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부산근현대역사관

부실이 2024. 7. 28. 12:50

방문 : 2024. 7. 7

 

* 인사말

부산 근현대사를 집중 조명하는 역사박물관이 부산근현대사역사관이름으로 새롭게 탄생합니다. 부산근현대역사관은 일제강점기 시기 건축물인 부산근대역사관(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미국문화원)과 한국 1세대 건축물인 옛 한국은행 부산본부 건물을 그대로 살려 새롭게 단장합니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의 부산은 근대도시로 탈바꿈하였지만 일제 수탈 기구들이 밀집하면서 외세 침탈의 최대 피해지이기도 하였습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임시수도, 1960년대 이후 산업 부흥의 기지 역할도 하였습니다. 민주화 시기에는 부마항쟁 등으로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큰 전환점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격동의 역사에서 비롯된 오늘날 부산의 정체성을 널리 알리는 역사관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부산근현대역사관은 원도심 역사문화자원을 적극 활용하여 관람객들이 부산의 근현대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어린이와 부모가 함께 즐기는 어린이 문화복합공간, 전시·공연 공간으로 새롭게 선보일 한국은행 금고, 다양한 지역사와 근현대사 자료와 도서를 열람할 수 있는 별관 등 살아있는 역사의 장소에서 부산의 근현대사를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박물관으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 1전시실

1876년 개항부터 1945년 광복까지를 살펴보는 근대도시 부산

 

* 01 관문을 열다

: 기산 김준근 무과시장 : 기산 김준근이 그린 말 타고 활 쏘는 무과풍경

: 해은일록 2 :   민건호(부산항 감리서 방판)  해은일록

조선시대 부산지역의 활쏘기 문화를 기록한 아주 귀중한 책이 있다. 해은일록이다. 1885년부터 1894년 까지 약 10년에 걸쳐 동래부읍성과 수군진영인 좌수영 및 다대진 일원에서 있었던 활쏘기를 구체적으로 일기문으로 남겼다.

: 인장과 인장함

 

* 02 달라진 부산, 근대의 시공간

: 회중시계

: 석유상자

: 수학여행기

: 부산 전차 노선도

 

* 03 부산항의 변천

 

* 04 근대를 향한 발걸음

: 일본경질 산수문 찻잔과 접시

: 수학일지

: 향전가극 [아리랑] 공연 포스터

 

* 2전시실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95년 광역시 이전까지를 살펴보는 '현대도시 부산'

 

* 05 생존과 희망의 도시

: UN의 날 기념 포스터

: 귀국동포보호협회 전단지

: 중앙서울피난초등학교 표창장

: 원조물품 상자

: 동명목재상사 나무 보관함

 

* 06 산업화 시대의 부산과 부산 사람들

: 범표신발 간판

: 럭키안내

: 전갱이, 고등어, 오징어 표식방류포스터

: 대한조선공사 리플릿

 

* 07 부산, 민주항쟁의 중심에 서다

: 고 박종철군 부산시민 추모제 전단

: 어느 여대생의 일기

 

[전시실 내용 정리]

 

* 2전시실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95년 광역시 이전까지를 살펴보는 '현대도시 부산'

 

* 194615일 발족한 부산의 국방경비대 제5연대의 훈련

* 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1947)에서 귀국한 손기정, 서윤복, 남승룡 선수의 귀국 환영행사(부산공설운동장)

* 임시정부 환국기념 환영대회에 참가한 군중들

* 1945916일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을 접수한 미군 제24군단 제6연대 선발대

* 광복과 함께 꿈에 그리던 고국의 품에 안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 봉환식(부산역 구내)

* 국제시장에서 열린 반탁운동

* 부산항으로 귀환하는 동포들

* 광복의 기쁨을 나누는 부산시민들

* 광복을 맞아 중앙로를 행진하는 부산항고등여학교(여중`) 학생들

 

* 생존과 희망의 도시

광복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와 치안대는 자치활동을 통해 부산의 당면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미군정기 동안 부산은 인구 증가와 식량부족, 고물가, 실업난으로 지역민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19506월 전쟁이 발발하자 국회와 대통령, 정부가 부산으로 내려오고, 군사시설과 각국 대사관, 유엔 기구, 학교 등도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부산은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행정과 정치 재건의 중심지였다.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 부산을 향한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원도심 인근의 공터와 야산은 피란민의 천막으로 뒤덮이고, 물은 부족하고 불은 넘쳐났다. 생존을 위해 돈벌이가 될 만한 일은 닥치는 대로 해야 했고, 희망을 놓지 않고 배움을 이어갔다. 이 시기 부산은 모두에게 생존과 희망의 도시가 되었다.

