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 이전 사람들의 삶
낙동강 하류 일대는 가야인들이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킨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인간 활동의 흔적은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구석기인들은 먹거리를 찾아 옮겨 다니며 이동 생활을 했습니다. 신석기시대에는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살며 물고기나 동물을 잡고, 식물채집으로 먹거리를 얻었습니다. 간석기와 토기를 사용하였고 초보적인 농사도 지었습니다. 청동기시대에는 청동기와 간석기, 민무늬토기를 사용하였습니다. 벼농사 등 농경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낮은 구릉이나 평지에는 큰 마을이 들어섰습니다. 거대한 고인돌은 농경사회 마을 공동체 의식이 크게 성장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 신석기시대 배와 노
창녕 비봉리유적 신석기시대 문화층에서 발견된 배와 노입니다. 약 7700여 년 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남아 있는 배 조각의 길이는 최대 310cm, 폭은 62cm입니다. 200년 된 소나무의 속을 파내어 U자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돌자귀로 파내기 쉽도록 불에 그을린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습니다. 현재까지 출토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로 일본 조몬시대 배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것입니다. 노의 몸통은 길쭉한 이등변삼각형을 띠는 날렵한형태이고 손잡이 부분은 쥐기 쉽게 둥글게 만들었습니다.
* 강과 바다로 가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부족한 자원을 주변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얻었습니다. 때로는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동남해안 일대 유적에서 발견된 흑요석과 일본 조몬토기는 일본 규슈지역과 교류했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투박조개로 만든 조개팔찌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대표 교역품 중 하나였습니다.
* 가장 오래된 삶의 흔적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돌을 깨뜨려 사냥과 채집 활동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찌르기, 자르기, 파거나 긁어내기, 빻기 등 다양한 용도에 맞는 뗀석기를 제작하였습니다.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돌을 이용했지만, 용도에 따라 특정한 돌을 골라 만들기도 했습니다. 커다란 석기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지고 정교해졌습니다.
* 지구가 생기고 4번의 큰 빙하기가 찾아왔습니다.
그 중 마지막 빙하기가 지금으로부터 약 260만년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20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최초의 인류(호모 에르가스테르, 호모 하빌리스)가 등장했습니다. 120만 년 동안 따뜻한 아프리카에서 살던 인류는 기후가 변화하자 점차 다른 지역으로 살 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인류가 내딛는 위대한 한 걸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환경 적응력이 뛰어난만큼 다양한 식물과 동물 자원을 가까이에서 구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좋아했습니다. 그러한 자연환경을 찾아 한반도 동쪽 끝에 정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다
약 1만년 전 날씨가 점차 따뜻해지면서 한반도의 자연환경이 지금과 비슷하게 변해갔습니다. 활과 화살을 이용해 사슴, 멧돼지 같은 따뜻한 날씨에 사는 빠른 동물들을 사냥했습니다. 강가나 바닷가에서는 뼈나 돌로 만든 낚싯바늘과 작살, 그물을 이용해 다양한 먹거리를 확보했습니다. 망태기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사냥과 채집으로 얻은 먹거리를 넣어 두었을 것입니다. 돌로 만든 보습, 괭이를 이용해 땅을 일구며 농경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 멧돼지를 새긴 토기 조각
창녕 비봉리유적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토기 조각입니다. 보통의 신석기시대 토기와는 달리 표면에 동물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두 앞다리와 등에 난 뾰족한 털로 보아 멧돼지 종류로 추정됩니다. 멧돼지는 사슴과 더불어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선호하던 식량이자 가죽, 뼈 등 쓰임새가 다양한 사냥감이었습니다. 이 독특한 사례는 비봉리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사냥 성공에 대한 염원을 토기에 표현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망태기
신석기시대 사람들에게 채집활동은 여전히 중요한 먹거리 확보 수단이었습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물 줄기나 뿌리는 안정적인 식용자원이자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재료였습니다. 비봉리 유적 신석기시대 층에서는 갈대를 엮어 만든 망태기가 발견되었는데 실물 자료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갈대는 물가에서 구하기 쉬웠고 여러 갈래를 엮어 만든 망태기는 사냥하거나 채집한 먹거리를 담아 여기저기 옮기는 데 훌륭한 가방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 토기의 등장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진흙을 구우면 단단하게 변한다는 것을 터득하고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토기의 발명으로 어렵게 확보한 먹거리의 보관, 운반이 손쉬워졌고 조리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대략 1만 년 전에 출현한 토기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생김새와 무늬가 다양해집니다. 덧무늬, 눌러그은무늬 등 다양한 무늬 중에서도 무늬새기개로 그어 새긴 빗살무늬가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 발찌와 팔찌
통영 연대도 조개더미 유적에서 발견된 발찌입니다. 무덤 주인공은 장년 남성으로 키가 약 160cm 정도로 추정되는데 돌고래, 수달, 너구리 이빨로 만든 발찌를 오른쪽 발목에 차고 있었습니다. 팔찌는 투박조개로 만든 것이 많습니다. 투박조개는 표면이 매끈하고 단단하여 팔찌를 만들기 알맞을 뿐만 아니라 주로 얕은 바다의 모래밭에 서식한 덕에 구하기도 쉬웠습니다. 가덕도 신석기시대 공동묘지, 김해 수가리 조개더미 유적 등 남해안 일대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죽은 이의 손목에 끼워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 농경과 마을의 탄생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신석기시대 조`기장 위주의 소규모 잡곡 농사와는 달리 벼농사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면서 큰 규모의 마을이 생겨났습니다. 여러 채의 움집, 논과 밭 마을 전체를 두른 도랑이나 울타리가 청동기 시대 마을 풍경을 그려냈습니다. 농사가 가장 중요한 생업수단으로 정착하면서 땅을 일구고 수확하는 도구들도 발달하였습니다.
