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읽은 때 : 2006년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정신과 의사. 192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출생.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맨해튼 주립병원, 콜로라도 대학병원 등을 거쳐 1965년에 시카고 대학 빌링스 병원에서 ‘죽음과 그 과정’에 관한 세미나를 시작. 1969년 ‘죽음의 순간’을 출판하여 국제적으로 유명해짐.
* 머리말
나는 죽어가는 환자들과 2년 반 동안 함께 지냈으며, 이 책은 그 실험의 초기 과정에서 겪은 이야기다. 인생의 최종 단계와 그에 따르는 불안, 공포, 희망에 대항 더 많은 것들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환자에게 교사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나의 바람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기피하지 말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이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람있게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경험이 환자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유익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고, 인간의 마음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며, 자신이라는 존재의 어느 부분이 가장 인간다운 측면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에 의해 마음은 보다 풍요로워지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죽음에 대한 불안도 줄어들지 않을까.
토론이 죽음에 대한 과민성을 경감시킬 수 있는 뜻깊은 방법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 죽음의 공포에 대하여 : 타고르 ‘열매 따기’에서
위험으로부터 지켜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없이 위험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기를
고통이 가라앉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싸워 이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기를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친구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능력만을 바라는 인간이 될 수 있기를
공포에 몸을 떨며 구원받기만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인내를 바라는 인간이 될 수 있기를
성공 속에서만 당신의 자애를 느낄 수 있는 비겁자가 아니라
실패했을 때 당신의 손에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인간이 될 수 있기를
* 집에서 죽음을 맞는 사람 / 아이들
환자가 그동안 정이 든 사랑하는 집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면 환자를 위한 특별한 배려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이들도 불행이 발생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대화나 토론, 공포의 동료로 참석하는 것에 의해 슬플 때에도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고, 책임을 분담하여 슬픔을 공유하는 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서서히 마음의 준비를 하는 한편, 죽음도 인생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배운다. 이것은 아이들의 성장과 성숙에 귀중한 경험이 된다.
* 환자도 어엿한 인간이다.
다만 여러 가지 기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삶 자체를 견디기 힘들 뿐이다. 절망하고 고뇌하는 환자를 보았을 때 회피하지 말고 모두 협력하고 노력한다면 그런 잃어버린 기능의 대부분을 활용할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환자를 기계로 구속하여 식물상태로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인간답게 죽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자기의 인생에서 죽음과 만나기 전에 죽음과 그 과정에 대해 가끔씩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누군가가 질병에 걸렸다면 그 환자의 생사와 관계없이 죽음과 그 과정을 자기에게 발생한 일이라 바꾸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 의사가 악성 종양이라는 진단을 내린 환자에게
그것을 눈앞으로 다가온 죽음과 결부시키지 않고 솔직하게 사실을 알릴 수 있다면 환자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그와 동시에 의사는 희망의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즉 새로운 약이나 새로운 치료법, 그리고 새로운 기술이나 새로운 연구의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으로 모든 것을 잃은 게 아니고 진단이 떨어졌다고 해서 의사가 환자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결과가 어떻든 이것은 의사, 가족, 환자가 함께 도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사가 환자에게 분명하게 전하는 일이다.
