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고통이라는 선물 : 폴 브랜드 / 필립 얀시

부실이 2020. 12. 3. 17:13

지은이 : 폴 브랜드, 필립 얀시

읽은 때 : 2002년

 

* 폴 브랜드

손수술 외과 의사 나병 전문가. 의료 선교사.

인도에서 20년, 미국에서 30년 동안 나환자들과 삶. 선교사인 부모님 또한 인도에서 나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침. 고통을 느끼지 못해 고통을 당하는 나환자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그는 고통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임을 깨달음.

 

* 탄야

고통 없는 삶의 극단적 사례. 위험 경고의 결여. 탄야의 손과 발에 있는 신경들은 압력이나 온도 변화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다. 탄야는 자신의 손과 발이 불에 타거나 손가락을 물어뜯었을 때 일종의 따끔한 느낌을 받을 뿐, 그로 인한 불쾌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고통의 정신적 구조가 결여된 것이다.

나병, 당뇨병, 알콜중독, 다발성 경화증, 신경장애 그리고 척수 손상 등의 상태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매우 위험한 상태를 일으킬 수 있다. 이들은 고통이 없으므로 인한 영원한 위험 속에 살고 있다. 손으로 불 속의 고구마를 꺼내던 노인의 피곤에 지친 무관심한 표정. 결국 손을 잃었다. 자기 파멸에 대해서 완전히 무관심하다는 것.

 

* 나의 직업생활은 고통이라는 주제의 주변을 맴돌아 왔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여러 나라 다른 문화 속에 살면서 고통에 대한 다양한 태도를 아주 가까이에서 보았다.

인도 : 어디를 가나 가난과 고통이 상존하는 그 나라에서 나는, 근엄하게 조용히 고통을 수용함으로써 고통을 참아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미국 환자들은 내가 겪어본 어떤 환자들보다도 더 편안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을 맞이할 준비가 훨씬 덜 되어 있을뿐더러, 고난으로 인해 훨씬 더 많은 상처를 받았다. 미국에서 진통제는 연간 630억 달러에 달하는 산업이 되었다.

런던 사람들은 어떤 대의명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고통을 견뎠고, 인도사람들은 고통을 예상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웠으며, 미국 사람들은 고통을 더 많이 두려워했다. 이들 세 나라의 사람들은 각각 인간 존재의 이런 신비스러운 사실들에 대해 내 나름의 안목을 갖는데 도움을 주었다.

* 우리는 대부분 언젠가 끔찍한 고통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미리 어떤 태도를 개발하느냐에 따라 실제 고통이 닥쳤을 때

그 고통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결정된다고 확신한다.

* 동정심이라는 말은 함께 고통을 당한다는 뜻이다.

* 인생의 경험에서 고통보다 더 보편적인 것은 없다. 고통은 일상생활의 껍데기 밑에서 용암처럼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의 업 철학은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가르침. 그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날씨와 같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일부였다.

 

* 인간은 인간의 특권 가운데 고통에 관한 책을 읽거나 무서운 경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림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고 존중할 줄 아는 독특한 능력이 있다.

어떤 고통들 슬픔이나 정서적 충격 같은 고통들은 아무런 신체적 자극이 없다. 두 뇌의 연금술에 의해 빚어진 정신 상태다. 이 덕분에 육체적 고통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그 고통이 마음속에 맴돈다. 고통은 공통의 언어로 존재한다.

 

* 가족의 유산

어머니는 남부 인도의 산지에서 전설적인 존재가 되셨다. 그래서 내가 그곳을 방문할 때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왕비의 아들처럼 나를 대접해 준다. 짧은 세월 함께 보냈지만 두 분은 나에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유산을 남겨주셨다. 나는 아버지의 한결같은 성격과 폭 넓은 학식과 평온한 자신감을 존경했다. 어머니는 풍부한 용기와 동정심으로 산지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 동정심

동정심이 생기는 것은 훨씬 나중에 생긴다. 그것은 쉽게 얻을 수 있는 은혜의 광선이 아니다. 의사가 수많은 상처를 싸매주고 수많은 상처를 절개하며, 온갖 상처와 궤양과 썩은 부분들을 고치기 위해 만져 줄 때 환자들의 중얼거림이 쌓여 생기는 것이다.

처음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올 때 속삭임이 된다. 그것이 천천히 모여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떠오를 때, 비로소 순수한 소명이 된다.

