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석기`신석기`청동기
* 국립중앙박물관
* 구석기문화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유인원과의 공통조상으로부터 분리`진화하여 농경과 고기잡이 및 정착생활을 특징으로 하는 신석기시대 이전까지의 시기로 약 400만년전부터 1만년전까지이 기간이다. 구석기시대의 생업은 주로 사냥과 채집이었으며, 이에 유리한 장소를 찾아 이동하면서 생활하였다. 이들이 사용한 주요한 도구는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이며, 때로는 나무나 뼈로 만든 도구도 사용되었다. 구석기문화는 뗀석기의 종류나 가공기술의 특징에 따라 전기(400만년~10만년 전), 중기(10만년~4만년 전), 후기(4만년~1만년 전)로 나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프랑스 남부의 빼리고드 지방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세계 각지의 구석기 문화에 대해서는 시간적인 의미보다 문화적인 발전단계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 전기구석기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유적으로는 석회암동굴인 평양 상원 검은모루동굴, 임진강과 그 지류인 한탄강 주변의 황토대지에 형성된 연천 전곡리, 파주 주월리, 가월리, 금파리유적, 동해안의 비교적 높은 해안단구에 형성된 강릉 심곡리, 양양 도화리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유적에서는 자갈돌의 한면 또는 양면을 때려 낸 찍개규와 긁개류가 주로 출토되지만, 석기의 제작기술이 세련되지 못하였고, 대체로 한 석기가 여러 목적에 사용된 것이 많다. 그러나 전곡리와 금파리 등 한탄강`임진강 주변의 유적에서는 전면을 때려 내어 손으로 쥐기 쉽고 사용효과를 높인 주먹도끼와 사냥돌, 가로날도끼, 찌르개 등의 정형화된 석기가 다수 출토되며, 특히 주먹도끼의 존재는 구석기 제작 전통을 인도를 기준으로 서쪽의 주먹도끼문화권과 동쪽의 찍개문화권으로 구분하던 기존의 학설을 깨뜨린 중요한 자료이다.
* 중기 구석기
중기에 해당하는 유적으로는 웅기 굴포리 아랫문화층, 평양 용곡동굴`역포 대현동, 단양 수양개 아래층, 제천 명오리유적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중기의 특징은 전기에 비하여 대형석기의 비율이 줄어들고, 석기의 기능에 따라 형태가 더욱 분화되어 톱니날석기`뚜르개`새기개 등이 새로이 나타나며, 날을 더욱 날카롭게 한 2차떼기와 격지를 떼어낸 몸돌무늬가 거북등무늬와 비슷한 르발루아기법도 유행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중기 유적에서는 주로 석영암과 같은 고르지 못한 석재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기술발전의 증거가 뚜렷하지 않으며, 또한 자연과학적 자료의 부족으로 전기와의 구분이 그리 명확한 편은 아니다.
* 후기 구석기
후기의 유적은 강의 수면에서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위치하며 공주 석장리 윗층, 홍천 하화계리, 의정부 민락동, 양구 상뮤룡리, 단양 수양개 윗층, 순천 금평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석기의 재질은 전`중기의 석영암에서 규질니암이나 흑요석이 다수를 이루게 되며, 이러한 재질의 변화에 따라 석재를 뼈나 뿔, 또는 단단한 나무를 대고 때린 간접떼기와 날을 2차 가공한 눌러떼기 수법의 발달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동북아시아 일대에는 쐐기모양의 몸돌에서 여러 개의 돌날을 떼어내는 세석인 기법이 발달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유적에서 이러한 기법으로 제작한 석기들이 출토되고 있어 우리나라의 세석인 문화가 동아시아의 한 지역문화에 속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세석인기법에 의한 돌날의 제작과 단양 수양개유적의 슴베찌르개 등은 우리나라에서도 후기에 들어서면 세계의 후기 구석기문화와 마찬가지로 창이나 활과 같은 투사용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한편 후기의 유적 가운데 홍천 하화계리와 통영 상노대도 최하층의 무토기문화층 등 몇몇 유적은 석기의 크기와 제작 기술 등으로 보아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이행하는 중간시기인 중석기문화에 해당할 가능성도 주장되고 있다. 평양 용곡동굴, 덕천 승리산동굴 등지에서는 고인류의 화석이 출토되어 한반도에 살았던 구석기인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검은모루동굴이나 두루봉동굴과 같은 석회암동굴에서 검출된 많은 동물 화석과 각지의 꽃가루 분석자료를 통해 당시의 기후와 자연환경을 추정`복원할 수 있다.
* 전곡리유적
겅기도 연천군 전곡리 한탄강 강변의 황토지애에 형성된 유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전형적인 주먹도끼가 발견된 곳이다. 출토된 석기에는 석영암이나 규암 등으로 만든 찍개류(외날찍개`양날찍개)와 주먹도끼`가로날도끼`사냥돌 등의 큰 석기들과 소형의 긁개류가 있다.
특히 이 유적은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가 함께 출토되는 점과 대형 석기의 형태적 특징이 아프리카 전기 구석기 말의 상고안 문화와 유사하여 전기구석기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유적의 자연과학적 절대연대는 열형광측정에서 황토대지의 아래층이 4만5천년 전이 연대가 얻어졌고 가장 윗층에 퇴적되어 있는 일본 아이라 화산재의 분석에서 약 2만2천년~2만5천년 전의 연대가 측정되었다. 따라서 이 유적은 석기의 제작기술과 전통으로 보면 전기구석기문화에 해당하지만 절대연대는 일반적인 전`중`후기의 시기 구분과는 일치하지 않아, 절대연대 측정치의 자료축적과 제작기술의 비교분석을 통해 한반도 나름대로의 시기구분에 대한 기준의 확립이 필요함을 제시하였다.
한편 한탄강의 상류로부터 임진강 하구의 문산에 이르는 지역은 평강고원에서 분출한 현무암 위에 형성된 황토대지로 파주군 금파리`주월리`가월리에서는 전곡리유적과 같은 성격의 유적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 상무룡리유적
강원도 양국군 상무룡리의 화천댐 수몰지역내에 있는 유적으로 중기 이전 및 후기 구석기시대의 두 문화층이 조사된 유적이다. 중기 이전 문화층에서는 석영암 계통의 석기가 대부분이며, 소량의 주먹도끼와 찍개류 및 사냥돌이 긁개류와 함께 출토되었으나, 전기 구석기의 유적으로 간주되는 연천 전곡리와 비교할 할 때 전형적인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등은 보이지 않고 유물의 구성도 단순한 편이다.
후기 구석기 문화층에서는 다량의 흑요석재 소형석기들이 출토되었다. 이 소형석기들의 대부분은 여러 목저에 사용된 긁개류이며, 나머지는 돌날과 새기개 및 격지들로서 성분분석 결과 백두산계 화산암에서 생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후기층보다 약가 깊은 곳에서 원산지가 밝혀지지 않은 갈색반점이 있는 흑요석기가 출토되어 후기에도 시기를 달리하여 인류가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흑요석은 성분분석을 통해 원산지를 알 수 있으므로 선사인의 이동로의 추정과 생활상의 복원에 많은 자료를 제공한다.
* 수양개유적
단양군 애곡리의 남한강 상류 강안단구에 이루어진 한데유적으로 석기 제작 과정의 역순으로 복원되는 유물과 정형화된 석기의 종류가 많아 한반도의 후기 구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꼽히고 있다. 석기를 만든 수법에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수법의 간접떼기와 눌러떼기가 나타나며, 주먹도끼`주먹칼`긁개`찍개`밀개`슴베찌르개`수정새기개 등과 함께 후기의 쐐기형몸돌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유적내의 일정구역에서 종류별로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모루돌`망치돌`격지`부스러기 등이 함께 출토되어 석기를 전문적으로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몇몇 격지는 몸돌과 짝이 맞아 석기 제자과정을 복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밖에도 각종 꽃가루와 숯이 검출되어 당시의 생활환경을 밝히는데 많은 도움을 준 중요한 유적이다.
* 석장리유적
남한에서는 최초로 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구석기시대유적으로 함북 웅기 굴포리유적과 함께 한반도에도 구석기 문화가 있었음을 알게 해 준 중요한 유적이다.
유적은 금강변의 낮은 하안단구에 자리하고 있으며, 보고서에 의하면 12개의 자연퇴적층 가운데 문화층은 3개로 구분된다. 즉 대형석기가 많은 전기 문화층(1-6층), 격지를 이용한 긁개류가 우세한 중기 문화층(7-9층)과 후기 문화층으로 구분되지만 전`중기의 석기류에 대해서는 인공유물인지의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다. 후기에 속하는 윗층(10-12층)에는 쐐기형몸돌, 새기개 등의 후기적 특징을 지닌 소형 석기가 많다. 그러나 특히 후기 구석기문화층의 석기들은 몇 점의 흑요석기를 제외하고 가공이 쉬운 규질니암계통이 대부분이며, 인공의 흔적이 뚜렷하다. 또한 가장 윗층에서는 기둥자리와 불 때 자리가 있는 집자리도 확인되었는데,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에 의해 약 2만5천~3만년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 하화계리유적
홍천강의 하안단구상에 입지하고 있는 구석기시대 최말기에 해당되는 유적으로서 모두 7천여점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우리나라의 구석기유적에서 가장 일반적인 석재인 석영암 이외에도 흑요석, 수정, 유문암, 단백석, 분암, 편마암, 사암, 반암 등 다양한 석재가 이용되었다. 이 유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고고학적 의의를 갖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지금 2m정도 범위의 석영 석기 제작장과 흑요석 돌날 제작장이 약 50m의 거리를 두고 확인되어 당시 석기제작에서 분담 내지는 분업이 존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흑요석 및 수정제 좀돌날 515점, 돌날몸돌 27점 등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한반도 최대규모의 잔석기 유적이다. 이와 더불어 석기포함층이 지질학적으로 홍적층 상부와 충적층 하부의 접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 유적이 중석기시대에 편년될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유럽에서 설정된 중석기문화의 석기들과는 그 제작기법이나 형식적인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토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 신석기문화
지구상의 기후가 빙하기(구석기시대)에서 현재와 같은 간빙기로 접어드는 시기는 기원전 8천년경이다. 이 시기는 과거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잡아먹고 살던 큰 동물들이 변화된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절멸되면서 지구상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먹거리를 확보해야만 하는 과제를 주었다. 이렇게 해서 개발된 것이 농경과 가축의 시작으로, 여기에 수반해서 간석기를 만드는 기술이 본격화되고 토기가 새로이 만들어졌다. 인류의 이러한 문화단계를 구석기시대와 비교하여 새로운 석기시대, 즉 신석기시대로 부르게 되었다. 한반도에 신석기문화가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8천년경에 시베리아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고아시아족들이 중국 동북지방과 연해주 지역을 거쳐 한반도로 이주해 오면서부터이다.
신석기시대의 주민들은 대개 물과 식량자원이 풍부한 해안가 언덕, 큰 강가의 대지, 인근 도서지방에 자리잡고 생활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청원 쌍청리, 금릉 송죽리, 합천 봉계리, 청도 오진리, 거창 임불리유적 등의 발굴조사로 깊은 내륙지방의 작은 강가에서도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유적으로는 살림집터와 무덤, 조개더미 등이 조사되었다.
각 유적에서는 토기를 비롯하여 탄화된 도토리와 갈돌 및 갈판, 이음낚시와 그물추, 돌화살촉 등이 출토되는데 특히 조개더미에서는 사냥이나 고기잡이의 대상이었던 각종 짐승과 물고기의 뼈와 뿔들이 검출되고 있어 신석기인들의 생활이 사냥과 고기잡이, 야생식물의 채집에 바탕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가에서는 투망과 작살로, 바닷가에서는 조개류의 채취와 함께 이음낚시 등을 이용한 고기잡이생활을 영위하였으며 활을 이용한 사냥법의 개발은 인간의 사냥대상이 대형동물에서 소형동물은 물론 날짐승에까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먹거리가 부족한 시기를 대비하여 가을에는 도토리, 밤 등 견과성 열매를 따서 보관하는 지혜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각 지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괭이, 보습, 낫 등의 농경용 석기가 출토되고 있으며 평양 남경과 봉산 지탑리유적에서는 불탄 피와 조가 검출되어 잡곡을 대상으로 하는 원시적인 농경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인들은 가락바퀴 등을 이용해 만든 실로 짠 옷감으로 간단한 형태의 옷을 만들어 입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이 외에도 동물이나 큰 물고기의 가죽도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옷에는 빗살무늬토기인의 상징인 기하학 또는 주술적인 내용의 무늬들이 장식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들은 옥, 돌, 동물의 뼈나 이빨, 흙, 조가비 등으로 만든 각종 꾸미개 등을 착용한 것이 종종 확인된다.
꾸미개에는 개, 새, 뱀 등 여러 종류의 동물을 장식하여 토테미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사람의 전신상 또는 얼굴을 새긴 것 등이 보인다. 전신상은 대부분 여성상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당시 모계씨조사회로서 여성숭배사상과 생산의 풍요를 기원한데서 연유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웅기 서포항,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유적 등에서 출토된 사람얼굴모양의 조각품은 신앙적인 의식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집터
신석기시대의 살림집으로는 구석기시대에 이용했던 동굴이나 바위그늘도 계속 이용되었으나 새로이 땅을 파서 만든 움집이 나타나며 때로는 바닥에 돌을 깐 돌깐집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 가운데에 움집터가 한반도 전역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어 움집이 이 시대의 가장 일반적인 살림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움집은 물가의 편평한 대지 또는 물가에 가까운 낮은 산의 경사면에 지름 4~6m 크기의 둥글거나 네모진 구덩이를 50~60cm 정도의 깊이로 파내어 바닥을 만든 후 그 중앙에는 화덕을 마련하고 기둥을 세워 지붕을 덮는 형태로 별도의 벽체시설이 없이 서까래가 바로 땅에 닿은 집이다. 화덕은 돌이나 진흙으로 지름 50~70cm 크기의 둥글거나 네모꼴의 테두리를 돌려 만들었는데 간단한 음식물의 조리 뿐만 아니라 실내를 따뜻하게 하거나 조명을 위하여 이용한 듯하다.
바닥은 아무런 시설이 없거나 또는 진흙을 깔아 다졌으며 그 위에는 마른 풀이나 짐승가죽 등을 깔고 생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붕은 움구덩이 어깨부분 주위에 서까래를 걸쳐 그 한쪽끝은 움바닥에서 세워 올린 기둥과 들보에 기대어 세우고 움의 중앙으로 모이게 묶어서 뼈대를 형성한 후 서까래 사이사이에는 잔 나뭇가지나 갈대, 이엉 등을 덮어 지붕을 만들었다. 지붕의 꼭대기나 옆쪽에는 여닫이가 가능한 연기구멍을 마련하기도 하였는데 움집의 전체적인 형태는 구덩이의 펴면 형태에 따라 원뿔 또는 네모뿔 모양으로 복원된다.
움집터로는 용천 신암리, 평양 나명, 온천 궁산, 봉산 지탑리, 서울 암사동, 양양 오산리, 합천 봉계리, 금릉 송죽리 유적 등이 알려져 있고 동굴이나 바위그늘을 이용한 집터로는 의주 미송리, 단양 상시리, 청도 오진리, 부산 금곡동 율리, 제주 북촌리유적 등이 조사되었다. 춘천 내평리와 평양 청호리유적은 돌깐집터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 무덤
신석기인들은 영혼의 존재를 믿어 사람이 죽으면 적당한 크기의 부정형 구덩이를 얕게 파고 그 안에 주검을 바로 펴 넣은 후 그 위를 잔돌과 큰돌을 차례로 덮는 형식의 펴묻기(신전장)를 하였으나 간혹 굽혀묻기(굴장)와 세골장도 확인된다. 무덤의 주검에는 목걸이, 팔찌, 발찌 등의 꾸미개가 착용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토기, 석기, 짐승뼈와 뿔로 만든 도구 등의 일상용구가 껴묻혀 있다.
신석기시대의 펴묻기무덤으로는 부산 범방, 통영 연대도`욕지도`상노대도 등의 조개더미와 춘천 교동 동국유적에서 조사되었다. 울진 후포리 유적은 세골장의 집단움무덤으로서 이 시대 매장시설의 매우 희귀한 예이다.
* 조개더미
우리나라 서`남해안 및 동북지방의 해안지방과 도서지방에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는 조개더미유적은 당시 사냥, 고기잡이, 채집에 의해 생계를 유지해 오던 신석기인들이 먹고 버린 폐기물이 쌓여 이루어진 생활유적이다. 조개더미 안에서는 많은 종류의 조가비류가 검출되고 있으며 이 외에도 그들이 잡아 먹은 각종 동물이나 물고기의 뼈들을 비롯하여 실생활에 사용하다 못쓰게 되어버린 토기, 식기, 뼈`뿔연장 등이 함께 출토되고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인공 및 자연유물은 부식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어 신석기인의 생활상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 토기
신석기시대의 유물로는 토기, 석기, 골각기, 토제품과 각종의 자연유물 등이 있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무늬를 베푸는 방법에 따라 덧무늬 토기와 빗살무늬 토기로 나뉜다.
덧무늬토기는 토기 겉면에 진흙띠를 붙이거나 겉면을 맞집어 돋게 하여 무늬를 만든 것으로 부산 동삼동, 통영 상노대도`연대도 조개더미 등에서 빗살무늬토기층보다 아래층에서 출토되었다. 이 토기는 부산`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해안에서 주로 출토되지만 북으로는 양양 오산리, 서쪽으로는 신안 흑산도, 내륙지방으로는 단양 상시리 바위그늘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조사가 진행되면 분포 범위가 더 넓어질 가능성도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빗모양의 무늬새기개로 토기 겉면을 누르거나 찍거나 그어서 각종 기하학적 무늬를 베푼 토기이다. 덧무늬토기가 일부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것에 비해 이 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어 우리나라의 신석기문화를 빗살무늬토기문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토기의 형태와 무늬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그릇모양`무늬를 기준으로 한반도의 신석기문화를 동북`서북`중서부`남부지방 등 크게 네 지역군으로 나누고 있다.
대동강, 재령강, 한강유역과 서해안의 인접지역에 해당하는 중`서부지방의 빗살무늬토기는 뾰족바닥을 기본으로 하는 반란형토기가 대표적이다. 이 지역 토기의 특징은 바닥`몸통`아가리에 각각 서로 다른 무늬가 새겨진 초기단계에서 점차 바닥 - 몸통 - 아가리의 순서로 무늬가 생략되다가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로 넘어간다.
서`남해안의 연안도서지방과 낙동강지류의 내륙지방을 포함하는 남부지방의 빗살무늬토기는 여러 종류의 토기형식이 존재하는데 특히 초기의 특징적인 덧무늬토기와 지두문토기는 다른 지역에서 보이지 않는 토기이다.
전기 이후에는 중`서부지방의 영향을 받아 빗살무늬토기의 영역에 들어서지만 뾰족바닥과는 달리 바닥이 둥근 형태가 대부분이다. 이 외에도 목항아리, 귀때토기, 붉은칠토기 등 중`서부지방에서는 보이지 않는 기형이 만들어지며 무늬도 이 지방의 특징적인 종류가 나타난다.
전기에는 아가리부분에만 무늬가 새겨지다가 전면무늬로 바뀌며 차츰 중`서부지방과 마찬가지로 무늬가 생략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또한 뾰족바닥에 무늬가 없는 토기도 있고, 그 밖에 아가리를 접어 붙인 겹아가리토기가 말기에 나타나 민무늬토기로 넘어간다.
두만강유역과 강원도지역을 포함하는 동북지방의 빗살무늬토기는 납작바닥의 깊은바리 토기가 대표적인 형태이다. 이른 시기에는 짧은 선이나 점으로 구성된 무늬를 몸통 윗부분 또는 아가리 둘레에 새기는 한편, 강원도지역에서는 덧무늬토기와 함께 중`서부지방의 지탑리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와 유사한 형태의 것도 만들어진다. 중기 이후에는 새로이 타래무늬가 등장하며, 아가리가 밖으로 약간 벌어지게 만든다. 후기에는 번개무늬토기`붉은칠토기가 함께 민무늬토기의 비율이 크게 증가한다.
청천강 이북의 내륙지방과 압록강유역을 포함하는 서북지방의 이른 시기, 즉 전기와 중기에 해당하는 유적으로는 의주 미송리 동굴유적이 유일하고 그밖의 유적은 대부분 후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전기의 토기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후기에는 토기들의 무늬에서 한반도 동북지방 및 중국 요동반도와 비슷한 문화양상이 일부 엿보이는 목단지와 굽잔 등이 출토되고 있어 지역적인 특징이 뚜렷하다.
* 석기
간석기의 출현은 신석기문화의 또 다른 특징이나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석기에는 전면을 간 서기, 날부분만 간석기, 전면을 떼어내어 만든 뗀석기 등이 있다. 한반도에서는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마제법이 알려져 있었으나 석기의 종류에 따라서는 떼어내어 만드는 전통이 오래 남아 있다가 중기`후기에 이르러 마제법이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사은 돌도끼에 잘 나타나 있는데 초기유저에서는 몸통을 돌로 거칠게 떼어낸 후 날부분만 납작하게 갈아 쓰고 떼어낸 격지는 2차손질을 하여 찍개나 긁개 또는 끌 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기`후기가 되면 갈린 부위가 점차 넓어지고 말기가 되면 농경의 본격화와 함께 전면을 갈아 쓰게 된다. 이 밖에 흑요석에는 떼기방법이 주로 사용되며 혈암으로 정교하게 만든 이음낚시의 낚싯축은 전면이 갈려 있다. 석기의 구성상 동북지방과 중`서부지방에서는 간석기의 비율이, 남해안지방에서는 뗀석기의 비율이 높아 석질이나 지역에 따른 차이를 보인다.
석기는 용도에 따라 고기잡이용, 사냥용, 일상생활용, 농경용, 조리용 등으로 구분된다. 고기잡이용으로는 이음낚싯축`그물추`작살`찔개살 등이, 사냥용으로는 화살촉`창끝이,
일상생활용으로는 도끼`끌`대팻날`자귀`칼`송곳`가락바퀴`바늘`발화석`망칫돌`숫돌`토기무늬새기개`톱 등이 보인다.
농경용으로는 괭이`보습`낫 등이 있는데 낫과 보습은 중`서부지방에서, 괭이는 동북지방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으나 남부지방에서는 농경용의 석기가 거의 출토되지 않아 지역에 따라 농경의 비중과 방법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리용으로는 갈돌과 갈판 및 공이 등이 출토된다. 남경유적에서는 300여개의 그물추가 출토되어 당시의 생업으로 고기잡이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석기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대륙에 있지만 동남해안에서는 일본의 조묭토기편을 비롯하여 규슈 고시다께계의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가 출토되고 있어 일찍부터 일본 열도와도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울진 후포리에서 출토된 긴 돌도끼는 매장유적과 관계있는 유물로서, 북유럽에서도 같은 형태의 도끼가 출토되고 있어 두 지역과의 관계를 시사해 주는 자료로 주목받게 되었다.
* 뼈`뿔연장
신석기시대에는 고기잡이와 사냥이 주된 생업경제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뼈`뿔연장이 많
이 제작되었을 생각되나 유물로 남은 것은 주로 조개더미유적에서 출토되는 것이 대부분
이다. 뼈`뿔연장의 종류에는 돌보다는 뼈나 뿔로 만드는 것이 효율적인 바늘`찔개살`삿바
늘`낚싯바늘`작살`흘리개 등이, 사냥뇽의 화살촉`창끝이, 농경구인 낫`뒤지개 등이 보이며
이 외에도 일상생활용의 송곳`칼`바늘과 바늘통`사사바늘`숟가락`토기무늬새기개 등이 만
들어졌다.
이 외에도 조가비로 만든 팔찌, 물고기나 동물의 이빨로 만든 발찌 등의 각종 꾸미개와
호신구가 있다. 특히 동삼동에서 나온 사람얼굴모양의 조가비는 사람모양의 토우`생식기
형 석물과 함께 원시종교 또는 당시의 신앙생활을 짐작케 하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 오산리 집터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 위치하는 집터유적으로 동해안에서 내륙쪽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쌍호라고 불리는 호숫가의 모래언덕 위에 형성되어 있다.
1977년 이곳의 흙을 채취하여 호수를 매몰, 농지로 만들기 위한 작업 중 다량의 석기와
토기편이 출토됨으로써 발견되었고 그 뒤 서울대학교에서 1981년부터 1985년까지 6차에
걸쳐 학술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유적은 모두 6개의 퇴적층으로 형성되어 있고 문화층은 청동기시대와 신석기시대층으
로 구분되며 신석기시대층은 다시 3개의 층으로 세분된다. 맨윗층에서는 중`서부지방 신
석기시대의 특징적인 토기인 뾰족바닥의 빗살무늬토기가, 가운데층에서는 주로 납작바닥
의 바리토기가 출토되었다. 바리토기의 바닥에는 나뭇잎무늬가 찍혀 있는 것도 있다.
민무늬가 보편적이나 무늬토기는 동북지방의 것과 유사하다. 맨아랫층에는 지름 약 6m
도로 파서 바닥을 만들고 가운데에 70*70cm 크기의 화덕자리가 한두개씩 마련된 10기
의 둥근 움집터가 확인되었다. 이 층에서는 바닥에 비해 아가리가 넓은 납작바닥의 바리
토기를 비롯하여 독과 항아리가 출토되었다. 바리토기의 아가리에는 여러 가지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석기로는 이음식낚싯축, 톱, 칼, 흑요석제 인긴 등이 출토되었다. 어로용
석기들이 다수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어로에 큰 비중을 둔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층에서 채취된 목탄의 탄소연대가 bc6000~5000년으로 측정되어 우리나라 신
석기문화의 연대를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오산리유적은 동북지방과 중`서부
방 그리고 남부지방이 접하는 지점에 위치하면서 각 지역의 유물들이 섞여 출토되고 있
어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지역적 문화를 비교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 암사동집터
신석기시대 집터유적으로 사적 제267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강 남안의 충적사질층에
형성되어 있으며 강건너 맞은 편에는 삼국시대의 아차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 문화층이 노출되면서 알려져 많은 유물을 채집하였
다. 1983`84년에 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 선사유적공원조성을 위해 재발굴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지점은 6개의 퇴적층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문화층은 3개층이었다. 1문화층은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고 집터와 돌무지유구가 확인
된 층이며 2문화층은 민무늬토기의 바탕흙에 대선이 시문된 소위 민무늬계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되는 층이고 3문화층은 이음독무덤과 건물터의 적심석 등이 발견되는 층이
다.
