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사 방식으로 본 한국 음식문화사
* 주영하
음식을 문화와 인문학, 역사학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음식인문학자. 마산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 1998년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대학원 민족학·사회학 대학에서 [중국 사천성 량산 이족의 전통 칠기 연구]로 민족학(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 프롤로그
엘리아스는 상층부 계층에서 형성된 유럽식 식사 예법이 하층민에게까지 퍼지는 현상을 ‘문명화 과정’이라고 불렀다. 또한 오늘날 서양인들의 테이블 에티켓은 개인의 감정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문명화 과정에서 생겨난 결과물이라고 보았다. 즉, 손으로 집어먹는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수치심을 준다는 인식이 귀족들 사이에서 퍼지면서 포크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식사 예법의 기초를 마련한 대표적인 학자는 공자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편찬에 간여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예기에 ‘무릇 예의 시초는 모두 마시고 먹는데서 시작되었다.
1장
조선시대 양반들이 실내에서 신발을 벗고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가옥의 형태가 방과 방, 방과 마루 등 각 공간 사이를 쉽게 오갈 수 있는 꺽음집‘이었기 때문이다. 즉, 조선시대 한옥은 'ㄱ, ㄷ, ㅁ’ 자 형태로 두 채 이상의 건물이 모서리 부분에서 직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모서리 부분의 꺽음부는 지붕의 빗물 처리 등에서 굉장한 기술을 요하는 건축 양식이다. 이를 두고 건축학자들은 ‘꺽음부의 발달은 주거 기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결국 신발을 벗고 생활하면서 각 공간 사이를 쉽게 오갈 수 있도록 만든 결과’라고 설명한다.
꺽음부가 있는 가옥의 역사가 오래된 것은 아니다. 고대의 건축 유적에서는 꺽음부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야 몇몇 살림집에서 꺽음부를 둔 사례가 있다. 실제로 방과 마루가 연결된 가옥의 형태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시기는 고려 후기이다.
방 전체에 구들을 깐 것을 통구들이라고 하는데, 통구들 온돌이 일반인의 살림집에까지 확산된 때는 18세기에 와서다. 이처럼 가옥에 꺽음부와 난방이 가능한 온돌시설이 설치되는 등 주거 환경이 개선되면서 실내에서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문화 또한 정착되어 갔다. 사람들이 하루종일 실내에서 신발을 벗지 않고 생활할 수 있으니 굳이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은 실내에서 신발을 벗고 책상다리 자세로 앉아 식사를 하거나 일을 보는 좌식 생활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 조선 초기부터 유행한 소반(식안)
소반은 그 이름처럼 크기가 작아서 들고 나르기 좋은 식탁이다. 생김새에 따라 둥근 소반, 사각 소반, 팔각 소반 등이 있다. 나주반, 통영반, 해주반 같은 이름은 생산지를 기준으로 분류한 것이다. 소반의 다리를 두고 호족반, 혹은 구족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족반은 아예 개다리소반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임진왜란 전에는 다리가 짧은 소조와 통각반, 그리고 다리가 세 개 달린 소반 등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 임진왜란 후에는 다리가 긴 소반이 주로 나온다.
* 소반을 사용하는 계층이 점차 확대되긴 했지만 초기만 하더라도 높은 신분과 경제력을 지닌 왕실이나 관청, 그리고 부유한 양반가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고급 식탁이었다.
소반이 가부장의 상징이 될 정도로 널리 확산된 배경에는 조선에 전해진 유교식 예법의 영향이 컸다. [예기] 예법을 보면 손님을 대접할 때 주인과 손님에게 독상을 차려내야 된다고 쓰여 있다.
1960년대, 두레반상. 1960년대 들어 소반을 만들지 않고 사각형 교자상을 만들기 시작. 다리를 접을 수 있는 교자상은 1891년 일본의 발명가가 특허낸 차부다이 라는 식탁에서 유래.