 

* 수혈하는 광경을 지켜본 것이 내가 의학의 길로 들어서도록 확신을 주었다면, 그 반대 경우인 심각한 출혈의 경험은 내가 외과 의사의 길로 접어들도록 확신을 갖게 했다.

* 우리가 고통이라는 감각을 만들어내 우리 자신에게 준 것이지만 고통이 바깥 세상에 의해 우리에게 일어난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가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고통은 언제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사건이다. 우리가 다 알면서도 이용하는 마술사의 속임수다.

 

* 80세 된 노인 엉덩이뼈가 부러졌다

할머니는 살아났고 다시 걸었다. 그와 같은 만남들을 통해서 나는 의학이 단지 신체의 일부를 치료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과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매우 다른 관심사다. 왜냐하면 회복이라는 것은 대부분 환자의 마음과 영혼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마음의 상태로, 전 인격을 포함한다.

 

* 인도에 군의관으로 나가다

나는 인도환자들의 강인함과 고통에 대한 침착한 태도에 감탄했다. 그들에게는 고통이 인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의 일부였고,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업 철학이 고통이 부당하다는 느낌을 무디게 함으로써, 그들은 고통을 그저 참아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 나병

나병은 손과 발에 심각한 손상을 입힌다. 결핵군과 매우 흡사한 세균. 모든 전염성 질병 중에서 가장 전염율이 낮은 질병의 하나로 밝혀짐. 가장 병에 걸린 확률이 높은 집단은 감염된 사람들과 장기적인 접촉을 가진 아이들인 것 같다. 이런 이유라 아이들을 나병에 걸린 부모와 격리한다.

위생수준이 높으면 그만큼 감염 기회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학자들은 나병이 상부 순환계, 기침이나 재채기를 통해 전달되는 콧물 방울에 의해 전염된다는 이론을 선호.

대부분의 환자들은 스스로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환자 5명 중 1명이 자연적인 면역기능이 결여되어 있다. 이 면역성이 없는 환자들은 나병에 걸린 것으로 분류된 채,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들의 신체는 외부 침입자들을 환영하는 멍석을 깔아주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세균이 그들의 몸에 포위공격을 한다. 그러는 동안 어떤 다른 종류의 박테리아가 대량으로 침투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병이 죽음을 초래하는 일은 거의 드물다. 그것은 천천히 쇠약하게 하는 방법으로 몸을 망가뜨린다.

나병은 무릎, 팔목, 광대뼈, 그리고 턱을 선호한다. 나병 간균은 그것이 증식하기 위해 더 시원한 온도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대부분이 표피에서 가까운 곳이다. 고환이나 귓볼이나 눈이나 코의 통로 같은 곳에 잠복.

 

* 나환자들에게는 고통이 정상적으로 제공하는 기본적인 자기 보호 본능이 결여되어 있었다. 고통이 인간의 신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병이 치유된 후에도 적절한 훈련을 하지 않으면 환자들이 손가락이나 다른 조직들을 계속 상실할 수 있었다. 그 상실이 무고통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신경의 손상) 나는 그 내용을 다른 나병센터들에도 전달해야 할 때가 왔음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 우리가 다룬 각각의 환자들은 회복이라는 자신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우리가 기계적으로 근육, 힘줄, 뼈 등을 재배치하는 것은 손상된 삶을 재건하기 위한 첫걸음에 불과했다. 환자 자신이야말로 그 어려운 길을 마다않고 간 장본인이었다.

 

* 미국의 루이지애나의 바르킬로 옮기다.

미국에는 나환자가 몇 천 명이지만 당뇨병 환자들은 수백만 명이 넘는다.

당뇨병의 신진대사 때문에 신경들이 죽고, 환자들은 고통의 상실로 말미암아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렇게 생긴 상처들은 환자들이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 걷기 때문에 쉽게 치유되지 않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사실 당뇨병으로 인해 생기는 혈액 공급의 위축은 치유를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전형적인 당뇨병 환자의 발도 더 이상의 압박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기만 하면, 여전히 감염을 통제하고 상처를 치료할 수 있고 풍부한 혈액 공급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 고통은 적이 아니라 적을 알려주는 충성스러운 정찰병

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재확인해주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내 인생의 주요한 역설이 있다. 그것은 내가 고통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생을 보내고 있는데도, 그런 결함이 없는 사람들에게 고통에 대해 감사하라고 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이미 이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좀처럼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개는 그것에 대해 분노한다.