신석기시대의 집터 : 평면형태는 둥근 것도 있으나 모줄인 네모꼴이 대부분이며 지름이
나 한 변이 4~6m 정도가 보편적이다.바닥 가운데에는 냇돌이나 깬돌을 돌려 만든 화덕
이 마련되어 있었고 주변에 저장용토기가 박혀 있는 집터도 확인되었다. 1975년에 발굴
된 2호집터에서는 중심기둥과 함께 벽체의 불탄기둥들이 확인되어 집의 형태를 복원하는
데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암사동토기의 형태와 새겨진 무늬는 하남 미사리, 봉산 지탑리, 온천 궁산유적에서 출토
된 것들과 유사하여 이들 지역이 신석기시대에는 같은 문화영역 안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기로는 강자갈을 이용한 긁개와 찍개, 도끼 등의 뗀석기가 대부분이며 소형의 그물추
도 다량 출토되었다. 간석기로는 도끼, 화살촉, 갈판과 갈돌, 공이 등이 출토되었다.
자연유물로는 불에 탄 도토리와 뼈 등이 검출되었다. 석기 중에는 짐승과 물고기잡이용
뿐만 아니라 낫, 보습 등도 출토되어 당시에 이미 농경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의 1문화층에서 채취된 목탄의 탄소연대가 대체로 bc4500~3500년으로 측정되
었다. 토기를 비롯한 암사동유적의 출토유물은 우리나라 북쪽의 내몽고`시베리아의 바이
칼호 주변에서 출토되는 유물과도 연관관계를 갖고 있어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뿌리를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 지경리 집터
양양군 현남면 지경리 해발 6~9m의 낮은 모래언덕에 분포하고 있는 신석기와 원삼국시
대의 집터 유적으로 주문진`인구간 7번국도 확장 및 포장공사 도중에 노출되어 발굴조사
하였다. 이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집터 8기, 원삼국시대 집터 3기가 확인되었고 노출되
어 있는 토층은 5개의 퇴적층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문화층은 원삼국시대 문화층과 신석
기시대 문화층으로 구분된다.
신석기시대의 집터는 둥글거나 모줄인 네모꼴의 구덩이를 파고 만든 움집터로서 바닥 가
운데에 화덕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유적에서는 동북지방 토기에서 볼 수 있는 납작바
닥에 손잡이가 달리고 점줄무늬가 베풀어진 단지와 짧은빗금무늬에 세모밀집선무늬가 새
겨진 남부지방계 토기 그리고 짧은빗금무늬에 가로고기뼈무늬 등이 베풀어진 중`서부지
방계 토기 등이 함께 출토되고 있어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중기의 문화연구와 전파경로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 가도 조개더미
이 유적은 군산과 장항을 연결하는 일대에 군장국가공단조성을 위한 공사 계획이 수립되
어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1993년에 군산 앞바다의 여러 섬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
면서 가도, 바응도, 노래섬, 오식도 등에 선사 역사시대에 이르는 조개더미유적이 분포하
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어 대학연합발굴단을 구성하여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 동삼동 조개더미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어 있어 여러 층으로 세분될 수도 있으나 크게 3개의 문화층(흑갈색부식토층`패각층`혼토패층)으로 나눌 수 있다. 맨 아래층에서는 원시민무늬토기와 덧무늬토기, 가운데층에서는 뾰족 또는 둥근바닥의 빗살무늬토기가, 맨위층에서는 아가리 주위에만 2~3줄의 조잡한 줄무늬를 베푼 빗살무늬토기와 아가리부분을 밖으로 접어 붙인 겹아가리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일본 규슈산으로 추정되는 흑요석과 죠몽토기편(일본의 신석기토기 : 야요이토기는 청동기) 등은 당시 두 지역의 주민들이 대한해협이라는 공동어로구역을 중심으로 교역과 문화교류활동을 활발히 행했음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 연대도 조개더미
통영시 산양면 연곡리 연대도에 위치하는 신석기시대의 조개더미유적.
* 교동 동굴유적
춘천시내의 한 가운데에 솟아있는 봉의산에서 발견된 동굴 유적.
* 후포리 무덤유적
울진군 평해읍 후포리의 바닷가에 면한 언덕 무덤유적. 40구 이상의 인골이 다량의 석기들과 함께 겹쳐져 출토되고 있어 여러 번의 개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단 세골장.
* 청동기문화
동기시대의 시작연대에 대한 문제는 학자에 따라 견해를 달리하고 있으나 대개 기원전 10세기경 북방민족들의 이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즉 기원전 10세기경 중국 동북지방에서 청동기로 도구와 무기를 만들어 쓰며 쌀농사를 짓고 민무늬토기를 사용하는 주민이 한반도로 들어와 선주민과 동화되면서 한반도도 청동기시대문화에 접어든다. 이 시대에는 청동제품`간석기`다양한 종류의 민무늬토기를 썼으며, 고인돌`돌널무덤`독무덤 등 새로운 양식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농경과 목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생산력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사회내부에 신분적 차이가 생긴 점이다.
부여 송국리, 여주 흔암리, 평양 남경 등의 집터유적에서 출토된 불탄 쌀과 각지에서 발견된 불탄 잡곡(보리`조`수수`피`기장 등)을 비롯하여 대전 괴정동에서 출토된 - 따비로 밭을 갈고 있는 무늬가 새겨진 - 농경문청동기 등의 유물은 농경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좋은 자료이다. 또한 무산 호곡동유적에서는 20마리 분의 돼지뼈가 검출되어 돼지나 개 등을 집에서 키웠음을 알 수 있다.
농경은 선진문명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에 접어들면서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한반도의 경우는 좀 늦은 신석기시대 후기에야 시작되어 그 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농경생활로 접어들게 된다. 한반도에서 시작 단계의 농경대상은 조, 기장, 피 등 북방계통의 잡곡문화였으나 청동기시대에는 쌀을 비롯해 보리, 수수 등 다양한 종류의 잡곡이 경작되어 본격적인 농경생활에 들어서면서 주거지역도 하천이 있는 구릉지대로 옮겨가게 되었다.
* 집터
청동기시대의 살림집으로는 동굴과 움집이 있으나 신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움집이 보편적인 형태다. 움집은 평야나 하천에서 가까운 낮은 야산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보령 교성리유적과 같이 야산 꼭대기에 만들어지는 산상취락도 있다. 청동기인들은 부여 송국리나 울산 검단리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대략 열집 안팎의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그 주위에는 마을의 경계와 방어를 위한 도랑을 파거나 나무울타리를 세우기도 하였다.
집터의 모양은 공간활용이 더욱 편리한 네모꼴이나 긴 네모꼴이 대부분이며 바닥 가장자리에는 배수를 위해 도랑을 설치한 예도 있다. 움의 깊이는 50cm 내외가 일반적이며 네모꼴의 경우에는 한변의 길이가 4~5m 가량이고 긴네모꼴의 경우에는 4*7m 정도로서 서까래가 있는 맞배지붕으로 복원된다. 집터 바닥에는 냇돌을 돌리거나 바닥을 약간 파서 만든 화덕자리가 마련되어 있는데 집이 큰 경우에는 여러 개가 있는 경우도 있다.
한편 서산 휴암리`부여 송국리, 광주 송암리, 순천 대곡리, 영암 장천리, 거창 대야리 등 한반도 서남부지역의 유적에서는 바닥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그 양 끝에 기둥을 세운 소위 송국리형 둥근집터가 확인되었는데 이 집터에는 화덕자리가 없으나 저장구덩이가 있어 네모꼴집터와 구분되는 특수한 문화영역을 이루고 있다.
한편 최근 조사된 보령 관산리, 익산 영등동유적에서는 마을의 중심부에서 거대한 규모의 집터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대가족이나 특수집단의 공동주거 내지는 석기제작소 등의 공동작업장과 같은 공공시설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생각된다.
* 무덤
청동기시대의 무덤은 신석기시대의 돌무지무덤이나 동굴무덤과는 달리 고인돌, 돌널무덤, 독무덤 등의 새로운 양식의 무덤이 만들어져 초기철기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진다.
고인돌은 서유럽의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지중해 일대, 인도, 동남아시아는 물론 중국의 동해안에 이르기까지 그 분포지역이 광범위한데 한반도의 고인돌은 이들과 모양은 비슷하나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듯하다. 동아시아지역의 고인돌은 중국 동북지방이나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하여 한반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며 일본 규슈지역으로도 전파된 무덤양식이다.
선사시대 유적 중 가장 특징적인 성격을 띠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으로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 분포한다. 주검의 위치와 무덤의 형태에 따라 북방식과 남방식의 두 양식으로 구분된다. 북방식은 땅 위에 판독을 세워 긴 네모꼴의 무덤칸을 만들고 주검을 넣어 그 위에 크고 넓은 덮개돌을 덮는 구조로서 일명 탁자식이라고도 한다. 대동강, 재령강을 중심으로 하는 평남, 황해도에 주로 분포하며 평남 용강 유적에는 수백기가 밀집되어 있다. 한강 이남지역에는 매우 드물지만 고창지역에까지 분포한다.
남방식은 땅 밑에 판돌이나 깬돌로 만든 긴 네모꼴의 돌널 안에 주검을 넣고 굄돌이나 돌무지를 쌓은 후 그 위에 덮개돌을 덮은 형태로 뚜껑식과 바둑판식으로 세분된다. 뚜껑식은 돌널의 뚜껑이 땅위에 노출되거나 땅 밑의 널을 덮은 뚜껑과는 별도로 그 위에 다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형식으로 덮개돌을 받치는 받침돌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바둑판식은 주로 영`호남지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작은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어 바둑판처럼 보인다. 특히 창원 덕천리에서는 이단구덩이에 이중 뚜껑돌의 특이한 형태도 조사되었다.
고인돌에는 대체로 민무늬토기`붉은간토기, 반달돌칼, 간돌검, 돌살촉 등의 유물이 껴묻혀 있으나 전남 여천 적량동`봉계동`평여동, 여수 오림동, 순천 우산리 일대의 고인돌에서는 요령식동검, 요령식투겁창, 대롱옥, 곱은옥, 둥근옥 등이 출토되었다. 이와같이 요령식동검이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예가 급증하고 있고 공반유물도 송국리형집터에서 보이는 석기들의 조합상과 같으며 대부분의 동검이 재생품이거나 파편인 점 등으로 보아 요령식동검문화 후기에 전남지방의 남방식고인돌문화는 요령식동검문화나 송국리형주거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돌널무덤은 남방식 고인돌의 땅 밑 매장시설과 유사하나 널의 깊이가 보다 깊고 널의 뚜껑을 판돌이나 나무판자로 덮는 형태이다. 봉분이 원래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로서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시대 전시기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 분포하지만 그 수는 고인돌에 비해 적으며 일부 남부지방의 돌덧널무덤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원래 유라시아대륙에서 널리 사용하던 무덤양식으로 동북아시아에서는 청동기시대 이후 시베리아를 비롯하여 한반도 전역과 중국 동북지방, 일본 규슈지방에 이르기까지 분포한다.
돌널무덤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의 하나로 지역과 묻힌 사람의 신분에 따라 그 형식과 껴묻거리의 내용이 다르다. 무덤 안에서는 대개 간돌검, 돌살촉,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가지무늬토기 등과 함께 청동기도 출토된다. 한편 충청도일대에서 발견되는 돌널무덤은 깬돌로 널을 만들고 구덩이의 윗부분을 돌로 채운 특이한 형식으로 여기에서는 한국식동검을 비롯하여 청동거울, 청동의기, 그리고 덧띠토기와 검은간토기 등이 세트를 이루며 출토되고 있어 지역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청동기시대 후기에 서남부지역의 송국리형토기문화권에서는 독무덤이 발견되는데 바닥에 구멍을 뚫은 일상용 토기를 바로 세워 주검을 묻고 아가리를 판돌로 덮은 외독널이다. 이 시기의 독널은 유아나 어린이용으로 사용되었으나 후대에는 이음식이 나타나면서 성인용으로도 이후 끊임없이 쓰였다.
널무덤은 후기에 등장하는데 대개 서북지방의 이주민과 함께 전래되었으며 여기에는 무구적 성격을 띠는 청동유물이 껴묻혀 있다.
* 토기
기원전 10세기경이 되면 요령`만주`시베리아지방으로부터 갈래가 다른 주민들이 서로 다른 문화와 접촉하면서 여러 갈래의 길을 통해 한반도에 들어와 빗살무늬토기인들을 동화함으로써 한반도의 토기양상도 민무늬토기문화에 접어든다. 민무늬토기는 굵은 모래나 곱돌가루를 섞은 진흙으로 빚어 한데가마에서 구운 납작바닥토기로 대개 황갈색 또는 적갈색을 띠며 그릇의 겉면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어 빗살무늬토기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을 보인다.
민무늬토기의 종류는 일반적으로 용도에 따른 제작의 차이로 바리, 깊은 바리, 대접, 접시, 항아리, 독, 시루, 두형 등으로 다양하고 그릇에 손잡이가 붙어 있기도 한다. 이 토기들은 지역과 시기, 그리고 만드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특징을 띠고 있다. 따라서 지역의 대표적인 유적명을 따서 신암리식, 공귀리식, 미송리식, 묵방리식, 가락리식, 송국리식 토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한 만드는 방법과 그릇모양에 따라 아가리 바로 아래에 작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1줄 내지 2줄로 돌아가며 배치된 구멍무늬(공열문)토기, 입술에 눈금이 새겨진 골아가리토기, 바닥이 지금 3~5cm 정도로 작고 그릇모양이 팽이처럼 생긴 팽이형토기, 겉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문질러 광택이 나게 한 붉은간토기, 겉면에 흑연 등의 광물질의 안료를 바르고 문질러 광택이 나게 한 검은간토기, 어깨부분에 검은색의 가지무늬가 베풀어진가지무늬토기, 아가리에 진흙띠를 덧붙여 겹아가리로 만든 덧띠토기, 화분형토기 등으로 나뉜다.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에 껴묻히는 붉은간토기는 아가리가 벌어진 단지형이 일반적인 형태이나 여주 흔암리, 부여 송국리, 진양 대평리 등의 집터유적에서는 항아리`바리`잔`굽달린잔 등의 일상생활용 토기가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검은간토기는 보령 교성리, 양주 수석리 등 집터유적에서는 덧띠토기와 공반되나 요령지방이나 한반도의 돌널무덤에서는 많은 종류의 청동기, 덧띠토기와 함께 출토된다.
원삼국시대가 되면 아가리가 바라지고 배가 불러지는 등 형태가 바뀌면서 와질토기로 변해간다. 이 밖에 항아리`굽다리접시와 같은 일용적인 형태도 보인다.
가지무늬토기는 대개 돌널무덤에서 출토되는데 둥근 몸통에 짧은 목이 달린 붉은간토기와 비슷한 형태로 회백색이 나는 고운 바탕흙으로 구웠으며 경상도`전라도 등 남부지방에서만 발견된다. 진양 대평리 집터에서 출토된 것과 순천 구산리 출토품을 제외하면 모두 고인돌`돌널무덤에서 발견되고 있어 껴묻거리나 의식 등에 사용된 것으로 믿어진다.
* 석기
이 시대의 도구로는 아직도 석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농경은 간석기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이 시기에는 전국에 걸쳐 간석기가 발견된다. 제작방법에도 진전이 있어 신석기시대에는 떼어낸 후 갈았던 방법이 있으나 청동기시대에 와서는 점판암과 같은 얇은 판돌에 흠을 그어 적당한 크기로 자르는 찰절법이 유행한다. 청동기는 제작의 어려움, 잴의 희귀성 등 기술적인 문제로 인하여 지배자의 꾸미개 또는 의기로 만들어진 반면, 일상도구는 아직도 석기 또는 목기가 주로 사용되면서 신석기시대에 비해 종류가 다양해지고 형태도 정형화되어 간다.
이들 간석기에는 나무의 벌목`가공 등에 이용된 도끼`자귀`대팻날`끌 등의 공구류가 있고
곡식의 이삭을 따거나 베는 데 사용된 반달돌칼`낫, 땅을 파거나 밭을 일구는 데 사용된 괭이`가래`호미, 음식가공에 쓰인 갈돌과 갈판이 있다. 이 외에 무기와 사냥도구로는 화살촉`창`검 등이 있고 일상생활용으로는 실을 꼬는 데 썼던 가락바퀴, 도구를 갈기 위한 숫돌 등도 있다. 한편 사회분화로 형성된 지배계층에서는 그들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바퀴날도끼`톱니날도끼를 사용했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간석기로는 간돌검을 들 수 있다. 주로 고인돌`돌널무덤에서 발견되나 집터에서도 출토되는데 이른 시기부터 만들어져 청동검과 함께 사용되다가 철기가 보편화되는 기원전후까지 제작되었다. 초기의 것들은 실용의 기능이 있으나 시기가 늦을수록 무덤에 묻히기 위한 의기적 성격이 강해져 필요없이 과장된 형태를 하고 있다. 간돌검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일본 규슈지방에서만 보이고 있어 하나의 뚜렷한 문화영역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농사와 관계있는 석기로는 반달칼이 있다. 반달칼은 곡식의 이삭을 따는 데 사용한 수확용 도구로, 반달모양인 것이 많으나 함경도지방에서는 네모꼴이, 충청도전라도 해안지방에서는 삼각형도 만들어졌다. 손에 거는 끈을 꿰기 위해서 1~3개의 구멍이 뚫려 있으며 한쪽에 외날이 나 있다.
중국의 화북지방에서 발생한 농경용 석기로서 한반도에는 신석기 말기에 등장해서 청동기시대 벼농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사용되다가 철기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홈자귀는 ㄱ자형 자루에 묶어 쓰는 공구로 중국 남부나 태평양지역의 석기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나무를 가공하는 목공구 또는 농사를 지을 때 땅파는 도구로 사용된 다목적 도구였다. 한편 기술적인 요령을 터득한 민무늬토기인들은 석기의 용도에 맞춰 석재를 골라 썼는데, 예를 들면 도끼`자귀류는 화강암`섬록암을, 갈돌에는 사암을, 칼`낫`살촉 등에는 점판암계통의 돌을 이용했다. 이같은 간석기는 철기가 보편화되었던 기원전후가 될 때까지 제작되었다.
* 청동기
청동은 구리(동)를 기본으로 하는 구리합금의 한 종류로서 인류가 발견한 최초의 합금이다. 일반적으로 구리와 주석을 섞어 만드나 주조할 때 용융점을 내리고 주조 후 표면처리와 마감처리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 아연`납 등을 섞기도 한다. 특히 아연을 섞은 것은 우리나라 특유의 합금술로서 주조서 유동성에 도움을 주며 잘 부식되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다. 주석이나 아연을 많이 섞을수록 단단한 청동이 되는데 만들고자 하는 청동기의 용도와 기능에 따라 합금의 성분비율을 조절하여 주조하였다.
한반도의 청동기는 다른 유물에 비하여 수량이 적고 집터나 고인돌에서는 거의 출토되지 않으면 돌널무덤이나 초기철기시대의 널무덤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 이들 청동기는 일반 주민의 실용품이라기보다는 유력자들만이 지닐 수 있었던 특수품, 또는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의 청동기는 요령지방에서 그 전통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데 후대에 유행하는 한국식동검이나 청동의기에는 요령지방에서 발견되는 청동기의 형태나 무늬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한국적 특성을 갖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를 통해 청동기의 발전과정을 시기적으로 2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요령지방에서 청동기가 유입되기 시작한 때부터 철기가 등장하는 때까지 - 요령지방에서 수입된 청동기 또는 한반도에서 제작했더라도 요령지방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는 청동기를 사용한 시기이고
2기는 비록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했으나 한국적 청동기가 제작되면서 한반도 청동기의 특징이 확립되고 나아가 일본에 그 문화를 전해준 시기를 말한다.
1기의 청동제품은 극히 빈약하다. 집터에서는 출토예는 거의 없고 고인돌을 비롯한 무덤에서 대부분 출토되고 있다. 청동기의 종류로는 요령식동검, 요령식투겁창, 부채도끼, 화살촉, 손칼, 끌, 밀개, 거친무늬거울, 단추 등이 있다.
요령식동검은 후대에 나타나는 한국식동검의 조형으로 초기에는 요령지방에서 수입되었으며 중국 요령, 길림, 장춘 지역을 비롯하여 동북지방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 동검은 날부분이 활모양으로 휘어져 있어 비파형 또는 곡인 청동단검으로 불리우며 분포지역에 따라 요령식 또는 만주식동검으로도 불리운다. 자루를 따로 만들어 검몬에 끼울 수 있도록 짧은 슴배가 달려 있어 중국식동검이나 북방계의 오르도스식동검과는 특징을 보인다.
요령식동검을 중심으로 하는 청동기문화가 요동반도에서 서해안을 통해 서북과 중서부지역에 먼저 들어와 각지로 확산되면서 한반도도 본격적인 청동기문화에 접어들게 된다. 동검이 생활유적에서 출토된 예는 없으나 부여 송국리의 집터에서 요령식동검과 공반되는 부채도끼의 거푸집이 출토되어 일상생활 속에서도 청동기의 주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거울은 뒷면에 동무이나 형상이 그려져 있는 중국 거울과는 달리 처음부터 기하학적 무늬로 출발하는 특수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꼭지도 중앙에서 한 쪽으로 약간 치우쳐 2개가 나란히 붙어 있다. 뒷면의 무늬를 기준으로 거친무늬와 잔무늬로 구분하는데 빠른 시기에는 거친무늬거울이 사용되었다. 기하학적 줄무늬를 기본으로 하면서 번개무늬, 별모양무늬 등 특색있는 변화를 보여준다. 도끼는 자루에 끼우는 부분이 좁고 날쪽이 부채꼴처럼 넓어진 형태로서 무기로 보기는 어렵다. 속초 조양동과 의주 미송리 유적에서는 실물이, 부여 송국리와 영흥읍에서는 거푸집이 출토된 바 있다.
2기는 순수한 한국식 청동기가 제작, 사용된 시기로서 청동기의 제작이 증가하며 재질은 백동질인 점이 특징이다. 청동기에는 칼날이 직선을 이루며 좁어자닌 한국식 동검, 꺽창, 투겁창 등의 무기류와 잔무늬거울을 비롯한 방울달린 청동기 및 검파형`방패형`원개형 등의 청동의기류가 대부분이며 도끼, 끌, 밀개 등의 공구류도 있다.
이 가운데 무기류가 숫적으로 가장 많은데 동검은 한국 청동기문화의 표지적인 유물로서 한반도 청동기문화를 동검문화라고도 한다. 기원전 4세기 이후에 제작되어 형태가 세부적으로 변화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거울`곱은옥과 세트를 이루며 출토되는 예가 많고, 투겁창`꺽창과 더불어 일본으로 전파되어 일본 청동기문화의 성립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창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으나 형태는 한국식동검의 요소가 많이 보여 한국화된 유물이다.
거울은 동검과 함께 한국 청동기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1기의 거친무늬에서 발전된 극히 섬세하고 정교한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다.
방울류에는 장대투겁과 가지방울이 있으며 그 안에는 구슬이 들어 있다. 이밖에 바패형, 검파형, 나팔형, 견갑형 등의 청동의기가 보이는데 대부분 고리가 달려 있고 독특한 기하학적 무늬에 사슴이나 손 등이 새겨져 있어 주술적인 성격을 띠고 특수한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도끼나 끌 등은 영암에서 출토된 거푸집에서 볼 수 있듯이 1기의 형태에 주머니모양의 둥근 것도 함께 보인다.
또한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에서는 한국식동검과 함께 대롱옥, 곱은옥, 둥근옥과 작은구슬 등이 출토되는데 목걸이, 귀걸이로 사용되었다. 대롱옥은 벽옥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고 원통형에 실에 꿸 수 있도록 장축을 따라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곱은옥과 세트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곱은옥은 천하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나 고남리 조개더미에서는 경옥으로 만든 것도 출토되었다. 형태는 반달형과 콤마형이 있는데 머리부분에 1~2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이러한 대롱옥과 곱은옥은 청동거울이 출토되지 않는 영남지역에서는 널무덤이 만들어지는 시기인 초기 철기시대 말기가 되면 거의 소멸된다.
이 외에도 조각품으로는 신석기시대부터 개, 돼지, 새, 사람, 여신상, 신상 등의 흙으로 만든 조각품이 나오기 시작하여 청동기시대에도 보인다. 이러한 인물살들은 부족의 번창을 도와주는 조상신인 듯하고 동물조각도 번식을 비는 주술적 존재를 표현한 듯하다. 이 외에 악기로서는 뼈로 만든 피리가 발견된 바 있다. 청동기에서 보이는 의기와 함께 신석기시대에 비하여 훨씬 폭넓은 예술활동의 흔적이 보인다.
* 청동기 제작
청동기는 대개 채광, 정련, 주조 등의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며 이외에 보수작업이 있다. 아직까지 광산의 채굴이나 정련과 관련된 자료는 밝혀져 있지 않고 다만 청동기의 성분과 제작기술 및 보수에 대한 자료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청동기의 제작에는 합금을 만드는 금속들의 광석채취가 가장 먼저 필요하다. 청동은 구리에 주석이나 아연, 흑연 등을 섞어 만드는데 현재까지 선사시대의 광산유적이 발견된 바 없어 채광기술에 대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광석에서 광물을 가려내거나 금속을 녹이기 위해서는 도가니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선사시대 도가니의 확실한 예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역사시대의 자료를 참고해 보면 청동기시대의 도가니는 대개 진흙에 모래가 섞여 있어 거치고 기벽과 바닥은 매우 두텁다. 형태는 일반적으로 다섯종류로 나누어지나50~60cc 정도의 주액을 담을 수 있는 보시기나 컵모양이 대부분이며 거푸집에 주액을 붓기 편하도록 아가리에 귀때를 만들어 주었다.
합금을 하기 위해서는 각 광석을 따로 정련한 뒤 적절한 비율로 섞어서 사용하엿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합금비율에 따라 만들어진 청동기의 성질이 달라지게 되며 주석이 19%일 때 가장 견고하고 그 이상이 되면 깨지기 쉽다.
청동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거푸집이 필요한데 거푸집의 출토는 현지에서 직접 주조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우리나라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곱돌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나 편암제도 가끔 보이며 흙으로 만든 것도 있었겠지만 발견된 예가 없다. 곱돌은 돌이 무르기 때문에 조각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주조식 쇳물에서 생기는 개스의 압력에 잘 견딜 수 있기 때문에 반영구적이며, 주조물의 표면을 곱게 뽑아낼 수 있는 잇점도 있다.
