.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완전한 인격체를 지니고 있다.
2.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아이들은 자기 삶의 주인이다.
3.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하라. 아이들은 언제나 자기 삶에 대한 직관을 가지고 있다. 진실이 올바로 전해지면 아이는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을 성장시킨다.
4. 모든 것은 언어다. 말뿐 아니라 시선, 손짓, 표정, 태도, 걸음걸이 등 이 모든 것이 언어다. 신생아들도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소통하려 한다. 그러니 주저 말고, 최초의 순간부터 아이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라.
그녀의 이론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의무와 권리를 규정하는 ‘부모권한법(1990)의 초석이 되기도 했다.
* 행복한 어린 시절(2014) : 카트린 귀겐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주변사람들의 감정 상태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즉 태어날 때부터 애정에 대한 공감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타인의 애정 어린 태도를 인식하고 여기 반응하는 것이다. 생후 6개월이 지나면 자신에게 호의적이고 따뜻한 사람에게 끌리는 한편, 악의적인 사람을 피한다. 한 살이 되면 타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게 되고, 14개월에 이르면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할 줄도 알게 된다. 자아를 자각하는 생후 15개월에서 두 살 사이의 시기에 아이들은 당황, 질투, 공감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타인에 대한 공감은 자신을 타인의 위치에 놓을 줄 알아야 드러난다. 만 세 살이 되면 아이는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 규칙을 이해하고 습득할 수 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죄책감, 부끄러움, 자랑스러움, 자만심 등 새로운 종류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아이가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호의를 가진 어른이 차근차근 하나씩 짚어가며, ‘너 지금 화났어? 실망했어? 무서운 거야? 슬픈거니?’라고 물어보고 아이와 소통하면 아이는 점점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수적이다. 그것은 우리를 자극하고 행동하게 한다. 어떤 연령대든 마찬가지다. 자신의 감정을 들어주는 사람도, 나누는 사람도 없다면 아이의 정서적 삶은 꺼져버리고 만다. 더 나아가 스스로를 꺽어버린다. 두려움과 의심을 확산시킬 뿐 아니라 살아갈 용기를 방해하는 부정적 감정들을 싹트게 한다.
아이가 소통할 대상을 갖지 못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마음을 닫거나 내면 한구석이 꺼질 수도 있다. 혹은 정반대로 공격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복종하면서도 갑작스럽게 분노를 폭발시킬 수 있다. 아이들의 문제는 어른들과의 관계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 애정이나 공감이 결핍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감을 많이 경험할수록 사회성은 발달하고 공격적이거나 반사회적인 태도는 줄어든다. 성장하기 위해 두뇌는 안정적인 관계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두뇌를 일깨우는 햇볕과도 같은 것이다.
칼리가 내게 슬펐던 일, 힘들었던 일, 서러웠던 일을 토로할 때, 나는 엄마로서 조언의 말을 찾기 전에 먼저 ‘그랬구나, 우리 딸, 그래서 우리 칼리가 슬펐구나’라고 먼저 말하며 무릎 위에 아이를 앉히고 꼭 안아준다. 그리고 마주 닿은 두 심장으로 공감을 충분히 확인시킨 후, 비로소 나의 제언을 건넨다.
온전한 책임을 가지고 대해야 하는 존재인 아이에게만은 ‘공감’이라는 밴드부터 붙여 상처가 노출되는 걸 막은 후,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원칙을 철저히 따른다. 실은 이 단계로 충분할 때가 많다. 공감해주는 사람 하나만 있다면, 다음 해결책 정도는 아이 스스로 찾는다.
* 왜 세상의 모든 꽃들은 다 예뻐?
그러게 왜? 꽃들은 모두 다 예쁘지? 한참을 생각한 끝에 꽃은 식물에서 생식기의 역할을 하는 부위라는 사실. 벌과 나비를 유혹하여 생식하고 번성하기 위하여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를 갖고 있는 거라는 결론에 이른다.
‘칼리야, 모든 식물은 벌과 나비를 오게 하려고 각자 최선을 다해 꽃에게 아름다운 색깔과 향기를 갖게 만들어온 것 아닐까?’
아이는 언제까지 이렇게 지상 위의 모든 생명체들과 소통하며, 그들과 우정을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연의 일부임을 느끼고 자연을 존중하는 태도는 아이를 자연스럽게 생태주의자가 되도록 이끌었다. 물도, 종이도, 음식도 낭비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가지게 된 건 그들이 모두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자각 때문이다.
목화 송이 : ‘고마워. 너의 친구들이 내가 입고 있는 바지를 만들어주었어.‘
*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들
내가 돌보던 티보도 그랬다. 두 살의 티보와 스물아홉 살의 나 사이에는 늘 누가 결정의 주체인지를 두고 숱한 분쟁이 있었다. 두 살 먹은 아이가 이 모든 것은 자신이 결정할 사안임을 표명하는 언어는 ‘결정을 하는 사람은 나야’ 였다. 티보도 태어나면서부터 완벽한 인격체로 철저히 존중받아온 것이다.
아이가 고집을 부리면 프랑스 부모들은 설명하고 설득한다. 그리고 선택의 범위를 제시한다. 아이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어른의 언어로 계속해서 설명한다. 아이도 처음 말을 배울 때부터 어른들의 말을 따라 한다.
나는 뻣뻣한 프랑스 상인들이 단박에 맘에 들었다. 진상 손님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고, 고통스러운 감정노동자들의 수고를 보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수평한 땅에 함께 서 있다는 그 느낌이 좋았다.
* 세상살이를 위한 세 가지 에어쿠션 봉주르 : 안녕하세요 실트프레 : 공손하게 부탁하는 말 메르시 : 감사합니다 |
아이들이 말을 시작하면 이 세 가지 말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올 때까지 주변의 모든 어른들이 가세해서 가르친다.
그것은 만인을 향한 존중의 언어인 동시에 그들과의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나를 지키는 언어였다. ‘메르시’를 넉넉하게 말하는 사람은 우아함을 획득하며, ‘봉주르’를 자주 건네는 사람은 너그러워진다. ‘실트플레’를 잊지 않는 사람은 품위를 얻게 된다. 유학시절의 나는 티보와 함께 그 세 가지 말을 내 몸에 장착시키며 프랑스 사회에서 안전하고 품위있게 살아갈 시민이 되는 훈련을 해갔다.
버스에서 만난 네 살짜리 소년 그리고 티보. 그들의 당당하고 맹랑한 자아는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존엄하게 태어났다는 ‘세계인권선언’의 첫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식탁에 앉아 얌전히 전식, 본식, 후식을 기다리는 프랑스 아이들의 놀라운 이야기는 바로 이런 교육의 바탕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가 받고 싶은 대접을 남에게 똑같이 해주는 것. 아이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이니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면서 인내심을 갖게 하는 것. 그러한 인본주의적 태도가 이 나라 유아교육의 바탕이기도 했다.
* 프랑스 유치원
프랑스의 유치원은 그 미스터리한 ‘프랑스 아이들’이 만들어지는 신묘한 공간이다. 아이들의 연령대가 만 3~5세이기에 유치원이라고 번역하지만 프랑스에선 엄마학교라 불린다.
프랑스의 유치원은 교육부 소속의 교육기관으로 대부분이 공립이다. 유치원 교사는 초등학교 교사와 같은 교원 훈련을 받은 교육부 소속 공무원으로서 한 명의 보조 교사와 함께 20~25명 정도로 구성된 한 학급을 맡는다. 입학을 원하는 아이들을 모두 무료로 받아주어야 할 의무가 국가에 있다.