분명히 덜 개발된 사회일수록 개발된 사회만큼 육체적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들 전통적인 문화에는 현대의 마취제가 결여되어 있지만, 개개인들은 일상생활에 뿌리박혀 있는 신념이나 가족 부양제도로 인해 고통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 일반적인 인도의 사람들은 고통을 잘 알고 있고, 고통을 기대하며, 고통을 인생의 피할 수 없는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인도 사람들은 마음과 정신의 수준에서 고통을 제어할 수 있는 법을 놀라운 방법으로 터득했다.

반면 서구사람들은 고통을 불의나 실패 또는 행복에 대해 보장된 권리가 침해받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고통의 메시지를 고려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침묵하게 하는 것은 불길한 소식을 듣기 싫어 화재 경보 장치를 끊는 것이나 같다.

나는 미국인들이 고통이나 고난에 대처할 준비가 더 잘되어 있다는 증거를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끔찍한 현실을 피하기 위한 일차적인 수단으로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이 우후죽순처럼 번져왔다.

 

* 류머티스성 관절염은 자가 면역에 이상이 생겨, 고통스러운 염증으로 관절이 부어올라 신체가 자체 조직을 공격하는 질병이다.

때로 나는 류머티스성 관절염 환자들에게 고통의 소중함을 납득시키기 위해 나환자들을 실례로 사용했다. 여러분의 질병은 나병 감염 그 자체보다 신체에 훨씬 더 파괴적입니다. 류머티스성 관절염에 걸리면 뼈가 물러져서 부러지기 쉽고, 인대가 힘을 잃어 관절에서 떨어져 나가며, 근육은 늘어나 조절이 어렵다. 그러나 여러분의 훌륭한 손을 보십시오. 모두 정상입니다. 여러분이 나병에 걸린 저 사람들보다 스스로를 헐씬 더 잘 지켜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고통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고통의 경험은 세 단계로 나눈다.

1. 고통의 신호 : 말초 신경의 말단에서 위험을 느낄 때 내보내는 경보

2. 척수와 뇌의 기저부가 수백 만 개의 신호들 중에서 어떤 것이 뇌까지 전달될 가치가 있는 메시지인지를 가려내는 척수의 관물 역할을 한다. 손상이나 질병도 뇌로 전달되는 메시지를 더러 막을 수 있다. 척수가 절단되면, 하반신 마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절단된 바로 밑의 말초 신경이 아무리 신호를 계속 내보내도 뇌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3. 뇌의 상단부(대뇌 피질)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사전에 메시지를 취사선택해서 반응을 결정한다. 참으로 고통은 신호, 메시지, 반응이라는 모든 과정이 완성될 때까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3단계에서 고통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면, 고통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는 일 즉 고통을 주인이 아닌 종의 위치에 두는 일에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 의사로서 나는 인간의 마음이 고통을 이런 저런 마음으로 바꿔가며 자각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점점 더 많이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고통을 소위 시련이라고 하는 더 심각한 상태로 능숙하게 바꿀 수도 있고, 또는 그 반대로 의식이 있는 마음속 방대한 자원을 이용해 고통에 대처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 고통은 독특한 감각이다.

고통의 감지기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위험이 남아 있는 한 끊임없이 의식적인 뇌에 신호를 보낸다. 또한 이 감각은 일단 사라지고 난 뒤에는 가장 기억해 내기 어렵다. 이러한 고통의 모든 특징은 고통의 궁극적 목적을 이룬다. 그것은 고통이 전신에 활기를 띠게 한다는 것이다. 고통은 시간을 현재로 축소한다. 일단 위험이 지나가면 그 감각이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위험이 남아 있어도 감히 길들여지지 않는다.

고통의 체계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을 중단해야 할 만큼 비참하다는 것을 느끼고 지금 당장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고통응 한 사람의 세계를 변형시킨다. 고통은 위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뒤엎을 수가 있다. 고문을 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정말 잘 안다. 육체적 고통의 끈질긴 강요를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바로 고통의 의도다.

내가 이 세상에서 육체적인 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 힘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나는 결코 그 힘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이 없는 환자들과 씨름하면서 고통이 자멸의 길에서 우리를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성 고통센터를 방문할 때마다 깨닫는 바처럼 고통 자체도 파괴적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고통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에너지를 약화하고, 우리의 전 생애를 지배할 수도 있다. 우리는 대부분 무고통과, 끊임없이 계속되는 만성 고통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마음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는 고통의 3단계에 대한 좋은 소식은 그것이 우리에게 고통에 대해 미리 대비하게 한다는 것이다. 최면술과 플라세보 효과는 마음이 이미 그 안에 고통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우리는 단지 그 자원을 끌어다 쓰는 방법만 배우면 된다.