 

* 광복과 미군정, 피란수도 부산

일제의 패망으로 부산의 생산공장은 멈추고 실업률은 증가하였다. 부산항을 통해 연일 귀국하는 귀환 동포들의 구호도 부산이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치안대는 자치활동을 통해 부산의 당면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부산의 미군정은 치안과 행정체계의 복구, 제도적 민주주의의 정착에 힘을 쏟았지만, 미군정기 동안 인구 증가와 식량부족, 고물가, 실업난은 더욱 심각해졌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미군정은 종식되었다. 냉전의 분위기 속에 1950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수도를 부산으로 옮겼다. 부산은 3년간 대한민국 피란수도로서 행정과 정치의 중심지였고, 대한민국의 최후 보루이자 피란민의 생활 터전이었다.

 

* 광복과 미군정

광복 직후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산하 치안대는 일본이 떠난 행정 공백을 메우고, 질서 회복과 치안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부산 지역의 각종 구호회는 귀국동포연합회로 통합되어 귀환동포들의 임시 수용시설 제공, 교통편 알선 등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미군정기 부산은 산업시설 중지에 따른 실업률 증가, 해외동포 귀환과 북으로부터의 월남인 유입으로 인한 인구 급증과 인플레이션, 식량난, 콜레라 유행 등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미군정은 경제질서와 사회질서 확립, 보건위생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대응책을 마련하였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많은 한계를 노출시켰다.

 

* 피란수도 부산

부산은 전쟁의 발발로 국회를 비롯한 중요 정부기구, 미대사관, 유엔의 주요 기관들이 모여들면서 전쟁 극복을 위한 중심지가 되었다.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산업시설이 온전히 남아 있어 병참과 전후 재건의 중심도시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부산항으로 전쟁 물자를 비롯한 원조 물품과 민간 구호품이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또한 전쟁 기간 동안 유입된 많은 피란민들이 전쟁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터전이었다.

 

* 국제기구의 원조와 재건 활동

전쟁을 전후하여 대한민국의 전후 복구와 재건을 돕기 위한 유엔군과 유엔산하 국제기구, 민간원조단체의 구호와 원조, 재건 활동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국제연합한국재건단은 한국의 경제 성장과 재건을 위한 장기적이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행하였다. 유엔한국민사원조사령부는 피란민의 통제와 구호, 경제 현황과 인구 조사, 전염병 통제와 한국 의료진 교육 등 다양한 민사업무를 전개하였다. 국제연합민사원조사령부는 구호물자 도입과 피란민 구호, 난민 재정착 지원, 직업 훈련과 농사 지도 등의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다. 휴전 이후에는 한국민사원조사령부로 개편되어, 한국 정부 부처와 협력하며 다양한 민사업무를 수행하였다. 이 밖에도 유니세프, 적십자 등의 국제연합 산하 기구나 민간원조단체의 원조와 구호가 있었다.

 

* 영도다리와 점집

영도다리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만들어진 영도와 육지를 잇는 도개교이다. 6`25전쟁을 거치며 피란민들이 헤어진 가족을 찾고 그리운 고향 소식을 듣기 위해 찾는 애환의 장소가 되었다. 하늘로 솟구치는 영도다리는 당시 부산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서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전쟁으로 피란길에 올랐던 사람들은 가족과 헤어지며 영도다리에서 만나자라는 약속을 하였다. 영도다리는 가족을 찾는 사람들로 연일 붐볐으며 가족의 생사와 안부를 묻기 위한 점집이 성행하면서 점바치 골목이 생겨났다.

 

* 1950년 부산 거리의 직업전선

피란수도 부산의 거리에는 점집, 이발소, 도장집, 대서집, 사진관, 수선집 등 간단한 도구만 갖춘 노천 영업장이 즐비하였다. 피란민 중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생업활동을 할 수 있었다. 돈이나 귀중품을 챙겨온 일부 피란민은 국제시장에 점포를 내거나 작은 사업장을 꾸리기도 하였다. 그러지 못한 대다수의 피란민들은 국제시장이나 40계단 주변에서 행상을 하거나 그나마 일거리가 있는 부산항 부두와 군부대, 부산역 주변에서 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 국제시장

