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산 마한 박물관
익산 마한박물관은 익산에서 꽃피웠던 마한 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08년 4월 개관하였습니다. 이후 2013년 1월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하였으며, 2013년 7월 이후 익산 출토 국가귀속유물을 인수하여 현재 전시 및 보관`관리하고 있습니다.
마한박물관은 상설전시실과 야외 전시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자체유물과 국가귀속유물 등 4942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상설전시실은 익산의 선사와 마한의 성립, 마한에서 백제로의 변화, 마한의 생활문화 등 세 가지 테마로 구성하였으며, 200여 점의 유무울 전시하여 익산의 구석기 ~ 마한의 문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획전시와 토기체험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 운영을 통해 시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박물관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마한의 중심, 익산 금마
마한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경까지 한반도의 서쪽, 현재 경기`충청`전라도지역에 존재했던 소국연맹체를 말합니다. 중국 역사서에서는 고조선 준왕이 위만에게 쫒겨 바닷길을 통해 한의 땅에 와서 한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조선 준왕이 남래(기원전 194년)하기 이전에 이미 한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준왕이 정착한 곳에 대해서 '재왕운기,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는 금마, 즉 익산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북지역에서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철기가 등장하고 동시에 한국식동검문화가 더욱 발전합니다. 전북지역 특히 모악산에서 미륵산에 이르는 지역은 청동기와 철기가 함께 묻힌 무덤이 어느 지역보다 많이 확인됩니다. 청동기와 철기를 만드는 기술력은 익산지역에서 여러 소국들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마한이 성장합니다.
마한은 한반도의 서쪽, 현재의 경기`호서`호남지방에 존재했던 소국연맹체를 말한다. 중국 역사서에서는 고조선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바닷길을 통해 한의 땅에 와서 한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준왕이 남래한 지역에 대해서는 '제왕운기, 고려사' 지리지 등에서 익산 금마로 기술하고 있다. 특히 여러 문헌기록과 발굴 성과를 통해 익산지역에는 마한의 중심인 건마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후 초기철기문화의 유입으로 성립한 마한문화는 3~4세기에 조성된 생활유적(움집터)과 무덤유적(분묘)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마한의 집터는 움집으로 주로 능선 사면에 분포하고 있으며, 대부분 방형이고, 규모는 4~6미터 정도를 보인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익산 송학동`장신리`웅포리`사덕유적 등이 있다.
마한 성립기 이 지역에는 움무덤(토광묘)이 유행하였으며, 기원후 3세기를 전후해서는 분구묘가 유행하여 5세기를 전후한 시기까지 지속되었다. 분구묘는 먼저 흙을 쌓아 분구를 만들고 후에 매장시설을 시설하는 무덤으로 서해안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영등동`율촌리유적 등이 있다.
* 익산문화의 여명
익산지역의 구석기와 신석기문화는 청동기문화나 마한`백제문화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근 이루어진 발굴조사를 통해 면모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익산지역은 큰 강과 작은 천이 발달되어 있어서 구석기와 신석기 문화가 발달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후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익산지역 곳곳에 모여 살면서 고대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익산은 일찍이 선학들에 의해평양, 경주와 함께 청동기문화권으로 설정될 만큼 청동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많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청동기시대의 문화적 배경이 위만에게 패한 고조선 준왕이 바다를 건너 익산지역에 터를 잡게 되는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익산의 역사와 문화
익산은 역사 기록과 유적을 통해서 보면 문화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인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청동기시대에는 많은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어 평양, 경주와 함께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진 곳이다.