의사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환자는 고립이나 기만, 거절을 걱정하지 않고 항상 의사의 성실성을 신뢰하며 가능한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협력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런 대응은 이 어려운 상황에서 심한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가족에게도 큰 격려가 된다. 가족은 의사의 말에 의한 격려나 무언의 격려에 의지한다. 그들은 설사 생명의 연장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고통을 줄이는 것만이라도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는 의사의 말에 큰 힘을 얻는다. 환자가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경우에는 주변 정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상대를 배려할 줄 알고 분별력 있는 의사라면 숫자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체력이 있는 동안에 주변을 정리해 두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설명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환자는 의사의 말뜻을 이해하고 계속 희망을 유지할 수 있다. 자기는 언제나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공언하는 사람도 포함하여 환자라면 누구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환자들은 의사가 환자의 입장에서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 병명을 알려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 자기 자신이 죽음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의사는 환자도 죽음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고 믿고 있으며 사실을 망설이지 않고 밝히는 의사는 환자도 이 문제를 직시하고 인정하려 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의사는 죽음에 대한 자기의 심리 상태를 환자에게 그대로 적용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사항은 의사가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의 반응이 환자의 인격 구조나 그때까지의 생활 태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진다는 점이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최대의 방어 수단으로서 부정을 선택한 환자는 다른 환자보다 훨씬 광범위한 부정을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 문제는 환자에게 어떻게 알려야 하느냐 라고 말할 수 있다. 의사는 우선 악성종양이나 죽음에 대한 자기자신의 태도를 검토한 뒤에 환자에게 지나친 불안감을 주지 않도록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고통스런 사실을 환자에게 전하는 것은 기술이다. 전하는 방법이 간결하면 간결할수록 환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쉽다. 우리가 상대한 환자들은 중요한 점은 환자에 대한 공감이라고 역설.
* 제1단계 부정과 고립
환자는 진단사실을 알게 되면 불안을 느끼고 그것을 부정한다. 그런 부정은 갑작스럽게 사실을 전달받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환자의 경우에 현저하게 나타난다. 적어도 부분적인 부정은 거의 모든 환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부정은 불쾌하고 고통에 가득찬 상황에 대처하는 건강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부정이라는 기능이 존재하는 것이다. 환자는 부정하는 것에 의해 자기 자신을 안정시키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보다 온화한 자기방어법을 사용하게 된다.
비교적 건강하고 체력이 있는 환자는 죽음이라는 사태에 더욱 잘 대처할 수 있으며, 다가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적다. 가족의 입장에서도 환자가 비교적 건강하고 컨디션이 좋은 상태일 때 죽음이나 그것을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편하다. 한 집안의 기둥이 그 역할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가족들끼리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손을 써둘 수 있기 때문이다.
부정은 언제 어떤 환자에게나 필요한 것이며 중병 말기보다는 오히려 초기에 더욱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부정의 필요성은 존속하는데, 예민한 감각과 통찰력을 가지고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것을 간파할 수 있으며 환자에게 자기의 모순을 깨닫게 하는 일 없이 자기방어 상태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보통 환자가 부정보다 고립을 선택하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이 단계에서는 건강과 질병, 죽음과 불사 등이 마치 쌍둥이 형제처럼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즉, 죽음을 직시하면서도 아직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K부인
우리는 침묵을 통하여 그녀의 병이 매우 위기적이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전할 수 있었다. 분명하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는 그 단계에서는 그녀가 진실을 견디지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길고도 의미 깊은 관계를 되돌아보면, 가능하면 오랫동안 질병을 부정하고 싶다는 자기의 바람이 존중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느꼈기 때문에 우리와의 관계가 성립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환자로서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든 우리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완전히 이성을 잃었을 때에도 우리의 얼굴이나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그녀가 기억해 내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계속 방문했다. 결국, 죽음에 대한 자기자신의 강박관념에 확실하게 대응해온 치료사만이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환자가 극복할 때까지 끈질긴 애정을 가지고 도와주는 역할을 완수할 수 있었다.
* 2단계 분노(수녀 사례)
부정의 단계와는 대조적으로 분노의 단계는 가족이나 스태프들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대응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이 분노는 목표가 없이 모든 방향으로 향해지며, 닥치는 대로 주위에 투사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기를 환자의 입장에 놓고 이 분노가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일찍 자기의 인생이 중단되어버린다면 우리도 틀림없이 화를 낼 것이다.
환자의 분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든 불합리한 것이든 우리가 그것을 용인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가 두려움 없이, 지나치게 자기를 방어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환자의 그런 태도를 용인할 수는 없다.