국제시장은 일제 말 미군의 폭격에 대비하고자 신창동 일대를 소개한 공터에서 출발하였다. 광복 이후 형성 초기에는 돗데기시장으로 불리며 귀환동포나 철수하는 일본인의 물건이 주로 거래되었으나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점차 미군 물자도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6`25전쟁으로 국제시장의 기능과 규모는 더욱 확대되었다. 국제시장은 피란민의 생활 근거지였으며 피란수도 경제의 중심지였다. 당시 생필품은 수요에 비해 공급량이 턱없이 부족하여 진열해 놓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상인들은 얌생이질로 빼돌린 군수품과 구호물자, 밀수품까지 취급하였다. 불법 물자 거래는 당국의 감시대상이었으나 도망, 물건 숨기기로 단속반을 피하고 일부는 당국과 결탁하여 단속 정보를 공유하는 등 각각의 생존 전략을 마련해 나갔다.

 

* 판자촌과 대화재

광복과 연이은 6`25전쟁으로 부산에 밀려든 피란민들이 폭증하면서, 전쟁 직전인 194947만 명이던 인구가 전쟁이 끝난 이후 1955년에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대청동과 보수동, 용두산, 영주동 등 산동네와 해안가처럼 피란민의 일터에서 가까운 곳은 판잣집으로 뒤덮이게 되었고 화재는 끊이지 않았다. 판자와 종이상자로 지은 집은 다닥다닥 붙어있어 화재가 났다 하면 큰불이 되기 일쑤였다. 19531월에는 국제시장 대화재로 상가 4200여 채가 불탔고, 이재민 3만여 명이 발생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영주동 판잣집에서 발화된 불이 강풍을 타고 부산역과 부산우체국 주변을 전소시킨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 부산에서 살아남기

부산은 광복 이후 정착한 귀환 동포들과 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란민들로 초만원이었다. 급격한 인구 증가로 도시기능은 마비되었고 주택난, 식량난, 식수난, 교통난 등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돌아갈 곳 없는 이들에게 부산은 버티고 살아남아야 할 최후의 보루이자 희망의 땅이었다. 국제시장과 40계단, 부산역과 부두는 피란민들의 대표적인 생존 현장이었다. 피란수도 부산에서도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문화예술인들은 광복동의 다방을 중심으로 미공보원, 국립박물관 등 다양한 문화공간에서 전시회와 발표회를 이어갔다.

 

* 교육과 의료

전쟁의 와중에도 학교 교육은 멈추지 않았다. 부산의 학교시설들이 대부분 군수자언으로 징발당한 상황 속에서 부산의 학교와 피란학교들은 가교사를 지어 수업을 진행하였다. 피란대학들은 부산에서 처음으로 전시연합대학을 발족하여 대학교육을 이어갔다. 전쟁으로 피란수도가 된 부산에는 수많은 피란민과 전재민이 모여들었다. 이들에 대한 의료와 구호는 생존과 관련하여 부상병 치료와 후송, 전재민과 극빈자 무료 진료, 의료 인력 양성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당시 열악한 의료 환경의 개선에 도움을 주었다. 부산의 기독교계 선교병원도 유엔과 외국원조단체의 지원을 받아 무료 진료와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 피란 예술인과 부산의 문화공간

피란지 부산에서도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특히 광복동 일대 다방은 피란 예술인들의 안식처이자 주요한 창작 공간이었다. 다방에는 화가, 문학인, 음악가, 영화인, 사진작가 등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었다. 녹원다방에서는 시인 조병화의 출판기념회가 열렸으며, 대청동 루네싼스다방에서는 [기조전, 토벽동인전] 등 화가들의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고아복동의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2층에 위치했던 밀다원은 피란 문인들의 아지트 겸 안식처가 되었다. 피란수도 부산의 광복동, 남포동, 대청동, 창선동, 동광동 일대에는 40여 개의 다방이 새로 문을 열어 이른바 다방 거리를 이루었다.

 

* 대한도기와 피란 화가

대한도기는 일제강점기 최대의 근대 도자기 회사였던 일본경질도기를 해방 이후 1950년 지영진이 인수한 것으로 판매용 생활 도자기를 주로 생산하였다. 한편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란 온 화가 중 변관식, 김은호, 김학수, 황염수, 장우성, 전혁림 등이 대한도기에서 도자기 그림을 그렸다. 핸드페인팅 도자기는 수출용이나 기념품의 수요에 맞춰 한국의 전통적인 풍속이나 풍경을 주제로 하였다. 피란 화가들의 필체가 남겨진 대한도기 핸드페인팅 도자기는 피란지 부산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이 낳은 산물이다.