마한시대와 관련해서는 고려 중기 이후부터 조선의 실학자들까지 모두 마한의 중심지를 익산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서는 사덕유적`송학동유적`영등동 주구묘`율촌리 분구묘 등 마한유적이 조사됨에 따라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백제시대에는 백제 중기의 유적인 웅포리고분과 입점리고분이 조사되어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토착세력 집단의 실체를 어느 정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백제 제30대 무왕과 관련하여 관세음응험기에 무왕의 익산 천도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백제왕궁터`미륵사지`제석사지`미륵산성 등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기록의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익산은 청동기시대와 마한시대, 백제시대에 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그 중 마한은 최근에 조사가 진행되면서 그 실체가 하나 둘씩 밝혀지므로 마한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문화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마한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 구석기시대 유적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하는 시기로부터 빙하가 물러가는 1만년 전후까지의 시기로써 뗀석기의 사용, 사냥과 채집을 위한 이동생활, 불의 사용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익산지역의 구석기유적은 여산 신막유적, 춘포 천동리유적이 발굴조사 되었고, 왕궁 청평유적과 온수리유적에서는 지표조사에서 구석기 유물이 수습되었다. 이러한 유적들은 금강유역의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으로서 생활하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에 의해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뗀석기, 석기문화의 시작
익산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은 금강과 만경강 등 광과 하천을 따라 생활영역을 넓혀갔습니다. 이들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갈돌, 특히 석영암을 이용하여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기 시작.
여산 신막에서는 금강 하류지역에서 최초로 구석기유적이 확인 되었으며, 만경강으로 합류하는 소하천들과 접하고 있는 쌍정리 유적에서도 석영암으로 만든 몸돌과 유문암으로 만든 격지 석기가 확인되어 익산지역 중`후기구석기시대 문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만경강과 금강이 교차하는 서두리유적에서는 슴베찌르개를 발견.
* 슴배찌르개 : 나무나 동물 뼈처럼 창처럼 찌르는 데 사용한 구석기 시대 대표적 사냥도구로 추정됩니다.
사냥을 할 때 찌르는 부분 앞부분을 '찌르개' 라 하고 나무와 연결하기 위한 이을 수 있는 부분을 '슴베' 라고 합니다.
슴베찌르개는 사냥하는 방법이 발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큰 사냥감을 멀리서도 도구를 던져 사냥감으로 내몸을 보호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 신석기시대 유적
신석기시대는 농경이 시작되면서 전 시기에 비해 비교적 안정적인 식량공급이 이루어져 땅을 파서 만든 수혈주거에 정착생활을 하게 되고, 토기의 생산과 간석기의 출현을 특징으로 한다. 신석기시대의 시기에 대해서 일치된 의견은 없지만 대체로 b.c 6천년경에 시작되어 b.c 1천년경까지 추정하고 있다. 익산지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웅포관광지 조성지역 내 1지구의 구릉 정상부(해발52미터)에서 주거지 1기가 전북 서부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조사되었다.
*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보금자리 : 익산 영등동유적
영등동유적은 익산에 살았던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이 유적은 1995년부터 1996년 사이에 발굴조사되었는데, 집터는 해발 20~30미터의 낮은 구릉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분포하고 있으며, 장방형`원형`방형의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른 시기의 장방형 집안에서는 화덕과 벽을 따라 기둥자리가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아가리에 무늬가 새겨진 토기(가락동식 토기)와 반달모양 돌칼, 석촉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방형과 원형 집터는 장방형 집터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조성된 것인데, 집터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아가리가 밖으로 퍼지고 배가 불룩하게 나온 송국리식 토기와 슴베가 있는 돌칼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 시기가 변하면서 집모양도 변해요
청동기시대에는 땅을 파고 그 위에 나무에 기둥을 세운 다음 풀을 덮어 움집을 지었다. 같은 청동기시대라도 초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집모양이 차츰 바뀌었다. 네모를 한자어로 방형이라고 하는데 한쪽 방향으로 길면 장방형이라고 하며 청동기시대 초기에는 장방형의 집을 지었다. 장방형의 집은 크기가 모두 큰 편(영등동 장방형주거지). 장방형의 집은 난방과 조명, 취사용으로 두루 쓰이던 화덕이 집 안에 두개씩 있으며, 서너가족 정도가 함께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것 같다.
청동기시대 후기로 가면서 집의 크기가 작아지며, 모양은 네모나 원형으로 바뀌었다. 이 움집은 집안 가운데에 타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양쪽으로 기둥을 세웠으며, 화덕자리는 없다. 이유형은 송국리형 주거라고 불리고 있으며, 충청`전라`경남 지역 등지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 마한 성립기의 익산 : 새로운 무덤을 쓰고, 철제 농공구를 만들다
준왕이 남천한 시기는 마한의 성립기에 해당하는 초기철기시대입니다. 이 시기에는 청동기시대에 유행했던 고인돌도 아니고 마한의 독특한 무덤 양식도 아닌 땅을 파고 들어가 목관을 안치한 널무덤이 조성됩니다. 또한 한국식동검 등 청동유물과 새로운 새로운 문화의 시작을 아리는 덧띠토기가 만들어지며, 쇠로 만든 새기개와 도끼 등도 제작됩니다.