6장 동아시아의 대표 식기, 도자기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식기의 변천사는 산업화 이전과 이후로 갈라진다. 산업화 이전만 해도 장인이 손으로 만든 식기를 사용했다. 오래된 목기·토기·자기·청동기·철기 등의 식기가 모두 핸드메이드, 즉 수제품이었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공업의 발달과 함께 스테인리스 스틸과 플라스틱 등 각종 새로운 재질의 식기가 탄생했다.
역사상 중국인들이 사용해온 식기도 토기에서 청동기, 칠기, 그리고 자기로 그 재질이 달라졌다. 이 중에서 자기는 점토에 고령석 가루를 섞거나 고령토만으로 반죽하여 성형한 뒤 가마에서 1200~1400도의 고온으로 구워낸 그릇을 가리킨다. 고령토는 장시성 징더전(경덕전) 부근의 고령촌에서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그 지명을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중국에서 고령석이 들어간 점토에 유약을 바른 자기가 유행한 시기는 송나라 때다. 12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낸 자기는 잘 깨지지 않았으며, 특히 표면에 유약을 발라 방수 효과가 커지자 식기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송나라 때는 청색 안료를 넣은 청자가, 원나라 때는 백자, 명나라 이후에는 청화백자와 온갖 채색 자기가 유행했다.
11세기에 유럽 귀족들 중 일부 가문에서는 중국에서 수입한 자기, 중국을 뜻하는 차이나 혹은 파인 차이나가 널리 쓰였다. 16세기 이후 중국에서 수입한 자기 식기는 유럽 귀족 가문에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필수품이었다.
15세기 이후 중국 내에서 가장 유명한 자기 생산지는 징더전이었다. 이곳에서는 유럽의 귀족들 취향에 맞추어 디자인된 자기 식기를 수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초반부터 징더전의 내부 갈등으로 생산이 원활하게 되지 않았다.
이 틈을 타 일본의 도자기들이 나가사키 항구를 통해 서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일본의 도자기 역시 서유럽의 소비자 요구에 맞춘 서양식 자기 식기였다.
원래 일본은 1592년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키던 당시까지도 자기를 만들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점토로 빚은 그릇을 600도 정도의 온도에서 구운 토기나, 800도 정도에서 구운 도기를 겨우 생산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상층부는 중국과 조선에서 수입한 자기를 찻잔으로 썼다. 식기는 대부분 일본 열도에서 많이 나는 옻나무 진을 목기에 칠해서 만든 칠기였다. 그런데 임진왜란 중에 일본은 수많은 조선 도공을 포로로 잡아가서 자기를 생산하도록 했다. 이때 잡혀간 도공 중 이삼평이 사가현 아리타에서 고령토를 발견해 조선의 자기 기술을 결합한 도자기를 생산하면서부터 일본의 도자기 역사는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 백성의 그릇, 막사기
일본 열도의 번주들이 수많은 도공을 포로로 잡아갈 정도로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은 이미 세계에서 손꼽히는 자기 생산국이었다. 10세기에 고령석으로 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중국에서 한반도로 전해졌고, 이후 고려청자 같은 기술적 진보를 이루어냈다.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고령토를 백토 혹은 백점토라고 불렀으며, 경기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 등지에서 찾아냈다. 최고 품질의 청자를 생산했던 고려시대에 귀족들은 식기로도 청자를 사용했다.
하지만 고려청자에 대한 애호는 일부에 국한되었을 뿐 고려 후기 지배층은 숟가락과 젓가락은 물론이고 일반 식기도 금속으로 만든 것을 더 좋아했다.
조선은 금은 그릇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각종 폐단이 발생하자, 태종이 즉위한 지 7년째 영의정 성석린이 상소를 올렸다. 금은으로 만든 그릇은 궁내와 국가에서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중외에 명령을 내려 일절 금지하고, 나라 안이 모두 사기와 칠기를 쓰게 하소서.
사기는 고급 자기와 달리 질이 좀 낮은 백토를 사용하여 1100도 전후 온도로 구워낸 자기의 일종이다. 비록 고급 백토를 사용하여 12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낸 고급 자기는 아니지만, 사기는 도기에 비해서 단단하고 수분 흡수율도 낮은 편이어서 금은 식기 대신 일상 식기로 사용하기에 알맞았다.