탁아소는 전체 유아들의 수요를 백% 감당하지 못하지만 유치원부터는 다르다. 유치원은 아침 9시에 문을 열고 오후 4시 반에 닫는다. 유치원이 끝나면 바로 같은 자리에서 6시까지 놀이센터가 이어진다. 이때 아이들을 돌봐주는 놀이 교사들은 지방자치단체 소속이다. 프랑스의 유치원 시스템을 들여다보면 아이는 나라가 키워준다는 말을 고스란히 실감할 수 있다.
유치원 교육의 목표는 언어를 비롯한 자기표현 방식을 발달시키고, 감각을 일깨우며, 프랑스 사회의 어린 시민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다. 본래는 3세부터지만 2세 반부터도 입학이 허용된다. 엄마와 떨어져도 울지 않을 아이들이 온다.
아이들에게는 유치원이 행복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교사가 수업을 이끌어간다면 보조교사는 아이들에게 넉넉한 스킨십을 전하고 엄마 품을 그리워하는 아이들에게 보모가 되주었다.
칼리가 유치원에 3일째 되던 날, 숨바꼭질
보조교사가 숨어있는 칼리를 놔두고 감. 놀이 교사가 발견하고 데려다 줌. 칼리는 유치원에 가기를 거부. 유치원을 옮기는 절차를 밟았으나 원측에서 거부. 일주일 정도 유치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 데리고 있다가 정면 돌파. 아이는 용기를 냈고 엄마 아빠도 아이만큼 담대해졌다.
오후 4시 반, 아이를 찾으러 유치원에 갔을 때 아이는 아침과 딴판이었다. ‘엄마, 친구가 생겼어!’ ‘칼리에게 친구가 생겼어요. 이제 다 해결되었어요’
구원의 천사는 노아였다. 일본 엄마와 프랑스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아이. 공통점을 인지했는지 둘은 서로에게 끌렸고 하루 종일 같이 놀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친구’는 칼리에게 가장 소중한 단어가 되었다. 친구는 지옥을 하루아침에 천국으로 바꿔줄 수 있는 인생의 열쇠라는 것을 아이는 알게 된 것이다.
놀이센터
오후 4시 반. 유치원이 끝나면 유치원에 남는 아이들은 부모나 베이비시터가 6시에 오기 때문에 그 사이 1시간 반 동안 유치원은 놀이센터가 된다. 마당 놀이터에서 뛰어놀거나, 놀이교사들과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를 접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놀이센터는 시청에서 운영하는 놀이 센터에 소속된 애니메이터들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
프랑스에서는 두 달이 넘는 기나긴 여름방학 외에도 2주짜리 방학이 연간 네 번 있다. 그때마다 유치원과 학교는 아침부터 6시까지 놀이 센터로 변한다. 방학동안 부모들이 늘 같이 휴가를 쓸 순 없는 까닭에 아이들은 도시에 놀이센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도 제법 많다.
방학 때 놀이 센터의 프로그램은 아주 다양하다. 루브르박물관, 오르세미술관, 케브랑리박물관, 퐁피두센터 등은 물론 유람선인 바토 무슈를 타고 센강을 한 바퀴 돌기도 한다. 인근 숲에서 야영도 하고, 숲속의 야외 수영장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하며, 마리오네트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한다.
공방에 가서 판화 작업을 하거나 도자기를 굽는 프로그램도 있다. 매일매일 다채로운 문화 프로그램들로 꽉 채워져 있어서 멀리 여행 가지 않아도 심심하거나 서러울 일은 없다. 파리에는 끝이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문화 프로그램들이 넘치도록 있으니까.
* 감각 일깨우기(에베이)
‘에베이는 유치원 또래가 받게 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수업에 붙는 단어다. ’눈뜨기‘ 혹은 감각 일깨우기’ 정도의 의미다. 음악이든, 무용이든, 미술이든, 유치원 시절에는 맛보기 정도로만 가볍게 배우면서 감각만 일깨우는 교육이 이뤄진다.
이 나라는 수영이든, 외국어든, 악기든, 뭘 배워도 일주일에 한번씩이다. 이런 속도로 어느 세월에 기능을 습득할까 싶지만 물에 발부터 담그고 조금씩 온몸을 젖어들게 하면 어느 순간 아이들은 스스로 온몸을 움직여 수영할 수 있게 된다는 게 이 동네 예술교육이 갖는 믿음이다. 맛을 보고 감각을 익히게 한 다음에 저 스스로의 동력으로 자신의 길을 찾게 하기 위함이다. 중요한 것은 즐거움과 재미를 놓치지 않게 하는 것. 재미가 의무로 둔갑하는 순간, 모든 배움의 동력을 잃게 된다고 이들은 믿는다.
* 내겐 권리가 있어
군주제의 폐지와 공화정의 탄생은 권력의 주체가 왕에게서 시민들로 바뀐 급격한 변화를 의미한다. 공화정의 성공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올바르게 행사하는 깨어 있는 시민 양성에 달려 있었다. 자신의 권리를 깨닫고 요구하며 행사할 줄 아는 시민을 지속적으로 양성하지 못한다면 공화정은 상상 속의 유토피아일 뿐. 바로 이 공화정 유지라는 절대적 필요에 의해 깨어 있는 시민 양성의 사명을 가진 근대 학교가 출발했다.
처음 혁명(1789년)을 했다가 엎어지고(1814년 왕정복고) 다시 뒤집어지면서(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 2세기 남짓한 시간이 지났으나 ‘깨어 있는 이성을 가진 시민 양성’은 여전히 프랑스 교과목의 하나를 차지한다. 프랑스 교육부는 ‘시민윤리’ 교육의 목표가 ‘미래의 책임 있는 시민’과 ‘비판적 이성을 가진 성숙한 시민’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밝힌다.
근대 시민사회의 시작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었으며, 저항의 출발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냉철한 이성임을 그들은 부인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민윤리 시간에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 중 하나가 ‘인간의 존엄’이다. 모든 인간에게 날 때부터 가진 천부의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존엄이며, 나 자신의 존엄을 먼저 알고 존중할 것, 똑같은 방식으로 타인들을 존중해야 함을 가르친다. 스스로에 대한 존중의 첫 출발점을 제 몸을 소중히 돌보는 것을 꼽고 있다. 균형 있는 식사를 하고, 충분히 잠을 자고 내 몸을 강제하는 타인의 어떤 강압적 요구도 받아들이지 말 것을 가르친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파업하고 시위하는 이 나라에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이념은 불변의 교훈이다. 비록 저 세 가지 이상이 현실 가까이에 있다고 느껴지진 않지만 적어도 이 가치들이 치명적 타격을 입으면 사람들은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며 반응한다.
* 가브리엘의 고백
아이를 몸 안에서 키워내 출산을 할 뿐 아니라 젖을 먹이고, 몸이 주는 지혜를 풀어내 어린 생명체를 길러내는 여성의 능력을 갖지 못한 남성들은 그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개척했다. 예를 들면 사냥 같은 것, 과거엔 들짐승을 사냥했다면 지금은 고객을, 기업을, 돈을 사냥하고, 여성들과 비교해 그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다. 전 세계 노동인구의 3/2는 여자지만, 전 세계 부의 백분의 1만이 여성의 소유라는 유엔의 여성 지위에 대한 보고서는 남성들이 여성에 비해 얼마나 뛰어난 사냥 실력을 가졌는지를 입증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들은 자신들이 능력을 발휘하는 그 분야에서 실력을 입증하는 것만이 유용한 존재의 의미를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인 것처럼 패러다임을 몰고 가버린 데서 비극은 발생한다.
