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동법 시행 기념비 : 조선의 세금체계를 바꾼 법
조선시대 농민을 보호하고 국가재정을 확보하려는 대동법
대동법 시행 기념비는 조선 효종 2년(1651)에 영의정 김육이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제안한 이후, 효종 10년에 이 법이 시행되었음을 기념하여 세워진 비입니다. 이 비는 삼남지방으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인 평택에 건립되었습니다. 대동법은 조선시대에 세금으로 납부하던 지방특산물 대신 쌀, 베 혹은 돈으로 납부하도록 하는 납세제도였습니다. 그 전에는 부세 제도가 토지, 역, 공물로 구성되어 국가 경비를 조달했지만, 이중 공물이 국가수입의 거의 60%를 차지하면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에 따라 공납제와 방납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세금을 대신 납부하고 후에 지역에 가서 대가를 징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방납인들이 폭리를 취해 농민들에게 부담을 더하고 국가수입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대동법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온 정책으로, 농부들이 납부한 쌀을 정부가 지정한 공인에게 지급하고 이들에게 왕실과 관청의 수요를 조달하게 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확보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렇게 대동법은 조선시대 사회 경제 구조와 부세 체계를 바꾸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 독산성 : 사적 162호
독산성은 다른 이름으로 독성산성이라고도 한다.
선조 25년(1592) 12월 임진왜란 중에 권율 장군이 전라도로부터 병사 2만여 명을 이끌고 이 곳에 주둔하여 왜병 수만 명을 무찌르고 성을 지킴으로써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곳이다.
독산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원래 백제가 쌓은 성일 것으로 추측되며,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쓰였을 것으로 본다. 선조 27년(1594)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1602)에 당시 부사 변응성이 다시 보수하고, 그후 정조 16년(1792)과 20년(1796)에도 다시 공사했다.
성 둘레는 1,100m이고 문도 4개이지만 성 안에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이런 결점 때문에 이 곳에는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이 있는데, 권율 장군이 산위로 흰 말을 끌어다가 흰 쌀로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해 보이므로 왜군이 성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서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 답사 후기
경기도 오빠집에 가는 길에 평택시내에 있는 대동법 시행 기념비를 보러 들렀다.
대동법은 조선의 세금체계를 바꾼 법으로 경기도에서 먼저 시행하고 전국에 시행하기까지는 백년이 걸렸다고 한다. 젊은 날 교과서에서 읽은 내용을 60이 훨씬 넘은 나이에 역사적인 사실을 비석으로 남긴 유물을 실제로 보는 일이 이해가 쉬워진다. 나이가 들면 이해력은 젊을 때보다 나아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어서 독산성을 방문했는데 1592년 12월 권율장군은 병사 2만 명을 이끌고 독산성에 거주하면서 왜군의 진출을 막았다고 한다. 1593년 2월에는 행주산성으로 병력을 옮겨 행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독산성은 조선군이 1592년 6월 용인전투의 패배로부터 숨을 고르고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해설사님이 계셔서 훌륭한 설명을 들었다.
* 다정한 타인이 살아남는다 : 호모 사피엔스
호모사피엔스는 작은 부족에서 시작해 거대한 문명으로 성장했다. 이는 우리가 고기 찌꺼기를 차지하기 위해 죽기살기로 싸웠기 때문이 아니라, 모닥불에 둘러앉아 메머드 스테이크를 나누고 서로 도왔기 때문이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최초로 문명이 나타난 징후를 짚어달라고 하자, 사람이 만든 도구 따위를 꼽지 않았다. 대신 고고학 발굴지에서 발견한 1만5천년 된 넙다리뼈를 꼽았다. 그 뼈는 부러졌다가 나은 흔적이 있었다. 이 고대의 환자는 추락한 자리에 그대로 남겨져 포식자에게 잡아먹히지 않았다. 같은 부족의 누군가가 그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와 나을 때까지 돌봐준 것이다. 미드는 말했다. '문명은 어려움을 직면한 누군가를 돕는데서 시작됩니다.'