환자는 분노를 드러내는 것으로 안정을 느끼며, 또한 그런 분노의 표현에 의해 마지막 시기를 여유있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환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불합리한 분노를 받아들이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우리 자신이 마음속에 끌어안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무엇인가를 부수어 버리고 싶다는 파괴적인 감정을 직시하고, 우리의 자기방어가 환자의 자유를 방해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동료 수녀들에게 느낀 분노는 어머니와 자매들에게 품고 있던 분노의 반복이며, 어린 시절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이 원인이 되어 있다. 이런 분노의 원인을 알 리가 없는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기는커녕 감정적으로 반응, 그것을 표면화시켜 그녀를 거부했다. 결국, 그녀는 주위로부터 더욱 고립되었다.
인터뷰에 의해 몇 가지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자기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나쁜 감정을 표현하거나 무엇인가를 요구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무조건 그런 행동을 비판하거나, 특정적인 개인에게 향해진 행위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다.
오히려 이해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또 자기의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일단 이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자 그녀는 그때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즉 따뜻한 정, 깊은 생각 등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을 갖춘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성으로서의 일면을 내보인 것이다. 그녀는 이제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어떤 안정을 발견한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다루기 어려웠던 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교훈을 가르쳐준 사람으로서, 우리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녀는 마침내, 사망하기 몇 개월 전에 그토록 자기가 바랐던 것, 즉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유지하면서 사랑받는 사람,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 제3단계 거래
환자는 우선 제1단계에서 슬픈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제2단계에서는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이나 신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그 후, 피할 수 없는 결과를 연장시키기 위해 교섭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즉, 신이 자기를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생명을 구걸하는 자기의 소원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뭔가 좋은 일을 해서 어느 정도의 편의를 보아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다, 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말기환자들의 거래는 어떻게든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선행을 쌓는 것에 의한 보상도 겸비하여 스스로 기한을 설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거래 상대는 신이다.
* 제4단계 우울(H씨의 사례)
이 모든 것들이 우울상태를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환자를 다루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잊기 쉬운 점은, 죽음이 가까워진 환자에게는 이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깊은 고뇌가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 두 종류의 우울 상태를 분류한다면 첫 번째를 반응적 우울, 두 번째를 준비적 우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울증의 원인을 찾아내어 거기에 동반되는 비현실적인 죄악감이나 수치심을 어느 정도 경감해 줄 수 있다. 자기는 이제 여자가 아니라고 고민하고 있는 여성에게는 그녀의 여자다운 매력을 발견하여 칭찬해주면 된다. 그렇게 하면 환자는, 자기가 아직도 수술 전과 똑같은 여자라는 자신감을 되찾게 된다. 사회사업가, 의사 또는 목사가 환자의 남편과 환자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환자가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남편의 협력을 구할 수도 있다. 이런 생활상의 문제가 해결되면, 그 순간 환자의 우울증은 낫는다.
두 번째 타입의 준비적 우울은, 이제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기 위한 준비수단이고, 그 사실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슬픔을 인정해주고 허락해주어야 눈앞으로 다가온 자기의 죽음을 좀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준비적 우울증인 경우에는 대부분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기를 원한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손을 잡아주는 것이 더 따뜻한 위로가 되고 잠자코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효과를 거두는 경우도 있다.
* H씨에게서는 두 가지 타입의 우울증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건강했을 때의 실패를 억울하게 생각했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때 그렇게 하지 못했던 점을 후회하며, 이제는 가족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슬퍼했다.
그의 우울상태는 체력이 약해지고 한 집안의 기둥으로서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과 보조를 맞추어 악화되어갔다. 우리와의 인터뷰에는 이 세상에 이별을 고할 각오가 되어있다는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만약 환자의 치료를 맡은 사람들이 그런 차이를 발견한다면, 그 사실을 환자의 가족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으로 가족과 환자 모두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
환자가 죽음을 받아들여 편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려면 이런 타입의 우울은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며, 환자를 위해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알아두어야 한다. 심한 고뇌와 불안을 뛰어넘은 환자만이 이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만약 환자뿐 아니라 가족도 그런 사실을 납득할 수 있다면 그 가족도 불필요한 고뇌는 할 필요가 없다.