여성의 관계 중심적인 생활 방식, 생명을 살리는 데서 장점이 발휘되는 능력은 수 세기에 걸친 집요한 파괴공작으로 인해 잘해봤자 사회적 능력으로는 간주될 수 없는, 아니, 능력의 카테고리 자체에서 삭제되는 참사로 이어졌다. 남녀간 불평등은 그들의 존재방식이 대변하는 가치의 불평등이기도 하다. 평화와 상생, 협력과 공존을 수치화하거나 그 능력에 대해 묻지 않고, 개발, 전쟁, 정복, 발전의 가치가 선두에 서서 지구인들을 견인해오는 동안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은 급속도로 멸종하고, 우리 모두의 삶의 터전인 지구의 파괴도 가속화되어 왔다. 이제 우리가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면 후손들에게 물려줄 하나뿐인 지구의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 만큼 자연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다.
여성의 몸이 지니고 있는 이 놀라운 지혜와 권능에 대해 나 자신도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처음으로 울컥 실감했다. 어떻게 우리는 이토록 까맣게 모르거나,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하면서 지내왔는지 그동안의 무지를 통감했고, 생명을 품어내고, 키워내도록 설계되어 있던 우리 몸이 지닌 능력에 감탄했다. 에콜로지(생태학)와 페미니즘(모든 성별은 평등하다. 여성지향주의 의식)과 반자본주의는 결국 한줄기 생각이 아닐까.
* 그들이 하지 않는 질문,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
인류 역사에 프랑스인들이 그은 가장 또렷한 획은 189년의 프랑스대혁명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7월 14일 혁명기념일에 불꽃놀이를 하며 그날을 기억한다. 그러나 혁명을 지휘한 영웅을 연호하지 않는다. 그날의 영웅은 없으며, 혁명의 주인공은 바로 이름 없는 시민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당연하게도 장점과 모순, 빛나는 면모와 허약한 지점을 함께 지닌 존재들이고 세상을 바꾸는 물줄기는 한 사람의 영웅이 만들어내지 않는 법이다.
* 아이들의 철학 아틀리에
나의 시각으로, 혹은 다른 사람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서로의 관점의 차이를 확인하면서, 나의 세계를 확장시켜나가는 것이다. 그 생각의 놀이터에서 당연해 보이는 이 세상의 논리들을 재배치해보며 그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놀이가 바로 철학이었다.
일곱 살짜리 아이들에게는 지식의 습득보다 학습 태도를 비롯한, 생활 태도의 기본 틀을 잡아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프랑스에서는 서너 살 때부터 생활 태도에 대해 집중적으로 교육시킨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부탁합니다’ 등의 기본적인 언어 습관은 물론, 식탁에서는 전식과 본식, 후식 사이의 엄격한 순서를 지키게 한다. 생활의 리듬이 완전히 습관으로 정착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훈련된다. 얼핏보면 프랑스는 자유가 넘실대는 사회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자유는 가정, 탁아소, 학교, 이웃, 친척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이처럼 단단한 틀을 만들어주고 나서야 그 틀을 준수하는 선에서만 허락된다.
생활태도는 엄격하게 가르치지만 학습에 있어서는 매우 느슨하다. 특히 선행학습은 원칙적으로 금물이다. 누군가 월반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단 다른 아이들의 입장에선 별일이 아니다. 미래에 대단한 인물로 성장할 싹을 지녔다고 해석되지도 않는다. 이들에게 월반은 남들보다 발이 크거나 키가 빨리 자란 것처럼 배우는 속도가 달라 다른 애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반을 수직적으로 바꾸는 일일 뿐이다.
완벽은 필요 없다. 천천히 알아가고, 점점 더 잘 이해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이 일관된 관대함은 담고 있다. 백 미터를 몇 초에 돌파하는지 보다 달리는 방법을 아이들이 제대로 익혔는지를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결과는 각자의 몫 일 뿐이다. 오늘의 내가 미래의 나와 견주어 어떤 점에서 나아져야 하는지를 제시해준다. 경쟁의 대상이 옆 사람이 아니고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라는 사실.
* 등수가 없는 자리를 메우는 것
등수의 부재가 베푸는 미덕은 무한하다. 먼저 아이들이 쉽게 우정을 지킬 수 있다. ‘열심히 하세요’라고 평가받은 아이들은 스스로가 성실하게 학업에 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 모욕을 주는 것도 아니다. 이번에는 못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열심히 할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한 아이가 갖는 특징 중 하나가 될 뿐이다.
인간에게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추억이다. 칼리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에게는 친구들과 쌓는 우정이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가 친구들에게 부여하는 의미는 점점 커져갔고, 그들과 나누는 우정의 농도도 짙어졌다. 부모를 넘어 친구들을 통해 아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넓히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켜나갔다.
방학동안 한국에서 만난 친구의 말 :
완전히 다른 카테고리에 속한 칼리한테는 상대의 장점과 약점을 살피고 비교하는 시선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는 평화를 느끼며 칼리를 사귈 수 있었던 것. 두 아이는 쉽게 친해졌고 포근한 우정의 위로를 처음 맛보았던 것이다.
등수가 없는 세계에선, 내가 점수로 판단되지 않으므로 남에게도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점수 너머에 있던 더 많은 각자의 특징을 보게 된다. 점수로 인간을 평가하는 획일적인 기준이 사라지면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주제들이 아이들의 삶 속에 들어가 펼쳐진다. 우정은 저마다의 다양한 관심사를 친구를 통해 만나게 해주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 카페에 앉아 녹였다, 3년 묵은 응어리를
트라우마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전쟁 세대는 전쟁의 공포가 주는 트라우마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고, imf 외환위기 사태를 10대 시절에 겪은 세대는 자본의 힘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내면화한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세월호와 함께 수장되던 청소년들을 지켜본 집단적 충격과 이후 전개된 세월호 유족들에 대한 패륜의 현장들을 우린 앞으로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겠다.
사랑이란 것은 한쪽이 넉넉히 주어도 때로는 예기치 않은 전달 사고가 일어나 받는 상대는 외로움에 시달릴 수도 있다. 부모의 사랑을 절반의 식량으로 취하며 자라는 아이들의 경우, 부모의 상상을 초월하는 곳에서 상처를 받고는 치유 받지 못한 채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갈 수도 있다. 이제 아이가 나를 위로할 때가 더 잦을 만큼 아이는 커버렸다.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리를 펼치자 아이는 금세 내 품으로 달려왔다.
* 사람의 몸은 자유로운가?
완전히 자유로우려면 정말 강해지고, 똑똑해지고, 힘이 있어야 해.
엄마가 마음대로 하라고 하니까 덜컥 법이 났지? 그건 너 스스로 자유를 누릴 만큼 아직 크지도, 힘이 있지도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무지가 사라질 때 비로소 자유가 시작된다.
네가 모르던 것들을 알게 되고, 세상에 눈을 뜨게 되면서 비로소 너는 자유를 얻게 된다는 뜻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남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겠지. 그리고 남들이 그 사람 머릿속에 집어넣은 생각을 자기 생각인 줄 알고 행동하는 거야. 혹은 자유를 줘도 거부하기도 하지. 자유를 누리는 건 힘들고 고단하기도 하거든. 자유는 누가 너의 행동과 생각, 말하는 것, 그리는 것을 막을 때, 그걸 거부하고 너의 의지대로 하는 거지.
아빠 : 과거에는 종교가 가장 많이 사람을 억압하는 역할을 했고, 지금은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자본주의도 그런 역할을 하지. 과거 프랑스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큰 힘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래서 신부들이 마녀사냥, 면죄부 판매를 했어. 이제는 세력이 많이 약해져서 못 그러지.