익산지역을 준왕의 남천지로 볼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로는 이 지역이 청동기시대부터 중구기나 한반도 서북부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다는 점, 왕궁면 평장리에서 출토된 전한경이 만들어진 시점(기원전 194~기원전 180년 사이)이 준왕이 남천한 시기와 맞물린다는 점, 전북지역에 철기가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2세기경으로 준왕의 남천 직후에 해당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 마한문화의 꽃을 피우다
익산의 마한문화는 초기철기문화의 유입으로 성립하여 3세기에서 4세기경에 꽃을 피우게 됩니다.
백제로 넘어가기 직전 단계 즉 마한 발전기의 모습은 송학동`장신리`사덕 등의 집터와 영등동`율촌리 등의 무덤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좀 더 발달된 기술로 만든 토기와 토기를 만드는 생산도구, 마한사람들의 새에 대한 생각과 신앙을 엿볼 수 있는 새모양토기, 당시 금이나 은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는 구슬 장신구, 유리옥 구슬을 만들던 틀, 시신을 담았던 독널 등을 통해 이 지역에 살았던 마한 사람들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 건마국, 성장과 좌절
후한서 [한전]에 따르면, 준왕의 후손들이 절멸하자 마한 사람들이 다시 자립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외래 세력인 고조선 준왕의 후손을 대신해서 토착세력이었던 마한 사람들이 다시 세력을 잡았음을 의미합니다.
익산(금마)지역에서 고조선 세력을 대체하고 마한 사람들이 세운 국가는 건마국으로, 이들은 마한연맹의 맹주임을 스스로 칭했지만 점차 맹주국의 지위를 목지국에 내준 것으로 짐작됩니다. 익산지역에 있었던 마한의 소국들은 백제가 성장함에 따라 점차 백제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됩니다.
기원전후 초기철기문화의 유입으로 성립한 익산의 마한문화는 3세기에서 4세기경에 조성된 생활유적(집터)과 무덤유적(흙무지무덤, 도랑두른무덤)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 마한의 전통과 백제문화의 유입
마한은 기원전3세기붙처 기원후 5~6세기까지 존재했던 정치세력입니다. 문헌기록과 최근까지의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볼 때 익산지역에는 준왕이 남천하기 이전에 이미 한이 있었고, 준왕의 남천과 함께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면서 익산이 마한 성립기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후 고조선 준왕 세력이 절멸한 후, 이 세력을 대체하고 마한 사람들이 세운 국가를 건마국으로 보고 있는데, 건마국은 4세기 중`후엽 경 백제의 영역으로 흡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5세기 중엽에서 후엽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모현동 목동유적에서는 마한의 전통을 이은 흙무지무덤(분구묘)을 조성하고 고배 등 백제토기를 넣은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익산지역이 백제로 흡수되면서 백제문화가 유입되었지만, 묘제에서는 아직도 마한의 전통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마한사람들이 금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는 옥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사람들은 금이나 비단보다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치장하거나 목걸이와 귀걸이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실제 마한 유적에서 출토되는 장신구의 대부분이 옥입니다.
구슬은 수정이나 마노 등의 원석을 갈아 만들거나, 유리 용액을 거푸집에 부어 만드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거푸집을 사용하면 작은 구슬을 한 번에 많이 만들 수 있습니다. 송학동 마한 집터에서 출토된 유리옥 거푸집은 마한 사람들이 직접 유리옥을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 익산의 마한유적
* 생활유적 : 생활유적은 인간이 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주거지, 저장을 위한 수혈, 그리고 여러 가지 성격의 구 등이 조사된 유적이다. 생활유적은 신동, 송학동, 웅포리, 오산 장신리, 영등동, 왕궁 사덕, 부송동 석치고개 등 유적 30여 개소에서 확인된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방형 또는 장방형이며, 내부에서는 기둥구멍과 화덕시설, 벽구 등이 확인되었다. 익산지역에서는 주로 방형계의 무주식 주거지가 확인되고 있으며, 사덕, 송학동, 장신리유적 등에서는 4주식과 무주식 모두 조사되었다.