죽음? 그건 가치 있는 활동이 끝나는 것이지요. 아내와는 달리 제 경우에는, 가치 있는 일이 돈을 버는 행위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와도 가장 중요한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대화가 있었다면 그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절망감 속에서도 긍지를 잃지 않았고,, 가족들의 이해가 없었어도 자기의 가치관을 잃지 않았다.
* 제5단계 수용(W부인, G씨) :
타고르 [기탄잘리 93절]
헤어질 때가 왔다. 안녕, 형제들이여.
나는 너희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간다. 자, 내 문의 열쇠를 돌려주마.
나는 내 집의 권리를 모두 포기한다.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따뜻한 말을 듣고 싶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이웃이었지만 나는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았다.
이제 날이 밝았고, 방의 어둠을 비추고 있던 등불은 꺼졌다. 사자가 온 것이다.
나는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환자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고 지금까지 설명한 몇 가지 단계를 통과하면서 어느 정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환자는 자기의 운명에 위축되거나 분노를 느끼지 않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 환자는 일찍이 소유하고 있던 여러 가지 감정, 즉 살아 있는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에 대한 질투, 아직 죽음을 직시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 등을 표명했다. 소중한 사람들이나 정든 장소에서 떠나야 한다는 상실감을 한탄해왔다. 그런 환자는 어느 정도의 기대를 가지고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게 된다.
환자는 완전히 지치고 대부분 쇠약해진다. 틈만 나면 졸거나 짧은 수면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것은 우울할 때에 원하는 잠과는 달리 회피를 위한 잠도 아니고 통증, 불쾌감, 가려움을 잊기 위한 휴식도 아니다. 그리고 점차 긴 시간 동안 잠자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더 이상 싸울 힘이 없다 라는 의미의 말도 자주하지만 그것은 결코 체념적, 절망적인 포기가 아니다.
수용을 행복한 단계와 오인해서는 안된다. 수용이란 감정이 거의 결핍되어 있는 상태다. 마치 통증이 사라지고 악전고투가 끝난, 어느 환자의 말을 빌린다면, 긴 여행을 앞둔 마지막 휴식의 때가 찾아온 것처럼 느껴지는 상태다.
그리고 이 시기는 환자 자신보다는 가족에게 많은 도움과 이해가 필요하다. 죽음 앞둔 환자는 어느 정도의 평안과 수용을 발견하지만 동시에 주위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진다. 시끄럽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보다는 환자의 손을 잡고 조용히 바라보거나 등에 베개를 대어주는 쪽이 훨씬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 W 부인
외과의사는 수술을 한번 더 하면 생명 연장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고, 그녀의 남편은 어떻게 해서든 아내의 생명을 연장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아내를 잃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떠나고 싶다는 아내의 마음을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거절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오히려 진보이며 죽음을 앞둔 사람이 안정을 발견하고 혼자 죽음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설명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언행에 끊임없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변화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전하려는 환자로부터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잠자코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옆에서 분노를 털어놓고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공포와 환상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얌전히 죽음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환자가 이런 수용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많은 시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 타입에 해당하는 사람은 많은 고생을 경험하면서 자식들을 성장시키고 다른 임무도 완수한, 자기는 이제 인생의 종착역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고령 환자였다. 그는 열심히 일만했던 자기의 일생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통해서 충족감을 얻었다. 또 하나의 타입은 그들도 죽음에 대한 준비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경우, 마찬가지로 위의 환자와 같은 심신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타입은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단계를 통과할 때 주위의 도움과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많은 환자들이 수용단계에 이르러 공포도 절망도 없는 존재로서 죽음의 문을 넘는 것을 보았다. 열심히 베풀고 즐거움과 고통을 겪어온 인생의 종착역에서 그 첫 시기로 되돌아가는 것에 의해 인생이라는 고리는 완결된다.