현대의 절대권력은 자본가들이야.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점점 바보로 만들어. 노예로 만들기도 하고. 너희 반에 큰 상표가 써있는 옷을 입고 다니는 아이들 있지? 상표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사회에서 자리 잡고 있는 위치를 표시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거든. 사람들은 비싼 상표가 크게 보이게 옷을 입고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자기가 실제로는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이 상표들이 대신 채워주길 기대하는 마음이 있는 거야. 이 아이들은 늘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니까.
칼리의 눈의 여왕 :
아이들이 다 좋아하니까 아이들이 엄마를 조를수록, 인형을 만든 사람은 그걸 비싸게 팔아. 너는 그 영화를 보고 그 인형의 포로가 된 거지. 그리고 그 사람들의 상술에 넘어간 거고. 엄마를 졸라 엄마 지갑을 열게 했지만, 결국은 그 지갑을 열어서 돈을 가져간 사람들은 장사꾼들인 거야. 자발적으로 지갑을 열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사람을 들들 볶는 거지. 광고판, 여기저기 똑같은 노래, 포스터, 계속해서 ‘사! 사!사!’ 이렇게 말하는 거야. 거기에 저항하려면 정말 힘이 세야겠지?
* 우월감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차는 것
중학 시절부터 대학교까지 모든 평가는 절대평가로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성적을 개인적인 일로 만들어버리는 중요한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학업이 나 자신의 일이며, 자신의 선택이란 사실을 명료하게 인지시킨다.
아이들에게는 자유를 허락하는 대신 자율을 요구한다. 너의 인생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너의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선택하되, 그 선택에 책임을 져라. 프랑스 아이들이 고교 시절부터 집회에 나서고, 시시때때로, 전국 단위의 파업을 조직하며, 주저 없이 사회적 투쟁의 최전선에 나서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 아이를 위해 머리를 맞댄 교사와 학부모
아이의 학습 태도나 학업 성취도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아이의 성품이나 고유한 특징에 대해서까지 각 과목 교사들이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교사들에게 아이들은 직업적인 가르침의 대상일 뿐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을 건네는 소중한 인격체임을 확인한다. 배움과 가르침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관계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 내 마음 한 조각 건네지 않으면 상대방의 마음도 들여다볼 수 없으니까.
선생님 네 분을 만나 10분씩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 면담을 마치고 나니 교사들과 함께 촘촘한 그물이라도 짠 기분이었다.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아이에 대한 이해의 폭이 한 뼘 더 촘촘해지면서 신뢰도 그만큼 두터워진다. 선생님과 학부모가 마주하고 공유한 아이에 대한 이해의 폭 덕분에 아이들은 한결 편해질 것이다. 모든 학부모가 함께 학교에 초대되어 각자 만나고 싶었던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 단체로 정기 건강검진을 받는 것과 비슷한 효과도 생기리라 본다.
학교나 교사들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 분명하다. 그래도 매년 교사와 학부모 상담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 프랑스 학교가 자신들의 행정 편의보다 아이들의 이해를 중심에 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만남은 이해를 낳고 이해는 신뢰를 가져오며 신뢰는 아이들이 씽씽 달릴 수 있는 평화로운 벌판을 선사한다.
* 우리반에 왕따가 있었어
그 아이가 가해자가 되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이 과거에 피해자였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왕따를 당했던 아이가 자신과 비슷한 프로필을 가진 새로운 피해자를 찾아내어 받은 대로 똑같이 그 아이에게 행하는 경우였다. 가해자 아이가 계속 돌은 던지는 걸 막을 수 있었던 사람은 피해자의 엄마였다. 그 엄마는 가해자 아이에게 조용히 다가가 자신의 아들이 매일 밤마다 집에서 울며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해자 아이는 그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다가 그것은 바로 1년 전 자신의 모습임을 알았다.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가 증오했던 악마의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던 것이다. 아이는 그날로 괴롭힘을 멈췄다.
* 교과목의 크로스오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엄마가 보기에 가장 놀라운 과목은 시민윤리다. 시민윤리는 격주로 1시간씩 진행된다. 이 수업은 시험을 보지 않는다. 아무것도 암기하지 않아도 되고 숙제도 없다. 다만 아이들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덕목들을 몸소 익힌다.
상황극이나 토론, 혹은 외부 강사 등이 초청되어 수업이 이뤄진다. 예를 들면 학교 왕따, 인종차별, 성평등, 동성애 등에 관한 무제들을 다양하게 상황극으로 간접 체험하게 한다. 먼저 관련된 자료들을 영상으로 보여주거나 선생님이 이야기를 통해 어떤 사례들이 있는지 소개해주고, 아이들로 하여금 소개해준 자료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각 그룹에서 함께 시나리오를 써보게 한 후, 다음번 시간엔 그것을 직접 배우처럼 연기해보는 방식이다. 때론 논리 훈련이 이뤄지기도 한다. 찬반의 논란이 있는 주제를 가지고 찬성 그룹과 반대 그룹으로 나뉘어 아이들은 논리 대결을 펼친다.
칼리는 시민윤리 시간을 좋아한다. 일상과 가장 밀접한 과목인데다 아이들이 서로의 생각을 가장 많이 이야기하고 듣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배워야 한다는 당위에서 벗어나 활발하게 의견을 말하는 주체가 된다. 문제와 답들이 공중에서 서로 부딪치면서 단단한 논리로 빚어지는 과정을 경험한다. 이른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자신의 생각을 구축하는 시간인 것이다.
* 평행선에서 동위각의 크기는 같다.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저는 정답보다 정답에 이르는 과정, 사고의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원리를 이해하고 언어로 입증해가는 훈련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수학은 논리적 사고를 가르치는 학문이니까요. - 수학 선생님
단 네 문제를 풀더라도 각각의 경우를 증명하는 이론적 토대를 구구절절 말로 풀어 설명해야 한다. 그래서 일단 글을 쓰는 일에만 제법 시간이 걸린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완벽히 과정을 이해하고 서술해야 하므로 많은 문제를 풀지 않아도 아이들의 앎의 질은 확실히 높아진다.
이 나라의 아이들은 정답을 맞히는 훈련으로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는다. 정답으로 가는 길을 탐구하고 그 과정을 말로 설명하도록 훈련된다. 수학문제를 푸는 순간에도 논리를 찾아내고 정확한 어휘로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한다. 정해진 단답형의 인생이 아니기에 그들의 길목은 미어터지지 않는다. 순간의 실수로 인생이 미끄러지는 법도 없다. 그들이 가는 속도는 더디지만 매순간 존엄을 지킬 수 있게 해준다.
* 학교의 슬픔
학교를 통해 투영된 사회의 문제다.
나탈리의 아버지가 해고된 1980년대 중반, 정확히 바로 그 무렵 프랑스의 사회당 정부에 의해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도입된다.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등장했고, 공기업 민영화가 시작되었다. 2008년의 금융위기는 이러한 현상을 한층 심화시켰다.
2008년~2009년 사이, 민영화와 더불어 급격한 구조조정이 이뤄졌던 프랑스통신에서 35명이 자살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2만 2천명이 해고되고 1만 명이 직종을 바꾸어야 했다. 이를테면 연구직에서 마케팅 사원으로의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던 사람들, 갑작스럽게 해고당했던 사람들이 연쇄적으로 자살을 택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 10년 사이 프랑스에서는 60만 명이 새롭게 빈곤층으로 전락했고, 직장 내의 번아웃(심신 탈진상태)현상이나 괴롭힘 현상도 일반화되어갔다.
한 줌 주식 투자자들의 이득을 위해 다수의 사람들이 일상에서 누리던 평화를 하루아침에 파괴하는 가공할 ‘일상 파괴의 신무기’ 신자유주의는 사회 곳곳에 폐허를 만들어갔다.