* 청동기시대 살림살이 - 돌로 만든 도구
농사가 청동기시대 중요한 생업수단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사냥과 물고기잡이는 여전히 중요한 먹거리 확보 방법이었습니다. 돌화살촉과 돌창, 그물추가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각종 생활 도구를 만드는데 나무는 이때에도 핵심 재료였습니다. 남를 정교하게 가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도구가 발달했습니다. 조갯날 도끼, 자귀, 대팻날, 끌 등이 대표적인 목공구입니다. 옥돌을 다듬어 영롱한 빛깔을 내는 목걸이를 만드는 데도 돌로 만든 공구를 사용했습니다.
* 청동기시대 토기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사용한 그릇은 민무늬토기입니다. 민무늬라 하지만 아가리 곁면에 짧은 선이나 구멍 등 간단한 무늬를 새기기도 했습니다. 바리`대접`접시`항아리`독 등 필요한 용도에 따라 생김새가 다양하지만 바닥은 대체로 납작합니다.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와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른 특징을 보이며 꾸준히 사용되었습니다.
* 붉은간토기와 가지무늬토기
붉은간토기와 가지무늬토기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특별히 많은 공을 들여 만든 특별한 토기입니다. 붉은 안료를 개어 발라 문질러 윤을 내거나 독특한 방식으로 검은 가지무늬를 표현했습니다. 질 좋은 바탕흙을 사용한 데다 정성스레 만든 덕에 다른 살림살이처럼 투박하지 않고 세련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귀한 그릇으로 대접받았고 무덤의 껴묻거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 고인돌 - 농경사회의 기념물
농경사회에서는 물 대기, 씨 뿌리기, 수확하기 등 마을 전체의 단결과 공동 노동이 중요해졌습니다. 농경의 발달은 공동체 안팎으로 여러 갈등을 발생시켰고, 이를 조정하는 인물의 역할과 권위도 점차 높아졌습니다. 거대한 크기의 고인돌에 넣어 둔 돌칼과 돌화살촉은 이러한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일부 과장된 크기와 형태의 돌칼과 돌화살촉은 실용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점에서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음을 알려줍니다.
* 덧띠토기문화의 등장
덧띠토기는 민무늬토기의 아가리에 점토띠를 붙여 만든 것입니다. 아가리에 덧붙인 점토띠의 자른 면은 원형에서 삼각형으로 변합니다. 아울러 검은간토기, 굽다리접시, 한국식동검을 비롯하여 청동으로 만든 공구와 무기 등 새로운 물건들이 출현하였습니다. 무덤은 고인돌을 대신하여 개인의 권력과 위신을 보여주는 널무덤 위주로 변합니다. 삼각형 점토띠로 변할 즈음에는 새로운 철기문화도 유입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기나긴 선사시대의 막이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현상입니다.
* 철기의 사용
철은 고대사회 형성과 변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광석에서 뽑아낸 철로 생활도구나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첨단 기술이 필요했고 이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데 한층 성숙한 사회`정치 체계를 갖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옛 가야 지역에서는 기원전 2세기 무렵 철기가 나타납니다. 간단한 공구와 농구를 시작으로 점차 무기나 발재갈 등 여러 종류의 철기를 만들었습니다.