* 희망(J씨)
환자가 비극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체험하는 몇 가지 단계를 정신 의학용어로는 이런 것들을 방어메커니즘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갖추어져 있는 정신적 메커니즘이다. 각 단계는 계속되는 기간도 각양각색이고, 순서가 바뀌어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각 단계를 통해 줄곧 존재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기대가 말기 환자에게 특별한 사명감 같은 것을 부여하고 기력을 유지시켜준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는데도 거듭되는 시련을 견디게 해준다. 때로는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일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상대한 환자는 모두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 희망을 괴로운 시기의 마음의 양식으로 삼았다. 환자들은 이런 희망을 안겨주는 의사를 가장 신뢰했다. 그리고 나쁜 소식을 전하면서도 동시에 희망을 부여하는 의사에게 감사했다. 단 의사도 환자와 함께 예측할 수 없는 좋은 결과가 나타날지 모른다. 또는 생각보다 오래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환자와 함께 희망을 가졌지만, 환자 자신이 절망에서가 아닌 최종 수용 단계에 도달하여 희망을 버렸을 때에는 무리해서 희망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환자에게 말기든 아니든 결코 포기하거나 포기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의학의 한계를 초월한 상황에 놓여 있는 환자야말로 충분한 간호가 필요하다. 퇴원을 기대할 수 있는 환자 이상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수준의 간호와 치료는 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포기하면 환자도 희망을 잃는다.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은 모두 동원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당신이 될 수 있는 한 편히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겠습니다.’ 환자는 이런 말을 들으면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잃지 않고, 그 후에도 의사를 마지막까지 함께 고생할 친구로 생각하게 되며, 설사 회복될 전망이 없다고 해도 버려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 J씨
전에는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틀림없이 출세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최선을 다해라. 그리고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럴 때는 이 세상은 무슨 일이든 운이 따라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저는 제 인생을 행운아였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저는 이런 몸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회에 등을 돌리고 살 수도 있고, 또 눈물로 세월을 보낼 수도 있지만, 증상이 허락하는 한 생활 속에서 재미있는 일과 즐거운 일만을 발견하면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좋은 텔레비젼 프로를 보거나, 재미있는 대화에 집중하면 어느 틈엔가 가려움도, 나쁜 기분도 잊혀집니다. 저는 이런 작은 즐거움을 보너스라고 부르는데, 보너스가 거듭되면 모든 것이 보너스가 되어 끝없이 퍼져나가면서 매일 좋은 날만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다지 애면글면하지 않습니다.
비참한 기분이 들 때는 어떻게 해서든 그런 기분을 흐트러뜨리고 잠을 자려고 노력합니다. 잠도 잘 수 없을 때는 그냥 조용히 누워 있습니다. 인내를 배우는 거지요. 달리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처음 인터뷰 당시의 그는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는 매일 가려움과 불쾌함, 통증과 싸우고 있었다. 자살도 불가능했고 은퇴 후의 생활도 바랄 수 없었다. 병이 진행함에 따라 가능성의 범위는 점차 좁아졌다. 기대도 요구도 줄어들고, 편안한 시기가 지나가면 다음에 또 그 시기가 올 때까지 참아야 하는 생활에 할 수 없다는 현실을 결국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증상이 특별히 나쁜 때에는 혼자 있고 싶어 했고 어떻게든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 기분이 좋은 때에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교적인 태도를 보였다.
‘운이 좋아야 한다’는 말은 그가 다시 한 번 편안한 상태에서 지낼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는 언젠가 이 병의 치료약이 개발되어 이 고통에서 해방될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버리지 않았다.
* 환자의 가족
가족 중 누군가가 항상 환자 옆에 있어야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은 너무 가혹하다. 누구나 호흡해야 하듯 가족도 가끔은 병실을 나와 충전해야 할 필요가 있고, 가끔은 평범한 생활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환자의 병 때문에 가정이 붕괴되거나 가족의 즐거움이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병을 앓는 기간 동안에 환자가 사망한 이후에 예상되는 형태로 가정을 서서히 조정하면서 변화를 시도해보는 것이 좋다.
중병을 알려야 하는 중대한 시기에는 가족 구성이나 가족의 결속, 커뮤니케이션 능력,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상황이 크게 좌우된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은 중립적인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감정이 배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가족의 걱정이나 희망, 요구를 듣고 적절한 도움이 되어준다.