 

* 산업화 시대의 부산과 부산 사람들

부산은 광복과 전쟁을 거치면서 인구증가와 원조물자의 도입항이라는 유리한 조건으로 공장들이 생겨나고 기업들이 몰려들면서 산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정부직할시 승격을 계기로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섬유, 금속, 화학, 고무 등의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크게 성장하였으며, 섬유`합판`신발산업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승객`화물 등 수송망이 확충되고 부산항 개발사업으로 항만시설이 확장되자, 부산은 대한민국 수출입의 관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일자리를 찾아 농촌에서 유입된 사람들로 부산의 인구는 가파르게 증가했다. 이들은 제조업, 수산업, 물류업 등에 종사하며 수출 최전선 부산의 산업화를 일구었다. 한편,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이면에는 인구과밀화에 따른 주택난, 교통문제, 환경오염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이 숨겨져 있었다.

 

* 늘어나는 일자리, 모여드는 사람들

피란수도 부산에는 많은 사람과 돈 그리고 시설 등이 집중되었다. 또한 각지에 있던 기업들도 부산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부산의 대표적인 신발기업으로 성장하는 동양고부, 태화고무 등이 전란을 피해 부산으로 이전하였다. 성창기업은 전후 합판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자 1955년 부산으로 진출하였다. 이 시기 제일제당, 고려제강, 건설화학공업, 협성해운, 오복식품 등이 새롭게 생겨났다. 휴전 이후에도 많은 양의 원조물자와 민간무역물자가 부산항을 통해 들어오고 최초 하역지인 부산의 산업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 부산의 신발산업

부산의 신발산업은 일제강점기 고무신 제조로 시작되어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부산의 주요 산업으로 성장하였다. 1950년대에는 전쟁의 영향으로 군용신발의 주문이 늘어나고 일반 신발의 수요도 급증하면서 부산은 신발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1960년대에는 서면 일대를 중심으로 진양, 동양, 태화, 보생, 국제화학 등 우리나라 대표적인 신발회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70년대에는 대외 수출이 활발해지면서 최대의 황금기를 맞았지만, 1970년대 후반 미국의 수입 규제로 생산성이 위축되면서 1985년 국제화학이 파산하는 등 부산의 신발 산업계는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1990년대 초 부산의 신발업체 다수가 조업을 중단하거나 해외로 발길을 돌렸다.

 

* 산복도로와 도시 노동자

산복도로는 도로라기보다는 삶의 터전이다. 실제로 인근 지역민들의 삶의 터전 자체를 산복도로라고 부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 농촌경제의 몰락으로 도시에 모여든 외지인들이 부산항과 가까운 경사진 산지에 정착하면서 산동네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부산항을 통해 귀환한 동포들과 6`25전쟁기 월남 피란민들, 산업화 시기 일자리를 찾아 유입된 이주민들이 정착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주민들은 제조업, 수산업, 물류업 등에 종사하면서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이에 부산의 산동네는 더욱 확장되었다. 1964년 동구 초량동에 처음으로 마을을 잇는 도로가 개설된 이후로 점차 확장 개통되면서 지금의 산복도로가 형성되었다.

 

* 재건의 기반이 된 부산의 산업

광복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부산에는 원조물자를 바탕으로 한 섬유, 제분, 제당 등 삼백산업이 발전하였다. 이 밖에도 전쟁 복구, 재건에 필요한 건축 자재, 생필품 등의 제조업이 활기를 띠었다. 정부의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1960년대 부산에는 제1항만이라는 유리한 입지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섬유`식료품`금속`기계, 화학`고무 등의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크게 성장하였다. 1963년 직할시 승격 이후 부산은 획기적인 수출 신장을 이루게 되었다. 1960년대 말을 정점으로 둔화되었지만 주요 수출 품목인 섬유`합판`신발산업은 1970년대에도 꾸준히 성장하였다. 하지만 이후 정부 주도의 중화학 공업정책의 전략 지역에서 배제되었고, 급변하는 환경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이에 조선방직 폐업(1968), 금성사 이전(1975), 동명목재 경영실패(1980) 등으로 부산의 산업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 대기업의 요람

6`25전쟁 전후로 많은 기업들이 부산으로 모여들거나, 새로운 기업들이 부산을 기반으로 생겨났다. 동명목재, 조선방직, 태광산업, 태화고무, 국제화학, 동양고무, 동산유지 등의 기업들이 전쟁 경기를 타고 도약을 준비하였다. 여기서 생산한 합판, 신발, 비누 등은 부산항을 통해 세계로 수출되었다. CJ의 모태인 제일제당, LG의 모태인 럭키화학과 금성사, 대우의 출발인 대우실업과 대우자동차 등 우리나라 대표적인 대기업들이 부산에서 출발하였다.