내가 의사로서 경험한 환자들의 다양한 반응들, 즉 영웅처럼 고통을 직면하거나 금욕적으로 참거나 두려움에 떨며 움추리는 등의 반응들은 고통에 적절히 대비를 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고통보험이라는 개념을 좋아하는데, 고통이 닥치기 전에 미리 보험료를 지불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고통에 대해 생각하는 최악의 시간은 그것이 공격하고 있는 것을 느낄 때다. 고통이 객관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 감사 :

셀리에는 인생 말년에 그의 연구를 요약하면서 인간에게 높은 스트레스를 가장 잘 유발하는 감정적인 반응으로 복수심과 비통함을 거론했다.

반대로 감사가 건강에 가장 유익한 유일한 반응이라고 결론지었다. 나는 셀리에의 의견에 동감한다. 왜냐면 고통의 많은 유익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부분적으로 나 자신의 태도를 너무나 많이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맡은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고통을 당신의 몸이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해 당신에게 전달하고 있는 언어라고 생각하십시오. 신체가 고통이라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여러분의 주의를 끄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접근 방법을 고통과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원수처럼 보이는 것을 받아들이고 무장 해제한 후 그것을 환영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불쾌함은 질병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충성스러운 방어 작용에서 생긴다. 사실 우리가 짜증과 혐오감을 가지고 대하는 거의 모든 신체활동, 이를테면 물집, 피부 경결, 열, 재채기, 기침, 구토, 통증에까지 이 모두가 신체의 자기보호작용을 나타낸다.

내가 감사를 권유하는 이유는 신체에 대한 사람의 근본적인 태도(마음의 산물)가 건강에 주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신체를 존중심과 경이감과 감사함으로 대하면, 내가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다.

* 나환자들을 대상으로 일하는 동안 나는 많은 수족을 고쳐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내 깨달은 것은 환자들 자신이 자신의 수족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그러한 진보가 무익하다는 것이다. 사실상 건강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재활의 본질은, 환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신체에 대한 개인적 운명을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 기후가 험하고, 열대성 질병이 왕성하며, 태풍이 불 때마다 자연재해가 밀어닥치는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도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척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세기 동안 그런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거기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발견해냈다. 많은 물리적인 자원이 결여 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지원들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힌두교 성자들은 금욕주의로 유명했고, 그러한 고도의 문화적 가치를 존중하는 마음이 사회전반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인도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훈련과 절제를 존중하도록 배웠다. 그래서 그들은 고난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갖추었다.

특별히 고난을 감수하도로 조직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는 인도의 토양 속에서 성장했다. 인생의 네 가지 비참한 모습(질병, 늙음, 죽음, 거지)를 보고 충격을 받은 고타마불타는 황자의 지위를 포기하고 세상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랑의 딜을 떠났다. 그가 도달한 해답은 서구의 소비주의 철학과 쾌락을 추구하는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동양사상에 의하면 인간의 고통은 외적인 반응들(고통스런 자극)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반응들’로 구성된다. 비록 우리가 외적인 조건들을 항상 조절할 수는 없지만, 내적인 반응들을 통제하는 방법은 익힐 수 있다. 이러한 철학에 익숙해졌을 때, 나는 그것이 의과대학에서 배운 신호 - 메시지 - 반응이라는 고통의 세 단계와 유사하다는 점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요컨대 동양의 철학은 고통을 경험할 때, 마음의 반응인 세 번 째 단계의 고통이 지배적인 요인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것은 또한 대부분 통제할 수 있는 고통이다.

 

* 윌리암 제임스 :

‘나의 세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이 마음의 내적인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삶의 외적인 양상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의 발견은 수 천 년 동안 주요 종교들이 가르쳐 온 것이기 때문이다. 동양에서의 그러한 가르침을 접한 후, 나는 내 자신의 신앙인 기독교에 있는 자기 절제에 대한 귀중한 전통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기도는 내가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나의 마음의 초점을 신체의 아픈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함으로써 영의 생명에 활력을 주어, 긴장의 수준이 낮아지고 고통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지는 경향이 있다. 종교적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심장마비, 동맥경화, 고혈압, 긴장 항진증에 걸릴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알았다.