거푸집은 표면을 편평하게 다듬은 후 만들고자 하는 형태를 새겨 만드는데 거울, 낚싯바늘, 끌, 도끼 등과 같이 1개짜리 거푸집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대부분 2매를 합한 합범이 쓰인다. 합범은 두 개의 틀을 맞춘 위쪽면에 주입구가 있어 이 곳을 통해 쇳물을 부어 넣어 제품을 만든다. 2매를 결합할 때에 어긋나지 않고 정확하게 맞출 수 있도록 옆면에 눈금이 새겨져 있다. 이 외에도 청동기가 곡면을 이루거나 복잡한 것, 또는 조각하기 힘든 무늬가 새겨진 방울류와 거울 등은 밀랍을 이용한다. 이 방법은 밀랍으로 만들고자 하는 청동기의 형태를 빚은 뒤 진흙 속에 넣고 불에 구워 밀랍을 녹여 낸 후 그곳에 쇳물을 부어 주조하는 방법이다. 이밖에도 주물모래에 의한 방법도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무늬는 거푸집에 직접 새기거나 원형에 새겨지는데 무늬도장을 사용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주조 후 제품의 테두리에 생긴 거친 흔적을 숫돌로 갈아 없애고 날을 새우는 등 마감처리를 하게 된다.
한편 주조과정에서 거푸집이 잘못 만들어지거나 그 밖의 결함이 있을 때, 또한 사용 도중 파손되는 경우 보수하여 다시 사용하게 된다. 보수에는 지워진 무늬를 다시 새겨 넣는 보각과 파손된 것을 때우는 땜질이 있다. 땜질은 땜질부위의 앞`뒷면을 진흙 등으로 막고 주물을 부어 메운 뒤 겉면을 간 것이 많다. 이 외에 분리된 부분에 못을 박아 연결하는 방법도 있다.
* 바위그림
선사시대의 신앙내용 및 형태, 의식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 가운데 하나인 바위그림은 이 시대의 예술활동을 살펴 볼 수 있는 유적으로 바위면이나 큰 암벽 위에 물상, 기호, 성혈 등의 형체를 쪼아 내거나 또는 선으로 윤곽을 나타낸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울산 대곡리 반구대`천전리, 고령 양전리와 안화리, 포항 인비동과 칠포리, 경주 석장동, 영천 보성리, 남해 양아리 등의 영남지방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으며 남원 봉황대와 여수 오림동에서도 발견된 예가 있다.
대곡리 반구대 바위그림은 태화강 상류의 대곡천변의 암벽 아랫부분에 있는 바윗면에 새겨져 있다. 왼쪽에는 고래`돌고래 등의 바다짐승을 주제로 하여 전면을 쪼아 내어 음영화로 표현하였고 오른쪽에는 들짐승들의 윤곽을 선으로 쪼아 내었다. 이 외에도 호랑이. 개, 사슴, 돼지, 산양 등의 여러 가지 짐승이 그려져 있고 그 외에 그물이나 울타리 안에 갇힌 짐승, 여러 사람이 탄 배, 사냥꾼 또는 무당의 모습이 보인다. 짐승 중에는 잉태한 것, 식도`내장 등 생명선이 표시된 뢴트겐식 그림으로 된 것이 있다. 이것은 북부 유라시아에 퍼져 있는 선사시대 사냥에 관한 의식을 표현한 암각화의 전통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상류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계곡의 U자형 돌출부 암벽에 새겨져 있는 천전리 바위그림은 기하학적인 무늬와 탈을 쓴 사람을 비롯하여 사슴이나 호랑이 등의 짐승이 표현되어 있다. 무늬에는 마름모꼴이 가장 많으나 동그라미`소용돌이`물결무늬 등이 새겨져 있고 이외에 신라시대에 새겨진 명문도 있어 이 지역이 청동기시대부터 신라때까지 계속하여 특수의식을 행하던 성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전리 바위그림에는 겹고리(동심원), 십자모양, 네모꼴 등의 기하학적인 무늬가 많이 보이는데 시베리아 아무르강유역의 바위그림의 내용과 통하는 요소도 보인다. 이외에도 포항 인비동과 여수 오림동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간돌검이나 돌살촉 등이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 송국리 집터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일대의 낮은 야산지대에는 청동기시대의 집터와 무덤유적을 비롯하여 삼국, 고려, 조선시대의 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1975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청동기시대의 움집터 30여기, 돌널무덤 1기, 독무덤 4기를 확인하였고 1991~1993년에는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여 청동기시대 취락의 나무울타리시설과 도랑유구를 확인하였다.
집터는 둥근 것과 긴 네모꼴이 있으며 둥근집터에는 바닥 가운데에 긴지름 1m내외의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그 양 끝에 기둥구멍을 만들어 세운 형태로 서산 휴암리, 청원 내수리, 광주 송암동, 순천 대곡리, 영암 장천리, 거창 대야리 등 한반도 서남부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긴네모꼴집터의 기둥구멍은 대부분 벽 주위에 돌려져 있으며 특히 1985년에 조사된 긴네모꼴 집터에서는 불에 탄 서까래가 내려앉은 채 발견되어 맞배지붕 또는 우진각지붕으로 복원된다.
55지구 8호집터에서는 요령지방에서 유행한 부채도끼의 거푸집이 출토되어 당시 청동기제작이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미송리유적 출토 청동도끼와 함남 영흥읍 출토 도끼거푸집의 도끼와 같은 형태로서 송국리돌널무덤에서 출토된 유령식동검과 함께 연대와 성격을 파악하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또한 54지구 1호집터에서는 400그람이 넘는 불탄 쌀이, 50지구 둥근집터에서는 볍씨자국이 찍혀있는 토기편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업경제가 쌀농사에 기반을 두었음을 보여준다. 나무울타리시설은 총연장 약 2km에 이르며 커다란 골짜기를 포괄하는 형태로서 대단위의 방어취락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송국리 돌널무덤
송국리 집터유적의 진입로 왼쪽 가장 높은 구릉의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1974년 밭을 개간하던 중 발견되어 197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기를 조사하였고 1993년에는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돌널무덤 2기, 돌뚜껑널무덤 6기, 독무덤 1기 등을 추가로 조사하였다.
처음에 조사된 돌널무덤은 풍화암반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안에 남북방향으로 돌널을 짠 후 타원형의 뚜껑돌을 덮은 구조이다. 돌널은 길이 205cm, 최대너비 100cm, 크기의 긴 네모꼴로 머리쪽이 다리쪽보다 넓다. 바닥에는 널보다 좁은 판돌 3매를 옆으로 깔고 그 사이를 작은 판돌로 메웠다. 네 벽은 긴벽 4~5매, 마구리벽 1~2매의 판돌을 높이 80~90cm로 세워 만들었다.
껴묻거리는 바닥에서 발견되었는데 주검의 왼발부분에는 요령식동검과 돌살촉`대롱옥`곱은옥이, 허리부분에는 끝을 머리쪽으로 향한 간돌검이, 약간 북쪽에는 청동끌이 놓여 있었다.
송국리유적 55지구 8호집터에서 출토된 부채도끼 거푸집은 요령식동검과 공반되는 예가 많아 이 유적의 돌널무덤과 집터가 같은 시기 주민들의 문화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무덤은 요령지방에서 청동기문화가 한반도에 들어온 초기단계의 돌널무덤으로 그 연대는 기원전 5~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 괴정동 돌널무덤
대전시 괴정동의 낮은 구릉지대에서 발견된 돌널무덤이다. 깊이 270cm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바닥에 깬돌로 길이 220cm, 너비 50cm, 높이 100cm 크기의 돌널을 만든 다음 뚜껑돌을 덮고 그 위에는 깬돌로 채운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의 돌무지, 돌널무덤 혹은 돌무지 널무덤은 예산 동서리, 아산 남성리, 화순 대곡리, 함평 초포리 등 한반도 서남부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이 무덤에서는 한국식동검을 비롯하여 거친무늬거울, 종방울, 용도가 분명치 않은 검파형`원개형`방패형 등의 청동의기와 돌살촉, 천하석제 곱은옥, 검은간토기, 덧띠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검파형동기는 아산 남성리나 예산 동서리의 돌널무덤에서도 출토되었는데 모두 3점이 세트를 이루며 껴묻혀 있어 흥미롭다. 청동기 겉면의 기하학적 무늬와 고리장식은 매우 정교하여 주조기술이 상당히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동의기와 검은간토기 등은 중국 요령지방의 돌널무덤에서도 출토되어 그쪽 지방 청동기문화와의 깊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덤은 이형동기들이 출토된 무덤구조를 알 수 있는 최초의 예로 연대는 한국식동검이 나타나는 가장 빠른 시기인 기원전 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 남성리 돌널무덤
아산시 신창면 남성리의 얕은 언덕(해발 30~40m)에 위치하는 돌널무덤 유적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수습조사했다. 이 무덤은 부정타원형 구덩이를 아래로 내려가면서 좁혀 파고 200cm 정도의 깊이에 길이 235cm, 너비 50~70cm 가량의 돌널을 만들어 넣어 주검과 껴묻거리를 묻고 옻칠한 나무뚜껑을 덮은 후 그 위를 깬돌로 채운 형식이다.
무덤안에서는 한국식동검을 비롯하여 방패형`검파형 등의 청동의기, 거친무늬거울`부채도끼`끌 등의 청동기와 함께 대롱옥, 천하석제 곱은옥, 그리고 검은간토기와 덧띠토기가 출토되었다. 대롱옥의 출토 위치로 보아 주검의 머리를 동쪽으로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무덤양식이 돌무지의 돌널무덤 혹은 널무덤이고 유물의 내용에 있어서도 방패형동기, 검파형동기, 거친무늬거울, 천하석제 곱은옥, 덧띠토기, 검은간토기 등이 세트관계를 가지고 있어 대전 괴정동, 예산 동서리의 돌널무덤과 함께 충청도지방의 지역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연대는 한국식동검문화기 전기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기원전 4~3세기경에 편년된다.
* 무계리 고인돌
경남 김해시 무계리의 중앙부를 동서로 관통하여 조만강으로 유입하는 대청천의 북쪽에 연접한 충적평지에 위치한다. 1962년 주민에 의해 파괴된 무덤유적으로 주변의 지면보다 약 1m 정도 높은 작고 둥근 구릉의 중앙부에 만들어졌다. 이 무덤은 구덩이를 파 바닥에 자갈돌을 깐 후 그 위에 냇돌로 쌓은 길이 160cm, 너비 100cm, 높이 60cm 정도의 돌덧널을 만든 후 3매의 판돌을 덮은 구조로 고인돌의 하부구조로 추정된다.
돌덧널 안에는 간돌검, 돌살촉, 대롱옥, 청동살촉, 붉은간토기 등이 껴묻혀 있었다. 청동살촉은 요령식동검과 공반되는 형태의 것으로 요령식동검문화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황석리 고인돌 : 충북 제천시 남한강변의 낮은 지대에 40여기의 고인돌 밀집분포.
고인돌은 모두 굄돌이 없는 남방식으로 5기의 고인돌에서는 거의 완전한 모습의 사람뼈가 검출되어 이 시대에 살았던 주민의 신체적인 특징을 밝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매장풍습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 송평동 조개더미 : 함북 경흥군에 위치. 신석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에 걸쳐 형성된 한반도 동북지방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유적.
대곡리 무덤유적
전남 화순군 대곡리에 위치. 비봉산 북쪽 구릉의 바로 아래에는 낮은 평야와 함께 지석천이 흐르고 있다. 민가의 담장공사 중 청동유물이 노출되어 발견된 무덤유적이다.
풍화된 암반에 테두리가 이중으로 된 긴 네모꼴의 구덩이를 파서 바닥에 고운 진흙을 깔고 널을 넣은 후 나무뚜껑을 덮고 그 위를 깬돌로 채운 구조이다. 바닥에는 구유형의 통나무널조각이 남아 있었다.
출토유물은 한국식동검, 잔무늬거울, 가지방울, 도끼, 밀개 등의 청동제품이 있다. 유물들의 형식과 조합상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후기의 무덤으로 보이며, 특히 잔무늬거울은 기하학적 무늬가 아주 섬세하여 주조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의 조영시기는 한국 청동기 문화가 가장 발전되고 제작기술이 뛰어났던 시기인 기원전 3세기경으로 편년된다.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이 자연물을 숭배하는 사상이라면 애니미즘은 정령 숭배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정한 물체에 정령이 깃들여져 있다고 보고, 그 정령을 신봉하는 사상을 말한다. 애니미즘은 생물이나 무생물에 혼령을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애니미즘은 자연물에 깃들여져 있는 초자연적 존재, 토템 : 한 집단이나 부족에서 존중되는 집단의 상징으로서의 동식물을 뜻하는 말로써, 토테미즘은 토템과 인간관계가 제도화된 원시신앙을 말한다. |
* 울산암각화박물관 특별전
* 수렵채집 : 사회의 거석
수렵채집사회에서 등장한 거석문화는 구석기 동굴벽화와 유사하게 사냥감이었던 동물들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외에도 사람 그림은 주술사, 사냥 장면 등을 표현하고 있어 당시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수렵채집인들은 주로 이동생활을 하였는데, 거석과 같은 특정한 공간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맴돌면서 특정한 시기에만 거석에 방문을 하였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수렵채집민이 만든 반구대 암각화와도 유사하다.
* 정착농경 : 사회의 거석
수렵채집 사회를 지나 정착농경 사회가 되면서 인류는 큰 돌을 사용한 거석 제작을 본격화한다. 이 시기의 거석은 20미터가 넘는 돌을 세우거나 수km에 걸쳐 나란히 돌을 세워 두는 등 대규모로 조성되는 특징이 있다. 선사인들은 주로 돌을 세운 열석이나 무덤인 고인돌을 만들었으며, 계절 변화나 천문 관측용으로 추정되는 환상열석도 발견된다. 이렇게 만든 거석에는 그들이 사용한 도구를 새기거나 추상적 기하문을 새겨넣어 신성함을 나타냈다.
* 청동기시대 : 사회의 거석
청동기시대의 거석문화는 점차 아프리카, 아시아 등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된다. 또한 거석의 규모가 이전보다 커지거나 신전과 같이 매우 정교한 형태로 발전한다. 이전 신석기시대에서 보이던 정착 및 농경생활은 물론 당시의 지배계급의 등장, 대외교역, 문화교류 등 보다 더 발달된 사회모습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인지의 발달을 기초로 상징적 사고를 통해 문화를 형성하고, 의례와 같은 무형의 관념을 돌로 표현하는 단계까지 발전하였다. 동굴벽화 예술품은 선사인의 관념을 나타내는 증거로, 예술 속 그림을 그리는 장소와 도구 대부분이 ‘돌’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돌에 담긴 선사인의 생각과 의미를 알 수 있다. |
* 동굴 밖에서 살기 시작한 인류는 큰 돌에 의미를 담아 구조물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살아가는 방식이 변하자, 돌을 이용하는 방식도 바뀐 것이었다. 이를 거석문화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공통으로 나타나, 지역적 차이보다는 사회구조에 따라 그 형태를 구분할 수 있다. 거석문화는 선사인들의 삶의 방식을 정교한 기술을 통해 독창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 라스코 동굴 벽화 : 구석기시대 1만8천 년 전
프랑스 도르도뉴 지역의 동굴 벽화 유적으로 동굴내부는 약 250미터에 걸쳐 사슴, 들소, 사람 등 다양한 그림이 발견된다. 그 중 동굴 천장에 그려진 길이 4~5미터의 ‘바이슨과 들소’그림은 지금까지 알려진 동굴 벽화 중 가장 크다.
이외에도 땅을 구르거나 뛰어오르는 들소, 강을 건너는 사슴무리 등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동굴내부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도구와 불을 밝히기 위한 등잔도 발굴 되었다. 특히 여러 개의 투창 촉이 ‘상처 입은 들소와 사람’그림 주변에 발굴되어 어떤 의식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괴베클리 테페 : 1만2천 년 전
튀르키예 남동부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거석 유적이다. 인간의 형상을 상징하는 T자형 기둥과 사자, 황소, 뱀, 새 등 동물이 사실감 있게 새겨진 기둥들이 원형을 이루고 있다. 수렵채집민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이 유적은, 의식을 치르는 장소 혹은 분산된 공동체의 모임장소로 추정된다. 제작했던 집단이 수렵채집민들이라는 점에서 특정한 공간을 중심으로 이동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 선돌과 열석 : 큰 돌을 세워두는 것으로 거석문화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 선돌은 종종 의식 장소나 무덤과 같은 지역을 나타내거나, 경계를 표시하고 신성한 장소를 표시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두 개 이상의 돌이 규칙적으로 배열되면 열석으로 구분한다. 계절의 변화, 달의 주기와 같은 천문학적 사건을 표시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환상열석 : 돌을 세워서 원형의 구조물을 만든 형태이다.
원형으로 돌을 세우고 주로 의례, 천문행사와 관련되는 특수의식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5천년 전후, 정착 농경사회에서 세워졌으며, 주로 서아프리카나 유럽에서 발견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북유럽인 스칸디나비아반도, 아메리카에서도 발견되어, 환상열석은 철기를 사용하는 시기까지 지속된다.
* 세네감비아 환상열석 : 신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 1천5백전 전~
서아프리카에 위치하는 감비아와 세네갈의 거석물로 살룸 강과 감비아 강을 따라 돌기둥이 350km 정도 이어져 있다. 라테라이트(홍토) 기둥으로 이루어진 둥그런 띠모양의 열석은 1천개가 넘게 밀집되어 있다. 매장터였던 사실은 명확하다. 이외에도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의식에 사용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지역의 환상열석은 약 1천5백년 전부터 2천년 동안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지만 거의 대부분이 선사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 스톤헨지, 에이브베리 거석 : 신석기시대 5천년 전
원형의 커다란 돌로 이루어진 유적으로 5천년 전부터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10km 떨어진 곳에 있는 암석에서 30개 정도의 거석으로 만들어 이동하였다. 만들어진 거석을 원형으로 세우고, 지붕돌에 홈을 파서 연결시켰다. 그리고 길이 1`3km의 도랑과 둑을 원형으로 설치하였다. 환상열석 바깥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힐스톤’이라 불리는 돌이 홀로 서 있는데, 하짓날 태양이 힐스톤을 통과하여 스톤헨지의 중앙제단을 비춘다. 이 때문에 농경 혹은 천체 관측용 유적이라는 의견이 있다.
* 터널식고인돌 :
평평한 돌을 길고 좁은 통로로 연결하여 만든 신석기시대 고인돌의 한 유형이다. 프랑스, 아일랜드, 몰타 등 유럽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 프랑스 카르냑 열석 : 신석기시대 6천년 전
프랑스 카르냑 지역에서 남아 있는 열석 군으로 크기는 낮은 것이 60cm, 가장 높은 것이 6미터인 선돌 3천 여개가 약 4km에 걸쳐서 분포한다. 메넥, 케르마리오, 케를레스칸 3개 구역으로 구분되며, 과거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열석 주변에는 터널식 고인돌 선돌 등 다양한 형태의 거석이 발견되었다. 그 중 가브리니스 무덤이 대표적으로 긴 무덤 길을 따라 23개의 석판에 나뭇잎, 도끼, 뱀 그림 혹은 다양한 반원의 동심원이 새겨져 있다.
* 로크 마리아케르 선돌 : 신석기시대 6천7백년 전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거석으로 총 19개의 선돌이 발견되었다. 가장 큰 선돌은 높이가 20미터 크기에 무게가 330톤이며, 선사인들이 사용했던 돌도끼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에르그라의 부서진 선돌로 불리는 선돌이 대표적인데 6천7백 전에 제작되고 6천 년 전에 부서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부서진 선돌은 다시 고인돌 제작에 사용되었는데 이런 이유로 선돌 주변에는 다수의 고인돌이 함께 관찰된다.
* 고인돌(돌맨)
한국은 물론 유럽과 중동, 인도 등 가장 넓게 분포하는 거석으로 무덤이나 의례 장소로 추정된다. 평평한 돌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돌로 구성된 것이 일반적이다. 터널 형태로 제작된 것은 신석기시대 유럽 지역에서 유행하며, 커다란 바윗돌을 사용하는 형태는 동북 아시아 청동기시대에 유행한다.
* 한반도의 고인돌
한반도가 위치한 동북아시아의 거석문화는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고인돌의 출현은 한반도에도 정착 및 농경 생활이 본격화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지배계층이 출현한 한국 청동기시대의 모습과 일본 중국 등 동북아시아 선사시대의 문화 교류 모습도 알려준다.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에서는 덮개돌이 큰 남방식 고인돌, 중국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서는 덮개돌이 납작한 북방식 고인돌이 많이 발견된다. 한국의 고인돌은 한 지역에 수백 기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고인돌의 제작 과정까지 상세히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도 고인돌은 다산을 바라는 민간신앙을 담고 있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돌을 믿고 돌에 기도하며 돌과 함께 살아오고 있다.
* 한반도의 암각화
한국에서 발견되는 기하문 암각화는 고인돌에 새겨진 경우가 많다. 의례적, 사회적 목적으로 지어진 고인돌은 기하문 암각화와 유사한 성격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무덤 안에서도 청동기시대 기하문 암각화가 발굴되는 모습을 볼 때, 그림이 그려진 바위는 역사시대에도 유효했던 특별한 의미의 돌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암각화박물관
* 반구대 암각화 개요
반구대 암각화는 태화강 상류의 지류 하천인 대곡천의 절벽에 있다. 너비 약 8미터, 높이 5미터의 판판한 암면에 집중적으로 그림이 새겨져 있으며 주변 10여 개의 바위에서도 그림이 확인된다. 절벽 윗부분이 처마처럼 앞으로 돌출되어 바위그늘을 이룬다.
암각화에는 약 3백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고래와 같은 바다동물과 호랑이, 사슴 같은 육지동물, 동물사냥과 고래잡이 그림 등 선사시대 사냥과 해양 어로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최초의 고래사냥.
* 바위그림
바위그림은 자연암면에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입지상 동굴벽화와 구분되는 개념이다. 바위그림은 물감을 사용하여 그린 암채화와 암면에 그림을 새겨서 표현한 암각화로 구분할 수 있다.
암각화는 자연 절벽이나 바위에 쪼기, 갈기, 긋기, 돌려파기 등의 다양한 수법으로 새긴 그림을 의미한다. 암각화는 석영과 같은 단단한 돌망치를 사용하여 직접 암면에 새기는 방법이 일반적이지만 암면의 상태에 따라 보다 다양한 도구가 사용되기도 한다.
* 신석기 시대의 반구대암각화와 유물
우리나라 동남해안 일대의 신석기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결과에 따르면, 반구대암각화는 지금으로부터 약 7천년~3천5백년 전 신석기시대 암각화로 추정된다.
2005년 창녕 비봉리 조개무지에서 배가 발굴되었으며, 2010년 울산 황성동 유적에서 고래사냥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작살이 꽂힌 고래뼈가 출토되었다. 이들 신석기시대 유적 출토유물을 통해 당시의 어로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다.
반구대암각화 그림과 유사한 신석기시대 유물로는 부산동삼동 출토 사슴문토기, 그물문토기, 조개가면, 양양 오산리 출토 얼굴상, 통영 욕지도 출토 맷돼지 토우, 울산 신암리 여인상, 울산 세죽리 패총(황성동`처용공원 옆) 물개 토우 등이 있다.
* 바다에서의 삶, 어로
신석기시대 다양한 형태 중 바다에서의 노동은 구석기시대와 뚜렷이 구분된다. 신석기시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어로는 어민의 생계양식과 생업경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해양어로는 4계절 내내 가능하였고, 수렵`채집이 가능한 자원이 풍부하여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해양어로는 그 방법에 따라 낚시, 그물, 작살, 채취, 함정 등의 방법이 있다.
* 바다 사람들의 삶
해양이라는 거칠고 위험한 환경과 자연의 변화에 좌우되는 삶에서 종교와 의례를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 토우와 조개가면 등의 의례구와 무덤이다. 일상생활과 생업활동을 통해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하여 각종 장신구를 만들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조개팔찌와 뼈로 만든 귀걸이다.
구석기시대 :
사람들은 불을 사용하였고 동물 뼈나 뿔로 만든 도구와 뗀석기로 동물을 사냥하며 생활하였다. 계절에 따라 동굴 입구나 바위그늘에 살거나 벌판에 막집을 짓고 무리를 지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시대 :
기원전 1만 년 전후, 마지막 빙하기가 물러가고 기후가 따뜻해져 순록처럼 무리를 지어 다니던 동물들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주변에서 물고기와 조개를 잡고 식물과 열매를 채집하기 시작하였다. 움집을 지어 정착생활을 시작하는 신석기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청동기시대 :
벼농사가 확산하여 본격적인 농경사회로 접어든다. 신석기시대보다 다양한 곡물과 가축들이 길러졌다. 사람들이 큰 집단을 이루면서 대규모 마을들이 생겨나고, 고인돌 같은 거석이 만들어진다.
* 울산사람들의 삶
울산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살기 좋은 곳으로 생업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선사시대 유적으로 확인되며 특히 청동기시대 마을유적과 논유적이 많이 조사되었다. 청동기 후기에는 집자리 유적이 많이 발견된다. 울산을 중심으로 동해 남부권에는 ‘울산식 집자리’라고 불리는 후기의 주거지로서 정방형 또는 장방형에 4개 또는 8개 정도의 기둥구멍이 대칭적으로 배열된 매우 표준화된 주거지에 배수구가 길게 설치되어 있기도 한다.
* 대곡천 주변 청동기 유적지
신화리와 교동리 유적 :
울주군 삼남면 일대에 위치한 신화리와 교동리는 울산 ktx 역세권 개발 사업으로 발견되었다. 신화리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유적층과 교동리에서 대규모 마을 유적이 발견되어 이들 지역에서 오랜 시간 사람들이 살아온 것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출토되는 유물과 무기류(석부 석촉 등)의 비중이 높고 그 다음이 농경구로 이 시대의 생활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삼정리 유적 :
울산광역시 두동면 삼정리의 하삼정 마을에서 대곡댐 건설공사로 이루어진 발굴조사로 확인된 유적이다. 지금까지 경주 주변에서 조사된 고분군 가운데 큰 규모이며 1천기가 발굴되어 그 밀집도가 높은 수준이다. 이 가운데 ‘나’지구 26호 목곽묘에서 비늘갑옷과 노형토기, 단경호, 철촉, 철모 등이 출토되어 이들 유물을 통해 4세기 중엽 경으로 편년된다.