 

* 잠들지 않는 부산항

부산항은 수출 중심의 우리나라 경제구조에서 거점 항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1960년대 부산항은 1962년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시작과 함께 본격적인 무역항으로 성장하였다. 부산항을 통해 해외로 수출되는 물동량은 급속히 증가하여 1972년 우리나라의 50%를 차지하였다. 물동량이 증가함에 따라 항만시설의 확충이 필요하였다. 1974년부터 1991년까지 3단계에 걸친 부산항 개발사업이 진행되어 컨테이너 전용부두와 대형부두가 건설되고 화물별 전용부두와 현대적 하역 장비를 갖추었다. 국제여객터미널과 연안여객부두도 축조되었다. 감천항과 신선대부두가 들어서면서 부산항은 본격적인 컨테이너부두 시대를 열었다. 2000년대에는 부산 신항 건설과 북항 재개발 사업으로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고 있다.

 

* 부산은 항구다

부산항은 6`25전쟁기 유엔군의 착륙지이자 전시물자가 들어오는 안전한 통로였다. 1950년대 수출입 물동량이 급증하면서 대한민국 최대 물류항으로 성장하였다. 동시에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원양어업의 성장으로 해양산업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1960년대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함께 본격적인 무역항으로 성장하였다. 1974년 이후 3단계에 걸친 부산항 개발사업이 시작되어 항만시설이 확충되면서 1990년대에는 본격적인 컨테이너 부두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동안 부산항의 핵심이었던 북항은 재개발사업으로 시민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부산 신항을 비롯하여 감만부두와 신선대부두의 성장으로 부산항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물류항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부산항의 마도로스

마도로스란 국제 항로를 다니는 배의 선원으로 산업화 시대 해양도시 부산을 상징하는 직업이었다. 1957년 지남호의 출항 이후 원양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마도로스는 상당한 수입을 보장하고 외국 문물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어 남성들이 선망하는 직업이 되었다. 부산항에 입항한 마도로스들이 주로 드나들던 남포동은 번화가이자 부산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 항구와 사람들

남항은 자갈치시장과 공동어시장, 냉동`냉장 창고와 수산물 가공업체가 자리하고, 영도의 물양장(전면 수심이 보통 4~5m이내인, 1천톤급 미만의 소형선박이 접안 하는 간이부두. 주로 어선 부선 등이 접안하여 하역을 함. 소형선 부두)과 수리조선소들이 밀집한 지역으로 컨테이너 터미널과 더불어 부산의 해양산업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6`25전쟁 이후 전국의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오면서 자갈치시장에는 생활령이 강한 자갈치 아지매가 생겨났다. 이후 산업화 시절 부산에서는 수리조선업과 원양어업이 게 발달하였다. 마도로스가 되기 위해 전국에서 청년들이 부산으로 모여들었고, 영도에는 깡깡이 아지매의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자갈치아지매와 깡깡이아지매

자갈치아지매와 깡깡이아지매는 강인한 부산 여성을 상징한다. 자갈치아지매는 자갈치시장에서 생선을 판매하는 여성으로 6`25전쟁 이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피란민 여성들이 많았다. 1960년대 본격적으로 등장한 깡깡이아지매는 영도의 수리조선소 현장에서 일해 온 여성들이다. 배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배 밑바닥에 붙어 있는 부식된 녹과 조개껍데기 등을 벗겨내는 작업을 하였다. 망치를 들고 작업을 하기 때문에 망치질에서 나는 깡깡깡소리가 이들을 부르는 명칭이 되었다. 자갈치아지매와 깡깡이아지매는 특유의 억척스러움과 활기 넘치는 생명력으로 부산을 대표하는 여성이 되었다.