긴장에 대비하는 것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갖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인도 사람들의 고통을 다루는 능력을 대부분 설명해줄 수 있다고 결론. 광범위하면서도 밀접한 가족 제도 덕분에 인도인들은 고통을 혼자 겪는 일이 드물다. 가정 호스피스 프로그램은 죽음을 대비할 때 생기는 우리의 걱정을 다소나마 덜어준다. 우리는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사망 희망서를 작성해 서명까지 했다.

죽음은 당연히 삶의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말기 질병과 큰 고통의 가능성에 대한 나의 두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 내에서 그것들을 미리 직면하는 것임을 배웠다.

 

* 슈바이처 : 내부의 의사

인간은 다른 어떤 기계와 달리 ‘내부의 의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치료할 수 있고 의식적으로 치료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본연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가장 훌륭한 의사는 겸손한 의사이다. 그들은 신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신체를 도와 이미 본능적으로 하고 있는 일에 협력한다. 참으로 나는 고통을 처리하는 데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동반자로서 협력할 뿐이다. 즉, 고통은 환자 내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환자만이 나를 인도할 수 있다.

만성적 고통을 정복하는 것은 고통이 계속되는 데도 불구하고 생산적 활동을 연습하고 증가하고자 하는 환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만성적 고통의 제어는 환자가 고통이라는 현실 앞에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때 성공을 거둔다.

 

* 호스피스 운동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치료의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병들었을 때 보살핌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다. 호스피스는 이처럼 인간의 절망적 상황을 존엄과 긍휼로 다루는 방법을 찾아냈다. 환자들이 고통의 최종 도전에 직면하는 것을 돕기 이해 고안된 것이다.

현대 의료기관의 최대 실패는 이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과, 치료의 매력과 질병과 죽음을 상대로 하는 전쟁의 매력 때문에 그 점을 소홀히 했다는 점이다.

돌봄의 한 가운데에는 고통 중에 있거나 괴로워하는 사람, 장애가 있거나 무능력한 사람, 정신 박약아나 정신 장애인에게서 결코 눈을 돌리지 않겠다는 헌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의료시스템이 모든 사람들에게 거의 언제나 쏟을 수 있는 유일한 헌신이고, 의료시스템이 합리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필요이다.

 

* 고통을 더하는 것을 나는 의식적 마음 안에서 고통에 대한 자각을 높여 주는 반응들을 가리켜 ‘고통을 더하는 것들’이라는 표현을 한다. 이렇게 고통을 더하는 것들에는 두려움, 분노, 죄책감, 외로움, 무력감 따위가 있는데 이런 것들은 내가 복용할 수 있는 어떤 처방보다 고통을 전반적으로 경험하는 데 더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두려움을 경험한다. 약이나 주사로도 해결할 수 없다. 의사들의 온유하고 정직한 지혜와 친구들이나 친척들의 사랑의 보살핌이 가장 좋은 치료책이다. 나는 내가 환자들의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 보낸 시간이 회복에 대한 그들의 태도, 특히 고통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한셀, 바위에서 떨어져 척추 관절염.

‘조금 아프더라도 참고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해도 됩니다.’ 한셀은 의사의 말이 자기에게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고통과 장래와 인생까지도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삶의 방식대로 살기로 작정했다. 그는 다시 등산을 시작했고 한셀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의 두려움은 사라졌다.

한셀은 두려움이 줄어들자 그의 고통도 결과적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고통이 이제는 더 이상 그의 인생에 아무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믿는다. 그는 고통을 정복하는 법을 배웠다. 더 이상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나의 불행은 선택가능하다.’

 

* 분노

분노와 원한의 감정은 대개 환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손해배상 사건이 있으면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고 질질 끌지 말고 속히 해결하라는 것이다. 분노가 처리되지 않고 마음과 영혼 속에서 곪아 터지면 그 독소가 육신에 퍼져 고통과 치료에 모두 영향을 미친다. 미워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건강하다.

* 고통받는 사람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일은 전문적 기술이 필요없다.

‘누가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환자들은 대개 조용하고 주제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즉 필요할 때 언제든지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말하기 보다는 들어주는 사람, 계속해서 시계만 들여다 보지 않는 사람, 껴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고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나의 동정이 고통받는 사람뿐 아니라 그 모든 가족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는 약과 붕대 외에도 줄 수 있는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환자들과 가족들 옆에서 나란히 서 있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치료의 한 형태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고통을 제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느낌만 주어도 고통의 수준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는 화상 입은 환자들을 화상을 입은 피부 조직을 제거하는 일에 동참하게 하면 그들이 그 과정을 더 잘 참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고통으로 누워 있는 두 여자의 태도

이 두 가지 반응 뒤에는 인격, 신앙체계, 확신, 건강에 대한 기대감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고통을 쉽게 느끼는 여자’는 자신을 부당하게 저주받은 희생자로 여긴다. 그리고 그 정신적 혼란이 그녀의 정체감을 규정한다. 하지만 다른 여자는 고통 때문에 동작이 다소 더디기는 하지만 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고통에 대해 정말 당당하게 행동함으로써 나를 감동시킨 관절염 환자들을 보아왔다.