나탈리의 아버지처럼 갑자기 무기력과 빈곤에 처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아이들에게 불안을 드리우는 가정환경이 늘어갔다. 정부의 ‘긴축 재정’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줄기차게 지속된 정책 방향이었다. 금융투자자들과 금융권이 감당해야 할 손해를 국가가 끌어안으면서 피해는 고스란히 전체 국민, 특히 저소득층에게 떨어졌다.
공공부문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쓰는 교육 분야부터 재정을 줄여야 했다. 사르코지 정부(2008~2013)는 학교들을 폐쇄했고 교원 수를 8만 명이나 감축했다. 그 뒤를 이은 올랑드 정부도 교육부의 재정 감축을 멈추지 않았다. 저소득층 지역의 학교에 지급되던 보조금은 삭감되었다. 더 많은 보살핌이 필요한 지역에서 교사 당 학생 수를 늘리고, 보조교사들을 위한 재정을 삭감했다.
국가 재정의 감축은 복지가 축소된다는 말과 같고, 공공 부문의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뜻이며, 남은 사람들의 업무가 과중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빈부 격차의 골을 메우던 복지가 얇아지자 앙상한 현실들이 속살을 드러내며 학교의 일상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교육재정의 축소는 교육의 질적 저하로 이어졌다.
초등학교까지는 사회적 갈등이 날카롭게 드러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로 배정된다. 아이들은 특별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 학교에 간다. 조금 잘살든 못살든 어릴 때는 학교 안에서 별다른 갈등 없이 어우러진다. 사교육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나라, 성적으로 서열화되지 않는 공교육 시스템 안에서 몇몇 개구쟁이들의 일상적 소란 외에는 계층적 문제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중학교부터 좋은 학교와 나쁜 학교가 구분되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예민해지는 시기, 즉 사춘기는 가정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는 아이와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성향이 극명히 다른 모습으로 표출되는 시기다. 해맑던 아이들이 삐딱하게 눈을 치켜뜨기 시작하면 부모와 의사소통이 원활하고 경제적 곤란을 겪지 않는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 사이의 차이가 또렷해진다. 격차가 심해질수록 교사들은 곱절이나 되는 에너지를 교실에 쏟게 된다. 반에 정서가 불안한 아이들이 네다섯 명만 있어도 교실 전체는 그들로 인해 완전히 분산된다.
무상에 가까운 교육제도가 의료복지와 더불어 프랑스의 복지제도를 뒷받침하는 기둥이건만 긴축 재정과 신자유주의가 이어지는 동안 기둥에 심각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삶에 감당하기 어려운 먹구름이 끼어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절망을 물려준다. 절망한 아이들을 품은 학교가 새로운 빛을 주지 못하면 학교는 아이들과 함께 격랑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 [클래스]
2008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클래스]는 도심에서 게토화된 중학교의 적나라한 사례를 툭 잘라서 진솔하게 보여준다. 교사에 대한 존경과 순종 따위는 애초에 알지 못하고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에 큰 기대가 없어 보이는 아이들.
영화의 배경이 된 학교는 프랑수아즈 돌토 중학교다. 감독인 로랑 캉테는 학교의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줄 것을 제안하면서 영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곪아가는 교육 현장의 오늘을 ‘학교의 학생과 교사들을 통해 보여주자’는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새 학기부터 학교에서는 연극 아틀리에가 진행된다. 아틀리에에 참여한 학생들 중 50명이 직접 영화 촬영에 임하게 되었고, 영화는 학교 전체의 프로젝트가 되어버린다.
영화 [클래스] 속의 아이들은 늘 화가 나 있고 언어는 거칠다. 동성애 혐오, 유대인 혐오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차별은 차별받는 자들이 드는 일상적 무기인 것일까? 아이들은 이미 깊숙이 반사회적인 태도를 내재화한 상태다. 선생님은 그들에게 주류 세계를 상징하는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가 무너질 때까지 최대한 들이받는다.
선생님은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발 딛는 세계에서 어떤 아이들이 자기를 기다리는지 말이다. 그러나 버텨야 한다. 교사의 임무는 그 아이들에게 구명의 밧줄을 최대한 드리워 한두 명이라도 일찍 찾아온 절망의 늪에서 구해내는 것이니까.
이후 영화 속의 아이들은 학교나 어른들과 다른 관계를 맺었다. 부드러워졌고 여유로워졌다. 세상에 자신들이 설 자리가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을 때 세상은 그들을 내치지 않고 주목했다. 그 사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신뢰를 만든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아이들을 어른들의 세상과 화해하게 해주었던 찬란한 경험은 세상에 대한 아이들의 편협한 시선을 확 열어젖혔을 것이다. 문제가 있을 때, 과감하게 외부의 낯선 문화적 힘과 결합하여 현실의 돌파구를 찾는 시도 또한 종종 목격되는 프랑스적 방식이다.
* 그 아이가 달라진 걸 선생님은 보지 못했어요
밀란 :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흥분하며 뜨겁게 반응했다. 역사 선생님은 밀란에게 급우들 앞에서 말할 기회를 준다. 그리고 밀란의 관점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해준다. 밀란은 자신이 존중받는 유일한 시간인 역사 시간에 아무도 방해하지 않으면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한다. 다른 선생님들은 밀란을 다루는 법을 알지 못했다. 오직 학생들과 역사 선생님 그리고 밀란 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열등생 한 명을 낙오시키는 교사를 보면 나머지 아이들은 공범이 되었다는 죄책감과 함께 나 자신도 저렇게 처참하게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아이들은 거기서 긍정적인 교훈을 얻지 못했다. 밀란을 수업에 끌어들이는 대신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은 교사의 본분을 저버리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교사는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을 배제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아이들은 역설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 뛰어난 사람, 어리석은 사람, 약한 사람이 고루 섞여 있어.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해.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너희 기술 선생님은, 아마도 개인적 삶이 행복한 사람은 아닐 거야. 그러나 그가 못된 사람이 아닌 건 너도 알지? 그러니까 선생님을 포기하지 마. 너희가 선생님을 포기하면, 선생님은 더 이상 좋아질 수가 없어’
*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치과 의사의 방식이 고통을 완전히 잊게 해주진 못했다. 하지만 고통 완화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며 환자를 치료의 주제로 끌어들인 의사의 의지와 노력에 아이는 전폭적으로 마음을 내주었다. 결국 조금 아팠더라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하나의 중요한 태도, 즉 신뢰라는 튼실한 벽돌 하나를 그날 의사 선생이 건네주었다.
의사는 사람들의 치아를 들여다보면서 그들의 인생도 함께 보는 듯했다. 치아를 통해 도무지 외면하지 못할 막다른 골목에 이른 어린 인생들을 보면, 그녀는 의사의 본분을 넘어 시민으로서 제대로 보살핌 받지 못하는 어린 생명을 돌보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때로 그들의 친부모가 제자리에 없더라도 아이들을 연민과 애정으로 바라봐주는 단 한 사람의 어른이 주변에 있다면 아이들은 거기에 기대어 성장할 수 있다.
*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 한 울타리에서 배운다
일부 수업은 비장애인 아이들과 함께 듣고, 대부분의 수업은 율리스(적응반)반에서 특수교사의 지도하에 진행된다. 공식적으로 그 아이들은 비장애아들 반에 속해 있으므로 학급 단체 사진을 찍을 땐 함께 하는 것이다.