* 청동기시대 암각화와 유물
청동기 시대 제작된 암각화는 부산 복천동, 밀양 산내, 밀양 신안, 사천 본촌리, 고령 지산동, 함안 도항리, 제주 광령리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암각화는 매장유적에서 출토되어 비교적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문양들은 석검, 청동검과 거울, 제의도구 등 청동기시대 유물에도 표현되어 있으며 농경의례와 관련된 일종의 상징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의 암각화는 동심원과 석검, 검 손잡이 문양, 여성의 상징 등이 있다.
* 고래종류
귀신고래 : 지금은 멸종 위기에 처한 고래. 회색 몸체 위에 따개비 등이 붙어 있어 알아보기 쉽고, 가끔은 바위처럼 보이기도 함. 배에 있는 주름의 길이가 짧고 개수가 적은 것이 특징. |
북방긴수염고래 : 배꼽 근처에 흰 반점이 있고, 내뿜는 수증기의 모양이 좌우로 갈라져 높이 솟아오르는 것이 특징.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는 세 마리의 북방긴수염고래가 그려져 있는데, 등 위에 분수 모양의 수증기가 그려져 있음. |
혹등고래 : 등에 혹이 있고 그 위에 작은 등지느러미가 있어 ‘혹등고래’라는 이름이 붙음. 배의 주름이 길고 가슴지느러미가 다른 고래에 비해 매우 길다. 이 고래는 머리가 아래를 향한 채 새겨져 있어서, 물 위로 뛰어올랐다가 다시 떨어지는 모습을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
* 수염고래와 이빨고래 고래의 종류는 크게 수염고래와 이빨고래로 나뉜다. 수염고래류는 입안에 커튼 같은 수염이 난 고래. 바닷물과 함께 먹이를 입속으로 삼킨 다음 물은 수염 사이로 뱉어내고 먹이만 먹는다. 귀신고래,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이빨고래류는 수염 대신 촘촘한 이빨이 나 있는 고래. 이빨을 통해 먹이를 잡아먹는데, 향유고래와 들쇠고래, 범고래가 이빨을 가지고 있다. |
* 고래 등의 분수 추운 겨울에 숨을 쉬면 물방울이 맺히는 것처럼, 고래 몸 속의 따뜻한 공기가 밖으로 나와 찬 공기와 만나서 분수처럼 보이는 것. 대왕고래의 수증기는 9m 높이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
* 고래 똥이 바다를 살린다 고래들은 바다 밑바닥에서 작은 새우를 닮은 크릴을 먹고 수면으로 올라와 똥을 싼다. 이때 크릴에 있던 철분이 고래의 똥과 함께 물속으로 퍼지고, 철분을 흡수한 바닷속의 식물성 플랑크톤은 다시 크릴의 먹이가 된다. 바닷속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고래가 많은 도움을 주는 셈. 최근 환경오염으로 고래의 숫자가 줄어들자, 과학자들은 인조 고래 똥을 바다에 뿌려 바다 생태계를 살리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
* 신석기시대 토기
신석기시대 토기는 인류 최초로 불에 구워서 만든 화학 발명품으로 운반이나 저장용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이 가능하다. 인간이 만든 이 발명품으로 인해 인간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지게 되었다.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것이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이다. 빗살무늬토기는 좁은 의미로 선이나 점 등으로 기하학적 문양을 장식한 토기만을 가르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융기문이나 자돌문, 압인문토기 등을 포함한 신석기시대 모든 토기를 지칭한다.
* 천전리 암각화
천전리 암각화는 전체 암면이 15도 정도 경사진 너비 약 10m, 높이 약 3m의 정방형 암면에 선사시대 암각화와 신라시대 세선화, 명문 등 780여개의 그림과 문자가 새겨져 있다.
암면 상부에는
각종 동물 문양과 동심원, 나선형, 물결문, 마름모 등이 새겨져 있다.
암면 하부에는
신라시대의 말을 탄 행렬 모습과 돛을 단 배, 용 등이
날카로운 금속도구로 새겨져 있다.
특히 신라 법흥왕 대 명문이 새겨져 있어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작기법은 쪼기와 갈기, 긋기, 돌려파기 등으로 대곡리 암각화와 동일하지만 금속도구를 이용해 새긴 가는 선각 그림과 문자가 있다. 주암면 왼쪽의 돌을 이용해 동물그림은 신석기시대, 돌을 이용해 깊게 갈아 새긴 기하학적 그림은 청동기시대, 금속으로 새긴 세선화와 명문은 신라시대에 새겨진 것이다.
* 명문
천전리 암각화 주암면의 하단부에는 세선화와 함께 신라시대에 새겨진 약 200여점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문자는 한 글자로 이루어진 짧은 문자에서 19행이 넘는 장문의 문자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내용은 주로 언제, 누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기록하였다. 왕족의 행차부터 신라귀족, 화랑, 승려, 지배층 여성들이 끊임없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문자 중 가장 이른 시기인 계사명(453년) 이후부터 개성3년명 838년까지 기록이 남아 있다.
453년 : 대형가가 다녀가다. 계사명, 눌지왕 37년 514년 : 신라 법흥왕 즉위 525년 : 갈문왕과 이사추어랑이 다녀가다. 을사명 법흥왕 12년 528년 : 신라의 불교 공인 |
539년 : 갈문왕의 부인 지소부인이 아들 심맥부지(진흥왕 되기 전)를 데리고 오다. 기미명 법흥왕 25년 540년 : 신라 진흥왕 즉위 543년 : 소서의 부인 조덕도가 놀러오다. 계해명 진흥왕 4년 838년 : 문암을 보러 오다. 민애왕 원년 |
* 세선화
천전리 암각화 주암면의 하단부에 인물, 기마행렬, 말, 배, 용 등 그림의 대상을 간략한 선으로 나타낸 세선각화가 있다. 그려진 시기는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함께 새겨진 명문을 바탕으로 가장 이른 시기인 계사명(453년) 이후부터 1세기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
용 : 머리부터 꼬리까지 비늘무늬가 정교하게 그려진 용을 포함해 여러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신라인에게 용은 건국신, 나라를 지켜주고 비를 내려 풍년을 기약할 수 있게 하는 신수 등 특별한 의미를 지닌 존재로 암각화에 새겨진 용은 당시 사람들의 신앙적 주술적 염원이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 기하학적 그림
천전리 암각화 주암면의 윗부분에는 동심원, 타원형, 마름모 등 기하학적 그림이 단독 또는 가로, 세로 방향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기도 하며, 두겹, 세겹으로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그림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지만 주로 해, 천둥, 비 등 자연현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청동기시대 농경민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주술의례의 결과물로 추정된다.
마름모 : 물결무늬. 암각화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뚜렷하게 새겨진 것이 마름모로 단독, 횡 또는 종으로 연속적 또는 세 겹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름모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는데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의례와 관련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은행알 : 음문그림. 암각화에 새겨진 세로 타원형 중앙에 선으로 표현되어 은행 알 같은 형태의 그림은 식물의 열매 또는 여성의 생식기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음문은 일부 표현만으로도 여성을 대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다산과 풍요의 염원을 이룰 수 있다는 주술적 믿음과 관련하여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심원 : 소용돌이그림. 암각화의 동심원은 해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되며 천전리 암각화뿐만 아니라 대구 진천동 입석 고령 양전동 암각화, 미량 신안4호 고인돌 등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동심원이 확인된다.
굽은 무늬그림 : 번개, 물결
* 대전 둔산 선사 유적지
둔산 선사 유적지는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친 복합 유적이다. 해발 60미터인 언덕 남쪽 꼭대기에는 구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있었고, 해발 50미터 정도 되는 북쪽 경사면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구석기 시대 유적에서는 구체적인 유구가 없이 유물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차돌로 만든 긁개, 몸돌, 격지 등이 발견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으로는 바닥이 평평한 둥근 움집 15기가 있다. 유물로는 한강 유역 계통의 빗살무늬 토기 조각들과 그물추와 보습, 망치돌 등이 있다. 이로 보아 신석기 시대 중기(기원전 3천년 ~ 2천5백년)의 주민들이 갑천 유역에서 원시 수준의 농경과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화덕 자리가 한쪽에 치우쳐 있는 가락동식 집터이다. 이런 모양의 집터는 차령 남쪽과 금강 유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유물로는 바닥이 납작하고 겹아가리 형식을 한 가락동식 토기와 돌칼, 화살촉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지에서는 구석기~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어 대전지역의 선사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유적지의 가치가 높다.
* 청동기 시대 움집 1호
이 움집터의 깊이는 70cm 내외이고 평면은 긴지름이 동서 방향인 직사각형으로, 넓이는 약 30제곱미터 정도이다. 서쪽의 짧은 변 가까운 곳에 깬 돌을 덧붙여 만든 두 개의 화덕이 있고 양쪽 긴 변에 6`8개, 동쪽의 짧은 변에 4`5개의 기둥 구멍이 있다.
청동기 시대 전기 토기의 특징인 겹아가리 토기 조각을 비롯하여
돌끌, 반달칼 조각, 석촉 조각, 돌도끼 등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 청동기시대 움집 2호
이 움집터는 깊이가 약 30cm 정도로 1호 집터보다 얕으며 넓이는 39제곱미터 정도이다. 화덕 자리는 남아 있지 않고, 양쪽 긴 변에 5개, 짧은 변에 4개의 보조 기둥이 있고, 장축으로 돌 3개씩으로 만든 주춧돌 두 줄이 있다. 서울 가락동에서 이런 형태의 움집터가 처음 발견되어 이런 집터를 가락동식 집터라고 부른다.
겹아가리토기, 반달칼 조각, 돌 화살촉, 돌칼 조각 등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 문의문화재단지
* 동굴유적 : 구석기 사람의 보금자리, 동굴
건축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구석기인들에게 동굴은 따뜻한 피신처였으며, 비바람을 피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구석기 사람들에겐 소중한 집터였다. 동굴은 온도와 습도가 일정하여, 겨울에는 바깥보다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였다. 또 눈보라와 비바람, 사나운 짐승을 피하기에도 좋았다. 동굴 한가운데에는 대개 땅을 파거나 돌을 쌓아 화덕을 만들었고 화덕 주위에 둘러앉아 차가운 몸을 녹이고 동물 살코기를 익혀 먹었다. 발굴된 동굴 대부분에서 사슴, 곰, 멧돼지들의 뼈가 발견되었다. 한국에서 구석기인들이 주거지로는 청주의 두루봉동굴, 제천의 점말동굴, 제주의 빌레못동굴 등의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이런 동굴에서는 그들의 생활`예술`종교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많이 발굴되었다.
* 두루봉 동굴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노현리 시남마을 동남쪽의 석회암 채굴장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의 동굴유적으로, 많은 유물들을 찾아냈다. 여러 굴로 이루어진 두루봉 동굴유적은 각기 다른 종류의 구석기문화 자료들이 발굴되어 아시아 구석기문화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석기를 이용하여 잡은 많은 멸종된 짐승뼈 화석과 뼈연모 등이 모두 한 유적에서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되며, 청주지역에서 발굴된 최초의 구석기 유적으로 금강을 따라 형성된 구석기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 인류의 출현
고생대를 제1기, 중생대를 제2기, 신생대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앞 시기를 제3기, 뒷 시기를 제4기라고 한다. |
제4기도 두 시기로 나뉘는데,먼저 홍적세가 있었고, 그 다음부터 현재까지를 충적세(완신세)라고 한다. 구석기 시대는 신생대 제4기 홍적세와 거의 일치한다. 홍적세 때 인류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
우주의 나이는 150억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인류의 출현은 약 4백만 년 전이다. 우주의 나이를 1년으로 가정한다면, 인류가 지구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12월 31일 오후 다섯 시경이 되는 것이다. 인류는 이날 자정을 5분쯤 남기고 등장하였다. |
인류의 역사는 우주, 전체의 역사에 비하면 촌각에 불과하지만, 인류 등장 이후 4백만 년 동안 지구 표면에는 그 이전 수십억 년보다 훨씬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 같은 변화를 몰아온 주인공은 인간이라는 동물이었다. |
* 불의 발견 : 위대한 발견, 불
인간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거나 화산이 폭발할 때 불이라는 것을 보았다. 인간은 신중하게 불을 관찰했고, 나뭇가지를 비비거나 부싯돌을 부딪쳐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인류는 불을 사용함으로써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불을 두려워하는 사나운 짐승들의 접근을 막아 몸을 보호할 수 있었다. 또한 불은 어두운 밤을 밝힐 수 있게 되면서 활동시간을 늘리는데 도움을 주었고, 사냥한 고기를 익혀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의 음식 또한 변화되었고 인간의 수명에도 영향을 주었다.
* 두루봉 동굴 출토 유물
쌍코뿔이 : 두루봉 처녀굴에서 쌍코뿔이뼈가 출토되었다. 마지막 빙하기가 시작되기 전 기후가 따뜻했을 때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갈비뼈와 등뼈에서 자른 자국이 확인되어 쌍코뿔이를 잡은 뒤 도살행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동굴곰 : 두루봉 처녀굴에서 큰 꽃사슴뿔과 함께 출토되었으며, 곰뼈와 사슴뼈를 의도적으로 배치한 듯 발견되었다. 이것은 당시에 두루봉에서 의식행위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연대설정의 기준이 되는 표준화석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흥수아이 : 흥수아이를 통해 본 구석기 장례문화
1983년 흥수굴에서 발견된 흥수아이는 편편한 석회암 낙반석 위에 누워있었는데 일부러 시신을 바로 펴놓은 후 고운 흙을 뿌렸다는 사실이 관찰되었다. 상당히 높은 지대인 석회암 동굴에 국화꽃이 자생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국화꽃은 장례를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곳에서 꺽어왔다는 추정이다. 이것으로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에도 매장 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흥수아이를 통해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그냥 골짜기 깊숙한 곳에 던져두지 않고, 죽은 사람을 위해 꽃을 바치며, 형식을 갖추어 애도할 줄도 알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인류의 이동경로(추정)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탄생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것인지 아니면 세계 곳곳에 자리잡고 있던 호모 에렉투스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다.
현재의 인류는 아프리카에 출현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1십만 년 전 쯤에 아프리카 남부에서 탄생한 현생 인류는 발달한 지능과 뛰어난 도구 제작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1만 년 전 쯤에 전 세계로 퍼져 살게 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 구석기 시대의 생활
구석기 시대에는 자연에서 모든 의식주를 해결하며 살았다. 3~10명 가량 무리를 이루어 떠돌아다니며, 경험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무리를 이끌었는데, 이는 권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평등한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동굴 주변에서 채집과 사냥으로 조달할 수 있는 먹거리가 떨어지면 새로운 식량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이 시대 사람들은 먹거리와 계절에 따라 이동생활을 하였다.
* 채집과 사냥
채집 : 모든 먹을거리를 찾아서 : 구석기인들은 숙련된 지도자와 함께 동굴 밖으로 채집을 나갔다. 농사를 지을 줄 몰랐던 구석기인들은 산과 들에서 구할 수 있는 풀이나 솔잎, 더덕, 도라지, 칡, 대추 밤 등을 먹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채집은 자연이 제공할 수 있는 온갖 먹을거리를 모으는 활동이었다.
사냥 : 단백질을 찾아서 : 채집활동만큼 사냥도 점점 더 중요해졌다. 사냥기술이 발달해 짐승을 더 잘 잡게 된 인류는 고기로 배를 채워 마지막 빙하기의 추위를 이겨낼 수 있었다.
* 구석기시대의 한반도
구석기시대의 한반도 지형 : 구석기 시대는 극지방에 두꺼운 빙하가 존재하던 시대로 해수면이 지금보다 낮아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대륙과 일본열도가 육지로 연결되어 인류는 물론 동물들의 이동이 자유로웠다. 이 시기는 빙하기로 날씨는 지금보다 추웠으며 덩치가 큰 대형 포유류들이 살고 있었다.
한반도의 빙하기 : 빙하기에는 지구의 많은 부분이 얼음으로 덮여 있어서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 빙하기 사이에는 간빙기가 있어서 기후가 따뜻해지고, 빙하가 녹고 많은 비가 내렸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것은 약 1만 년 전이었으며, 그 다음부터 다시 지구가 따뜻해졌다. 지구가 따뜻해지자 빙하가 녹게 되어 지구상의 바다 수면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빙하기 때보다 바다는 넓어지고 육지는 줄어들었다.
* 소로리 볍씨
소로리 구석기시대의 토탄층에서 볍씨가 발굴되고 그 이전의 층에서는 유사벼가 발굴되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볍씨는 중국 화북지방으로 1만5백년 전으로 기록돼 왔는데, 그보다 3천여 년이나 앞선 소로리 볍씨가 발견된 것이다.
고고학에서 볍씨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농경사회를 이루었던 구석기시대의 문화와 기원을 설명할 수 있으며, 고대의 쌀은 현대의 쌀과 다르기 때문에 벼의 진화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 소로리 구석기 유적(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소로리에 위치)
이곳에서 구석기문화층과 토탄층이 조사되었는데,
소로리 토탄층의 형성 시기는 홀로세 이전의 층위로
마지막 빙하기 후기의 기후와 식생 등 자연환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지표조사시 후기 구석기문화층에서는 잔손질된 주먹대패`긁개`밀개`홈날`톱니날`뚜르개 등 약 2천 여 점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이 층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1만5천년 전의 볍씨가 발견되어 크게 주목받았다. 이 유적은 중부 내륙지역의 후기 구석기 문화와 자연환경, 벼의 기원과 진화과정 등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고고학적 기준을 제시하여준다.
* 양산시립박물관
구석기 : b. c. 38000 : 양산지역 인류 등장 / 양산 사송 유적 - 후기 구석기 출토 |
신석기 : b. c. 4000 : 빗살무늬토기인들의 남하 / 금곡 율리패총이 가까움 신암리유적 : 덧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울주군서생면 신암리) |
청동기 : b. c. 8~9세기 : 농경문화의 정착 / 소군장세력 등장 신기동, 북정동 고인돌(지석묘) / 신평유적, 소토리유적 |
* 양산지역의 선사문화
선사시대(bc 2000/1500~bc 400년 경)라 함은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시대, 즉 문자 기록이 아닌 남겨진 유물이나 건축물 등의 흔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시대를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연경관이 좋은 곳, 햇빛이 잘 드는 곳, 자연재해의 피해나 영향을 받지 않은 생활하기 편리한 곳에 터전을 잡기 마련이다. 특히 양산은 낙동강의 잦은 범람은 넓은 습지와 같은 형태가 형성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교적 범람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에 마을을 형성하고 사람들의 집단생활이 시작되었다. 때문에 양산의 선사 유적들은 주로 양산천과 회야강 등 강을 끼고 펼쳐진 평야나 나지막한 구릉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양산의 대표적인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완만한 구릉에 위치한 하북면 신평 지산리, 지내리, 순지리유적, 회야강 일대의 평산리 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집자리부터 삼한시대 무덤까지 대거 확인되어 선사시대 양산의 주거문화를 이해할 수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소토리, 신기리 등지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현재 1~2기 정도가 남아있으나 과거에는 주변에 무리지어 분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소토리 유적은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무덤부터 통일신라,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어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터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양산의 최초 구석기유적 - 사송 유적
사송유적은 양산시 동면 사송-내송리 일원에 공공주택지구를 건설하기 위한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유적은 경부고속도로를 기준으로 북동쪽과 남서쪽으로 크게 나뉘는데 동면 소재지에서 노포사송로를 따라 부산방면으로 2~3km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를 한 결과 D2지점에서 양산지역 최초로 후기구석기시대(bc 38000~36400)에 해당하는 몸돌, 돌날몸돌, 좀돌날몸돌, 돌날, 긁개, 홈날, 새기개, 복합석기 등 128점의 뗀석기가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유물층에서 출토된 유물은 74점이며, 지표 및 교란층에서 수습된 유물은 54점이다. 그 외에도 청동기시대 집자리 18동, 통일신라시대 우물, 조선후기에 해당하는 토광묘, 수혈유구 등 전 시기에 걸쳐 다양한 유구가 존재한다.
* 양산 소토리 유적 : 청동기
소토리 유적은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일원. 유적은 소토리 소노 청동기 주거지 유적과 소토리 소노 지석묘, 소토리 송국리 문화집락 유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소토리 소노 지석묘 유적은 청동기시대 묘 11기를 비롯하여 주거지 2동 등이 확인되었다. 묘제는 석곽묘 9기, 석관묘 1기, 토광묘 2기이다. 3호 석곽묘는 부장칸을 따로 만들고 그 내부에 적색마연호1점을 매납한 특징을 보인다. 4호 석곽묘는 석곽 안에 다시 석관을 축조한 특징을 지닌다. 9호 석곽묘의 경우 청동기시대 주거지 1호와 중복으로 만들어졌다.
소토리 유적의 묘제 축조시기는 출토된 유물을 통해 청동기시대 후기로 추정된다. 유적에서 확인된 토기와 석검, 석촉 등은 양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후기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 양산 신평유적 : 청동기 ~ 삼한시대에 이르는 복합유적
양산 신평유적은 1977년 지표조사 후, 통도환타지아 유원지 건립에 따라 1992년 발굴 조사되었다. 이곳은 청동기시대부터 삼한시대에 이르는 생활유적과 분묘유적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유적지이다. 유적은 순지리와 지내리 일대의 완만한 구릉에 위치해 있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21동과 삼한시대의 묘제인 옹관묘 6기, 토광묘 1기, 석관묘 1기가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구릉 정상부를 중심으로 중소형 주거지 2~3기가 무리지어 분포되어 있었다. 형태는 방형과 장방형의 수혈주거지가 주류를 이룬다. 옹관묘는 구릉의 동남단 급경사면에 거리를 두고 분포되어 있고 주옹과 부옹의 합구식이 많으며, 단옹만 출토된 것도 있다.
* 신기동 지석묘(계급발생), 평산 주거유적 : 청동기시대
양산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낙동강 일대의 청동기문화와 관련이 깊으며 기원전 5~6세기 경부터 붉은간토기, 민무늬토기 계통의 농경문화가 시작되었으며, 점차 부가 축적되면서 지석묘(고인돌)이 축조되는 등 신분제 사회를 이루게 된다.
* 동삼동패총 전시관
* 동삼동패총 전시관 : 어린이용 자료( 8천 년 전 ~ 4천 년)
1. 지금으로부터 1만2천 년 전 쯤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의 기후가 오늘날과 비슷하게 되자, 산과 바다의 환경도 변하고 먹을거리가 풍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이동생활을 하지 않고 일정한 장소에 머물며 사는 정착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2. 신석기시대 사람들도 처음에는 구석기시대와 같이 동물사냥, 물고기잡이, 조개잡이, 나무열매나 뿌리를 채집하여 먹을거리를 구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농사를 짓고 가축도 기르게 되었습니다. |
3. 신석기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여러 가지 음식물을 삶아먹거나 저장하기 위한 토기를 널리 사용하였는데, 사람들은 여기다 여러 가지 무늬로 장식도 하고 필요에 따라 다양한 크기와 형태를 만들어냈습니다. |
4. 신석기시대에 중요한 생활도구는 돌을 소재로 만든 석기였습니다. 구석기시대에는 주로 때리거나 떼내서 석기를 만들었는데, 신석기시대에는 돌을 자르거나 갈아 만든 간석기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석기시대에 비해 신석기시대의 석기는 용도에 딱 맞는 모양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
5. 신석기시대 유적이 많이 발견되는 곳은 바닷가나 강가. 이곳은 물과 식량이 풍부하다. |
6.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바다를 매우 적극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그 증거로 남은 것이 바닷가나 강어귀에서 발견되는 패총이지요. 패총은 당시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질이 겹겹이 쌓여서 만들어진 유적입니다. 우리말로는 조개무지(무덤)라고 합니다. |
7. 옛날 신석기시대 사람들도 생활공간을 합리적으로 나누어 이용했나 봅니다. 음식물쓰레[기(조개껍질, 동물뼈, 생선뼈 등)와 생활쓰레기(토기조각, 화살촉, 낚시바늘 등)를 마을 한쪽에 장소를 정해서 그곳에만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패총은 오늘날의 쓰레기장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8. 그런데, 패총을 이루고 있는 조개껍질은 토양을 산성에서 알칼리성으로 만들어 동물뼈, 생선뼈 같은 것들이 썩지 않고 몇 천 년 동안 남아 있게 됩니다. 그리고 패총 안이나 그 가까이에서 무덤, 집자리, 화덕자리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
9. 동삼동패총은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한은 패총유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국가 사적 제26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10.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주로 해안가나 강변에 정착하여, 땅을 얕게 파고 기둥을 세워 지붕을 얹은 움집을 지어 생활하였습니다. 돌도끼는 집짓기에 필요한 나무를 베거나 다듬을 때 사용한 유물. |
11. 사냥은 신석기시대 사람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식량 확보방법이었으며, 풍부한 단백질을 섭취할 수도 있고 털과 가죽, 뼈도구와 장신구의 재료를 얻을 수도 있었지요. 화살촉은 사냥에 사용한 도구. |
12. 패총에서 출토되는 조개껍질과 생선뼈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수산자원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용했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동삼동패총 사람들은 어떤 생선과 조개를 주로 잡아먹었는지 동삼동패총에서 출토된 생선뼈와 조개껍질. 생선 : 참돔, 방어, 상어, 돌고래 등 조개 : 굴, 가리비, 개조개, 백합, 전복, 홍합, 보말고둥 등 |
13.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열매나 뿌리 같은 야생식물도 채집하여 먹거리로 이용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신석기유적에서는 도토리가 출토되어 중요한 식량이었습니다. |
14. 자연에 의해 주어진 것만을 먹거리로 이용하였던 사람들은, 신석기시대 중기 무렵이 되자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는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동삼동패총의 집자리에서 불탄 조, 기장과 개뼈는 신석기시대의 농경과 목축의 출현을 잘 말해주고 있는 자료입니다. |
15. 돌보습은 농사를 짓거나 집을 만들 때 땅을 파는 도구. 갈돌과 갈판은 도토리 같은 견과류나 잡곡 같은 것들을 갈아서 요리. 오늘날 맷돌과 비슷한 도구. |
16. 조리시설로 돌을 모아 둥글게 만든 후 불을 때서 뜨겁게 달궈진 열을 이용하는 화덕이 있었습니다. 이런 시설을 이용하면 음식물을 불에 그을리거나 태우지 않고 잘 익힐 수 있었습니다. |
17. 뼈바늘 : 당시 사람들도 실을 잣고 옷을 만들어 입었던 것을 상상. |
18. 동삼동패총에서 나온 갖가지 장신구들의 재료 귀걸이 : 흙 / 뒤꽂이 : 동물뼈 / 목걸이 : 상어의 척추뼈, 매의 발톱, 맷되지의 송곳니 팔찌 : 투박조개 / 발찌 : 돌고래, 수달, 너구리의 이빨 |
19. 고기잡이를 위해 먼바다로 나간 동삼동패총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고기잡이를 하러 나온 저 바다 건너 일본땅에 사는 사람들과 만나 서로 알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교환해서 사용했는데, 동삼동패총에서는 이렇게 일본땅에 살았던 신석기사람들로부터 받은 조몬토기, 흑요석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
20.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천재지변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 식생활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여러 가지 의례도구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큰가리비조개로 만든 조개가면입니다. 또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모든 자연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으며, 특정동물을 숭배하기도 하였습니다. 동삼동패총에서 나온 곰모양 토우는 이러한 신앙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
* 습지(인터넷 자료)
사람들은 습지에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살았다. 노력을 많이 들이지 않고 조금만 움직여도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는 이른바 가성비가 좋은 삶터였다. 낙동강이나 한강 같은 큰 강 주변은 큰 물이 지면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기에 살 수가 없었다. 2천년 ~ 1천5백년 전 낙동강변에 조성된 가야의 옛 터전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고령 지산동고분군 : 제1지류 회천과 제2지류인 안림천`내곡천 합천 옥전고분군 : 제1지류 황강과 제2지류 성산천 함안 말이산고분군 : 제2지류 함안천과 제3지류인 신음천 창녕 교동과 송현군고분군 “ 제1지류 창녕천과 제2지류 남창천 |
바닷가의 경우도 장애물이 없이 트여 있으면 파도가 거세서 살기 어려웠다. 해상교역으로 일대 세력을 이루었던 경남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고성 송학동고분군은 옛 김해만과 옛 고성만의 안쪽 깊숙한 데에 자리잡고 있다.