 

* 베트남 파병의 관문 부산항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19649월 시작되었다. 1차 파병에는 의무장교, 위생병, 간호장교 등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 등 총 140명이 부산항 제3부두를 출항했다. 이듬해인 196543월에는 후방 군사원조 목적으로 비전투병력 비둘기부대가, 같은 해 가을에는 전투병력인 청룡부대와 맹호부대가 부산항을 떠났다. 이어서 십자성부대와 백구부대도 출발했다. 이후에도 추가 요청에 따라 혜산진부대, 백마부대가 부산항을 통해 파병되었다. 8년 동안 여섯 차례 파병이 있었고, 베트남으로 떠난 한국군의 숫자는 모두 34만 명에 이른다. 부산 항구는 베트남으로 떠나는 병사들을 환송하는 행사뿐만 아니라 전쟁터로 가는 자식을 붙잡지 못하는 부모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뒤섞여 북새통을 이뤘다.

 

* 도시의 성장과 변화

부산은 1962년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작과 1963년 정부직할시 승격을 계기로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남북`동서 간의 승객`화물 수송망이 확충되고, 부산항 개발사업으로 항만시설이 확장되자 부산은 대한민국 수출입의 관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부산 경제는 1970년대 이후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중화학중심의 산업구조로 빠르게 전환하지 못해 침체를 겪게 되었다. 1985년 광역시 개편과 더불어 새로운 도심들이 형성되고 1998년 시청사가 연제구로 이전되면서 원도심 일대는 점차 활력을 잃게 되었다.

 

* 직할시 시대 도시 공간의 확장

1963년 정부직할시 승격은 도시 발전의 활력소가 되었다. 1963년 연산동 전역, 구포, 사상, 북면, 송정리가 부산시에 편입되었고, 1978년에는 김해군 대저읍, 명지면이, 1989년에는 김해군 녹산면, 가락면과 창원군의 천가면(가덕도)이 부산시에 편입되었다. 당시 부산의 도시공간은 525KM2로 확장되었고, 인구 400만 대도시로의 성장을 본격화했다. 이 시기에 경부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가 각각 완성되어 부산을 기점으로 한 남북 간`동서 간의 승객`화물수송망이 확충되었다. 경부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는 부산 시내 도로망과 터널 공사로 부산항과 연결되었다. 터널은 만덕터널, 구덕터널, 부산터널, 황령산터널이, 도로망으로는 산업도로, 도시고속도로, 충장로, 동서고가도로가 도심을 가로질렀다.

 

* 수출증진

1962~1969년간 부산의 수출 실적은 4백만 달러에서 15700만 달러로 41배 증가하였다. 이는 11배 증가한 전국에 비해 매우 높은 성장률이다. 부산의 수출 규모가 우리나라 총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2년의 6`9%에서 196925`2%까지 이르렀다. 특히 직할시로 승격된 1963년 이후 획기적인 수출신장을 이루었다. 1970년대 이후 부산의 수출 증가율은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부산의 수출증가율은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부산의 수출실적은 19배 증가하였으나 같은 기간 우리나라 전체 수출실적은 24배로 증가하였다. 부산 수출의 전국 비중은 197229`2%를 정점으로 점점 낮아졌으며 1979년에는 19`4%로 나타났다.

 

* 고용의 증대와 인구증가

1962년부터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자 경제개발계획의 전초기지인 부산에서의 고용기회는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일자리를 찾아 인근 경남과 경북, 서울, 전남의 이촌향도민이 유입되어 1976~`980년 사이 인구 증가율은 26%에 이르고 부산의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이후 1981~1985년 사이에도 10`8% 증가하며 증가세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1981년부터 시외로 공장이 이전하자 증가 속도는 지속적으로 둔화되어 1990년대 초반부터는 감소세로 바뀌어 갔다.

 

* 부산의 주요 수출 상품

1960년대 이후 부산의 수출 산업별 구성은 공산품이 압도적이다. 부산의 주요 수출상품은 1960년대에 합판, 의류, 신발이 3대 품목을 이루었다. 1970년대의 부산 수출은 으, 합판, 신발, 철강 등의 4대 품목에 의해 주도되었다. 특기할 것은 1970년대에 들어 부산 수출에서 철강, 선박, 전자제품 등 중화학제품이 10대 품목에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80년대 부산의 주요 수출품목은 신발, 의류, 직물이며 1984년까지는 섬유류의 비중이 신발류보다 높았으나 1985년부터는 신발류가 앞서기 시작하였다.