쥘은 말과 행동이 좀 느린 편이고 남들보다 예민하다. 그래서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지나가다 부딪히거나 하면 과도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어차피 지나가다 부딪히는 걸 좋아할 아이는 아무도 없으니까. 무례하게 굴지 않는다면 쥘과 쿨하게 지내지 못할 이유는 없단다. 갈등 상황이 빚어졌을 때 유연하게 대처하는 사회성이 좀 아쉬울 뿐. 쥘은 그렇게 학교라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특별함과 다른 아이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익히고, 아이들은 남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쥘과 살아가는 방식에 익숙해진다.
2005년부터 프랑스 정부는 모든 교육기관이 장애를 지닌 학생에게도 학습에 알맞은 환경을 제공하는 ‘장애학생 진학법’을 시행했다.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이 함께 학습할 수 있도록, 교육시설 스스로가 그들을 불편 없이 맞는 환경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이 법의 핵심. 학교란 다양한 사람들이 누구를 배제하거나 누구에게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곳이라는 판단이다.
장애가 의심되거나 장애를 가진 학생이 있다면 학생과 그 가족은 각 지자체에 속한 장애인 센터에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장애 정도를 진단받고, ‘개인 맞춤형 진학 계획’을 세우게 된다. 센터는 학생의 발달상태와 장애의 정도에 따라 교육 보조인의 동반 여부나 적응반 수업 참가에 대해 결정한다. 적응반의 교사는 특수교육 전공자로 학생 각각의 학업 계획에 따라 교육한다.
아이는 국가가 함께 키운다는 프랑스 정부의 태도는, 장애학생들을 일대일 맞춤형으로 돌보고, 그들을 위한 학습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데에서 더욱 또렷이 드러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똑같은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사회가 그들에게 어깨 하나를 내어주어 기대며 갈 수 있게 해주어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공존하게 하겠다는 그 철학에서 아이들은 더불어 살기의 기초를 배운다. 2017년 장애학생의 98%는 보조교사를 동반하여 등교했다고 발표했다. 그 숫자는 16만 4천명에 이른다.
* 칼리가 13살 되던 날
이해받는 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많다. 아이들이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누군가의 공감으로 녹아내린다. 이후 현실의 문제를 극복해가는 건 각자의 과제다. 아이를 키우며 내 어린 날들의 기억들을 계속 꺼내본다.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 아이는 부모와 단단한 공감의 지대를 형성할 수 있다.
아이는 서툴던 어린 시절의 엄마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열세 살의 딸로부터 아직도 울고 있는 일곱 살, 아홉 살의 내가 위로를 받는다.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우린 서로의 삶을 같이 쓰다듬는다.
* 평등에 온몸을 적시다
평등의 감수성은 내가 나보다 강한 사람들과 대등해져야 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나보다 약한 존재들도 나만큼 존중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한다. 그것은 생명의 무게는 같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생태 근본주의자들의 심리다.
* 깔랑, 내 속의 달콤함을 전달하는 행위
깔랑 : 포옹. 어리광 부리는, 다정한, 감미로운.
깔랑은 너로 인해 내 속에 생성된 달콤함을 녹여 너에게 전달하는 행위다. 그래서 그것은 주는 행위인 동시에 다시 받는 행위다. 나에게 달콤함을 생성하게 하는 상대와의 깔랑은 불가역적이다. 그 단순한 몸의 언어는 우리의 인생에 닥쳐왔고, 앞으로도 닥쳐올 슬픔과 환멸들로부터 우리를 쓰다듬어주는 포근한 깃털이다.
아이 아빠를 만나고 우리 사이에 칼리가 생기기 전의 삶은 이런 깔랑의 위로를 알지 못했다.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사랑은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고, 빗물에도 씻겨가지 않는다. 곱게 우리 안에 스며들어 빛으로 쌓인다. 그래서 사랑으로 빚어진 생명체는 빛을 발한다. 그 언제라도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는 환희를 비축한 사람이기에.
* 문학을 통해 아이들을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로 안내한다
: 마리 드 발레 - 샤를마뉴 중학교, 프랑스어 교사
프랑스어 교육의 목표 : 내 학생들이 프랑스어를 잘 읽고, 쓰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 더 나아가 문학에 입문하기를 바란다. 학생들이 세상의 위대한 작가들이 구축한 작품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길 바라며, 문체에 탐닉하기를 원한다.
프랑스, 파리에는 무료로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시설이 얼마나 많은가? 문화에 눈을 뜨고 그것들을 누릴 수 있는 코드(취향)를 획득하는 것은 앞으로 아이의 삶에 큰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 세상에 풍족하게 열려 있는 문화를 향한 문에 다가가는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해 매우 중요한 문제다.
프랑스어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아이들의 행복으로, 아름다움에 접속하는 것은 행복한 삶의 원천이니까. 나 스스로가 문학을 통해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맛보았다. 인류가 문학을 통해 누려온 기쁨과 행복을 학생들에게도 갖게 해주는 것이 나의 일이다.
충만한 인생을 위해선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을 나누는 법은 주로 부모가 가르칠 몫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프랑스어 교사로서 문학을 통해 아름다움에 접근하고 행복에 다가가는 길을 아이들에게 찾아주는 것을 내 역할로 삼는다.
* 왜 프랑스는 철학교육에 목숨 걸죠?
바칼로레아는 프랑스 고등학교 졸업자격 시험으로, 합격률은 88~90% 정도다. 약 2주일간 치러진다.
바칼로레아 철학시험이 던지는 질문들은 다분히 기존 질서와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과 의심을 품고 있다. 도발적 질문들은 파편처럼 사방으로 튀는 자유로운 생각을 자극한다. 그 도발 속에서 정연하게 체제수호적 생각을 할 수도, 나만의 뾰족한 사고를 구축할 수도 있다. 그 성을 축조하는 벽돌들을 차곡차곡 흩어지지 않게 쌓아올려 그럴듯한 모습으로 제시해야 할 뿐이다.
이 심오해 보이는 질문들은 세상에 나가기 전에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가라는 주문을 이제 막 어른이 될 아이들에게 던지는 것이다. 일생에 단 한번뿐인 바칼로레아 철학시험에서 만난 질문. 거기에 답하기 위해 집중하던 4시간. 그 시간 동안 만들어낸 나만의 생각 체계는 누구에게든 오래 남을 생각의 틀이다.
1808년 나폴레옹 치하에서 바칼로레아가 처음 생겼고 바로 그해부터 바칼로레아 철학시험이 실시되었다.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역사적 부침과 숱한 정치적 변혁이 있었음에도 철학에 부여한 이 사회의 가치는 한순간도 포기되거나 뒷걸음치지 않았다. 이들은 어떤 순간에도 자유롭게 생각하는 공화국의 시민을 길러낸다는 명제를 놓치지 않았다.
프랑스 교육부의 철학 바칼로레아 담당 교육감은 이 시험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철학 수업을 통한 우리의 목표는 학생들이 생각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하나의 인간이자 시민으로 완성될 수 있도록, 그들이 건설적인 생각의 자유를 획득하고 공화국 프랑스의 이상 실현에 기여하길 바란다.’
나만의 사고 체계, 세계관 없이 세상에 발을 딛는 청년에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바로 대세를 좇는 삶이다. 자기 세계관이 없으면 가장 번성한 종교인 자본주의가 그들의 사고를 점령하여 그들에게 대세를 좇게 하며 결국 박 터지는 경쟁 속에서 영혼을 탈취당할 것이다.
지식과 생각을 나의 언어로 기술해나가는 것은 철학뿐 아니라 프랑스의 모든 교과과정에서 12년간 지속되는 방식이다. 수업이나 시험, 과제를 통해 꾸준히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간다. 일대일로 구술시험을 보고, 길게 글로 풀어낸 답안을 평가하는 것이 교사들에게는 훨씬 고달프다. 게다가 시험 자체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도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채점의 효율과 비용의 절감이라는 사소한 이득을 위해 앎의 질을 포기하진 않는다. 결국 교육의 목표 자체를 어디에 두는지의 문제, 선택의 문제다.