이렇듯 사람들은 습지의 일부에 빌붙었을 뿐인데도 그보다 나은 삶터는 없었다. 제1지류와 제2지류가 만나면 강물의 흐름이 느려지기 때문이다. 강물과 함께 떠내려온 자갈`모래`흙들이 쌓여 기름진 땅이 되어주었다. 기세찬 흐름도 잔잔해지면서 먼 거리까지 배를 타고 나갈 수 있도록 안전한 물길도 보장해 주었다.
습지는 산속과 달리 넉넉한 물과 풍성한 초지를 두루 갖추고 있다. 멧돼지나 노루 고라니가 대표적인데 고라니는 영어 이름이 water deer일 정도로 물을 좋아한다. 호랑이가 먹을거리 풍부한 곳, 습지를 찾는 이유이다. 게다가 갈대밭`억새밭 같은 습지는 시야까지 트여 있어 사냥하기에도 좋다.
* 비봉리패총전시관
비봉리패총에서는(8천년 ~ 4천년)
우리나라 최고, 최초의 수식어를 붙인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습니다.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의 발견, 최초의 똥화석 출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망태기와 목기, 가장 오래된 동물무늬 토기인 멧돼지무늬 토기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비봉리패총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최초의 내륙 패총이자 저습지 유적입니다. 해수면의 변동에 의해 습지화된 환경에서 나무, 풀을 비롯하여 유기물(동물 뼈`식물 유체`씨앗류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토기와 석기를 중심으로 연구되던 신석기시대 문화를 생업이나 생태계 등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채집(도토리`가래`솔방울`조개 등), 어로(바다생물`민물생선), 사냥(사슴`멧돼지), 가축사육(개)와 관련한 구체적인 증거물이 확인되어 당시 먹거리 획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먹거리의 저장(해안선을 따라 위치한 도토리 저장시설), 가공(갈판`갈돌), 조리(토기 내면에 부착된 양파류의 탄화물 등)의 모든 과정과 먹거리가 구체화되었습니다.
퇴적물 및 저장공 분석을 통해 낙동강 중`하류 혹은 그 지류(현재의 창녕`밀양)까지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바닷물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 비봉리패총 전시 안내 책자에서
비봉리패총은 낙동강의 제1지류인 청도천이 비봉마을에서 흘러내리는 이름 없는 제2지류와 합류하는 자리에 있다. 북쪽에는 월봉산이 자락을 펼치고 마주 보는 남쪽에는 비룡산이 솟아 있다. 동쪽으로 청도천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면서 마을서 나오는 개울물을 받아들인다.
2007년 사적으로 지정된 비봉리패총은 지금으로 치면 쓰레기장이었다. 먹고 남은 뼈나 껍데기를 쓸모가 없어진 생활용품과 함께 내다버렸던 것이다. 8천년 전부터 4천년 전까지 인간들이 정착해서 생활했던 증거물이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7700년 전 통나무 속을 파내어 만든 소나무 쪽배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똥 화석과 신석기인들의 예술 감각을 보여주는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조각도 나왔다. 찌르개와 그물추, 돌도끼와 갈돌, 노(삿대), 망태기와 낚싯바늘도 나타났다.
먹이로 삼았던 재첩`굴`꼬막 껍데기와 상어`가오리`잉어(물고기), 사슴`멧돼지`개`늑대`호랑이`소`물소`고라니`쥐(네발짐승), 꿩`오리(새) 등의 뼈와 도토리`가래`솔방울`조 같은 식물이 나왔다. 등고선을 따라 이어지는 구덩이도 90개 가량 확인되었다. 당시는 바닷물이 드는 자리였는데 짠물에 도토리를 담가 떫은맛을 내는 탄닌 성분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신석기시대 비봉리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다. 청도천 쪽에서 잉어를 거두고 민물과 짠물이 섞이는 데서 재첩과 꼬막을 잡았으며 갯벌에서는 조개를 캤다. 때로는 쪽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상어나 가오리도 잡았다. 비룡산`월봉산에서는 도토리`솔방울`가래를 따고 사슴`멧돼지를 사냥했으며 산과 산 사이 들판에서는 조 같은 곡물 씨앗을 얻었다.
움막은 지금도 마을이 형성되어 따뜻한 남향 산기슭에 마련했으리라. 움막`망태기는 갯벌에 자라는 갈대`물억새 따위로 만들 수 있었다. 비봉리유적은 인간의 삶이 습지에서 비롯되었음을 제대로 알려주고 있다.
* 조동리 선사유적(충주시 동량면)
조동리유적은 청동기문화층과 신석기문화층이 위, 아래로 구분되어 발달되어 있었다. 신석기문화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불땐자리가 확인되었으며 청동기문화층에서는 네모꼴의 집터, 불땐자리, 움, 돌무지유구 등이 조사되었다. 또한 민무늬`붉은간토기와 돌도끼`보습`그물추 등 많은 석기류가 수습되었다. 집터에서는 쌀`보리`밀`귀리`수수 등 일 천 알이 넘는 낟알이 확인되어 당시 조동리 선사인의 식생활연구와 선사 농경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 조동리의 석기
땅을 파는데는 돌괭이, 돌보습, 나무를 자르거나 다듬을 때는 돌도끼, 돌대패, 사냥이나 무기로는 간돌검, 화살촉 등이 사용되었다. 그 외 연모를 가는데 썼던 숫돌과 불을 일으켰던 발화석 등 다양한 용도의 석기가 제작되어 쓰여졌다.
* 조동리의 토기
조동리 유적에서는 일상생활에 사용한 다량의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빗살 등 여러 기하학적 문양이 표현되었고 기본형은 바닥이 뾰족한 토기이다. 민무늬토기는 모래나 돌가루가 섞인 태토로 한데가마에서 구운 것으로 항아리형, 바리형 등 여러 모양의 토기가 만들어졌다. : 굽잔토기
* 조동리의 농경생활
신석기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농경생활의 시작으로 채집경제 단계를 벗어난데 있다. 청동기시대에는 벼, 조, 보리, 수수, 콩과 같은 곡식농사를 짓는 농경이 본격화되었다. 농경 수확물은 안정된 생활을 이루게 하여 조동리 선사마을이 대규모 취락지로서 자리잡게 된 근간이 되었다.
* 조동리의 어로생활
한강변의 조동리유적에서는 그물추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당시 어로생활도 활발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물추의 크기는 2~10cm, 무게는 10~314g까지로 어로활동에 그물추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 (흙)그물추
* 다호리 유적(2천년 전)
비봉리 사람들이 쪽배를 타고 다녔을 바다(지금은 낙동강) 맞은편(직선거리 11km) 창원 주남저수지 옆에는 다호리고분군이 있다. 초기철기 시대 유적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풍부한 유물을 품은 곳으로 유명하다. 주남저수지 일대는 오랜 옛날부터 사람살이의 터전이었고 다호리고분군은 옛날 삶터의 뚜렷한 물증인 것이다.
언덕빼기에 앉은 다호마을이 배후습지(동판저수지)를 향해 흘러내리는 비탈의 우묵한 풀숲에 해당된다. 2천 년 전 ~ 2천1백년 전 무덤들로 화폐 구실을 했던 덩이쇠가 무더기로 출토된 최초 유적이다. 가야권역에서 가장 먼저 번영을 이루었다는 물증이다. 국제교역을 일러주는 중국제 청동거울과 중국 동전 오수전도 출토되었다.
활`화살촉`청동칼`쇠칼 등 무기와 쇠낫`괭이와 같은 농기구는 다호리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고유한 붓질 자국이 남아 있는 옺칠제품은 토종 옺칠 예술의 시작을 알려주었다. 붓과 긁개도 나와 눈길을 끌었는데 다호리 사람들은 평평하게 깍은 나무에 붓으로 글자를 적고 틀린 글자는 긁개로 긁어내 지웠다. 우리나라 문자 생활의 최초 증거물이다.
고분군 둘레에는 다른 유적도 많다. 산남저수지 한쪽 구석의 합산패총, 주남저수지 수문 주천강 시작 지점에서 700미터 가량 아래 주남돌다리, 숲 그늘이 대단한 천연기념물 신방리 음나무군, 커다란 바위들과 둘레를 감싼 당산나무가 울창한 모암 당산숲 등이다. 다호리고분군 이후 7세기까지 뚜렷한 흔적을 남기며 여기에 터잡고 살아온 이들이 남긴 문화`생태유적들이다.
* 국립김해박물관
* 신석기시대 배와 노
창녕 비봉리유적 신석기시대 문화층에서 발견된 배와 노입니다. 약 7700여 년 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남아 있는 배 조각의 길이는 최대 310cm, 폭은 62cm입니다. 200년 된 소나무의 속을 파내어 U자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돌자귀로 파내기 쉽도록 불에 그을린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습니다. 현재까지 출토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로 일본 조몬시대(일본의 신석기) 배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것입니다. 노의 몸통은 길쭉한 이등변삼각형을 띠는 날렵한 형태이고 손잡이 부분은 쥐기 쉽게 둥글게 만들었습니다.
* 강과 바다로 가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부족한 자원을 주변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얻었습니다. 때로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동남해안 일대 유적에서 발견된 흑요석과 일본 조몬토기는 일본 규슈지역과 교류했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투박조개로 만든 조개팔찌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대표 교역품 중 하나였습니다.
* 가장 오래된 삶의 흔적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돌을 깨뜨려 사냥과 채집 활동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찌르기, 자르기, 파거나 긁어내기, 빻기 등 다양한 용도에 맞는 뗀석기를 제작하였습니다.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돌을 이용했지만, 용도에 따라 특정한 돌을 골라 만들기도 했습니다. 커다란 석기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지고 정교해졌습니다.
* 지구가 생기고 4번의 큰 빙하기가 찾아왔습니다.
그 중 마지막 빙하기가 지금으로부터 약 260만년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20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최초의 인류(호모 에르가스테르, 호모 하빌리스)가 등장했습니다. 120만 년 동안 따뜻한 아프리카에서 살던 인류는 기후가 변화하자 점차 다른 지역으로 살 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인류가 내딛는 위대한 한 걸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환경 적응력이 뛰어난 만큼 다양한 식물과 동물 자원을 가까이에서 구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좋아했습니다. 그러한 자연환경을 찾아 한반도 동쪽 끝에 정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다
약 1만년 전 날씨가 점차 따뜻해지면서 한반도의 자연환경이 지금과 비슷하게 변해갔습니다. 활과 화살을 이용해 사슴, 멧돼지 같은 따뜻한 날씨에 사는 빠른 동물들을 사냥했습니다. 강가나 바닷가에서는 뼈나 돌로 만든 낚싯바늘과 작살, 그물을 이용해 다양한 먹거리를 확보했습니다. 망태기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사냥과 채집으로 얻은 먹거리를 넣어 두었을 것입니다. 돌로 만든 보습, 괭이를 이용해 땅을 일구며 농경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 멧돼지를 새긴 토기 조각
창녕 비봉리유적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토기 조각입니다. 보통의 신석기시대 토기와는 달리 표면에 동물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두 앞다리와 등에 난 뾰족한 털로 보아 멧돼지 종류로 추정됩니다. 멧돼지는 사슴과 더불어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선호하던 식량이자 가죽, 뼈 등 쓰임새가 다양한 사냥감이었습니다. 이 독특한 사례는 비봉리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사냥 성공에 대한 염원을 토기에 표현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망태기
신석기시대 사람들에게 채집활동은 여전히 중요한 먹거리 확보 수단이었습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물 줄기나 뿌리는 안정적인 식용자원이자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재료였습니다. 비봉리 유적 신석기시대 층에서는 갈대를 엮어 만든 망태기가 발견되었는데 실물 자료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갈대는 물가에서 구하기 쉬웠고 여러 갈래를 엮어 만든 망태기는 사냥하거나 채집한 먹거리를 담아 여기저기 옮기는 데 훌륭한 가방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 토기의 등장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진흙을 구우면 단단하게 변한다는 것을 터득하고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토기의 발명으로 어렵게 확보한 먹거리의 보관, 운반이 손쉬워졌고 조리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대략 1만 년 전에 출현한 토기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생김새와 무늬가 다양해집니다. 덧무늬, 눌러그은무늬 등 다양한 무늬 중에서도 무늬새기개로 그어 새긴 빗살무늬가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 발찌와 팔찌
통영 연대도 조개더미 유적에서 발견된 발찌입니다. 무덤 주인공은 장년 남성으로 키가 약 160cm 정도로 추정되는데 돌고래, 수달, 너구리 이빨로 만든 발찌를 오른쪽 발목에 차고 있었습니다. 팔찌는 투박조개로 만든 것이 많습니다. 투박조개는 표면이 매끈하고 단단하여 팔찌를 만들기 알맞을 뿐만 아니라 주로 얕은 바다의 모래밭에 서식한 덕에 구하기도 쉬웠습니다. 가덕도 신석기시대 공동묘지, 김해 수가리 조개더미 유적 등 남해안 일대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죽은 이의 손목에 끼워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 농경과 마을의 탄생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신석기시대 조`기장 위주의 소규모 잡곡 농사와는 달리 벼농사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면서 큰 규모의 마을이 생겨났습니다. 여러 채의 움집, 논과 밭 마을 전체를 두른 도랑이나 울타리가 청동기 시대 마을 풍경을 그려냈습니다. 농사가 가장 중요한 생업수단으로 정착하면서 땅을 일구고 수확하는 도구들도 발달하였습니다.
* 청동기시대 살림살이 - 돌로 만든 도구
농사가 청동기시대 중요한 생업수단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사냥과 물고기잡이는 여전히 중요한 먹거리 확보 방법이었습니다. 돌화살촉과 돌창, 그물추가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각종 생활 도구를 만드는데 나무는 이때에도 핵심 재료였습니다. 나무를 정교하게 가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도구가 발달했습니다. 조갯날 도끼, 자귀, 대팻날, 끌 등이 대표적인 목공구입니다. 옥돌을 다듬어 영롱한 빛깔을 내는 목걸이를 만드는 데도 돌로 만든 공구를 사용했습니다.
* 청동기시대 토기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사용한 그릇은 민무늬토기입니다. 민무늬라 하지만 아가리 곁면에 짧은 선이나 구멍 등 간단한 무늬를 새기기도 했습니다. 바리`대접`접시`항아리`독 등 필요한 용도에 따라 생김새가 다양하지만 바닥은 대체로 납작합니다.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와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른 특징을 보이며 꾸준히 사용되었습니다.
* 붉은간토기와 가지무늬토기
붉은간토기와 가지무늬토기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특별히 많은 공을 들여 만든 특별한 토기입니다. 붉은 안료를 개어 발라 문질러 윤을 내거나 독특한 방식으로 검은 가지무늬를 표현했습니다. 질 좋은 바탕흙을 사용한 데다 정성스레 만든 덕에 다른 살림살이처럼 투박하지 않고 세련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귀한 그릇으로 대접받았고 무덤의 껴묻거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 고인돌 - 농경사회의 기념물
농경사회에서는 물 대기, 씨 뿌리기, 수확하기 등 마을 전체의 단결과 공동 노동이 중요해졌습니다. 농경의 발달은 공동체 안팎으로 여러 갈등을 발생시켰고, 이를 조정하는 인물의 역할과 권위도 점차 높아졌습니다. 거대한 크기의 고인돌에 넣어 둔 돌칼과 돌화살촉은 이러한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일부 과장된 크기와 형태의 돌칼과 돌화살촉은 실용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점에서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음을 알려줍니다.
* 덧띠토기문화의 등장
덧띠토기는 민무늬토기의 아가리에 점토띠를 붙여 만든 것입니다. 아가리에 덧붙인 점토띠의 자른 면은 원형에서 삼각형으로 변합니다. 아울러 검은간토기, 굽다리접시, 한국식동검을 비롯하여 청동으로 만든 공구와 무기 등 새로운 물건들이 출현하였습니다. 무덤은 고인돌을 대신하여 개인의 권력과 위신을 보여주는 널무덤 위주로 변합니다. 삼각형 점토띠로 변할 즈음에는 새로운 철기문화도 유입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기나긴 선사시대의 막이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현상입니다.
* 국립대구박물관
* 한국의 신발 : 전시를 열며
‘신발’은 사람이 땅을 딛고 서거나, 걷고 뛰기 위해서 발에 신었던 물건을 통틀어 부르는 말입니다. ‘신’과 ‘발’이 합쳐진 말로 ‘신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신발은 발을 보호하고 기후를 극복하기 위해 신기 시작했습니다.
신발은 다양한 형태와 재료로 만들었으며, 차츰 제작 방법도 발달했습니다.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신발을 신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발을 보호하기 위한 신발은 점차 사회문화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패션의 완성은 신발’이라는 말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번 전시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신발까지 지역과 시대를 아우르는 신발을 다루었습니다. 기후에 따라, 직업과 신분에 따라, 때로는 특별한 날에 신었던 다양한 신발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 두 발로 선 사람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인류가 최초로 직립보행을 했다고 알려진 ‘루시’는 약 4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입니다. 탄자니아의 라에틀리 유적에서는 360만 년 전으로 알려진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인류는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키가 커지고 눈으로 보는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걷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이동 반경도 넓어졌습니다. 두 손으로 도구를 만들면서 인류 발전의 동력을 얻었습니다.
맨발로 걸을 수 있는 아프리카의 기후와 달리, 고위도 지역의 차가운 기온에서는 신발을 신어 발을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가죽과 식물로 신발을 만들어서 신었습니다. 신발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었습니다.
* 인류의 보폭 변화
인류는 직립보행하기 시작하면서 보폭이 차츰 넓어졌습니다. 키가 커지고 다리가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보폭이 커진 것입니다. 보폭이 넓어지면, 인류가 살아가는 행동반경이 넓어지게 되고, 그만큼 생존할 확률도 높아졌습니다. 인류는 네발 짐승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없었지만, 더 오래 더 멀리 걸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발의 진화, 신발의 탄생
인류는 두 발을 딛고 서서 생활하면서 손과 발의 역할이 나뉘었습니다. 손은 도구를 잡고 무언가를 던질 수 있도록 발달했다면, 발은 몸을 지탱하는 동시에 걷고 뛸 수 있도록 발달했습니다. 발은 28개의 뼈로 구성되었습니다. 아치형 구조를 이루며 손보다 길어지는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신발 중 가장 오래된 신발은 미국 오리건주에서 발견된 산쑥나무 껍질로 만든 것입니다. 이는 1만 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발을 보호하기 위해 그전부터 신발을 신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국 로프노르에서 발견된 3500년 전의 가죽신은 발목까지 감싼 모양으로 추운 날씨를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약 2천 년 전의 신발로 창원 다호리유적과 평양 채협총에서 발견된 칠기 신발이 있어 고대 사람이 신었던 신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 호모 사피엔스 인골 모형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 사피엔스는 사람속(homo)에 속하는 생물 중 현존하는 종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류의 진화 단계를 몇 가지로 구분하였을 때 가장 진화한 단계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등장하여 4~5만 년 전부터 유럽과 아시아로 확산되었으며, 1만 년 전에는 아메리카 대륙까지 퍼져 나갔다.
* 청동단추 : 영천 어은동. 원삼국시대
청동단추는 옷이나 가죽신을 장식하는 장신구이다. 고조선 유적으로 알려진 중국 심양 정가와자 무덤에서 이와 비슷한 청동단추 180개가 유골의 다리와 발 주위에서 발견되었는데 가죽 장화를 장식하는 데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원주박물관
* 구석기(기원전 약 200만 년 전 ~ 기원전 1만년)
구석기인들은 이동생활을 하면서 평등한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구석기시대 대표적 유물로는 주먹도끼와 슴베찌르개가 있으며 규석과 석영을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원주지역에서는 섬강변의 지정면 월송리, 안창리와 남한강변의 부론면 법천리, 흥호리 일대에서 찍개 및 주먹도끼가 출토되어 원주지역에서도 수만년 전부터 구석기인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 신석기(기원전 1만년 ~ 기원전 2천년)
신석기시대에는 정착생활을 시작하고,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어 사용하던 시기이다. 원주지역에는 그동안 부론초등학교 주변에서 빗살무늬토기편과 돌도끼 등의 유물만 수습되고 유적이 조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근 2010년 발굴 조사를 통하여 반곡동(혁신도시 부지) 유적에서 원주지역 최초로 신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되었다.
* 청동기(기원전 3천년 ~ 기원전 1500년)
청동기시대는 금속을 처음 사용하는 시기로 사유재산이 생기고 계급이 발생하는 시기이다. 또한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벼농사가 시작되었으며, 고인돌, 비파형동검, 거친무늬거울 등 청동기를 대표하는 유물이 다수 등장한다.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등장도 이때이다. 원주지역의 부론면 노림리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반곡동 유적, 문막 동화리 유적, 가현동 유적 등
춘천박물관
* 인류의 진화와 확산
인류는 진화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아프리카에서 유럽을 거쳐 점차 아시아와 한반도로 진출해 왔습니다. 구석기시대에는 빙하기와 간빙기가 여러 차례 반복되었는데, 한반도는 빙하 주변 지역이었지만 기후 변동에 따라 동식물 종과 분포가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특히 빙하기에는 바다 수심이 낮아져 서해가 육지가 되어 서해로 흘러드는 강이 중국의 강들과 연결되는 등 기후 변화는 동식물뿐만 아니라 인류의 삶 전반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 구석기시대 : 강원의 첫 인류
강원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0만 년 전 무렵부터입니다. 사람들이 주로 강변이나 해안 구릉에 거주하였고 찍개, 주먹도끼와 같은 뗀석기를 만들어 사냥과 채집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4만 년 전 무렵이 되면 새로운 석기 제작 기술인 돌날기술을 쓰는 사람들이 새로 유입되었습니다. 그들은 현생인류인 우리의 조상으로 백두산 지역으로부터 흑요석과 같은 좋은 석재를 들여오는 등 다른 지역과 활발히 교류하였습니다.
* 돌날기술 / 흑요석 : 4만년 전
현생인류가 약 4만 년 전 개발한 석기 제작 기술. 표준화된 형태의 돌날을 연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으며, 생산된 돌날은 다른 석기를 만드는 재료가 되기도 함. 화산 폭발 시 분출된 용암이 급속히 냉각되면서 형성되는 암석. 유리질로 결정구조가 없어 자유로운 격지떼기가 가능하며, 성분 분석에 의해 원산지를 알 수 있음.
* 사냥
처음으로 사냥을 시작한 인류는 호모에렉투스입니다. 하지만 체계적인 사냥이 시작된 시기는 약 4만 년 전. 현생인류가 던지는 창과 활을 발명한 이후부터.
*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도구와 생활 : 뗀석기 : 찍개와 주먹도끼 / 홈날석기 / 새기개 / 밀개 / 긁개
구석기시대에 가장 주요한 도구는 뗀석기였습니다. 이른 시기의 찍개, 주먹도끼로부터 가장 발달된 돌날석기까지 다양한 뗀석기들을 만들어 생활에 활용하였습니다. 뗀석기 용도는 석기의 크기, 모양, 날 형태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최근에는 날의 닮은 모습을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석기의 용도를 추정하고 있습니다.
* 구석기시대 유적의 층위 : 동해 노봉 유적
구석기시대에 사용하던 석기가 포함된 토양 위로 여러 시대의 퇴적층이 쌓인 상태를 보여줍니다. 자갈층의 존재는 과거 어느 때인가 하천이 이곳을 통과한 적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색상이 갈색에 가까울수록 추운 기후, 적색일수록 따스한 기후에 퇴적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위 아래로 길고 하얗게 보이는 줄은 빙하기에 형성된 얼음쐐기의 흔적으로, 추운 기후였음을 말해 줍니다.
* 신석기시대 : 따뜻함이 가져온 삶의 변화
약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사람들의 생활 방식도 변하였습니다. 강원 지역에 살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현재의 고성 문암진리 등지에서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강가나 바닷가에서 낚시를 하고 활과 화살을 만들어 작은 동물을 사냥했습니다. 이렇게 얻은 먹거리는 바닥이 평평한 토기에 요리를 하였고, 옷감을 짜 옷을 지어 입었으며 다양한 장신구로 치장했습니다. 또 춘천 교동동굴 유적의 예와 같이 장례 의식도 치렀습니다.