 

* 서면교차로

1960년대 서면 일대는 피란민의 유입으로 인구가 증가하였고, 서서히 산업,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1957년 부산에서 처음으로 회전식 로타리가 조성되었다. 1963년 직할시 승격을 기념하는 부산탑이 로터리 가운데 조성되면서 전차는 탐 아래를 통과하였다. 1968년 전차가 철거되고 교통량이 증가하여 서면 로터리의 교통체증은 전국적으로 악명이 높았다. 198010월 도시철도 1호선 공사가 착공되면서 1981년 부산탑과 회전식 로터리는 철거되었다. 1985년 도시철도 1호선 개통에 이어 1999년 도시철도 2호선이 개통되었고, 서면교차로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한편 서면교차로는 산업화와 인구증가에 따라 시민들의 생활 및 문화공간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4`19혁명, 6월 항쟁 때에는 부산 사람들이 독재에 저항하는 정치공간이었다.

 

* 시민항쟁

부산사람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 선거에 항거한 4`19혁명을 거치며 더욱 강렬해졌다. 197910월 부산 시민들은 부마민주항쟁을 일으켜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부마민주항쟁이 뿌린 씨앗은 19805`18민주화운동을 거쳐 19876월 민주항쟁으로 결실을 맺으며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6월 항쟁 이후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은 1990년대 시민운동의 자양분이 되어 지역사회의 민주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7년 이후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정착되면서 시민사회 내에서 실질적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시민운동이 확산되었다.

 

* 부산의 시민항쟁

부산의 4`19혁명1960년에 일어난 4월 혁명은 이승만 정권이 획책한 부정 선거 규탄에서 시작하여 반독재 민주화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선거를 앞두고 전국적으로 학생시위가 일어나고 부산에서도 3월부터 학생들의 연합시위가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419일에는 경남공고, 데레사여고, 부산상고 등 고교생과 시민들이 합세하여 민중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부산의 시위는 도시빈민층의 참여가 두드러지며 이승만의 하야 뒤에도 더욱 격렬해졌다. 4월 혁명 이후 학원가에는 민주화운동이 전개되며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교원노조 운동이 시작되었다. 노동계의 노동운동도 본격화되고 사회운동과 통일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 부산의 학생들 일어나다

학원을 정치에 이용하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은 1960315일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고조되어 있었다. 2`28대구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선거당일인 315일에는 마산시민들과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와 유혈 사태가 발생하였다. 4113`15마산 시위에 참가했던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자 마산에서는 곳곳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전국적인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발전하였다. 부산의 학원가도 3월부터 공명선거와 학원의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내세운 벽보를 부착하고, 삐라를 살포하며, 가두 시위를 시도하는 등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312일 영도 해동고 학생들의 가두 시위 이후 부산지역 고등학생들은 대규모 연합시위를 통해 3`15부정 선거를 비판하고 구속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 학생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

419일은 경남공고, 데레사여고, 부산상고 학생들의 주도로 부산 지역 최대의 연합시위가 서면과 범일동 일대에서 전개되었다. 경찰의 무차별 대응에 분노한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서면 일대는 이승만 정권에 저항하는 민중과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현장으로 변했다. 426일에는 노인들과 어린이 시위, 부산대학교 의과대학과 동아대학교 교수단의 시위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이후에도 그간 누적되었던 시민들의 불만이 표출되면서 부산지역 대부분의 경찰서와 파출소가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다.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 중에는 구두닦이, 지게꾼과 넝마주이, 엿장수 등 도시 빈민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들은 부산이 가지고 있던 경제적 모순을 견뎌오다가 시위를 통해서 자신들의 불만을 강하게 표출하였다.

 

* 6월 항쟁 그 이후

6월 항쟁은 부산시민사회의 정치적 의식이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전개된 노동운동을 비롯한 각종 대중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6`29 민주화선언 이후에 부산은 7,8,9월 노동자 대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노동자 투쟁은 7월 태광산업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 농성을 시작으로 제조업, 운수업, 서비스업, 수산업 등으로 확산되며 최대규모의 노동쟁의로 발전하였다. 특히 섬유, 신발 등 수출 위주의 제조업 사업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노동자 투쟁의 결과로 노동운동은 빠르게 발전하였고 신규 노조가 결성되어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876월 항쟁 이후 시민사회의 역량이 강화되고 민주화가 진전됨에 따라서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변화를 겪게 되었다.

 

* 부산의 6월 항쟁

1985년 정치권에서는 직선제 개헌안이 공론화되며 각 분야에서의 민주화운동도 활발해졌다. 부산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가 결성되면서 재야 민주화 세력이 결집하게 되었다. 부민협은 1987년 민주화 운동의 구심체였던 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6월 민주항쟁 기간 중에 부산에서는 약 30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6`10부산시민대회를 시작으로 격렬하게 전개된 시위는 이태춘이 사망함으로써 더욱 거세졌다. 616일부터 시작된 부산가톨릭센터 농성은 명동성당 농성 해산 이후 항쟁의 불씨를 다시 되살리는 구심점이 되었다. 부산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저항이 계속되자 결국 정부는 6`29민주화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수용하였다.