* 분묘유적 : 분묘유적은 지하에 구덩이를 파 매장하는 토광묘, 흙을 쌓아 큰 분구를 조성하는 분구묘, 관으로 옹관을 사용하는 옹관묘 등이 발견된다. 영등동 유적에서 발견된 분구묘는 규모 및 제의가 이루어진 환호가 확인됨에 따라 3세기경 익산지역 유력한 세력 집단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또한 율촌리 유적에서 조사된 분구묘는 낮고 평면적인 형태의 분구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유적이다.
* 마한의 주거지
마한의 주거지는 땅을 파서 만든 수혈 주거지로 청동기시대나 철기시대에 비하면 깊이가 낮아 백제시대의 지상건물로 변화되는 중간단계라고 볼 수 있다.
* 마한의 토기
마한에서는 발달된 중국의 토기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이전 시기보다 더욱 단단하고 실용적인 토기를 만들었습니다. 토기를 제작할 때 회전 성형이 가능한 물레를 사용하였으며, 오름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토기를 구웠습니다. 무엇보다 새로운 토기제작 기술인 '두드림기법'으로 구릇 표면에 격자무늬, 삿무늬 등을 새겨넣었습니다.
또한 계란모양토기, 시루, 바리 등 생활용기와 대형 독널을 제작하였으며, 겹아가리토기나 두귀달린토기, 새모양토기 등 마한의 특징적인 토기도 만들었습니다.
* 마한의 무덤
마한의 조기 (bc 3세기 ~ bc 1세기) 무덤은 가장 쉽게 만들 수 있는 무덤 형태로 구덩이를 파고 목관이나 모곽을 안치한 널무덤이 축조된다. 유적으로는 익산 다송리, 익산 신동리, 장수 남양리, 대전 괴정동, 함평 초초리 등이 있으며 주로 금강유역에 분포한다. 무덤 내부에서는 전 시기와 달리 한국식동검과 청동거울 등의 청동 유물을 비롯해 철기유물이 함께 출토되었으며, 이외에도 덧띠토기 등이 함께 확인된다.
마한 전기(bc 1세기 ~ad 3세기) 무덤은 조기와 달리 매장주체부를 중심에 두고 주위로 구를 둘러 시설한 주구묘가 축조된다. 보령 관창리유적에서 최초 발견된 이래로 서천 당정리와 익산 영등동, 서해안지역인 부안과 고창, 영광 등지에서도 추가로 확인되는 등 중서부지방에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이 주구묘는 대개 여러 기가 연접되어 군집을 이루며 널무덤과 대형 독널무덤이 매장주체부로 안치되고 유물은 겹아가리단지, 짧은목항아리, 철도끼, 철도자, 옥 등이 함께 출토된다.
마한 중기(3세기 중엽 ~ 4세기 전반) 무덤은 주구묘의 평면적인 무덤형태가 상하 중첩되면서 다장 형태로 변화하고 높은 분구가 만들어진다. 유적으로는 익산 울촌리, 함평 예덕리 만가촌 고분군, 영암 초분골1, 2호분 등이 있다. 전기에 비해 널무덤과 대형독널무덤 다수가 안치되고 점차로 매장주체부가 대형독널무덤으로 변화한다. 대형독널무덤은 아가리가 넓고 경부가 짧은 영암 송월리식옹관이 주류를 이룬다. 출토유물은 겹아라기단지가 점차 소멸되고 두귀단지와 더불어 영산강유역에서는 긴목항아리, 구멍뚫린 항아리 등이 새로운 기종으로 등장한다.