또 법률 문제를 의논해주거나 유언 준비를 도와주고, 일시적이든 장기적이든 한쪽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보살펴줄 수 있는 사람을 수배해준다. 그리고 이런 실질적인 문제와는 별도로 환자와 가족 사이의 정신적인 중개자가 필요하다.
죽음을 앞둔 환자의 문제는 언젠가 종결되지만, 가족의 문제는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대부분의 문제는 환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 대화를 나누면 줄일 수 있다. 죽음에 직면한 환자는 가족이 자기의 죽음을 직시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그 중 하나는 환자가 자기의 생각이나 마음을 가족에게 전하면 그것에 의해 가족도 생각이나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또 환자가 자기의 슬픔을 초월하여 사람은 평온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실천해 보일 수 있다면 가족은 그 강인함을 기억해내고 냉정하게 슬픔을 견딜 수 있다.
죄악감은 죽음의 길동무로서 최악의 존재다. 그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죄악감을 느끼는 더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가족이 사자에 대한 죄악감 때문에 고민하는 이유는 죽은 사람에 대해 실제로 화를 내거나 나쁜 생각을 가졌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음과 그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려운 문제다. 죽음이 갑작스럽게 주변문제로 나타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죽음이라는 위기적 상황을 경험해본 사람은 이런 이야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한동안 일뿐, 익숙해지면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죽음과 그 과정에 대해 솔직하게 대화하게 되면 고통을 공유하는 데에서 얻을 수 있는 친밀감과 공감을 느끼게 된다.
* 말기환자와 가족의 반응
환자의 태도나 의식,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따라 크게 좌우되지만 어느 가족이든 일정한 변화를 경험한다. 그들이 공통된 걱정거리를 나누어 가질 수 있으면 남겨진 시간이 줄어들고, 감정적으로도 쫓기는 상태에 접어들기 전에 중요한 문제를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각자가 서로의 마음을 모른 경우에는 쌍방 사이에는 벽이 존재하여 환자와 가족 모두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슬픔의 시기를 가지기 어렵다.
환자가 분노의 단계를 거치듯 가족도 마찬가지로 정서적인 반응을 경험한다. 그들의 분노는 첫 진단에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던 의사와 슬픈 현실을 그대로 가르쳐준 의사에게 교차로 향해진다. 또 병원 스테프에게도 분노를 표현하여 실제로는 최선의 간호가 베풀어지고 있는데도 결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가족들은 보통 환자를 충분히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다. 또 이 반응에는 과거에 환자를 위해 뭔가를 해주려 했던 기회를 놓친 데 대한 죄악감과 그것을 메우려는 바람도 포함되어 있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런 감정을 표현하고 해소할 수 있다면 가족의 마음은 훨씬 편해진다. 가족이 자기의 감정을 환자와 나눌 수 있다면 그들은 이별이 다가온다는 현실을 점차 직시하고, 환자와 함께 그 현실을 수용한다. 가족에게 가장 괴로운 시기는 마지막 단계다.
환자는 가족을 포함한 자기의 세계로부터 서서히 자기 자신을 이탈시켜 나간다. 그러나 가족은, 죽음의 시기가 다가오고 죽음에 안정과 수용을 느끼게 된 환자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 주위의 모든 것들로부터 조금씩 자기 자신을 이탈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인간관계가 있지만 거기에 집착해 있으면 죽음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환자가 면회를 몇 명의 친구로, 이어서 자식, 그리고 아내만으로 제한하게 된다면 그런 식으로 서서히 자기 자신을 이탈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는데, 가족들은 환자의 그런 태도를 보고 자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통과한 자만이 이렇게 평온한 상태에서 자기자신을 주위로부터 이탈시킬 수 있는 것이다.