* 자연을 경영하여 얻은 먹거리
약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해수면이 높아지는 등 환경이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이런 변화와 함께 사람들은 바다를 물고기와 조개와 같은 먹거리를 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연 자원을 채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계획적으로 기르는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전에 없던 도구들을 창안했습니다. 신석기시대는 이처럼 자연을 적극적으로 경영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 익숙한 식량, 짐승의 고기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활을 사용해 작고 빠른 동물을 사냥. 영월 공기2굴 유적에서는 다양한 동물 뼈가 출토되었는데 약 40%가 사슴뼈이고, 노루, 고라니, 멧돼지 등도 나와 식생활을 짐작.
* 식량 창고, 바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초보적인 수준의 농경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사냥과 채집, 물고기잡이도 하였습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배 안에는 작살을 든 사람이 표현되어 있는데, 강원지역에서도 신석기시대 작살이 발굴되었습니다. 집터에서 무더기로 출토되는 그물추는 어로 활동이 활발했음을 알려줍니다.
*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정착 생활
먹거리를 얻는 방식이 변화하자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정착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주로 바닷가나 강가에 둥근 움집을 짓고 모여 살면서 작은 집단을 이루었습니다. 움집 바닥에 진흙을 깔아 단단하게 다졌고 집 한가운데에 둥근 화덕을 설치하여 난방과 조리를 하였습니다. 또 가장자리에 그물을 비롯한 각종 도구와 토기들을 보관하는 공간이 설치된 움집도 있습니다. 움집들 사이에는 구덩이를 파고 불을 피워서 토기를 구웠습니다.
* 추상화된 자연, 신석기시대 토기 문양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토기에 다양한 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통틀어 빗살무늬라고 합니다. 무늬를 만드는 방법은 점토 덧붙이기, 긋기, 찍기, 누르기 등이었으며 강원지역에서 나온 대부분의 토기에서 확인됩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토기 바깥면 전체에 각 부위별로 다른 무늬를 새겨 장식성을 높였습니다. 늦은 시기가 되면 무늬는 점차 줄어들어 토기 아가리 부분에만 단순한 빗금을 새겨 넣었습니다.
*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그릇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토기 표면에 장식이 없는 민무늬토기를 사용했습니다. 진흙에 굵은 모래를 섞어 표면은 거칠고 형태도 투박했지만 빗살무늬토기에 비해 더 단단하고 실용적인 토기로 발전한 것입니다. 간혹 무늬를 새길 때는 아가리 부분에만 단순한 빗금을 긋거나 구멍을 뚫었습니다. 특별한 용도의 토기는 별도로 정성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아주 고운 흙을 사용해 그릇을 만들고 표면에는 산화철을 바른 후 반질반질하게 갈아 만든 붉은간토기는 장례를 비롯한 각종 의례 활동에 사용하였습니다.
* 청동기시대 : 사회조직의 태동
청동기시대에는 금속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대규모 공사와 공동 노동이 발생하여 이에 대한 관리가 필요해지면서 계급이 생겨나고 대규모 마을이 형성되는 등 사회구조가 복잡해집니다. 주거 형태를 살펴보면, 기원전 8~7세기 강원지역에는 사각형 집터로 대표되는 천전리형 집터가 등장하였습니다. 이 시기 다른 지역에서 원형 집터 중앙에 기둥구멍이 있는 송국리형 집터가 나타난 것과 대비됩니다. 한반도 전역에서 확인되는 고인돌도 이 시기에 축조되며, 도랑을 갖춘 무덤도 만들어집니다.
* 도구의 전문화와 재활용
청동기시대에는 돌을 이용해 더욱 다양한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돌도끼는 나무를 자르는 도끼날과 가공을 위한 자귀날을 구분하여 썼고, 곡물 수확용 낫과 이삭만을 따기 위한 반달돌칼을 별도로 구분하여 제작`사용하였습니다. 단순히 집단의 규모만 커진 것이 아니라 활동도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한 부서진 토기를 그물추로 재활용하거나 부러진 돌칼을 수리하여 반복 사용하는 등의 지혜로운 모습도 엿볼 수 있습니다.
* 나무를 가공하는 여러 도구들 : 도끼, 자귀
마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나무울타리를 치고 생활에 필요한 집과 창고를 짓는 등 청동기시대 건축의 주재료는 나무였습니다. 나무를 베고 용도에 맞게 손질할 때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도끼나 자귀를 사용했습니다.
* 사냥도구에서 무기로 : 활
농경이 보편화되었지만 사냥은 여전히 식생활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구석기시대 말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활은 점차 위력적으로 발전하여 훌륭한 사냥 도구로 쓰임과 동시에 전투용 무기로도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활 : 춘천 천전리 유적과 정선 아우라지 유적. 화살대 수종 분석 결과 버드나무로 확인.
* 울타리 두른 청동기시대 마을
집단 규모가 대형화되면서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춘천 천전리 유적의 경우 집터 75동이 발견되어 당시 마을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마을에는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 시설이 필요해졌습니다. 마을 외곽을 둘러싸는 높은 목책, 환호, 외부 감시용 망루 등을 설치하여 주민과 가축을 보호하였습니다. 마을 바깥에는 농경지와 함정, 그리고 고인돌과 같은 무덤 영역이 있었습니다.
* 청동기 사람들의 무덤 : 고인돌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은 고인돌이지만 돌로 관을 만든 돌널무덤과 무덤 주변에 도랑을 두른 도랑 갖춘 무덤도 만들었습니다. 무덤 안에는 청동검과 거울, 간돌칼, 화살촉 등을 함께 묻었습니다.
* 조문국박물관
* 뼈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발굴을 통해가 가끔 동물이나 사람의 뼈가 출토된다.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의 동굴유적에서는 멸종된 동물의 뼈가 발견되고 현재와는 전혀 다른 추운 지방에 사는 동물과 더운 지방에 사는 동물 뼈도 발견되고 있어 우리나라의 기후와 동물의 생태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신석기시대에 주로 발견되는 조개무지에서 사람의 뼈가 출토되기도 한다.
이러한 동물이나 사람의 뼈를 통해 당시의 매장풍습이 밝혀지기도 하고,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키, 나이, 성별, 혈연관계 등은 물론 생활풍습과 먹거리 등을 추측할 수 있다.
*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오트트랄로피테쿠스 : 약 4백만 년 전 등장. 최초 원시 인류. 직립보행. 두 발로 대지를 디딘 최초의 동물이다. |
호모 하빌리스 : 약 250만 년 전 등장. 인류 최초로 돌을 도구로 사용. 인류가 손을 움직여 도구를 만들고 조작하게 된 것은 그들의 두 뇌를 정교하게 하고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호모 에렉투스 : 약 50만 년 전 등장. 베이징인, 자와인, 하이델베르크인. 동굴생활, 불과 언어 사용. 불을 쓴다는 것은 추운 지역에서도 살 수 있다는 것으로, 이제 인류는 아프리카를 떠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게 되었다. |
호모 사피엔스 : 약 20만 년 전 등장. 네안데르탈인. 언어의 구사와 예술행위가 시작되고, 집단 내외적으로 고도로 구조화`조직화된 양식의 사회적 행위를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 약 3~4만 년 전 등장. 현생 인류의 직접적 조상. 크로마뇽인, 상동인, 그리말디인. 이들이 새겨놓은 많은 조각상 및 동굴에 그려놓은 암벽화는 그들의 예술적인 수준과 다양한 경제활동, 신앙 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 구석기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차이는?
구석기시대는 인류 역사의 99%가 넘는 긴 기간을 차지하며 느린 속도로 문명이 발전한 시대이다. 도구는 나뭇가지나 동물 뼈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했지만, 특히 돌을 깨뜨려 다양한 석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약 1만 년 전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면서 깨트려 다듬은 돌을 갈아서 더욱 날카롭고 정교한 석기를 만들어 사용하게 되는데, 이것이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 구석기인들은 어떻게 도구를 만들었을까?
뗀석기(타제석기)는 돌을 깨서 만든 도구로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 모루떼기, 직접떼기, 간접떼기, 눌러떼기
* 신석기 생활 : 신석기인들의 정착생활
신석기인들은 기후환경이 변화된 덕분에 구석기시대보다 먹을거리의 확보가 쉬워졌다. 차츰 이동생활을 줄일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계절의 변화에도 구애 받지 않고 안정되게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는 강가나 바닷가에 머물러 살기 시작하였다. 가끔 동굴이나 바위그늘에 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땅을 파고 지붕을 덮은 움집을 지어 살았다. 이동생활보다 훨씬 시간적 여유가 많아져 생활이 더욱 윤택해졌다.
* 사냥의 어려움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은 지금과 달리 추운 시기였기 때문에 메머드나 순록과 같은 동물들이 살았다. 이같이 몸집이 크고 성질이 순한 동물들을 찾아다니며 사냥돌을 던지거나 날카롭게 다듬은 돌창으로 사냥하였다. 구석기인들은 활을 발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새나 작고 날쌘 짐승들을 사냥하기 어려웠다.
* 신석기인들은 어떻게 도구를 만들었을까?
신석기시대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이 처음으로 토기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지역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다채로운 무늬로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초창기에는 무늬가 없는 토기가 만들어졌으나, 이후 남해안과 동해안 지역에서는 표면에 가는 점토띠를 붙여 장식한 덧무늬토기가 유행하였다. 그 다음에는 밑이 둥글거나 뾰족한 토기의 표면에는 도구로 여러 가지 점과 선을 그려 장식한 빗살무늬토기가 널리 유행하였다.
* 토기제작 종류
태쌓기 : 반죽한 점토를 일정한 굵기의 둥근 태로 만들어 쌓는 방법 : 신석기 서리기 : 길고 납작하게 만든 점토띠를 아래로부터 위로 감아올려 만드는 방법 빗기 : 점토 덩어리를 그냥 손으로 눌러 빚어 토기 모양을 만드는 방법 |
* 신석기시대의 토기 무늬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초창기 토기에는 무늬가 없지만, 흙을 반죽할 때 섞은 식물 줄기와 같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 가장 오래된 무늬는 덧무늬토기(융기문토기), 가는 점토띠를 가로, 세로 혹은 사선으로 덧붙여 장식하였다.
그 후 남해안에서는 끝이 뾰족한 도구로 촘촘이 찌르거나 짧고 깊게 눌러 새긴 무늬(자돌`압인문토기)가 유행하였고, 중부지방에서는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하여 입술 부근에는 짧은 사선 무늬를 그 아래에는 생선 뼈 무늬를 장식한 토기가 많이 만들어졌다.
이후 전국적으로 이와 같은 생선 뼈 무늬를 비롯하여 마름모꼴이나 삼각형 등 여러 가지 기하학적 무늬의 빗살무늬토기들이 널리 유행하였다. 하지만 후기가 되면 무늬의 정연함이 흐트러지고 일부에만 무늬를 새기는 등 빗살무늬가 점차 퇴화해 간다.
*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본격적인 벼농사를 시작한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구릉지대나 평야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가옥은 네모꼴이나 원형인 움집이 대부분이었으나 멀리 전망할 수 있는 망대와 곡식과 식료를 저장하는 다락집도 있었다.
그리고 마을 전체를 둘러싼 구덩이나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여 마을을 보호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벼`보리`콩`조`수수 등 오곡을 재배하였으며 이를 수확하기 위한 도구로 반달돌칼과 낫 등을 사용하였다. 또 냇가나 구릉의 바위면에 그림을 새긴 암각화가 많이 만들어졌는데, 지금까지는 주로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확인되고 있다.
청동기시대라 하더라도 도구는 여전히 돌칼과 돌화살촉, 돌도끼, 반달돌칼 등 석기를 주로 사용하였고, 청동기는 힘을 가진 소수계층의 권위를 과시하는 장식품이나 의례에 주로 사용하였다.
* 청도박물관
* 신석기시대 청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다
청도에서 밀양 고례리유적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청도에도 후기구석기시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8천년 전 오진리 바위그늘 유적으로 신석기 시대 문화층에 해당한다. 빗살무늬토기와 석기를 사용한 사람들의 유적이 진라리`신당리에서 발굴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바다나 강가에서 고기잡이와 사냥, 야생 열매의 채집 등에 의존하는 정착생활을 하다가 점차적으로 농경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석기시대 청도사람들은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청도천과 동창천의 물길을 통해 남해안과 내륙의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신석기 문화를 지속적으로 형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
빗살무늬토기는 기원전 약 4천년 전부터 1천년 사이, 신석기인들이 사용한 그릇이다. 그릇 겉면에 빗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문양을 새겨 빗살무늬토기라 한다. 빗살무늬토기의 밑이 뾰족한 것은 강가와 바닷가 모래에 반쯤 묻어놓고 편리하게 세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청동기 고인돌 문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으로 우리나라를 주된 분포지로 한다. 땅 위에 넓적한 돌판으로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을 얹어둔 형식과, 지하에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을 얹은 형식으로 구분된다. 고인돌은 형태에 따라 탁자식`바둑판식`개석식 등으로 분류된다. 청도의 고인돌 유적은 청도천을 중심으로 범곡리`송북리`소라리`진라리`무등리`원정리 등 대규모의 고인돌 무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고인돌 무리들로 청동기시대 후기 청도천 중류지역에 이서국과 같은 읍락 국가가 성립될 수 있는 고고학적 기반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이서국의 뿌리, 청도의 청동기시대 문화
청도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400년 무렵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벼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농경생활이 시작되었고, 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마을 가장자리에 깊은 도랑과 나무울타리를 두른 규모가 큰 마을들도 생겨났다. 이러한 생산력의 증가에 따라 사회 내부에서는 신분차이가 발생하게 되었고, 지배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청도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신당리`화리`갈지리`진라리`서상리`유호리`사촌리`오진리 등이 있으며,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생활 터전 때문에 주로 동창천과 청도천을 따라 형성된 선상지(扇狀地)와 충적(沖積)대지에 분포한다.
당시의 집자리는 대개 반지하식의 움집으로 평면형태가 장방형`세장방형`원형 등 다양하며 내부에는 기둥자리와 화덕자리, 저장구덩이 등이 남아 있어 집의 구조와 주거생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 곡식저장 등을 위해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고상식건물, 연장이나 도구를 만들던 공방지, 토기를 굽던 소성유구 등이 함께 확인된다.
무덤은 지석묘 석관묘가 주류를 이루고 지금까지 청도지역에서 알려진 지석묘는 63개소 정도로 땅위에 보이는 상석만 하더라도 400여기에 달해 영남지역의 지석묘 최대 밀집지로 주목받고 있다.
의례유적으로는 비파모양 동검이 나온 예전리유적, 그리고 순지리 순늪마을 북쪽 위에 세워져 있던 선돌도 당시의 전통과 관습을 알려주는 표식물로 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출토유물로는 민무늬토기와 간돌검, 돌창, 돌도끼, 반달돌칼을 비롯하여 조리용구인 갈돌과 갈판, 공이가 있으며, 석기를 만들 때 받쳤던 모룻돌과 석기 제작을 위한 몸돌 및 석재도 나온다. 특히 석기의 제작`사용과 관련하여 모든 유적에서 많은 숫돌이 확인되었다.
청도에 분포하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와 마을 유적은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를 통해 볼 때 수량이나 규모에 있어서 영남의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로 보아 청동기시대에 유력집단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들 유력 집단이 이서국의 성립과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청도의 청동기시대 집자리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대표적인 집자리로는 동굴과 움집이 있다. 청도의 청동기시대 집으로는 주로 바닥이 네모난 형태의 움집의 집자리로 진라리`송읍리`신당리 등에서 발굴되었다. 특히 진라리 생활유적에서는 대형집자리를 중심으로 소형집자리들이 주변에 배치하고 있는데, 이는 집자리 위치 선정에 있어 일정한 계층성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청동기시대의 마을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와 몽골 등지로부터 퉁구스계에 속하는 새로운 종족이 한반도로 진출하여 청동기 문화를 전파하면서 정착하게 되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강이나 바닷가에 인접한 낮은 구릉이나 평지에 움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농경무늬 청동기 문양에서 보듯이 괭이나 따비를 이용한 밭농사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주 흔암리와 송국리 등에서 탄화미가 출토되었고, 논산 마전리와 울산 옥현 등에서 확인된 논 유적을 통해서 벼농사를 지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요 도구로는 청동제 의기 및 무기, 생산을 위한 간석기(마제석기), 다양한 종류의 무늬 없는 토기(무문토기) 등이 제작`사용되었다.
본격적인 농경의 시작으로 생산력이 증가되고 사회 내부에 신분적 차이가 발생하였다.
이는 이 시기에 많이 만들어진 무덤형식인 고인돌과 돌널무덤(석관묘), 독무덤(옹관묘)의 규모나 부장품을 통해 알 수 있다.
* 청동기시대, 도구를 사용하다
청도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다양한 도구들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청동기시대는 청동제품이 출토되지만 실생활에서 사용되었던 도구는 주로 돌로 만든 석제품이다. 도토리 등을 분쇄할 때 사용한 갈돌과 갈판, 옥을 마연할 때 사용한 옥마지석 등 여러 석제품들이 출토되고 있다.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로 청동기시대 도구의 사용과 발달, 문화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울산박물관
* 사람이 살기 시작하다 :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 인류는 처음으로 불을 사용하고 뗀석기를 사용하였다. 사람들은 무리지어 먹을거리가 있는 곳을 찾아 이동하면서 사냥과 채집생활을 하였다. 동굴이나 강가에 일시적으로 머무르면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를 돌`나무`뼈 등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조각품을 만들거나 동굴벽화를 그리는 등의 예술 활동도 하였으며 죽은 자를 위한 장례의식을 치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구석기시대는 약 70만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울산에서는 무거동 옥현 유적, 신화리 유적, 입암리 유적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약 4만년 전~ 1만년 전)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돌을 깨뜨려 도구를 만들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를 주로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주먹도끼나 찍개와 같이 하나의 석기를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시간이 지나고 다듬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긁개나 밀개와 같이 쓰임과 용도에 맞는 각각의 석기를 제작하였다. 후기 구석기시대가 되면 고운 입자로 이루어진 새로운 종류의 돌을 사용하여 돌날과 작은 돌날처럼 크기가 더 작고 정교한 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 주먹도끼 : 구석기시대의 맥가이버 칼. 구석기시대 초기에, 좀더 거친 형태의 뗀석기인 찍개의 뒤를 이어 나타났다. 이후 구석기시대 중후기까지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의 한탄강변에 세계적인 주먹도끼 유적지가 있다.
* 바다를 무대로 살아가다 :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에는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후가 점차 따뜻해지고 바닷물의 높이가 높아져 강이 생기고 내륙 깊숙이 바닷물도 들어왔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정착 생활을 시작하고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살면서 고기잡이`사냥`채집으로 식량을 얻었으며, 점차 가축을 기르고 농사도 시작하였다. 또한 다양한 장신구를 만들고 반구대 암각화와 같은 예술 작품도 남겼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는 빙하기가 끝난 이후인 기원전 8천년 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울산은 신암리 유적, 우봉리 유적, 황성동 유적(세죽리), 궁근정리 유적 등에서 이른 시기부터 늦은 시기의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다. 이들 유적은 주로 해안가와 강가에 분포하는데, 이를 통해 신석기시대 울산 사람들은 식량과 자원을 얻기 쉬운 바다와 강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 바다, 삶의 터전 :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곳에 주로 머물며 생활하였다. 울산은 주변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기온이 온화하였으며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여 물고기와 조개가 풍부하게 서식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해안가에 정착한 사람들은 돌`뼈`조개껍데기로 만든 다양한 도구로 낚시하거나 그물을 이용하여 식량을 얻었다. 또한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고래`상어와 같은 바다 동물이나 큰 물고기를 잡기도 하였다.
* 사냥을 하고 농사를 시작하다 :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어로 활동 이외에도 사냥이나 야생 식물 채집, 농사 등 다양한 생업 활동을 하였다. 사냥에서 잡힌 동물은 식량과 각종 도구를 만들 수 있는 뼈를 제공해 주었다. 신석기 시대 이른 시기에는 도토리와 같은 야생 식물을 채집하여 먹다가 후기에는 조`기장과 같은 잡곡 농사를 시작하였다.
* 토기를 만들고 무늬를 새기다 :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인류 최초로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이는 인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토기는 손으로 흙 반죽을 빚어 모양을 만들고 야외에 위치한 가마에서 낮은 온도(600~700도)로 구워내어 붉은 갈색을 띤다. 운반`저장`조리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토기 표면에는 덧무늬, 눌러 찍은 무늬, 그은 무늬, 짧은 사선 무늬, 겹아가리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이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예술과 정신세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울산에서는 초창기를 제외한 전 시기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특히 신암리 유적에서는 다양한 덧무늬 토기가 많이 출토된다.
* 풍요와 아름다움을 기원하다 :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생활이 안정되면서 팔찌나 목걸이`귀걸이를 만들어 아름답게 꾸몄다. 옥으로 만든 귀걸이는 무덤에 묻히기도 하였다. 또한 흙을 빚어 사람의 얼굴`여성의 몸`배 등 다양한 모양의 예술품을 만들었다. 장신구나 예술품은 개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속한 무리의 신앙`의례에 사용하거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목적도 있었다.
* 다양한 조개 -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어떤 조개를 먹었을까?
바닷가에 위치한 황성동 유적의 조개무지에서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많이 발견되었다. 홍합`가리비`참굴`전복`우럭`피뿔고둥`피조개`왕우럭조개 등 종류도 다양하며 그중에서 굴과 홍합이 가장 많다. 먹고 난 조개껍데기로 어로 도구나 장신구 등을 만들기도 했다.
* 신석기시대 토기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토기에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 토기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토기 안쪽을 살펴보면, 점토 띠를 쌓아 올려가며 만든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바닥에 찍힌 나뭇잎 모양은 바닥을 받침대에서 분리하기 위하여 나뭇잎을 깔고 작업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기원전 1만 년 : 초창기 : 고산리식 토기 바닥이 평평하고 무늬가 없는 토기로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 |
기원 전 6천 년 : 조기 : 덧무늬토기 가는 점토띠를 붙여 다양한 무늬를 기하학적으로 장식한 토기 |
기원 전 4천 백 년 : 전기 : 눌러 찍은 무늬 토기 끝이 뾰족하거나 둥근 도구로 눌러 찍어 장식한 토기 |
기원 전 3천 5백년 : 중기 : 빗살무늬토기 도구로 누르거나 그어서 만든 선으로 빗살무늬처럼 장식한 토기 |
* 울주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모형 : 신석기시대로 추정
울산을 가로지르는 태화강 상류의 대곡천 절벽에 위치한다. 너비 8미터, 높이 약 5미터의 편평한 바위 위와 그 주변 바위에서도 그림이 확인된다.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하여 고래와 같은 바다동물과 육지동물, 동물 사냥과 고래잡이 모습 등 약 30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 그림들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사냥과 해양 어로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울산 신석기시대 대표 유적인 황성동 세죽 유적에서 고래 사냥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어 반구대 암각화는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청동기 - 풍요로운 삶의 터전
청동기시대에는 벼농사를 비롯한 본격적인 농경이 이루어졌다. 대규모 마을이 생겨나고 마을을 다스리는 지배자도 등장하였다. 일상생활에서는 주로 민무늬 토기`간석기`나무로 만든 도구가 사용되었다. 청동으로 만든 칼이나 거울은 권위를 상징하는 의기로 제작되어 지배자와 같은 특별한 사람만 소유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2천년 경에서 기원전 1천5백년 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울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의 청동기시대 유적이 밀집되어 있어 사람이 살기좋은 환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요 유적으로 검단리 유적, 무거동 옥현 유적, 다운동 유적, 연암동 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 확인되는 유구와 유물은 ‘울산식 집자리’, ‘검단리식 토기’ 등으로 불리며 후기 청동기시대의 영남 및 동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되는 독특한 문화 양상을 보여준다.
* 청동기 - 힘과 권력의 등장
농경의 발달로 잉여생산물이 증가하면서 이를 차지하기 위해 마을간 싸움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다툼 속에서 힘과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등장하였다. 지배자는 마을을 다스리고 이웃 마을과 전쟁하면서 점차 큰 힘을 가졌고, 고인돌과 같은 커다란 무덤을 만들어 권력을 과시하였다.
고인돌 이외에도 돌널무덤`움무덤`독널무덤`주구무덤 등을 만들었고 집터를 무덤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무덤 안에서 간돌검`청동검`화살촉`옥`붉은간토기와 같은 유물들이 발견되는데, 이는 무덤 주인의 지위나 권력을 드러내는 상징물로 보인다. 울산에서도 언양읍 서부리, 상북면 향산리 등에서 거대한 고인돌이 발견되지만, 그 수가 집터에 비해서 매우 적다.
* 청동기 - 사냥, 여전한 생계 수단
청동기시대에는 농경과 더불어 사냥과 어로도 여전히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사냥과 어로 활동을 통해 부족한 식량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고, 고기를 통해 단백질도 섭취할 수 있었다. 주로 돌화살촉으로 만든 화살과 돌창으로 사냥하였으며 함정 시설을 만들어 사냥하기도 하였다. 함정은 땅을 깊게 파고 뾰족한 막대를 꽂아 만든 시설로, 청동기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사냥 방식이다.
*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일구다 :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 초기에는 2~4기의 집들이 모여 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백 기의 집들이 모여 규모가 큰 마을을 이루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주로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있는 배산임수 지역에 마을을 만들었다. 마을 안에서 주거구역`매장구역`경작지 등으로 공간을 만들어 생활하였으며,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환호`목책`망루 등의 시설을 만들었다. 집의 형태는 움집이며 내부에는 화덕`기둥 구멍`곡식 저장 구덩이 자리 등이 발견된다. 초기에는 큰 집에서 대가족이 살다가 후기로 갈수록 집의 크기와 가족 수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 벼농사의 시작과 농기구의 발달 :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조`수수`보리`콩과 같은 잡곡 농사와 함께 본격적인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논은 하천이 범람한 곳이나 골짜기의 아래쪽과 같이 비옥한 땅에 작은 규모로 만들어졌다. 농경의 발달은 농기구의 발달로 이어졌다. 돌삽`곰배괭이`돌보습으로 땅을 일구고, 반달돌칼과 돌낫으로 수확했으며 갈돌과 갈판`공이와 절구 등으로 수확한 농작물을 가공하였다. 농경의 본격적인 발달은 노동력과 수확물을 관리하고 분배하는 계층이 등장하는 등 사회적인 모습도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가락바퀴
가락바퀴는 실을 만들 때 사용했던 도구이다. 구멍에 막대를 끼워 축을 만들고, 솜이나 동물털 등의 섬유를 축에 어이 회전시켜 꼬아서 실을 마든다. 실을 감는 도구인 가락을 끼워 사용해서 가락바퀴라고 부르며 흙이나 돌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 검단리식 토기
검단리식 토기는 깊은 바리모양 토기에 낟알무늬를 눌러 찍어 새긴 토기를 말한다. 주로 동남해안 지역에서 확인되며 검단리 유적에서 대표성이 인정되어 검단리식 토기라고 부른다. 울산식 집자리와 함께 후기 청동기시대 동남해안 지역의 문화 특징 중 하나이다.