* 양반의 그릇, 놋그릇
놋그릇은 다른 말로 ‘유기’라고 불렀다. 구리에 아연을 넣어 만든 합금을 놋쇠, 혹은 황동이라고 부른다. 또 이를 가공하여 만든 그릇은 유기 혹은 놋그릇이라고 부른다.
놋그릇은 만드는 방식에 따라 뜨거운 쇠 덩어리를 처음부터 두드려 만드는 방짜유기와 주형에 놋쇠물을 부어 모양을 만든 후에 다듬질하는 주물유기가 있다. 구리에 주석을 합금한 청동이나 구리에 니켈을 합금한 백동 따위를 모두 놋쇠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엽전도 구리를 원료로 만들었는데, 구리 공급량이 부족해 늘 곤란을 겪었다. 지배층 중 일부 사람들은 엽전을 녹여서 놋그릇을 만들었다. 엽전의 값은 싸고 놋그릇의 값이 비싸기 때문이었다.
* 멜라민수지 그릇
플라스틱은 석유나 천연가스를 화학적으로 가공해 만든 합성수지가 그 재료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독일과 영국의 화학자들에 의해서 플라스틱이 발명된 이래,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로 개발되고 있다. 그중 멜라민 수지는 멜라민과 폼알데하이드를 반응시켜 만든 열경화성 수지이다. 항공회사와 해군에서 가볍고 견고한 멜라민 수지의 특성을 살려 기내용 식기로 제작하면서 상용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멜라민 수지 식기의 본격적인 대중화는 미국의 유명 프랜차이즈 업체인 맥도날드에 의해 이루어졌다. 1950년대 이후 멜라민 수지 식기를 사용했고, 이 음식점의 성공과 함께 식기도 미국사회에 퍼져나갔다.
멜라민 수지 식기는 1970년대 초반 이후 한식음식점에서 대표적인 음식점용 식기로 자리를 잡았다. 멜라민 수지 식기는 장점이 많은 식기다. 가볍고 깨지지 않고 설거지도 쉽다. 값도 싸다. 멜라민 수지 식기는 백자와 닮았다.
* 1960년대 중반, 스테인리스 스틸 그릇의 전성기
스텐 그릇의 원료인 스테인리스 스틸은 크롬과 니켈 등이 포함된 강철 합금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녹이 잘 스는 일반 강철을 대신하여 건축 자재를 비롯해 산업 전반에 이용되었다. 또한 포크·나이프·스푼 등의 식사도구와 각종 식기도 스텐으로 만들었다.
1950년대는 양은그릇을 쓰고 있었다. 양은그릇은 알루미늄의 단점을 보완한 알루마이트로 만든 식기를 가리킨다. 알루마이트 제품이 널리 사용된 이유는 알루미늄의 대표적인 원료인 명반석이 한반도에 많이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양은그릇은 가격이 저렴하고 잘 깨지지 않고 쉽게 더러워지지 않는 점도 알루마이트 그릇을 선호하는 이유였다. 특히 알루마이트 냄비는 주물로 만든 것에 비해 가벼우면서도 열전도율이 좋았다. 그러나 알루마이트의 코팅이 벗겨지면 바로 인체에 해로운 알류미늄에 노출된다는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스텐그릇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한국에서 스텐 그릇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 초반부터이다. 스텐 그릇은 주부들의 대환영을 받았다. 스텐 그릇이 주목받은 또 다른 이유는 놋그릇과 달리 관리하는 데 어려움이 적었기 때문이다. 놋그릇은 사용하기 전에 얼룩을 지우고 광을 내야 하는 등 손이 많이 가는데 비해서 스텐그릇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1960년대 중반이 되면 신혼살림을 장만할 때 스텐 그릇이 큰 인기를 끓었다.
놋그릇은 연탄가스에 약했다. 1960년대 가정의 취사용 연료는 나무땔감에서 연탄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연탄은 사용이 편리한 연료였지만, 연소 시 유해가스가 발생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 유해가스는 인체뿐 아니라 놋그릇 같은 주방용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놋그릇은 연탄가스에 노출되면 고유의 광택이나 색이 변해서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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