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산, 도리천 가는 길 : 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 2022. 6. 15 ~ 9. 12
* 낭산으로의 초대
경주 낭산은 이리가 엎드린 형상이어서 '이리 낭'자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마천은 '사기'에서 동쪽의 큰 별을 '낭'으로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이리 형상 때문이 아니라 신라 왕궁의 동(남)쪽에 자리한 까닭에 낭산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낭산은 신라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산 이름의 유래조차 명확하지 않을 만큼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이번 전시가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겼던 낭산을 이해하는 디딤돌이 되길 바랍니다.
* 신들이 노닐던 세계
413년 낭산에서 누각 형태의 구름이 나타났고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성 이사금(재위 402~417)은 '이는 반드시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것이니, 응당 이것은 복스러운 땅'이라며, 낭산에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천왕사가 세워진 곳은 원래 신들이 노닐던 숲이었습니다.
낭산은 신라에서 중요한 국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도 이용되었는데, 대사(나라의 큰 제사)를 지낸 삼산의 하나였습니다. 농사와 관련된 영성제도 낭산 일대에서 치렀습니다. 그리고 낭산에 여러 절이 세워지면서 탑의 기단부나 각종 석조물에 다양한 신장을 새겨 신성함을 드러냈고, 성대한 불교 의례가 행해졌습니다.
토착 신앙의 성지였던 낭산은 세월이 흐르면서 국가의 제사와 불교의례의 공간으로 점차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낭산의 신들도 성격이 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낭산이 신성한 공간이라는 인식은 변함없이 이어졌습니다.
: 석조 신장상 : 통일신라. 전 황복사 터
: 기단 면석에 새긴 십이지상 : 통일신라. 능지탑 터
: 녹유 신장상 벽전(A형) : 통일신라(7세기 후반). 사천왕사 터
: 녹유 신장성 벽전(B형) : 통일신라(7세기 후반). 사천왕사 터
: 녹유신장상 벽전(C형). 통일신라(7세기 후반). 사천왕사 터
* 왕들이 잠든 세상
선덕여왕이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장사 지내달라고 유언하였고, 왕은 낭산의 남쪽이라고 알려주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은 왕실을 석가족에게 빗대어 신성화했고, 그 맨 꼭대기에는 선덕여왕이 있었습니다. 선덕이란 이름은 선덕바라문에서 유래합니다. 선덕바라문은 도리천의 왕이 되기를 바랐고, 선덕여왕은 살아 있을 때 선덕이란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선덕여왕을 낭산 정상에 장사 지내고 그곳을 도리천으로 인식되도록 기획한 인물이 진평왕임을 알려줍니다. 진평왕릉을 선대의 능역이 있는 서악동이 아닌 낭산 동쪽의 한지(보문동 일대)에 만든 것도 그 일환입니다.
진평왕릉과 선덕왕릉이 낭산 일원에 들어서면서 이곳은 왕들의 영원한 안식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리고 낭산에는 왕의 명복을 비는 절을 세웠습니다. 신들이 머무는 공간에 이제 왕들이 또 다른 주인공으로 자리잡았습니다.
: 허리띠 드리개 : 신라(634년). 분황사 모전석탑
: 금제 불 입상(국보) : 통일신라(692년 무렵). 전 황복사 삼층석탑
: 금제 아미타불 좌상(국보) : 통일신라(706년). 전 황복사 삼층석탑
: 문무왕릉비 : 통일신라(681~682년). 경주 동부동
: 금동제 사리함 : 통일신라(706년). 전 황복사 삼층석탑
: 전 황복사 비편 : 통일신라. 전 황복사 터
* 문무왕릉비 (통일신라 681~682년)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의 [이계집]에는 1796년 무렵에 경주 주민이 밭을 갈다가 문무왕릉비를 발견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1817년 김정희는 경주를 방문해 선덕여왕릉 아래의 낭산 남쪽 기슭에서 문무왕릉비 상단부와 하단부를 재차 확인하였다. 그 뒤 문무왕릉비의 행방은 묘연해졌는데, 1961년에 하단부가 경주 동부동에서 발견되었다.
문무왕릉비는 신문왕 원년(681년) 또는 2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김씨의 내력과 무열왕`문무왕 업적, 통일의 과정, 문무왕을 화장해 뼛가루를 바다에 뿌렸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문무왕릉비의 하단에는 촉이 있는데 이를 근거로 대조 조사한 결과 사천왕사 서 귀부에 문무왕릉비가 세워져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사천왕사는 울산 방면에서 왕경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해달할 뿐만 아니라 호국을 위해 사천왕사를 창건한 이가 문무왕이었으므로, 사람들에게 문무왕의 업적을 과시하고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려 했던 문무왕의 의지를 각인시키기 위해 문무왕릉비를 사천왕사 입구에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금제 불 입상 / 금제 아미타불 좌상
황복사로 전해오는 절터의 삼층석탑 사리함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사리함 뚜껑에 새긴 글에 따르면 신문왕이 세상을 떠나자 692년 아들인 효소왕이 어머니 신목태후와 함께 석탑을 세웠고, 효소왕이 승하하자 706년 성덕왕이 금제 아미타상 1구와 "무구정광 대다라니경" 1권을 석탑에 안치 하였다. (블러그에서 빌려온 글)
금제 불 입상과 금제 아미타불 좌상은 특별 전시를 위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대여해온 유물이다.
* 소망과 포용의 공간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자 명랑법사의 건의에 따라 채색비단을 사용해 임시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문두루법을 행했습니다. 그러자 당나라 군사를 실은 배는 신라군사와 싸우기도 전에 가라앉았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사천왕사는 신라인들에게 호국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당나라 사신에게 사천왕사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고 사천왕사 남쪽에 지은 망덕사는 나라를 지키려고 세운 또 다른 절이었습니다. 대형 소조불을 사방에 모신 능지탑은불국토인 신라를 지키려는 바람이 담겼습니다. 이렇듯 낭산은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소망하던 곳이었습니다.
아울러 낭산은 중생사에서 엿볼 수 있듯이 현실의 어려움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공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신라인들은 낭산의 관음보살상과 약사여래상 앞에서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기도 했습니다. 국가나 개인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신라인들은 낭산을 찾아 평안을 빌었습니다.
: 수정`유리`구슬 : 통일신라. 사천왕사 터
: 토제탑 : 통일신라~고려. 사천왕사 터
: 소조 불 좌상편(무릎) : 통일신라(7세기 후반)
: 십일면관음보살, 약사불 : 통일신라. 낭산
* 신라의 낭산을 그리며
신라인들은 낭산을 신성하게 여기며 보호했고, 조선시대까지 낭산은 경주를 지키는 진산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낭산이 지닌 이런 상징성을 훼손하고자 낭산을 가로지르듯 철길을 놓았습니다. 우리 역사의 아픈 장면입니다.
낭산에는 다양한 문화유산이 분포하지만, 사천왕사와 전 황복사를 제외하면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 황복사는 절이 차지한 구역의 대부분이 발굴되었지만, '인백사와 선원사'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만 출토되어서 황복사가 맞는지 논란이 뜨겁습니다.
낭산에는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백결과 죽은 누이를 위해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사, 신라 말의 학자로 이름을 떨친 최치원의 숨결이 배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