아침만 되면 그들은 뻣뻣해진 손을 천천히 힘을 주어 펴준다. 물론 아프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스스로 해야 할 일이라고 느낌으로써 고통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어느 정도의 통제력을 가진다.

 

* 버니 시겔의 세 종류의 환자

15-20% : 삶을 포기, 질병을 도피의 수단으로 반김. 치료를 거부

60-70% : 그들은 중립적인 입장.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선택권이 주어지면 수술을 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15-20% : 예외적인 환자들. 그들은 자연스럽게 거동하고 있다. 그들은 희생자 노릇하기를 거부한다.

시겔은 이 마지막 집단이 때때로 다루기 어려운 환자들이기 때문에 의사들에게 도전을 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병원이라는 환경에서 그들은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다른 의사의 진단을 요구하며, 절차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 집단은 또한 회복될 가능성이 가장 큰 집단이기도 하다.

 

* 재활 분야에 있어서 내가 받은 최초의 도전은 나의 환자들에게 스스로가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손을 치료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손이 다시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느냐는 그들에게 달려 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그들에게 건강을 추구하도록 하면서 자신들이 회복되기를 진정으로 소원하도록 격려하지 못한다면, 나는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수년간에 걸쳐서 많은 예외적인 환자들, 특히 엄청난 장애를 극복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풍요롭고 자기성취적인 삶을 살아가는 나환자들을 알게 된 것은 정말로 큰 축복이었다.

 

* 쾌락

하나의 부산물일 뿐이다. 그것은 서로 다른 많은 세포가 협력해서 생기는 상호작용이다. 나는 그것을 ‘공동체의 환희’라고 부른다. 쾌락은 고통과 마찬가지로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쾌락은 감각기관으로부터 나오는 정보에 부분적으로 의존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격이 고통보다 훨씬 더 강하다.

나는 이제 쾌락과 고통을 샴 쌍둥이로 묘사한다. 그 한 가지 이유는 내가 더 이상 고통을 도망쳐야 할 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을 박탈당한 사람들에게서 나는 고통이 제공하는 보호가 없이는 삶을 쉽게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 곤경과 궁핍을 희미한 배경으로 삼고, 나눔과 용기 그리고 상호 의존이라는 새로운 자원들이 그들에게 예기치 않은 쾌락과 기쁨을 가져다 준 것이다. 우리 의료팀은 나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물론 곤경을 겪기도 하고 많은 장애물을 만났다. 그러나 그런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협력하던 그 과정으로 인해, 나는 그 시기를 내 인생에서 가장 환희에 찬 순간들로 회상한다.

 

* 마약

도전이 부족한 생활방식으로부터의 도피를 상징해 왔다. 그러나 엄격한 새 환경에서는 수고와 땀, 피로와 단잠, 그리고 배고픔과 간단한 음식이 결합하여 새롭고 적절한 행복의 길을 열어 준다.

고통과 쾌락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둘이 결합되어 온다. 나는 피곤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 뜨거운 물로 목욕하는 것을 좋아한다. 더 큰 기쁨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더 큰 고통이 선행한다. 쾌락에 대한 이러한 통찰력은 풍요로운 서구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나는 일생동안 수술을 해왔지만 결코 많은 돈을 모으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만은 이와 같은 환자들 덕분에 참으로 풍요하다. 그들은 부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의 많은 기쁨을 내게 준다.

 

* 세던 :

나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저는 사회에서 출세하려고 모든 정력을 다 소진했을 겁니다. 나병에 걸렸기 때문에 저는 약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장애를 통해 저는 제 세상을 발견했으며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섬김의 행위로써 자발적으로 고난을 선택한다. 그들은 주는 과정에서 오히려 삶을 발견하며 사실상 세상과 나머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만족과 평안의 수준을 누리게 된다. 세상의 고통을 나누어지는 사람들은 복이 있으리니, 결국 그런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행복을 얻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