* 가족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비극적인 것은 고령자의 죽음일 것이다. 각 세대에는 각각의 생활을 보내고 프라이버시를 가지며, 그 세대에 어울리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필요와 권리가 있다. 노인은 경제 체제 속에서 유용성을 잃어도 기품있고 편안한 인생을 보낼 권리가 있다. 노인의 비극은 고액의 돈을 들여 재정상의 희생을 지불해도 상황이 전혀 개선되지 않고 그저 살아 있을 뿐인 상태를 유지하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합병증이 발생하면 비용은 몇 배로 부풀고, 가족은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고 빨리 사망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결국은 죄악감을 발생시킨다.
* 자기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환자를 이용해서는 안된다.
내가 말하는 환자는, 육체적으로 병들어 있지만, 정신 상태는 정상적이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환자다. 그들의 희망이나 의견은 존중되어야 하고, 또한 그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는 한편 상담에도 응해주어야 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유족이 마음놓고 이야기하고 울고 소리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을 걸어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도록 유도하고, 언제든지 대화 상대가 되어 주어야 한다.
유족에게는 환자의 문제가 종결된 이후에도 긴 슬픔이 남아 있다. 환자의 병이 악성이라는 진단이 내려진 순간부터 사후 몇 개월 이후까지 도움과 마음의 의지가 필요하다. 우리는 가족의 욕구를 이해하고 그것들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죄악감이나 수치감, 벌에 대한 공포를 해소시켜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가족이 아이든 어른이든 환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 감정을 모두 표현하고 초월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가족의 분노가 고인이나 신, 또는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향해지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수용해준다면 그들은 죄악감을 가지지 않고 죽음을 수용할 수 있다.
* 죽음과 그 과정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한 의사들은 모두 탄성을 지른다.
환자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스테프들의 의견이나 관찰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들은 의사로서 일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통찰력과 용기를 이 세미나에서 배울 수 있다고 평가하게 되었다.
그녀들이 고민이나 갈등, 대처 과정을 단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자기들의 발언이 좋고 나쁜 판단 재료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순투성이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의사가 담당환자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려한다는 사실을 알자 간호사들이 앞장서서 그 의사의 힘이 되어주려고 했다. 반대로 의사가 자기 방어적인 태도를 보일 때에는 즉시 그 점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방어적인 태도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 사회 사업가는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다른 어떤 스태프들보다 환자의 위기적 상황에 담담하게 대응했다. 현실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도 워낙 바빴기 때문에 말기 환자와 접촉할 필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사회사업가들이 하는 일은 남겨진 아이들과 관계있는 문제로 어디에서 돌봐야 할지,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지, 복지시설로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등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유족들 사이의 분쟁 상담이다. 말기 환자와 직접 접촉하다가 환자가 사망하면 손을 떼는 간호사들과 비교할 때 사회사업가는 죽음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 성직자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위독 환자를 방문한 경험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이 세미나에 참석한 이후에야 비로소 죽음과 그 과정에 관한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장례식에 관해서는 정통해 있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와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일에는 서툴렀다. 말기 환자와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없었고 끊임없이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세미나에 거듭 참가하는 과정에서 그들도 무엇이 중요한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 것은 자기 탓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 의학생들의 반응
처음에는 당혹감이나 무력감, 공포로 가득차 있던 학생들도 심리극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이 세미나를 통해서 자기들이 담당해야 할 역할을 각자 나름대로 조금씩 자각했고, 그룹이 함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룹 멤버는 모두 고통스럽더라도 만족할 수 있는 과정을 함께 통과하는 것으로 혼자였을 때보다 훨씬 쉽게 해결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멤버들은 자기의 갈등을 직시하는 한편, 갈등에 잘 대처하는 방법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배워갔다. 솔직함과 정직함,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에 의해 각자는 멤버가 그룹에 제기한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서 의사체험하면서 경험을 쌓아갈 수 있었다.
* 환자의 반응
환자들은 우리의 방문을 반기면서 놀라운 정도로 적극적으로 맞이해 주었다. 인터뷰를 한 환자는 이 백 명이 넘었지만, 자기가 앓고 있는 병의 중대함이나 말기 질환이 야기시키는 모든 문제, 또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해 말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환자들은 모두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기뻐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가장 먼저 우리를 시험했다. 죽음 직전의 몇 시간에 대해서 또는 첫 간호에 대해서, 정말로 진지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지 그 점을 확인해두려는 것이었다.