* 그물추 : 사는 곳에 따라 그물추 모양이 달라진다?
그물추는 청동기시대 대표 어로구로 그물을 바닷속에 가라앉게 하는 무게추로 사용하였다. 형태는 기둥 모양의 원통형과 동글납작한 원형이 있다. 원통형은 무게가 무겁고 큰 하천변과 바닷가 주변에서 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큰 물고기를 잡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납작한 원형 모양은 무게가 가볍고 내륙의 작은 하천변에서 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작은 물고기를 잡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울산에서는 주로 주거지에서 많은 양이 발견되는데, 대부분의 취락에서 어로 활동도 중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국립경주박물관
*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불을 이용하고 처음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시대로 대략 250만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의 시기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먹을거리가 많은 곳을 찾아 무리를 이루어 옮겨 다니며 사냥과 채집을 했습니다. 동굴이나 강가에 일시적으로 머무르면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도구를 만들어 썼습니다. 한반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빙하시대라고도 불리는 플라이스토세 중기(약 78만 ~13만년 전)로 추정됩니다. 경주에서 발견되는 석기나 울산과 포항의 유적으로 볼 때 후기 구석기시대(약 4만년 ~1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는 약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시작해 기원전 3천년 무렵까지로, 서서히 정착생활을 해 나가며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던 시기입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강이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살면서 고기잡이, 사냥, 식물채집, 초기 농사를 통해 먹을 거리를 얻었습니다. 경주와 주변지역의 대표 유적으로는 경주 봉길리 유적, 울진 후포리 유적과 죽변리 유적, 울산 세죽리 유적(황성동) 등이 있습니다. 봉길리 유적에서는 움집이, 후포리 유적에서는 많은 사람이 묻힌 무덤이, 세죽리 유적에서는 일종의 생활 쓰레기장인 조개무지가 발굴되었습니다. 또 바닷가 죽변리 유적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의 조각과 노로 추정되는 나무 제품이 발견되었습니다.
* 청동기시대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5세기 무렵 시작되었습니다. 청동기시대라고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민무늬토기, 간석기, 나무 제품 등이 주로 사용되었고, 청동기는 권위의 상징물이나 특별하고 중요한 의식을 위한 기물로서 특정계층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 벼농사가 발달하면서 오늘날과 비슷한 마을이 생겨났고, 집단 내에서는 사회계층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이런 청동기시대 사회를 바탕으로 등장하였습니다.
경주 곳곳에서도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신라를 건국했던 사람들의 조상은 이 무렵부터 경주 일대에 살면서 농사를 짓고 큰 마을을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 함안박물관
* 함안의 지질시대
지질시대란 지구의 지각이 형성되는 약 38억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지구상에 공룡은 약 2억3천만 년 전인 중생대 후기 트라이아스기부터 6천5백만 년 전인 백악기까지 존재하였다.
함안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함안층은 약 1억 년을 전후하여 형성된 백악기 후기의 퇴적층이다. 함안층에서 새와 공룡의 발자국 화석 등이 발견되는데, 백악기 당시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대규모 호수 주변의 부드러운 땅에 남겨진 여러 흔적들이 굳어진 뒤, 융기되고 침식되어 현재의 지표면에 드러난 것이다.
* 함안의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구석기시대는 뗀석기를 사용하던 시대이다. 구석기인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먹을 것을 찾아 옮겨다니는 생활을 하였다.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가 약 70만 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함안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들은 중기 구석기 ~ 후기 구석기(약 13만 ~ 약 1만 2천년 전)의 것이다.
* 최초의 함안인, 도구를 만들다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돌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 시기로, 도구는 의도적인 떼기 작업으로 만들어진 뗀석기이다. 이른 시기의 구석기는 대체로 몸돌로부터 서너 차례의 떼기를 하여 만들어져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크고 무거웠지만, 늦은 시기의 구석기는 석기를 제작하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몸돌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격지를 다듬어 비교적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함안에서는 칠원읍 용산리에서 석영제 몸돌이 최초로 채집됐고, 최근 법수면 우거리와 가야읍 사내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다. 가야읍 도항리, 칠원읍 유원리, 군북면 덕대리, 월촌리 일대에서 구석기 유물이 채집되면서 구석기시대의 자료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지금까지 함안에서 발굴 및 채집된 구석기 유물로는 몸돌, 외면찍개, 양면찍개, 긁개, 망치돌 등이 있으며, 석기의 형태와 제작 방법으로 볼 때 중기~후기 구석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 함안의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농경과 정착생활이 이루어지면서 크고 작은 마을이 생겨나게 된다. 농경이 보편화되면서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였고, 빈부격차와 계급 분화를 불러와 지배자를 등장시켰다.
한반도에는 기원전 15세기 무렵부터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중국 내몽고, 동북지방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하였다. 사람들은 빗살무늬토기 대신 민무늬토기를 사용하였고, 청동기가 출현하고 유통되었지만 석기를 주로 사용하였다.
가야분지의 함안천, 군북분지의 석교천, 칠원분지의 광려천 주변으로 청동기 유적들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함안에 모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함안은 경남동부권과 경남 서부권 청동기문화의 연결지점으로서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갖추어 나갔다.
* 농경사회, 지배자의 등장
청동기시대는 농경 사회였다. 밭농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논농사도 중요한 식량생산의 기반으로 자리잡았다. 이로 인해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거주가 가능한 움집을 짓고 마을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다. 또한 생산된 곡식들을 안정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저장시설을 비롯해 생활 도구를 만드는 작업장 등도 갖추었다.
각종 생활 도구는 주로 돌, 나무,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농경구, 수렵구, 어로구, 목공구 등 이전시대보다 훨씬 다양해졌다.
청동기 전기에는 긴 사각형으로 초대형(4~50평)인데 반해, 중기에 들어와서는 원형과 사각형으로 소형(6~7평)의 집터가 주를 이루었다. 이를 통해 공동생활에서 단일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로 변화해 갔음을 알 수 있다.
* 지배자의 등장, 고인돌과 껴묻거리
농경사회에서는 마을 단위의 단결이 강조된다. 생산력이 증대되어 풍족한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지만, 생산지의 확보나 잉여물의 분배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여 이를 중재할 수 있는 지배자가 등장하게 된다. 막대한 노동력의 동원이 필요한 고인돌과 간돌칼, 돌화살촉, 옥 등의 신분을 나타내는 껴묻거리는 지배자 등장의 증거로 볼 수 있다.
* 의령 의병박물관
*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약 250만 년 ~ 1만 년 전)는 유인원과 갈라져 진화를 시작한 인류가 불을 사용하고,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와 나무나 뼈로 만든 도구를 사용한 시기이다. 한반도에서는 약 75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초기의 도구는 거칠게 가공되었으며 여러 기능을 가진 것이었으나, 점차 다양하고 세분된 기능을 가진 정교한 도구들로 분화`발전되었다. 구석기인들은 사냥과 채집생활을 영위하면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 이동하였으며, 주로 강가나 동굴에서 생활하였다. 진주 집현 월평리, 대곡 마진리, 지수 청원리 등지에서 구석기 유적이 확인되거나 유물이 채집되고 있어 의령지역에서도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하겠다.
*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기원전 8천년 ~ 기원전 1천년)는 빙하기 이후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이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고 정착생활을 시작한 시기였다. 신석기인들은 고기잡이와 사냥, 채집활동을 바탕으로 농경과 목축이 가미된 생활을 영위하였다. 간석기와 뼈연모는 더욱 효과적으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도구였으며, 토기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하고 음식을 조리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직물이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옥`동물뼈와 뿔`조가비 등을 사용하여 꾸미개를 만들어 몸을 치장하였다. 나아가 중국`일본`연해주 등 주변지역과 필요한 자원과 정보를 교류하였으며, 움집터와 조개더미, 무덤유적을 남겼다. 의령지역은 대의면 마쌍리 유적이 있으며 마쌍리 유적에서는 야외노지 1기, 집석 1기, 무덤으로 추정되는 적석묘 1기가 발견되었다.
* 청동기시대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5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청동기시대는 구리와 아연, 또는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인류가 최초로 금속기를 만들어 사용한 시기로 중국 동북 지방을 비롯한 북방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농업이 발달하면서 낮은 구릉이나 충적지를 중심으로 취락을 형성하여 정착생활을 하였다. 청동기는 주로 무기와 의기로 사용되었고, 실제 용구는 민무늬토기, 석기와 목기, 뼈 도구가 주로 사용되었다. 고인돌, 돌널무덤, 독무덤 등 새로운 무덤이 등장하였고, 사회내부에는 사회적 지위 차이도 생겼다. 의령지역에는 의령읍 서동리 유적을 비롯한 대의면 마쌍리, 정곡면 석곡리`오방리, 가례면 가례리`수성리, 화정면 상정리, 칠곡면 신포리 등 많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존재하고 있다.
* 벼농사의 시작
벼는 우리나라에서 주식으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곡물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벼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도 그 존재가 일부 확인되지만 청동기시대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재배되었다. 여주 흔암리와 부여 송국리 주거지에서 탄화미가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울산 검단리 유적의 토기에서도 볍씨가 박힌 흔적이 있어 기원전 6세기 이전에는 이미 본격적으로 벼 재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벼농사에 이용된 도구로는 반달모양 돌칼이 수확도구로 사용되었고, 돌보습이나 목제 농구도 다량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벼농사는 중국의 화남지방에서 대륙을 거쳐 들어왔다고 하는 북방설이 지배적이지만 일부는 바닷길을 따라 동남아지역에서 전래 되었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벼농사기술은 일본으로 전래되어 야요이(청동`철기시대)문화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울산박물관 : 환호(검단리)
* 검단리 유적
한국 최초로 완전한 모습의 환호를 가진 청동기시대 마을 전체가 발굴된 유적으로,
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7~8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검단리 유적에서는 환호를 비롯하여 집자리 92동, 망루 추정 시설, 도랑, 구덩이, 고인돌 3기 등이 확인되었다. 발굴된 집자리와 토기는 지역의 고유한 특징을 띄고 있어 ‘검단리식 집자리, 검단리식 토기 등으로 불리며 울산의 대표 청동기 유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검단리유적의 변화과정
* 검단리 1기 : 작은 크기의 집들이 모여 작은 마을 형성. 하나의 마을이지만 주민 집단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집을 지음. |
* 검단리 2기 : 마을은 환호 안에 지은 집들과 환호 밖에 지은 집들로 나누어짐.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만 환호 내부에 거주. 환호 축조. |
* 검단리 3기 : 마을의 크기가 커지고 집이 많아졌으나, 집들 간의 계급 차이가 심해짐. 검단리 사회가 안정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마을이 커졌음. 환호 폐기. |
* 검단리 집을 방문하다 : 검단리 13호 집자리
검단리 13호 집자리는 약 18제곱미터로, 1인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평균 면적을 최소 3제곱미터로 볼 때 최대 6명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직사각형의 집자리에 6개의 기둥을 세우고 한쪽 벽에 출입구 시설을 만들어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집자리 바닥에서 타다 남은 숯조각과 가느다란 풀 성분이 확인되어 나무와 풀을 엮어 만든 움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움집의 바닥은 점토를 한 층 덧발라 평탄하고 단단한 바닥이 되도록 하였다. 입구와 떨어진 곳에 있는 4개의 기둥 중앙에 불을 피우는 화덕(노지)도 설치하였다. 화덕의 존재는 난방과 식생활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 검단리 사람들과 생활하다
검단리 13호 집자리에서는 토기 6점, 석기 29점, 흙으로 만든 그물추 5점이 발굴되었다. 토기는 깊은 바리와 얕은 바리 등이 확인되었다. 깊은 바리는 보통 음식을 삶고 끓이는 조리용으로, 얕은 바리는 식사용 그릇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경과 관련된 유물은 반달돌칼이 있으며, 사냥`어로와 관련된 유물은 돌화살촉, 그물추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물로 볼 때 검단리 사람들은 농경과 함께 사냥과 어로 활동을 통해 식량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간돌검, 숫돌, 돌끌, 미완성 석기들이 발견되었다.
* 검단리의 특별함을 만나다
검단리 유적에서 확인된 검단리식 토기는 울산지역 청동기문화의 대표 자료로 인정받은 토기로, 깊은 바리 모양 토기의 아가리 가까이에 가로 방향, 또는 비스듬하게 굵게 그은 낟알 무늬가 새겨진 토기를 말한다. 검단리식 토기는 경주`포항을 중심으로 동남해안 지역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어 지역성이 강한 토기라고 할 수 있다.
* 한반도 후기 청동기 문화권별 특징
* 동남해안지역 : 검단리형(울주) 사각형 집자리 + 불땐 자리 + 기둥구멍 + 배수구, 검단리식 토기 |
* 금강유역 : 송국리유형(부여) 원형 집자리 + 작업공 + 양쪽 기둥구멍, 송국리식 토기 |
* 한강유역 : 당동리유형(파주) 직사각형 집자리 + 불땐자리, 역삼동식 토기, 흔암리식 토기 |
* 강원영동지역 : 포월리유형(양양) 전기의 대형 집자리 계승, 공열문 토기 |
* 강원영서지역 : 천전리유형(춘천) 사각형 집자리 + 불땐자리 + 저장공 + 작업공 + 이색점토다짐, 공열문 토기 |
* 환호 마을에 들어서다
환호란 마을을 둘러싸는 큰 도랑을 말한다. 검단리 유적의 환호는 해발 104~123미터에 해당하는 구릉이 만들어졌다. 전체 길이 298미터, 내부 면적 5974제곱미터(1810평), 최대 깊이 1.5미터, 최대 너비 2미터이다. 환호의 안팎으로 92동의 집자리가 확인되어 환호를 중심으로 한 큰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환호의 남쪽과 북쪽에 출입구를 설치하여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으며, 환호 내부에는 망루로 추정되는 시설과 제사용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도랑이 확인되었다. 또한 환호에서 서쪽으로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3기의 고인돌이 확인되었다.
* 창원시립박물관
* 선사시대의 창원
인류의 역사는 문자의 사용을 기준으로 기록이 존재한 역사시대,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선사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창원시 의창구에 위치한 다호리유적에서 발견된 붓을 기준으로 역사시대와 선사시대를 나누고 있다. 선사시대는 다시 사용한 도구를 기준으로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창원지역은 아직까지 구석기대 유적이 발굴되지 않았다.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창원시 의창구 동읍의 합산패총과 진해구의 안골포 패총 등이 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리`현동 유적을 비롯하여 의창구 덕천리`다호리유적, 남산유적, 성산구 상남동 유적 등 창원 지역 곳곳에는 청동기시대와 삼한시대 유적들이 위치해 있다.
창원지역의 고대 정치집단들이 남긴 것으로 고인돌과 농경지, 주거지를 비롯하여 토기와 청동기, 철기, 칠기류 등이 함께 발굴되었다. (다호리유적은 철기시대 편에서 정리 예정)
* 남산유적 : 주거지유적, 청동기시대에서 삼한시대까지
남산유적은 청동기시대에서 삼한시대에 걸쳐 형성된 주거지 유적이다. 마을전체 면적은 5018제곱미터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 및 삼한시대에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어시설인 환호와 집터, 저장시설, 조개무지 등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한편,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와 삼한시대의 각종 토기류를 비롯하여 반달 모양의 돌칼 등의 석기류와 각종 동물 및 물고기뼈 등의 골각기류 등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창원 남산 유적의 연대는 청동기시대 환호취락이 서기전 5세기, 삼한시대 취락은 3세기로 추정된다. 이 유적은 일반 주거지 유적보다는 방어와 의례 등 특수한 역할을 하였던 취락으로 짐작된다.
* 덕천리유적 : 청동기시대의 분묘유적
덕천리유적은 발굴 전에는 모두 5개의 상석이 지표상에 드러나 있었으나, 발굴 조사 결과 3개의 상석 아래에서만 매장 시설이 확인되었다. 또한 지표에 아무 흔적이 없던 상석 주변에서 돌덧널무덤과 돌널무덤 12기, 돌뚜껑움무덤 5기 등이 추가로 조사되었다.
덕천리유적은 청동기시대 후기인 서기전 3세기경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고인돌은 지금까지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무덤 가운데 최대 규모에 속한다.
* 익산마한박물관
* 익산문화의 여명
익산지역은 큰 강과 작은 천이 발달되어 있어서 구석기와 신석기 문화가 발달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후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익산지역 곳곳에 모여 살면서 고대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익산은 일찍이 선학들에 의해 평양, 경주와 함께 청동기문화권으로 설정될 만큼 청동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많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청동기시대의 문화적 배경이 위만에게 패한 고조선 준왕이 바다를 건너 익산지역에 터를 잡게 되는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익산의 역사와 문화
익산은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인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청동기시대에는 많은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어 평양, 경주와 함께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진 곳이다.
* 구석기시대 유적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하는 시기로부터 빙하가 물러가는 1만년 전후까지의 시기로써 뗀석기의 사용, 사냥과 채집을 위한 이동생활, 불의 사용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익산지역의 구석기유적은 여산 신막유적, 춘포 천동리유적이 발굴조사 되었고, 왕궁 청평유적과 온수리유적에서는 지표조사에서 구석기 유물이 수습되었다. 이러한 유적들은 금강유역의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으로서 생활하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에 의해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뗀석기, 석기문화의 시작
익산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은 금강과 만경강 등 강과 하천을 따라 생활영역을 넓혀갔습니다. 이들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갈돌, 특히 석영암을 이용하여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기 시작.
여산 신막에서는 금강 하류지역에서 최초로 구석기유적이 확인 되었으며, 만경강으로 합류하는 소하천들과 접하고 있는 쌍정리 유적에서도 석영암으로 만든 몸돌과 유문암으로 만든 격지 석기가 확인되어 익산지역 중`후기구석기시대 문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만경강과 금강이 교차하는 서두리유적에서는 슴베찌르개를 발견.
* 슴베찌르개
나무나 동물 뼈로 창처럼 찌르는 데 사용한 구석기시대 대표적 사냥도구로 추정됩니다. 사냥을 할 때 찌르는 부분 앞부분을 ‘찌르개’라 하고 나무와 연결하기 위한 이을 수 있는 부분을 ‘슴베’라고 합니다. 슴베찌르개는 사냥하는 방법이 발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큰 사냥감을 멀리서도 도구를 던져 사냥감으로 내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 신석기시대 유적
신석기시대는 농경이 시작되면서 전 시기에 비해 비교적 안정적인 식량공급이 이루어져 땅을 파서 만든 수혈주거에 정착생활을 하게 되고, 토기의 생산과 간석기의 출현을 특징으로 한다. 익산지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웅포관광지 조성지역 내 1지구의 구릉 정상부에서 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다.
*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보금자리 : 익산 영등동유적
영등동유적은 익산에 살았던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이 유적 집터는 해발 20~30미터의 낮은 구릉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분포하고 있으며, 장방형`원형`방형의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른 시기의 장방형 집안에서는 화덕과 벽을 따라 기둥자리가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아가리에 무늬가 새겨진 토기(가락동식 토기)와 반달모양 돌칼, 석촉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방형과 원형 집터는 장방형 집터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조성된 것인데, 집터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아가리가 밖으로 퍼지고 배가 불룩하게 나온 송국리식 토기와 슴베가 있는 돌칼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 시기가 변하면서 집모양도 변해요
청동기시대에는 땅을 파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 다음 풀을 덮어 움집을 지었다. 같은 청동기시대라도 초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집모양이 차츰 바뀌었다. 청동기시대 초기에는 장방형의 집으로 크기가 모두 큰 편. 장방형의 집은 난방과 조명, 취사용으로 두루 쓰이던 화덕이 집 안에 두 개씩 있으며, 서너 가족 정도가 함께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것 같다.
청동기시대 후기로 가면서 집의 크기가 작아지며, 모양은 네모나 원형으로 바뀌었다. 이 움집은 집안 가운데에 타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양쪽으로 기둥을 세웠으며, 화덕자리는 없다. 이 유형은 송국리형 주거라고 불리고 있으며, 충청`전라`경남 지역 등지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 경산시립박물관
* 경산문화의 시작 : 고대문화실
경산은 아직까지 신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금호강 지류인 남천변의 옥곡동과 옥산동유적 청동기시대 집터 내부에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편이 확인되었다. 또한 인접한 대구 시지동의 생활유적에서 구석기시대 석기가 채집된 것으로 보아 경산에도 구석기시대 유적이 존재할 것으로 짐작된다.
* 청동기시대 마을과 무덤
마을은 남천변의 옥곡동과 옥산동, 오목천변의 남산면 산양리를 비롯하여 진량읍 내리리, 하양읍 대학리 등 금호강 일대에서 확인된다. 옥곡동유적은 경북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청동기시대 마을유적으로, 280여 기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집의 면적은 사용하던 사람들의 신분이나 용도에 따라 차이가 나며, 내부에는 기둥자리, 저장공간,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자리 등이 있다.
무덤은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대표적이다. 고인돌은 무덤 간의 차별화가 극대화된 거대무덤으로 지역공동체 사회에서 유력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사회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 청동기시대 석기
청동기시대에서 청동기는 몇몇 사람들이 신분을 과시하고 위력을 나타내는 위세품으로 드물게 사용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돌을 갈아서 만든 간석기를 주로 사용하였다. 생계를 위한 수렵이나 농경생활을 위해 돌도끼, 반달돌칼, 자귀 등 각종 농기구를 비롯하여 공구, 무기 등을 많이 제작`사용하였다.
* 청동기시대 토기
토기는 주로 집터와 무덤에서 발견된다. 종류는 항아리, 깊은 바리, 보시기 모양의 몸통에 무늬가 없는 민무늬토기가 대부분이고, 그릇 겉면에 붉은 칠을 한 간토기도 있다. 토기의 아가리에 구멍무늬, 겹아가리에 짧은 빗금무늬, 골아가리무늬 등을 새기기도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가리의 무늬는 없어진다. 청동기시대 토기는 손으로 빚어 만들어 한데가마에서 낮은 온도로 구운 것으로 전문 장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저장용, 조리용, 식기용 등으로 만들어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부산시립박물관
* 구석기시대 : 구석기문화
부산지역에서는 해운대 좌동과 중동유적이 발굴됨으로써 2만년에서 1만5천년 전인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구석기문화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구석기유적은 좌동, 중동, 청사포, 노포동, 기장군 등 주로 해안에 가까운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부산지역의 구석기인들은 바닷가와 야산에서 모여 살면서 채집과 사냥, 어로생활을 하였으며, 석영과 니암 등의 암석으로 생업활동에 필요한 돌도끼, 긁개, 찍개, 찌르개, 밀게, 자르개, 새기개, 돌날, 갈돌, 망치돌 등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 신석기시대 : 신석기문화
부산지역에서는 8천년에서 7천년 전에 물과 식량자원이 풍부한 강가나 바닷가 등지에서 신석기인들이 정착하여 사냥과 고기잡이, 원시농경 생활을 하면서 패총, 주거지, 분묘 등 각종 유적과 유물을 남겼다. 이 중에서 특히 각종 생활 쓰레기들이 쌓여 만들어진 동삼동`영선동`수가리패총과, 조리용 화덕시설이 대량으로 발견된 범방유적은 부산지역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이 남긴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조개껍질`물고기`동물뼈, 도토리`조`기장, 화살촉`돌도끼`낚시바늘`작살`갈돌`갈판`돌괭이``돌보습, 토제품, 조개가면`곰모양토우, 귀걸이`조개팔찌 등은 신석기인들의 먹거리와 생활 모습을 잘 보여준다.(동삼동패총은 이미 정리)
* 빗살무늬토기 : 덧띠무늬토기 : 영선동패총. 보물
본래 토기의 표면에 빗살같은 무늬가 장식된 데서 붙여진 명칭이지만, 실제로는 시대에 따라 형태와 무늬가 다양하다. 빗살무늬토기는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빚어 야외가마에서 600~700도의 온도로 구웠으며, 색깔은 대부분 붉은 갈색을 띤다. 무늬의 장식기법에 따라 크게 덧띠무늬토기, 눌러찍은 무늬토기, 그은무늬토기, 짧은 빗금무늬토기, 겹아가리토기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들 토기는 덧띠무늬토기에서 겹아가리토기로 변해간다.
* 신석기인의 대외문화교류
한반도와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인접한 지리적 환경과 생업형태의 유사성 때문에 구석기시대 이래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한반도 남해안과 일본 규슈지역은 신석기시대에 접어들면서 어로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수천년 간 교류활동을 전개해 왔는데, 이와 관련한 유적`유물이 한`일 양 지역의 곳곳에 산재해 있다.
신석기인의 대외 문화교류의 모습은 동삼동`범방`신암리`연대도`욕지도`상노대도 유적의 일본 죠몽토기와 석기, 흑요석 그리고 서북 규슈 지역의 여러 유적 및 쓰시마의 사가패총`고시다카 유적 등에서 출토되는 각종 빗살무늬토기와 장신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동삼동패총에서 생산된 조개팔찌는 국내의 여러 집단뿐만 아니라 규슈 지역 흑요석과의 교역물로서 쓰시마 등지에도 공급되었다.
* 신석기인의 장신구
신석기인들은 일상 활동을 통해 쉽게 구할 수 있는 조개`동물뼈`옥`돌`흙 등의 재료로 각종 목걸이와 팔찌, 발찌, 귀걸이, 뒤꽂이 등 각종 장신구를 만들어 몸을 치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술적인 목적으로도 사용하였다.
목걸이는 가공한 조개나 동물뼈, 옥을 한 점, 또는 여러 점을 연결하여 만들었으며, 귀걸이는 흙으로 굽거나 돌로 만들었는데, 착용방법에 따라 고리형과 삽입형으로 구분된다. 동삼동패총에서 대량 출토된 조개팔찌는 신석기인들이 가장 즐겨 착용했던 장신구이다.