 

* 6월 항쟁과 부산, 그곳의 기억들

6월 항쟁은 1985년 이후 시작된 개헌논의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군사정권은 그 간의 개헌 논의를 중지하는 반민주적 4`13호헌조치를 선언하였다. 민주세력은 이에 대응하는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6`10민주항쟁을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6`10부산시민대회가 광복동 대각사를 중심으로 남포동, 충무동, 대청로 일대에서 벌어졌다. 616일 이후 시위대의 일부는 경찰의 진압을 피해 부산가톨릭센터에 들어가 시위를 이어갔다. 부산가톨릭센터 시위는 명동성당의 시위를 이어받아 항쟁의 불씨를 되살리는 구심점이 되었다. 6월항쟁 이후 시민사회의 역량이 강화되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 요구가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 부마민주항쟁의 전개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이후 반정부 정서의 고양, 부산 지역 내 저항 세력의 성장을 배경으로 한다. 19791016일 부산대 학생들의 교내시위를 시작으로 부산 지역 각 대학생들이 광복동과 남포동 등 시내 중심가에 진출하면서 시민들이 합세하여 민중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시위대는 언론사, 세무서, 파출소 등 공공기관들을 파괴하면서 유신체제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평등에 저항하였다. 정부는 17일 부산대에 휴교령을 내리고, 180시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하였다. 18일에는 경남대 학생과 마산시민들의 시위가 시내 전역을 휩쓸었고 20일 마산에는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유신정권 내부에서는 부마항쟁의 수습 문제로 갈등이 빚어져 10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사망하였다. 이로써 유신체제의 기나긴 터널은 끝이 났다.

 

* 1979, 부마

부마민주항쟁은 197910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을 비롯해 마산, 창원 등 경남 일원에서 유신체제에 대항하여 발생한 민주화운동이다. 유신체제 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와중에 발생한 부산대 학생시위는 유신체제 이후 최대 규모의 시민항쟁으로 확산되었다. 부마민주항쟁은 시민들의 손으로 기나긴 유신체제의 종말을 이끌어낸 민중항쟁이었다. 그러나 연이어 들어선 군사정권으로 부마민주항쟁은 긴 침묵 속에 잊힌 항쟁이었다. 부산시민들의 오랜 노력 끝에 2019년 공식적인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

 

* 고향 부산으로 돌아오다

[동백아가씨]를 비롯하여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킨 한국의 대표 작곡가 고 백영호 선생 그가 남긴 친필 악보, 육성 릴테이프, 가요음반, 생활자료 등 12000여 점의 귀중한 자료가 장남 백경권의 기증으로 202112월 고향인 부산에 다시 돌아왔다.

1964년에 발표한 [동백아가씨]는 발표와 동시에 우리나라 음반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대중가요 역사상 최초로 백만 장을 넘기며 기록적인 인기와 대중적 성공을 거뒀다. 당시 무명가수였던 이미자를 국민가수로 만들었고, 영화, 드라마 주제곡하면 작곡가 백영호라는 공식이 생겼다. 동백아가씨의 성공은 당시 스탠다드팝 중심의 가요계 흐름을 바꾸며 우리나라 트로트의 전성기를 여는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 박물관 관람 후기

부산근현대역사관은 일제시대 때 세워진 건축물로 2003년에 부산근현대역사관으로 용도를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오래된 건물인데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적절히 배치해서 이용자의 편리를 도모했고 전시실 내부도 불편한 줄 몰랐다. 최신식 전시 기법을 도입해서 전시실 해설사를 배치하지 않았어도 좋았다. 봉사자가 계셔서 마주쳤을 때 질문을 드렸는데 봉사자는 전시실에 관해서 이미 교육을 받아서인지 설명을 수월하게 해주셨다.

불편했다면 먼저 제1전시실 입구에서 입구를 찾지 못해 3층으로 올라갔다는 점이다. 가까이에서 봉사자를 만났더라면, 또는 안내 팜프렛을 보았더라면 그런 실수 없이 다 보고 왔을텐데3층 제2전시실을 사진을 찍으며 돌아보느라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박물관은 1층 찻집을 겸한 휴게실로 꾸며놨는데 간식을 먹거나 차를 마시면서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적절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