* 청동기시대 막바지에 이르러 옛 가야 지역 곳곳에 나타난 덧띠토기문화와 더불어 새롭게 확산된 철기문화는 사회변동을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화는 이전부터 뿌리내린 지역문화를 완전히 압도하지는 못한 채 일정기간 공존하면서 서서히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도 바뀌었습니다. 새로이 등장한 널무덤에서 널리 확인되는 철제품과 와질토기가 대표적입니다. 무덤에 넣은 껴묻거리 종류와 양이 많아진 것도 청동기시대 고인돌에서 찾아볼 수 없던 큰 변화입니다. 주면 지역과 교류도 활발해져 각 지역 공동체들은 새로운 선진 문물을 경쟁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가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 와질토기 - 제작 기술의 혁신
기원전 1세기 무렵 한반도 중부와 남부에서는 지역별로 독특한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영남지역에서는 ‘와질토기’가 등장합니다. 질감이 기와와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회색, 회흑색을 띠며,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기에 제사 그릇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릇의 모양은 주머니단지, 쇠뿔모양 손잡이 항아리 그리고 짧은목 항아리 등이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굽다리를 붙이거나 화로모양 그릇받침이 나타나는 등 형태와 종류가 다양해집니다.
* 옻칠 - 빛깔 입은 목기
옻칠은 목기의 장식성과 기능성을 한껏 높이는 기술입니다. 옻칠한 나무는 윤이 나고 표면이 매끈해질뿐더러 습기, 열, 부패에 강합니다. 목제품뿐만 아니라 토기, 가죽, 쇠붙이 등에도 발라 그 효과를 기대했습니다. 옻나무 수액을 채취하고 정제해서 칠하기까지 과정은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들어 당시 칠기는 매우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널무덤에서 발견된 칠기는 무덤 주인공의 사회적 경제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 해상 교역망의 거점
옛 김해만 일대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동남해안 지역에서는 당시 국제교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청동세발솥, 청동거울, 동전 등은 중국과의 교류를, 그리고 야요이 토기, 청동 투겁창 등은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줍니다. 가야지역의 대표 취급 품목은 철이었는데, 중국 역사책에 특별히 기록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철기의 등장과 함께 활발해진 국제교류는 사회 변화를 촉진하고 가야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 중국동전
오수전은 무게의 단위인 수를 동전 이름에 사용한 것으로 한무제 5년(기원전 108년)에 처음 발행하여 수나라 때까지 사용한 화폐입니다. 1수는 조 혹은 수수 1백알의 무게 약 650mg으로 오수전의 무게는 약 3.25g입니다. 가운데 네모난 구멍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오, 왼쪽에 수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주로 해상교역망의 주요 결절지였던 지역에서 출토 사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천 늑도, 창원 성산패총, 창원 다호리유적 등지에서 출토된 바 있습니다. 이외에도 옛 가야 지역에서는 화천, 반량전 등 여러 종류의 중국 화폐가 출토됩니다. 당시 활발했던 교역 활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뿐더러 함께 출토된 물건들의 시간적 위치를 가늠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됩니다.
* 검, 거울, 옥
검, 거울, 목걸이는 청동기시대 이래로 지도자 혹은 지배자를 상징하는 물품이었습니다. 널무덤 단계에 이르면 철로 만든 검이 나타나고 칼집과 손잡이 장식이 정교해지며, 중국 거울을 본떠 만든 거울도 등장했습니다. 주로 옥으로 만들던 목걸이는 유리, 마노, 수정 등이 더해지며 더욱 화려해졌습니다. 변한 사회의 유력자들은 특정한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자신들의 권위 혹은 권력을 가시적으로 드러냈습니다.
* 유력자의 무덤 - 창원 다호리 1호 나무널
서력기원 전후, 청동기시대부터 농경을 주요 생업수단으로 사아 성장, 발전하던 촌락들은 이즈음 큰 변화를 겪습니다. 크고 작은 촌락들 사이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고 으뜸가는 촌락의 영향력이 더욱 분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촌락들을 아우르러 읍락이라 합니다. 변한의 여러 나라들은 읍락 몇 개가 모인 형태를 띠고 있었으리라 추정됩니다. 창원 다호리유적1호 널무덤의 주인공은 껴묻거리의 질과 양이 최상급인 점에서 이 일대에서 으뜸가는 읍락의 유력자로 추정됩니다.
* 국립김해박물관 답사 후기
2023년에는 박물관이 리모델링하는 기간에 방문했었다. 본관 옆 건물에서 전시된 특별전을 보고왔나 싶다. 새로 단장한 박물관 본관은 얼마나 큰 예산을 들여서 최신 기법으로 진열과 배열을 하였는지 훌륭했다. 1층이 가야로 가는 길, 2층은 가야와 가야 사람들로 생활사 중심으로 전시했다고 한다.
오후 4시 해설을 들었는데 해설사가 젊은 분이었다. 해설사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느낌이다. 해설하는 내용 역시 에너지가 느껴지고 해설 할 곳과 건너 뛸 곳을 알아서 해주는데도 불구하고 해설하는데 중간중간 목을 축이면서 꼬박 두 시간을 할애했다. 열정적인 해설이었다. 해설을 듣는 남편과 나는 고마운데 미안하기도 했다. 여러 사람이 같이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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