마한 후기(4세기 전반 ~ 5세기 후반)는 분구묘가 대형화되고 평면형태가 방형과 원형으로 정형화된다. 매장주체부는 대형독널무덤 일색으로 다수가 매장되고 U자형의 전용 독널으로 변화되며, 후기에 가면 백제와 관련된 돌방무덤도 등장한다. 대표무덤으로는 나주 신촌리9호분과 복암리3호분 등 주로 영산강유역에 분포하며, 규모는 직경 또는 일변이 30~45미터, 높이가 5~9미터에 이른다. 특히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는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등 당시 차상위층의 다양한 위세품이 출토되었다.
* 독널
마한시대 독널은 전 시기와 달리 대형화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독널은 크게 단옹식과 합구식으로 나누어지는데, 합구식은 1개의 독널을 안치하는 단옹식과 달리 서로 다른 독널의 구연부를 맞대어 나란히 놓아 시설한 것이며, 일반적으로 이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독널에 묻힌 사람은 1미터 이하의 작은 소형옹관의 경우 유`소아장이거나 세골장을 위한 것이며, 반면 합구 길이가 2미터 이상 가까이 되는 대형 독널은 성인을 위한 무덤으로 보여진다. 특히 대형독널은 거대한 전용독널로 상당수가 제작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독널 안과 밖에는 당시 생활 토기와 철기류, 옥 등을 두기도 하며 간혹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 당시 초고위층의 위세품도 함께 매납되기도 하였다.
* 마한에서 백제로의 변화
마한 54개국 중의 하나인 백제국의 세력이 성장하여 백제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백제의 성장은 곧 마한 영역의 축소로 이어지게 되었다. 마한 세력이 백제로 흡수`편입되는 시기는 근초고왕 24년(ad 369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일시에 마한의 전 영역이 백제로 편입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백제가 성장 발전함에 따라 마한의 중심세력은 점차 천안, 익산, 나주 등지로 이동해간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 과정은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 마한에서 백제로의 변화
구 분 | 마 한 | 백 제 |
주 거 지 |
수혈(움집), 토실 | 벽주식건물, 지상가옥 |
방형, 원형 | 방형, 장방형 | |
4주식, 무주식 | 벽주식, 초석, 기와 사용 | |
점토나 점토에 토기편, 돌을 혼합하여 부뚜막 설치 | 판석으로 부뚜막과 구들 설치 | |
벽을 따라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벽구(벽도랑) 설치 | 벽구가 없거나 일부 확인 | |
고분 | 토광묘, 주구묘, 분구묘, 옹관묘 | 석실분, 석곽묘, 옹관묘 |
토기 | 적갈색연질토기 | 회청색경질토기 |
발형토기, 장란형토기, 이중구연토기, 양이부호 | 삼족토기, 고배, 개배 | |
격자문, 사격자문, 거치문 | 단선집선문, 승석문 |
* 마한박물관 스탬프북
* 옥과 거푸집 : 마한 사람들은 금`은보다 옥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 뚜껑있는 뒤귀단지 : 뚜껑이 있고 몸체 양쪽에 동그란 귀가 있는 마한의 토기이다.
* 새모양토기 : 마한 사람들은 새를 신성하게 여겨 새모양으로 토기를 만들어 제사 지냈다.
* 독무덤 : 마한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큰 항아리 안에 매장하였다.
* 청동거울 : 나뭇잎문양이 새겨진 청동거울로 한반도 내에서 처음으로 출토되었다.
* 답사후기
8월 15일을 전후 휴가를 이용하여 다녀온 익산 지역에는 박물관이 다섯 개가 있다.
마한박물관은 그 가운데 하나로 고대국가 백제 이전의 마한소국 중 익산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익산지역이 고대에는 역동하는 고대도시였다는 것이다.
인근에 군산이 있어도 근대역사관도 익산에 있다.
뒤늦게나마 마한의 지역을 새롭게 공부하게 되어서 참 좋다!
자료들은 박물관에 비치된 자료집과 전시자료에 붙여진 설명서를 사진으로 찍어와 컴퓨터로 입력하는 과정으로 만들었다.
읽으면서 공부하고 타자를 치면서 입력하는 동안 공부를 하는 것이니 깊게 하는 공부인 셈이다.
이번 기회에 고대의 무덤, 토기, 집자리 등 고대를 특징짓는 자료들을 보면서 고대사를 미흡하지만 전체적인 틀 속에서 보는 안목이 조금은 자라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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