바칼로레아 철학시험에 온 사회가 시선을 집중한다는 말은 학생들의 점수에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험에 출제된 문제들은 현재 프랑스 사회를 향해 철학자들이 던지는 예민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험장에 도착한 아이들뿐 아니라 온 사회가 그 질문에 답해보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 시간이 바로 프랑스 공화국을 지탱하고 완성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 젠더교육, 남자 혹은 여자 되기
1954년 보부아르의 글이 여성의 특징처럼 여겨지는 종속성과 수동성이 사회에 의해 길러지고 강요된다는 사실, 즉 성적 불평등을 만드는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면,
2011년 생물 교과서의 ‘남자 혹은 여자 되기’는 환경적`사회적 요인에 의해 생물학적 성과 각자의 성적 정체성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보다 확장되고 유연해진 성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수용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교과서는 성정체성을 스스로를 남성 혹은 여성으로 느끼는가의 문제로 바라보고, 성정체성은 날 때부터 결정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사회적 조건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것이라 기술한다.
프랑스에서 성차별과 동성애자 차별의 문제는 인종차별과 마찬가지로,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저항의 차원에서 다뤄진다. 동성애자 결혼법은 그들이 이성애자들과 평등한 존재이므로 그들에게도 결혼을 하거나 하지 않을 권리가 똑같이 주어짐을 천명함으로써 평등을 확대하는 의미를 갖는다.
* 노동인권교육, 학교가 노조활동을 가르친다?
업종 불문, 수시로 파업과 가두시위가 벌어지는 사회가 프랑스다. 학생들도 교사들이 파업에 동참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파업은 ‘엇! 무슨 일?’인지 묻게 하는 사회적 사이렌이다. 이들이 파업을 대하는 태도는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순순히 수용한다는 면에서 자연현상을 대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폭우가 쏟아지고 우박이 떨어질 때 하늘을 원망하지 않듯, 파업을 한 사회가 굴러가기 위해 종종 일어나곤 하는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인다. 사이렌이 끝끝내 수용되지 않으면 거센 파도가 되어 사회를 뒤흔들기도 한다. 파업에는 어떤 직업의 구별도 경계도 없다.
파업은 기계의 부속품이나 노예가 되길 거부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취하는 공식화된 사회적 언어인 셈이다. 각자가 맡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함께 굴러가던 사회라는 기계는 한 군데가 잠시 멈추면서 같이 멈춰서거나 더디게 작동한다. 그때 잠시 멈춰서 문제 제기를 하는 한 집단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것이 파업을 대하는 이들의 방식이다.
최근 마크롱 정부가 철도노동자들이 누려왔던 혜택들을 박탈하기로 함에 따라 철도노조는 파업을 결정했다. 파업 예고 기사에 가장 많은 호응을 얻은 댓글.
‘공기업과 사기업을 통틀어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사회적 권리는
바로 우리의 아버지들, 할아버지들이 미래의 세대를 위해 파업해가며 얻은 것입니다. 그들은 연대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파업을 할 만한 재정적 여력이 없었지만
감자만 먹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린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다시 당하고 있군요.
모두 깨어납시다. 삶에서 싸우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명예를 걸고 그리고 우리 후손들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파업은 의미 없는 파업입니다.
좀 더 이해하고 관용하며 그들과 함께 춤춥시다‘
1936년 총파업. 2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한 달간 진행한 총파업.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그러나 결기 있게 진행된 그 파업이 바로 프랑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유급휴가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연 5주 유급휴가, 주 35시간 노동이라는 현재의 근로조건은 바로 당시의 승리가 물꼬를 트며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프랑스인들의 삶의 패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일에 쏠려 있던 사람의 무게중심은 점점 여가와 개인적 삶 쪽으로 이동했고, 사람들을 일의 노예에서 제 삶의 운용 주체로 서서히 바꿔놓았다. 아이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문헌으로 배우기에 앞서 파업하는 교사들과 부모들,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민들, 그렇게 해서 누리게 된 여유로운 삶의 태도를 눈으로 보고, 역사를 진보시킨 노동자들의 투쟁사를 들으며 노조나 파업에 대한 인상을 새겨간다.
1948년에 유엔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의 23조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노동의 권리와 노동자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조를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를 천명한다. 이 인권선언은 이후, 세계 대부분의 헌법에 영향을 끼치며 노동권과 노동자의 단결권을 가장 기초적인 시민의 권리 중 하나로 수용하게 된다.
미디어란 지배계급의 시선을 담아내는 도구이기에 다분히 비판적으로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를 바라보는 시각을 갖춰야 한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간다.
고교생들이 노동자들의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파업이나 집회 동참을 결의하거나, 정치 사회 이슈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표명하게 된 것은 아이들을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하는 이 나라의 교육철학의 바탕에 역사와 시민윤리 시간을 통해 습득되고 훈련된 사고의 결과인 것이다.
* 프랑스 고교생, 거리에 진출하는 나이
마크롱의 대학 개혁 반대 집회와 철도 노동자들의 격렬한 파업 투쟁이 진행되는 기간이면 망아지 같던 고등학생들이 다른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들은 전국 조직을 가진 고교생연합회를 통해 파업을 결의하고 교문에 쓰레기통을 쌓아 봉쇄한 후 거리로 향한다.
프랑스의 68혁명에서 고등학생들이 단단히 한몫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이후로도 프랑스 사회가 뒷걸음칠 때마다 최전선에서 실력 행사를 하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장 강렬하게 이들의 활약을 목격했던 때는 2013년 가을이었다.
‘우린 모두 이민자의 아이들이다!, 사회엔 관용, 학생들에겐 교육, 이 나라에서 축출되어야 할 사람은 인종주의자 발스 내무부 장관이다’
나시옹 광장에 집결해 이렇게 외치는 고등학생들의 가열한 목소리를 접하며, 그 자리에서 전율했다. 학생들은 어른들과 국가의 권위에 굴하지 않고, 공화국의 근본이념을 위배한 권력을 꾸짖었다. 불법체류자라고 기피하는 대신 오히려 그들의 딸이 자신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연대했다. 그때 함께 목소리를 높이는 아이들을 보며 자문했다. 도대체 이 연대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이틀간 진행된 고교생들의 집회에 어른들은 갑자기 머리를 두드려 맞은 것 같았다. 1789년 혁명의 교훈인 ‘자유 평등 박애’라는 문구가 학교 입구에 여전히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기억해낸 것이다.
아이들이 프랑스 공화국의 기본 정신에 입각하여 ‘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학교이지, 특정 국가의 국적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어른들은 감히 다른 변명거리를 찾지 못했다.
2006년에도 고교생들의 저항으로 정부의 정책이 멈춰 선 일이 있었다. 최초고용계약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최초고용계약은 고용인이 26세 이하의 피고용인을 채용한 경우 2년간의 수습기간에는 정당한 사유 없이도 해고할 수 있게 한 정책이었다. 이는 2년간 이른바 입증책임의 부과 대상을 역전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고용인이 해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용인이 해고의 부당성을 증명해야 했다. 정부는 기업의 고용 유연화를 극대화하면 고용이 확대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 법안을 내놓았다.
이에 프랑스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함께 연대하여 격렬하게 저항했다. 약 3백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의 이같은 저항에 겁먹고 결국 이 정책을 백지화했다.
* 필요한 것은 조직된 힘, 승리의 기억, 외침을 들어주는 귀
한국 현대사를 복기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17~18세는 가장 빨리 피가 끓어오르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 조직에 눈뜨기 시작하는 나이다.