* 청동기시대 : 청동기인의 문화
부산지역의 청동기인들은 바닷가와 하천 주변 혹은 낮은 구릉지대에 살면서 농경과 어로 생활을 병행하였는데, 이와 관련한 많은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반여동`노포동`온천동`오륜동 집터를 비롯하여 감천동`가덕도고인돌`사직동`두구동 돌덧널무덤`조도패총 등이 있다. 아가리에 구멍을 뚫어 장식한 구멍무늬토기와 화살촉`돌칼`돌창`돌도끼`돌끌`반달돌칼`가락바퀴 등 여러 종류의 유물이 출토된 반여동`노포동집터와 조도패총은 부산지역의 청동기시대 생활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감천동`가덕도고인돌, 두구동돌덧널무덤은 부산지역 청동기인들의 매장형태와 관습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 농경문화와 생활도구
청동기시대의 큰 특징은 벼농사와 밭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문화의 성립이다. 불탄 쌀, 기장, 수수, 조, 보리 그리고 곡식 이삭을 따는데 이용된 반달돌칼, 돌낫 등은 농경생활의 흔적을 보여준다.
농경문화의 등장과 발전은 생산력의 증대 뿐만 아니라 생활양식의 변화와 기술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그 결과 다양한 종류의 도구가 만들어지고 마을 주위에 울타리와 도랑을 두른 환호취락이 출현한다.
* 국립제주박물관 특별전 : 고산리 신석기시대를 열다
* 전시를 열며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에 빙하가 물러나면서 자연 생태계는 물론 인류의 삶까지도 바뀌었습니다. 신석기인들은 따뜻해진 기후에 적응하면서 구석기시대 이래 오랫동안 이어왔던 수렵`채집 생활에서 벗어나 원시적인 농경을 하였으며 바다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안정된 정착생활을 하였습니다. 또한 토기를 발명하고 도구를 만들어 새로운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해 나갔습니다.
* 따뜻한 시대의 시작 : 신석기시대
지구는 인류가 등장한 이래 가장 기온이 낮았던 1만 8천년 전을 정점으로 서서히 따뜻해졌다. 기후 변화로 식물은 온대성 활엽수림인 참나무속으로 바뀌었고, 추운 기후에 살았던 매머드나 털코뿔이 같은 대형 포유류는 사라지고 사슴, 맷돼지, 고라니와 같은 중소형 포유류가 번성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변화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도구를 개발하고, 식량 획득은 물론 저장, 조리, 섭취하는 방법 등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 신석기시대의 시작, 제주 고산리유적
약 1만 년 전에 등장한 한국 최고의 신석기문화는 제주에서 발견되었다. 제주 고산리유적, 서귀포시 강정동유적 등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작은 돌날몸돌, 토기, 화살촉, 창끝 등이 출토되어 신석기문화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 따뜻함이 준 풍요로운 먹거리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가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바다 자원의 활용이 쉬워졌다. 한편, 육지의 삼림은 참나무속의 활엽수림으로 바뀌어 도토리, 밤 등 나무열매가 풍부해졌으며 사슴, 맷돼지 등의 동물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계절에 따라 식량자원이 변화하는 점을 깨달은 신석기인들이 단기간에 효율적으로 먹거리를 이용하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 자원활용의 도구, 토기
토기는 점토를 빚어 말린 후 불에 구운 용기로 사람이 화학적인 변화를 깨닫고 이용한 최초의 발명품이다. 토기로 음식을 조리함에 따라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식재료를 이용할 수 있어 안정적인 식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식생활의 안정은 한곳에 오랫동안 정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보다 다양한 예술 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다양한 장식의 토기, 의례행위와 관련된 특수용기,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조형물 등이 대표적이다.
* 신석기인의 매장 풍습
신석기시대의 정착생활은 무덤에도 영향을 주어 지역적으로 다양한 무덤들이 등장하였다. 사람들은 공동체 일원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를 기억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었으며 이 과정을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벗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졌다. 가장 많이 발견되는 무덤은 구덩이 안에 시신을 직접 묻는 형태이며 독널이나 동굴 등에도 매장하였다. 무덤에서는 실생활에서 사용하였던 도구나 장신구가 발견되는데 이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연속된 삶을 영위한다고 믿는 신석기인의 내세사상을 보여준다.
* 중국과 한국의 토기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지역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지역별로 독특한 신석기문화를 영위하였다. 각 지역의 신석기 개시 연대는 조금씩 다르며, 약 1만6천 년 ~ 1만년 전부터 토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인도`중국 화남 이남 등지에서는 동식물 혹은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린 채색토기가 주를 이루며 한국`중국 동북지역`시베리아 등지의 토기는 곁면에 무늬를 새긴 것이 많다. 여러 토기 중에 점토 띠를 덧붙여 장식효과를 낸 덧무늬토기는 한반도, 시베리아, 일본열도에서 확인된다.
* 경보화석박물관
지질시대는 크게 시생, 이언, 원생 이언, 현생 이언으로 구분한다. 그 중 현생 이언은 다시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나뉜다. 각 시간대는 동물의 출현에 근거하여 나뉘고 이름이 붙여졌다.
고생대는 약 5억 7천만 년 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시기는 다시 캄브리아기, 오르도비스기, 실루리아기, 데본기, 페름기로
세분화하여 구분한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증가하고,
대기 중 산소 농도의 증가에 따라 생물의 육상 진출이 이루어졌다.
고생대 초기, 캄브리아기에는
‘캄브리아기 대폭발’이라 일컫는 다양한 생물종들의 출현이 있었고,
극피동물(성게류`불가사리류`해삼류 등의 무리),
척삭동물(척추동물의 기원),
연체동물(오징어, 문어, 달팽이),
절지동물(곤충, 거미, 갑각류 등)이 출현하였다.
고생대에는
삼엽충과 특히 최초의 어류인 갑주어가 바닷속에 나타났으며,
그 이후 다양한 어류가 등장하여 현생 어류와 같은 특징을 갖추었다.
해양 조류가 다양해지고 선태식물, 양치식물, 겉씨식물 등의
육상식물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건조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외골격을 가진 절지동물,
큐티클층이 발달된 척삭동물 등이 육지로 진출하면서 진화하였다.
다세포 생물의 화석이 캄브리아기 이후 퇴적암에서 급증하였다.
캄브리아기와 오르도비스기에는 해양 무척추동물,
실루리아기와 데본기에는 어류,
석탄기와 페름기에는 양서류가 각각 출현하여 번성하였다.
로디니아에서 분리된 대륙들이
고생대 말에 다시 하나로 모여 판게아를 형성하였으며,
이때 대규모 조산 운동이 일어나 애팔래치아, 우랄 산맥 등이 형성되었다.
원생 이언 이후 대기 중 산소의 양이 증가하여
그 일부가 광분해되어 오존층을 형성하면서
자외선을 막아주자 육지에서도 생명체가 사는 것이 가능해졌다.
* 고생대의 기 : 석탄기를 제외한 고생대의 기의 명칭은 주로 그 시기의 암석이 연구된 유럽의 특정 지방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캄브리아기는 영국 웨일스 지방의 캄브리아에서, 페름기는 러시아의 페름에서 유래하였다.
* 고생대의 생물
고생대 이전 생물들은 껍질, 비늘, 뼈, 이빨 등 단단한 부분을 갖지 않았다. 이에 대해 고생대는 단단한 부분을 가진 최초의 생물들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단단한 부분은 암석 내에 기록으로 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높여 주었다. 이렇게 해서 풍부해진 고생대의 화석은 지질학자들에게 매우 상세한 시간 단위를 설명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많은 화석 기록은 고생대의 환경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기초자료가 되어 주었다.
* 고생대의 대표적인 생물들 : 삼엽충, 완족류, 바다전갈이다.
삼엽충은 고생대 말에 완전히 멸종하였으며, 완족류는 고생대 말에 대부분 멸종하였고, 일부가 살아남았다. 고생대의 기후는 전기에는 온난하였고, 말기에는 한랭하였다.
* 중생대
중생대는 2억5천만 년 전부터 6천 5백만 년 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대형 파충류를 피해 생활하던 초기 포유류가 나타나고, 새로운 종류의 파충류가 출현하였다. 또한 파충류와 조류의 특징을 모두 갖는 시조새가 등장하였다. 중생대에는 겉씨 식물이 번성하였을 뿐 아니라 말기에 이르러 다양한 속씨식물이 등장하였고, 곤충류와 함께 발달하였다. 즉, 속씨식물의 꽃가루는 곤충에 의해 옮겨져 유전자 조합이 다양해지고, 개체의 다양성도 함께 증가하였다.
중생대는 공룡의 멸종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며, 운석의 충돌, 대규모 화산 분출 등으로 인한 지구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멸종 원인으로 본다. 파충류가 출현하여 번성한 시기로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로 구분한다. 대기 중 산소의 양은 현재의 80% 정도였으며, 현재보다 고온이면서 다소 건조한 환경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생물은 쥐라기에 출현하여 백악기에 가장 번성하였고 백악기 말에 갑자기 멸종하였다.
트라이아스기 말에 판게아가 분리되기 시작하여 다양한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알프스와 로키 산맥에 생성되기 시작하였고, 한반도에서는 대보 조산 운동이 일어났으며 동시에 대량의 마그마가 지각 하부에 관입하여 대보 화강암을 만들었다.
* 중생대의 환경과 생물
중생대에는 판게아가 분열하면서 대서양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두께가 300미터에 달하는 나바조의 사암은 쥐라기에 아메리카의 남서쪽에 거대한 사막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며, 미국 서부와 캐나다의 석탄층은 쥐라기에서 백악기로 넘어가면서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에 거대한 늪지가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육지에서는 건조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겉씨식물이 번성하였으며, 침엽수가 번성하였다. 파충류는 껍데기가 있는 알을 낳음으로써 양서류보다 건조한 환경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었다. 파충류의 알 속의 묽은 액체는 화학 조성이 해수와 매우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파충류의 껍데기를 가진 알은 독립적인 수족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중생대의 표준화석으로는 암모나이트, 시조새, 공룡 등.
* 신생대
신생대는 6500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를 말하며 이 시기는 포유류와 속씨식물이 번성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바다에는 화폐석이 번성하였는데, 껍데기의 모양과 크기가 주화와 유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는 유공충에 속하는 원생생물의 화석을 말한다.
포유류는 중생대 말기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신생대에는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 포유류는 파충류와 달리 정온 동물이기 때문에 체온 유지가 용이하여 적응력이 높아서 빠르게 번식할 수 있었다. 신생대 말기 대륙 이동에 의해 분리된 대륙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포유류가 진화하였는데, 그 예로 오스트레일리아에만 서식하는 단공류와 유대류를 들 수 있다. 신생대 말기 인류의 조상이 출현하였고, 현재까지 진화해왔다.
중생대 말에 출현한 포유류가 번성한 시대로, 고제3기, 신제3기와 제4기로 구분한다. 알프스 산맥이 중생대에 이어 계속 형성되었고, 유라시아 대륙과 인도 대륙이 충돌하여 히말리야 산맥이 형성되었다. 제4기 초에는 빙하기가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백두산, 울릉도-독도, 제주도 등 화산과 화산섬들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 신생대 제3기와 제4기
최초의 지질 시대 구분은 지구의 역사를 제1기부터 제4기까지로 구분한 것이다. 이후 제1기와 제2기에 대한 명칭은 사라졌지만 제3기와 제4기는 신생대를 구분하는 기의 이름으로 남았다.
* 신생대의 대표적인 생물들
복족류(달팽이, 민달팽이 등이 있으며, 고둥, 소라, 전복, 다슬기, 우렁이 등)와 단풍나뭇잎
신생대의 표준 화석으로는 화폐석과 메머드가 있다.
* 석장리박물관
* 석장리 유적(공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굴, 조사한 구석기유적으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단군시대(청동기시대)보다 앞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이 땅에서 사람이 살아왔다는 귀중한 사실을 밝히게 한 유적입니다.
석장리 유적은 발굴조사 결과 구석기시대 전기`중기`후기 그리고 중석기시대의 문화층이 가늠되었고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유물도 출토됨으로써 선사시대 전 시기에 걸쳐 사람이 살았던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석장리 유적의 발굴은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처음으로 구석기 고고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유적입니다.
* 지질시대(신생대 ~ 제3기, 4기)
고등물화석은 지질시대의 자연환경과 동물들의 진화과정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자연실에는 신생대 제3기에 서식했던 말, 삽니코끼리, 코뿔이, 기린 등과 제4기의 코뿔이, 맘모스, 곰, 하이에나 등의 화석을 복원해 그림과 함께 비교 전시하고 있다.
* 인류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 인류의 머리뼈, 뇌, 팔`다리뼈의 비교 전시를 통한 인류의 진화 과정을 이해.
유인원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 호모 하빌리스 - 호모 에렉투스 - 호모 사피엔스 -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순으로 인류의 진화과정을 뇌의 크기와 함께 비교 전시하고 있다.
* 생활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복원, 디오라마로 구성
동굴생활 - 곰사냥 - 막집생활 - 석기 떼는 사람 - 열매 채집 - 풀뿌리채집 - 물고기잡이 - 벽화 그리기
: 디오라마 : 일부가 3차원인 실물 복제품 또는 축적 모형을 말하며, 주로 역사적 사건, 자연 풍경, 도시 경관 등을 제작하여 교육용이나 오락용으로 활용된다.
* 국립청주박물관
아프리카를 떠난 인류는 유라시아를 건너 한반도 중심에 있는 충청북도에 도착했다. 충청북도에는 남한강과 금강이라는 큰 강이 흐르고 석회암 동굴지대가 발달되어 단양 애곡리 수양개, 청주 만수리 등 구석기 유적이 많이 확인된다. 인류는 도구를 만들고 힘을 모아 동물을 사냥했다. 가죽을 벗기거나 고기를 자르는 등 다양한 용도로 주먹도끼를 활용했다.
1만2천년 전 기후가 온화해지면서 사람들은 식물 자원과 바다 자원에 눈을 돌리고, 이때부터 신석기시대가 열렸다. 토기를 만들고 계절에 따라 이동 생활을 하고, 조, 피, 수수와 같은 작물을 키우는 초보적인 농경을 시작했다.
기원전 15세기경 벼농사를 중심으로 농경 생활을 했다. 수확한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를 만들고 때로는 전쟁도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등장한 권력자는 청동기를 만들고 소유했다. 이러한 흔적은 충주 조동리`호암동, 청주 쌍청리`비하동 유적 등에서 확인된다.
금속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삶과 세상은 크게 바뀌었다. 금속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청동기시대이다. 철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농기구나 공구는 석기에서 철기로 바뀌게 된다. 그 결과 농업생산력이 크게 향상되고 사회의 갈등과 통합도 빠르게 속도를 내게 되었다.
* 도구의 등장과 발전 - 무기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누를 만큼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주변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인간을 먹잇감으로 노리는 큰 육식동물도 종종 마주쳤습니다. 이탈리아의 과타리 동굴에서는 하이에나가 사냥한 네안데르탈인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위험한 환경에서 인간은 생존 전략을 세워야만 했습니다. 그 전략에 맞추어 슴베찌르개나 화살촉과 같은 다양한 사냥도구, 무기 등이 만들어집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 사람과 짐승이 아닌 사람과 사람 간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좋은 무기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가장 발전된 기술로 무기를 만듭니다. 또한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를 병사들과 구별하기 위해 간돌검이나 청동검과 같은 칼이 등장합니다. 칼의 등장은 군사력의 상징이었지만 점차 실용적인 무기로 변해갑니다.
* 도구의 등장과 발전 - 공구`비실용적 도구
먹거리는 항상 인류의 숙제였습니다. 맛있고 좋은 먹거리를 얻기 위해 사냥과 채집을 하며 살았습니다. 사냥을 잘하기 위해 더 날카로운 도구를 만들고 채집에서 농업으로 삶의 방식이 바뀌면서 더욱 다양한 도구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도구들은 다양한 재질로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땅을 파는 괭이는 무디게 만들지만 나무를 베는 도끼는 더 날카롭게 제작합니다.
재료의 발전은 더 많은 수확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실용성이 중요한 공구나 농구는 청동기와 같은 귀한 재료로 만들기 쉽지 않아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신분이나 재력을 나타내는 꾸미개 등은 귀한 옥이나 청동으로 만드는 차이가 있습니다. 결국 형태와 재질, 쓰임새로 도구가 가진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 도구의 등장과 발전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새로운 생활방식도 나타납니다. 재료의 한계가 있는 석기와 달리 토기는 점토로 다양한 형태를 만들 수 있었고 무언가를 새기는 것도 쉬웠습니다. 토기에는 다양한 무늬를 넣었는데, 예를 들어 빗살무늬는 짚풀이나 대나무로 만든 그릇이 토기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 지속되어 짚풀 등이 엮인 무늬가 남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모방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여기에 사람들이 미적 요소를 더해 다양한 문양을 넣거나 생략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러한 문양은 단순히 아름다움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이 보장되고 수확이 늘어나게 해달라는 기원을 나타냅니다.
그릇에 그려진 기하학 무늬는 그릇에 담긴 음식이 상하지 않고 오래 가거나, 그릇이 늘 가득 차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토기가 등장하는 것은 먹거리의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토기는 단순히 불에 굽는 것이 아니라 수육처럼 끓여서 연한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생으로 먹지 못하는 나물도 삶아서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토기의 등장으로 음식물을 불로 끓일 수 있게 되어 사람들의 식생활은 개선되었습니다.
* 금속 이전과 이후의 삶
세상은 금속을 만들기 전과 후로 나뉩니다. 금속을 만들기 전은 석기시대로, 사람들은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집하며 살았습니다. 계절에 따라 먹거리를 찾아 이동했고, 혈연바탕으로 한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새롭게 등장한 농경으로 한 곳에 정착하였고, 큰 강을 낀 비옥한 땅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재자가 나타나고 권력이 등장합니다. 권력자는 보통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청동기 등을 만들고 소유합니다. 전문적인 장인들이 금속을 만들고, 반짝이는 광택과 청명한 소리를 가진 금속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금속은 점차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도구를 대체하게 됩니다.
* 선사시대 집터
집터란 사람이 생활을 영위하던 집이 지어졌던 자리로서 그 곳에 남아 있는 구조물과 유물을 통해서 당시의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기 때문에 집터의 발굴은 고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구석기시대에서는 빈번한 이동생활에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을 이용하거나 지상에 간단한 막집을 지어서 생활하였다. 중원지방에는 석회암동굴이 발달되어 많은 구석기유적이 발견되고 있는데, 청원 두루봉`단양 금굴이 대표적이다. 동굴 안에서는 가죽으로 막집을 짓거나 아무 시설없이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야외의 막집은 지상에 막대기를 세워 묶어 텐트식으로 만든 뒤 그 위에 가죽을 덮는 것이 일반적으로 공주 석장리`제원 사기리 유적 등에서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가 되면 고기잡이나 농사를 위해 한 곳에 오래 정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움집을 짓고 산다. 움집은 일정한 넓이와 모양을 가진 구덩이를 파서 집바닥을 땅밑에 두고 구덩이 안에 필요한 시설을 한 후 그 위에 지붕을 덮는 구조로서 별도의 벽체시설이 없이 서까래가 바로 땅에 닿는 집을 말하나, 서까래가 지상에서 떨어진 반움집도 넓은 뜻에서 여기에 포함된다.
신석기시대의 움집은 지름 4~6미터 크기의 둥글거나 네모난 구덩이를 깊이 60~70cm 정도 판 다음, 움 주위에서 서까래가 중앙을 향하여 돌려가면서 걸쳐 뼈대를 형성하고 사이사이에 잔가지나 갈대 등을 엮어 지붕을 만들었다. 또한 집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바닥 중앙에 1개의 기둥을 세워 서까래의 중심을 받쳐주는 경우도 있고, 네 귀퉁이 가까이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 들보를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걸쳐 주기도 하였다. 따라서 전체적인 집의 형태는 원뿔이나 네모뿔 모양을 이룬다. 움집의 바닥은 진흙을 깔거나 불로 구워 단단하게 한 것이 많으며 바닥 가운데에는 냇돌을 돌려 만든 화덕이 설치되어 취사와 보온을 겸하였다. 움집 이외에도 바위그늘집터, 돌깐집터, 동굴집터 등이 발견되고 있는데 특히 중원지방에서는 신석기시대에도 동굴이 많이 이용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움집은 신석기시대의 것과 유사하나 움의 깊이가 얕아지면서 반움집이 발달하고 규모도 커지며 평면형태가 장방형인 것이 많아진다. 화덕자리는 움집의 한쪽에 치우쳐 설치되었고 두 개가 있는 경우도 있다. 그 형태는 주위에 돌을 돌리는 것도 있으나 아무 시설없이 바닥만 판 것도 있다. 기둥 구명은 대체로 벽 가를 따라 벽체기둥의 작은 구멍만 남아 있는 것과 바닥의 장축을 따라 1~4열의 큰구멍을 판 것들이 있는데 이러한 기둥배열의 차이는 시기와 지역차, 그리고 가옥 구조상의 변화를 함께 반영하고 있다. 지붕 기둥구멍으로 보아 대체로 맞배나 우진각지붕의 형태를 이룬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금강유역과 호남지방에서는 중앙에 두 개의 큰 기둥구멍이 있는 원형의 움집터가 유행하며 중원 계산리와 제원 양평리 등의 중원지방에서는 평면 타원형의 움집터도 발견되고 있다.
* 선사시대의 무덤
인류가 처음으로 주검을 매장하기 시작한 것은 중기구석기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의 무덤은 확인된 예가 없고 신석기시대에도 옹진군 시도의 돌무지무덤`춘천 교동의 동굴무덤`울진후포의 집단구덩무덤 유적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간단하게 땅을 파고 묻은 구덩무덤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믿어진다.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는 고인돌`돌널무덤`독무덤이 있다. 고인돌은 서유럽`동남아시아`인도`중국의 동해안`만주`한반도`일본 구주지방 등 그 분포지역이 넓다. 그러나 만주`한반도`일본 구주의 고인돌은 한반도 북부나 만주일대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하여 한반도 남부 및 일본으로 전파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인돌은 주검을 매장하는 위치에 따라 크게 두가지 형식으로 나뉜다. 탁자식 또는 북방식은 판돌로 땅 위에 긴 네모꼴의 방을 만들어 주검을 넣고 그 위에 크고 넓은 덮개돌을 얹은 형식이며, 기반식 또는 남방식은 땅 밑에 판돌이나 깬돌로 널을 만들어 주검을 넣은 다음 받침돌(지석)이나 돌무지 위에 덮개돌을 덮는 형식이다.
이러한 고인돌에는 민무늬토기`붉은간토기`간돌검`반달돌칼`돌살촉`가락바퀴 등이 주로 껴묻혀 있고, 청동제품이 발견된 예는 많지 않다. 중원지방에는 북방식은 거의 없고 남방식이 대부분이며 제원 황석리`중원 하천리 등의 고인돌들이 잘 알려진 유적이다.
돌널무덤은 북방시베리아 계통의 무덤으로 땅 밑에 판돌이나 깬돌로 널을 만들고 널 위에는 판돌`나무 등으로 뚜껑을 덮은 것으로 봉분이 원래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충청도 및 전라도 지역에서 나타나는 깬돌로 널을 만든 돌널무덤에서는 다량의 청동제품과 덧띠토기`검은간토기 등이 출토되어 지역적인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중원지방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청원 비하리유적을 들 수가 있다.
독무덤은 청동기시대에 부여`공주지역에서 쓰여진 독특한 양식으로 일상용 토기의 바닥에 구멍을 뚫고 바로 세워묻어 아가리를 판돌로 막은 형식이다. 초기철기시대에는 2~3개의 독이나 항아리를 맞붙여 묻었는데 대체로 그 크기가 작아 유아용 또는 어린이용으로 생각된다.
* 선사시대 토기
선사시대의 토기는 활석`운모`모래`조가비가루 등을 섞은 바탕흙을 사용해 손빚기`테쌓기`서리기 등의 성형법으로 빚어진다. 한데가마에서 600~800도의 낮은 온도로 구워지기 때문에 흡수성이 강하고 색깔은 흔히 갈색을 띠게 된다. 이들 토기는 시대에 따라 신석기시대의 덧무늬토기`빗살무늬토기, 청동기`초기철기시대의 민무늬토기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덧무늬토기는 토기 겉면에 진흙띠를 붙이거나 겉면을 가늘게 돋게 하여 아가리와 몸통부분에 무늬를 베푼 토기이다. 남해안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으며, 북으로는 양양 오산리까지 분포되고 있는데 빗살무늬토기보다 빠른 시기의 것이다. 반면 위의 토기와는 별개로 동북지방과 중서부지방에서는 아가리 밑에 한가닥 덧띠를 붙인 덧무늬토기가 신석기시대 후기에 나타나는데 빗살무늬토기의 빗살무늬가 덧무늬로 대체된 형태이다. 춘성 내평`제원 황석리유적에서 출토되는 덧무늬토기는 후자의 계통이다.
빗살무늬토기는 점과 선으로 구성된 기하학적 무늬를 베푼 토기로 시기와 지역에 따라 형태`무늬 구성이 다양해 많은 차이를 보인다. 중`서부 및 남부지방에서는 둥근 바닥의 장란형기형을 갖고 아가리`몸통`바닥에 서로 다른 무늬를 시문한 것이 특징적이나 시기가 늦어지면서 무늬가 차츰 생략되어진다. 동북지방에는 납작바닥의 깊은 바리가 많고 몸통에 생선뼈무늬`점줄무늬`번개무늬 등이 시문된다. 중원의 빗살무늬토기는 기본적으로 중섭지방의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계통이다.
민무늬토기는 그릇에 아무런 무늬가 없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나 아가리에 구멍 무늬나 짧은 빗금무늬가 베풀어진 토기, 가지무늬토기 등도 이에 포함되며 실제로는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에 제작된 토기를 지칭한다. 민무늬토기는 사용시기`지역`기능에 따라 여러 종류의 토기가 있으나 형태는 납작바닥의 깊은 바리와 단지가 주를 이룬다. 지역적으로 보면 서북지방에서는 공귀리`미송리형토기`팽이형토기가, 동북지방에서는 꼭지손잡이토기`구멍무늬토기`붉은간토기가 특징적이며 중부 이남에서는 위 지역의 영향을 받아 변형팽이형토기`구멍무늬토기`붉은간토기가 만들어지고 후기에는 검은간토기`쇠뿔잡이토기`덧띠토기 등이 새로이 제작된다. 한편 돌널무덤`고인돌 등의 껴묻거리용으로 붉은간토기`검은간토기 등이 특별히 만들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