환자들은 자기 방어를 위해 주변에 쳐진 높은 울타리를 누군가가 제거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우리가 자기들을 진심으로 이해하려 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려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첫 면담에서부터 마치 봇물이 터지듯이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마음속에 쌓였던 감정을 모두 털어놓은 그들은 면담이 끝날 무렵이면 상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말기환자들 대부분이 자기의 체험에 대해 자진해서 우리와 대화해주었는데, 무엇이 그렇게 큰 도움이 되고 뜻깊은 것이었을까. 이 대답을 얻으려면 면담을 받아들인 이유를 환자에게 묻고 그 대답을 검토해야 한다.
* 죽음을 부정하는 단계에서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무력감과 절망감에 휩싸여 자기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 오직 의사의 회진을 기다리거나 x선 촬영을 기다리거나, 약을 가져오는 간호사를 기다릴 뿐이다. 낮이나 밤이나 단조롭게, 그런 기다림은 언제까지나 계속 이어질 것처럼 보인다.
이런 가운데 방문자가 나타나 환자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방문자는 인간으로서의 환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환자의 반응, 강인함, 희망, 욕구불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단조롭고 고독하며 목적이 없는 괴로운 기다림을 누군가가 깨뜨려주는 것이다. 환자들은 자기가 말하는 내용이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내용일지도 모른다고 이해했다. 자기는 이제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고 느끼고 있을 때, 봉사정신이 싹튼 것이다.
환자는 간호해주는 사람이나 시간을 조금 할애해 주는 사람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 환자 쪽의 선물은 같은 곤경에 처해 있는 다른 환자에게 주는 선물 즉 도움과 계시와 격려라는 형태를 띤다. 우리 쪽의 선물은 간호와 시간, 그리고 말기 환자들이 그들의 인생 마지막 시점에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을 다른 환자들과 나누어 가지고 싶다는 바람의 형태를 띤다. 환자들이 담당해준 역할은 우리에게 가르침이었고, 그들의 뒤를 잇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결과를 낳았다.
세미나의 면담을 확립시킨 것은 죽음이 임박한 환자 자신이다. 환자들은 지금까지 쌓아온 인간관계로부터 서서히 자기 자신을 이탈시켜 최소한으로 줄인 인연을 마지막으로 끊을 생각을 한다. 그러나 갈등을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협력이 없으면 인간관계를 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교육이나 교양, 사회적 속박, 직업적 책임이 별로 없는 사람은 물질적 풍요로움, 즐거움, 대인관계 등의 면에서 보다 많은 것을 잃게 되는 유복한 사람과 비교하면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이 최종적인 위기를 직시하는 듯하다.
한편 야심적으로 주위 사람들을 지배하며 물질적 재산을 축적하고, 많은 사회적 관계는 있어도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필요한 뜻깊은 대인관계는 거의 없는 사람은 존엄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쉽지 않다. 환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거기에 따르는 절망감이나 무력감, 고독감 때문이다. 세미나에 참가하여 이런 점들을 생각하고 자기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실감한 사람이라면 편안한 마음으로 환자를 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죽음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
* 말기환자의 정신요법
말기환자에게는 우리가 언제든지 환자의 불안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일이 중요하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를 상대하려면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성숙이 필요하다. 불안감이 없는 안정된 마음으로 말기 환자 옆에 앉아 있기 위해서는 죽음과 죽음의 과정에 대한 자기 자신의 자세를 잘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말기환자만의 집단요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비슷한 외로움과 고독감을 공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말기환자와 자주 접촉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환자끼리 서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 말기 환자끼리의 대화에는 서로에게 조언해주는 말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 인터넷 자료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여의사라 부른다. 30년 이상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나를 죽음의 전문가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있었다." 그녀는 죽음에 관한 최초의 학문적 정리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비할 바 없이 귀한 가르침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 가르침을 전하며 살았다.
* 죽음에 이르는 5단계 : 부정 - 거부 - 거래 - 억울함 -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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