일제에 저항했던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 중 한사람인 유관순. 그녀는 당시 이화학당에 다니던 17세 소녀였다. 1929년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도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대규모 항일 운동이었다.
1960년 4`19혁명을 촉발시킨 것도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시위에 참여했던 마산상고의 학생 김주열의 죽음이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 항쟁에 수많은 고교생 시민군들이 있었음도 알고 있다. 지난 촛불 정국 때 어른들이 국정농단 세력에 대한 질타에 머무르던 순간, 가장 먼저 ‘혁명정부’라는 어휘를 들고 거리를 누볐던 사람들은 바로 고등학생들이었다. 마산, 광주, 창원, 진주, 대구에서 벼락같은 언어로 먼지 낀 어른들의 시야를 밝히고 시민의 양심을 뒤흔들었던 전설적인 연설들은 모두 고등학생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학생들의 사회 참여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인간이 세상을 뒤흔든 익숙한 방식이었다. 지난 수십 년 간, 건강한 사회 작동에 필요한 학생들의 참여를 입시 지옥에 철저히 가둔 한국 사회가 오히려 진단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고등학생들은 결정적 순간에 확실히 자신만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20세기 말 한국 사회를 덮친 외환위기 국면과 대학들의 경쟁적인 등록금 인상,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속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없었다.
고용 유연화를 주장하는 기업들의 만행 속에서 사회는 학생들에게 생존을 위한 경쟁만을 유일한 선택지로 내밀었다. 그러자 건강한 사회가 가져야 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거세되었다.
프랑스의 68혁명은 (긍정적`부정적 측면을 모두 포함하는) 개인주의와 다원주의의 승리였고 동시에 권위주의와 국가주의의 패배였다. 68혁명은 소중한 승리의 경험이었다. 승리의 경험은 단순히 감정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사회적 투쟁을 부추긴다.
우리에게도 승리의 기억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10대가 계속 거리에서 싸울 수 있는 까닭은 승리의 기억이 멀지 않기 때문이다. 고등학생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소리 높여 함께 말하면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항의에 답하는 ‘상식적 정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앞만 보며 경쟁의 계단을 오르라고 협박하는 채찍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10대들과는 달리 프랑스의 10대들이 누리는 한 가지 엄청난 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경쟁하지 않을 자유다. ‘경쟁하지 않을 자유’, 이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경쟁 대신 협력하고 연대하는 법을 배우고, 경쟁으로 마모되지 않은 에너지는 세상을 개혁해낼 조직된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삶은 경쟁일까, 공생일까?
난 약 20년 전, 파리 8대학 공연예술학과 3학년에 편입하여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3학년에서 시작하여 석사 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4년 동안 느낀 바는 떠나버린 친구들과 남아서 학위를 취득한 친구들 사이에 패자와 승자를 가르는 경계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모두에게 명료한 한 가지 사실은 스스로가 개척해야 할 수백 가지의 길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수직이 아니라 수평으로 작동하는 세상, 누구에게나 똑같은 길이 주어지는 대신 끊임없이 자기만의 길을 만드는 세상이었으며, 과정은 고달플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굴욕을 감내하도록 요구하지는 않는 세상이었다.
2018년 마크롱 정부의 대학입시 제도 개편
2017년 집권한 마크롱 정부가 2018년부터 대학생 선발권을 학교 측에 부여하면서 평등한 교육의 기회 부여라는 원칙 자체에서의 거대한 변화, 저항이 빚어지고 있다.
정부는 기존의 시스템이 중도 포기하는 학생들을 양산하기 때문에, 사회적 비용이 과다하다는 판단 하에 효율성을 재고하는 차원에서 새로운 입시제도를 시도한 것이라 밝히고 있다. 그러나 불평등을 교정해나가야 할 임무를 지닌 정부가 불평등을 확산시키는 데 강력히 일조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낸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을 피해갈 도리가 없어 보이며 혼란과 저항은 불가피할 것 같다. 공생과 협력을 가르쳐온 프랑스 교육은 이제 경쟁이라는 괴물의 출현과 맞서고 있다. 아이들은 그 괴물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 인터뷰 : 학교는 너한테 어떤 의미니?
유익한 곳. 제가 필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곳. 제가 미래를 건설하도록 도와주는 곳이죠.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은 대체로 이후에도 유용하게 쓰일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수학 같은 경우에도 나중에 꼭 직접적으로 써먹지 않더라도 저의 사고방식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겠죠. 영어나 스페인어 같은 외국어도 마찬가지고요. 특히 좋은 선생님을 만나면 학교가 너무 흥미진진해지죠.
* 인터뷰 : 교사에게는 아이들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수학에서 뭔가를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아이들의 고백이 없었다면 그 전투 같은 시간들을 내가 같은 농도로 살아낼 수 있었을지 자신할 수 없다.
한번 자신감을 회복하기 시작한 아이들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방치하지 않았다. 자신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들면 아이들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최대한 아이들이 자신을 믿도록 노력했고, 내 노력이 아이들에게 가닿으면 교사로서의 삶도 더 충만해졌다.
그 아이들을 어떻게 감당하셨나?
그 아이들의 교문 밖 삶이 어떻든 나는 교실 안에서는 아이들을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교사로서의 나의 원칙이었다. ‘대학에 가든, 기술자가 되든, 슈퍼마켓 계산원이 되든, 길에서 청소를 하든, 수학은 인생에 꼭 필요한 것’임을 아이들에게 설득시키려 했다. 그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온전한 인격체로 대하려 했다.
폭력의 힘을 아는 아이들과의 타협은 나에게는 교사의 권위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누가 딜러이며 누가 폭력 조직의 구성원인지, 모두 파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에게는 모두가 수학을 배워야 하는 학생이었다. 특별하게 대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의 일부를 이미 검은 세계에 상납한 아이들을 나까지 특별하게 취급한다면, 그들은 돌아올 길을 영영 잃게 된다고 생각했다. 25년간 이 원칙을 고수했다. 다른 교사들의 염려와 달리 나를 공격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교사가 자신들의 미래를 진심으로 염려하고 그들을 공정하게 대하며 가르침을 건넬 때, 그 진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의무가 사라지고 즐거움만 남은 제2의 인생.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데는 세 가지 정도의 조건이 필요했다. 첫 번째가 아이를 낳은 여자들에게 유리하게 설계된 프랑스의 연금제도. 두 번째는 세 자녀를 키우고 가르치는 데 큰 재정적 부담이 없는 교육 시스템. 세 번째는 경제적 여유보다 자신의 자유와 진정한 열정에 방점을 찍고 인생을 조율할 줄 알았던 그녀의 결단이었다.
* 저자와의 대화
한국 교육이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첫 번째는 교사가 자부심을 갖고 교단에 설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엄마가 불행하면 집안 식구 모두 행복해질 수 없듯, 학교에서도 교사가 불행하면 아이들을 행복한 수업으로 이끌 수 없다. 존엄과 긍지와 자유의지를 가진 교사만이 아이들에게 그것을 전할 수 있다.
교사 각자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신념을 갖고 학생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 있는 수업을 진행할 수 있고, 아이들이 무언가를 교사로부터 받을 수 있다.
두 번째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학교행정, 교육행정에 지속적`실질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행복하게 공부하고 학교를 자신들의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공간으로 바꿀 생각들이 가득 차 있다. 이것은 아이들과 이야기해보면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중구난방의 아이디어들이 나오기도 하고 간혹 실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이 행복해지는 길을 찾는 데 가장 현명한 지혜를 발휘할 주체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통해 함께 성장해가는 길을 찾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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